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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9:01:19

이집트-시리아 관계

시리아-이집트 관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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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시리아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고대 말2.3. 중세2.4. 근세2.5. 19세기2.6. 20세기2.7. 21세기
3. 관련 문서

1. 개요

이집트 시리아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시리아의 기원이 되는 아시리아 제국 고대 이집트 사이에 전쟁을 비롯한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기원전 14세기 남은 아케나톤 아미르나 문서에 남은 상세한 외교 기록이 유명하다.

지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고대 이집트가 세력을 확장할 때는 시리아 일대까지 영토가 팽창하고 조공을 받아냈으며 반대로 아시아에서 이집트로 유입된 힉소스들이 이집트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집트 신왕국이 몰락한 이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이후 이집트 부흥 운동이 계속 실패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이집트를 다시 정복하고 해방자로 환영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이집트 일대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며, 시리아 북부(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안티오크를 기반으로 한 셀레우코스 왕조과 시리아, 팔레스티나 일대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다. 헬레니즘 왕조들이 시리아와 이집트에 들어선 것을 계기로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이 시리아와 이집트의 도회지에 정착하고 두 지역은 헬레니즘화가 진행된다.

이후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에 헬레니즘 왕조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고대 로마에 정복된 것을 계기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공화정 로마 제국으로 넘어가고 시리아와 이집트 모두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제국의 재정을 지탱하는 주요 속주가 되었다.

2.2. 고대 말

이집트와 시리아는 상술한 것처럼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밀집한 속주였을 뿐 아니라, 초창기 기독교도 인구가 가장 밀접한 지역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의 5개의 총대주교구 중 하나는 안티오키아,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집트와 시리아가 로마/기독교 사회에서 갖는 위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한 편으로 시리아의 아람인들과 이집트의 콥트인들의 자부심은 라틴어권 및 그리스어권 인구와의 반목 및 상호간의 연대의식으로도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시리아와 이집트의 비그리스계(시리아의 아람어 사용자, 이집트의 콥트어 사용자) 주민들 사이에서는 합성론이 유행하였고, 칼케돈 공의회 신조를 따르는 비잔티움 및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의 그리스어 사용자들과 반목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의 주요 기독교 종파였던 야코부스파는 오늘날 시리아 정교회의 기원이 되었고, 이집트의 콥트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은 오늘날 콥트 정교회로 이어진다.

2.3. 중세

7세기에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점령될 당시 합성론을 믿는 현지인들은 아랍 무슬림 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뚱딴지같은 소리겠지만, 이슬람 초창기에는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구분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를 명백하게 타자화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11세기 압바스 칼리프조 이후이다.

아랍인들이 해당 지역에 정착하고 행정 언어가 우마이야 왕조 시대 들어서 그리스어/아람어에서 아랍어로 대체된 것을 계기로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아랍어가 기존에 사용되던 언어를 대체하고 주요 사용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는 콥트어와 시리아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모두 아랍어와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로, 그리스어( 인도유럽어족 언어)보다 훨씬 더 가까운 관계였던 것이 주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이슬람 제국은 정통 칼리파 시대를 거쳐, 우마이야 칼리프조, 압바스 칼리프조로 이어졌으나 압바스 칼리프조 이후 제국의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각지에서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9세기와 10세기를 기준으로 툴룬 왕조, 이흐시드 왕조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였다.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시아 이스마일파가 중심이 된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장악하는데, 그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벌 정권들이 명목상으로나마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에게 복종했던 것과 다르게 파티마 왕조의 경우 순니파를 따를 수가 없다며 자신들의 지도자가 독자적인 칼리파임을 선언하며 압바스 칼리프조와 선을 그었다.[1]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는 동안 시리아는 여러 개의 소국으로 쪼개져 있었다. 시리아는 해안, 산악, 도시, 사막 등 생태적 조건이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지중해 이집트, 이라크 등 주변의 문화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파티마 왕조는 시리아 남부에 세력을 구축하고 978년부터 1076년까지 다마스쿠스를 지배했다. 시리아 북부는 함단 왕조 부와이흐 왕조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각축을 벌였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시리아는 결국 셀주크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와중에 살라흐 앗 딘 유수프가 파티마 왕조를 전복하고 독자적인 아이유브 왕조를 건국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기존 파티마 왕조의 이스마일파 신학자 양성 기관이었던 알 아즈하르 대학을 순니파 마드라사로 개혁한다. 여기에다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기존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여기에 이스마일파의 몰락까지 겹쳐서 아이유브 왕조 이후 순니파 무슬림 인구 비중이 이집트와 시리아 인구의 과반수를 넘어가게 되었다. 이집트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에는 순니파 사회는 샤피이파 마드하브를 공통분모로 하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13세기 아이유브 왕조가 전복되고 맘루크 왕조가 건국되었다. 맘루크 왕조는 레반트 일대의 십자군 잔여 세력을 축출함과 동시에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제국 군대의 시리아, 이집트 침공까지 저지하면서 레반트와 이집트 일대의 패권을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

2.4. 근세

1517년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를 장악한다.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이후에 이집트 일대의 패권은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 치하 시리아의 경우 현지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기존 사회구조에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 맘루크 왕조는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 되어 이집트 내정에 필요한 비용을 제한 나머지 세금을 이스탄불로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첫 150년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는 관개시설이 개선되고 농산물 생산이 증가하였으며 인도와의 교역로가 다시 열려 무역이 정상화되었다.

2.5. 19세기

19세기 초 알바니아인 출신으로 오스만 제국의 관리였던 메흐메트 알리가 이집트의 기득권층이던 맘루크들을 전멸시키고 이집트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메흐메트 알리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목표로 정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를 완충지대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1831년 메흐메트 알리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가 오스만 제국 영토였던 시리아를 침공하는데 이를 제1차 오스만 이집트 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일대를 현지 아랍인 지역 유지들을 통해 간접지배하던 상황이었고, 이집트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은 현지 자치군벌들과 이집트군 사이의 대결이 되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지역 유지나 부족장들은 이집트군의 진군 초기에는 별 다른 저항 없이 항복하였으나,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는 메흐메트 알리 정권 측에서 이들이 기존에 누리던 자치권을 상당부분 박탈하자 팔레스타인 농민봉기와 같은 소요 사태가 빈발하게 되었다. 한 편 오스만 제국이 갑자기 약체화되는 상황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 측에게 새로 정복한 영토를 오스만 제국한테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이집트가 시리아를 오스만 제국 영토로 반환한다. 잠시 이집트 케디브 왕조의 영토가 되었던 시리아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후 메흐메트 알리가 세운 케디브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건설 과정에서 얻은 과도한 채무가 문제가 되어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고, 시리아는 1차 대전 이후 시리아-레바논이라 하여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2.6. 20세기

20세기 중반 양국은 둘 다 각각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되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독립한 이후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로 독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는데, 시리아는 당시 이스라엘보다는 요르단의 압둘라 1세를 견제할 목적으로 전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집트 왕국의 경우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국왕의 입지가 더 강해질 것을 우려하여, 이집트 장성들이 일부러 다 이긴 전투에서 후퇴하는 방식으로 어깃장을 놓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축출 문제로 시리아와 이집트 양국 국민들이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할 것 없이 동요하고, 제2차 중동전쟁까지 벌어지면서 양국은 이스라엘을 적성국으로 두면서 동맹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두 나라는 아랍 연합 공화국이라는 통일 국가를 결성한 적도 있었으나, 이스라엘 때문에 시리아와 이집트가 월경지처럼 서로 잘 연락이 되지 않는 문제가 불거져 결국 서로 따로 독립하기 이르렀다.

이집트는 제4차 중동전쟁 이후인 1982년 이스라엘을 인정하면서 시리아와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이 이스라엘 인정 문제를 제외하면 갈등은 많지 않았다.

2.7. 21세기

2004년 2월 25일, 이집트와 사우디, 시리아 3국이 아랍연맹 개혁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

2011년 이후 2011 이집트 혁명이 나타나자 시리아에도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시리아 내전 이후, 일부 시리아 난민들은 이집트에 이주하여 이집트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시리아 내전이 2020년대까지 장기화되자 이집트인들중에 일부는 자국에 거주하는 시리아 난민들을 흘겨보거나 증오하는 이들도 생겼다고 한다.

2016년 10월 17일, 시리아 국가안보회장이 이집트를 첫 방문했다. #

2021년 9월 11일에 시리아의 바삼 토메 석유장관은 이집트에서 시리아 영토를 통과해 레바논으로 가는 송유관의 석유운송량 일부를 합의에 의해 시리아가 갖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

3.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파티마조 칼리파 중 한 명이었던 알 하킴 부하라에서 초청한 이스마일파 신학자 앗 다라지와 함께 개인 숭배를 강요하는 등 기행을 일삼다가 측근들에게 제거당하는데, 알 하킴의 사망 이후에도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이슬람에서 갈라져나온 독자적인 드루즈교 신도가 되었다. 드루즈교 신도들은 이집트를 떠나 시리아, 레바논 일대를 중심으로 퍼져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