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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와 이집트의 관계. 고대 이래 양국은 역사적/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2. 역사적 관계
2.1.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는 고대부터 교류가 많았다.[1] 고대 미노아 문명과 키클라데스 제도의 고대 문명은 이집트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미케네 문명과 이후 암흑시대를 지나고 기원전 8세기 이후 전성기를 맞이한 그리스의 폴리스들도 고대 이집트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데 열심이었다.[2] 특히 기원전 7세기 프삼티크 1세(그리스어로는 프삼메티코스) 제위 시절 이집트는 그리스인 용병들을 고용하고 펠루시온 항구를 통해 그리스 폴리스들과 교역하였다.고대 이집트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정복된 이후, 이집트인들은 반페르시아 봉기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그리스인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반페르시아 봉기군들은 페르시아 군과 싸울 때보다 자신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때가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 등이 이집트로 건너가 용병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2.1.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그리스 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새로 정복한 영토 각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번영한 도시가 바로 하이집트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였다.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시대가 되면서 이집트에는 그리스계 헬레니즘 국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세워지고 많은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리스인들이 최상류층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강제이주된 유대인 및 무역을 위해 정착한 페니키아인들이 중간 계급을[3] 그리고 이집트 현지인들이 서민층을 형성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계급 고착은 후대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제국으로 이어졌다.
- 동일 인물( 프톨레마이오스 6세)을 각각 그리스식 그리고 이집트식으로 묘사한 금속판
헬레니즘 시대 이후 이집트의 공용어는 고대 이집트어에서 그리스어가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히브리어에서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 이른바 70인역 성경 번역을 완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공문서나 석문에서 이집트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로 병기하였는데, 이는 후대 로제타 석이 발견되면서 고대 이집트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1.2. 로마 치하
로마 공화국이 지중해 각지로 영토를 팽창하는 과정에서 그리스 반도와 아나톨리아 서안의 그리스계 도시들, 폰토스 왕국 등이 로마 영토로 편입되었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것을 계기로 이집트 역시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 일대는 그리스 반도 지역 등 그리스인들이 사는 지역과 한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주요 곡창 지대였으며 당대 그리스어권에 속했다.로마 제국 치하의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 이집트 원주민들은 서로 교류가 활발한 것과 반대로 반목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고집한 반면 이집트 원주민들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인 이집트어를 계속 사용해왔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되면서 이집트 역시 기독교화되었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고대 이집트 종교 사제들을 탄압하면서 고대 이집트어 상형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사제 계급은 소멸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고대 이집트어는 콥트어로 계승되었다.
서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시리아의 아람어 사용자들과 이집트의 콥트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합성론( 단성론) 신학이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이집트 사회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칼케돈 신조를 믿는 정교회 신도들과 콥트어를 사용하고 합성론을 믿는 콥트 정교회 신도들로 양분되어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2.2. 중세
서기 7세기 무렵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반도에 슬라브인들이 대거 정착하여 동로마 제국의 통제력이 일시 상실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집트는 아랍 무슬림 군대의 정복으로 이슬람 제국의 영토가 되고 급속히 아랍화되면서[4] 두 나라는 서로 다른 문화권으로 분리되었다. 크레타 섬은 아랍인 해적들이 정복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 반도와 크레타 섬의 영토를 재수복하기는 했으나, 이집트는 콥트 정교회 신도들이 서서히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상황이 되었다.동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어권 지역은 정교회를 보존한 반면, 이집트 지역은 파티마 왕조의 알 하킴의 기독교 박해 등등을 이유로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 바실리오스 2세로 이어지는 동로마 제국 중흥기 당시 동로마 제국은 파티마 왕조로부터 시리아 북부 영토 상당수를 재수복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슬람화가 급격히 진행된 시리아 남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일대 재수복은 시도하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 신민을 통치했던 경험이 없었고 크레타 섬 등등 무슬림들이 지배하던 영토를 수복하면 이슬람화 정도가 강했던 도회지 지역 무슬림들은 모조리 학살하고 농촌 지역 주민들은 정교회로 재개종시키는 정책[5]을 취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3. 근세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이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와 이집트는 다시 한 국가 안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통치와 그리스 통치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왕조의 시리아 영토는 따로 분리시키되 이집트 영토에서의 주권은 사실상 건드리지 않는 번국 형태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였고,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내정에 쓰고 남은 세입을 이스탄불로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그리스 반도 지역은 번국 단위의 자치가 아닌 밀레트 제도 그리고 그리스계 파나리오테스들의 의한 반자치가 이루어졌다. 이집트와 그리스 모두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2.4. 19세기
19세기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약체화되었던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독립 운동을 진압할 목적으로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 헤디브국 군대를 대신 파견하였다.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의 지원으로 그리스는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을 쟁취하였다.1859년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에서 그리스어 성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문헌에 해당하는 시나이 사본이 발견되었다. 당시 성서를 발견한 학자는 독일인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였으며 사본 발굴은 당시 중동의 그리스 정교회를 보호하는 입장이었던 러시아 제국 측의 도움을 받았다.
2.5. 20세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집트 왕국은 그리스 왕국과 수교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리스 침공으로 그리스 전역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그리스 왕국 정부는 이집트 왕국 카이로에서 망명정부를 꾸리기도 했다. 이집트 왕국은 1953년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로 전복되었으나 양국의 외교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그리스는 제1세계 노선을 타게 되고 이집트는 이른바 나세르주의로 불리는 제3세계 노선을 추구하게 되면서 양국의 외교 정책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케디브 왕조 시대나 이집트 왕국 시대만 해도 그리스 반도와 아나톨리아 각지에서 온 수십만여 명 규모의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서 생업을 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 그리스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는 와중에 이집트의 경제 발전이 지체되면서, 이집트에 체류하던 그리스인 인구 상당수가 그리스 본국으로 다시금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2.6. 21세기
오늘날에도 이집트와 그리스 양국은 교류와 협력이 자주 이뤄지고 있다. 아직 정교회권에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정교회)는 서열상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다음 가는 자리에 속해있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구 소속 신도 인구는 이집트 내에서만 해도 25만~30만 명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에는 일부 근현대 그리스에서 이주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대 이래 이집트에 거주하는 정교회 신도들 다시 말해서 그리스계 조상을 두되 중세 이래 일상생활에서 아랍어를 사용하게 된 아랍화된 정교회 신도들이다.2020년 8월 6일, 그리스와 이집트가 지중해의 EEZ 획정에 합의했다. #
2021년 1월 18일, 이집트의 모하메드 자키 국방장관과 그리스의 콘스탄티누스 플로로스 참모총장이 카이로에서 양국간 군사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회담을 가졌다. #
2022년 8월 3일, 이집트 해군과 그리스 해군이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
3. 관련 문서
- 그리스/외교
- 이집트/외교
- 프랑코포니
- 그리스/역사
- 이집트/역사
- 그리스/경제
- 이집트/경제
- 그리스인 / 이집트인
- 정교회 / 콥트교
- 그리스어 / 콥트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프리카 국가/북아프리카 국가
-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정교회)
-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정교회)
[1]
오늘날 그리스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 주민들이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한 역사는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역사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사례로는
고대 이집트를 침공한
바다 민족의 일파인
블레셋인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블레셋인들은 오늘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연대의식이나 문화를 공유한 것은 아니라, 이들을 그리스인의 아프리카 진출 사례로 보기는 애매하다.
[2]
자세한 내용은 고대 이집트 문화가 그리스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다룬 교양서인 <블랙 아테나>라는 도서 참조. 여담으로
그리스 신화가
이집트 신화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에 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3]
알렉산드리아의 페니키아인들은
고대 카르타고가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한 이후 상당수가 고대
페니키아의
바알과 타니트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이집트인들이
이슬람 정복 직후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그리스어 대신
아랍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면서 언어적, 문화적으로 급속히 아랍화되기 시작했다.
[5]
중세 당시에는 공교육이 있던 것도 아니고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 접경 지역의 시골 문맹 주민들은 명목상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와 이슬람 교리를 헷갈려해서 사실상 두 가지 종교를 동시에 믿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경우
선교사들을 파견해서 다시 정교회로 개종시키는 방식이 그렇게 어렵거나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