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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관계. 양국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고 이슬람 협력기구의 회원국[1]들이지만, 양국 정부는 갈등을 빚고 있다.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2011년 이후 튀르키예는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며 알아사드 정권과 대립했다.[2] 오늘날 시리아 난민들을 제일 많이 수용한 나라가 튀르키예인데, 시리아 정부는 여기에 대해서도 다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튀르키예의 난민 수용이 외부 개입이자 시리아에 대한 주권 침해이며, 난민들이 국내로 다시 돌아와 국가 재건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다만 쿠르드족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비슷한 견지를 가지고 있다. 튀르키예는 쿠르드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쿠르드 민병대가 PKK와 연계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강력히 반대한다. 시리아 역시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3]
2. 지리적 관계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국경을 상당부분 서로 접하고 있다. 아나톨리아 남동부 지역과 시리아 일대는 고대 당시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시리아 외에도 튀르키예 동남부 지역까지 포괄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시리아의 주요 도시였던 안티오크는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에 속해있다.[4]알렉산드로스 제국 시대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 각지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폰토스 왕국 등등의 헬레니즘 제국들이 뿌리내리고 이후 아나톨리아의 헬레니즘 왕국들이 고대 로마에 병합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나톨리아 지역 주민들은 토착 아나톨리아어를 버리고 그리스인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시리아 일대의 주민들은 고대 중동의 공용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해왔고 그리스어 문화에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대신에 고유의 아람어 문화를 유지하였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나톨리아 지역은 칼케돈파 정교회가 자리잡은 반면 시리아 일대에는 야코부스파( 오리엔트 정교회의 일파 시리아 정교회) 신도가 주류였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아나톨리아 지역이 그리스 문화를 배경으로 튀르크화되는 반면, 시리아 일대는 아시리아인들의 아람어 문화가 아랍 문화로 대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민족적인 차이로도 이어졌다.
3. 민족적 관계
튀르키예와 시리아 사이의 관계에는 시리아인 기독교인과 튀르크인의 관계 및 시리아인 아랍인 무슬림과 튀르키예인 무슬림과의 관계 등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오늘날 튀르키예 마르딘에는 이른바 쉬르야니라고 불리는 시리아계 기독교인 인구가 상당수 거주하며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 지대의 아랍계 기독교인 상인들이 오스만 제국 레반트 일대의 세금 상당부분을 충당하기도 했다.아랍 무슬림들과 튀르키예인 무슬림들 사이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중세 이슬람 제국 초창기 이슬람으로 개종화되고 아랍화되었던 시리아 일대는 압바스 칼리프조가 지방 장악력이 약화하면서 튀르크계 군벌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시리아 일대에는 룸 술탄국의 여러 술탄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십자군이 레반트 지역을 침공하자 아랍인들과 튀르크인들은 일단 협력하여 최종적으로는 십자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자리잡은 맘루크 왕조의 튀르크인, 체르케스인 군인들은 아랍인들을 2등 신민으로 취급하며 차별하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장악한 맘루크들은 왕조 영토 내에 기독교인 & 유대인 & 아랍인들을 모두 탄압했다. 맘루크 왕조 치하에서 아랍인들은 말을 탈 수 없었으며 갑옷을 입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발리파의 율법학자인 이븐 타이미야는 튀르크인들이 좋아하는 수피즘을 공격하면서, 무슬림 공동체가 초기 아랍-이슬람 문화로 복구할 것을 주장하여 많은 아랍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맘루크 왕조의 통치자 나시르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을 순례하자, 이븐 타이미야는 "예루살렘은 경건한 방문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질 뿐이며 메카를 방문하는 핫지와 동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직언했다가 감옥에 갇힌다.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은 샤피이파 꾸란 주해가 겸 역사가 이븐 카시르를 통해 전해지고, 결과적으로는 근대 살라프파 및 아랍 내셔널리즘에 상당한 수준의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맘루크 왕조는 근세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 속국이 되었다.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 영토는 보전하였지만 시리아 일대는 오스만 제국이 대신 다스리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시리아 지역의 아랍인들의 자치 권한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제국 전반에서 아랍인들을 2등 신민으로 차별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였고 여기에 많은 아랍인들이 분개하는 상황은 지속되었다. 후술하는 오스만 제국 쇠퇴기에 해당하는 19세기 당시 시리아는 이집트의 이슬람 모더니즘 및 아라비아 반도의 와하비즘의 영향으로 살라프파가 출현하였으며, 반오스만 감정이 프랑스에서 유입된 서구 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재해석되며 아랍 내셔널리즘으로도 이어졌다.
4. 역사적 관계
4.1. 근대 ~ 20세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이 유럽발 가격 혁명[5]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쇠퇴하자, 프랑스가 레바논 지역의 마론파 신도들과 접촉을 늘리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과 레바논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접수한다.[6]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 내내 탄압받았던 알라위파는 프랑스의 이이제이 전략 과정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오늘날 알라위파가 시리아 정부의 실세가 되는 배경이 되었다.20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몰락한 뒤에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난 시리아와 훗날 수교하게 된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과 갈등이 적지 않았다. 또한, 튀르키예가 냉전시기에 나토에 가입했고 반대로 시리아는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리아 내에 소련군 기지가 존재하는 등 군사적으로 긴장 관계가 있었다.
1998년에는 튀르키예가 댐을 만들려고 하면서 이 일이 시리아 내 물을 관리한다고 전쟁 분위기까지 갔을 정도였다.
4.2. 21세기
양국은 이슬람 협력기구의 회원국이지만, 현재에도 영토 갈등외에도 정치적인 갈등도 여전히 심한 편이다. 또한, 시리아 내전 당시에 다에쉬가 시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면서 난민들이 튀르키예로 많이 몰려오자 튀르키예와는 외교갈등도 존재한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난민들이 많아지자 시리아와의 국경지역에 철조망을 세우는 등 시리아 난민들을 막고 있다. 다에쉬가 시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튀르키예에서도 다에쉬에 가담하는 경우도 생기자 튀르키예 정부는 다에쉬를 테러단체로 규정했다. 게다가 튀르키예를 통해 다에쉬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다보니 튀르키예측에선 시리아 국경지역을 봉쇄하고 튀르키예를 거쳐 시리아로 가는 경우에는 체포하고 있다.다에쉬가 패한 뒤에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했고 튀르키예군이 시리아 북부를 점령한 것도 있다보니 시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다.
2012년 양국은 단교하였다. #
시리아 내전 때 시리아군이 튀르키예 공군의 전투기를 격추시켰던 사태도 있었다.
2019년엔 쿠르드족 문제로 튀르키예가 군사개입을 함에 따라 일촉즉발의 위기에 치달았다. 특히, 튀르키예 측에서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지역을 공격했다. 이에 주변국들은 튀르키예에 대해 반발하고 항의했다.
시리아 때문에 튀르키예의 외곽 일부 지역(시리아 국경지대)까지 싸잡아서 (3단계)철수 권고 지역이 되었다.
두 나라는 튀르키예 내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켄데룬 지역' 영유권 문제로 다툼이 있다. 이스켄데룬은 아랍어 이름이고, 튀르키예어로는 하타이(Hatay) 지역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 안티오크(안디옥)'으로 알려진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데, 프랑스 위임통치기에는 시리아-레바논에 속해 있었으나 튀르키예인이 '압도적 다수'(90% 이상)를 차지한 지역이라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한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식민당국으로부터 독립된 하타이 공화국을 세우고, 1939년에 하타이 공화국 내 국민투표를 거쳐 튀르키예에 합병되었다.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을 둘러싼 문제도 있다.
튀르키예가 시리아 소재 테러단체 진압작전을 도와주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대해 시리아 반정부군과 아제르바이잔과 파키스탄이 지지 의사를 밝혔다. # 특히 파키스탄의 경우 테러 문제로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는 나라라 외교부 대변인이 나서서 파키스탄과 튀르키예는 "테러의 희생자"라고 말하며, "시리아 분쟁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을 찾는데 튀르키예가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 감사한다"고 까지 밝혔다. #
4.2.1. 2020년대
2021년 3월 18일에 튀르키예 국방부는 시리아 북부로부터 발사된 로켓포탄 여러 발이 킬리스주에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 3월 20일에 튀르키예군이 시리아 북동부 지역을 공습했다. #튀르키예 정부가 5월로 예정된 시리아 대선이 불법이라고 밝혔다. #
튀르키예 정부가 틱톡에 시리아 난민들이 바나나먹는 장면을 올린 것에 대해 튀르키예인들을 모욕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즈미르에서 8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추방위기에 몰렸다. #
2022년 2월 17일에 튀르키예 정부는 2021년말까지 시리아 난민 19만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
8월 19일, 시리아-튀르키예 국경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 13명이 사망했다. #
이스탄불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튀르키예군이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공습했다. #
2022년 12월 28일, 러시아, 튀르키예, 시리아 국방장관이 시리아 내전 11년 만에 회담을 가졌다. #
2023년 2월 6일,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강진이 일어나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강진에 의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 양국에서 일어난 강진으로 인해 사망자가 2만3726명을 기록했다. #. 최종척으로는 터키에서만 53,677명이 죽고 실종됐다.
강진으로 튀르키예의 시리아인들이 사망하면서 사망한 튀르키예내 시리아인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란 소식이 나왔다. #
2월 24일, 튀르키예 정보기관이 시리아에서 이스탄불 테러를 저지른 주모자를 사살했다고 밝혔다. #
2024년 12월 7일,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이제 시리아에 새로운 정치적, 외교적 현실이 있다고 말하며 "튀르키예의 소원은 이웃 나라 시리아가 13년간 갈망해 온 평화, 안정, 평온을 빨리 되찾는 것."이라고 밝혔다. #
2024년 12월 8일, 시리아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붕괴되고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자유 시리아군이 시리아를 장악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될 전망이다.
아사드 정권 붕괴로 튀르키예 내 수백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자발적으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
5. 교통 교류
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 이에 따라 국경을 통해 교류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난민 사태로 인해 시리아 난민들이 튀르키예로 대거 몰려오자 튀르키예 정부는 시리아와의 국경을 폐쇄조치하고 장벽을 세웠다.6. 관련 문서
- 튀르키예/외교
- 시리아/외교
- 시리아/역사
- 튀르키예/역사
- 이슬람 협력기구
- 쿠르디스탄
-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 이들리브 / 하타이
- 튀르키예인 / 시리아인 / 아랍인
- 튀르키예어 / 아랍어 / 이슬람교 / 순니파 / 쉬아파 / 알라위파 / 알레비파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1]
시리아는 내전으로 인하여 현재 아랍국가들에 의하여 제재되어 회원국에서 정지되었다.
[2]
시리아 반군이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을 잘 패주기도 하고, 시리아 내 민주주의가 형성되기를 바라기도 해서. 특히, 시리아 반군은 시리아 전체가 아랍화가 되어야 하며 북부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에 자치구역을 형성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인데, 이것이 튀르키예가 바라는 바와 너무나 일치한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이 단순히 시리아 북부 지역에 자치구역을 형성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튀르키예 남부로 북진하려 하며, 이것이 튀르키예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믿는다.
[3]
시리아 내전 이전에는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관계였으나, 시리아 내전 이후 반군에 집중하느라 쿠르드족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도 하고, 쿠르드족이 반군과 싸우는 것을 보며 쿠르드족의 자치구역 확장을 묵인해주는 관계로 양상이 변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족이 시리아 북부에 자치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반대하며, 자치권을 갖더라도 시리아 정부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4]
튀르키예 공화국 성립 직후에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인 시리아에 속하여 있다가 1938년에야 튀르키예로 귀속된다.
[5]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화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은이 스페인으로 유입되어 유럽 각지의 물가가 폭등하였는데, 공업 기반이 튼튼했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은 별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공업 기반이 시원찮았던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은 물가 상승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6]
프랑스의 지배하에서
마론파가 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은 레바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