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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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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72727><colcolor=#fff>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파일:Schumann-Photo-1850.jpg
본명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
Robert Alexander Schumann
출생 1810년 6월 8일
작센 왕국 츠비카우
사망 1856년 7월 29일 (향년 46세)
프로이센 왕국
직업 작곡가, 피아니스트, 평론가
배우자 클라라 슈만 (1840년 결혼)
사조 전기 낭만주의
서명 파일:external/150px-Signature_Robert_Schumann.jp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클라라 슈만과 결혼2.3. 왕성한 음악 활동2.4. 말년
3. 작품4. 기타작품5. 음악 비평가로서의 슈만6. 그에 대한 평가7. 작품들
7.1. 오페라7.2. 교향곡7.3. 협주곡7.4. 관현악7.5. 실내악7.6. 피아노7.7. 가곡7.8. 합창
8. 기타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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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음악가, 작곡가, 음악 평론가. 멘델스존과 함께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평론과 저술활동을 통해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베를리오즈 등의 많은 음악가들을 알리고 도움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2020년은 슈만 탄생 210주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그의 동갑내기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의 탄생 2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40년 앞서 태어난 대선배 베토벤의 탄생 250주년이 더 부각되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1]

2. 생애

2.1. 어린 시절

어린 시절 슈만의 모습 #

1810년 작센 왕국 츠비카우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출판업자였고 저작도 하고 있었다. 슈만은 아버지의 능력을 이어받았는지 어릴 때부터 문학을 접할 환경이 많아서 문학적인 재능이 있어 14살 때 아버지가 출판한 책에 그의 원고가 실릴 정도였고 17살에는 시를 썼다. 게다가 음악적인 재능도 있어서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곧이어 작곡까지 손을 댈 정도였다.[3]

아버지는 어린 슈만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작곡가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에게 보낼 생각을 했지만 그런 아버지가 1826년에 사망했고[4], 슈만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바라는 어머니의 희망을 저버리지 못해 결국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슈만은 라이프치히에 온 지 며칠을 못 참고 피아노 선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 리스트 쇼팽의 인기를 따라가기 위해 담배 상자와 줄을 이용한 이상한 장치로 실력향상을 가속하던중 오른손의 두 손가락을 영구적으로 다쳐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글을 잘쓰는 재능도 함께 살릴 수 있는 음악 평론과 작곡가로서 살기로 결심했다. 1830년에 "아베크 변주곡"을 자신의 첫 작품으로 발표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슈만은 이듬해인 1831년 하인리히 도룬에게 정식으로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돼서 도른에게 만족하지 못해 독학하기 시작했다고한다.

2.2. 클라라 슈만과 결혼

슈만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프리드리히 비크에게는 9살된 클라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당시 피아노에 대한 재능으로 상당히 주목받는 신동이었다. 실제로 후에 클라라는 유럽 전역에 유명세를 떨치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하지만 슈만에게는 아직 클라라는 너무 어렸는지 논외의 대상이었고 같은 스승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던 에르네스티 폰 프리켄과 사랑에 빠져서 그녀를 위해서 피아노 작품인 "카니발"과 "교향적 변주곡"을 작곡했다. "카니발"에서는 프리켄의 고향을 음표에 암호식으로 집어넣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처음에 슈만은 에르네스티네가 유력한 가문의 자제라고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남작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결혼을 거의 눈앞에 둔 상태에서 슈만과 그녀와의 사랑은 깨지게 된다.[5]

한편, 이 시점에서 스승 비크의 딸인 클라라가 눈에 들어온 슈만은 9살 연하의, 이제 14살이 된 클라라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려 했다. 비크에게 클라라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비크는 놀라서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클라라는 상당히 명망있는 신동 피아니스트였고 자신이 모친없이 애지중지 열심히 가르치고 기른 외동딸이지만 슈만은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 작곡가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비크는 슈만의 경제적 능력을 근거로 강하게 압박하기도 했다[6].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슈만의 여성편력에 있었다. 후술할 사인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슈만은 당시에 여러 일반인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사창가를 들락거렸을 정도로 문란했던 것으로 유명[7]했다. 결국 비크는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로 고소했고, 슈만도 스승을 결혼을 못 하게 한다고 맞고소하는 민망한 법정 다툼이 벌어졌다.[8] 이 과정에서 비크는 승소하기 위함이었는지 슈만을 알코올 중독이라고 근거 없이 고발하기까지 했고[9], 슈만은 한때 스승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슈만이 시와 함께 클라라에게 선물한 (출판 당시에는 리스트에게 헌정된) 판타지 op.17은 이 법정 다툼으로 클라라를 만나지 못할때 쓰여진 곡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추하다 싶을 정도로 법정 다툼을 한 끝에 결국 1840년, 법정은 클라라가 성년이 되면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다. 슈만은 승소했고 클라라와의 결혼을 겨우 허락받을 수 있었다.[10] 두 사람은 그해 9월 12일에 결혼을 했다

이후 자녀는 8명을 두었는데, 1명은 1년 만에 죽었다. 클라라와 결혼한 이 해는 슈만에게는 "가곡의 해"로 불리는데 이전까지 피아노곡을 작곡해온 슈만이 중요한 가곡 작품들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 "리더 크라이스", "여자의 생애"가 이 해에 작곡된 가곡집으로 걸작들로 꼽힌다.

하지만 부인 클라라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슈만은 결혼 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아내에게 말한 후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다녔으며, 게다가 본인보다 더 재능이 뛰어났던 아내를 질투하여 집에서 아내가 피아노를 못 치게 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나마 자신의 곡은 연주를 허락했는데 이때도 본인의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지 못했다며 아내에게 훈수를 두고, 호통을 치다 피아노 덮개를 닫아버려 아내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적도 있었다.

2.3. 왕성한 음악 활동

슈만은 1834년 창간된 "신 음악지(Die Neue Zeitschrift für Musik)"[11]의 편집장으로서 본격적인 음악평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836년에는 주필이 되어 1843년까지 왕성한 음악평론 활동을 해 나갔다. 1838년, 빈에서 슈베르트의 "큰 C장조 교향곡"[12][13] 를 발굴해서 친구 멘델스존에게 가져다 주었고 독일 음악계에서 신음악지의 영향력은 커져 갔다.

이듬해인 1841년은 "교향곡의 해"로 불리는데 이 해에 교향곡 1번과 교향곡 4번의 초고가 완성되었다. 교향곡 1번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다음 해인 1842년은 "실내악의 해"로서 "피아노 오중주" 같은 실내악곡들이 작곡되었고 오라토리오를 작곡하는 등 다양한 작품들로 작곡의 반경이 넓혀져 갔다. 동시에 러시아 연주여행을 갔다.

1844년,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슈만은 피아노 협주곡 등을 쓰며 작곡에 몰두했지만 점점 정신 이상의 징후가 나타나며 정신의 균형이 무너질 조짐을 보였다. 슈만은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연구하며 오르간 작품들을 작곡했고 1845년에는 교향곡 2번을 완성했다. 1848년에는 유일한 오페라 작품인 "게노페파"를 작곡하기도 했다.

파일:Schumann bipolar disoder.jpg
Image from Jamison KR. Sci Am 1995;272(2):62-67.

정신 이상에 대해 덧붙인다면, 슈만은 양극성 장애를 지녔던 대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표에 나와 있는 대로, 조증일 때는 무척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지만, 우울증일 때는 작곡을 하나도 못 했던 해도 있을 정도였다. 양극성 장애를 연구할 때 빼놓지 않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슈만은 우울증과 정신 질환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받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죄인에 형편없는 작곡가라는 소리가 울렸고, 끔찍한 음악 소리도 울렸다.[14]

2.4. 말년

1850년, 슈만은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대의 지휘자겸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음악의 중심지인 빈이나 라이프치히에 비하면 변방이라 처음엔 성에 차지 않는 직책이었지만, 뒤셀도르프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명받은 슈만은 교향곡 3번 "라인", 첼로협주곡 등을 작곡했다. 또한 "미사곡 c단조", "레퀴엠" 등도 작곡했다. 하지만 슈만은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그다지 좋다고는 볼수 없었고 [15]내성적인 성격탓에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1853년 11월, 슈만은 지휘자직을 사임했다. 이 시기에 바이올린 협주곡이 작곡되었다.

말년의 슈만은 어떤 탁자가 마법을 부린다고 주장했다. 그 탁자가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의 그 유명한 쾅쾅쾅쾅(1악장을 시작하는 그 멜로디이다)소리를 내고, 슈만이 어떤 숫자를 생각해 내면 그 탁자가 숫자를 알아맞춘다고 했다.

지휘자를 사임하기 전인 1853년 9월, 슈만은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의 소개로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나게 되었다. 브람스의 음악적 능력에 감탄한 슈만은 오랜만에 펜을 들어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써서 브람스를 알렸다.하지만 브람스를 만나고 반년도 못되어, 슈만은 점점 심해지는 우울증과 뒤셀도르프 시절 지휘자로서의 스트레스가 결국 폭발하여 1854년 2월 27일, 뒤셀도르프의 라인강에 투신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배가 슈만을 건져서 생명은 건졌지만 결국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병상에서도 슈만은 작곡을 시도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이것들은 모두 나중에 클라라가 없애버렸다. 결국 1856년 7월 29일 슈만은 4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클라라는 와인을 손가락에 찍어 슈만에게 먹여주려 하자, 슈만은 그런 클라라를 붙잡고 "나는 알고있다(Ich weiß)"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를 두고 자신을 간호하는 클라라의 헌신을 알고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하지만, 슈만이 클라라를 열렬히 사모했던 브람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말한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16].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슈만은 에 묻혔고, 아내인 클라라는 슈만 사후 남은 여생 40년간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피아노 공연과 슈만 작품의 편곡으로 죽은 남편의 음악을 널리 알리고, 1896년에 남편 옆에 묻혔다.

3. 작품

슈만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음악가로서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과 문학적 재능을 결합해 음악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바그너가 악극을 통해 모든 예술의 통합을 시도했다면 슈만은 문학적 관념 위에 음악을 두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상당히 감성적이고 음악으로 쓰인 시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 음악적 재능과 문학적 재능은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내면은 그 스스로에 의해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가공의 인물들로 명명되었다.[17] 학자들 중에는 슈만의 정신병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두개의 인격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미 예고된 게 아니었나라고 보기도 한다.

스타일의 측면에서는 당대 음악가들과 다른 상당히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구사했다. 화성의 측면에서도 참신한 화성을 이끌어 냈고, 특히 개성있는 부분은 바로 리듬으로서 낭만주의 음악가들 중 슈만의 리듬에 대한 감각이 최고라고 일컬어도 될 만큼 그의 작품에서 리듬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부점음표나 당김음을 자주 사용하고 강력함이나 마치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리듬을 통해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선 아주 작은 동기가 작품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곡 전체가 중심축을 이루는 작은 동기와 관련되게 구성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이런 동기들은 숨겨져 있기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동기들은 지명이나 인명을 음표로 옮겨놓은 것이여서 일종의 암호같은 것이기도 했다. 앞에서도 나온 피아노 작품 "카니발"에서 약혼자의 고향을 음표속에 숨겨두는 등의 방식이 그런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음악가는 역시 베토벤이라고 볼수 있고, 음악의 시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자신이 발굴한 음악가였던 슈베르트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리고 당시 재조명되고 있던 바흐의 작품들을 연구해 그의 대위법을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기도 했다.[18]

그의 작품에서 초기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피아노 작품들이다. 작품번호 1번 아베크 변주곡부터 23번까지가 모두 피아노 작품일 정도인데 이는 이루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을 피아노 작품으로 대신 풀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슈만의 피아노 작품들이 정말 어렵다는 평을 듣는데 이유인 즉슨, 마치 오케스트라가 울리는 것처럼 슈만의 대곡들은 상당히 스케일이 큰데다가, 그 표현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다.[19] [20] 또한 노벨레테라고 불리는 표제가 있는 피아노 모음곡 장르를 창시하기도 했다.

클라라와 결혼한 1840년은 "가곡의 해"로 불리는데 이때에 슈만의 대표적인 가곡들이 다수 작곡되었다. 슈만 자신이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시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시와 음악의 결합을 추구한 것이 그의 가곡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가곡의 가사로 채용하고 있는 시들은 당시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로 슈만은 그 시들 가운데서 신중하게 텍스트를 골라 곡을 붙였다. 하이네, 괴테, 뤼케르트, 아이헨도르프 등이 슈만의 가곡에 채용된 시를 쓴 시인들이다. 또한 그의 가곡은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가 단순히 반주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솔로 연주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시인의 사랑"의 마지막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1842년에 집중적으로 작곡된 실내악곡에서도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현악 4중주곡도 쓰긴 했지만 역시 그의 실내악곡에서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피아노 4중주와 피아노 5중주로, 특히 피아노 5중주에서는 현악4중주에 피아노가 결합되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편성을 선보여 마치 피아노가 협주곡처럼 쓰이고 있다.[21] 이런 실내악에서의 피아노 활용은 브람스가 계승해서 더 발전시켜 나갔다.[22] 또한 슈만은 이 두 작품에서 바흐 연구로 다져진 대위법 실력을 유감없이 펼쳐보이고 있다.

하지만 관현악에 있어서는 슈만의 능력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어린 슈만은 베토벤의 교향곡 같은 명교향곡을 남기고 싶어했고 이런 야심은 1841년에 교향곡 1번과 4번이 완성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슈만의 교향곡 중 제일 특이한 것은 역시 4번으로, 4번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치 곡 전체가 하나의 소나타 형식으로 쓰인 곡을 연상시킬 만큼 구조적으로 주제의 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교향곡 4번의 또다른 특징은 각각의 악기들의 솔로 연주가 거의 없고, 오케스트라만 연주하는[23] 부분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는 개정후에 이뤄진 것이다. 이를 두고 당대의 음악가들은 별로 좋지 않은 개정이라고 깠다. "오케스트라가 마치 피아노 같다"라거나, "생기가 없이 뻥뻥 울리기만 하네"라는 식의 평이 당대의 평이었고 그래서 성에 안찬 음악가들은 아예 직접 슈만의 교향곡을 뜯어고치기도 했다. 개정마인 구스타프 말러가 대표적인 슈만 교향곡의 개정을 시도[24]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에도 말러가 개정한 슈만의 교향곡의 연주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슈만이 무능해서 그런 관현악법을 구사했다기 보다는 의도적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그래서 슈만의 원래 의도에 충실한다는 차원에서 지휘자가 재량껏 오케스트라 각 파트별로 음량을 조절하거나 하는 식으로 연주를 하고 있다. 또한 교향곡 3번 "라인"을 살펴보면 금관악기 파트가 다소 엉성한데, 슈만이 본래부터 오케스트라 개별 악기들의 활용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이런 슈만의 관현악법에 대해서는 파울 하인리히 메르첸이 연구하여 1975년에 발표했고, 현대음악의 대표적 작곡가로 꼽히는 루이지 노노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에 슈만의 관현악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슈만의 작품 세계 중 가장 주목이 부족한 영역은 역시 합창곡이다. 실제로 오늘날 애호가들에게 슈만은 피아노 작품과 가곡에서 뛰어났던 인물로 기억되지만, 생전에 슈만에게 가장 큰 성공을 안긴 작품은 Op.50 오라토리오 천국과 페리이다. 또한 오랜 기간을 들여 작곡한 WoO 3 괴테 파우스트의 장면은 그야말로 필생의 역작. 혼성/남성/여성 합창곡이나 뒤셀도르프 지휘자로 재직하던 시절 써낸 미사곡도 수준급이다. 돌아보면 오페라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장르에서 걸작을 남긴 진정으로 다재다능한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4. 기타작품

저서 《음악과 음악가》(이기숙 역, 포노, 2016). 한글판. 하인리히 지몬이 위 책을 전 3권으로 편집하여 1888년 라이프치히에서 출간한 보급판을 발췌 번역한 책.

5. 음악 비평가로서의 슈만

슈만은 "신음악지"를 통해서 당대 음악가들의 음악을 평가하고 비평하는 일도 했다. 특히 슈만이 초기에 감탄한 음악가는 같은 나이의 폴란드 피아니스트 쇼팽으로 1831년, "작품2"라는 제목의 비평에서 "모두들 모자를 벗어라. 여기 천재가 등장했다!"라고 말하며 쇼팽에게 엄청난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쇼팽은 슈만의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찬사에 되려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25] 또한 젊은 브람스를 발굴하고, 프랑스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엑토르 베를리오즈를 독일에 소개하는등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재능있는 음악가들을 널리 알리는 역할도 했다.

슈만이 음악 평론을 하는 방식은, 슈만이 직접 만든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의[26] 단체에서 단체의 멤버들이 가상의 좌담회를 한다는 형식으로 글이 쓰여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다비드 동맹의 멤버중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슈만의 의견을 드러내는 분신의 역할을 했다. 플로레스탄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면모라면, 오이제비우스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면모를 보였다.

비록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음악가라도 좋은 부분은 높게 평가할 만큼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로시니 마이어베어의 오페라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그밖에 프란츠 슈베르트를 세상에 알리고, 멘델스존과 마찬가지로 바흐의 음악을 재평가하여 바흐 전집을 출판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6. 그에 대한 평가

슈만은 낭만적이기 짝이 없는 예술가였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물론이고 생각들까지도 하나같이 실제 세계보다 더 아름답고 격렬하고 마술적인 세계에서 온 것 같았다.
- 스티븐 이설리스(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 베토벤이 스튜 그릇을 던져 버린 이유는?) - 애덤 스토어 그림 - 고정아 옮긺
슈만은 나의 이상(my ideal)이다.
- 에드워드 엘가[27]

7. 작품들

7.1. 오페라

7.2. 교향곡

슈만의 교향곡
교향곡 1번 B플랫장조
"봄"
교향곡 2번 C장조 교향곡 3번 E플랫장조
"라인"
교향곡 4번 D단조
교향곡 제1번 Op.38 교향곡 제4번 Op.120

7.3. 협주곡

첼로 협주곡 Op.129 피아노 협주곡 Op.54

7.4. 관현악

슈만, 만프레드 서곡 Op.115 슈만, 줄리어스 시저 서곡 Op.128

7.5. 실내악

슈만, 피아노 5중주 Op.44 슈만, 로망스 Op.94 No.2
슈만, 민요풍 소품 Op.102 No.1 슈만, 피아노 3중주, Op.63

7.6. 피아노

슈만, 아베그 변주곡 Op.1 슈만, 나비 Op.2
슈만, 다비드 동맹무곡집 Op.6 슈만, 소나타 1번, Op.11
슈만, 환상소품 Op.12 슈만, 교향적 연습곡 Op.13
슈만, 어린이의 정경, Op.15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
슈만, 환상곡 C장조, Op.17 슈만, 아라베스크, Op.18
슈만, 꽃의 곡 Op.19 슈만, 후모레스케, Op.20
슈만, 숲의 정경,Op.82 슈만, 다채로운 작품 Op.99

7.7. 가곡

슈만, Op.48 시인의사랑 슈만, Op.25 No.1 헌정[61]
슈만, Op.74 No.10 밀수업자 슈만, Op.25 No.24 너는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슈만, Op.35 No.10 고요한 눈물 슈만, Op.24 리더크라이스

7.8. 합창

8. 기타

9. 관련 문서



[1] 그나마 10년 전(2010년) 그의 탄생 200주년에는 제법 주목을 받은 편이었다. [2] 누나가 첫째이다. [3] 이 당시에도 가곡을 여럿 써서 형수들에게 선물하였다 [4] 공교롭게도 베버 역시 이 해(1826년)에 사망했다. [5] 슈만은 에르네스티네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경제적 문제, 즉 에르네스티네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현실적인 고민 끝에 원치 않는 이별을 통보했다. [6] 이는 슈베르트도 똑같이 겪은 일이다. 당시 슈베르트는 가수인 테레제 그로브와 사랑에 빠졌었으나 슈베르트의 경제력을 불신한 테레제의 아버지에 의해 반대되었고 결국 테레제는 경제력이 있던 베르그만이란 제빵사에게 시집을 갔고 이는 슈베르트를 크게 상심하게 한다. [7] 슈만은 어렸을 적부터 일기를 쓰는 버릇을 들였었는데 그 일기에 자기의 성생활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기도 했다. [8] 후에 1843년 화해하기는 한다. [9] 슈만이 한때 폭음을 일삼았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만취한 채 망신을 당한 일도 수 차례 있었다. 다만 비크가 그 당사자들을 찾아다니며 증언을 확보하려 했지만 하나같이 슈만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소용없었을 뿐이다. [10] 당시 클라라의 나이가 이미 21세의 나이로(1819년생) 성인이었고, 때문에 해당 판결로 사실상 두 사람의 결혼은 승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 오늘날까지도 발간되고 있다. 지금은 독일의 유명 음악 출판사인 쇼트 뮤직의 후원을 받고 있다. 하여간 엄청난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다. [12]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더 그레이트를 말한다. 같은해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축소된 형태로 초연했다. 애초 슈베르트 생전에 이 교향곡이 까인 이유는 '곡이 너무 길어서'라고. [13] 슈베르트는 C장조 교향곡을 둘(6번과 9번) 작곡하였는데 구별을 위해서 곡이 더 큰 9번을 큰 C장조 교향곡이라 부르고, 6번을 작은 C장조 교향곡이라 부른다. [14] 출처: 스티븐 이설리스,《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 베토벤이 스튜 그릇을 던져 버린 이유는?》- 애덤 스토어 그림, 고정아 옮김 [15] 슈만은 지휘를 하다가 공상에 빠지곤 했다. 그리고 지휘봉을 자주 떨어뜨려서 나중에는 손에다가 붙들어매기도 했다. (출처: 스티븐 이설리스,《클래식 음악의 괴짜들 - 베토벤이 스튜 그릇을 던져 버린 이유는?》- 애덤 스토어 그림, 고정아 옮김) [16] 실제 브람스는 클라라에 청혼을 하기도 했지만 클라라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게된다. [17] 긍정적인 성격이 플로레스탄, 부정적인 성격이 오이제비우스이다. 또한 그의 내면의 세계에서 멘델스존은 메리티스, 클라라는 파니라는 캐릭터로 명명되어 있었다. [18] Op. 56, 58, 60이 일련의 대위법적 작품들이다. 특히 Op. 60 'B-A-C-H에 의한 6개의 푸가'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은 매우 높았고 능숙한 대위법이 구사되어 있다. [19] 언뜻 보면 슈만 피아노 소나타 2번 같은 곡이나 그의 소곡은 '뭐야 ㅈ밥이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게다가 그의 곡들은 대충 쳐보면 리스트처럼 별로 화려하지도, 쇼팽만큼 별로 시적으로 들리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대로 안듣고 대충 연주한다면 '애매모호한 스타일의 곡'이라고 속단하기 매우 쉬운 곡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표현적인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곡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화려해질 수도, 시적으로 들릴 수도, 심오하게 들릴 수도 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테크닉이 좋은 피아니스트들만이 잘 살려 낼 수 있는 곡들이 대곡뿐만이 아니라 소품들까지 포함된다. 이유는 아티큘레이션(이음줄)이나 외성,내성이 너무 섬세하게 쓰였기 때문인데 경우에 따라선 뭣도 모르고 슈만으로 과제를 받은 작곡 전공생들이 몇개월 하고 피토하는 일이 상당히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전공생들이 가장 먼저 통곡의 벽을 느끼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훨씬 더 어려운 작곡가도 많지만 라흐마니노프나, 라벨 같은 경우는 지도교수에 따라서 의외로 대학시절에는 거의 접하지 않는 학생도 있지만, 슈만은 전공생이라면 필수로 한두곡쯤은 공부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아 망했어요~~ [20] 조윤범의 파워클래식에서 어떤 예고생이 슈만의 피아노곡의 특징을 문장에 비유한 바 있다. 다른 작곡가들의 피아노곡이 "나는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식이라면, 슈만의 피아노곡은 "나는 학교에 갔는데 학교에 가는길에 하늘을 보니까 하늘이 무척 푸르르고, 길가를 보니까 풀들이 싱그럽고~"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21]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는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다른 편성을 사용하며, 피아노와 현악4중주를 합치는 편성은 슈만이 사실상 처음으로 시도했다. [22] 이외에 포레, 드보르작, 프랑크, 쇼스타코비치 등 후배 작곡가들이 슈만의 편성으로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23] 이를 "투티(Tutti)"라고 한다. [24] 악기 편성은 그대로 두고 관현악법에 손질을 가했다. 하지만 슈만의 본래 의도를 무시하고 너무 말러적으로 작품을 개정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많다. [25] '슈만이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26] 처음 보면 무슨 당대의 규모있는 작곡가 단체나 모임 같지만 순전히 슈만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비드라는 이름의 어원은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에서의 다윗으로, 동맹의 규모는 작지만, 다른 모임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27] 슈만의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 op.52'를 듣고 감격한 기억을 회상하며 1883년 7월 1일에 쓴 편지에 남긴 말. [28] 슈만 유일의 오페라로 중세유럽을 배경으로 전쟁터에 나간 백작의 부인인 게노베바가 남아있는 신하들의 더러운 음모를 이겨내고 결국 명예를 지켜낸다는 줄거리인데 오페라다운 극적 긴장감이 부족한 탓인지 거의 연주되지 않는 편이다. [29] 19세때 작곡한 작품으로 1,2악장이 완성됐고 4악장 일부 스케치가 남아있는데 그의 고향 '츠비카우'에서 1악장이 몇차례 연주되었지만 반응이 별로였다고 한다. [30] 바로크 시대 텔레만이 작곡한 비슷한 편성의 곡이 있지만 슈만의 경우 당시 밸브가 발명된 '호른'이라는 개량된 악기에 대해 애정을 갖고 Op.70의 실내악곡에도 호른을 적극 포함시켰다. [31] 원래는 미완성작인 교향곡 G단조에 이은 두번째 교향곡으로 작곡됐으나 제목을 변경했다. [32] 슈만에겐 실내악의 해로 불리는 1842년에 작곡했는데 직전에 작곡한 '피아노 5중주'에서 활용하지 못한 여러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완성됐다. 그래서인지 조성이 E플랫장조로 같다. [33] 이 작품을 기점으로 피아노 5중주는 피아노+ 현악 4중주의 구성이 정착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제2바이올린 대신 더블베이스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34] 호른 파트는 첼로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슈만이 직접 편곡했다. 비올라 버전도 있고 원곡보다 편곡버전들이 더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35] 클라리넷 파트는 첼로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슈만이 직접 편곡했다. 비올라, 오보에, 콘트라베이스, 트럼펫, 호른 등 다른 버전도 있다. [36] 피아노 트리오 편성으로 된 작품으로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 이전에 작곡한 작품이다. [37] 오보에 대신에 클라리넷, 바이올린으로도 연주된다. [38] 파가니니 24 카프리스 Op.1 중 no.5,9,11,13,19,16 주제에 의한 연습곡 [39] 모두 18곡 / 1곡 ‘생기있게(Lebhaft)’ 2곡 ‘친밀하게(Innig)’ 3곡 ‘유머러스하게(Etwas hahnbüchen/Mit Humor)’ 4곡 ‘조급하게(Ungeduldig)’ 5곡 ‘소박하게(Einfach)’ 6곡 ‘매우 빠르게(Sehr rasch und in sich hinein)’ 7곡 ‘확고한 느낌으로 빠르지 않게(Nicht schnell mit äußerst starker Empfindung)’ 8곡 ‘활기차게(Frisch)’ 9곡 ‘생기있게(Lebhaft)’ 10곡 ‘발라드풍으로 매우 빠르게(Balladenmäßig sehr rasch)’ 11곡 ‘소박하게(Einfach)’ 12곡 ‘유머러스하게(Mit Humor)’ 13곡 ‘거칠고 즐겁게(Wild und lustig)’ 14곡 ‘부드럽게 노래하듯이(Zart und singend)’ 15곡 ‘활기차게(Frisch)’ 16곡 ‘경쾌한 유머를 가지고(Mit gutem Humor)’ 17곡 ‘먼 곳에서 울리듯(Wie aus der Ferne)’ 18곡 ‘빠르지 않게(Nicht schnell) [40] op 번호가 붙은 것 중 제일 먼저 작곡되었으며, 슈만이 손가락 문제로 피아노를 못 치기 전에 작곡된 곡이다. 그리고 슈만 곡 중에서는 기교적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곡이다. [41] 원래 소나타의 1악장으로 계획했으나 독립적으로 출판했다. [42] 1834~1835년에 작곡된 매우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기법이 잘 녹아든 동시에 슈만 특유의 몽환적인 서사와 아이디어가 깃들어 있는 21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이다.(8번과 9번곡 사이 '스핑크스'라는 수수께끼같은 번외곡 포함해서 22곡. 생략하여 21곡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그 곡들에는 전 약혼자와 현 애인(Clara)이 나란히 등장하고 본인의 이중캐릭터 자아들과 당대의 떠오르는 천재인 쇼팽과 이미 경이로운 존재였던 파가니니, 여러 어릿광대들이 등장한다. 후에 클라라의 연주로 들은 리스트도 무척 감탄한 작품이다. [43] 2번 연습곡은 파가니니 카프리스 6번을 주제로 하며, 프란츠 리스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S.140) 1번도 카프리스 6번이 주제이다. 슈만 연습곡 나머지곡들 주제는 1번은 카프리스 14번, 3번은 카프리스 10번, 4번은 카프리스 4번, 5번은 카프리스 2번, 6번은 카프리스 3번이다. [44] 이 작품 중에서 제2번 비상(Aufschwung)이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자주 연주된다. [45] 연습곡(Étude)라고 되어 있지만 주제와 변주곡 형식으로 제목대로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다이내믹과 색깔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치밀한 대위법이 녹아있고 구성상 자유분방한 듯 하지만 체계적이고 도전적인 기교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브람스 등 후대 변주곡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다. 처음의 제목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쓴 12개의 다윗동맹 연습곡"이었다가 최종 출판시 프랑스어 제목으로 "Études Symphoniques"로 불리게 되었다. [46] 1836년 처음 출판시 "Concerto without orchestra(오케스트라 없는 협주곡)"으로 부제를 삼을 정도로 화려한 연주효과를 보였는데 1853년 4악장 형식으로 개정하면서 출판사 요구로 넣었던 화려한 부분을 상당부분 없애 원래의 작곡의도대로 부활시키고 "Grande Sonate"라고 부르게 된다. 3악장의 변주곡 주제는 만나지 못하는 클라라 슈만을 그리워하며 그녀 작품을 인용했다. [47] 이 작품 중 제7번 꿈(Träumerei)이 가장 유명하다. [48] 슈만의 피아노 독주곡 중 가장 중요한 작품중 하나로 평가받는 걸작으로 베토벤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한 모금을 위해 쓰여졌고(1악장 끝에 베토벤의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 6번곡이 인용됨) 취지에 부합하듯 고전 소나타형식의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당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클라라와의 사무친 그리움의 고뇌와 감정을 그만의 어법으로 절묘하게 담아냈다.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후에 슈만은 사적인 자리에서 리스트의 연주로 이 곡을 듣던 중 너무나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그를 끌어안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49] 노벨레테(Novellette)는 '작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슈만은 8곡의 소품을 묶었다. [50] 슈만의 3곡의 피아노 소나타중 마지막에 작곡됐지만 '3번 op.14'보다 먼저 출판되어 2번이 되었다. 그런데 작품번호는 '3번 Op.14'보다 뒤에 Op.22로 작곡순서대로 되어있어서 다소 혼란을 준다. [51] 야상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제가 Nachtstücke으로 영어로 night pieces이므로 엄밀히 보자면 야상곡은 아니다. 오히려 환상곡에 가깝고 원래 큰형의 죽음으로 인해 장송곡으로 만들었으나 슈만이 '죽음' '장례' 등과 연관된 용어를 부담스러워해 '밤의 소품들'로 바꿔 출판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의 3악장 '장송행진곡'도 음악적으로 무척 좋아했지만 다만 제목에 대해서 슈만은 아쉬움을 보였다. [52] 원제는 "Faschingsschwank aus Wien". 마치 5악장 구성의 자유로운 피아노 소나타 형식을 취하는 듯 하다. 환상적인 회화(Phantasiebilder)라는 부제가 있다. [53] 원래 피아노 두 대, 첼로 두 대, 호른 한 대 편성으로 된 작품이었으나 연주해보니 악기 간 밸런스가 맞지 않는 문제가 발견되어 서주를 빼고 피아노 두 대 편성으로 바꿔 출판했다. 초기 버전은 WoO 10으로 분류되어있다. [54] 드레스덴 시절에 원래 큰딸 마리의 7살 생일선물로 소품 몇 곡을 묶어 "크리스마스 앨범"이라고 했으나 추후 출판사의 권유로 모두 43곡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55] 이 중 10번곡이 '일에서 돌아오는 행복한 시골 사람(Fröhlicher Landmann, von der Arbeit zurückkehrend)'인데 "행복한(즐거운) 농부"(Happy Farmer)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 가사가 있는 동요도 있다. #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안내방송으로 틀어주도 한다. 농협이 친농업 성향임을 감안하면 참으로 적절한 곡. [56] 큰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됐으며 마지막 12번 '저녁의 노래(Abendlied)'가 알려져 있다. [57] 각기 다른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 소품들을 14곡 묶었는데 '어린이의 정경'을 작곡하던 시절의 어린이의 정경 13곡에 포함되지 못한 여러 곡들이 포함됐다. 클라라 슈만은 이 작품의 네번째곡을 주제로 피아노변주곡(op.20)을 작곡했다. 브람스 역시 같은 네번째곡을 주제로 투신자살을 시도한 슈만으로 인해 상심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9"을 작곡해 그녀에게 헌정했다. [58] '다채로운 작품 Op.99'과 마찬가지로 슈만의 작곡 초반기부터 출판되지 못한 여러 소품들을 묶어서 1853년에 선보였다. 20곡의 다채로운 형식의 소품이다. [59] 슈만이 자살시도하기 5개월전 작곡된 5악장 구성의 작품으로 사회운동가이며 작곡가이며 작가이기도 한 '베티나 폰 아르님'에게 헌정됐다. [60] 1854년에 작곡된 슈만 최후의 피아노곡이다. 슈만의 정신질환이 극에 달해 있을 당시 '천사가 불러주는 주제를 들었다'며 작곡을 했지만, 사실 이전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2악장의 주제였다. 유령변주곡을 작곡하는 도중 슈만은 자살을 기도했고, 집으로 돌아와 작품을 마무리한 뒤 정신병원으로 들어갔고,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61] 리스트의 피아노 편곡도 있다. # [62] Op.24(9곡)는 하이네, Op.39(12곡)는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음악을 붙였다. 참고로 Liederkreis라는 제목 자체가 '연가곡'이라는 독일어 단어이다. [63] 슈만이 결혼 선물로 클라라에게 선물한 가곡집으로 당대 독일 최고 시인들의 시들을 가사로 26곡을 묶었다. '미르테'는 신부의 화관을 장식하는 꽃이다. 이 곡들 중 첫 곡 Widmung(헌정)은 뤼케르트의 시로 진실한 사랑의 감정을 토로하는 매우 유명한 곡이며, 프란츠 리스트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제3곡인 Der Nussbaum(호두나무)도 설레는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하이네의 시로 작곡한 제7곡 Die Lotosblume(연꽃)은 차분한 안정감으로 반려동물과 함께 감상하면 좋은 음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64] 뤼케르트의 연작시 "사랑의 봄(Liebesfrühling:'싹트기 시작한 사랑'의 뜻이 있다)"에서 12곡의 가사를 취했는데 이 중 2,4,11번곡은 클라라 슈만의 작곡이다. [65] 슈만 생애 중 유명한 해인 1840년 이른 바 "가곡의 해"에 작곡한 연가곡집으로 동명의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연시 중에서 8편을 가곡으로 만들었다. 여인의 사랑과 결혼, 출산, 남편의 죽음 등을 그리며 오직 남편을 향한 한 여인의 절절한 사랑과 심리를 담았다. [66] 이 가곡집의 가사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집 "노래들의 책(Buch der Lieder)"에서 가져왔고 전체 16곡 중 첫곡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önen Monat Mai>가 여자친구의 미니 5집 리패키지 타이틀곡 여름비 (SUMMER RAIN)에 샘플링 되었다. [67] 하이네의 시를 텍스트로 함. [68] 가사는 괴테의 작품. [69] 바그너가 높이 평가하였으며, 작곡자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슈만 스스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여겼다고 알려졌다. [70] 당시는 '유명 작곡가 = 유명 연주자'라는 등식이 자동으로 성립될 만큼 음악가를 지망한다면 연주자(혹은 지휘자)로서의 지망도 각광되는 편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후에도 수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한 슈만의 이런 과거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화두가 될 수 있는 주제였다. [71] 재미있는 건 이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가 클라라 슈만이 70대였을 때인데, 이 때까지도 세간에는 슈만이 다쳤던 손가락이 4, 5번으로 알려져 있었고, 닉스는 그간 알려져 있는 이야기와 모순되는 점에 대해 클라라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발언을 부정했다. [72] 과거 많은 시청자들에게 두고두고 충격과 공포의 기억을 심어주었던 공익광고협의회 구 징글의 출처가 다름아닌 슈만의 교향곡 제2번 2악장 피날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