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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의 아이콘인 손흥민- 차범근- 박지성을 합쳐서 일컫는 말. 주로 축구 방송이나 유튜버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시대는 차범근-박지성-손흥민의 순이지만 어감이 손차박 쪽이 더 좋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렇게 부르는 편.최근에 김민재가 급격하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향후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등에서 우승 타이틀을 획득하고, 7년[1]이상 유럽 상위권 클럽에서 꾸준한 활약, A매치 100경기[2] 이상을 출전하는 꾸준한 모습까지 보여준다면, 손차박김이나 차박손김, 또는 그 이상에 대한 논의를 해볼 수 있다.[3]
2. 상세
차범근은 빠른 속도와 강력한 슈팅력을 바탕으로[4] 각각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게 UEFA컵 우승[5]을 안겼으며, 당시 전 세계에서 최고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평가받았던 대한민국과 분데스리가의[6] 레전드 선수이다. 현역 은퇴 후에도 수십 년간 한독 관계발전을 위해 애쓴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독일 정부로부터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국가대표로서는 1986 FIFA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하였으며, 무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서 뛴 선수 중 한 명이다.[7][8][9]박지성은 지치지 않는 체력과 투지로 '3개의 폐', '두 개의 심장' 등의 별명을 가졌으며, 21세기 국내에서의 월드컵과 해외축구 붐을 일으킨 레전드 선수이다.[10] UEFA 챔피언스 리그, 프리미어 리그 등 통산 17개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대한민국 대표팀의 월드컵 4강, 원정 첫 16강을 오르는 등, 소속팀들과[1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전성기를 이끈 거의 모든 팀의 레전드 선수다.[12][13][14][15]
손흥민은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유럽무대 200골, 발롱도르 후보 11위[16] 등 아시아의 축구 관련 온갖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어나더 레벨 월드클래스 선수다. 대한민국과 아시아를 넘어, 프리미어 리그의 레전드라고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17] 유럽 활약에 비해서 국가대표팀 성적은 아쉽다는 평가가 있지만,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원정 16강으로 이끌고, 2015 AFC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에도 기여하는 등, 나름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과 2027 AFC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안컵까지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18]
당시 비유럽인이라 후보에 들 수 없었던 차범근을 제외하면 박지성[19], 손흥민 모두 발롱도르 후보에 들었다.
2.1. 김민재?
김민재는 33년 만에 SSC 나폴리에게 세리에 A 우승 안겼으며, 세리에 A 최우수 수비수상, 발롱도르 후보 22위[20] 등 아시아 역사상 전례없는 활약을 펼친 센터백이다. 현재는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 중이며,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해외 리그에 진출한 역대 선수들 중 가장 빅클럽에 몸을 담고 있다.[21]손차박의 입지가 확고한 상황에서 또 다른 괴물이 등장한 상황이다. 여러 매체에서 자주 다루는 역대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에는 아직 손차박처럼 상위권에 올라간 경험이 없지만 우승 후보도 아니었던 팀에서 압도적인 활약으로 리그 우승의 주역이었고, 바이에른 뮌헨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등 예사롭지 않은 커리어와 퍼포먼스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팬들은 아예 손차박을 뛰어넘을 가능성[22]까지 거론하고 있는 중이다.[23]
3. 평가 및 논쟁
손흥민이 메이저 대회 우승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꽤나 저평가하는 팬들이 많은 논쟁이다. 그러나 손흥민의 월등한 소속팀 내부 위상과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등 압도적인 수상 기록을 논거로, 대다수의 팬들은 손흥민을 최고로 두는 분위기이다.[24]자세한 내용은 손흥민/개인 수상 문서 참고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성 기록을 꼼꼼히 따져보면, 거쳐갔던 모든 소속팀에서 모을 수 있는 모든 우승컵을 다 모았던 선수였고, 박지성이 참가한 02~10년도 월드컵과 손흥민이 참가한 14~22년도 월드컵 등이 비교가 되면서, 결국 승리와 우승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는 박지성이 최고 아니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또한 차범근의 경우 대한민국의 기성세대 레전드 선수임이 많은 기록과 언사 등에서 인정을 받지만 현시대만큼 스탯, 영상 등 평가할 사료 자체가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박지성vs손흥민의 구도가 생겼으며, 꽤나 자주 언급되어 쉽게 찾을 수 있는 논쟁이다.
해외에서는 손흥민을 위로 두는 경우가 많으나[25], 국내에선 박지성의 팬덤도 나름 강한 기세를 보인다.[26] 다만 기브미스포츠가 박지성을 EPL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18위로 뽑거나, 가끔 손흥민을 제치고 역대 아시아 최고의 프리미어리거로 뽑기도 하며, 동료들[27]과 상대팀이었던 선수들[28]의 꾸준한 언급 등을 보면 박지성도 전혀 꿀릴 것은 없다. 특히 우승커리어는 축구 클럽과 국가대표팀의 가장 큰 목적인 만큼, 박지성의 커리어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넘사벽에 가깝다. [29] 이로인해 손흥민이 트로피가 없다는 것이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 [30]
2024년 3월, 기브미스포츠가 역대 아시아 최고의 프리미어리거로 손흥민을 2위, 박지성을 1위로 뽑았다.
2024 8월 18일 기준, 기브미스포츠가 역대 한국 선수 10인을 뽑았는데 말그대로 손차박이 1~3위를 차지했고, 김민재가 바로 뒤를 이어 4위에 올랐다.
2024년 8월, 기브미스포츠에서 토트넘 역대 최고의 윙어 1위로 손흥민을 선정하였고, 같은 해 11월, 맨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9위로 박지성을 선정하면서 다시 한 번 이들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31]
2024 11월, 스코어90에서 21세기 아시아 최고 선수 1위로 손흥민, 박지성을 카가와 신지보다 아래인 3위로 뽑았다. 물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 이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카가와 신지는 키커 랑리스테 월드 클래스로 선정과 더블(리가+포칼 우승)까지 해내는 대단한 시즌을 보냈다. 순수하게 고점만 생각하면 아예 납득이 가지 않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 다만, 카가와 신지는 2010년대 중반부터는 썩 좋지 않았고, 그의 전성기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치욕에 가까운 유럽 커리어 말년을 보냈다. 그에 비해서 박지성은 QPR에서의 1년과 중간의 부상기간들을 제외하면, PSV에서 말년까지 훌륭하게 보냈기 때문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팬들이 다수 존재한다.[32][33] 그리고 같은 달 26일, 매드풋볼에서 21세기 아시아 최고 선수 1위로 손흥민, 2위로 박지성을 뽑았다. 다만 김민재의 경우 유럽에서의 활약 기간이 비교적 짧아서인지 9위로 올랐다.
현재 이 논쟁은 어이가 없는 전쟁으로 번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문제의 시작점은 축구는 팀 스포츠이고, 결과에 따른 영광과 책임은 팀이 모두 함께 지지만, 선수 개인의 대한 평가는 별개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다보니 개인으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지 못 했지만, 함께 했던 모든 팀을 최고의 순간으로 이끈 박지성과 개인으로서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나, 단 한 번도 팀과 최고의 순간을 함께하지 못 한 손흥민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대부분의 일반팬들은 둘 다 대한민국의 레전드 선수인데 이런 싸움이 진정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반응이다.
4. 결론
차박손, 혹은 손차박이라는 통칭은 라이벌 구도도 아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시대별 레전드 선수들의 계보이며, 대한민국 스포츠의 자랑거리이다. 때문에 이 논쟁에 대해선 아, 대한민국에 이런 선수들이 있었구나! 등 얕게만 알아보는 것이 권장된다. 만약 이 논쟁에 대해 과몰입하게 된다면 서로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만을, 자신이 축구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아니면 가장 사랑했을 때에 나온 선수만을 칭찬하고 존중받기 위해 다른 선수들을 깎아내리고 철저히 배척하는 악성 팬덤이 되어버리며, 자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할 것이다.[34]2024년 기준으로 아직 손흥민이 건재하기 때문에 손차박 다음의 아이콘 선수가 정해지지는 않았다.[35] 현재 차박손 순서대로 이어지는 레전드 계보는 아시아에서 나오기 힘든 발롱도르 후보급 센터백 김민재[36], 어린 나이에 코파 트로피 후보에 올랐으며 현재 파리 생제르맹 FC라는 빅클럽에서 활약하는 이강인[37], 스토크의 왕 배준호[38] 등이 다음을 계승할 선수들로 기대받고 있다.[39]
그리고 김민재가 손차박을 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직까진 단기임팩트라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김민재가 모두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꾸준히 일관되게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40]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차박손으로 이어지는 레전드 계보에 입성하지 못 한 선수들도 많다.[41]
1. 상황적으로 시대의 최고점을 찍지 못 하고 내려온 범부사례[42]: 허정무[43], 이영표[44]
2. 장기간 유럽에서 활약했으나, 낮은 고점의 사례[45]: 설기현[46], 차두리[47], 기성용[48], 구자철[49], 이재성[50]
3. 월드클래스가 될 기회를 잡았음에도 증명에 실패한 사례[51]: 이천수[52], 박주영[53], 박주호[54]
4. 엄청난 단기 임팩트를 보여주었으나, 꾸준함을 보여주지 못한 사례: 최정민[55], 안정환[56], 이청용[57]
5. 축구 외적으로 논란을 만들어낸 사례: 홍명보[58]
단, 해외매체 및 기관들이 주로 선정하는 아시아 역대 베스트 11, 대한민국 역대 순위 등에서는 반박할 수 없는 차박손김을 제외하면, 시기 순으로 홍명보[59], 설기현[60], 이영표[61], 기성용[62]이 주로 선정되어 인정받는다.
[1]
이영표조차 PSV-토트넘-도르트문트와 같은 유럽 상위권 레벨의 클럽들에서 7년을 활동했다. 페네르바흐체-나폴리-바이에른 뮌헨이라면 이미 클럽 네임밸류는 그 이상이고, 심지어 발롱도르 후보까지 오른 전적이 있으니 이미 이영표는 넘었다고 본다. 그러나, 결국 손차박 라인급에는 유럽무대에서의 꾸준함 또한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2]
역시나 단기 임팩트만으로는 손차박 라인에 들어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센추리 클럽은 국가대표에서 최소한 10년 이상 해당 포지션에서 대체불가의 자원이였으며, 부상 없이 롱런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표라고 볼 수 있다.
[3]
물론 김민재는 유럽 4년차로 꾸준한 편이며, A매치 100경기도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차기 주장 후보로 뽑히고 있으며, 실제로 손흥민 부재시 주장 완장을 차고있다.
[4]
차범근은 압도적인 신체능력으로 경기를 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간간이 원톱으로 활약한 적은 있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섀도 스트라이커나 윙어로 뛰었으며, 이는 그의 탁월한 속도와 강력한 슈팅력에 기반한 것이다. 현대의 손흥민과 유사한 플레이 스타일을 보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제일 빠르며, 실제로 차범근 이후로 박지성 시절까지 유럽에서의 아시아 선수 선발 기준은 빠르고 슈팅이라도 좋아야만 유럽에서 통한다는 것이었다.
[5]
현재 UEFA 챔피언스리그의 참가 자격은 당시의 유러피언컵과 UEFA컵을 합친 성격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현재의 유로파를 챔피언스리그 2부라고 했을 때, 당시의 UEFA컵은 1.2~1.3부 챔피언스리그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UEFA컵의 역사적 계승은 유로파리그가 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권위는 UEFA컵>>>유로파리그다.
[6]
1970-80년대 분데스리가는 바이에른 뮌헨, 함부르크SV,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3강 구도로 유럽에서 가장 강한 리그였다. 당시 유러피언컵 3연패의 바이에른 뮌헨이나, UEFA컵 우승했던 레버쿠젠조차 해당 시즌 분데스리가 중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리그 내부 경쟁력이 매우 높았다.
[7]
단, 월드컵 예선은 거리 문제로 인해서 참가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본선 출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예선을 뛰지 못한 선수가 어떻게 본선 명단에 이름을 올리느냐로, 해외에서는 당시 한국 축구에서 알던 유일한 선수이자 세계적 선수인 차범근을 월드컵 엔트리 제외한다니 한국 축협이 무슨 패기로?라는 반응이었다.
[8]
차범근이 출전하였던 1986 멕시코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https://www.youtube.com/watch?v=GDa7PN3wIlE)은 경기 영상도 남아 있다.
허정무가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태권킥을 날렸던 것이 바로 이 경기다.
차범근,
허정무,
조광래,
박경훈,
김주성,
최순호 등이 참가한 대회였고,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과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만큼이나 황금세대라는 평가를 받는다.
[9]
놀랍게도 차범근의 A매치 100경기는 만24세에 달성한 것인데, 이는 현재처럼 FIFA가 전세계 A매치를 관리하던 시기가 아니라서 리그 일정을 무시하고 친선 경기를 20회 이상 잡는 등 기록 뻥튀기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메르데카컵이나
박스컵등 당시 아시아의 정치적 상황때문에 생긴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유럽이나 남미도 비슷해서 70년대 이전의 국대경기 기록에서 비상식적인 것들이 다수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는 초인류+초축협이 등장하면서
고대 괴물들의 기록들을 현대에 구현해 버렸고, 해외축구 뉴비들이 이 둘 때문에 예전 기록에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10]
해버지
[11]
교토 퍼플 상가,
PSV 에인트호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2]
여타 운동선수와 국내에서 저평가받는 경향이 크다. 뛰어난 오프 더 볼, 발기술, 강력한 양발 킥력, 양발 드리블, 수 읽기, 높은 축구 지능, 준수한 스피드, 활동량, 성실성 등의 엄청난 장점 등을 모두 갖춘 선수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놓고 찾아봐도 극히 드물다. 오히려 영국 현지팬들은 박지성을 레전드로 치켜세워준다.
[13]
PSV에서는 레전드 박지성의 은퇴를 위한 이벤트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경기장에서 팬들이 불러주는 위송빠레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14]
교토 상가에서는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히기도 하였다.
[15]
박지성이 유일하게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QPR 시절이다. 그러나 QPR 입단에서 받았던 특급 대접과
프리미어 리그 구단이 아시아 선수에게 주장을 맡긴 최초의 사례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당시 어떠한 위치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16]
아시아 역대 최고 순위
[17]
당연히 소속팀인
토트넘 홋스퍼 FC에서도 레전드라고 평가받는다.
[18]
사실 대표팀에서 손흥민이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하필 비교대상이 2024년 기준 최다 출장 및 최다 골인
차범근과 월드컵 4강, 원정 첫 16강 주역인
박지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지성은 잉글랜드, 프랑스, 포르투갈 등 유럽 강호들과 라이벌 일본, 이란 등에게 결정적인 동점골, 결승골을 넣는 모습으로 임팩트가 남다르다. 또한 공격 포인트가 적어도 경기력 면에서 남달랐는데, 특히 월드컵 16강에서 2대1로 아쉽게 패배하기는 했으나, 혼자 우루과이 중원을 휘젓는 괴물같은 모습은 압권이었다. 그리고 박지성 은퇴 이후 급격하게 추락한 대표팀의 성적을 생각하면 왜 국대는 박지성이 최고였다는 말이 나오는지 알 수 있으며,
손흥민이 인터뷰에서 박지성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는지 알 수 있다.
[19]
당시 최종 50인
[20]
수비수 중 1위
[21]
그나마 견줄 만한 클럽은
박지성이 뛴
알렉스 퍼거슨 시절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뿐이다.
[22]
현재와 같은 모습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챔피언스리그 우승, 키커 랑리스테 월드 클래스 선정, 피파 월드 베스트11, 발롱도르 포디움도 노려볼만해보인다.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손차박이라는 대한민국 레전드를 넘어 세계 축구사에 남을만한 선수로 기록될 것이다.
[23]
박지성의 저평가 요소인 아쉬운 출전기록과 적은 공격 포인트 등의 개인 퍼포먼스, 손흥민의 저평가 요인인 소속팀과 무관의 선수경력도 김민재에겐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라는 포지션이 김민재의 평가를 더욱 높이고 있다.
[24]
단, 인터넷이 확연히 발전한 현대라는 점 때문에 과거부터 봐온 팬덤에서는 의견이 많이 갈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차범근과 박지성의 활약을 굳이 지금에 비유하면, 차범근의 경우 현시점 최고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 100골 가까이 넣으며 아스톤 빌라, 웨스트햄 정도의 중견 클럽을 챔스 혹은 유로파에서 우승 시킨 것이며, 박지성의 경우는 현재 맨시티 왕조의 핵심 일원으로 우승 경쟁에서 중요한 시점마다 골을 터뜨린 영웅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당연히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활약을 보인 것이기 때문에 사실 손흥민보다 높게 평가받아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손흥민 또한 후대의 후배 선수가 비슷한 활약을 보이면 차범근, 박지성과 비슷한 입장으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25]
포포투, 기브미스포츠, 90min 등에서 선정
[26]
박지성의 팬덤이 욕을 많이 먹기도 하지만, 박지성의 국가대표 활약상을 보면 팬덤이 생길수밖에 없기도 하다.
[27]
웨인 루니, 파트리스 에브라, 리오 퍼디난드, 대런 플레처 등
[28]
안드레아 피를로, 존 오비 미켈 등
[29]
월드컵 4강,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프리미어 리그 4회 우승, FIFA 월드컵 우승, 에레디비시 2회 우승 등, 유럽의 어지간한 선수들도 이 정도 커리어는 힘들다.
[30]
게다가 김민재와 이강인이 연달아 5대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더 부각되었다.
[31]
맨유와 토트넘의 위상의 차이를 생각하면 박지성 역시 대단한 것이다.
[32]
굳이 비교한다면, "고점의 카가와라면 박지성한테 한 번 비벼볼만하다?"수준은 된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우승커리어나 업적들을 따져보면, 박지성이 우세인 것은 변함 없다.
[33]
게다가 고점을 따질 것이었다면 김민재 역시 최상위권 순위에 있어야 한다.
[34]
내가 이 시대를 지켜봤다, 너희들은 보지 못했다. 등 자신이 더 많은, 더 오래된 레전드들의 경기를 봤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옛 레전드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자신이 더 위대한 시대를, 더 오래 지켜봤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많다.
[35]
단, 최근 김민재와 이강인의 활약과 인기는 거의 호각이다.
[36]
사실 김민재는 이미 이 계보에 올라도 무방하나 아직 활약 기간이 짧다. 오히려 커리어가 쌓였을 때, 그 이상을 바라볼 여지도 있는 선수이다.
[37]
최근 PSG라는 빅클럽에서 입성하였으나, 주전경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지성시기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김민재의
바이에른 뮌헨과 비교해 보면, 현재의 PSG는 확연히 급이 떨어진다. 이를 감안했을 때, 소속팀에서 아예 주전급 활약을 해주거나 더 상위클럽으로 이적을 하지 않는 한, 손차박 레벨에 도전하기는 힘들어보인다. 오히려, 현재까지의 커리어로는
이영표,
기성용과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지난 몇 년간 경이적인 발전을 보여준만큼, 한 번 더 반등을 해줄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38]
함부르크SV 데뷔 시절 손흥민을 연상시키는 대단한 유망주이긴 하나, 배준호는 이제야 뱀의 머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손차박은 단순히 대한민국 축구계의 역대급 레전드 라인일 뿐만 아니라, 야생이라고 할만큼 거친 유럽 축구계 먹이사슬에서조차 한 시대의 최정점에 있던 선수들이다. 배준호의 재능과 노력의 한계가 어느 정도일지 지켜보는 것은 앞으로 해외축구 팬들에게 즐거운 포인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강인과 달리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이는 그의 축구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39]
최근에는 양민혁도 토트넘 입단에 성공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으나, 양민혁을 이 손차박 문단에 언급하는 것은 축알못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해외 명문 클럽 같은 경우는 미리 유망해보이는 선수의 몸 값이 저렴할 때 미리 계약을 한 후, 중하위권 클럽에 임대 뺑뺑이를 돌리며 그 성장 가능성을 지켜본 후, 만약 못 하거나 중박일 경우 해당 클럽에 팔아버리고, 극소수의 대박 선수만 임대 복귀를 시켜 즉각 전력감으로 써먹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후자(잘 풀린 케이스)는
토니 크로스가 있으며, 전자(안 풀린 케이스)는
닐스 페테르센 같은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국내 케이스들을 예로 들자면,
차두리,
정우영 역시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분명히 양민혁이 K리그에서 보여준 재능은 우리에게 많은 기대감을 주고 있으나, 솔직히 이 정도로 훌륭한 재능의 선수들 중 95% 정도는 기회를 전부 말아먹고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가다가 은퇴하는 것이 유럽 축구판이다. 오히려
박주영,
이승우 등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양민혁에게 현재 들어가는 관심은 그에게 독이 될 확률이 높으며, 해당 문단에 벌써부터 기술하는 것은 오히려 "제발 망해라"라고 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이다. 이렇게 유망한 선수일 수록, 팬들은 제발 관심을 줄이고 인내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참고로 양민혁의 이적료는 3.4m에 6년 계약인데, 이 정도 금액일 경우, 토트넘에서도 즉시 전력감으로 영입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두고 지켜볼 예정이고, 그 미래 역시도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복권이나 한 번 사볼까?"라는 느낌에 더 가깝다. 본인이 팀 훈련에서 말도 안 되는 기량을 보여준다면, 리그에 데뷔하면서 신화를 써내려 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하부리그나 하위팀으로 임대를 갔다가 하위팀에 정착할 확률이 높다. 심지어 이것마저도 잘 풀린 경우이고, 어쩌면
이승우와 같이 K리그 유턴 또는 오히려 심각한 기량 하락으로 국내 복귀 후 실업 리그에서 뛰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양민혁과 같은 영입은 기대에 미치지 못 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반대로 선수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그의 가능성 역시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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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데뷔년부터 지금까지 어느 클럽에서든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오히려 2023-24시즌 후반기에 흔들리는 모습이 더 어색했을 정도이며, 군사훈련, 부상, 실력 외적으로 인한 국내에서의 잡음 등 특수한 이유가 없는 한 기복이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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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열은 프로 데뷔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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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클럽에서도 주전으로 뛸 수 있음을 입증했으나, 그 기간이 길지 않고, 임팩트도 크지 않았을 경우에 포함된다. 소속팀에서는 기억에 남기 힘들 수도 있으나, 국가대표에서는 확실히 역대 라인에 포함되는 선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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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차범근, 연세대의 허정무. 80~83년까지 PSV에서 활동하며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와 선수 본인의 네덜란드 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 83년에 K리그 창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간다. 당시에는 나쁜 선택이 아니였으나, 유럽에서의 커리어를 더 높게 쳐주는 후대의 평가로 인해, 이미 유럽에서 능력을 어느 정도 증명했음에도 유럽무대에서 롱런을 한 차범근에게 70-80년대 아이콘의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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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경우는 20대 초반 PSV에 진출하면서 이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면, 이영표는 PSV에서 그의 전성기 시간을 보냈다. 07/08 시즌 토트넘 3년차에는 이미 30대였고, 이 시기부터 전형적인 은퇴선수 커리어를 보여준다. 늦은 유럽 진출로 유럽 커리어가 손차박과 비교했을 때 짧았으며, 유럽 상위권 클럽에서도 주전임을 입증하는 실력이였음에도 장기간 한 클럽에는 머무르지 못 하는
저니맨이였다. 분명히 2002년 월드컵에서 10번을 부여받으며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던 선수였던만큼 높은 레벨의 선수였지만, 00년대 최고의 선수가 되기에는 동시대
박지성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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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리그라도 중하위권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이다가 유럽 커리어를 마무리할 경우, 대부분 이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한국 국가대표팀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역대급 선수들로 평할 수 있지만, 손차박의 아성에 끼기에는 한끗 모자란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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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4강을 이끌었으며, 2002-03 시즌 벨기에 리그에서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비록 아시안 쿼터제라는 논란이 있긴 해도 대한민국 최초로 발롱도르 후보에 들었다. 또한 레딩 FC에서도 초반에는 설바우두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활약을 보여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부상과 부진이 커리에서 자주 발목을 잡았으며, 주전을 고집하여 유럽의 하위권 팀들을 돌았고, 포지션에 대한 고집으로 감독과 충돌을 일으키는 등 인성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빠른 스피드, 유럽 선수들과 대등한 몸싸움이 가능한 피지컬, 정교한 크로스 등 좋은 능력들을 갖추어 많은 기대를 받아왔으나, 본인의 고집과 더 높은 곳을 향하려는 의지가 약했다. 박지성은 이러한 설기현의 재능을 아쉬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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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아버지의 이름 값 덕에 첫 계약이 무려 레버쿠젠이였고, 2002 월드컵에서도 히딩크의 눈도장을 받아 후반 조커 공격수로 출전한다. 하지만, 부족한 발기술과 좁은 시야라는 단점을 전혀 극복하지 못 해 1부 하위권 팀과 2부리그에서 저니맨 생활을 전전하였다. 그의 변곡점은 마인츠 시절에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이후로 코블렌츠-프라이부르크-셀틱 등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대한민국 대표팀에도 소집이 되어 역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과 2015 아시안컵 준우승에도 기여하였다. 차범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비슷한 급의 선수로 성장한 동년배 박지성에게 시기와 질투도 느꼈을 것이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도 상당히 심했을 것이다. 어쩌면 위대한 아버지에게 걸맞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서 포지션 변경을 망설였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시간을 낭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축구 커리어를 살펴 보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그만의 축구를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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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엄청난 재능이었지만, 승리를 위한 무엇인가가 결여된 전형적인 하위권팀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준 선수. EPL 시절에는 중위권~강등권 팀에서 주로 뛰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그가 주전으로 활동했던 시기가 대한민국 최악의 암흑기와 겹친다. 물론 당시 최악의 암흑기를 보낸 원인은 기성용이라기보다는 조광래-최강희-홍명보-슈틸리케로 이어지는 감독 선임 실패이긴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선수는 항상 논쟁을 불러오는데, 선수 개인의 기량을 팀이 못 받쳐준다와 그 선수 또한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로 평가가 갈리는 편이다. 물론 각자의 평가가 어떻든 프로스포츠의 논리상 손차박과 같은 확실힌 업적을 이룩한 선수들에 비견하기는 어렵고, 이영표와 같이 팀의 핵심 요원이 아니더라도 승리하는 팀에서 기여하는 선수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기도 어렵다. 경기 외적인 부분이라 사람마다 평가가 갈릴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리더는 묵직해야한다", "니들이 직접 뛰어 보시던가" 등의 경솔한 발언도 평가절하 요소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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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카타르 아시안컵 득점왕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분데스리가로 진출한다. 볼프스부르크와 마인츠에서는 인종차별이나 폭행시비가 붙는 등, 실력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잘 정착하여 클럽 레전드라고 불릴만한 커리어를 쌓았다. 다만 기성용과 마찬가지로 아우크스부르크가 챔피언스 리그 레벨의 클럽이 아니라 중위권~중하위권을 전전했으며, 국가대표팀 활약상은 생각 외로 2010년대 중반부터는 썩 좋지 않아서 기성용보다도 높게 쳐주기 힘들다보니 손차박 논쟁에 함께 들어가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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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슈타인 킬과 마인츠에서 뛰었으며, 마인츠를 강등위기에서 구하는 등 상당한 기간 분데스리가에서 꾸준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국가대표팀 합류와 함께 서서히 한국 축구의 국가대표 성적이 상승 곡선을 그린다는 것을 보았을 때, 10년대 후반 20년대 초반의 한국축구 부흥을 손흥민과 함께 이끄는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손차박 레벨의 고평가를 받기에는 클럽 네임밸류가 지나치게 낮고, 유럽 진출이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보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도 단점이다. 여기에 동시대 축구협회가 온갖 비상식적인 행정을 하고 있어 국가대표 성적이 기대만큼은 못 미친 것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또한, 동시대
손김이황과 같이 역대급 반열에 오를 예정인 천재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있어, 실력에 비해 존재감이 옅은 편이다. 이미 손흥민과 함께 선수생활 황혼기에 접어들었기에 이 항목에 같이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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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빅클럽에서 증명을 실패한 경우는 2-3시즌 정도 하위팀에서 성장한 후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작 빅클럽 이후로는 대부분 유럽커리어가 끊기거나 하위팀에서도 벤치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에, 고점이 낮지만 꾸준했던 선수들보다 높게 쳐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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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대 가장 기대받던 유망주는 사실 박지성, 이영표가 아닌 이천수였다. 당시의 축구인들은 당연히 이천수가 박지성보다 더 훌륭한 선수라고 믿었고, 그의 유럽 성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그 기대에 걸맞게 프리메라리가 전 시즌 2위를 기록한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하는데 성공한다. 설령 선수단, 구단관계자, 현지 팬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는 기자회견을 했을지언정, 당시 대한민국 팬들은 "이천수라면 충분히.."라는 심정이였을 정도로 그의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천수는 스페인 무대에서 적응에 완전히 실패했고, K리그에서는 여전히 재능을 뽐냈으나 유럽 무대는 도전하는 족족 실패로 귀결되며 더 높은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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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모나코에서 팀이 강등권에 처지는 와중에도 12골을 넣으며 재능을 뽐냈지만, 아스날 이적 후 커리어가 대차게 꼬이면서 그대로 전성기가 지나가버렸다. 리그 앙과 PL의 수준 차와 스타일 차이 등으로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고, 벵거 감독이 '자신감이 없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출전에 대한 의지를 잘 보이지 않기도 했다. 물론 런던 올림픽 한일전에서 보여준 활약 등 재능의 편린은 남아 있었으나 이를 꾸준히 보여주지 못했고, 셀타 비고나 왓포드 임대에서도 반등하지 못하며 일찌감치 K리그로 돌아와야 했다. 너무 이른 나이부터 대한민국 언론으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주인공 대접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척박한 유럽생활을 견디지 못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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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대 초반 대한민국 언론과 대중들이 주목하던 선수는 아니였으나, 조용히 유럽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던 선수였다. 바젤에서 11-12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며 여러 차례 이변의 주역으로 활약한 뒤 마인츠로 이적해 좋은 활약상을 보였다. 이후 투헬 감독의 요청으로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빅클럽 중 하나인
도르트문트에 영입됐지만, 부상과 기량 저하 등으로 완전히 벤치 맴버로 전락하며 투헬의 말동무 내지는 승리 토템 역할(...)이나 하였다. 동시대 손흥민이 소속팀에서 맹활약하며, 부패한 인맥 축구와 관계 없이 국가대표에 "뽑힐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올라섰고, 결과적으로 역대 라인에 입성한 예시가 있어, 그의 실패가 더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도르트문트에서 제한된 기회를 잘 살리고, 멀티자원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어 차츰 입지를 넓혀갔다면, 국가대표에서의 더 많은 출전 기회 뿐 아니라 더 훌륭한 선수로 기억되었을 확률이 높다. 사실 손차박이나 해당 문단에 언급된 다른 선수들과 달리, 재능 자체가 살짝 부족한 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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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1960 AFC 아시안컵 우승의 주역 중 하나다. 한국 축구는 1970-80
차범근과
허정무 이후로 02년도까지는 유럽에서 활약한 축구 선수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서정원,
안정환 등이 산발적으로 유럽에 진출하였으나 역대 논쟁에 낄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이동국,
황선홍과 같은 에이스 계보의 선수들조차 아예 처참한 실패만을 반복했을 뿐이다. 따라서 02년도 이전의 유럽 진출 커리어가 전무한 선수들을 평가 할 때는 if를 모두 제외하고, 당시의 A매치 성적만을 확인하는 것이 공정한 비교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기준으로 그나마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의미있게 내세울만한 업적은 1956, 60 AFC 아시안컵 우승과 2002 FIFA 월드컵 4강 뿐이다. 하지만, 아시안컵 우승은 거의 한국전쟁까지 올라가야 하는 수준의 고대의 일이지라, 기록조차 찾기 힘들다. 그나마 두 대회에 모두 출전하였으며, 현재에도 이어지는 국가대표 주전 스트라이커 계보의 원조 선수으로 기억되는
최정민만큼은 그래도 기록이 남아있다. 비록, 시대적으로 유럽 기록이 전무하지만, 아시안컵을 연달아 우승하며 한국축구에 역사적인 임팩트를 남겼다. 오히려 시대상을 고려하면 더 고평가받을 수 있는 여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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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4강 신화의 핵심은 현대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히딩크의 한국 축구 혁신이였다.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의 지원이 아무리 좋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은 선수들의 몫이다. 선수단의 주전력은 90년대 쌍두마차
황선홍,
홍명보의 마지막 불꽃과 0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의 황금기를 이끈
박지성,
이영표였지만, 그 사이에 절묘하게 끼인
안정환을 잊으면 안 된다. 당시 7공주의 끝자락 시절, 세리에A에 진출했던 대한민국 유일의 빅리그 선수였고, 비록 주전자리는 차지하지 못 했지만, 쏠쏠한 슈퍼조커로 소속팀에서 활약하였다. 2002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2차전 미국전과 16강 이탈리아전에서 결정적인 한 방들을 연달아 넣어주면서 결정력 부족이라는 한국축구의 오랜 숙원을 풀어낸 위대한 9번이 되었다. 그의 은퇴 이후, 조재진, 이동국, 박주영, 김신욱, 황의조, 조규성 등의 9번 계보 선수들 중 단 한 명도 결정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임팩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오점은 유럽 커리어 중에서 단 한 번도 주전의 위치에 오르지 못 했다는 것. 물론 안정환의 유럽 커리어는 실력 외적인 불운이 겹치고 겹쳐 안타깝게 꼬인 탓에 그 재능을 개화하기 어려운 상황이긴 했지만, 결국 남은 기록 자체는 특출난 것이 없는 게 되고 말았다.
[57]
K리그에서 EPL로 직행하는 굉장히 드문 사례로, 볼턴을 09-10시즌 EPL 중간 순위 4위까지 올리는 등 충격적인 퍼포먼스들을 선보이며 EPL에 데뷔한다. 10여년이 넘게 지나
김민재의 세리에 폭격 이전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시즌을 보여준 선수라고 볼 수 있다. 박지성 다음을 책임질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로 각광 받았으나,
톰 밀러에게 당한 살인 태클로 장기 부상을 겪은 후 급격한 기량저하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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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은
황선홍을 더 높게 쳐주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90년대 최고의 선수로 홍명보를 뽑는다. 하지만, 이후의 행보로 인해 모든 평가가 무색해졌다. 또한 시대적으로 유럽 진출이 어려웠기에 if와 의미 없는 이벤트성 수상에 평가를 의존해야하고, 그나마 공정한 비교가 가능한 90년대 A매치 시절 성적은 사실상 10년대만큼이나 처참해서 역대 논쟁에 끼기에는 민망하다. 그나마 02월드컵 4강 신화와 브론즈볼 수상 정도가 있긴하지만, 이후 박지성-이영표가 00년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전성시대를 열고, 이들이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부진에 빠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를 역대논쟁의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옹졸한 측면이 있다. 비슷한 경우로, 10년대 대표팀의 핵심자원이자 세계적인 왼발 센터백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김영권도 마찬가지로 유럽커리어의 부재와 처참한 10년대 A매치 성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는다. 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90년대 홍명보를 특별 대우해줄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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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선정 100인에 뽑혔으며, 아시아 역대 베스트 11에서 주로 김민재와 센터백 라인을 이룬다. 또한 2024 기브미스포츠 역대 한국 선수 순위 6위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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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로 발롱도르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2024 기브미스포츠 역대 한국 선수 순위 10위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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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기브미스포츠 역대 한국 선수 순위에서 손차박김에 이어 5위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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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기브미스포츠 역대 한국 선수 순위에서 7위로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