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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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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대하드라마
세고돈 (2018)
西郷どん
파일:segodon_logo.jpg
방송 시간 매주 일요일 오후 8시 00분 ~ 오후 8시 45분 (회당 분량 : 45분)
방송 기간 2018년 1월 7일 ~ 2018년 12월 16일
방송 횟수 47화[1]
제작 파일:NHK 로고.svg 일본방송협회
채널 파일:NHK G 로고.svg NHK 종합 / 파일:NHK BS 프리미엄 로고.svg NHK BS 프리미엄
연출 노다 유스케, 본코하라 마코토, 오카다 타케시
극본 나카조노 미호
원작 하야시 마리코 <西郷どん!>
프로듀서 사쿠라이 마사루, 사쿠라이 소이치
음악 후우키 하루미
출연 스즈키 료헤이, 에이타, 니시키도 료, 쿠로키 하루, 마츠다 쇼타, 키타가와 케이코, 호리이 아라타, 와타나베 켄, 오구리 슌
해설 니시다 토시유키[2]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마케팅3. 구성
3.1. 특집 프로그램
4. 등장인물
4.1. 다카모리와 가족들4.2. 도시미치와 가족들4.3. 사츠마 번
4.3.1. 향중(鄕中)의 동무들4.3.2. 사츠마번 가신4.3.3. 사츠마 시마즈4.3.4. 사학교당4.3.5. 사츠마 사람들4.3.6. 아마미 오시마4.3.7. 오키노에라부
4.4. 조슈 번4.5. 토사 번4.6. 기타 제번4.7. 도쿠가와 막부4.8. 조정4.9. 메이지 신정부4.10. 에도4.11. 교토
5. 방영 목록 및 시청률6. OST7. 평가8. 기타
8.1. 캐스팅8.2. 정한론자8.3.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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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1986년도 나오키상을 수상한 중견 여류작가 하야시 마리코의 소설 <세고돈!(西郷どん!)>이 그 원작으로, 메이지 유신의 150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날 유신삼걸로 일컫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애를 다루는 드라마. 1990년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翔ぶが如く) 이후로 28년만이며, 사이고 다카모리 중심의 대하드라마로써는 두 번째이자 단독 주인공으로는 처녀작이 된다.[3] 그의 좌우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중심으로 사랑이 넘치는 리더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 될 예정이다. 여담으로 막부 말기의 주요 웅번[4]을 배경으로 한 대하 드라마가 2010년대에만 무려 4편이 촬영되었다.[5] 극본은 파견의 품격 하나코와 앤을 쓴 나카조노 미호가 담당했다. 작가의 영향인지 스즈키 료헤이, 쿠로키 하루, 타카나시 린, 마치다 케이타, 이시바시 렌지, 후지모토 타카히로 등 하나코와 앤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겹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제목인 '세고돈'은 '사이고 님'이라는 뜻의 사쓰마 사투리이다. 가고시마에서 상(さん)이라는 단어를 연상이 연하를 지칭할 때 쓰는 가고시마 사투리이며, 출처는 가고시마 출신 배우 사코다 타카야의 사츠마말 강좌(세고돈 NHK 공식 홈페이지)에서 언급된 부분이다.[6]

원작소설의 경우 연재는 2016년이고 출판은 2017년 11월일 정도로 매우 따끈따끈한 신작인데, 그닥 큰 인기가 있던 것도 아닌데다가 한국 입장에선 주인공 자체가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작가 자신도, 엄밀히 말해 조금 유행이 지난 해외에 알려지지 않은 대중소설가인데다 역사소설 집필도 극소수이기 때문에, 이 작품이 외국 역사소설 유통에 영 관심이 없는 한국에 번역되어 출판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듯.

1990년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의 오마주를 표방하는 작품이다. 양대 주인공인 니시다 토시유키와 카가 타케시가 각자의 역할로 출연하는가 하면, 나는 듯이의 출연 배우들도 등장해 극중 무게감을 더한다. 사이고 이토 역의 쿠로키 하루는 다나카 유코를 닮은 외모로 화제가 되었으며 그 밖에 사이고와 오쿠보의 우정씬 등 나는 듯이를 의식한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원훈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애를 그리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관동 평균 시청률에서 고전하고 있다.[7] 반면 관서 평균 시청률에서는 상당히 고시청률로 집계되는 현상[8]이 보이고 있어 극히 이례적이다.[9] 자세한 내용은 기타 문단 참조.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 서남전쟁 전후까지를 다루고 있다.

2. 마케팅

파일:segodonposter.jpg
공식 포스터
제작 발표회

3. 구성

<세고돈>은 총 47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5편으로 분류하여 줄거리를 진행하고 있다.

3.1. 특집 프로그램

올해부터 대하드라마를 47회로 축소, 남은 3회는 특집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4.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news-180209.jpg 파일:news-180506.jpg
제 1,2장 제 3장
파일:news-180711.jpg 파일:DnWFmHIVAAAhuS.jpg
제 4장 최종장

4.1. 다카모리와 가족들

파일:39-saigo_takamori.jpg
배역명 / 배우
사이고 다카모리
(西郷隆盛)

(유소년: 와타나베 아오 분)
( 스즈키 료헤이 분)
본작의 주인공.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불리는 인물. 통칭은 키치노스케(吉之助)이며 호는 난슈(南洲). 1828년에 하급 무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코키치(小吉). 타고난 인품 덕분에 남녀 가리지 않고 항상 주변에 사람이 모여 든다.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 싸움에서 오른쪽 어깨에 칼을 맞아 막대기를 치켜들 수 없게 되자 검술을 포기하는 대신 학문에 전념했고 무술은 스모로 대신했다.[11][12] 어렸을 때부터 백성들이 배불리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들고싶다는 꿈을 키운다. 겐푸쿠(元服)를 치르고 니세카시라(二才頭部, 젊은 사쓰마 무사들의 우두머리)가 된 사이고는 군방서역보조[13] 임무를 맡으면서 가까이서 지켜본 백성의 고충을 건백서로 써 나리아키라에게 보낸다. 마찬가지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는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어 니와카타(庭方)[14], 카치메츠케(徒目付)[15] 등을 역임한다. 니와카타 시절의 사이고는 주군 나리아키라와 함께 요시노부를 차기 쇼군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토의 고노에 가문이나 하시모토 사나이같은 히토츠바시 파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우군인 아베 마사히로의 죽음과 이이 나오스케의 계략으로 이에모치가 쇼군이 되면서 그동안의 정치 공작은 실패, 사이고는 나리아키라와 교토로 출병하여 조정을 등에 업어 막부를 압박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나리아키라가 급사하면서 출병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고, 히토츠바시 파가 몰락하며 수배자가 된 사이고는 겟쇼와 망명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함께 바다에 투신한다. 구출된 사이고는 키쿠치 겐고(菊池源吾)[16]로 개명하고 아마미 오시마에 3년간 유배된다.[17] 아마미오시마에서 사츠마번의 수탈에 저항하며 섬 주민들을 보호한다.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로 인한 정국 변화, 오쿠보의 노력 등 어렵사리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히사미츠와 대립 끝에 2달도 안돼서 다시 2년 동안 섬에 유배된다. 유배 중에 영양실조와 풍토병 등으로 삶의 경계선에 놓였지만 구사일생하였고, 남은 유배 생활 동안 감옥 안에서 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좌우명인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을 구축한다.

두번째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이고는 군부역(軍賦役)[18]을 맡는다. 교토로 쳐들어 오는 조슈 번을 제압하고 금문의 변에서 맹위를 떨친 사이고는 요시노부가 추진하는 조슈 정벌을 앞두고 카츠 카이슈를 만나 도막(倒幕)[19]의 의지를 일깨운다. 요시노부의 생각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피해없이 조슈 정벌을 끝내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가 항복을 받아 그 공로로 번으로부터 측근(側役)[20]으로 임명받는다. 막부의 참근교대 부활[21]을 막기 위해 조정 공작의 비장의 카드로서 이와쿠라 도모미를 포섭하고, 사카모토 료마의 중개를 통해 삿쵸 동맹을 관철한다. 또한 프랑스의 협력을 받고 있는 막부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을 포섭하여 삿쵸의 후원자로 둔다. 가로(家老)로 승진한 사이고는 제후 회의를 통해 조슈 처분을 논의하려 했으나 요시노부의 공작으로 실패하고 마침내 정치적으로 막부를 타도하는 것을 단념, 무력으로 막부를 토벌할 것을 결의한다. 이와쿠라와의 공작으로 막부토벌을 명하는 가짜 칙령을 발포하는데 성공했으나 때마침 대정봉환이 결정되어 명분을 잃는다. 결국 신정부가 수립되는 12월 9일, 사쓰마를 중심으로 어소를 점거하고 메이지 천황이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언하게 만드는 무력 쿠데타를 실행한다.[22] 요시노부의 처분[23]을 둘러싸고 토사번의 야마우치 요도가 방해를 하자[24] 무력으로 협박하여 이를 제압하였고, 결과적으로 도막파가 신정부를 장악하는데 기여한다. 또한 낭인들을 고용하여 에도에서 폭동을 감행, 막부를 자극한다. 무진전쟁이 발발하고 사이고는 신정부군 총 참모장으로서 종군한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니시키노미하타를 이용하여 승리하고 요시노부는 에도로 도주한다. 사이고는 요시노부 토벌의 칙명을 받고 동정대총독부 도카이도 선봉 참모(東征大総督府東海道先鋒参謀)에 임명되어 에도로 진군한다. 진군 도중, 구 막부 측과 협상한 사이고는 총공격 전날에 카츠 카이슈와의 회담으로 에도성 총공격 중지를 합의, 에도 막부의 멸망을 이룩한다. 허나 창의대의 궐기로 시작해 아이즈 및 도호쿠의 거센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화된다.[25] 사이고는 창의대 토벌 후 도호쿠 전투의 지원군을 충원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동생 키치지로와 함께 증원군을 격전지로 보내었으나 동생이 총탄에 쓰러진다. 자신이 세운 신정부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동생을 포함한 수많은 사무라이를 죽음으로 내몬 슬픔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이고는 신정부의 직함을 반납, 상투를 자르고 은거한다.

메이지에 들어서면서 휘를 다카모리로 바꾸었다. 판적봉환으로 가고시마 번이 된 고향에서 참정(參政)을 맡던 사이고는 주도의 설득으로 폐번치현과 어친병(御親兵) 설립 등의 정치 개혁을 위해 마침내 가고시마 사족들을 이끌고 도쿄로 상경한다. 참의(參議)로 신정부에 복귀한 사이고는 곧바로 오쿠보와 힘을 합쳐 어친병의 설치와 폐번치현[26]을 밀어붙인다. 오쿠보가 구미 시찰을 떠나면서 부재중 정부의 필두로 우뚝선다. 사이고는 가장 먼저 궁정 개혁을 실시하고 메이지 덴노와 함께 전국을 순례하여 민심을 잡는다. 그리고 부현의 통폐합[27], 태양력의 채용, 징병제의 도입, 육군성 해군성의 설치, 기독교 금지령 철폐, 학제의 제정[28], 지조 개정 조례의 포고[29] 등 개혁을 추진한다. 모두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재중인 약 2년 사이에 일어난 개혁이었다. 1873년 6월, 대 조선 외교 문제를 놓고 강경론이 일어나자 사이고가 특명전권대사로 조선에 간다는 결정을 한다. 그러나 귀국한 오쿠보 파가 사이고의 계획을 저지하고 정한론 파를 실각시킨다. 사이고는 참의를 사직하고 가고시마로 귀향한다. 사이고를 뒤따라 300명 이상의 가고시마 출신 군인이 일제히 낙향하고, 가고시마 사족의 불만은 오쿠보 도시미치를 향한다. 사이고는 사족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사관 양성을 위한 사학교(私學敎)를 설립한다. 사학교당은 가고시마 사족의 총본산이 되었고 가고시마의 현정까지 장악하여 흡사 독립국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신정부는 가고시마 출신 경찰 21명을 귀향 명목으로 가고시마에 파견한다. 신정부는 암호를 사용하여 전보를 전달하여 사학교당의 동태를 감시했는데 사이고를 보즈(坊主[30])라고 불렀다. 사학교당은 전보의 내용을 입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ボウズヲシサツセヨ(보즈오시사츠세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래 뜻은 <까까머리를 시찰(視察:시사츠)하라> 라는 의미였다고 하나, 사학교당에서 <까까머리를 자살(刺殺:시사츠, 찔러 죽임)하라>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한다. 가고시마 사족은 마침내 폭발하여 정부군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과 대포를 빼앗아 무장한다. 사이고를 따라 낙향했던 간부들이 사이고에게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자, 사이고는 "도쿄로 가서 정부를 심문하여 나라를 바로 잡고 가고시마로 돌아간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1877년 2월 17일 약 1만 3천 명의 사족을 이끌고 육군 대장 신분으로 거병하면서 이른바 일본의 마지막 내전인 서남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이고의 거병 소식을 입수한 신정부는 정토령을 공포하며 사이고의 육군 대장 직위를 박탈한다.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버린 사이고는 마침내 무력항쟁을 결의, 구마모토에서 정부군과 공성전을 벌이며 타바루자카, 키치지 고개로 진군하는 신정부 응원군에 발도 돌격으로 맞서 싸웠으나 경시청 발도대 및 화력의 차이로 패주, 뒤에서 덮치는 충배군으로 인해 퇴각을 거듭했다. 반란을 우려한 신정부가 가고시마에 있는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 암스트롱 포 등의 신식 무기를 모두 오사카로 빼돌렸기 때문에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사쓰마 군은 시작부터 불리했고, 따라서 검을 쥐어본 적도 없는 신정부군을 상대로 발도 돌격으로 열세를 극복하려 했으나 사족들로 구성된 발도대의 등장으로 이마저 무색해진 것이다. 1만 3천의 군세는 어느새 4천 이하로 줄어들어 패색이 짙어지자 도쿄행을 단념하고 사쓰마 군의 해산을 선언한다. 사이고는 남은 342명과 고향 가고시마를 향해 산을 타고 225km를 이동한다.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가고시마 현 시로야마(城山)에 도착한 사쓰마 군은 가고시마의 관군을 습격하고 사학교 및 가고시마 시내를 점령했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9월 쯤에는 시로야마를 완전히 포위 당한다. 9월 23일, 신정부는 사이고에게 9월 24일 총공격 통보와 동시에 최후의 통첩을 날리지만 사이고는 대답하지 않는다. 9월 24일 약속대로 관군은 총공격을 실시했고 사이고 휘하 342명의 사쓰마 군은 장렬하게 산화한다.[31] 사이고의 죽음으로 서남전쟁은 종결되었고 사족들의 무력봉기도 사그라 들었다. 서남전쟁은 지금까지 일본의 마지막 내전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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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이고 키쿠지로
(西郷菊次郞)

(9~12세: 쇼 카이리 분)
(14세~:이마이 유키 분)
(교토시장:니시다 토시유키[32][33])
다카모리와 아이카나 사이에서 낳은 장남. 류 사민의 집에서 아이카나와 함께 살다가 9살에 사쓰마 본가에 거두어져 이토가 계모로서 직접 양육하게 된다. 12살에 미국에 유학을 떠나고 17살에 아버지와 함께 서남전쟁에 참전했으나 오른발에 총탄을 맞아 무릎을 절단하여 전열에서 이탈된 후 쿠마키치가 보살핀다. 쿠마키치는 키쿠지로를 등에 업고 달려가 사이고 주도에게 투항했고, 주도는 조카의 투항을 기쁘게 받아주었다. 전쟁 이후에는 외무성, 궁내성 등을 거쳐 청일전쟁 이후 대만 식민지의 신베이시 지청장, 이란현 장관을 역임했고, 귀국하여 6년 반동안 교토 시장의 임기를 수행하였다. 극중에서는 시장 취임식을 계기로 아버지와의 만남부터 아버지의 죽음까지의 시기를 회상한다.
파일:39-iwayama_ito.jpg
배역명 / 배우
이와야마 / 사이고 이토
(岩山 / 西郷糸)

(유소년기: 와타나베 코노미 분)
( 쿠로키 하루[34])
다카모리의 세번째 부인.[35] 서남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전사한지 21년 뒤, 1898년 우에노의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제막식에서 사이고 주도와 함께 참여한 이토의 외마디[36]와 함께 극의 시작을 알린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발이 빨라 묘엔지 참배[37]라는 사쓰마 번의 달리기 시합에서 1등을 차지했다.[38] 오랫동안 사이고를 사모했지만 집안의 결정을 따라 결국 에비하라 가문과 혼례를 올린다.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을 당하여 이와야마 본가에 내려가는데, 우여곡절 끝에 사이고와 재회하여 그의 세번째 아내가 된다. 실제로 둘의 결혼식에 코마츠 타테와키가 주례를 보았다고 전해지지만, 당시에 그는 교토에 있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훗날 아마미 오시마에 직접 건너가 아이카나로부터 키쿠지로를 맡는다.
파일:39-aikana.jpg
배역명 / 배우
아이카나
(愛加那)

( 니카이도 후미 분[39])
다카모리의 두번째 부인. 다카모리의 아마미 오시마 유배 당시에 만나 결혼했다. 이름의 카나(加那)는 아마미어로 '사랑하는 사람', '연인'을 의미하는데 섬에서는 기혼 여성에게 붙이는 이름이었다. 실제로 사이고가 그녀의 이름에 '愛'를 붙여주었다. 둘 사이에서 아들 사이고 키쿠지로와 딸 키쿠소(菊草)[40]를 낳는다. 실제 기록에서도 다카모리가 두 번째의 섬 유배형을 받고 도쿠노시마에 체류할 당시 아이카나와 재회했으며, 유배형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아마미 오시마에 정박해 두 사람은 다시 만났고 그 뒤로 생이별을 하였다. 아이카나는 훗날 키쿠지로를 사츠마로 보낸다.[41]
삼남이자 다카모리의 남동생. 통칭은 신고(信吾). 일본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육군 해군의 요직[43]을 모두 경험한 인물. 일본 해군 최초의 원수. 형 다카모리는 큰 사이고(大西郷), 주도는 작은 사이고(小西郷)라고 불렸다. 유신 이후 隆道라 쓰고 류도(음독)로 등록하려 했으나 구두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주도(従道)로 등록했다. 그러나 본인은 신경쓰지 않고 주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고 한다. 혈기왕성한 성격으로 아리마 신시치와 함께 교토로 상경하면서 등장하는데 당시 신고의 나이는 18세. 다카모리가 집을 자주 비웠던 탓에 사이가 소원했으나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관계를 회복한다. 테라다야 사건에 가담한 이유로 징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나이가 어린 탓에 근신형에 그쳤다. 오쿠보에 의해 근신이 해제되고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하여 수박 판매를 가장한 결사대에 자원했다. 귀환 명령을 받은 다카모리를 배웅하기 위해 오키노에라부로 직접 건너갔다. 동생 코헤에와 함께 군을 이끌고 상경해 금문의 변, 조슈 정벌, 무진전쟁에 종군한다.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전쟁의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주도'로 이름을 고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함께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다. 이때부터 주도는 가파른 출세길을 걷는데, 신정부는 서양 문화를 전면 개방하면서 서구화를 위해 힘썼고 유학 경험이 있는 주도의 지식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귀국하고 병부권대승(兵部権大丞)에 임명되어 정6위의 위계를 받았으며 이듬해 육군 소장으로 임명된다. 군 개혁, 폴리스 제도의 도입을 위해 진력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중앙 정계 복귀를 추진한다. 훗날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사이고와 사쓰마 출신 군인들이 하야했으나, 주도는 끝내 메이지 정부에 잔류한다. 서남전쟁이 발발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육군경 대리에 취임하여 정부를 지킨다. 전쟁이 끝나고 형을 이어서 근위대도독에 임명, 같은 해 말에는 육군경에 취임한다. 말년에 해군 원수 칭호를 받으며 총리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형 다카모리가 역적의 오명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파일:39-saigo_kohei.jpg
배역명 / 배우
사이고 코헤에
(西郷小兵衛)

(카미카와 슈사쿠 분)
사이고 집안의 사남. 사이고에게 매우 귀여움 받으며 자랐다. 성인이 된 후에는 무진전쟁에도 종군하여 최전방 1번대로서 에도 총공격을 맡는다. 서남전쟁에서는 사츠마군 1대대 1소대장으로 종군한다.
파일:26-saigo_kichijiro.jpg
배역명 / 배우
사이고 키치지로
(西郷吉二郞)

(유소년: 아라이 타케토 분)
(와타나베 고타 분)
사이고 집안의 차남이자 다카모리의 남동생. 다카모리가 참근교대 행렬로 집을 비우면서부터 가장 역할을 시작하여 늘 사이고의 집안을 지탱해왔다. 실제로 다카모리는 항상 키치지로를 집안의 가장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전쟁이 가까워지자 평생 자란 고향을 떠나 파수병 2번대에 배치되어 에치고 국에 출병, 세 형제와 함께 무진전쟁에 종군한다. 에치고 국 이가라시가와(五十嵐川) 부근에서 전투 도중 중상을 입고 전사한다.
파일:26-saigo_koto.jpg
배역명 / 배우
사이고 / 이치키 코토
(西郷 / 市来琴)

(유소년: 쿠리모토 유키 분)
(사쿠라바 나나미 분[44])
다카모리의 여동생.
파일:39-ichiki_sousuke.jpg
배역명 / 배우
이치키 소스케
(市来宗介)

(마에가와 유키 분)
다카모리의 여동생인 이치키 코토의 장남. 키쿠지로와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에는 요시노 개간사(吉野開墾社)와 사학교당의 지도자로 활동한다. 29살에 서남전쟁에 종군하여 시로야마(城山)까지 따라갔지만, 정부군에 체포되어 참수당한다.
파일:26-saigo_sono.jpg
배역명 / 배우
사이고 소노
(西郷園)

( 카시와기 유키[45])
키치지로의 아내.
파일:39-saigo_kiyo.jpg
배역명 / 배우
사이고 키요
(西郷淸)

(카미시라이시 모네 분)
주도의 아내.
파일:39-kumakichi.jpg
배역명 / 배우
쿠마키치
(熊吉)

(츠카지 무가 분)
사이고 집안의 하인. 다카모리가 태어 났을 때부터 그 성장을 지켜보며 평생을 사이고 집안에서 봉사하는 의리가 두터운 인물. 역사적 현장에서 다카모리와 동행하며 시중을 들었다. 서남전쟁에서 다카모리의 장남 키쿠지로를 구출한다. 다카모리 사후, 가와구치 셋포와 함께 다카모리의 가고시마 본가를 지탱하다가 도쿄로 상경해 사이고 주도의 저택에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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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카와구치 셋포
(川口雪篷)

(이시바시 렌지 분)
사츠마의 서예가. 다카모리가 오키노에라부에서 두 번째 유배 생활을 보내면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10년도 더 전에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섬겼지만 오유라 소동에 휘말려 섬에 유배된 몸이다. 섬에서 다카모리와 의기투합하였고, 훗날 사면되어 사츠마에 돌아온다. 하지만 유배 생활동안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카모리의 집에 식객으로 지낸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무덤에 있는 글귀는 셋포가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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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이고 키치베에
(西郷吉兵衛)

(카자마 모리오 분)
다카모리의 아버지. 키치베에는 통칭으로 본명은 다카모리(隆盛). 사실 본명에 대한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당시 메이지 정부 수립에 공헌한 사이고는 메이지 천황의 위계를 안게 되고, 메이지 정부는 서류에 사이고의 본명을 써야했다. 하지만 사이고가 하코다테 원정 중이었던 차에 연락이 닿지 않았고, 그의 친구 요시이 도모자네에 사이고의 본명을 물었다. 요시이는 사이고를 통칭인 "키치노스케"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본명을 좀처럼 생각 나지 않았지만, 겨우 기억해 '다카모리'라는 이름을 전했다. 그리하여 메이지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라고 서류를 작성했다. 사실 키치노스케의 본명은 다카나가(隆永)였는데, 훗날 귀경 후에 이 사실을 들은 다카모리는 아버지 이름을 계속 사용했고 호적에도 다카모리로 올렸다고 전해진다. 사이고 다카모리 2세 사이고 집안은 나리아키라를 지지했는데, 그 나리아키라 파의 중신이자 다카모리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아카야마 유키에에게 할복 명령이 떨어지고, 아카야마의 부탁에 의해 카이샤쿠를 맡는다. 다카모리의 할아버지 류에몬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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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이고 마사
(西郷満佐)

( 마츠자카 케이코[46])
다카모리의 어머니. 집안 내력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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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이고 류에몬
(西郷龍右衛門)

(오오무라 콘 분)
다카모리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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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이고 키미
(西郷きみ)

(미즈노 쿠미 분)
다카모리의 할머니. 말년에 다카모리를 키치베에로 착각하는 치매 증상을 보인다.

4.2. 도시미치와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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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유소년: 이시카와 타츠키 분)
( 에이타[47])
사이고 평생의 죽마고우이자 라이벌. 통칭은 쇼스케(正助) → 이치조(一蔵). 훗날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불리는 인물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최초의 내무경(内務卿)에 취임했다.[48] 사이고와 같이 하급 무사의 집안의 자제이지만 오쿠보 쪽이 조금 더 격이 높다. 사이고를 비롯한 향중(鄕中)의 동무들과 함께 아카야마 유키에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몸이 허약해 검술이 뒤쳐지는 대신 학문에 열중하여 마을 제일의 수재라고 불린다. 고향땅을 벗어나 더 넓은 무대로 가고싶어하는 등 야망이 있는 인물이다. 오유라 소동에 휘말려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은 근신형을 받았지만 나리아키라가 당주에 즉위하면서 기록소(記録所)의 오구라(御蔵) 역에 복직했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뒤, 오쿠보는 카치메츠케(徒目付)로 임명받고 히사미츠의 마음을 사기 위해 접근한다. 히사미츠를 보좌하는 위치로 성장한 오쿠보는 사이고를 귀환시킨다. 코마츠 타테와키와 함께 히사미츠 사천왕으로 성장했고, 이윽고 이치조(一蔵)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나마무기 사건이 터져 사쓰에이 전쟁이 가까워지자 오쿠보는 적극 개전을 주장한다. 사츠마 번은 증기선을 모두 잃고 민가가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대영제국을 쫓아내는 성과를 얻었고, 오쿠보는 두번째 유배를 간 사이고를 다시 소환시킨다.

공무합체 정치 기구인 산요 회의(参預会議)가 무산되고 조슈가 정국을 장악하는 가운데, 사이고의 힘이 절실한 오쿠보는 사이고를 교토로 부른다. 하지만 돌연 히사미츠가 사츠마로 돌아가면서 함께 내려갔다. 막부가 참근교대를 격년제로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사이고와 함께 다시 교토로 올라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접근해 조정 공작을 펼친다. 또한 뒤에서 히사미츠에 진언하여 번론을 도막으로 통합, 사이고에 힘을 보탠다. 2차 조슈 정벌의 칙명을 두고, 사쓰마 번은 조슈 정벌에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의롭지 않은 칙령은 칙령이 아니다"라는 서신을 제번에 퍼뜨리며 조정과 막부를 뒤흔든다. 이윽고 사이고와 함께 무력 토막을 결의, 조슈 번에 거병을 약속받고 막부토벌의 칙령을 받아냈으나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에 한 번 좌절한다. 신정부가 수립되는 12월 9일, 고고쇼 회의에 참여한 오쿠보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함께 요시노부를 신정부에서 배제시키는 것으로 의견을 일치시킨다.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는 사전에 준비했던 니시키노미하타를 이용해 신정부군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사이고가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도시미치는 신정부에서 천도를 건의하는 등 내부를 다진다. 이어서 유신의 공로자에 대한 논공행상, 판적봉환에 이은 급진개혁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반발을 낳자, 이를 잠재울 영향력을 가진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앙정계로 복귀시킨다. 사이고와 함께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고 폐번치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오쿠보는 불평등 조약의 해결 등을 위해 이와쿠라와 사절단을 편성해 구미 시찰을 다녀온다. 불평등 조약은 단 하나도 개정하지 못했으며, 부국강병을 이룩한 서양 열강을 직접 마주한 오쿠보는 두려움과 조급함을 느낀다. 귀국하자마자 내치우선을 앞세우며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저지한다.

사이고의 정한론파를 실각시킨 오쿠보는 정부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스스로 내무경에 취임,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국가의 중대사로 하는 오쿠보 독재체제의 서막을 알린다. 이에 불만을 품고 하야한 에토 신페이는 사가의 난을 일으켰으나 오쿠보가 직접 신정부군을 지휘하여 난을 진압하고 즉결심판으로 에토 신페이를 처형하여 효수시킨다. 에토의 효수로 사족들의 불만을 힘으로 잠재우려 했지만, 근대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야만적 행위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에토 신페이의 효수는 사족들을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사이고의 낙향과 동시에 가고시마에 밀정을 심어둔 오쿠보는 사이고가 사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사이고 주변인물이 반란을 부추길 것을 우려한다. 오쿠보는 21명의 사쓰마 출신 경찰을 밀정으로 보내면서 수시로 사학교의 동태를 전보로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반란의 불씨가 되어 서남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실제로도 오쿠보는 사이고의 거병 소식을 듣고 직접 만나러 가겠다고 했으나, 가면 목숨을 위협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신정부 중역들의 만류로 가지 못했다. 대신 오쿠보는 역도정토령을 내려, 사쓰마 군을 직접 진압하기에 이른다. 사이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오쿠보는 오열했다. 실제로도 오쿠보는 통곡하며 "자네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일본이 태어난다. 강한 일본이...(おはんの死と共に、新しか日本が生まれる。強か日本が……)"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서남전쟁 이후 오쿠보는 "나만큼 사이고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며 시게노 야스츠구에게 사이고 전기 집필을 요구했다. 그리고 8개월 뒤, 1878년 5월 14일 아카사카 임시 황궁으로 향하던 중 키요이자카에서 시마다 이치로 등 사족 일당에게 16군데의 자상 가운데 두부만 8곳을 찔리면서 절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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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쿠보 마스
(大久保満寿)

(미무라 리에 분)
오쿠보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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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유우
(ゆう)

(우치다 유키 분)
오쿠보의 첩. 이전에는 기온(祇園)[49] 게이샤 출신으로 다양한 무사들이 왕래하는 가게에서 오쿠보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진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첩이었던 실존 인물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오쿠보를 헌신적으로 지원하고 무진전쟁의 큰 전환점이 된 니시키노미하타를 꿰메기에 이른다. 유신 후, 오쿠보와 함께 도쿄에서 살며 達熊(타츠쿠마)라는 서자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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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쿠보 지에몬
(大久保次右衛門)

(히라타 미츠루 분[50])
오쿠보의 아버지. 오유라 소동에 휘말려 유배형을 받았다가 돌아와 오쿠보에게 가독을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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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쿠보 후쿠
(大久保福)

(후지마 리코 분)
오쿠보의 어머니.

4.3. 사츠마 번

4.3.1. 향중(鄕中)의 동무들

향중(鄕中)이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사츠마 고유의 교육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제도로서, 보이스카우트 비슷하게 각 동네 단위로 저년층 소년층 청년층으로 나이 또래끼리 남자 아이들이 모여서 어울리고 함께 무사(武士)가 지녀야 할 소양인 학문과 검술을 익히는 조직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6년 정변(1873년)으로 낙향해서 설립한 사학교(私學校)는 이런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을 근대식으로 발전시킨 학교 제도였다. 참고로 일본이 서양을 모방해서 소학교(훗날 국민학교로 개명했다가 다시 소학교로 되돌린) 교육 제도를 도입한 것은 같은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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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야마 츠나요시
(大山綱良)

(유소년기: 이누카이 나오키 분)
(키타무라 유키야 분)
옆동네인 고라이쵸(高麗町) 향중 출신. 통칭은 카쿠노스케(格之助). 어렸을 때에는 다카모리의 동네 패거리와 자주 싸웠으나 시간이 지나 같은 향중에서 수학하면서 친해졌다. 사츠마 번에서는 검의 달인으로 불려왔다. 시마즈 히사미츠의 상경에 동행하여 1862년에 아리마 신시치 등의 과격파 숙청에 중심적인 역할로 참가했는데, 특히 사이고 주도, 오야마 이와오 등을 투항시키는 공을 세웠다. 훗날 가고시마 현 첫 권령(현령)[51].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방식에 납득하지 못하여 오쿠보와 지속적으로 부딪힌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낙향하고 설립한 사학교 운동의 적극적인 후원자였고, 서남전쟁(1877년)에서는 사츠마 반란군에게 정부의 돈을 제공했다는 죄로 도쿄로 압송당해 재판을 받고 나가사키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이 현령 재직 시절에 현청에 보관되어 있던 사츠마 번 시대의 공문서를 '구습이 사라지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소각해버리는 병크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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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아리무라 슌사이 / 카이에다 노부요시
(有村俊斎 / 海江田信義)

(유소년기: 이케다 유토 분)
(타카하시 미츠오미 분[52])
오야마와 같은 고라이쵸(高麗町) 향중 소속. 소년기에는 머리를 빡빡 민 동자승으로 등장한다. 사츠마 번사로서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막내 지사에몬과 함께 참가한[53] 그의 동생 아리무라 유스케의 카이샤쿠를 맡았다. 이후 안세이의 대옥으로 체포되어 옥사한 쿠사카베 이소지(日下部伊三治)의 차녀인 마츠와 혼인을 맺었다. 원래 쿠사카베 가문을 잇기로 했던 동생 지사에몬을 위해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이름을 카이에다 노부요시(海江田信義)로 개명했다. 통칭은 타케지(武次). 카이에다는 쿠사카베의 옛 성씨였다. 카이에다는 이후에도 종종 아리무라 슌사이라는 이름도 함께 썼고 극중에서도 주변 인물들이 그냥 예전 이름으로 부른다. 다카모리가 이례적인 출세를 보이자, 질투심이 생겨 히사미츠에게 접근한다. 훗날 나라 현 관선 3대 현지사(県知事)를 거쳐, 시마즈 히사미츠를 보필하며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시마즈 히사미츠와 메이지 정부간의 중재 역할도 맡았다. 1906년(메이지 39년)에 사망했는데 향중의 동료들 중에서는 가장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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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무라타 신파치
(村田新八)

(유소년기: 카토 켄시로 분)
(호리이 아라타 분[54])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마을( 下加治屋町)의 향중 소속. 1836년생으로 동네 형님격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란 후배. 1862년에 사이고와 함께 번의 명령을 거역하고 양이파의 폭주를 막으려 갔다가 기카이 섬(喜界島)으로 유배 당했다. 사이고의 천거로 궁내대신을 역임(1871년)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에도 참가하는 등 장래가 촉망받는 수재였는데[55], 메이지 6년 정변(1873년)로 인해 다카모리가 낙향하자 오쿠보 도시미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따라 낙향하여 오쿠보는 망연자실했다.[56] 결국 서남전쟁(1877년)에 참전하여 사이고의 자결을 지켜봤고, 패전이 확실시 되자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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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아리마 신시치
(有馬新七)

(유소년기: 이자와 마사키 분[57])
(마스다 슈이치로 분[58])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마을의 향중이며 다카모리의 죽마고우. 문무를 겸비한 보기드문 인재로, 사츠마의 존황지사들이 교토로 상경하여 과격한 존황양이 운동을 계획하다가 명령을 받은 친구 오야마 츠나요시 등에 의해 무력숙청당한 테라다야 사건(1862)의 주인공.

4.3.2. 사츠마번 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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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코마츠 타테와키
(小松帯刀)
[59]
( 마치다 케이타 분)
28살에 사츠마의 가로(家老)[60]로 출세하며 재무, 외무,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다. 하급 무사들의 중용을 히사미츠에게 진언하여 사이고, 오쿠보 외에도 세츄구미의 인물들을 요직에 추천하였다. 사카모토 료마와도 친분이 있으며 삿쵸 동맹, 대정봉환 등 굵직한 사건 속에서 활약했다. 사쓰에이 전쟁 전후 사츠마와 대영 외교의 총 책임을 맡았고, 삿쵸 동맹의 실질적인 입안자였다. 사카모토 료마가 구상한 신정부 청사진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를 제치고 필두로 꼽혔다. 그러나 다리 통증부터 시작된 알 수 없는 합병증으로 1870년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그의 병세에 대해서 왼쪽 하복부에 종양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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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가츠라 히사타케
(桂 久武)

(이토다 쥰 분)
사츠마의 가로(家老). 아카야마 유키에의 동생으로 개명 전 이름은 시마즈 토시사다(島津歳貞). 아카야마가 세상을 떠나고 카츠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사이고와 친분이 매우 두터워 서신을 여러 번 주고 받았다. 1865년에 가로에 임명되어 사이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서남전쟁(1877년)에서는 사츠마군 거병에 참전, 사이고와 같은 날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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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나카무라 한지로 / 키리노 도시아키
(中村半次郞 / 桐野利秋)

(오노 타쿠로 분)
막말 3대 칼잡이 중 한 명인 나카무라 한지로(中村半次郞). 독학으로 검술을 연마해 처마의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동안 세 번을 베었다는 일화가 있다. 능력으로 사람을 등용하는 사이고에 심취하여, 사이고의 오른팔로서 사츠마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는다. 무진전쟁에서는 대 총독부 직속 군감에 임명되어 도카이도 선봉대를 이끌고 슨푸, 오다와라를 점령하였고 그 다음에는 아이즈-와카마쓰를 공략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쇼텐로쿠 200석을 하사받는다. 유신 후에는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로 개명하고 사이고와 함께 도쿄로 상경하여 일본 육군 최초의 소장이 된다.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사이고가 하야 하면서 뒤따라 낙향하여, 사이고가 세운 사학교당의 중심 인물로 자리 잡는다. 사이고 암살지령 사건을 계기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최고 지휘관으로 옹립하고 가고시마에서 거병한다. 사실 서남전쟁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위해 거병한 사족을 외면할 수 없어서 끌어안은 것이고 실질적인 전쟁은 키리노 도시아키가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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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카와지 토시요시
(川路利良)

(이즈미사와 유키 분)
일본 제국 경찰의 아버지이자 초대(初代) 대경시(大警視, 현 경시총감). 금문의 변에서는 조슈 번 유격대 총독의 키지마 마타베를 저격하여 쓰러뜨리는 공로를 세웠으며, 이후 다카모리의 총애를 받으며 무진전쟁에서 활약하였다. 프랑스 유학중에 폴리스 제도에 감명을 받아 일본에 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메이지 6년 정변으로 다카모리를 위시한 수많은 사쓰마 출신들이 하야 하자 "무사로서 참으로 참을 수 없지만, 국가 행정 활동은 하루라도 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어디까지나 경찰에 헌신하겠다"며 잔류한다.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밀정을 이용해 사족들의 동향을 감시하였고, 사쓰마 출신의 나카하라 나오오 등 24명의 경찰관을 '귀향' 명목으로 가고시마에 보내어 사쓰마 사족들의 거점인 사학교당의 이간 공작을 도모한다. 그러나 나카하라 일행은 사학교당 학생들에게 체포되었고, 가혹한 고문 끝에 카와지가 사이고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자백서[61]가 나오면서 사쓰마 사족 사이에서 오쿠보와 함께 증오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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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아카야마 유키에
(赤山靱負)

( 사와무라 잇키[62])
나리아키라의 최측근. 시마즈의 분가인 히오키 시마즈 출신으로 개명 전 이름은 시마즈 히사히로(島津久普). , 나리아키라를 차기 당주로 만들기 위해 분전한다. 사이고 집안은 다카모리의 아버지 키치베에가 아카야마 집안 밑에서 일하면서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고, 사이고에게는 선생님같은 존재. 오유라 소동에 휘말려 할복을 명받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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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야마다 타메히사
(山田為久)

(도쿠이 유 분)
나리아키라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실재 인물인 야마다 타메마사(山田為正)를 모티브로 만든 가공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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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즈쇼 히로사토
(調所広郷)

(류 라이타 분[63])
나리오키의 측근이자 사츠마의 가로. 오유라 소동 당시, 나리오키의 은거를 막기 위해 음독자살한다.

4.3.3. 사츠마 시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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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斉彬)

( 와타나베 켄 분[64])
시마즈 나리오키의 아들. 시마즈 28대 당주이자 사츠마노카미(薩摩守). 에도 막부 말기 4현후(四賢侯)[65]로 꼽힌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용했다. 참근교대 제도로 볼모 생활을 하느라 40살이 되도록 에도에서 자라서 사츠마 벤을 쓰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닮아서 서양문물을 좋아해 등장부터 화혼양재(和魂洋才)의 복식을 입었다.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아편 전쟁을 언급하며 서양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추었다. 당주가 되어서는 정적이었던 나리오키 파들을 포용하여 사츠마를 단결 시킨 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그 누구보다 서양 열강의 무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부국강병 정책이 잘 추진되었기 때문에 사쓰에이 전쟁에서 무승부로 끝날 수 있었다. 공무합체파로, 정치 일면에 나서기 위해서[66] 아베 마사히로에 접근하고, 히토츠바시 파에 접근하거나 아츠히메를 도쿠가와 쇼군의 정실로 보내는 등 많은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막강한 조력자인 아베 마사히로가 급사하고 정적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大老)에 취임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차기 쇼군을 승계받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5천의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할 준비를 한다.[67] 그를 위한 열병식에 참관 도중 원인불명의 병으로 쓰러져 며칠 뒤 사망했다. 현대의 분석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임종 직전에 히사미츠의 아들을 당주로 앉히고 히사미츠를 그의 후견인으로 임명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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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시마즈 히사미츠
(島津久光)

( 아오키 무네타카 분)
나리아키라의 이복 동생이자 오스미노카미(大隅守)이며 사츠마의 국부(國父).[68] 통칭 사부로(三郎). 사이고 다카모리와 평생의 앙숙. 코마츠 타테와키의 진언으로 오쿠보 도시미치 등 젊은 하급 무사들을 중용했다. 나리아키라의 사망 이후 히사미츠의 적자가 시마즈 29대 당주로 등극하고, 히사미츠는 당주의 후견인이자 국부로서 사츠마를 통치하면서 아마미 군도에서의 유배를 마치고 귀환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독대한다. 나리아키라의 의지를 잇겠다는 뜻을 가진 히사미츠는 나리아키라의 최측근이었던 사이고에게 자신의 원대한 꿈을 밝혔으나 되려 욕을 들은 히사미츠는 격노한다. 그리고 히사미츠는 사이고에게 시모노세키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사이고는 교토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양이파를 진정시키러 간다[69]는 구실로 히사미츠의 명령을 거역하고 시모노세키를 떠나 교토로 가버리자 히사미츠는 사이고 체포 명령을 내렸다. 사이고는 이내 오키노에라부로 유폐되어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히사미츠는 테라다야 사건 이후 조정의 신임을 얻어 요시노부의 사면 및 쇼군후견직,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정치총재직 등의 개혁안을 담은 칙서를 막부에 전달하여 이를 관철시켰고, 이 사건을 오늘날에는 분큐의 개혁(1862)이라 부른다. 그러나 무관무위(無官無位)였던 히사미츠는 요시노부에게 면전에서 무시를 당하여 둘 사이의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이후 나마무기 사건, 사쓰에이 전쟁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터졌고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탄원으로 마지못해 2년만인 1864년에 사이고를 귀환시킨다.[70] 다카모리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지만, 오쿠보의 영향으로 국사에 대해서는 가끔 손발이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67년에 조슈 번과 출병 협정을 맺기 전까지는 꾸준히 이복형인 나리아키라의 의지(意志)를 이어받아 사츠마가 주도하는 정국을 만들기 위해 공무합체(公武合体)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버지를 닮아 보수적인 면이 다소 있어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사이고와 오쿠보가 추진한 폐번치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뜻으로 밤새 폭죽을 발사했다. 뿐만 아니라 평생 죽을 때까지 상투를 자르지 않고 검도 계속 패용했다. 서남전쟁 당시에는 중립을 표방하며 사쿠라지마로 대피하였다. 최초로 개그 캐릭터의 히사미츠를 연기하고 있어 트위터 등지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귀엽다, 웃기다라는 평도 있는 반면 역대 대하드라마의 히사미츠와 비교해 지나치게 우둔하고 감정적인 캐릭터라는 평도 있다.[71][72] 시마즈 32대 당주 시마즈 노부히사도 이 캐릭터를 두고 "스스로 국부(國父)라 칭하는 꼴불견"이라며 쓴 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메이지편에 들어서면서 여전히 꼬장꼬장하지만 의상을 포함해 비교적 진중해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히사미츠는 시마즈 막부를 구상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이번 작에서 표현되지 않았다. 41화 마지막에 "새로운 국가란, 앞으로의 젊은이를 위해 있는 것이다."라는 대사를 남기면서 현지 트위터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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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시마즈 나리오키
(島津斉興)

(카가 타케시 분[73])
시마즈 27대 당주이자 오스미노카미(大隅守).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아버지. 나리아키라가 40세가 될 때까지도 은거를 하지 않고 있다. 서양 문물에 심취해있는 나리아키라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며, 둘째 히사미츠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완고하다. 그러나 나리아키라의 공작에 의해 측근인 즈쇼 히로사토가 음독 자살을 했고, 이에 단단히 화가난 나리오키는 오유라 소동을 일으켜 나리아키라 파의 많은 중신들을 제거하며 사츠마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역사대로 류큐 출병 거부, 밀무역 등으로 인해 막부의 눈 밖에 났고, 결국 막부로부터 차 도구를 하사 받으면서 사실상 은거를 종용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리오키는 전부 가로에게 죄를 떠넘기고 뻔뻔스럽게 은거하지 않고 버티자, 아카야마의 피묻은 옷이 담긴 사이고들의 탄원서를 들고 온 나리아키라가 미제 권총 1자루를 꺼내며 당주 자리를 건 내기를 제안했으나, 나리오키가 도중 포기하면서 은거를 결정했다. 극중에서는 암군처럼 안좋은 모습만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사츠마의 경제 개혁을 성공시켜 번의 재정을 풍족케 했던 공도 있었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뒤에는 다시 권력을 잡는다. 히사미츠가 나리아키라의 의지를 이어 교토로 출병하려는 것과 군비 강화를 철저히 금지시킨다. 친막부 성향의 나리오키는 막부의 눈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카모리를 아마미 오시마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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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유라
(由羅)

(코야나기 유미코 분)
시마즈 나리오키의 측실(첩). 히사미츠의 친모. 오유라 소동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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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키쿠
(喜久)

(토다 나호[74] 분)
나리아키라의 첩.

4.3.4. 사학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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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시노하라 구니모토
(篠原国幹)

(사카기 히데오 분)
다카모리와 같은 출생지인 시타가지야마치(下加治屋町)에서 자랐다. 우에노 전쟁에서의 용맹함으로 주목받았다. 1871년 어친병이 조직되면서 다카모리와 함께 상경해 육군 대령이 된다. 다카모리가 하야 하며 근위 장관직을 그만두고 가고시마로 돌아와 사학교 설립에 전력투구한다. 키리노 도시아키와 함께 서남전쟁에서 사츠마군을 지휘했으며, 서남전쟁의 격전지였던 키치지(吉次) 고개에서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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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벳푸 신스케
(別府晋介)

(시노하라 유신 분)
키리노 도시아키의 사촌. 무진전쟁에 종군했으며, 1871년 어친병이 조직되면서 육군 대위로 상경한다. 다카모리가 하야 하자 소령 계급을 반납하고 가고시마로 돌아가 키리노와 함께 사학교 설립에 힘을 쏟는다. 서남전쟁의 마지막 전장인 시로야마(城山)에서 다카모리의 카이샤쿠를 맡은 후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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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헨미 쥬로타
(辺見十郎太)

(모치나가 유호 분)
사쓰마한시(薩摩藩士) 출신으로 동북 전쟁에서 활약한다. 유신 후, 어친병의 근위 육군 대위로 상경한다. 1873년 황궁에 화재가 발생할 당시 신주쿠의 사창가에서 놀다가 동료에게 할복을 강요당했지만 다카모리가 구해준다. 서남전쟁의 시로야마(城山)에서 다카모리를 뒤따라 전사한다.

4.3.5. 사츠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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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나카하라 나오오
(中原尚雄)

(타노우에 코키치 분[75])
사쓰마한시(薩摩藩士) 출신으로 메이지 신정부의 경찰관이 된다. 서남전쟁의 계기를 만드는 인물. 카와지 토시요시의 허가를 받고 가고시마 출신 경시청 동료들 20 여명과 함께 귀향한다. 그러나 귀향은 표면적인 명목으로, 사실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학교당을 감시하라는 상부의 명령이었다. 그 배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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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스가
(須賀)

( 하시모토 아이 분)
다카모리의 첫번째 부인. 다카모리가 나리아키라를 따라 에도로 떠나면서 이혼한다. 극중에서는 다카모리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이혼하는 것으로 그려졌으나 실제로는 다카모리가 에도 체류 중에 이혼 통보를 받았다.

4.3.6. 아마미 오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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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류 사민
(龍 佐民)

( 에모토 아키라[76])
아이카나의 백부. 류큐에서 건너온 유서깊은 가로이자 호농으로 가로 사탕수수 재배부터 흑설탕 생산까지 다루고 있다. 그의 하인들은 그에게 있어 가족같은 존재로 여겨져 일절 소작료를 받지 않는다. 다카모리의 첫 아들에게 키쿠지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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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시 치요카네
(石 千代金)

(키우치 미도리 분)
류 사민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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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유타
(ユタ)

(아키야마 나츠코 분)
섬의 점술가로, 아이카나의 남편에 대한 예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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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토미켄
(富堅)

(타카하시 츠토무 분)
투마(아이카나)의 오빠. 사츠마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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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토 치요카네
(里 千代金)

(사토 안나 분[78])
토미켄의 아내. 메인 테마에서 노래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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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다나카 유노스케
(田中雄之介)

(콘도 요시마사[79])
아마미 오오시마의 대관(代官)[80]으로 부임한 사츠마 번사. 섬 주민에 대한 사츠마 번의 악정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작 인물. 충의라는 명목아래 흑설탕을 채취하는 섬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어 다카모리와 대립한다. 오쿠보의 편지에 의해 사이고 다카모리는 살아있고, 키쿠치 겐고가 바로 사이고였다는 사실을 듣고 더이상 그를 건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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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코바 덴나이
(木場伝内)

(타니다 아유미 분)
아마미 오오시마에 부임한 사츠마 번사. 오쿠보에게 키쿠치(사이고 다카모리)가 섬에 있는 동안 사츠마와의 연결고리를 이어주는 부탁을 받으면서, 키쿠치가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카모리의 인품에 반해 그의 섬 생활을 지원한다.

4.3.7. 오키노에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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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츠치모치 마사테루
(土持政照)

(사이토 요시키 분)
오키노에라부의 섬 관리인. 류큐 문화권에서 태어났지만 사츠마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사츠마 벤을 구사한다. 태풍과 영양실조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다카모리를 구출하여 가택 안의 감옥을 따로 만들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고, 훗날 다카모리와 의형제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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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츠치모치 츠루
(土持鶴)

(오오시마 요코 분)
마사테루의 어머니. 생사를 방황하는 사이고를 간호하고 아들과 함께 다카모리를 지원한다.

4.4. 조슈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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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카츠라 코고로 / 기도 다카요시
(桂 小五郎 / 木戸孝允)

(타마야마 테츠지 분)
조슈 양이파 지사들의 정치적 리더. 훗날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불리는 인물. 번교 명륜관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수학하였고 검술에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무사 수행으로 에도에서 체류하면서 페리 함대의 내항을 목격한다. 이후 진정한 양이를 실행하기 위해 서양의 기술과 학문에 광적으로 몰두한다. 8.18 정변으로 조슈가 실각하면서 신센구미에게 주요 타깃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된다. 다카모리와 함께 삿쵸 동맹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중추가 되어 폐번치현, 판적봉환 등을 단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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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하마노 켄타 분)
조슈 번사(長州藩士)이며 훗날 초대 일본 총리. 통칭은 슌스케(俊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조슈 3존으로 언급되는 인물. 쇼카손주쿠의 문하생으로, 요시다 쇼인의 추천으로 카츠라 코고로와 함께 상경에 동행하면서 카츠라를 수행한다. 쿠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함께 양이론자였다가, 이노우에 카오루와 함께 영국 유학을 수행하면서 압도적인 국력을 체험하고 도막 개국론자로 돌아섰다. 유신 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에 합류하면서 정치에서 차츰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유신 삼걸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토의 거침없는 독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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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무라 마스지로
(大村益次郎)

(하야시야 쇼조 분)
조슈 번의(藩医)이자 일본 육군의 아버지. 우메다 유사이에게 의학과 난학을 배우고, 오사카에서 오가타 고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후에 병학자(兵学者)가 되어 조슈 정벌 무진전쟁에서 조슈군을 지휘해 승리를 이끈다. 에도성 무혈 개성 이후, 우에노 관영사를 무단점거하고 있던 창의대(彰義隊, 쇼기타이)를 훌륭한 군략으로 토벌하며 신정부의 힘을 천하에 널리 알린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으로 오쿠보, 카츠라에 이어 신정부의 간부가 되지만, 군사 제도를 둘러싸고 오쿠보와 대립한다.

4.5. 토사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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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오구리 슌 분)[81]
토사 번의 탈번 낭인이자 사업가, 정치 논객, 무역회사 및 정치결사단체 해원대(海援隊)의 대장. 앙숙 관계였던 사츠마와 조슈의 삿쵸동맹을 중개하고 토사 번의 힘을 빌려 대정봉환을 이룩한 막말의 풍운아. 유신 지사에 가깝던 기존과는 다르게, 어디까지나 무기 상인의 입장으로 그려지고 있어 현지에서는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치 무대의 뒷편에서 상식을 깨는 행동력과 절충력으로 종횡무진한다. 카츠 카이슈의 제자로, 해군조련소에 몸을 담았으나 요시노부에 의해 조련소가 해체되고 갈 곳을 잃어 사이고의 중개로 사쓰마 번에 고용, 사쓰마의 지원을 받으며 해원대의 전신이 되는 가메야마 사츄(亀山社中)를 설립한다. 사쓰마의 무기와 조슈의 군량미를 교환하는 거래를 완수해 삿쵸 동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대정봉환을 통해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려는 료마는 사이고, 오쿠보 등 도막 세력에게 점점 방해가 되어간다.[82] 결국 1867년 11월 15일, 새로운 세상을 지켜보지 못한 채 정체모를 괴한들의 손에 운명을 달리한다. 헤이세이 시대의 역대 드라마에서 다루는 마지막 료마암살로 언론에서 작은 화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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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龍)

(미즈카와 아사미 분) [83]
료마의 부인. 안세이의 대옥에서 아버지를 잃고, 료마와 만나 결혼했다. 삿쵸동맹 이후, 료마가 막부로부터 습격을 당한 테라다야 사건(1866)에서는 오료의 재치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왼손을 부상당한 료마의 요양을 위해 함께 사츠마를 여행하는데, 이 것이 오늘날 일본 최초의 신혼 여행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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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나카오카 신타로
(中岡慎太郎)

(야마구치 쇼고 분) [84]
토사 번 출신의 낭인이자 무력 정치결사단체 육원대(陸援隊)의 대장. 사카모토 료마와 운명을 함께하는 라이벌이자 동지. 존왕양이 운동에 심취해, 탈번하여 조슈 번으로 망명한다. 금문의 변에서 조슈 측에 서서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다. 그 와중에 제번끼리의 유해무익한 싸움을 목격하며, 존왕양이 사상에서 제번 연합에 의한 무력 도막론으로 사상을 발전시켜 나간다. 사이고가 '절개의 선비'라며 인정한 인물이다.

4.6. 기타 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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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마츠다이라 슌가쿠
(松平春嶽)

(츠다 칸지 분)
후쿠이 번의 다이묘이자 막부 정치총재직. 에도 막부 말기 4현후(四賢侯)로 꼽힌다. 안세이의 대옥에 의해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함께 근신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사츠마의 시마즈 히사미츠가 교토에 직접 상경해서 근신중이던 요시노부와 마츠다이라 슌가쿠의 처벌을 풀어줄 것을 요구. 1862년에 요시노부와 함께 근신에서 풀려나면서 분큐의 개혁에 의해 막부의 정치총재직이 되었다. 이후, 토사 번의 대정봉환에 동참하였고 신정부의 의정(議定)에 임명되었다. 왕정복고 후 사쓰마의 막부 토벌 운동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막부와 조정을 설득하여 겐지(元治) 연호를 도입했으며, 메이지(明治) 연호를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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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하시모토 사나이
(橋本左内)

(카자마 슌스케 분)
후쿠이 번의(藩医). 뒤에서는 마츠다이라 슌가쿠를 위해 밀정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4대 쇼군 옹립 문제를 두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기 위해 다카모리와 함께 정치 공작을 펼치지만 실패하고, 안세이의 대옥으로 체포되고 참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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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松平容保)

(카시와바라 슈지 분[85])
제 9대 아이즈 번 다이묘이자 교토수호직. 아이즈의 가훈에 따라 끝까지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관철한다. 정치적 혼란 가운데 교토 수호직에 요청을 받는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취임했다. 처음에는 양이파와의 융화를 도모하는 온건 정책을 펼치지만, 곧 태도를 돌변해 강경주의로 돌아선다. 왕정복고와 무진전쟁을 거치면서 조적(朝敵)의 오명을 받으면서도 철저한 항전을 주장한다. 이는 결국 아이즈의 비극을 부르게 된다.

4.7. 도쿠가와 막부

4.7.1. 도쿠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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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히토츠바시 / 도쿠가와 요시노부
(一橋 / 徳川慶喜)

(마츠다 쇼타 분[86])
도쿠가와 막부 제 15대 정이대장군.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제9대 당주. 다카모리의 숙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래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력이나 지략에 있어서 뛰어난 중앙 정치의 거물. 픽션으로 히사마(ヒー様)[87]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 히토츠바시 파에 의해 차기 쇼군 후계자로 추존되는데, 실제로 요시노부는 이에 대해 "천하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귀찮은 일은 없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난색을 표한다. 이이 나오스케가 대로(大老)에 집권한 이후 천황의 윤허없이 날치기로 체결한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대하여 항의를 했다가 몇 년동안 칩거형을 받는다. 1861년에 시마즈 히사미츠가 추진한 분큐의 개혁으로 칩거형에서 해제되고 쇼군후견직(將軍後見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되려 사쓰마를 정치 일선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사쓰마가 도막으로 전향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요시노부는 막부 제1의 실권자로 거듭나는 동시에 존황 지사들의 암살 위협을 받기 시작해 주변의 모든 인물을 경계한다. 이윽고 요시노부의 가로인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郞)가 미토 번사들에게 암살당하자 도쿠가와 종가를 지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양이-친막부의 고메이 덴노를 등업고 궁중수위총독직(禁裏御守衛総督)에 임명되어 조정을 장악, 그 힘으로 조슈 정벌을 윤허받는다. 존황세력이 조슈를 다시 장악하자 요시노부는 참근교대를 부활시키려는 동시에 쇼군 이에모치를 상락시켜 2차 조슈 정벌의 윤허를 받아내려 하였고, 사쓰마 번은 이에 강하게 반발, 뒤에서 조슈 번과 밀약을 맺어 최신 무기, 군함을 제공하고 출병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였다. 제번의 반대를 무릅쓰고 효고 개항 등을 추진,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프랑스에 접근한다. 1867년, 요시노부는 도사 번의 건백서를 받아들여 천황에게 정권을 봉환한다. 요시노부는 오랫동안 정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조정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때 도쿠가와가 개입하여 신정부의 중심이 된다는 철저한 계산 끝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사쓰마의 무력 쿠데타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이고, 오쿠보, 이와쿠라의 계략에 의해 요시노부는 신정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구 막부세력 내부에서 전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조적(朝敵)이 될 수 없었던 요시노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니조성을 탈출, 오사카 성으로 퇴거한다. 그 사이 사쓰마 번이 에도에서 방화, 약탈 등을 일삼으며 요시노부를 도발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오사카 성에서 구미 공사들을 모아 일본의 대표는 여전히 도쿠가와임을 선언하며 조금씩 힘을 찾고 있었다. 허나 결국 쇼나이 번이 에도의 사쓰마 저택에 포격하고 불을 지름으로서 모든게 어긋났고, 요시노부는 15,000 대군을 이끌고 교토 출병을 결의하며 삿쵸 5,000 군세와 부딪힌다.

그러나 도바 후시미의 전투에서 니시키노미하타를 내세운 사쓰마의 계략으로 구 막부군은 처참하게 패하였으며, 처음부터 전쟁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다 조적(朝敵)[88]이 되면서 전의까지 상실한 요시노부는 수많은 가신을 뒤로하고 첩 오요시와 함께 전함을 타고 에도성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카츠 카이슈의 진언대로 우에노 관영사에서 근신하여 신정부에게 공순의 뜻을 취한다. 당초 신정부는 요시노부의 목을 취하는 것으로 전쟁의 목표를 잡았으나, 영국의 개입[89]과 더불어 에도무혈개성이 성사되어 근신형으로 그치고, 신병은 미토로 옮겨진다. 1869년 무진전쟁 종료 선언과 함께 근신이 해제된 요시노부는 슨푸(현재의 시즈오카)에서 거주하며 사냥, 낚시, 바둑, 사진 등 소소한 취미로 여생을 보내다가 30년만에 메이지 덴노를 알현하였고, 1913년(다이쇼 2년)에 사망하여 천수를 누렸다. 정작 그의 목숨을 취하고자 했던 유신 삼걸(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10년이 지나기 전에 모두 사망했다.

작중에서 유난히 천황을 알현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 요시노부는 천성부터 천황에게 약했다고 한다. 천황이 나서면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미토 번은 미토학의 영향으로 존황사상이 강한 지역이었고, 그의 친부 나리아키도 열렬한 존황양이론자였고 어머니가 천황가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고산케를 구상할 때, 미토 번은 천황가와 연결시켜 에도 막부가 망할 때를 대비해서 막부가 망하더라도 천황가의 편에 서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런데 미토 번 출신의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고, 역적으로 몰린 것은 요시노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마지막 쇼군이 미토 도쿠가와 출신이었으니 막부의 멸망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하지만 요시노부가 며칠 사이에 전쟁을 포기하고 스스로 은거에 들어간 것은 가훈때문이었는지, 내전을 빨리 끝내어 열강의 개입을 막기 위한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요시노부는 실제로 주변 사람들에게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며 일관된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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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후키 / 요시
(ふき / 芳)

( 타카나시 린 분)
요시노부의 실제 애첩이었던 요시(芳)를 모티브로 각색된 인물. 실제 인물은 신몬 타츠고로(新門辰五郎)의 딸이다. 작중에서 요시노부의 첩이 되기 이전의 설정들은 모두 픽션이고 후키라는 본명도 창작이다. 실제로 요시노부가 오사카에서 에도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우마지루시를 잃어버렸지만 애첩 요시는 동반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츠마의 가난한 농부 집안의 딸에서 에도의 게이샤를 거쳐 요시노부의 측실이 되었다. 2화에서 빚쟁이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사이고가 구해주려 했으나 결국 팔려갔다. 교토 등지를 떠돌다 에도의 이소다야에 정착하고 몇년 후, 에도에서 다카모리와 재회한다. 이후 요시노부의 측실로서 에도 퇴각까지 같이 동반했고, 전쟁 이후 요시노부와 시즈오카(슨푸)에서 여생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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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도쿠가와 나리아키
(徳川斉昭)

(이부 마사토 분) [90]
미토 번의 다이묘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버지. 고산케(御三家)이지만 쿠로후네 사건 때에는 양이를 외치며 이이 나오스케의 난키(南記)파와 대립한다. 결국 패배하여 은거당했고,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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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도쿠가와 이에사다
(徳川家定)

(마타요시 나오키 분)
도쿠가와 막부 제 13대 정이대장군이자 아츠히메의 남편. 역사적으로 뇌성마비의 증세를 보인다. 건강 문제로 오래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고 1858년 사망했다.

4.7.2. 막각·막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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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카츠 카이슈
(勝 海舟)

(엔도 켄이치 분)
막부의 군함봉행직. 광대한 지식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여러 나라의 지식을 젊은 지사들에게 전수했으며 그 중에서는 사카모토 료마도 포함되어있다. 나리아키라의 동지인 아베 마사히로에 의해 등용된 막신으로, 나리아키라와의 친분이 두터웠다. 막부의 각료이면서 다카모리에게 막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주장하며 다카모리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1차 조슈 정벌에서 출전을 거부하며 요시노부에 반항하다 꼬투리가 잡혀 해군조련소가 폐쇄되고 자신은 근신형을 받는다.[91] 요시노부와 자주 부딪히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요시노부로부터 열강의 개입을 막기위해 전쟁을 빠르게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듣고 감복, 요시노부의 구명을 위해 전력투구한다. 에도 총공격을 감행하려는 사이고와의 담판을 통해 에도 무혈 개성을 관철하여 주군의 목숨과 에도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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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야마오카 텟슈
(山岡鉄舟)

(후지모토 타카히로 분) [92]]
막신이자 막부 말기의 검호이며 카츠 카이슈, 다카하시 테이슈와 함께 막말 3슈(舟)로 유명하다. 에도무혈개성이 이루어지기까지 무대 뒷편에서 암약한 인물. 친구 키요카와 하치로와 함께 신센구미의 전신인 로시구미의 결성에 참가했다가 친구의 변절[93]로 막부로부터 근신을 받아 격동의 막말 무대에서 종적을 감춘다. 도바 후시미 전투가 발발하고 요시노부의 신변 경호역으로 복귀한다. 카츠 카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역사적인 회담 전에 사전 협상을 위한 사자로 임명되었다. 텟슈는 신정부군 사이를 당당하게 지나가며 "조적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하, 야마오카 테츠타로 지나가겠소."[94]라고 외쳤다. 다카모리와의 사전 협상에서 에도성 양도 이후, 요시노부의 신병을 히젠에 맡길 것인지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텟슈는 의견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카모리에게 "입장을 바꿔서 사이고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95]라고 말하여 다카모리를 진땀 흘리게 만들었다. 회담 이후, 다카모리는 텟슈를 두고 "돈도 필요없는, 명예도 필요없는, 목숨도 필요없는 사람은 다루기 곤란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면 천하의 위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96]라고 극찬하였다. 유신 이후, 사이고의 부탁으로 1872년부터 10년동안 메이지 덴노의 시종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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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이 나오스케
(井伊直弼)

(사노 시로 분[97])
히코네 번의 다이묘 겸 에도 막부의 다이로(大老)[98]. 도쿠가와 고산케에 못지 않는 위상을 자랑하며 막부의 요직을 꿰찼던 히코네 이이 가문[99] 출신 인물이며, 별명은 조상인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이이의 붉은 귀신(井伊の赤鬼). 히토츠바시 파와 대립 관계에 있는 난키(南紀) 파의 좌장이며 쿠로후네 사건 당시 전면적인 개국을 주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병약해 후계자 논의가 들끓자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내세웠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려는 도쿠가와 나리아키,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대립각을 세운다. 극중에서는 나리아키라를 암살하려 음식에 비소를 타는 모략을 벌인다. 정쟁에서 승리한 뒤, 이이는 천황의 윤허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강행하였고 상황이 이리되자 히토츠바시파는 천황의 권위를 빌어 이이 나오스케를 밀어내려했다. 고메이 덴노에게 상황을 알리자 고메이 덴노는 격노하여 막부에 의한 정치쇄신과 다이묘들의 결속을 명하는 무오의 비밀칙서를 미토번에 내리고 세력이 큰 다이묘들에게 사본을 보내게 했다.

비밀 칙서였음에도 불과하고 이 사실은 이이 나오스케도 알게 되어 큰 문제가 되었다. 천황이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막부를 무시하고 다이묘에게 직접 칙서를 내리는 경우는 막부 체제를 흔드는 전대미문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이 나오스케는 대대적인 조사와 심문을 시작했다. 고메이 덴노의 칙서의 배후에 미토 번이 있다는 측근의 진언에 따라 배후들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안세이의 대옥이 일어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마츠다이라 슌가쿠, 다테 무네나리, 야마우치 요도 등이 근신이나 은거 처분을 받고 하시모토 사나이, 요시다 쇼인 같은 존왕양이 지사들이 투옥되거나 참수당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또한 존왕양이론자로서 수배 대상이 되어 몇 년동안 성과 이름을 바꾼 채 머나먼 남쪽 섬에서 유배 생활을 보냈다. 이후 눈 내리는 사쿠라다 문 밖에서 미토 번의 가신들에게 암살당한다. 이이를 암살한 미토 번의 가신 중에는 아리무라 지사에몬이라는 사츠마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일개 하급무사가 아니었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비밀 정치결사인 세츄구미의 일원이자 아리무라 슌사이의 친동생으로 밝혀져 한 때 이 뒤에서 아츠히메가 암살을 지시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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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아베 마사히로
(阿部正弘)

(후지키 나오히토 분)
빈고 후쿠야마의 다이묘 겸 로쥬(老中). 구미 열강의 위협이 닥치자, 주변의 의견을 널리 수렴하여 도쿠가와 나리아키,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 신판, 도자마 다이묘와 협력해 막정개혁을 추진, 아츠히메의 혼사와 요시노부의 쇼군옹립 등을 추진한다. 누구보다 빨리 시류를 파악하는 균형있고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급사한다.

4.7.3. 오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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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아츠히메 / 텐쇼인
(篤姫 / 天璋院)

( 키타가와 케이코 분)
아명은 '一'(첫 번째 아이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카츠 또는 이치). 본명은 시마즈 아츠코(島津篤子)이며 아츠히메(篤姫)로 유명하다. 시마즈 가문의 분가인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문의 딸로,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로 들어가면서 스미코(敬子)에서 아츠코(篤子)[100]로 개명한다. 이후 고노에 다다히로의 양녀 신분으로 에도 막부의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3번째 정실이 되었을 때는 다시 스미코로 개명한다. 이에사다 사후에는 오오쿠의 역대 미다이도코로와 측실들이 그랬듯 불가에 귀의하고 텐쇼인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다카모리와의 인연은 에도 무혈 개성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로는 오오쿠 NHK 대하드라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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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쿠시마
(幾島)

( 미나미노 요코) [101]
나리아키라와 친분이 깊은 공가인 고노에 타다히로로부터 사츠마로 파견된 아츠히메의 노녀(老女). 텐쇼인이 도쿠가와 가문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결의를 들으며 사츠마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자신이 방해 될 것을 우려하여 은퇴를 선언하고 오오쿠를 떠났다. 에도성 총공격을 앞두고 재등장하여 다카모리와 텐쇼인의 만남을 중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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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혼쥬인
(本寿院)

(이즈미 핀코 분)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생모. 이에사다 이후의 후계자 문제로 아츠히메와 대립했다.

4.8.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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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

(쇼후쿠테 츠루베 분)
일본의 공가(公家) 귀족, 정치인.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유명하다. 하급 귀족 집안 출신.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혼례 등을 주선하는 공무합체파의 선두주자로 주목받았으나 존왕양이 파에 의해 실각하고 이와쿠라 마을에 은거한다. 이때, 이와쿠라의 정치력을 주목한 사츠마 번이 접근했고, 이와쿠라는 사츠마와 손을 잡으며 도막파로 전향하여 막부토벌의 칙서, 왕정복고의 쿠데타 등을 실현시킨 책략가로 거듭난다. 냉철한 안목[102]과 대담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는 걸물로, 이와쿠라 없이는 메이지 유신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일선에 나서기 싫어하고 늘 막후에서 활약했던 인물로 막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천황의 이름으로 거짓 칙서를 남발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때문에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이자 음험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취급되기도 한다. 고메이 덴노 독살설에 그가 연루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대신, 외무경 등을 역임하여 정부의 필두로 자리잡았다. 메이지 6년의 정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를 비롯한 내치파의 수장으로서, 정한파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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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고노에 다다히로
(近衛忠熙)

(쿠니히로 토미유키 분)
공가(公家) 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을 승계한 고노에 가문의 당주. 아츠히메의 형식적 양아버지이다. 사츠마 번에 있어 고노에 가문은 조정 정치 공작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히토츠바시 파로 나리아키라와 함께 요시노부의 쇼군 옹립을 도모하지만, 이이 나오스케에 의한 안세이의 대옥으로 처분을 받고 실각한다. 이이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서 암살된 후, 히사미츠는 다다히로를 조정에 복귀시키지만, 정세는 공무합체에서 도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4.9. 메이지 신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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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메이지 덴노
(明治天皇)

(노무라 만노죠 분[103])
고메이 덴노의 황자. 고메이 덴노 붕어 이후, 만 14세에 왕위를 잇는다. 이와쿠라 도모미 일당에 의해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공포되면서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가 구축되는 가운데, 도쿄로 황궁을 옮겨 근대 국가의 군주가 된다. 서남전쟁 이후 다카모리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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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산조 사네토미
(三条実美)

(노무라 만조 분[104])
존황양이 파의 공경으로 조슈번을 등에 업고 활약했지만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정에서 쫓겨나 조슈로 망명한다. 그리고 1차 조슈 정벌이 터지자 후쿠오카로 망명해 3년동안 유폐된다. 1867년 왕정복고를 계기로 정치 무대에 복귀했으며, 신정부의 부총재, 우대신, 태정대신 등을 역임했다. 정한론 논쟁에서 정부내 세력 싸움의 희생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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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県有朋)

(무라카미 신고 분[105])
조슈번사 출신. 쇼카 손주쿠의 문하생.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조슈 3존으로 언급되는 인물.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奇兵隊) 창설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유신 후, 사이고 주도와 함께 유럽 유학을 떠나 각국의 군사 제도를 시찰한다. 육군대보(陸軍大輔)로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협력을 얻어 징병제의 도입과 육군성과 해군성의 설치 등 군제 개혁에 종사하지만 야마시로야 사건[106]의 혐의를 받고 사직한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의 정치비리 사건이었다. 복직 후, 서남전쟁에서 신정부군의 총사령관을 맡는다. 시로야마 총공격 전에 "이 명분없는 거병은 사이고의 뜻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폭주가 아닐까"하며 더이상 의미없는 희생을 내지말고 다카모리의 자결을 권유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카모리의 시신을 직접 검시한 야마가타는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다카모리의 뒤를 이어 일본 육군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계까지 장악해 일본 군벌의 조상이라는 별명과 함께 흑막으로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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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노우에 카오루
(井上 馨)

(오시나리 슈고 분)
조슈번사 출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함께 조슈 3존으로 언급되는 인물. 존황양이론자였지만 개국파로 전향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에 밀항한다. 유신 후, 대장대보(大蔵大輔)에 종사했으며 이와쿠라 사절단의 공백 속에 정부를 지키며 사실상 대장성의 장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각 성에서 불만이 폭발하여 사직에 몰린다. 이후 정계에 복귀하여 요직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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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이타가키 다이스케
(板垣退助)

(시부카와 키요히코 분[107])
도사 번 상급무사 출신. 정한론자로서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와 함께 한국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가장 많은 인물. 야마우치 요도의 친(親) 요시노부 행보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삿쵸군에 가세하여, 무력 토막 운동의 핵심인 무진전쟁에서 곤도 이사미를 격퇴하는 등 승승장구한다.[108] 유신 후에는 참의(參議)로 신정부에 출사하였다. 조선 출병을 바탕으로 하는 과격한 정한론을 주장하지만 구미 시찰에서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반대에 부딪히며 다카모리와 함께 하야한다. 이후 의회 정치를 목표로 자유민권운동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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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고토 쇼지로
(後藤象二郎)

(세가와 료 분)
토사 번 참정(參政). 사카모토 료마와 협력하여 대정봉환을 이끌었으며, 메이지 정부의 참의(参議)로 참가한다.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사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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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에토 신페이
(江藤新平)

(사코다 타카야 분[109])
사가번사 출신. 유신십걸[110], 사가의 칠현인[111]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사가번사 시절, 번의 서양식 포술과 무역을 담당하는 직책에 있었는데 사가 번에서는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식 화포를 만들었고, 당시 최신식 무기 암스트롱포도 제작하고 있었다. 암스트롱포는 무진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에도→도쿄의 개명을 건의하였다. 유신 후에는 사법경[112]과 참의를 겸임하였다. 부재중 정부를 지키며 사이고 다카모리와 뜻을 함께하다가, 오쿠보 도시미치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하야한다. 사가로 낙향하여 사족들과 함께 사가의 난을 일으킨다. 결국 신정부군에 진압당하고 전장에서 도망쳐서 은신하던 중 체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토는 사법경 시절 자신이 확립한 사진수배 제도에 의해 체포된 첫번째 케이스였다. 4월 13일 사형선고를 받고 당일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머리는 효수되었지만, 이는 에토가 재직시절 금지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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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오노 히데유키 분[113])
사가번사 출신. 사가의 칠현인[114]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난학을 통해 번교 홍도관과 영어학원 치원관에서 교수를 맡고 있다. 존황양이파로서 각지 유신지사와의 교류를 하였고, 유신 후에는 신정부의 중역으로 출사한다. 외교-금융-행정, 식산 흥업 등의 분야에서 수완을 발휘했으며, 훗날 총리가 되었고 와세다대학의 창시자로 이름을 남긴다.

4.10. 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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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타마
(玉)

(다나카 미치코 분) [115]
후키의 동료.

4.11.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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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겟쇼
(月照)

(오노에 키쿠노스케 분[116])
존황양이 사상의 기요미즈데라 죠쥬인의 주지 스님. 고노에 타다히로와 함께 교토에서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옹립하는데 힘을 쏟았지만 실패하며 사이고와 함께 움직인다. 에도 막부 말기 존황양이 파로 암암리에 활동하다가 탄압을 피해 사츠마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막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사세구를 남기며 함께 행동하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차가운 겨울 바다에 투신했다. 사이고는 가까스로 구출되어 살아남았으나 겟쇼는 고령으로 인해 겨울 바다를 견딜 수 없는 체력인지라 그대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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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역명 / 배우
토라
(虎)

( 콘도 하루나[117])
사츠마 번의 숙소인 카기야의 점원. 다카모리를 매우 좋아한다.

5. 방영 목록 및 시청률

회차 방영일자 부제 시청률
제1장. 사츠마 편
제 1회 2018년 1월 7일 사츠마의 겁쟁이
(薩摩のやっせんぼ)
15.4%
제 2회 2018년 1월 14일 훌륭한 사무라이
(立派なお侍)
15.4%
제 3회 2018년 1월 21일 어린이는 나라의 보물
(子どもは国の宝)
14.2%
제 4회 2018년 1월 28일 새로운 번주
(新しき藩主)
14.8%
제 5회 2018년 2월 4일 스모다! 스모!
(相撲じゃ!相撲じゃ!)
15.5%
제 6회 2018년 2월 11일 수수께끼의 표류자
(謎の漂流者)
15.1%
제 7회 2018년 2월 18일 등 뒤의 어머니
(背中の母)
14.3%
제 8회 2018년 2월 25일 불길한 며느리
(不吉な嫁)
14.2%
제 1장 평균 시청률 14.86%
제2장. 에도 편
제 9회 2018년 3월 4일 에도의 히사마
(江戸のヒー様)
14.8%
제 10회 2018년 3월 11일 아츠히메께서는 어디로
(篤姫はどこへ)
14.4%
제 11회 2018년 3월 18일 나리아키라 암살
(斉彬暗殺)
14.6%
제 12회 2018년 3월 25일 운이 좋은 공주님
(運の強き姫君)
14.1%
제 13회 2018년 4월 8일[118] 변함없는 친구
(変わらない友)
13.0%
제 14회 2018년 4월 15일 요시노부의 진심
(慶喜の本気)
11.9%
제 15회 2018년 4월 22일 주군의 죽음
(殿の死)
13.4%
제 16회 2018년 4월 29일 나리아키라의 유언
(斉彬の遺言)
11.1%
제 17회 2018년 5월 6일 사이고 입수
(西郷入水)
12.0%
제 2장 평균 시청률 13.25%
제3장. 섬 편
제 18회 2018년 5월 13일 유배인 키쿠치 겐고
(流人 菊池源吾)
14.4%
제 19회 2018년 5월 20일 아이카나
(愛加那)
13.7%
제 20회 2018년 5월 27일 쇼스케의 검은 돌
(正助の黒い石)
12.2%
제 21회 2018년 6월 3일 이별의 노래
(別れの唄)
12.0%
제 22회 2018년 6월 10일 위대한 형, 시골뜨기 동생
(偉大な兄 地ごろな弟)
13.4%
제 23회 2018년 6월 17일 테라다야 소동
(寺田屋騒動)
13.4%
제 24회 2018년 6월 24일 땅 끝에서
(地の果てにて)
12.2%
제 25회 2018년 7월 1일 되살아난 생명
(生かされた命)
12.7%
제 3장 평균 시청률 13%
제4장. 혁명 편
제 26회 2018년 7월 15일[119] 사이고, 교토로
(西郷, 京へ)
12.2%
제 27회 2018년 7월 22일 금문의 변
(禁門の変)
12.0%
제 28회 2018년 7월 29일 카츠와 료마
(勝と龍馬)
11.1%
제 29회 2018년 8월 5일 세 번째 결혼
(三度目の結婚)
11.6%
제 30회 2018년 8월 12일 괴인 이와쿠라 도모미
(怪人 岩倉具視)
10.3%
제 31회 2018년 8월 19일 료마와의 약속
(龍馬との約束)
11.0%
제 32회 2018년 8월 26일 삿초 동맹
(薩長同盟)
10.4%
제 33회 2018년 9월 2일 이토의 맹세
(糸の誓い)
13.2%
제 34회 2018년 9월 9일 쇼군 요시노부
(将軍慶喜)
11.9%
제 35회 2018년 9월 16일 전쟁의 귀신
(戦の鬼)
11.7%
제 36회 2018년 9월 23일 요시노부의 목
(慶喜の首)
11.0%
제 37회 2018년 10월 7일[120] 에도무혈개성
(江戸無血開城)
9.9%
제 38회 2018년 10월 14일 상처 투성이의 유신
(傷だらけの維新)
10.2%
제 4장 평균 시청률 11.26%
최종장. 메이지 편
제 39회 2018년 10월 21일 아버지, 사이고 다카모리
(父, 西郷隆盛)
12.3%
제 40회 2018년 10월 28일 파란의 신정부
(波乱の新政府)
11.7%
제 41회 2018년 11월 4일 새로운 국가로
(新しき国へ)
11.8%
제 42회 2018년 11월 11일 양웅격돌
(両雄激突)
11.3%
제 43회 2018년 11월 18일 안녕, 도쿄
(さらば、東京)
11.6%
제 44회 2018년 11월 25일 사족들의 동란
(士族たちの動乱)
12.4%
제 45회 2018년 12월 2일 사이고, 일어서다
(西郷立つ)
11.5%
제 46회 2018년 12월 9일 서남전쟁
(西南戦争)
11.4%
최종회 2018년 12월 16일 경천애인
(敬天愛人)
13.8%
최종장 평균 시청률 12.0%
전체 평균 시청률 12.7%
해당 자료는 일본 간토 지방의 TV 시청률 기준입니다.

6. OST

오프닝 음악
후우키 하루미(富貴晴美) - 세고돈 -메인 테마- (西郷どん -メインテーマ-) (LIVE)

7.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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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3.8 / 5.0



||<tablealign=center><tablewidth=480><table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ff0558><bgcolor=#ff0558> 파일:왓챠피디아 로고 화이트.svg ||
별점 3.3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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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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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8.2 / 10


8. 기타

8.1. 캐스팅

8.2. 정한론자

주인공인 사이고 다카모리 항목을 가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정한론자로 인정 받은 빼도박도 못할 정한론이다. 심지어 이 사람의 생애 후반 행적은 정한론을 주창하다가 자멸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당연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선 이 사람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다. 다른 NHK 대하드라마에서 자주 쓰는 배경인 센고쿠 시대와 겹치는 임진왜란은, 무려 400여 년 전의 일인데다가 이미 마무리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서 일본에서 함부로 창작물의 소재로 쓰기 힘들 정도다.[124] 그런데 그 임진왜란보다 더한 영향력을 끼치는 게 바로 이 정한론과 이어지는 일제강점기이다. 물론 역사적 팩트인만큼 묘사못할건 없지만, 어떻게 묘사하냐가 문제.

일단 일본의 다수 견해는 '막부 말의 위인이 생애 마지막에 잘못된 판단을 내려 자멸했다' 정도이다. 그동안 NHK의 태도를 볼때, 결국 이 드라마도 이런 해석을 따를 확률이 높고,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 사이고와 그 일파는 죽었지만 결국 몇년 뒤에 일본은 사이고의 계획과 완벽히 일치하진 않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냐고 누군가 반문하면 또 할말은 없다.

확실한건,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애 전반을 묘사하는데 있어 정한론은 생략 불가능한 건 분명하다. 이걸 빼먹으면 서남전쟁 자체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도저도 아닌 방법으로 그러나 이 사진이 스타일로 사이고 인생의 절정기인 메이지 유신이나 무진전쟁 때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사실 예전에 히데요시(1996)에서 써먹었던 적도 있다. 히데요시 인생의 최절정기에서 황금빛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마무리했다.[125] 따라서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장면은 고스란히 생략되었다. 하지만 메이지 편이 드라마 후반부에 구성됨으로써 정한론 문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참고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다룬 이전의 작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나는 듯이(1990)에는 정한론 논쟁은 주요 소재로 등장했고, 나는 듯이에서는 2부 9화 드라마의 프롤로그에서는 메이지 원년(元年)( 1868년)부터 시작한 조선과의 외교적 갈등과 정한론이 생긴 배경을 소개한다. 하지만 드라마 본편에서는 정작 정한론이 무엇인가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조선과의 외교 문제와 류큐를 둘러싼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 러시아와의 사할린에서 발생한 분쟁에서 무엇을 우선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사이고와 오쿠보가 갈라져 대립하는 계기가 된다.[126][127] 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 시찰 중일 때는 국가의 중대사는 결정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어기고 자신이 부재중일 때 이런 것을 결정한 사이고는 비겁하다고 따지자 사이고는 분노한다. 이 건을 계기로 사이고와 오쿠보는 대립하고 파벌 싸움( 메이지 6년 정변)이 일어났고,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는 정쟁(政爭)에서 지고, 참의직을 사퇴하고 낙향한다.

어쨌거나 한국인 중에 원작 소설을 읽어봤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탓에 이 드라마가 이 문제의 인물을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는 드라마가 마무리 되기 전까지 쉽지 않은 상태이다.

8.3. 그 외



[1] 당초 50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본사 기자 과로사 사건을 계기로 업무 개혁이 단행되어 본 작품부터 47부작으로 단축되었다. 나머지 3화분은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었다. [2] 노년의 사이고 키쿠지로 겸 내레이션 [3] 나는 듯이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공동 주인공이었다. [4] 아이즈, 사쓰마, 조슈, 도사 번 등 막부 말기 정국을 주도한 유력 번(藩)들을 뜻하는 역사 용어다. [5] 료마전, 야에의 벚꽃, 꽃 타오르다, 세고돈 [6] 사이고가 등장하는 작품들을 보면 주변 동료들이 다카모리보다 어리기 때문에 '세고돈'보다는 연하가 연상을 지칭하는 사-(さぁ)를 많이 붙여 부른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그런 구분이 모호해졌다. [7] 2010년대에 낮은 시청률을 보인 타이라노 키요모리, 꽃 타오르다 등은 비교적 듣보잡 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이지만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8] 특히 최저 시청률이 집계된 제 37화에서는 관동이 9.9% 집계되었고 관서가 14% 집계되었다. [9] 일본 현지에서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서일본 지역의 인물들이고 동일본 인물들은 패자로 그려지고 있어 관심도가 낮다는 분석이 있다. [10] 태풍 짜미로 인해 10월 14일에서 변경 [11] 어깨의 후유증은 몇년 후에는 완치됐다. [12] 실제로는 어깨가 아니라 팔꿈치를 베여서 검을 들 수 없었다. 참고로 이 상처는 실제로 서남전쟁때 발견된 사이고의 시신을 추측할 때 도움이 되었다. 당시 발견된 시신이 목은 없고 고환이 부풀어 있었는데 고환이 부푸는 것은 당시의 풍토병이라 그것만으로 사이고라 짐작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팔꿈치의 흉터를 보고 사이고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13] 농정 전반을 담당하고 연공 징수 등을 기록하는 업무. 높은 체력을 요하는 말단 직책이었다고 한다. [14] 상시 다이묘의 저택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역할 [15] 경호 및 밀정 [16] 사츠마 사이고 집안은 원래 구마모토 현 키쿠치 시를 뿌리로 두고 있다. 키쿠치 겐고라는 이름은 '나의 연고는 키쿠치'라는 의미이다. [17]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숙청 피바람이 불고 있어서 사츠마는 사이고를 어디론가 숨겨야만 했고 대신 이름을 바꾸고 유배를 보냈고 그동안 무덤까지 세워 죽은 사람 취급했다. [18] 오늘날의 사령관 [19] 막부를 타도하는 정치 사상. 토막(討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도막은 무력, 정치 등의 다양한 수단으로 막부를 타도하는 대범주이며 토막은 무력으로만 막부를 쓰러뜨리는 소범주이다. [20] 다이묘의 곁에서 시중드는 최측근 [21] 분큐의 개혁으로 인해 격년제에서 3년제으로 완화되었지만, 금문의 변을 계기로 다시 격년으로 번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막부의 위신은 예전같지 않아 사츠마 번을 비롯해 따르지 않는 번들이 많았고 어느샌가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대정봉환과 함께 참근교대는 폐지되었다. [22]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으로 정권을 반납했지만 정치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신정부의 내대신 직위에 있었다. 따라서 요시노부를 완전히 정치판에서 몰아내기 위해 먼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에 어소를 지키던 아이즈, 쿠와나 세력을 몰아내고 요시노부의 신정부 입성을 막아야만 했다. [23] 내대신 관직 반납, 도쿠가와 영지 반납 등 [24] 요도는 애시당초 오늘의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두어 공경들이 어린 폐하를 에워싸고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そもそも今日の事は一体何であるか。二、三の公家が幼沖なる天子を擁して陰謀を企てたものではないか,)라고 비판했다. [25] 이때 에도무혈개성의 조건 중 하나였던 막부 함대의 양도를 해군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거부, 에노모토는 막부 함대를 선동하여 동북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요시노부에 대한 처우가 부당할 경우 즉시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시나가와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다. 요시노부의 근신형이 확정되자 함대를 이끌고 도호쿠로 이동하여 구 막부군을 지원하고 최종적으로 에조( 홋카이도)로 북상한다. [26] 시마즈만이 유일하게 폐번치현에 반발했으나 당시 다이묘 가문은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빚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담없는 장기 상환으로 돌려주는 조건을 내미는 신정부의 폐번치현에 쌍수들고 반겼다. [27] 3부 72현으로 통폐합 [28]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의 설치 [29] 토지개혁 [30] 또는 까까머리(삭발)를 하고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초상화를 통해 익히 알려졌듯이 유신 이후 사이고는 삭발을 하고 있었다. [31]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고에게 자결을 권유하였으며 드라마에서도 자결 권유를 고려하는 장면까지는 연출되었으나, 사이고와 오쿠보의 우정을 강조하고 싶었던 엉터리 극본에 의해서 오쿠보가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내용이 각색되었다. 게다가 사이고는 최후의 돌격 당시에 허벅지와 복부에 총격 2방을 맞고 휘하 간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벳푸 신스케의 카이샤쿠 아래 할복을 하였으나 드라마에서는 이것마저 각색되었다.. 현지 트위터에서는 할복으로 죽지 않는 것이냐"는 식의 비판 트윗이 많았다. 많은 비판을 받은 끝에 총집편에서는 문제의 장면이 편집되었다. [32] 사이고 키쿠지로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원작과 동일하다. 드라마에서도 처음부터 사이고 키쿠지로의 시선으로 내레이션이 진행된다는 사실이 확정되었으나 니시다 토시유키에게만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이고 키쿠지로의 회상으로 내레이션이 진행될 계획이다. [33]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는 1990년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맡았다. [34] 스즈키 료헤이와는 천황의 요리사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스즈키 료헤이는 주인공의 형으로, 쿠로키 하루는 주인공의 아내로 각각 분했다. [35] 1843년생으로 드라마가 시작하는 1840년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 사이고 다카모리가 39살인 1865년에 결혼했다. 당시 이토는 23살로 사이고는 3번째 결혼이고 이토는 재혼이었다. 사이고는 1852년 28살 때 스가라는 여인(1832년생)과 첫 번째 결혼을 하고 이혼했는데, 첫 회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의 이토는 드라마상의 각색이다. [36] 실제 인물도 당시의 우에노 동상을 처음 보고는 비슷한 말(やどんしは、こげな人じゃなかったこて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모를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사이고는 예의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줄근한 유카타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라는 의견이 있다. 사이고의 동상을 두고, 처음에는 군복 차림으로 제막될 예정이었으나 반란 수괴를 군복 차림으로 만들 수 없다는 여론이 많아 현재의 동상으로 만들어졌다. [37] 시마즈의 퇴각을 기리며 묘엔지까지 20km를 달리는 오늘날의 마라톤과 같은 행사였다. [38] 여자는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로 분장하고 伊東(이토)라는 가명을 썼다. [39] 오키나와 출신의 배우 [40] 훗날 오야마 이와오의 동생의 아내가 된다. [41] 당시 섬 여자는 사츠마번사와 결혼해도 섬에서 나갈수 없는 제도가 있었다. [42] 여담으로 어머니가 아마미 오오시마 출신이다. [43] 육군경, 해군대신 [44] 가고시마 출신 [45] AKB48 Team B와 NGT48 Team NⅢ의 멤버로 가고시마 출신이자 가고시마 현 홍보대사 [46] 아츠히메에서 이쿠시마로 열연 [47] 에이타는 니가타 현 출신이지만 아버지, 할아버지가 가고시마 현 출신이며, 아츠히메에서는 같은 사츠마 번 출신의 코마츠 타테와키 역을 맡았다. 에이타의 선조 중에 나가야마(永山) 성씨의 인물이 서남전쟁에 정부군으로 종군했다고 한다. [48] 내무경은 1885년 내각제 출범 이후 내무대신으로 개칭돼서 오늘날 일본 정부 총무대신의 전신에 해당하지만, '내무경'이라는 명칭을 쓸 때에는 오늘날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 일본 최초의 총리로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내무경은 1885년 12월에 폐지되었고, 초대 '총리대신'은 이토 히로부미다. [49] 교토에서 게이샤로 유명한 지역. [50] 나는 듯이(1990)에서 조슈의 오무라 마스지로 역을 맡았다. [51] 현재의 현지사(県知事) 이전의 명칭이며, 원래 폐번치현을 단행하면서 첫 현령부터는 출신이 다른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가고시마 만은 그 원칙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례. [52] 굉굉전대 보우켄저 아카시 사토루를 맡았던 배우이며 스즈키 료헤이와는 아름다운 그대에게 ~이케멘 파라다이스~에서 함께 출연했다. [53] 20화에서 지사에몬이 히코네 번에게 당했다는 내레이션이 있었는데 현지에서는 사츠마에서 할복했다고 알고 있어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 위키피디아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문서에는 히코네 번사 오가와라 히데노죠(小河原秀之丞)에게 뒷통수를 베여 중상을 입고 할복, 구출되어 에도 막부의 와카도시요리 엔도 타네노리(遠藤胤統)의 저택으로 옮겨졌으나 곧 절명했다. [54] 여담으로 사이고 주도와 무라타 신파치는 5년 차이로 무라타 쪽이 연상이지만 실제 배우는 니시키도 료(84년), 호리이 아라타(92년)으로 니시키도가 8살 연상이다. [55] 일본 전국에서 사족들의 봉기(반란)가 일어난 후, 사이고 다카모리를 찾아와서 무력 궐기를 촉구하는 각 지방의 사무라이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했다. 무력 반란을 자제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메이지 정부와는 타협점을 찾자는 태도를 취했다. [56] 맹우 사이고의 낙향에도 불구하고 오쿠보는 무라타만 있으면 된다고 할 정도로 아꼈다. [57] JIN-진-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팥도너츠를 팔던 아이 역할을 맡았다. [58] 군사 칸베에에서 오오토모 요시무네 역으로 출연했다. 수하 가신인 요시히로 무네유키 역의 마토바 코지와 함께 10년에 걸쳐 아리마 신시치 배역을 소화했다. [59] 2008년 아츠히메에서 에이타가 코마츠 역을 맡았다. [60] 에도 시대의 가로란 가신의 최고 직위를 뜻했다. [61] 거짓 자백이라는 주장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서남전쟁 참조. [62] 가고시마 출신. 에이타와 마찬가지로 10년만에 사츠마 배경의 대하 드라마에 출연 [63] 나는 듯이(1990)에서 가와구치 셋포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양평이형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64] 2001년 호조 도키무네 이후로 17년만에 대하드라마 출연 [65] 번정 개혁에 성공해 막부 말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4명의 다이묘들을 일컫는다. 사츠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토사의 야마우치 요도, 우와지마의 다테 무네나리, 에치젠의 마츠다이라 슌가쿠 [66] 막부와 조정의 상호협력 하에 웅번의 다이묘들이 모여 정치를 꾸려나가는 제도. 쿠로후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제번의 다이묘들에게 '기탄없는 의견을 받겠다'며 공포한 아베 마사히로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막말의 사츠마가 항상 막부 개혁을 외치던 것이 바로 이 것이며, 이 것을 통하여 정치 일면에 나서려는 야망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류큐 지배, 밀무역, 군비 확장 등으로 근근히 힘을 길러 마침내 제번 중에서 제1의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사츠마였지만 도자마로서 일체 정치에 간섭할 자격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67] 아베 마사히로가 죽자 공경들과 연줄이 있던 사츠마는 교토로 눈을 돌려 조정의 힘을 빌어 막부를 개혁하고자 한다. 이 때부터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막부의 위상이 추락하는 현상이 맞물려 사츠마뿐 아니라 존황양이 성향의 조슈 번 및 수많은 지사들이 교토로 몰려들어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고, 그리하여 막부에서는 각지의 낭인들을 끌어 모아 신센구미를 설치하였다. 나중에는 에도에 있는 쇼군이 교토로 상경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예 교토 니죠성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훗날 사츠마는 제후회의에서 막부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예 막부를 무너뜨리고 조정을 중심으로 유력 제번들이 모여 정치를 꾸려 나가는 새로운 일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68] 다이묘로 즉위하지 않고, 현 다이묘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을 국부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자면 조선의 대원군과 비슷하다. [69] 1달도 안 지나서 과격한 존황양이 사츠마 무사들을 무력으로 숙청한 데라다야 사건(1862)이 터졌다. [70] 다만 이에 대해서는 오쿠보의 개입없이 젊은 무사 58명이 '사면시켜주지 않는다면 할복하겠다'는 혈서를 써서 보내어 울며 겨자먹기로 사면시켰다는 의견이 있다. [71] 특히 나는 듯이에서 진중하면서 강력한 포스를 보여준 타카하시 히데키의 히사미츠와 비교가 많다. 타카하시의 히사미츠는 국부에 걸맞은 위엄있는 캐릭터였던 것에 비하면 아오키의 히사미츠는 오쿠보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72] 발연기라기보다는 캐릭터를 잘못 잡은 탓이 크다. 오히려 동일 배우가 료마전에서 보였던 고토 쇼지로야말로 히사미츠에 걸맞게 무게있는 캐릭터였다. [73] 90년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에서 오쿠보 도시미치 [74] 영화 덕혜옹주 이방자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75] 가고시마 출신으로서 세고돈에서는 사투리 지도를 겸하고 있다. [76] 공명의 갈림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열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한자와 나오키 시즌 2 최종보스인 미노베 케이지 간사장으로 등장했다. [77] 다카모리는 원래 키쿠타로로 이름을 정했으나, 섬 아내 제도때문에 이야기가 나올 것을 생각하여 키쿠지로로 지었다. [78] 아마미 오시마 출신의 가수 [79] 군사 칸베에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사나다마루에서 히라노 나가야스를 연기했다. [80] 주군(主君)을 대리하여 행정을 보던 사람 [81] 스즈키 료헤이와는 아름다운 그대에게, 변태가면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분이 있으며 마츠다 쇼타와는 꽃보다 남자에 함께 주연으로 참여했다. 그에게는 야에의 벚꽃 요시다 쇼인 이후 5년 만의 대하 드라마이며, 7번째 대하 드라마이다. [82] 료마는 신정부의 구심점으로 요시노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이고, 오쿠보는 요시노부가 완전히 배제된 신정부를 계획했다. [83] 2011년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의 세 명의 주인공 중에서 죠코인 역을 맡았다. [84] 마탄전기 류켄도의 세 명의 주인공 중에서 나루카미 켄지역을 맡았다. [85] 아침이 온다에서 오쿠보 도시미치 역을 맡았다. [86] 아츠히메에서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맡았다. [87] 히토츠바시 사마의 줄임말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요시노부는 신몬 타츠고로라는 소방대 오야붕과 친분 관계가 있었는데 이를 이용한 극중 설정으로 보인다. [88] 무진전쟁 당시 조적은 5개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1등급 - 도쿠가와 요시노부, 2등급 -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사다아키 형제, 3등급 - 노중(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 등이 있었다. [89] 신정부의 에도성 총공격을 두고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적장이 항복을 하였고, 한 나라의 대도시를 송두리째 불태우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이라 집었다. [90] <풍림화산>에서 셋사이, 영화 <고에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연기했다. [91] 이케다야 사건 당시 양이지사 측에 해군조련소 학생인 모치즈키 카메야타가 있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 모치즈키는 료마의 고향 친구이기도 했다. [92] JIN -진-에선 이 배우가 사이코 타카모리를 연기했다 [93] 키요카와 하치로는 존황양이론자였으며, 막부를 이용해 로시구미를 존황양이의 선봉대로 세울 계획을 했다. 그러나 미마와리구미 대장 사사키 타다사부로에게 암살당했다. [94] 朝敵・徳川慶喜が家来、山岡鉄太郎まかり通る [95] 立場が違って西郷先生が私ならどのようにご返事なさいますか? [96] 金もいらぬ、名誉もいらぬ、命もいらぬ人は始末に困るが、そのような人でなければ天下の偉業は成し遂げられない。 [97] 나는 듯이에서 아리무라 슌사이(가이에다 노부요시) 역을 맡았다. [98] 로쥬(老中)의 우두머리. [99] 도쿄 치요다 구에 키요이 언덕(紀尾井坂)이라는 지명이 있다. 에도 시대에는 키요미즈 언덕(清水坂)이라 불렸으나, 키이 도쿠가와(紀伊德川), 오와리 도쿠가와(尾張徳川)와 히코네 이이(井伊)의 저택이 붙어 있어서 세 가문들의 앞 글자를 따 지명을 바꾸었다. [100] 토쿠코라고도 발음할 수 있다. [101] 한자와 나오키 시즌2에서 전뇌잡기집단의 부사장으로 등장했다. [102] 삿쵸 동맹이 성사되기 전부터 삿쵸가 뭉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03] 가부키 배우이며, 산조 사네토미 역 노무라 만조 9세의 장남 [104] 가부키 배우이며, 나는 듯이의 겟쇼 역으로 출연한 노무라 만조 7세의 장남 [105] 사나다마루에서 나오에 카네츠구로 열연. [106] 65만엔(현재 가치로 100억엔) 상당의 육군성 공금을 횡령한 사건. 이 무렵,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근위도독으로 근위병을 총괄하는 위치였으나, 근위병 내부의 사츠마계 군인은 조슈의 야마가타를 불복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거기에 야마시로야 사건을 계기로 육군성 회계감독 타네다 마사아키가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해 상당한 육군성 공금이 대출되어 있었던 것이 발각되고, 키리노 도시아키 등 사츠마계 육군의 강한 추궁이 있었다. [107] 국내에는 영화 우연과 상상 2번째 에피소드의 세가와 교수 역으로 알려져있다. [108] 원래 성은 이누이(乾)였으나 그의 집안은 다케다 신겐의 가신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후예였기 때문에, 다케다 신겐의 영지였던 고후 성의 전투를 앞두고 이와쿠라 도모미의 조언으로 이타가키(板垣) 성을 사용한다. 그리하여 고후 성이 위치한 카이 국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곤도 이사미가 이끄는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를 대파한다. [109] 가고시마 출신으로서 세고돈에서는 사투리 지도를 겸하고 있다. [110]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코마츠 타테와키, 기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마에바라 잇세이, 히로사와 사네오미, 에토 신페이, 요코이 쇼난, 이와쿠라 도모미 [111]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 사노 츠네타미, 시마 요시타케, 소에지마 다네오미, 오오키 다카토, 에토 신페이, 오쿠마 시게노부 [112] 오늘날의 법무부장관 [113] 료마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 [114]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 사노 츠네타미, 시마 요시타케, 소에지마 다네오미, 오오키 다카토, 에토 신페이, 오쿠마 시게노부 [115] 키 172cm로 이 작품에 출연하는 여자 배우 중 최장신이다. [116]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연기했으며 변두리 로켓에서는 이타미 다이 역할을 맡았다. 또한 그랑 메종 도쿄에서는 탄고 마나부 역으로 적지 않은 호평을 받은 바 있다. [117] 닛폰 테레비의 아침 방송 프로그램 《슷키리(スッキリ)》의 진행자로 알려져 있다. 김신영과 유사한 입지를 지닌 방송인으로 보면 될 듯. [118] 4월 1일은 스즈키 료헤이x와타나베 켄의 대담으로 진행되는 세고돈 스페셜로 인한 결방 [119] 7월 7일은 세고돈 스페셜 ~가자 혁명으로! 사이고와 4명의 남자들~로 인한 결방 [120] 태풍 짜미로 인한 NHK 종합채널 결방. BS 프리미엄에서만 정상적으로 9월 30일에 방송되었다. 당초 14일로 예정되었던 3번째 스페셜 방송은 날짜가 변경될 예정이다. [121] 작중 상황은 다카모리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심각한 장면으로 셋포가 입에서 입으로 물을 강제로 먹이는 장면이었다. [122] 역사대로 마지막 화까지 등장했다. 마지막 화에서 사이고가 죽고 나서야 상투를 잘랐다. [123] 사이고 집의 식객 [124] 사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센고쿠 시대 전체로 놓고 보면, 임진왜란은 조선 입장에선 그야말로 몇백년만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으로 비중이 클 수밖에 없는데 비해, 이미 백여년 가까이 전쟁통에 시달리던 일본 입장에선 그 시기 수많았던 전쟁 중 히데요시가 말년에 삽질한 전쟁 하나 정도로 비중 자체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기도 하다. [125] 이 시기 부터 사실상 히데요시와 히데요시가와 히데요시 계열의 가신들이 비명횡사와 사망 등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에 사실상 내리막길 묘사를 포기한 것이다. [126] 사이고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에 시찰하러 나가 있는 틈을 타서 산조 사네토미와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들끼리 이미 결정한 사항이기에 직접 조선 사절로 가서 담판을 짓겠다고 고집하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잘못되면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지금의 일본은 전쟁할 여건이 못 되니 조선 문제는 미루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127] 다만 2부 8화(38화) 드라마 본편에서 사이고 주도의 "세간에서 형님(다카모리)을 정한론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식의 언급을 다카모리가 "잠깐. 정한론이라니, 나는 단 한번도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며 정면반박하는 모습이 나와있다. 이에 주도는 "하지만 세간에서는 이미 형님을 대표적인 정한론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128] 얼마나 어려운지 대한 사례로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이 가장 풀기 힘들었던 것은 일본군이 만든 암호가 아니라 가고시마 사투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군에서도 정보를 전달할 때 가고시마 사투리를 사용했었지만, 미군은 가고시마 출신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데이비드 아키라 이타미라는 병사의 도움으로 해독하였다. [129] 나는 듯이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사투리는 일부 자막으로 주석을 달았다. [130] 실제 에도 시대 당시 상위 계층(아츠히메, 코마츠 타테와키 등)은 여러 번 및 막부와의 교류를 위해 표준어를 많이 썼으며 오리지널 사투리는 하급 무사(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같은 낮은 계층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131] 나는 듯이는 소설이 원작이었는데 이야기의 시작이 유신 이후부터이며 막부말기는 오리지널 스토리이다. 게다가 더블 주인공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리즈 시절이 유신 이후라 볼 수 있었던 만큼 유신 이후의 비중이 컸다. [132] 두 사람의 인연을 어릴적부터 만들고 싶었다는 나카조노 미호의 뜻이었다. [133] 사실 15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134] 다카모리는 술을 못한다. [135] 실제 야간에 행해지던 행사였으나 초등학생 연기자들을 야간에 기용할 수 없으므로 낮에 끝냈다. [136] 오다와라 공성전 씬 전까지 둘이 마주치거나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는 일화. [137] 다만 감옥의 경우에는 유배 생활 말년에 눈을 피해 술을 자유롭게 마시거나 산책을 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고증 실패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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