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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40:58

이케다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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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말기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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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00> 1853년 7월 8일 쿠로후네 사건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 체결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1858년 ~ 1859년 안세이 대옥
1860년 3월 24일 사쿠라다 문 밖의 변
1862년 2월 13일 사카시타 문 밖의 변 (坂下門外の變)
1862년 5월 21일 사쓰마 번 지사 숙청 사건 (薩摩藩志士肅淸事件)
1862년 8월 21일 나마무기 사건
1863년 8월 15일 ~ 1863년 8월 17일 사쓰에이 전쟁
1863년 9월 30일 8월 18일의 정변 (八月十八日の政變)
1863년 ~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
1864년 7월 8일 이케다야 사건
1864년 8월 20일 금문의 변
1864년 8월 24일 ~ 1865년 1월 24일 제1차 조슈 정벌
1866년 3월 7일 삿초 동맹
1866년 7월 18일 ~ 1866년 10월 8일 제2차 조슈 정벌
1867년 11월 9일 대정봉환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
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보신 전쟁 }}}}}}}}}


池田屋事件

1. 개요2. 상세3. 여담4. 매체에서의 이케다야 사건

1. 개요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서 재현된 이케다야 사건[1]

이케다야 사건은 1864년 7월 8일, 조슈 번 도사 번 존황양이 지사(志士)들이 아이즈 번 다이묘이자 교토수호직[2]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암살하고 고메이 덴노 하기로 납치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막부 신선조에게 체포된 사건이다.

2. 상세

시모노세키 전쟁과 <8.18 정변>으로 조슈는 교토에서 실각한다. 서양의 포격에 놀란 고메이 덴노 산조 사네토미 양이파 교토 귀족을 실각시켰고 이어 공무합체파(친 막부파) 교토 귀족들이 집권한다. 막부 측의 교토 수호직인 아이즈 번 사쓰마가 손을 잡자 도막파(반 막부)였던 쵸슈는 완전 고립된다.

당시 교토에서 양이파 탈번 낭인들이 막부 측 인사나 개국파를 죽이고 다니자 아이즈 번도 낭인들을 조직화해 유신 지사들을 즉결처분하고 다녔는데[3], 그 와중에 조슈 번사들과 양이파 탈번 무사들이 산조 키야마치(三条木屋町)의 이케다야(池田屋)라는 여인숙에 모여 여러 차례 작당 모의를 했다.

6월 5일 신선조의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는 조슈 번의 지사 후루타카 슌타로를 체포한다. 그는 원래 중고상으로 신선조는 그의 점포에서 갑옷과 조총, 그리고 조슈 번 사람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압수했다. 심한 고문 끝에 조슈 번의 지사들이 이치카이소 정권 요인[4]들을 암살하고, 교토에 불을 지른 사이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를 암살하고 고메이 덴노를 쵸슈로 납치하려한다는 자백을 받아낸다.[5][6]

7월 8일 국장 곤도 이사미는 신선조를 두 부대로 나뉘어서 출동시킨다. 한쪽은 부장인 히지카타 토시조가 이끄는 시마바라의 유곽 거리를 수색하는 부대로서 이쪽은 인원수는 많지만 검호들은 적었으며 다른 한쪽은 곤도 이사미가 직접 이끄는 소수 부대로 이 곳엔 오키타 소오시를 비롯한 뛰어난 검객들이 포진하여 이케다야를 급습하였다. 처음 이케다야에 들어서며 주인장에게 공무가 있음을 알렸을 때 주인장은 2층의 조슈 번 지사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여기 신선조가 공무로 오셨답니다!'라면서 크게 외쳤고 이에 곤도가 주인장을 발길질로 걷어차고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신선조는 이 과정에서 대원 1명을 잃고[7] 토도 헤이스케가 부상당했으며, 조슈 번은 7명이 죽고 24명이 체포된다. 그 탓에 쵸슈는 교토에서 아예 활동은 커녕 역적 신세를 면키 어렵게 됐다.

이 사태를 듣고 교토소사대 및 미마와리구미 등의 여러 경비단체가 이케다야로 몰려들었으나 시마바라에서 허탕을 친 히지카타의 부대가 철통같이 이케다야로 향하는 길목을 봉쇄하여 신선조가 오롯이 공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여담

4. 매체에서의 이케다야 사건



[1] 당시 이케다야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했다고 한다. [2] 교토의 치안 및 경비를 담당하는 직위. 오늘날로 따지면 수도경비사령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3] 아이즈번의 신선조가 대표적인 예. [4] 교토 수호직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금리어수위총독(교토 어소와 오사카만을 방어하는 직책) 도쿠가와 요시노부, 교토소사대(교토 치안 담당)이자 구와나 번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황족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5] 그러나 일각에서는 히지카타가 조슈 번의 지사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 자백을 조작했다는 설이 있다. 납치를 모의했다는 내용이 막부 측의 기록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때 자백을 한 후루타카가 얼마 안 있어 일어나는 금문의 변 때 죽게 되면서 진실을 확인할 방법마저 사라진다. [6] 목조건물이 밀집한 당시 일본의 특성상 아무리 소방설비와 인력을 갖추어도 잠깐의 화재로 도시가 전소될 위험이 있었던지라 방화죄는 미수조차도 극형으로 다스릴 정도로 인식이 안좋았다. 요즘으로 치자면 테러행위와 같은 것이었기에 진위여부를 떠나 이 일로 한동안 유신지사들의 인식이 상당히 안좋아졌고, 신센구미는 테러로부터 도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해져 막부로부터 확실한 인정과 지원을 받게 된다. [7] 사망한 대원은 오쿠자와 에이스케. 사건 당시 곤도 이사미 부대 소속이었다. [8] 유일하게 원래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수족관 폐업 후에 건물 자체는 철거하고 다시 지었다. 현지에 있는 비석은 수족관 관계자가 세운 것. [9] 신선조가 더 철저하게 수색을 했으면 와다도 발견될 수가 있었겠지만 당시 신선조는 이케다야의 죠슈 번 지사들이 전부인지 어디에 더 죠슈 번 지사들이 숨어있는지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건물마다 짧은 시간동안 수색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