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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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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두 삼두정치의 비교3. 현대 민주주의 삼권분립과 비교4. 가공 매체에서

1. 개요

삼두정치(三頭政治 / Triumvirate)는 로마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3인 집권 체제를 지칭한다. 과두제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1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국가기구나 법제가 아니었으며 그냥 세 사람 사이에 집정관을 돌려막는 협정에 불과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에 집정관으로 당선되었고, 이후로는 갈리아 키살피나+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아 3개의 속주 총독으로 갈리아 원정을 10년간 지휘하였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에 공동 집정관을 지냈으며 폼페이우스는 제해권을 전담하고, 크라수스는 동부지역 속주 총독을 지냈다.

2차 삼두정치는 형식적으로는 3인 위원회로 집정관을 나눴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민관 원로원의 업무까지 대부분 실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견제 불가능한 최고 통수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두정치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창설 의도와 작동 방식은 전혀 다르다. 사두정치는 제정 사회가 이미 실현된 상태에서 권력을 다시 분할하여 군인 황제 시대 같은 참사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 삼두정치는 원로원과의 갈등을 적절히 봉합하고 종국엔 원로원을 몰아낸 뒤 권력을 성공적으로 집중시켰지만, 사두정치는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2. 두 삼두정치의 비교


총 2차에 걸친 삼두정치 체제가 있었는데, 결성 시점에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처졌지만 최후의 승자가 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비교적 짧은 역사의 평민 유력가 출신으로 명성 높은 장군이었지만 결국 패배한 폼페이우스와 안토니우스, 공화정 명문 귀족 출신이고 상대적으로 초반에 탈락한 크라수스와 레피두스가 비슷하다고 자주 비교된다.

1~2차 삼두정치 모두 형태와 결과가 비슷하기 때문에 구성 인물들의 능력이나 성격, 사건 진행 과정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세한 진행 과정과 인물들은 서로 다른 측면이 많다. 대표적으로 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과 대립했을지언정 비공식 연합으로 남았고 원로원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던 반면 2차 삼두정치는 결성 직후 원로원을 숙청해버린 후 공식 직함을 가진 위원회로 활동했다. 이는 1차와 2차 삼두의 이름값과 상황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인데 1차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다들 로마의 거물급 정치가라서 원로원이라 해도 이들과 직접 맞설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2차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절대적 1인자 카이사르의 부하 중 주요 인물일 뿐이었으며[1] 당장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키케로 등 공화주의자 세력이 원로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이를 숙청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1차 삼두정치는 초반에는 폼페이우스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2차 삼두정치 때는 셋 다 자신의 사병이 있었다. 그리고 1차 삼두정치는 크라수스가 죽을 때까지 셋 다 로마 최고 유력자 지위를 잃지 않았고 비교적 신참인 카이사르가 앙숙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지만, 2차 삼두정치는 보노니아 협정을 주선했던 레피두스가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권력 구도에서 사실상 밀려나면서 일찌감치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의 양자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1차 삼두정치는 폼페이우스에 비해서 세력이나 명성이 모자라던 카이사르에게 그의 후원자 격이었던 크라수스가 더해져 결성되었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출 이후 갈리아에서의 군공으로 크라수스를 금방 추월했고 폼페이우스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크라수스는 결성 당시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 로마인들 대다수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중요인물로 여겼지만,[2] 점차 곁다리로 밀려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 자멸했다. 이들의 관계가 결렬된 건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셋이 서로를 견제하던 구도가 1 대 1로 변질된 한편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사망으로 두 사람 사이의 인척 관계가 끊어지고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 견제를 위해 원로원파와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2차 삼두정치는 결성 당시는 레피두스가 주도권을 잡았지만 고작 1년 뒤인 필리피 전투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부하나 마찬가지로 전락하였다. 레피두스는 처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보다 강력한 세력이었고 다른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해 삼두체제 성립을 주도했으며 출범 직후에도 갈리아 지역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와 비슷한 세력에 자신에게 분배된 시칠리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지배하에 있었던 옥타비아누스보단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군대를 이끌고 브루투스, 카시우스 세력과 싸우는 대신 본토 방위를 맡은 것이 패착이 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을 전부 빼앗겨 실권을 잃었다. 페루시아 내전에서는 로마 방어를 맡았다가 쫓겨나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망치는 등 굴욕을 당하다가 군단 몇 개를 받아 아프리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최고 권력을 노릴 만한 위치에서는 일찌감치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필리피 이후로 삼두정치는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립 구도였고 거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레피두스를 끼워넣은 것에 불과했다. 레피두스는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전, 승리했지만 직후 팽당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영역인 아프리카[3]에 더해 자신에게 약속되었던 시칠리아를 요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당당히 레피두스의 캠프로 가서 레피두스 눈 앞에서 레피두스의 부하에게 직접 배반을 권유하여 부하들이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가버린 것이다.

삼두가 각자 군대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카이사르 파였고 이들이 가진 군대도 본질적으로는 카이사르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부하들을 회유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카이사르파의 헤게모니를 옥타비아누스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일개 부하였던 데다 이미 권력 투쟁에서 한참 밀려났던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받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데 더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세력을 일소하고 서방의 지배권을 확고히 한 상태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회유하자 금세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3. 현대 민주주의 삼권분립과 비교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의 정치체제인 삼두정치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는 몽테스키외의 업적이기도 한데 몽테스키외는 오랫동안 삼두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했고 삼두정치를 변형시킨 이른바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여 1인 독재의 출현을 방지하려 했다.

몽테스키외는 최고권력자가 집정권 두 명에서 삼두정치의 세 명으로 늘어났는데 왜 로마의 공화정은 몰락하고 오히려 제정이 되었는가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몽테스키외는 세 명이든 네 명이든 권력자가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의 모든 기능을 틀어쥐면 결국 민의는 무너지고 권력자들끼리의 암투가 벌어져 누가 이기든 최후의 1인에 의한 독재는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4] 설령 권력자가 한 명만 남지 않고 계속 두 명 이상이라 해도 그들 모두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틀어쥐면 1인 독재보다 더 심각한 군벌들의 암투로 시민이 고통받게 된다고 결론지었다.[5]

결국 삼두정치를 연구한 몽테스키외가 내린 결론은 단순히 권력자가 둘 이상이라는 것만으로 시민의 권익이 보호될 수는 없으며 아예 권력의 기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이렇게 셋으로 분산시켜서 각각의 권력자에게 따로따로, 그리고 독점적으로 나눠주고 그 대신 서로의 권력 기능은 침해하지 않고 견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면 로마의 공화정은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각각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중 어느 하나씩만 행사했다면 한 명의 황제가 모든 권한을 휘두르는 정치체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단순히 복수의 권력자가 아니라 아예 국가의 권력 기능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셋으로 나눈 구조적 정치 체제로 정치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몽테스키외는 로마의 삼두정치를 진지하게 연구해서 삼두정치의 업그레이드(?)판인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게 된다. 즉 삼두정치는 일종의 반면교사로써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가공 매체에서

현실과 마찬가지로 셋 중 실질적인 리더가 있는 경우가 많다.

[1] 카이사르의 뒤를 이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으로 정통성을 얻었고 카이사르 암살 당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공동 집정관, 레피두스는 독재관 카이사르의 2인자인 기병장관을 맡고 있어서 충분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이건 카이사르 지지자에게나 통하는 이야기고 로마 시민 대다수가 자신들을 비호해준 카이사르를 지지한 건 사실이지만 공화정인 이상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이 곧바로 로마를 지배할 명분이 될 수는 없었으며 원로원의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명분 쪽이 훨씬 더 직관적이고 그럴 듯했다. 반면 1차 삼두정치에서 크라수스는 로마 최고의 거부이고 기사계급을 대표했고 폼페이우스는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군부를 대표했다.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거두로서 평민들을 대표했지만 옥타비아누스나 레피두스, 안토니우스에게는 이런 상징성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파를 숙청할 필요가 있었던 것. [2] 초창기엔 오히려 카이사르가 곁다리로 여겨졌다. 전공도 비교적 적었고 크라수스와 채무로 엮여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 당시 카이사르였다. [3] 지중해와 맞닿은 북아프리카 지역을 말한다. 과거 카르타고 누미디아 등의 나라를 정복하고 부르던 명칭이다. [4] 예를들어 로마 공화정에서 호민관의 권력은 입법·사법·행정 삼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호민관이 원로원의 관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원로원은 이를 견재하기 위해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초법적 수단으로 찍어눌렀고 이를 민중파는 군대로 다시찍어누르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5] 이는 과거 일본 센고쿠 시대, 중국 군벌시대와 오늘날 군벌이 난립해 내전 중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6] 에덴조약 편 이후 현재 티파티는 사실상 나기사 혼자 이끌어나가는 상황이다. 세이아도 죽다 살아난 판국인지라 도저히 티파티 업무를 볼 상황도 아니고, 미카는 초강경파이자 트리니티 내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던 파테르 분파를 대표해 게헨나와의 평화협상에 반발해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다른 둘을 제쳐놓고 티파티의 전권을 잡은 미카가 파테르 분파가 원하는 즉각 게헨나에 선전포고하기를 거부하면서 쿠데타가 이도 저도 안 되고 붕 뜨고, 시스터후드가 창립 이래 지속되어 오던 절대중립 원칙을 깨고 개입했으며 구호기사단이 파테르 분파와 충돌하는 등 혼란 속에 결국 쿠데타가 실패해 미카 본인은 정치적 권력을 모조리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세이아는 목숨은 건졌고 세이아와 나기사, 선생까지 개입해 미카를 보호했기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음에도 미카는 여전히 티파티 일원이자 파테르 분파의 수장 지위는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미카를 떠밀어 쿠데타를 일으키고 선전포고를 승인하기를 거부하는 미카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두들겨패기까지 했던 파테르 분파는 미카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운 채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공작으로 미카를 반쯤 매장시켜버렸다 다만 미카 말고 파테르의 얼굴로 내세울 이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명목상 파테르 분파의 수장이며 티파티의 일원이기 때문에 삼두정 자체는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