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목록 | 등장인물 ( 기타 세력 · 미분류) | 평가 | 비판 ( 조조/비판 · 피해자) | 오류 ( 시즌 1 · 시즌 2) |
1. 개요
항목이 너무 길어져서 분리되었다.☆ 표시 -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나 그에 따라 삼국지톡에서도 난 오류를 나타낸다.
2.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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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잘 모르는 일반인도 착각하기 쉽지만 조조가 황제국 위나라를 세우진 않았다. 조조는 일부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가 있는데다 유비와 손권이 아래에서 버티고 있는 등 상황 자체도 마땅치 않았던 것도 있어서 위왕의 자리와 특전인
구석(九錫)을 헌제에게 직접 받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 제국 체제 내에서의 작위 개념이었기에 나라와는 관계가 멀다. 실제로 위나라를 세운 것은 조조의 맏아들인
조비이다. 이는 정사와 연의 모두에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위의 비판은 살짝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작가의 서술은 정확히 아래와 같다.
그런 혼세를 평정하고, 각각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 된 영웅이 셋 있었으니... 오나라를 세운 '손권', 위나라를 세운 '조조', 그리고 촉나라를 세운 자비로운 군주 '유비'였다.
분명 작가는 '왕이 된 영웅'이라고 했지 황제가 되었다고 한 적이 없다. 다만 이 경우 황제까지 한 유비, 손권이 다소 애매해지긴 하지만 어쨌든 둘 다 왕을 거쳐서 황제가 된 것이므로 오류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조조는 헌제로부터 위국공에 임명된 것이지 위나라 자체를 세운 건 아니기 때문에 오류인 점은 변하지 않는다.
- 연의에서 유비는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했다(事母至孝)'고 되어 있으며 짚신과 돗자리를 짜서 팔았던 것도 그 일환 중 하나다. 만화에서의 묘사처럼 어머니의 등골을 뽑아 먹으며 놀기만 한 백수는 아니었으며,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일정한 장소 없이 노점상을 한 것에 가깝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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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15세까지
대학에 다녔다고 되어있는 것도 오류다. 연의에서 유비는 15살이 되자 어머니가
노식에게
유학(游學)[2]을 보냈다고 표현되는데 그 시대에 대학과 맞먹는 교육기관은 건무 5년(29년)에
광무제에 의해 지어진 태학(太學)뿐인데 태학은 후한의 수도인
낙양이나
장안에 있었다. 거기에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어릴때 받은 교육 관련 언급은 공손찬과 같이 노식에게서 배웠다는 것 뿐인데 노식은 나라의 명으로 구강과 여강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한 뒤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들을 가르친 것일 뿐이라 정상적인 교육기관이라 보긴 어렵고 현대로 치면
과외에 가깝다.
나중에 이러한 오류에 대해 지적을 받았는지, 노식이 등장하는 17화부터 유비가 배운 것이 대학이 아닌 '노식스쿨' 이라는 이름의 학원 강의처럼 묘사가 되었으며 해당 화 맨 뒤의 설명에도 1화의 '대학'이라는 용어가 빠지고 '대학자 노식 문하에서 공부하다'라는 설명이 붙었다.[3]
- 손권과 조조가 유비보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을지언정 신분이 더 귀했다는 것은 오류다. 조조는 세력가에서 태어났지만 환관의 후손이었기에 신분 자체가 고귀했던 것은 아니다. 손권이 태어난 손씨 가문은 지방 호족으로 하내 사마씨나 홍농 양씨 같은 명문가도 아니었고 아버지 손견의 벼슬은 고작 하비승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 날 때부터 귀한 신분이었다면 할아버지가 현령이었고 아버지도 벼슬이 있었던 유비도 마찬가지다. "손권과 조조는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라면 모를까 손권과 조조의 신분이 유비보다 귀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3. 2화
- 향거리선제는 지방관과 지방의 유력자들이 관내의 우수한 인물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관리를 뽑던 제도였는데[4][5] 어째 만화에서는 현실의 공무원 공개채용으로 묘사가 되었다. 인재추천제와 공개채용은 국가기관에서 일할 인재를 구한다는 점[6]에서 목적은 같지만 방식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형태[7]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한 묘사인 셈. 유비가 나름 능력이 있고 황통임에도 백수로 지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무리하게 넣은 것으로 보인다.
- 위와 이어지는 지적으로 유비가 자기소개서에 적은 '가난해도 행복했다. 가난해서 어머니랑 같이 짚신 만들어 팔았다.' 라고 쓴 부분을 면접관[8]이 비웃으며 '자랑이야?' 라고 말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는데 향거리선제가 유교의 교리에 따른만큼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것이 '효렴(孝廉)'인데 이를 저렇게 비웃는 건 상당한 고증오류. 적어도 '너와는 다르게 번듯하게 일하면서 부모님 밥 먹여 주는 놈도 있는데 이런게 효도냐?' 라는 식의 비난이면 모를까 가난하단 이유만으로 무조건 깔보는 식의 표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대놓고 나올 순 없었다.
4. 3화
- 연의에서는 당시 유주의 태수였던 유언[9]이 교위였던 추정(鄒靖)의 권유로 의병을 모았고 유,관,장 삼형제도 이때 의병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때문에 전개상 3화에서 등장해야 하지만 어째 유언과 추정 둘 다 전혀 등장은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다가 14화부터 시작되는 대흥산 전투나 돼서야 제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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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각이 만든 종교는 '
태평도'이지, '황건교'가 아니다. 사실 이 오류는 연의에서 남화노선이 장각에게 '태평요술(太平要朮)'이라는 신비한 책을 주는 장면과 비술을 익힌 장각이 스스로를 '태평도인(太平道人)'으로 칭하는 장면이 통으로 삭제되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인터넷에서 '장각'만 검색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게다가 해당 화에서는 <황건적 가입문의>라는 문구도 등장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막장 집단이라도 명분과 체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들의 집단을 '도적(賊)'이라고 표현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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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홍보영상에 '누런 수건 두르고, 일자리를 구했어요!' '누런 수건을 쓰니 병이 나았어요!' 등의 문구가 나온다. 아무래도
무안단물을 패러디한 거 같은데 당시 관리 임용 방식이
향거리선제, 즉 추천제라는 것은 이미 1-2화에 걸쳐 나왔다(...). 즉 아무리 영험한 누런 수건을 두른다 해도
해당 화에서 언급되는가난하고 못 배운 이가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현대와는 시대부터가 달랐다는 얘기다. 연의에서 장각은 중평 원년(184년) 정월에 대규모 역병이 발발하자 부적을 태운 가루를 물에 탄 이른바 '부수(符水)'로 백성들을 구했고 그 때부터 유명세를 탔다. 무안단물을 패러디할 생각이었다면 누런 수건이 아니라 차라리 이 부적 태운 물을 패러디하는 게 더 나았을텐데둘 다 물이니까...황건적하면 아무래도 누런 두건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작가가 누런 수건을 무안단물로 패러디한 모양이다.
- 1화에서 시간적 배경은 184년 1월로 나왔는데 방의 달력은 5월 것을 쓰고 있다. 년도도 2017년이 그대로 보인다.
5. 4-5화
- 조선왕조실톡 시기부터 있던 문제인데 작가가 유독 성인 이하의 나이대를 학생처럼 표현한다는 것. 나이가 15세 전후라는 점 때문으로 보이나 그 당시 기준으론 남성 20세, 여성 15세[10]만 되어도 결혼 적령기로서 현재보다 적령기가 상당히 낮았고 적령기 이외에도 모종의 사정으로 빠르게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에 그 시대에서 15세 즈음을 지학(志學)[11]이라 불렀는데 이 시대에만 해도 15세면 상투만 올리지 않았을 뿐이지 어른으로 대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술이나 결혼 등이 오늘날의 청소년처럼 제약받지 않던 시대였다. 작가가 유비와 만날 즈음의 장비가 어린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중-고등학생 뻘로 잡은 것으로 보이나 오히려 그렇게 치면 한창 학교 다닐 나이에 푸줏간에서 일하는데 자기 명의의 집도 있고 재산도 많은 청소년(...)이라는 더 비현실적인 존재가 된다.[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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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장 의형제의 나이 분류는 만나기 전이 아니라
도원결의 이후에 언급되었다. 연의[14]의 해당 부분은 아래와 같다.
誓必, 拜玄德為兄,關羽次之,張飛為弟.
(맹세를 한 뒤, 절하며 현덕이 형이 되고,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되었다.)
사실 나이 어린 장비에 대한 부분은 도원결의 이후에 넣어도 분량을 제외하고는 전개상 큰 지장이 없다.[15] 가령 건배를 하다가 민증이 떨어져서 알게 된다던가(...) 자꾸 급식체를 써서 들통난다던가...
6. 6-7화
최초로 관우가 등장하는데 부패공무원의 패악질을 제압하며 유비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해당 모습은 아마도 관우의 의협심과 강함을 묘사하기 위해 각색한 장면으로 보인다. 근데 중요한 것은 연의에서 관우는 사례주(司隸州) 하동군(河東郡) 해량현(解良縣) 출신[16]으로 고향에서 토호 하나가 권세를 믿고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서 때려죽이고(!) 5-6년 간 강호를 떠돌아다닌 것[17]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고전이든 현대든 간에 살인으로 수사기관의 추격을 받는 상황이었고 의협심에서 한 일이긴 하나 관리를 두들겨 팬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표현된) 유비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18][19] 또 관우가 의병으로 나선 것 역시 나라를 지키는 충의 이외에도 공을 세워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요량도 있기 때문에 부패공무원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 삽입된 건 관우나 유비에게 있어서 마이너스 요소에 가깝다.7. 8화
- 관우가 고씨(高氏)라는 설정을 가져왔는데 전해지는 내용을 보자면 관우의 원래 성은 고씨로 당시 소금을 담당하는 관리[21]였는데, 어느날 자신의 약혼녀가 악덕 지주에게 추행을 당했고 결국 약혼녀가 수치심에 자결하자 관우가 그 지주를 죽인 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유곡관(幽谷關)[22]이라는 관문에서 검문을 받을 때 즉흥적으로 관의 글자를 따서 자신을 '관씨(關氏)'라고 소개했고 그 이후로 관우로 개명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정사에도 연의에도 등장하지 않는 야사 내지는 민간설화의 내용이다. 연의에는 성씨가 아닌 자(字)가 달라진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원래는 장생(長生)이었으나 운장(雲長)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이다. 물론 나관중본 삼국지대로만 간다면 관우가 손권에 의해 처형되는 것이 아닌 상제의 명령으로 전투를 중단한 뒤 느닷없이 승천(...)하는 괴랄한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점은 작가가 해당부분에 대해 적절하게 어느 판본을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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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의 순서대로 따르자면 원래 이번 편에서 장비의 집 정원에 모여
도원결의를 맺어야 하지만, 그냥 포차에서 만난 걸로 퉁친건지(...) 아니면 그냥 누락시킨 건지 언급이 없다. 물론 작가가 임의로 차후에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행보는 황건적과의 전투(대흥산, 청주성) → 노식과 만난 후 영천으로 이동 → 동탁 구출 → 주준을 도와 장보와 전투 순으로 쉴틈없이 전투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에 적당하게 넣을 시기가 없다. 그나마 가능한 시기가 유비가 황건적의 난이 끝난 후 안희(安喜)의 현위가 되는 시점인데 그 때 결의를 맺으면 그림이 더 이상해진다.
형, 아우 하면서 황건적을 잡았는데 난데없이 형제 맹세이후 공손찬이 일반인인 도적을 죽이자 유비가 카톡을 보는 내용으로만 등장
- 조조가 처음으로 등장해 황제에게 간언을 하지만 읽씹하는 것에 분개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조조의 벼슬이 의랑(議郞)으로 등장하는데 의랑은 황실 제관을 통제하는 광록훈(光祿勳) 아래의 직위로서 황제의 고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황제가 의랑에게 직접 질문을 하기 직전에는 먼저 조언할 수가 없었다. 즉, 조조가 황제에게 조언을 하고 황제가 읽씹하는 모습은 실제로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다.[23] 참고로 연의에 등장하는 조조의 벼슬길을 살펴보면 향거리선제 중 효렴으로 추천을 받아 낭(郞)으로서 지내다가 이후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북부위(北部尉)에 임명되었고[24] 이후 기주(冀州) 돈구현(頓丘縣)의 현령을 지내다가 중앙으로 진출해 의랑이 되었다.
8. 9화
- 해당화에서 조조가 황제를 대신해 기자단 앞에서 입장을 발표하다가 계란을 맞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작중 조조의 역할이 황명을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본다면, 응당 조조의 신분은 의랑 따위가 아니라 내조(內朝) 소속의 상서(尙書) 정도는 돼야 한다. 의랑은 황제의 칙서(명령서)를 전달할 권한 같은 게 없기 때문이다.
- 조조가 등장하기 전 발언대에 용에 감싸인 '한'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한의 국호는 정식적으로는 '대한(大漢)'이다. 국호가 외자인 왕조 국가들은 대부분 앞에 대(大)를 붙였다. 대당(大唐), 대청(大淸) 등등. 그리고 굳이 고증을 맞춰 당대의 글자였던 예서체를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중국이 배경이면 한자로 大漢, 혹은 漢이라고 표기해도 될 텐데 그냥 한글로 떡하니 박아놨다.[25] 24화부터는 피드백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장각을 의미하는 천공장군(天公將軍)의 깃발에 적힌 글자를 한자로 적고, 공무용 차량에도 마찬가지로 '漢'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등 갑자기 한자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 황제 대신 사과하는 공식 석상임에도 조조의 복장이 너무 프리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26]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면 조조가 머리에 상투를 트고 비녀를 꽂은 상태로 등장하는데 공식적인 자리라면 당연히 상투를 꽂고 비녀를 꽂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복식도 관복을 갖춰 입는 게 예의다. 즉, 황제 대신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제대로 된 복장을 안 갖춘 것. 현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셔츠의 첫 단추가 풀어져 있고 넥타이도 메고 있지 않다. 정장 차림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정장 차림이라면 이 역시 상당히 잘못된 복장 착용이라는 점이다. 물론 조조가 업무에 치이는 상황에서 황제가 공식 사과문 발표까지 시켜 업무 과중 상태라는 점[27]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한 장치일 수 있으나 일반 사회에서도 공식적인 발표 등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복장을 갖춘다.
- 조조에게 계란을 던지는 할머니의 복장이 당시 한나라의 복장이 아닌 검은색의 한복이다. 한나라의 여성 복식에는 가슴에 다는 형태의 고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 상복은 대체로 흰색이었으며 검은 빛깔의 상복은 서양의 장례 문화와 더 가깝다.
- 조조의 발표 속에 "얼마전, 한 고을 전체가 황건적에게 습격당했습니다." 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연의의 기록에 의하자면 황건의 난은 십상시와의 연계가 실패하자 장각이 휘하의 수하들을 움직여서 청주(青州), 유주(幽州), 서주(徐州), 기주(冀州), 형주(荊州), 양주(揚州), 연주(兗州), 예주(豫州) 등 8개의 주에서 한꺼번에 군을 일으켜 관청과 마을을 습격했다. 즉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고 피해 범위 또한 그냥 '고을 하나'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후한 정부와 십상시가 각지에서 의용병들을 모집하게 하고 황제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을 풀고 당고의 금으로 쫓겨난 청류파 인원들을 재고용 하는 등 법석을 벌인 것이다. 물론 조조의 (대리) 기자회견이 처음이란 보장도 없고 마을이 대거 털릴 때마다 새로이 발표했다고 하면 설명이 안 되는 것도 아니나 만화 속에서의 묘사가 마치 첫 입장발표문처럼 묘사가 되었기 때문에[28] 의아한 부분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오류는 입장표명문을 처음 발표했든, 혹은 수시로 발표했든 간에 대사나 묘사를 조금 수정해서 뉘앙스만 주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오류이기도 하다.
9. 10화
- 환관인 십상시가 턱수염, 콧수염을 길렀다. 환관은 아예 성적인 기능을 상실한 아이를 들여오거나 유년기의 아이를 데려와 고환을 제거한 뒤 환관으로 키우기 때문에 환관에게서 남성성의 상징인 수염이 나는 건 불가능했고[29] 환관에게서 수염이 난다는 것은 곧 그 환관의 죽음을 의미했다. 한 예로 은나라의 주왕 시절에도 한 남자가 수염만 밀고 환관으로 변장해 들어와 궁녀들과 정을 통했다가 들통나자 주왕은 3일간 이 남자를 감금해 수염이 자라게 한 뒤에 그 꼴을 보이며 조리돌림을 가한 뒤 참수해 죽였다.
- 십상시는 환관이지 내시가 아니다. 조조가 "알다시피, 내시는 원래 심부름 셔틀이다. 욕망마저 거세당해 고분고분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라고 설명하는데 중국 삼국시대에 내시는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를 가리키는 평범한 표현이었다. 삼국지 촉서 동윤전을 보면 비의가 진지를 높이 평가해 동윤의 뒤를 이어 내시로 삼았다는 구절(多技藝, 挾數術, 費禕甚異之, 故超繼允內侍)이 있다. 그러나 진지나 동윤이 환관이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건 정사뿐 아니라 연의도 마찬가지다. 모종강본 삼국연의 66화를 보면 허저가 자신을 내시(許褚雖疏,現充內侍)라고 지칭한다. 내시가 환관이라면 허저도 환관인 셈인데 그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에선 조선 이래로 내시=환관으로 쓰여서 대부분 헷갈려하는 것.[30]
- 황건적의 난 대비 군사회의에서 황제 바로 다음 상석에 자리 잡은 태부(太傅)와 태사령(太史令)은 군사직이 아니다. 태부는 황제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위고 태사령은 점복, 책력 등과 황제에 대한 기록 등을 담당하는 직위다. 군사회의라고 한다면 실질적인 군사를 지휘하는 대장군(大將軍)이나 대사마(大司馬), 혹은 군수물자로 들어가는 양곡과 세금을 관리하는 대사농(大司農) 등이 참여하는 게 더 그럴싸하다. 물론 군사회의를 어전회의에서 겸한다면 상관없긴 하다.
- 해당화 마지막 설명을 보면 환관들이 권력을 잡은 건 황제를 업어 키웠기 때문에 자연스레 권력을 틀어쥐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설명이다. 후한에서 황제가 어리면 그 모후(母后)가 섭정을 했고 자연스럽게 모후인 태후의 가문, 즉 외척이 권력을 쥐는 형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성장하면 당연히 외척의 간섭을 벗어나려 했고 그 일환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환관 세력들을 포섭해 외척 숙청에 이용한 것이다. 환제가 외척 양기를 숙청한 것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며 양기 숙청 이후에는 역으로 환관의 권력이 너무 커져서 외척이 환관을 없애려다 역공을 당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영제 시절의 두무나 소제 시기의 하진이 바로 환관을 없애려다 되려 자신들이 죽은 케이스에 속한다. 정리하자면 황제가 외척을 몰아내기 위해 환관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것이지, 그들이 황제를 업어 키웠다고 권력을 가진 게 아니다.
10. 11화
- 조조가 황실인사과로부터 종군을 명받으면서 '인간 사냥은 무관들 소관 아닌가?' 라고 하는데 황제를 호위하는 오관중랑장[31]등의 중랑장, 황제의 고문이나 응대를 맡은 대부(大夫)나 의랑, 형법이나 법률을 담당하는 좌감(左監), 사병 등을 관리하는 도위(都尉) 등이 모두 광록훈 휘하의 관직들이다. 즉, 종합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사실상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의미가 없었고 또한 광록훈은 황제의 호위 병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에는 군을 이끌고 참여하기도 했다. 게다가 조조가 이 말을 하는 것도 웃긴 장면인 게 조조 자신도 의랑 이전에는 무관들이 맡을 것처럼 보이는 낭직과 궁궐의 문을 수비하는 북부위를 맡았다가 경학(經學)에 능하다는 이유로 의랑직을 맡으면서 문-무의 영역 모두를 지낸 전력이 있다는 점이다. 즉 자기 입장 안 살펴보고 막 내뱉은 말이나 다를 바 없다.
- 유비가 이미 유언을 만나 기념 사진까지 찍었으나 가장 중요한 의용병들의 교통 수단이 마련되지 않는 듯한 묘사가 있는데 연의에서는 도원결의를 한 후에 고을의 용사 300명을 모았으나 이들이 타고 갈 말이 부족해서 유비가 탄식했고 그러한 때에 상인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이 등장해 유,관,장 삼형제를 도와 말 50필과 금은 5백냥, 그리고 강철 1천근을 충당해준 덕에[32] 군세를 꾸릴 수 있었고 이후 유언의 장수인 추정을 통해 유언을 만났기 때문에 원작과 순서가 뒤바뀐 감이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33]이라고 하면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 부분이다.
- ☆ 삼국지톡이 원전인 삼국지연의에 충실했음에도 연의 자체에서 오류가 발생한 경우도 있다. 유언으로 추정되는 유주 태수가 등장하는 컷에는 실제 역사와 두 가지 차이가 존재하는데, 첫번째는 유주 태수라는 직함이다. 유주는 후한 13주 중 하나로서 한국으로 치면 도(道)에 가깝기 때문에 유주의 통치자는 태수(太守)가 아니라 자사(刺史)라 부르는 게 맞고 만약 군(ex-탁군)을 관할하는 직위라면 태수라 부르는 게 맞다.[34] 다시 말해 '유주 태수'라는 직책은 ' 경상북도 시장'처럼 직책과 행정구역이 들어맞지 않는 오류인데, 원전인 삼국지연의에서 이러한 오류를 먼저 범하고 있는 탓에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삼국지톡 고유의 오류는 아니다. 다만, 해당 부분은 정사를 참조해 직위명만 바꾸면 충분히 무리 없이 수정이 가능한 오류이기도 하다.
11. 12화
아무리 고전을 현대식으로 풀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연출이 등장하는데 바로 많은 인원을 태울 버스를 구하지 못하자 중고마 딜러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에게서 중고마 구매를 시도하는 장면이다. 현대식으로 장세평과 소쌍을 자동차 딜러로 설정하고[35] '중고마'에 비견할 수 있는 중고 소형차나 오토바이또한 말이라는 게, 기능 면에서 차량보다 밀리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결코 싼 것이 아니다. 되려 어지간한 차량들 만큼이나 비싼데 경주마의 경우는 2017년 5월 기준으로 평균 낙찰가가 약 4천만원이고 삼성이 정유라가 탈 고급 승마용 말을 대신 구매했을 때 들어간 비용이 17-18억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오히려 차량 대신 말을 구매하는 건 금전적으로 손해다. 삼국지연의 초기 배경인 후한 시대 역시 말값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흉노와의 전쟁 이후 기병의 중요성[36]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한무제 시기에는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말이 40만필에 이를 지경이 되었고[37] 농경과 운송 등에도 사용되면서 말은 일종의 필수 품목이 되었다. 거기다가 한나라 안에서도 말을 사육하긴 했으나 워낙에 한정적이었기 때문에[38] 중앙정부에서는 양질의 말을 구하기 위해 서방과 무역을 했는데 비단과 말을 교환한다고 하여 이른바 '견마무역(絹馬貿易)'이라 불렀다. 삼국지연의에서 장세평과 소쌍이 괜히 수고스럽게 매년마다 북방에 말을 팔러 간 게 아니라 그만큼 이문이 남기 때문이며 또한 연의에서 장세평과 소쌍이 양질의 말을 50필[39]이나 유비에게 선뜻 준 것은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12. 13화
- 해당 화에서 장세평과 소쌍은 분명 '팔지 못했던 중고마'만을 준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정작 맨 뒤의 설명에는 '말과 돈, 좋은 쇠를 주다' 라고 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다. 즉 작중 묘사와 부가적인 설명이 불일치한 현상이 나타난 것. 원전인 연의에서는 장세평과 소쌍이 큰 상인(大商)으로 등장하며 해마다 북방에 가서 말을 팔았다고만 되어 있지 오직 말만 판다는 것을 나타내는 별도의 표현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나, 해당 작에서는 아예 두 사람이 말만을 전문으로 파는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연의와는 달리 묘사와 설명이 다른 현상이 생긴다. 물론 당시에 비단과 말을 교환하는 견마무역이 있었기 때문에 말과 직접 교환한 금과 좋은 쇠를 유비에게 준 게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겠으나 견마무역은 둘 다 귀한 상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고 당시 후한 내부에서는 이미 오수전(五銖錢)이라 불리는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으며 금이나 은, 좋은 쇠 역시 주요 무역 품목이었기 때문에 삼국지톡 내에서 단순히 말만 취급하는 상인에 불과한 장세평과 소쌍이 유비에게 기부하기 어려운 품목이다.[40] 애초에 장세평과 소쌍을 거상 내지는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는 (큰 규모의) 상인으로 묘사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오류다.
- 정원지가 이끄는 황건적이 공격해오자 혼란에 빠진 탁군의 모습이 보여지는데 마치 차이나타운처럼 보이는 전경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과 옛 복식을 입은 사람이 뒤섞인 듯한 괴상한 도시의 모습 광경도 그렇지만[41] 특히 옛 복식을 입은 장면에 오류가 있다. 우선 비교를 하자면 아래와 같다.
삼국지톡 13화의 해당 장면 | 고구려-백제의 평민복 |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어째 고구려-백제의 평민복과 너무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아래 치마 부분만 빼면 거의 완벽하게 비슷할 정도.
직거심의 도안 | 직거심의 착용 모습(위-진 남북조 시기) |
후한 시기부터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널리 입은 직거심의(直裾深衣)[42]가 그나마 본문의 복장과 흡사하긴 하지만 물론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직거심의 자체는 옷자락을 수직으로 지면에 늘어뜨린 형태였으며 여성들의 복식의 경우는 아랫단이 긴 치마의 형태지만 해당 만화에서는 너무 짧은데다 안에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있어서 이상한 느낌을 준다.[43] 물론 만화의 특성 상 복장 고증까지 완벽하게 지킬 순 없겠지만 적어도 과도한
PC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남성과 여성의 복장을 다르게 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별 없이 똑같이 그렸다는 점은 상당히 의아한 부분이다.
13. 14화
유,관,장 삼형제의 첫 전투인 대흥산 전투가 시작되는데 작중 묘사는 유주태수 유언이 유비의 군세[44]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황건적의 추산 병력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보낸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는데 연의를 보면 이미 사람을 보내 적의 규모를 대략적으로 알아낸 상태였고 유비도 이미 그걸 알고 참전했다. 즉, 병력차가 상당하긴 했지만 해당 화처럼 유비가 '이건 사기야' 라는 생각은 안했을 거라는 것이다.不數日, 人報黃巾賊將程遠志統兵五萬來犯涿郡。劉焉令鄒靖引玄德等三人,統兵五百,前去破敵。玄德等欣然領軍前進,直至大興山下,與賊相見。
(2-3일이 되지 않아, 정찰병이 황건적 장수 정원지(程遠志)가 병사 5만을 이끌고 탁군을 침범해 왔다고 알려왔다.[45] 유언은 추정에게 명을 내려 유비 등 3인과 함께 병사 5백명을 이끌고 가서 적을 격파하게 했다. 현덕 등은 기꺼이 군을 이끌고 나아가 곧 대흥산(大興山) 아래에 이르렀고 도적들과 마주했다.)
(2-3일이 되지 않아, 정찰병이 황건적 장수 정원지(程遠志)가 병사 5만을 이끌고 탁군을 침범해 왔다고 알려왔다.[45] 유언은 추정에게 명을 내려 유비 등 3인과 함께 병사 5백명을 이끌고 가서 적을 격파하게 했다. 현덕 등은 기꺼이 군을 이끌고 나아가 곧 대흥산(大興山) 아래에 이르렀고 도적들과 마주했다.)
14. 15화
- 장비가 무려 창 계열의 무기인 장팔사모로 황건적이 쏜 화살을 쳐내는 굉장한 장면이 연출되는데[46] 전편의 장면과 이어서 보면 어째 이상한 부분이 여러가지 나온다. 아래의 사진과 설명을 참조.
1. 우선 14화에서 황건적 5만 명이 유비의 의용군이 진을 친 곳을 둥글게 포위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그 수에 놀란 유비의 짧은 독백 이후 곧바로 황건적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는데 2번째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황건적이 쏜 화살비는 정면이 아니라 유비의 머리 위 방향으로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알 수 있다.[47] 원형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이 일제히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 경우, 병사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방패를 들어서 머리와 측면을 보호하던가 하다 못해 엎드려서라도 화살을 피해야 하는데 어째 그런 모습을 보이는 병사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현실에서도 저렇게 되면 유비의 의용군은 날아오는 화살에 순식간에 전멸당할 위험이 매우 크다. 물론 이런 만화에서 그런 세세한 디테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어렵다면 애당초 무리해서 화살이 날아오는 불필요한 장면을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장비의 무용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넣은 무리한 구성이 아닌가 싶다.
2. 3번째 그림을 보면 장비가 쳐낸 화살들의 양, 그리고 화살이 떨어진 범위를 보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황건적들이 장비만을 겨냥해 쏜 것처럼 보일 정도. 하지만 분명히 이전 화에서는 유비의 머리 위로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에 화살이 떨어지는 범위가 꽤 넓어야 하는데 되려 범위가 장비 주변이 된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만약 14화와 15화의 묘사 둘 다가 맞는 게 되려면 장비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서 의용군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한 쪽 방향으로 처내거나(...) 아니면 배후나 측면의 병사들이 화살 맞아 죽든 말든 한 곳에서 날아오는 화살만 쳐냈다고 하면 되는데 둘 다 말이 안되는 소리다. 제 아무리 영웅 띄워주는 것으로 유명한 연의에서도 그런 초인은 없다. 장비가 병사들을 죽게 내버려 둘 위인도 아니고..
3. 위의 지적들을 다 떠나서 1번째 그림을 보면 포위한 황건적 군과 의용군 사이의 거리가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높은 포물선을 그릴 거 없이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하면 된다(...). 적이 가까이 있는데 굳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정확도만 떨어진다.
- 장비가 등무를 제압하면서 장팔사모의 뒷부분으로 명치를 세게 치자 등무가 토하며 괴로워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연의에서는 '등무의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刺中鄧茂心窩)'고 되어 있다.[48] 즉, 등무는 이 때 죽은 것인데 이 만화의 특징인 <장비 나이 = 현대의 고등학생> 이라는 방식이 유효하기 때문에 발생한 장면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나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된 애가 성인의 명치를 창으로 꿰뚫어 죽이는 장면은 보기 안좋긴 하지만 그런걸로 따지면 고등학생 되는 애가 학도병도 아니고 의용병으로 참전한다는 점도 이상하고 등무가 만약에라도 장비와 싸운 뒤에도 생존해 버리면 원전에 대한 왜곡이 된다.
14.1. 반박
장비의 과장된 액션은 만화라는 특성에서 볼 때 용납 가능한 수준이다. 우선 황건적의 포위 장면-황건적의 사격 준비 장면-하늘을 덮는 장면로 장면이 이어지며 마치 포위한 황건적이 전방위에서 화살을 날린 것처럼 보이나, 다음 화를 보면 적어도 만화 내에서 묘사된 바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화살이 날아오는 장면은 14화 끝 부분 유비의 시점이며, 15화에서 화살을 쳐내는 것 또한 유비 앞에 나선 장비이고, 해당 장면이 끝난 후에 화살이 널부러져 있는 것 또한 유비의 앞쪽뿐이다.
이를 볼 때 황건적은 전방위에서의 사격이 아니라 지휘관인 유비를 노린 집중사격을 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개이다.[49]
또한 전근대의 전투에서 보병진이 맨 앞에서 서고 궁병진이 그 뒤에서 곡사를 통해 아군을 보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아군 오사를 방지하기 위해 지근거리의 적에게 포물선을 그리는 곡사를 하는 것은 그리 큰 오류가 아니다.
현실성에 대한 지적은 결국 장비의 훨윈드로 귀결되는데, 이는 해당 작품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만화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이다. 당장 유명한 삼국지 만화로 손꼽히는 창천항로나 화봉요원에서도 이러한 과장된 무용 묘사는 빈번하게 나왔으며, 15화가 유관장 삼형제의 첫 출전으로서 그동안 개그캐로만 일관했던 삼형제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첫 무대라는 점에서 임팩트 있는 연출이 필요했음은 자명하다.
다만 등무는 일단 장비가 첫 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으나 실제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삼국지와의 오류가 맞다.[50]
15. 16화
유주태수 유언이 보도용으로 보낼 자료[51]를 작성하는 와중에 굉장히 상황이 절망스럽다는 듯이 결과가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명복부터 비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건 너무 오버스러운 장면이다. 당장에 대흥산 전투 다음에 곧바로 청주태수(青州太守) 공경(龔景)의 요청으로 청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으며 그 병력이 연의 기준으로 오천의 병사였다. 즉, 대흥산의 전투는 거진 의용병들만으로 이긴 것이고 유주에는 이미 황건적에 대비할 상비군이 존재했던 셈이다.참고로 유주는 치소가 위치한 계성(薊城, 오늘날의 베이징 일대)을 중심으로 한사군을 포함한 꽤 넓은 지역이었으며 오환, 선비, 고구려, 부여 등의 이민족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방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즉 유주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8개 주 중에 하나지만 그만큼 그에 맞설 군대 또한 갖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으로 인해 대흥산 전투 이후 유주만을 지킨 게 아니라 수하장수들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어 다른 주를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언은 정사에서는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고 연의 기준으로도 무능하다는 뉘앙스의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52] 그런데 삼국지톡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 파악과 전달의 부재로 결과적으로 유비 일행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 되었다.[53] 정사의 야심을 품은 유언이나 연의의 무난하게 인자한 관리 모두 아닌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해 버린 것이다.
16. 17화
- 노식이 '황실소속 관군 사령관'으로 등장해 마치 황실이 보낸 진압군 전체를 통솔하는 것처럼 묘사했는데 잘못된 묘사다. 일단 후한의 군대 자체를 통솔하는 것은 대장군이었고 당시에는 황건적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압군 역시 지역 별로 나뉘어졌다. 때문에 좌중장랑 황보숭은 연주와 예주와 같은 중원지역, 우중랑장 주준은 형주나 양주 같은 남부, 그리고 노식이 북중랑장으로서 장각의 근거지가 있던 기주 일대의 진압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해당 화에서의 표현보다는 '기주(북부) 방면 황실군 사령관' 등으로 표기했다면 훨씬 더 정확했을 것이다.
- 유비가 대흥산과 청주성 전투로 유명세를 타서 노식이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허술한 부분이 많다. 우선 연의에서 유비와 노식이 만나는 계기는 청주성 전투 이후, 노식이 기주 거록군의 광종에서 장각과 대치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유비가 추정에게 사정을 말해 유주의 군사를 추정 편으로 돌려보낸 뒤, 의용병 500만을 이끌고 만났고 거기서 노식이 기뻐한 것이다. 즉, 유비의 유명세 같은 건 없었고 청주성 전투가 한꺼번에 누락되다 보니 진행에 있어서 오류가 발생하고 그것을 메우려고 유명세라는 얼토당토 않는 장면을 넣은 것이다.
- 원소가 하진의 직속으로 등장하는데, 연의상에서 원소가 하진과 직접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십상시의 난 즈음이다. 십상시 건석이 하진을 죽이려다가 들통나자 하진이 친위대인 어림군(御林軍) 5천명을 원소에게 내린 것이 그 계기이다.
17. 18화
- 유비가 노식스쿨에 가서 학문을 배웠을 때 자신의 사정이 어려운 탓에 비뚤어져 수업에 집중을 못하다가 때려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연의에 정사를 혼합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면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정사와 연의에 등장하는 해당부분은 아래와 같다.
先主不甚樂讀書,喜狗馬、音樂、美衣服。
선주(유비)는 책 읽는 것을 아주 즐기지 않았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
- 삼국지 촉서 선주전
선주(유비)는 책 읽는 것을 아주 즐기지 않았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
- 삼국지 촉서 선주전
年十五歲,母使游學,嘗師事鄭玄、盧植,與公孫瓚等為友。
열다섯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유학을 보내어 일찌기 정현과 노식에게 배우고 공손찬 등과 벗했다.
- 삼국지연의
열다섯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유학을 보내어 일찌기 정현과 노식에게 배우고 공손찬 등과 벗했다.
- 삼국지연의
少語言,善下人,喜怒不形於色。好交結豪俠,年少爭附之。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에게 잘해줬으며 기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의로운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따랐다.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에게 잘해줬으며 기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의로운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따랐다.
즉, 유비는 차분하지만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즉, 삼국지톡에 등장하는 노식 앞에서 대놓고 보이는 우울한 모습은 유비의 본 성품과는 완전히 다른 묘사인 셈이다.
-
유비가 노식에게 학문을 배울 때 분명히
공손찬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는데 삼국지 톡 내에서의 묘사는
히키코모리처럼 묘사 되었다. 유비가 공손찬과 친하게 지낸 건 정사와 연의 모두에서 확인되는 장면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공손찬 등과 벗했다(與公孫瓚等為友)'는 표현이 등장하고, 정사에서는 '공손찬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선주가 형으로 섬겼다(瓚年長,先主以兄事之)'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나 해당 화에서 공손찬이 등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예 등장조차도 없다.
정사와 연의 모두를 씹어버리는 패기
- 유비가 노식에게서 배운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스스로 때려쳤다는 내용은 없다. 이는 정사나 연의의 공통사항이다. 정사에서는 유비의 학문 내용 다음에 소쌍과 장세평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연의의 경우는 28살에 유언이 방문을 내려 의군을 모집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즉, 둘 다 유비의 학문한 사실은 기술하고 있으나 다음 사건과의 중간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사와 연의에서 묘사된 유비의 성정으로 보면 스스로 때려칠 위인은 아니다.[54]
오히려 유비가 학문이 그만둔 것은 스승인 노식의 사정일 가능성이 높다. 『후한서(後漢書)』의 노식 열전에 보면 노식은 희평 4년(175년)에 구강에서 일어난 만족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병을 핑계로 물러났고, 상서장구(尚書章句), 삼례해고(三禮解詁)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황상 유비가 이 시기에 수학을 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55] 그러나 노식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집필을 했을 즈음에 다시금 부름을 받았고 이번에는 여강(廬江)의 태수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한 뒤에 의랑, 시중을 거쳐 상서(尚書)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유비가 학문을 그만두게 된 것은 유비가 현실상황을 못 견뎌서 때려친 게 아니라 남쪽에서 다시 발발한 만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식이 여강태수가 되어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노식스쿨(...)이 해체된 탓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유비가 학문을 그만두게 된 것은 유비가 현실상황을 못 견뎌서 때려친 게 아니라 남쪽에서 다시 발발한 만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식이 여강태수가 되어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노식스쿨(...)이 해체된 탓으로 보인다.
- 노식이 황건적을 이미 진압해 묶어두고 유비의 전화를 느긋하게 받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틀린 묘사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연의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時張角賊縱十五萬,植兵五萬,相拒于廣宗
그 때, 장각은 십오만의 황건적을 거느렸고, 노식은 병사 5만으로 광종에서 서로 겨루고 있었다.
그 때, 장각은 십오만의 황건적을 거느렸고, 노식은 병사 5만으로 광종에서 서로 겨루고 있었다.
즉, 북중랑장 노식이 이끄는 5만 군대는 장각의 병력과 '대치하던 상황'이었고 병력차가 15만과 5만이나, 장비와 전투숙련의 면에 있어서 관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서로 함부로 치지 못하는 대치국면이 된 것이다. 이는 정사와도 일치하는 부분인데 후한서의 노식열전에도 노식은 진영을 갖추고 참호를 판 뒤 공성무기인 운제(雲梯)를 사용해 적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 치밀한 계획은 영제가 보낸 환관인 소황문(小黃門) 좌풍이 뇌물을 요구했고 노식이 거절하는 바람에 모함해서 다 망해버렸다. 즉, 노식이 황건적을 상대로 여러 군데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 사실인데 그것은 '장각이 광종에 틀어박히기 전'의 일이라는 얘기다.
- 노식이 유비와 통화하면서 벌벌 떠는 황건적 앞에서 '근데 비야~ 너 알지? 역적 잡으면 원래 산채로 가죽 벗기는 게 나라법인거~?' 라는 말을 하는데 당시에 가죽을 벗기는 '정식' 형벌은 없었다.
한서형법지(漢書刑法志)에는 3000가지의 형벌을 기록하면서 크게 5가지의 형벌로 압축되는데 전한의
문제(文帝) 시기에 묵,의,월 의 형벌이 너무 잔혹하다고 해서 수위를 낮춘답시고 태형(笞刑) 등을 도입했는데 매질의 수가 너무 많아서 매 맞다 죽는(...) 사례가 흔했으며 죄인이 차라리 목숨이라도 건지게 신체 부위를 잘라 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한나라 시기의 형벌에 대한 것은 아래를 참조.
형벌명 | 의미 | 문제 시기의 변화 |
묵벌(墨罰) | 얼굴에 글을 쓴 뒤에 칼로 그 글자를 새겨버림 | 머리칼을 자른 뒤 변방으로 보내 성을 쌓거나 수비를 맡는 노역 |
의벌(劓罰) | 코를 베어냄 | 태형 300대 |
월벌(刖罰) | 무릎뼈나 발뒷꿈치를 잘라냄 | 태형 500대 |
궁벌(宮罰) | 생식기를 잘라냄 | 그대로 유지 |
대벽(大劈) | 사형 | 그대로 유지 |
중요한 것은 해당 화에서 언급된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방식'이라는 형벌이다. 사형인 대벽에는 목을 자르는 참수(斬首), 허리를 베는 요참(腰斬), 몸을 찢어버리는 거열(車裂) 등이 있었고[56] 해당 화의 언급과 가장 비슷한 형벌은 바로
능지(凌遲)로서 몸의 살을 조금씩 저며서 죽이는 방식인데, 이 방식은 한나라 시대에는 없었고 북송 시기부터 요형(剮刑) 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즉, 당시에 대역의 죄를 범한 이들은 형법에 따라 대벽을 적용해 목이나 허리를 베거나 몸을 찢어 죽이는 방식으로 처리되었지,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은 없었다는 것이다.[57] 후한서 노식열전에도 노식은 1만여 명의 황건적을 참획(斬獲), 즉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만 되어 있지 껍질을 벗겼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황건적의 진압에 대한 다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미 잡힌 황건적을 겁주기 위해 일부러 하는 소리라고 본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오류이기도 하다.
18. 19화
- 원소와 조조가 어린 시절에 만났다는 이야기는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지인소설[58]'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설신어의 가휼(假譎) 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魏武少時, 嘗與袁紹好為游俠
위무제는 일찍이 원소와 더불어 유협하기를 좋아했다. (후략)
위무제는 일찍이 원소와 더불어 유협하기를 좋아했다. (후략)
조조가
장수를 칠 때 병사들에게 매실 밭이 있다고 속인 망매해갈(望梅解渴)의 일화 또한 세설신어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연의에서 세설신어를 많이 인용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세설신어 자체가 창작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모종강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더군다나 세설신어의 이야기 그대로도 아니고[59] 꼬마 원소가 꼬마 조조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욕을 먹는(...) 장면은 세설신어에도 등장하지 않는 말 그대로 작가의 창작이지만, 삼국지연의를 전혀 접하지 않은 독자들은 그게 실제로 있는 에피소드라 믿을 수도 있다.[60]
- 어린 원소가 처음 보는 어린 조조의 머리를 쓰다듬는 무례한 행동을 하는데[61] 어떻게 보면 어린애들끼리 하는 행동이라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원소가 속한 원씨 가문이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낸 집안이지만 조조의 할아버지인 조등은 무려 전 황제인 환제를 황위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당시 환관과 함께 외척을 몰아내는데 힘을 보탠 탁류파와 그런 탁류파에게 배척 받은 청류파 모두에게 존경 받던 인물이었다.[62][63] 즉, 원소가 정말 저런 짓을 했고 조등이 불쾌해 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아마도 원씨 가문은 탁류와 청류 양쪽의 압박을 받았거나 설령 그냥 넘어갔다 치더라도 나중에 양아버지인 '원성'이 원소의 볼기짝(...)을 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조조가 원소의 머리를 쓰다듬어도 원소가 꾹 참아야 하는 상황인데 반대로 묘사된 셈이다.
게다가 원소는 당시에 무시 당하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저런 행동 자체가 위험한 짓이었다. 게다가 원전의 원소 역시 기본 성격은 오만했지만 적어도 타인을 의식해 예의는 차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 조조가 영천(穎川) 전투에서 황건적의 수급 1만여개를 얻은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연의에서도 동일하게 말하고는 있으나 조조를 너무 띄워준 감이 없지 않다. 연의의 기록으로만 보면 황건적은 좌중랑장 황보숭과 우중랑장 주준이 이끄는 관군과 영천에서 싸웠으나 결국엔 밀려 장사(長社) 방면으로 달아났고 풀을 엮어서 진영을 갖췄다. 그러자 주준과 황보숭은 바람의 방향을 살핀 뒤 경비가 허술해진 2경(밤 10시)에 불을 질러 황건적들을 당황시킨 뒤 공격했다. 결국 불과 관군의 공격에 무너진 황건적들은 부랴부랴 갑옷도 못 입은 채 달아났고 조조는 그런 황건적을 가로막은 뒤 공격해 궤멸시킨 것이다. 즉, 밥은 주준과 황보숭이 다 차리고 조조는 거기에 숟가락만 얹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작가진도 이를 알고는 있는지, 작가의 말에서 황보숭과 주준이 적을 물리치고 조조는 퇴각하는 적을 공격해 수급을 취했다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작 작품 내에서는 황보숭과 주준은 얼굴도 나오지 않았고 그들의 활약상은 아예 생략했다. 전투 승리와 황건적의 목을 베는 모습을 통해 냉정하고 때에 따라 잔혹해질 수 있는 조조의 캐릭터성을 유비와 대비시키기 위해 일부러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64]
- 작가의 말에서 '주준'을 '조준'이라고 썼다.
19. 20화
- 작가의 각색 영역이긴 하지만, 실제 연의에서 영천-장사 전투에서 조조와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해당 연의의 본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卻說玄德引關、張來潁州,聽得喊殺之聲,又望見火光燭天,急引兵來時,賊已敗散。玄德見皇甫嵩、朱雋,具道盧植之意。嵩曰:“張梁、張寶勢窮力乏,必投廣宗去依張角。玄德可即星夜往助。”玄德領命,遂引兵復回。
한편 현덕은 관우, 장비를 이끌고 영주에 왔는데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까지 비추는 불빛이 보였다. 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 도적들은 이미 패해 흩어진 상태였다. 현덕은 황보숭과 주준을 보고는 노식의 뜻을 상세히 알렸다. 황보숭이 말했다. "장량, 장보는 세력이 궁해지고 힘이 모자라니 반드시 광종의 장각을 의지하러 달려갈 것이네. 현덕은 곧바로 별이 뜬 밤일 때[65] 가서 도우시오." 현덕은 명을 받들어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한편 현덕은 관우, 장비를 이끌고 영주에 왔는데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까지 비추는 불빛이 보였다. 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 도적들은 이미 패해 흩어진 상태였다. 현덕은 황보숭과 주준을 보고는 노식의 뜻을 상세히 알렸다. 황보숭이 말했다. "장량, 장보는 세력이 궁해지고 힘이 모자라니 반드시 광종의 장각을 의지하러 달려갈 것이네. 현덕은 곧바로 별이 뜬 밤일 때[65] 가서 도우시오." 현덕은 명을 받들어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이후의 장면이 노식이 수레에 끌려서 압송되는 장면이며 조조와 유비가 대화하는 장면은 아예 없다. 왜냐하면 유비의 의용군은 전투가 이미 다 완료된 상태에서 뒤늦게 도착했고 곧바로 노식의 명령을 황보숭과 주준에게 보고한 뒤 황보숭의 명으로 곧바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
황제에게 장수의 공과(功過) 등을 보고하는 직위는 '황문시랑(黃門侍郞)'이지, 감찰관이 아니다. 애당초 감찰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직위 자체가 당시에 없었으며 감찰관은 어이없게도
고대 로마의 직위이다. 당시의 명칭은 켄소르(Censor). 주로 하는 일은 인구조사, 공중도덕 감찰, 재정 감독 등이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다른 나라 직위까지 들고 나온건가노식이 뇌물을 안 주자 곧바로 영제에게 달려가 모함했던 환관 좌풍(左豊) 역시 소황문(小黃門), 즉 황문시랑이었다. 아마도 작가가 나중에 유비에게 시비를 거는 독우(督郵)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독우는 군(郡) 아래의 현(縣)을 감독하는 직위이다. 우습게도 연의 본문에도 좌풍의 직위는 황문(黃門)이라고 버젓이 등장한다.이쯤되면 연의를 읽고 작업을 하는건지 의심이 될 지경
- 연의에서 논공행상이 이루어진 것은 황보숭이 곡양(曲陽)에서 버티던 장량을 죽이고 장각의 묘를 부순 뒤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낸 뒤에야 이루어졌다. 즉, 해당 화에서 논공행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너무 빠른 전개인 셈이다. 해당 화에서 아직 장보, 장량은 물론이고 장각이 죽었는지도 언급이 안되는데 벌써부터 논공행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부분이다.
- 정사를 인용해 조조가 발령을 받게 되는 청주 제남국을 고담시티급이었다고 묘사했는데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해당 기사는 아래와 같다.
國有十餘縣,長吏多阿附貴戚,贓污狼藉,於是奏免其八;禁斷淫祀,姦宄逃竄,郡界肅然。
제남국엔 10여개의 현이 있었는데 많은 장리들이 귀척(황제의 친인척)들에게 아부했으며 더러운 뇌물을 받고 거칠고 고약하게 짓밟으니 이에 그 중 8명을 아뢰서 면직해 바로 잡고 음사(민간제사)를 금지하니 간악한 도둑들은 도망가 숨었고 군의 경계가 숙연해졌다.
- 삼국지 위지 무제기
제남국엔 10여개의 현이 있었는데 많은 장리들이 귀척(황제의 친인척)들에게 아부했으며 더러운 뇌물을 받고 거칠고 고약하게 짓밟으니 이에 그 중 8명을 아뢰서 면직해 바로 잡고 음사(민간제사)를 금지하니 간악한 도둑들은 도망가 숨었고 군의 경계가 숙연해졌다.
- 삼국지 위지 무제기
물론 해당 화의 설명에 나온 것처럼 제남의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위서(魏書)에 보면 '이전의 상들은 보이는 것을 들추지 못했다(歷前相不見舉)' 라는 표현과 '제남은 (사당 건축이) 더욱 번성해서 사당이 600개에 이르렀다(濟南尤盛 至六百餘祠)' 는 표현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애당초 청주 성양국(城陽國)에 부임한 귀척인 경왕(景王) 유장(劉章)이 자신이 세운 공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그 때부터 유행을 타듯이 음사, 즉 유교의 제사가 아닌 다른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우는 일이 청주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66] 제남은 그러한 부패가 청주의 다른 곳보다 좀 더 심했을 뿐이지 제남만이 고담시티처럼 헬게이트였던 건 아니다. 고담시티의 치안이 불안정한 것은 정부기관에 의한 수탈과 피폐보다는 조커나 펭귄, 베인 등이 저지르는 '강력범죄'와 더 큰 연관이 있다.
- 관우도 유비, 장비와 함께 영천 방면으로 이동했다. 해당 화의 묘사처럼 광종의 노식 곁에 있지 않았다. 아마도 노식이 붙들린 상태에서는 핸드폰을 쓸 수 없으니까 대신 연락망 역할을 해주려고 설정한 거 같은데, 연의처럼 묘사했으면 사실 해결 가능한 부분이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돌아가던 중에 노식을 호송한 수레행렬과 마주치기 때문.
20. 21화
- 노식이 환관 좌풍의 모함으로 체포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사유가 '근무태만' 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18화에서 노식은 (삼국지톡 한정으로) 광종의 황건적들을 제압한 상태였고 이미 조정에서 내린 임무를 완료한 상태였기 때문에[67] 좌풍이 노식을 근무태만으로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좌풍이 백성의 고발을 꾸며대[68] 모함한 것으로 등장하고 있으나 애당초 연의에는 없는 장면이고 어색하기는 매한가지다.
해당 부분에 대한 연의의 기술을 보면 노식이 유비를 황보숭에게 보낸 후 계속해서 광종의 황건적과 대치했으나 장각의 요술로 인해 번번히 제압에 실패해 장기간 대치중이었고[69] 그 타이밍에 좌풍이 등장해 아직까지 제압을 못한 노식을 근무태만의 죄를 물어 모함한 것이다. 즉,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지지부진 하고 있는 노식을 '근무태만' 이라는 죄목으로 모함한 것이다. 적어도 상황정리가 끝난 상황에서 얼토당토 않게 모함하고 그게 먹히는 삼국지톡의 묘사보다는 훨씬 매끄럽다.
- 사실 노식이 등장하면서부터 있었던 문제인데 노식이 투구가 아닌 관모(官帽)를 쓰고 등장하는 점이다. 물론 애당초 장르가 고전과 현대를 퓨전한 것인데다 유,관,장 삼형제도 자유로운 복장이라서 지적하기 애매하다는 점은 사실이며 노식이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과거에 구강과 여강의 만족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으며 당시에는 북방의 황건적을 진압하기 위해 북중랑장에 임명된 '장수'였다. 즉 노식의 현재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70] 만약 노식이 제갈량이나 방통, 순욱 등과 같이 참모의 역할이었으면 어느정도 감안할 수 있는 부분이나 본인이 군을 직접 통솔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잘못된 묘사인 셈이다.
- 노식이 20년 전에 벼슬을 때려친 것으로 등장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은 연의에서는 황건적 시기의 중랑직을 제외하고는 노식의 관직 생활에 대한 내용이 아예 등장하지 않으니 정사를 참조할 수 밖에 없다. 아래의 표를 참조.[71]
연대 | 노식의 벼슬 | 사건 |
건녕 이전 | 백수 | 외척 두무에게 스스로 공치사 하지 말라고 건의했으나 무시됨 |
건녕(建寧, 168년 - 172년) | 박사(博士) | 관직생활 시작 |
희평(熹平) 4년(175년) | 구강태수, 여강태수 | 구강 반란 진압, 낙향, 석경[72] 관련 상소 제출, 여강 반란 진압 |
희평 5년(176년) - 광화(光和, 178년 - 184년) | 의랑, 시중, 상서 | 중앙관직 생활 재시작 |
중평(中平) 원년(184년) | 북중랑장 | 황건적의 난 진압 |
즉, 노식은 그만두고 1년도 안 되게 쉬면서 학생들 가르치고 저술 작업을 했다가 다시 추천받아 여강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조정에 복귀한 셈이다. 그리고 활동한 거 보면 쉰 거 같지도 않다 그리고 최초의 관직생활을 건녕 1년(168년)에 했다고 해도 중평 원년(184년)에서 해당년을 빼면 16년 정도다. 즉, 20년이라는 관직 생활은 나올 수가 없는 셈이다. 게다가 삼국지톡 내의 묘사처럼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학생을 가르친 건 희평 4년(175년)이고 이 역시 황건적 시기와 계산하면 겨우 9년 밖에 안 된다. 이래저래 오류 투성이다.
- 10화에서 나온 오류인 내시=환관이 또 나왔다. 노식의 X까라는 말에 환관 좌풍이 "내시라서 더 깔게 없다"고 대답한다. 상술된 바와 같이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서 내시는 절대 환관이 아니다. 다만 "삼국지톡의 세계관에선 내시=환관이라는 설정"이라고 설명한다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인데, 그렇다면 허저도 반드시 환관으로 묘사해야 한다. 허저는 비중의 차이는 있어도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인데, 허저를 환관으로 묘사한다면 작중 세계관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왜 환관이 아닌 인물을 환관으로 묘사했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허저를 환관이 아닌 평범한 인물로 묘사한다면, 내시=환관이라는 작중 세계관이 붕괴되는 셈이다. 즉 삼국지톡의 내시=환관 설정은 현재로선 어느 쪽으로든 모순을 피하기 힘든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21.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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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의 친구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중 '소소'라는 여학생이 장비의 자퇴 사실을 알고는 수능 안 볼거냐, 대학 안갈거냐고 따지듯 얘기를 하는데 당시 현대의 대학과 가장 비슷한 개념으로는 태학이 있는데, 높은 관리 집안이 아닌 일반 학생들은 시험 등을 보는 게 아니라 지방 관리들의 추천이 있어야만 입학이 가능했다. 다른 학교로는 당대의 황제였던
영제가 서책을 모아놓고 태학의 학생들을 불러모은 홍도문(鴻都門)이라는 게 있었으나 말이 좋아 학문기관이었지 학문보다는 예술 쪽에 치중된데다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만 우글거려서 당시의 군자들은 수치스럽게 여겼고[73] 나중에 영제가 집안은 별 볼일 없는데 재력을 갖춘 학생들에게 벼슬을 팔아먹는 장소로 써먹었다(...). 또 다른 특수 학교로는 사성소후(四姓小侯)라는 게 있었는데 외척 가문이었던 번씨(樊氏), 곽씨(郭氏), 음씨(陰氏), 마씨(馬氏) 등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74]
말 그대로 귀족학교즉, 수능과 대학이라는 것은 당대의 상황과는 너무 맞지 않은 지극히 현대적인 요소로서 장비에게 자꾸 현대 고등학생의 이미지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생긴 오류다.
- 노식이 노식이 [콕콕 법과사회] NoSick쌤의 앓지마! 오답정리라는 내용으로 강연 장면이 등장하는데 노식이 가르친 것은 '경학(經學)'이었고[75] 경학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역경, 서경, 시경, 악경(樂經), 예기, 춘추로 분류되는 육경(六經)이었기 때문에 법률에 대한 부분은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 소하가 정했다고 하는 법률서인 구장률(九章律)이 경학에 포함되어 '율경(律経)'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긴 했지만 유비가 노식에게 갔을 때의 겨우 나이가 15세[76]였기 때문에 배우기에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 되었지만 유비 본인도 책 읽는 건 안 좋아했었고(...) 노식이 탁군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친 기간이 상당히 짧았다.
- 관우가 장비와 함께 나선 것처럼 묘사되나, 연의에서는 오로지 장비만이 날뛰었고, 관우는 나서지 않았다. 다만 관우도 상황 파악을 했는지 노식이 군사들에 의해 끌려간 뒤에 '노 중랑장도 체포되고 다른 이가 군을 지휘한다고 하니 우리가 가봐야 의지할 곳이 없다. 탁군으로 돌아가자'는 말만 했다.
- 작가의 말 부분에 유비가 장비를 가로막으며 "조정에서 나온 자들이니 안된다" 라고 말했다는 부분이 있다. 해당 표현은 조정에서 나온 이들(높으신 분들)이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로 풀이가 되는데 연의 원문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朝廷自有公論 汝豈可造次?
조정에 정해진 공론이 있는데 네가 어찌 급하게 구느냐?
조정에 정해진 공론이 있는데 네가 어찌 급하게 구느냐?
즉, '나라에서 정해진 바가 있는데 네가 왜 나서려 하냐' 는 말로서 북중랑장 노식에 대한 처우를 나라에서 정했으니 그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분명 같은 상황을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유비의 발언에 담긴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셈이다.
22. 23화
- 노식이 자신을 붙잡아 가는 호송인원들을 그냥 보내는 유비에게 내심 감탄하며 '나 원 참, 성난 망아지 같더니 언제 저리 어른이 됐는고?'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이미 18화 항목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유비의 성격은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에게 잘해줬으며 기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의로운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거기에 연의에서는 한실(漢室)의 의사를 존중하는 태도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비의 저런 행동은 어느 정도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반에는 유비를 니트에 가깝게 묘사하고 유비의 성격 자체도 작가의 임의대로 정사 및 연의와는 완전 다르게 묘사한 터라 사실상 의미없는 지적이기도 하다.
- 유비가 노식이 잡혀간 후 갈 곳이 없음을 상당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삼국지톡에서의 내용만 가지고 보면 상당히 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유비가 모은 의용병은 대부분 장비의 개인 재산으로 모았고, 말과 추가 의용병 징병은 소쌍과 장세평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노식을 도우러 갈 때도 유주의 군사 없이 의용병만 끌고 갔으니 결국 정식으로 후한 정부에게서 받은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된다. 그리고 노식에게서도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 유비가 의용병을 끌고 가려다가 이미 상황정리가 된 탓에 영천 방향으로 곧바로 이동했기 때문. 애당초 도움 받은 적이 없으면서 도움 받을 곳이 없다고 걱정하는 게 모순이다. 그리고 유비의 의용병들은 모두 탁군 출신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단락 되었다면 응당 고향에 돌려보내는 게 맞다. 유비의 저런 행동은 자신을 따른 의용병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77]
-
탁군으로 돌아가자는 관우의 말에 장비가 관우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연의에서는 충돌 그런 거 없었고 얌전히 돌아갔다. 애당초 연의의 장비는 푸줏간 일 말고는 얽매이는 일이 없었기 때문. 해당 만화의 장비는 작가가 현대식 고등학생이라는 형태를 자꾸 강조하기 때문에 관우의 탁군 귀환 얘기에 발끈하는 것이다.
유비라는 이름의 비트코인에 전재산을 몰빵 했는데 떡락한 채로 돌아가자고 하니 화딱지가 날만도 하다.
23. 24화
- 관우와 장비가 유비 몰래 문자를 주고받을 때 유비가 개와 말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78] 그러면서 부연 설명으로 '개와 말을 사랑한다'는 말에 대해 '허세에 찌든 개노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일단은 맞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의 제 9편인 '여덟 가지 간악함(八姦)'에도 4번째 재앙으로서 '기르는 재앙(養殃)'이 등장하는데 '미남과 미녀, 말과 개를 꾸미며 그것을 즐기는 마음(好飾子女狗馬以娛其心)'과 '세금을 무겁게 하고 그것으로 자녀와 개,말을 꾸미는 것(重賦歛以飾子女狗馬)'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여러 사서에서도 '구마(狗馬)'라는 말이 '사치'의 대명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나 말은 사냥에나 쓸모 있었기에 대단한 사치품'이라는 말은 엄연히 따지자면 아니다. 이미 18화 부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말은 사냥에도 이용되었지만 우선은 군에서의 기마병 운용을 위해 황실에서도 사육이 활발했으며 민간에서는 농사, 운송, 이동 수단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필수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개 역시
투견이나
애완견으로 기르는 것 말고도
수렵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마냥 사치품이라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말의 경우는 작가가 '대단한 사치품'으로 언급해 버리는 순간 18화에서 버스를 대절할 돈이 없어 장세평과 소쌍에게 말을 받은 유비의 행동은 '대단한 사치행위'가 되어 버린다(...).
- 유비가 천공장군(天公將軍) 깃발을 든 황건적에게 포위된 차량을 구해 주려다가 유비와 관우가 '새 중랑장이 덕장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구해줄까 말까 망설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원본인 연의에서는 유비가 의용병을 이끌고 탁군으로 돌아가던 중, 천공장군 깃발을 든 황건적에게 관군이 밀리는 것을 보고는 일단 구해줬고 동탁과는 나중에 통성명을 나눈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연의의 유비는 위기에 처한 관군을 따지지 않고 일단 바로 도와주었으나, 삼국지톡에서의 유비는 관군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았으나 동탁에 대한 '악평'을 듣고 구원 행위를 저울질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24. 25화
-
동탁이 자신의 공을 높이기 위해서 황건적 병력의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습격을 받게 만든 부하를 황건적으로 변장 시켜서 목을 치고 황제에게 바치라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춘추시대의
진(晉)나라 이전에는 공을 세운 증거로 적의 머리를 잘라 말 등에 달아야 했으나 진나라는 그런 불편한 부분을 바꿔 적장의 머리에서 잘라낸
귀를 입공의 징표로 삼았다.[79][80] 출처인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의 글을 더 인용하자면, 한자 중 馘(괵)은 여기에서 나온 글자로 그 자체로도 '귀를 자르다' 라는 뜻이며 '용감(勇敢)'라는 단어의 '감(敢)'은
파자를 할 경우 '공(攻)'과 '이(耳)'가 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해 귀를 잘라오는 (용기있는) 행위'를 뜻한다.
전쟁 중에 귀를 자르는 행위는 현대에도 계속 되었는데 6.25 전쟁 당시에 반공유격대, 이른바 '동키부대'가 미군의 무기를 지원받기 위해 인민군의 군화나 귀를 잘라와야 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 즉, 동탁이 정말로 적공을 위해서 아군까지 희생시켰다면 불필요하게 무겁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목이 아니라 귀를 잘라 모았을 것이다. 그리고 목을 잘라 황제에게 바치는 것은 적의 수괴나 요주의 인물을 죽였을 시에나 하는 것이지[81], 잡졸병을 죽여서 무작정 보내는 것이 아니었으며 함부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군주를 기망한 죄를 받을 수도 있었다.
- 동탁의 수하가 동탁이 부른다면서 유비를 부를 때 "탁군 유현덕?" 이라고 부르는데 연의에서는 동탁은 구원을 받은 시점에도 이들의 이름이나 출신 지역 같은 건 전혀 몰랐다. 해당 부분은 아래와 같다.
三人救了董卓回寨. 卓問三人現居何職. 玄德曰 "白身". 卓甚輕之 不為禮.
세 명(유,관,장 삼형제)은 동탁을 구해 목책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세 명의 현재 직위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덕이 "백신(벼슬이 없음)입니다."라고 말하자 동탁은 매우 업신여겼고 예를 갖추지 않았다.
세 명(유,관,장 삼형제)은 동탁을 구해 목책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세 명의 현재 직위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덕이 "백신(벼슬이 없음)입니다."라고 말하자 동탁은 매우 업신여겼고 예를 갖추지 않았다.
즉, 동탁은 이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고 직급부터 물었으며 벼슬이 없다고 하자 무시한 셈이다.
25. 26화
- 동탁은 유비에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한 적이 없다. 연의에서의 표현은 동탁이 자신을 구해준 유비가 직책이 없다는 것을 안 후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 외에는 자기 밑으로 오라 권하지도 않았다. 애당초 연의의 동탁은 성격이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 격인지라 벼슬도 없고 의용병이나 끌고 다니는 유비를 들일리가 없었다.
- 위와 같은 장면에서 나름 정사를 반영한답시고 후한서 동탁열전에 나온다는 '거칠고 사나웠으나 호걸을 만나면 대접하다'라는 구절을 써놨는데 해당 본문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性麤猛有謀 少嘗遊羌中, 盡與豪帥相結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나 꾀가 있었고 어린 시절 강족 사이를 떠돌며 뛰어난 장수들과 서로 더불어 사귀었다.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나 꾀가 있었고 어린 시절 강족 사이를 떠돌며 뛰어난 장수들과 서로 더불어 사귀었다.
즉, '꾀가 있다(有謀)' 라는 표현과 '어린 시절 강족 사이를 떠돌며(少嘗遊羌中)' 라는 부분을 빼고 서로 붙여버린 것이다. 특히 뒷 구절의 경우는 강족 중에서 뛰어난 장수감들을 그것도 어린 시절에 사귀었다는 얘기지, 호걸이라고 무작정 다 사귄 게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이 정도면 자기 입맛에 맞게 사료를 일부만 잘라내어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21컷 부분에 설명처럼 아래와 같은 말이 써 있다.
[연의] 장비, 동탁의 수하가 되느니 떠나겠다며 질색하다.
하지만 연의에서 실제로 나오는 구절은 상당히 다르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삼국지톡의 장비가 동탁이 싫어 형님들과 떠난다는 식의 표현이라면 원본의 장비는 동탁을 죽이지 못한 분을 못 이겨 만약 형님들이 저 놈 밑에 남을거면 난 딴 길 가겠다고 엄포를 부리는 것이다.
若不殺這廝, 反要在他部下聽令, 其實不干! 二兄要便住在此, 我自投別處去也!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되려 저 놈의 무리 밑에서 굽실거리면서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그건 진짜 싫소! 두 형님이 굽히면서 편하게 살 거라면 나는 스스로 떠나서 내 갈 곳으로 갈 것이오!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되려 저 놈의 무리 밑에서 굽실거리면서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그건 진짜 싫소! 두 형님이 굽히면서 편하게 살 거라면 나는 스스로 떠나서 내 갈 곳으로 갈 것이오!
장비가 그만큼 정의롭지만 괄괄하고 앞뒤 안 살피는 조급한 성격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렇게 묘사를 한건지 의문이다.
- 탁군으로 돌아가려는 유비에게 강동의 호랑이 양반이 연락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유비와 손견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고 두 사람이 처음 마주치는 것은 무려 형주의 완성(宛城)에서 벌어진 전투 막바지이다. 연의에서의 행보를 보면 유비는 동탁에게서 나온 뒤 주준을 찾아가 함께 움직였는데 아래와 같다.
- 장각의 아우이자 지공장군(地公將軍)인 장보를 토벌해 양성으로 몰아넣음.
- 양성 전투에서 마침내 장보를 죽임.[82]
- 황건적의 장수인 조홍, 한충, 손중이 군을 이끌고 반항하기 시작함.
- 주준이 철기병으로 이들을 격파, 세 장군은 완성으로 후퇴해 농성.
- 식량이 떨어진 황건적의 항복을 거절한 뒤 격파.
- 황건적을 이끌던 조홍이 많은 군사로 주준을 공격해 주춤하게 하고 완성을 다시 탈환.
- 손견의 군대가 달려옴.
- 양성 전투에서 마침내 장보를 죽임.[82]
- 황건적의 장수인 조홍, 한충, 손중이 군을 이끌고 반항하기 시작함.
- 주준이 철기병으로 이들을 격파, 세 장군은 완성으로 후퇴해 농성.
- 식량이 떨어진 황건적의 항복을 거절한 뒤 격파.
- 황건적을 이끌던 조홍이 많은 군사로 주준을 공격해 주춤하게 하고 완성을 다시 탈환.
- 손견의 군대가 달려옴.
즉, 지금 현 시점에서 손견이 튀어나온 걸 보면 예전 청주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주준과 유비가 세울 공로와 황보숭 및 조조의 광종 점령이 대거 삭제될 수도 있다.어째 유비가 연의에서 보다 훨씬 잉여로 묘사된다. 작가가 전투 장면이 그리기 싫은건가? 그리고 27화에서 사실이 되었다.
26.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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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려했던 것처럼 장보가 죽는 양성 전투와 유비의 활약상이 모두 누락되었다.
이쯤되면 작가가 유비 안티가 아닌가 싶을 정도[83]아니 근데 이러면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걸 도대체 뭐라고 설명할 생각인거지?
- 주준의 직급을 북중랑장이라고 써놨는데, 당연히 틀린 말이다. 북중랑장은 노식과 그 후임인 동탁이 있었던 자리고, 당시 주준은 우중랑장이었다.[84]
中平元年, 黃巾賊起, 四府舉植, 拜北中郎將, 持節
중평 원년(184년), 황건적이 일어나자 4부는 노식을 천거했고 북중랑장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렸으며...
- 후한서 제 64권 노식열전
중평 원년(184년), 황건적이 일어나자 4부는 노식을 천거했고 북중랑장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렸으며...
- 후한서 제 64권 노식열전
及黃巾起, 公卿多薦儁有才略, 拜為右中郎將, 持節
황건적이 일어나고, 공경의 다수가 주준이 재주와 꾀가 있음을 추천하자 우중랑장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렸으며...
- 후한서 제 71권 주준열전
황건적이 일어나고, 공경의 다수가 주준이 재주와 꾀가 있음을 추천하자 우중랑장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렸으며...
- 후한서 제 71권 주준열전
이러한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연의]라는 표기를 넣었지만 정작 삼국지연의에서는 노식, 황보숭, 주준의 직위를 세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통틀어서 중랑장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연의를 충실하게 반영했다고도 보기 어렵다. 삼국지톡에서 좌중랑장, 우중랑장, 북중랑장의 세부적인 직위 구별을 하려면 결국 정사를 인용해야 하는데 결국 엉터리로 인용된 셈.[85] 게다가 후한서의 기록을 더 보면 주준은 영천, 여남, 진국 등에서 황건적을 소탕한 공적을 인정받아[86] 진적중랑장(鎮賊中郎将)에 서향후(西鄉侯)로 진급한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우중랑장도 아닌 한 단계 더 진급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지톡에서의 오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후담으로 이 오류는 2018년 9월 7일 경에 바로잡혔다.
- 손견이 혼자서 성벽을 오르고 유비가 아래에서 그걸 감탄하며 지켜보는 장면[87]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전개는 연의와는 꽤 다르고, 좀 더 과장된 묘사로 볼 수 있다.
조홍 등이 완성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농성 상태로 들어가자 주준은 10리 밖에 영채를 세우고는 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고, 그 때 손견의 군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주준은 작전을 짜서 손견은 남문, 유비는 북문, 자신은 서문을 공격하고 동문은 비워두기로 했는데[88] 결국 남문으로 간 조홍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기행을 선보인 손견의 손에 죽었고 북문으로 가려던 손중은 유비가 날린 화살에 죽었다.
중요한 것은 유비가 손견과 있다는 것은 둘의 공격로가 일치한다는 얘기가 되고, 또한 완성의 황건적인 손중이 언급조차 없는 거 보면 유비가 손중을 죽이는 장면은 또 생략될 것으로 보였으나 29화에서 손중이 뜬금없이 등장해 유비의 화살에 목이 꿰뚫려 죽는 장면이 등장한 탓에 해결되었다.
27.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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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견의 부인인 오씨의 이름이 오국태(吳國太)라고 나오고 부가설명으로 [정사]라고 붙인 뒤 이름이 아니라 '대비마마'와 같은 존칭이라는 설명이 등장하는데 일단 국태가 이름이 아니라 존칭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태부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후한-삼국시대 당시의 용어가 아니다.
당나라 시절에 1품 관리나 황족의 어머니, 혹은 부인에게 내리던 봉작인 '국부인(國夫人)'이 원조로서
오대십국시대부터 클 태(太)자를 넣어 '국태부인'으로 불렀다.
금병매가 북송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명나라 시기의 생활사를 담고 있는 것처럼 삼국지연의도 후한 말을 무대로 하지만
지어진
시기의 언어생활이 반영된 것 이다. 후한 당시에 황실의 여성들에게 내려지던 봉작은 주로 군(君)[89]이나 부인(夫人)[90]이었다.
이 부분만 보자면 삼국지연의 그 자체의 오류이기 때문에 작가에게 잘못이 없어 보이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정사'라 묘사한 점이 문제다. 정사 삼국지 오서(吳書)에는 오씨의 열전인 오부인전을 비롯한 어느 기록에도 오국태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 22컷 부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연의] 손견 가문, 시골 젊은이들 1500명을 모아 황건적 토벌군 일으키다.
물론 연의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소리다. 연의에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今見黃巾寇起, 聚集鄉中少年及諸商旅, 并淮泗精兵一千五百余人, 前來接應.
이제 황건의 도적들이 일어나자 시골의 젊은이와 장사치, 나그네를 모두 모았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의 정병 1천 오백 여명을 더해 먼저 온 것이다.
이제 황건의 도적들이 일어나자 시골의 젊은이와 장사치, 나그네를 모두 모았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의 정병 1천 오백 여명을 더해 먼저 온 것이다.
즉, 시골의 젊은이와 장사치, 나그네를 모은 건 사실이나, 천 오백 여명의 인원들은 서주와 양주(揚州)에 배치된 정병, 즉 정예병이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젊은이 등+1500명 정병"으로 무조건 1500명보다 많다는 뜻이 된다. 작가가 26화에서 정사의 동탁의 기록을 제멋대로 잘라 인용했다면, 이번에는 연의의 기록을 뭉떵하게 서술한 것이다.
- 24컷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정사] 경직된 사회 분위기상, 손견같은 지방 실력자도 대명문가가 까라면 까야했다.
정사에서 손견을 기록을 보자면 양명황제(陽明皇帝)를 칭하던 도적 허창(許昌)과 그 아들 허조(許詔)를 토벌하면서 염독(鹽瀆), 우이(盱眙), 하비(下邳)의 승이 되었고 황건적의 난이 터지자, 우중랑장 주준이 조정에 표를 올려서 손견을 좌군사마(佐軍司馬)로 삼아 달라고 했고[91] 이에 손견이 연의의 기록과 일치하게 상인들 및 회수와 사수의 정병 천여 명을 모집해 주준을 도우면서 전공을 세웠다.
정리하자면 주준은 당시에 승에 불과한 손견을 직접 추천해 공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고 손견은 그에 응해 병사가 될 인원들을 이끌고 간 것이다. 그것을 까라고 해서 깐 거라고 본다면 주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배은망덕에 가까운 표현이다. 게다가 손견의 벼슬이었던 승 자체가 태수를 보조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대명문가가 까라면 깐다'는 식의 표현은 상당히 부적절한 묘사다.
나중에 등장하는 원술과의 관계를 의식한 발언이라면 그거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 원술과 주종으로 보일 정도로 친밀한 제휴 관계를 맺었으나 그건 그 때의 문제지, 원술이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명문가가 까라면 까야했다는 발언을 한다는 건 상당히 뜬금없는 셈. 게다가 정사에서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破虜將軍)[92]으로 추대하고 손견이 자신의 지시로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다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손분(孫賁)이 남은 병력을 끌고 자신에게 오자 조정에 표를 올려 손분을 예주자사로 추대하기도 했다. 즉, 손견이 좀 손해 보긴 했어도 삼국지톡에서의 표현처럼 무조건 까는 게 아니라 서로 이익이 맞아 함께 행동한 것에 가깝다.
28.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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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이 유비에게 톡을 보내 '왜 성문 앞이 텅텅 비었냐' 고 따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미 이전 화의 지적 부분에서 언급되었듯이 원전에서는 주준과 유비, 그리고 손견이 각 성문을 공격하고 오직 동쪽 문만 비워놓는 방법을 채택했다. 즉 연의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주준이 지시한 작전대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작전을 알고 있는 손견이 유비에게 따지는 장면이 되려 이상한 장면이 되는 셈이다. 삼국지톡에서
손견의 활약상에만 치우쳐주준, 손견, 유비가 성문을 각각 공격할 것을 구상하는 장면을 누락시킨 탓에 발생한 오류라 볼 수 있다.
- 유비가 손견과의 톡을 통해 '얘네(황건적) 문잠그고 버티다보니까 식량 진작 떨어졌던 듯...ㅠㅠㅠㅠ' 라고 톡을 보내는데 실상 황건적을 완성으로 몰아붙인 게 유비와 주준이다. 즉 유비는 자기가 굶어죽게 만들어 놓고 눈물 짜는 셈. 이 역시 양성 전투 이후 조홍, 손중 등이 이끄는 황건적을 유비와 주준이 완성으로 몰아붙이는 장면과 굶다 지친 성 안 황건적들의 항복을 거부하는 장면이 통삭제 됨으로 인해 발생한 모순이라 볼 수 있다.
- 14컷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연의] 유비, "도적을 엄벌하는 건 마땅하나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라며 자비 베풀자고 하다.
하지만 실제 연의의 기술은 상당히 다르다.
不容寇降是矣. 今四面圍如鐵桶, 賊乞降不得, 必然死戰. 萬人一心, 尚不可擋, 況城中有數萬死命之人乎? 不若撤去東南. 獨攻西北. 賊必棄城而走, 無心戀戰, 可即擒也.
(주준의 말대로) 도적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지금 4면을 철통처럼 에워쌌고 도적들의 항복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기로 싸울 겁니다. 만인이 한 마음이라면 오히려 막을 수 없는데 하물며 성 안에는 수만의 목숨을 걸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동남쪽(의 병력)을 철거하고 오로지 서북쪽만 공격함만 못합니다. 도적들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고 전투에 대한 미련도 사라질테니 곧바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주준의 말대로) 도적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지금 4면을 철통처럼 에워쌌고 도적들의 항복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기로 싸울 겁니다. 만인이 한 마음이라면 오히려 막을 수 없는데 하물며 성 안에는 수만의 목숨을 걸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동남쪽(의 병력)을 철거하고 오로지 서북쪽만 공격함만 못합니다. 도적들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고 전투에 대한 미련도 사라질테니 곧바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앞의 이야기가 누락되는 바람에 임의적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연의의 내용을 보면, 완성의 황건적은 이미 기아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주준에게 항복을 요청했으나 주준은 그 요청을 거부했고 유비가 '왜
한고조처럼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냐'고 묻자 '저들은 그때와 달리
천하가 하나가 된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무엇으로 선한 일을 권할 것이며 또 (항복을 받아들이면) 도적들이 멋대로 노략질 하다가 불리해지면 투항하는 나쁜 뜻만 키우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유비가 그 뜻을 납득하며 한 말이 위의 말이다.
정리하자면, 유비는 '도적을 엄벌하는 게 마땅하다' 고 한 게 아니라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옳다' 고 했으며 자비를 베풀자고 한 게 아니라 적을 손쉽게 잡기 위해 동남쪽을 비워두자고 꽤 전략적으로 한 말이다. 나름 유비가 전투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계책을 냈는데 그 삼국지톡에서는 그 계책의 빛이 바래진 것이다.
- 유비가 황건적 장수 손중을 활로 쏴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사실 연의에서 유비는 황건적들이 다시 완성을 빼앗고 틀어박히기 전에 있었던 공격에서 황건적의 장수인 '한충'을 활로 쏴 죽이는 장면이 있다. 다만 그 전투 자체가 누락되는 바람에 유비의 활약상이 또 하나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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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화살이 손중의 목을 꿰뚫는 장면이 2컷이나 등장하는데 자세히 보면 화살촉 전체가 반대편 목으로 튀어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튀는 피의 양이 상당히 적고 상처가 벌어진 흔적이 없다. 물론 심의를 생각해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피가 튀는 묘사 자체가 등장했고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지만 화살이 목구멍을 뚫은 장면과 손중이 사망하면서 눈이 뒤집어진 장면을
한 컷이나 소비해꽤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93] 정말로 심의를 걱정했다면 구태여 두 컷이나 할애해서 손중이 죽는 모습을 정성스럽게 넣을 필요가 없다.
- 원소가 오랜만에 등장하는 장면에 '황건적 무찌른 공으로 벼슬받아' 라는 기사 문구가 등장하는데 정사[94]에서나 연의에서나 원소는 황건적의 난에서 딱히 공을 세운 적이 없다. 원소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것은 하진이 집권 및 십상시의 난 시기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17화의 오류 부분에서 이미 등장한 적이 있다(...).
29. 30화
- 10컷에 제남국의 예산안 관련 공문서가 등장하고 그 안에 제사에 대한 내용과 골프접대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대든 현대든 간에 조세포탈은 빈번히 이루어졌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공문서에 대놓고 자신들의 비리에 관련된 부분을 직접적으로 기입하는 곳은 단 1군데도 없다. 특히나 고대 사회의 경우는 명분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했다. 때문에 훗날 '협천자이령제후'[95]를 이룬 조조가 자신이 후한 조정의 실질적인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인물 하나를 요직에 앉히는데 상세히 표문을 올리고 명목상이지만 황제의 주청을 받아 처리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현대 사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권력형 비리를 보면 직접적으로 권력을 이용해 비리를 저지르는 방식보다도 정책 예산 편성, 문화 사업, 특정 부서를 움직여 비리를 저지르는 등의 방식이 월등히 많은 걸 알 수 있다.
- 전편에 걸쳐서 제남의 유지들이 조조에게 제남에 오지 말라고 협박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예전에 작가가 인용한 위서 등의 정사에서는 전혀 다르게 묘사된다.
聞太祖至, 咸皆舉免, 小大震怖, 姦宄遁逃, 竄入他郡.
태조(조조)가 도착하면 남김없이 다 들춰내고 해직할 것이라는 걸 듣자, 크건 작건 놀라 두려워했고 간사한 도둑들이 달아나 숨거나 다른 군으로 숨어 들어갔다.
- 위서
태조(조조)가 도착하면 남김없이 다 들춰내고 해직할 것이라는 걸 듣자, 크건 작건 놀라 두려워했고 간사한 도둑들이 달아나 숨거나 다른 군으로 숨어 들어갔다.
- 위서
즉, 당시의 제남국 유지들은 감히 새로 부임하는 조조를 협박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조가 도착한 이후 자신들이 어떤 꼴을 당할지를 풍문으로 듣고는 상당히 놀라 되려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
조조의 4언시 도관산(度關山)의 일부를 인용해 부패척결에 대한 조조의 각오를 보여주는데 문제는 13컷에 조조가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그 다음 컷에 '이곳, 제남국을 벌레들의 지옥으로 만들어주마.' 라는 사못
중2병 돋는진지한 대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도관산은 조조가 남긴 시 중에 하나로서 조조의 인본주의적인 모습과 총체적인 국가관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96] 그 바탕이 '법치주의'라는 점이 중요하다. 시의 곳곳에도 조조가 법치주의를 숭상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아래의 구절은 삼국지톡의 구절 다음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즉, 조조는 엄격한 법치를 세우고 그 법치를 준수하는 군주 아래에서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는 방식을 원했기 때문에 작중에서 묘사한 것처럼 제남국의 타락한 관원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할 것 같은 묘사는 상당히 부적절한 묘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기록에서도 조조는 부임한 후 조정에 표를 올려 장리(長吏) 8명을 파직하고 사당을 부숴 사태를 진압했다.
30.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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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의 우두머리인 장양이 손견과 유비의 공을 아뢴 주준의 청을 가지고 '벼슬이 어디 노력해서 얻는거야? 돈주고 사는거지?'라고 비웃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시대상을 고려할 때 맞는 말이다. 영제가 환관들을 부려서 벼슬을 팔아치운 게 버젓이 정사에 등장하기 때문. 다만 이를 벼슬을 받은 모든 인물이 벼슬팔이를 통해 임명되었다고 생각될 여지가 있다. 유비와 손견의 공을 아뢴 주준 자신이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후 조정으로부터 거기장군(車騎將軍)에 하남윤(河南尹)[100]에 임명되었고
비록 삼국지톡 내에서 얼굴 한 번 안 비췄지만황보숭 또한 연의에서는 그 공으로 인해 본래 직위에 거기장군을 더했고 익주목(翼州牧)에 임명되었기 때문[101]. 그리고 황보숭과 함께 했던 조조[102]는 제남상으로 임명되었다. 황제인 영제가 벼슬팔이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로를 세운 이에게 돈을 받고 벼슬을 팔지는 않았다.
- 유비의 첫 공무생활을 하게 해준 장균(張鈞)의 직접 출현이 누락되었다. 삼국지톡 내에서는 낙양데일리에 실린 유비의 기사에서 유비를 옹호하는 리플을 달아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원래 연의에서는 낭중(郞中)직[103]에 있었는데 수레를 타고 지나던 중 마음이 답답해 낙양 거리를 배회하는 유비를 만나 그 사연을 '직접' 전해 듣고 황제에게 나아가 아뢰다가 끌려나가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즉 유비에게는 일종의 은인으로서 단역이지만 하나의 인물로 등장하기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누락이 된 셈이다. 유비와 사제지간으로 맺어졌지만 마찬가지로 잠깐 등장하는 인물에 불과한 노식에게 들어간 분량과 장균의 분량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 급으로 격차가 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31. 32화
- 십상시들이 자기네들끼리 의논해 유비를 촌구석인 안희현으로 보내는 장면이 등장하고 건석이 '촌구석에 자리 하나 있네요' 하는 장면이 있는데 연의에서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
權且教省家銓注微名, 待後卻再理會未晚
우선 관청으로 하여금 인물을 선별해 자질구레한 벼슬이라도 줬다가 나중에 재차 확인해서 모자라다 싶으면 도로 빼앗으면 되오.
우선 관청으로 하여금 인물을 선별해 자질구레한 벼슬이라도 줬다가 나중에 재차 확인해서 모자라다 싶으면 도로 빼앗으면 되오.
즉 환관이 직접 나서서 자리를 정해주는 게 아니라 관청에 맡겨서 아무 자리나 보낸 것이다. 이 부분은 20화에서 환관들이 조조를 제남상으로 보내는 장면에도 해당하는 부분이다. 사실 현위를 임명하는 것은 현령(縣令)[104]이나 현장(縣長)[105] 따위가 할 일이었기 때문에 환관들이 직접 위치를 지정해 보내는 장면은 좀 에러인 셈.
- 유비가 자신의 임무가 아닌 고추를 따는 일 등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는 그저 자기일만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署縣事一月, 與民秋毫無犯, 民皆感化. 到任之後, 與關, 張食則同桌, 寢則同床. 如玄德在稠人廣坐. 關,張侍立, 終日不倦.
한달 간 고을 관청의 일을 보면서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자 백성 모두가 감화되었다. 부임한 뒤 관우, 장비와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침상에서 잤다. 현덕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앉으면 관우, 장비가 시립했는데 하루 종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달 간 고을 관청의 일을 보면서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자 백성 모두가 감화되었다. 부임한 뒤 관우, 장비와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침상에서 잤다. 현덕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앉으면 관우, 장비가 시립했는데 하루 종일 게을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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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고추를 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고추는
남미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된 외래종 작물이다. 당연히 후한 시대에는 등장할 수 없다.[106] 차라리 콩이나 벼 등 다양한 작물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그 때 당시 없던 작물을 넣었다는 것이 의아한 부분.[107]
근데 스마트폰, 헬기, 편의점이 판치는 세상인데 굳이 트집잡을 필요가 있을까
- 삼국지톡에서는 독우의 등장이 【유비부임 - 농사일 시작 - 독우의 난동】 순이지만, 연의의 실제 순서는 【유비 부임 - 업무 처리 - 독우 방문 - 독우 난동】 순이다. 즉, 독우는 오자마자 사람을 줘팼던 게 아니라 유비가 영접했으나 괜히 시비를 걸면서[108] 은근슬쩍 뇌물을 주라는 뉘앙스를 보냈는데 유비가 내놓지 않자 현청의 관리들을 잡아다가 거짓자백을 하라고 소동을 부린 것. 애당초 독우가 현의 관리들을 감독하는 역할이었으니 가자마자 난동을 피우기는 어려웠다.
32. 33화
- 4컷에 독우(督郵)가 처음 등장하는데 설명란에 다음과 같이 써 있다.
감찰관 독우: 벼슬하는 관리들이 잘 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직책.
일단 틀린 설명이다. 우선 '독우'는 황제에게 보고하는 황문시랑처럼 후한 정부에서 직접 파견하는 게 아니라 군(郡)이나 국(國)에서 파견되며[109] 군과 현의 관리들 한정으로 감찰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20화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후한에는 감찰관이라 불리는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야 한다.
독우: 군과 현의 벼슬하는 관리들이 잘 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감찰 직책.
그리고 삼국지연의를 보면 독우가 자신의 역할과는 별개로 '황건적의 난 이후 벼슬을 받은 이들의 공적을 조사'하는 내용이 있다. 이전 화에서 십상시들이 지들끼리 톡하면서 벼슬을 줬다 뺏으면 된다고 낄낄댔던 게 바로 이런 방식으로 뇌물을 공수하고 자신들을 싫어하는 자들을 쳐내려고 했기 때문. 삼국지톡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전혀 묘사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독우가 '이제 조정에서 조서를 보내(目今朝廷降詔)'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조사가 후한 조정을 대표하는 십상시의 농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통삭제 됨으로서 십상시의 악행에 대한 묘사가 되려 축소 되었다.
- 9-11컷을 소비해 유비가 안희현금고[110] 계좌를 뒤졌는데 돈이 없다고 당황해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 유비는 아예 뇌물을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주변인들이 '독우가 저러는 건 뇌물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자 아래와 같이 대답했다.
我與民秋毫無犯, 那得財物與他?
내가 백성들을 추호도 건드린 적이 없는데 어찌 재물을 얻어 남을 주겠소?
내가 백성들을 추호도 건드린 적이 없는데 어찌 재물을 얻어 남을 주겠소?
즉, 유비가 서순경의 말을 듣고 계좌를 뒤적거리다가 돈이 없어 황망해 하는 모습 자체가 연의에서 묘사된 유비의 인자한 모습을 깎아먹는 게 되는 것이다.
- 20컷에 조조가 '제가 더러운 환관핏줄이라 뇌물 받아쳐먹고 백성들 등쳐서 짜낸 돈이 통장에 산더미' 라는 말을 하고 아래 설명에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은 환관'이라는 설명이 추가로 나오는데 일단 조등은 조조의 친할아버지가 아니라 '양할아버지'고 십상시와는 다르게 환제를 도와 외척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권신보다는 공신의 영역에 가깝다. 정사인 후한서의 조등열전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腾用事省闥三十餘年, 奉事四帝, 未嘗有過.
조등은 30여년 간 궁궐에서 일하며 4명의 황제[111]를 섬겼는데 일찍이 과실(잘못)을 경험하지 못했다.
조등은 30여년 간 궁궐에서 일하며 4명의 황제[111]를 섬겼는데 일찍이 과실(잘못)을 경험하지 못했다.
즉 조조가 제남의 유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든 간에 저런 식으로 까이기엔 너무 훌륭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조등이 유일하게 까이는 것은 원소가
관도대전을 벌이기 전에 천하에 공표한 격문에서 '조등은 중상시로서 요사스런 무리를 만들어 제멋대로 재물을 탐내고 습속을 해치고 사람들을 학대했다'고 표현한 게 전부인데 이 격문은 말 그대로 원소를 띄우고 조조를 깎아 내리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부분이 많다. 실제로 조등은 익주자사 충고(种暠)가 조등에게 보내진 뇌물을 파악하고[112] 조정에 상주해 폭로했음에도[113] 악감정을 가지지 않고 되려 항상 '충고는 유능한 신하' 라고 칭찬했으며 결국 그 충고는 사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정말 뇌물로 깐다면 조등이 아니라 그의 양아들이자 아버지인 조숭이 까여야 한다. 실제로도 영제 시기에 영제가 벼슬팔이 하던 서원에 1억만 전이라는 천문학적인 뇌물을 바쳐 태위 벼슬을 샀기 때문이다. 더러운 환관의 핏줄[114]이라는 표현과 부정축재에 대한 부분에서 아버지 조숭의 내용이 빠진데다 작가의 부가설명까지 없기 때문에 마치 '더러운 환관 조등이 부정축재를 일삼은 것'처럼 묘사가 되었다. 이전에도 이야기 된 거지만 조조가 다시 일어서는데는 아버지가 부정축재한 재물과 할아버지 조등의 명망이 큰 몫을 했다.
33. 34화
- 원술의 친형이자, 같은 원씨 일가인 원기(袁基)[115]가 원소가 백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크게 질책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원소의 행동을 질책한 건 원기가 아니라 숙부이자 당시 태부(太傅)[116]를 맡고 있던 ' 원외(袁隗)'였다. 이는 후한서나 영웅기 모두에서 일치하는 부분이다.
中常侍趙忠言於省內曰:「袁本初坐作聲價,好養死士,不知此兒終欲何作。」叔父太傅隗聞而呼紹,以忠言責之,紹終不改。
중상시 조충이 궁안에서 말하기를 "원본초는 앉아서 좋은 평판을 만들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선비를 기르니 이 애송이가 끝내는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소." 숙부인 태부 외가 이를 듣고 호소하며 충(조충)이 한 말로 꾸짖었으나 소는 끝내 고치지 않았다.
- 후한서 원소열전
중상시 조충이 궁안에서 말하기를 "원본초는 앉아서 좋은 평판을 만들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선비를 기르니 이 애송이가 끝내는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소." 숙부인 태부 외가 이를 듣고 호소하며 충(조충)이 한 말로 꾸짖었으나 소는 끝내 고치지 않았다.
- 후한서 원소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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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이 원소를 '종'이라고 은근슬쩍 비웃는 장면이 등장하고 이는 실제 기록 상에도 있긴 하다.
「群豎不吾從,而從吾家奴乎!」 又與公孫瓚書,云紹非袁氏子...
"놈들이 내가 아니라 가노(家奴)를 따르는구나!" 또한 공손찬에게 준 서신에 '소는 원씨의 자손이 아니다' 라고 했다. (후략)
- 후한서 원술열전
"놈들이 내가 아니라 가노(家奴)를 따르는구나!" 또한 공손찬에게 준 서신에 '소는 원씨의 자손이 아니다' 라고 했다. (후략)
- 후한서 원술열전
春秋之義,子以母貴。紹母親為傅婢,地實微賤,據職高重 享福豐隆。有苟進之志,無虛退之心,紹罪九也。
춘추에 의하면 자식은 어미로 인해 귀해진다 했습니다. 원소의 모친은 부비(傅婢)이니 태어난 곳과 종자가 미천하나, 지위에 의지해 높고 무겁게 되었고 후한 복을 누렸습니다. 단지 나아갈 마음 뿐이고 물러날 마음이 없으니 원소의 아홉 번째 죄입니다.
- 공손찬이 원소를 탄핵하는 상소문 中
춘추에 의하면 자식은 어미로 인해 귀해진다 했습니다. 원소의 모친은 부비(傅婢)이니 태어난 곳과 종자가 미천하나, 지위에 의지해 높고 무겁게 되었고 후한 복을 누렸습니다. 단지 나아갈 마음 뿐이고 물러날 마음이 없으니 원소의 아홉 번째 죄입니다.
- 공손찬이 원소를 탄핵하는 상소문 中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는 게 사서의 기록이긴 하나, 원소의 태생을 종놈이라고 부른 것은 오로지 원술 뿐이고, 공손찬 또한 원술에게서 들은 말을 인용해 상소문에 넣었을 뿐이다. 사가들의 주석들을 봐도 원산송의 후한지에서는 얼자(孼子)라는 표현이 등장하나 배송지의 주석에서는 위서를 인용해 '원소는 원봉의 서자(庶子)였으나 이복형 원성(袁成)의 아들이 되게 꾸몄다(紹即逢之庶子,術異母兄也,出後成為子)'고 말하고 있다. 즉, 원소가 서자 출신인 건 분명한 사실이나 그 어미가 노비 출신이라는 점은 확신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게다가 저 발언은 원술이 본격적으로 원소와 척을 지고 조조-원소 라인에 대적하기 위해 공손찬과 손을 잡으면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반동탁연합군 이후에나 나와야 맞다.
즉, 원술이 원소를 종놈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너무 이른 시기에 나왔고 그 발언 속에 담긴 '원소의 어머니는 노비'라는 주장 또한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정사 혹은 나무위키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지톡의 진짜 골자인 연의에서는 원소를 딱히 종놈이라고 부르는 장면도 없다.[117] 그냥 연의의 방식대로 대면대면하면서 어색한 이복형제로 묘사했으면 나오지 않았을 지적인 셈.
- 원소 가문의 사람들이 '옷 길 원(袁)' 자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연히 오류다. 고대 중국에도 가인(家印)이라고 해서 특정 가문을 상징하는 표식이 새겨진 도장이 있었지만 저런 반지 형태가 아닌 그냥 도장의 형태였고, 저런 반지는 고대 로마에서 편지에 왁스를 부어 봉인한 뒤 보내는 이의 문장을 찍는 왁스 씰(Wax seal)의 도구로 주로 사용되었다.[118] 즉 원씨 가문이 대가문임을 상징하는 장치이긴 하지만 중국이라는 배경에는 맞지 않은 셈. 더군다나 그냥 문양이 새겨진 반지라면 그냥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작가조차도 빼도박도 못하게 이 반지가 도장 겸용임을 트위터로 증명해 버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황명을 내릴 때는
전국옥새를 사용했고 관리들이 임용되면 그 직책에 맞는 관인(官印)을 내렸으며 그 관인이 관리의 상징이기도 했다.[119] 현대의 면에서도 은행 업무나 주택 관련 사항에서 다들 도장이나 인장, 서명 등을 사용하지 도장용 반지는 너무 옛날 방식이라 사용되지 않는다.
34. 35화
-
독우가 안희현의 주민들(정확히는 할머니)을 폭행하면서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겠다고
쓰레기 같은 소리를 하는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연의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아니라 관청에서 일하는 현리(縣吏)들을 잡아다 때렸고 그 이유 또한 거짓으로 유비의 죄를 자백받으려 한 것이다. 독우의 등장 순서와 구조가 바뀌면서 해당 부분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 유비와 장비가 독우를 같이 주먹으로 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사실 해당 장면은 오류라기보다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절충안을 낸 것에 가깝다. 독우를 폭행하는 묘사는 삼국지와 연의의 차이가 크다.
督郵以公事到縣, 先主求謁, 不通, 直入縛督郵, 杖二百, 解綬繫其頸著馬, 棄官亡命.
독우가 공적인 일로써 현에 이르렀고 선주(유비)는 뵙기를 구했으나 통하지 않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결박하고 장(杖) 200대[120]를 때리고 인끈을 풀어 그 목에 걸고 말매는 나무에 묶어둔 뒤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 삼국지 촉서 선주전.
독우가 공적인 일로써 현에 이르렀고 선주(유비)는 뵙기를 구했으나 통하지 않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결박하고 장(杖) 200대[120]를 때리고 인끈을 풀어 그 목에 걸고 말매는 나무에 묶어둔 뒤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 삼국지 촉서 선주전.
飛大喝:“害民賊!認得我嗎?”督郵未及開言,早被張飛揪住頭發,扯出館驛,直到縣前馬樁上縛住﹔攀下柳條,去督郵兩腿上著力鞭打,一連打折柳條十數枝。
장비가 크게 소리치길, "백성을 해치는 도적놈아! 나를 알겠느냐?" 독우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가까이 다가온 장비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관역(館驛)으로 나갔다. 곧 현청 앞 말을 메어두는 말뚝 위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의 아래를 꺾어 독우의 두 넓적다리 위를 힘껏 채찍질 했다. 한 번 닿으면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졌는데 가지를 세어보니 10개나 되었다.
- 삼국지연의의 서술.
장비가 크게 소리치길, "백성을 해치는 도적놈아! 나를 알겠느냐?" 독우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가까이 다가온 장비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관역(館驛)으로 나갔다. 곧 현청 앞 말을 메어두는 말뚝 위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의 아래를 꺾어 독우의 두 넓적다리 위를 힘껏 채찍질 했다. 한 번 닿으면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졌는데 가지를 세어보니 10개나 되었다.
- 삼국지연의의 서술.
즉, 정사에서는 유비가 독우를 때리고 연의에서는 장비가 때리는데 둘 중 하나를 취하는 게 아니라 둘 다를 취하려는 일환으로 장비와 유비가 동시에 때리는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작가의 역량의 영역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연의와 정사 모두를 취합함으로서 역으로 정사와 연의 모두의 기술을 어긴 셈이 되기 때문에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35. 36화
- 10컷에 보면 조조가 굴삭기로 건물만 밀어낸 게 아니라 사람까지 파묻은 장면이 보이는데 무제기에는 '(부패한 유지들 중) 8명을 아뢰어 파면시키고 음사[121]를 금지시켰다(於是奏免其八 禁斷淫祀)' 라고 등장하며 위서에는 '사당 건물을 모두 무너뜨리고 관리 및 백성들의 제사를 금지시켰다(皆毀壞祠屋, 止絕官吏民不得祠祀)' 라고만 등장한다. 즉, 저 시기에 사람을 파묻는 짓거리는 안했다는 얘기다.
- 14컷에 설명으로 [정사] 조조가 낙양에 불려가자 병을 핑계로 벼슬 내려놓다 라는 서술이 등장한다. 만화 속 정황만 보면 조조가 제남국에서 행한 일이 맘에 안들어 보복하기 위해 십상시가 불러온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다고 보기 힘들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제남에 부임했다는 내용 이후에 전혀 조조에 대해 언급이 없다가 하진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전군교위(典軍校尉)로서 등장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정사에서는 조조가 제남의 사당을 폐지함으로서 제남을 안정시킨 공을 세운 상태였다. 해당 부분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久之, 徵還為東郡太守, 不就, 稱疾歸鄉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불러들여서 동군태수로 삼았지만 나서지 않았고 병을 핑계로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 위지 무제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불러들여서 동군태수로 삼았지만 나서지 않았고 병을 핑계로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 위지 무제기
조정에서는 조조의 활약을 눈여겨 본 것인지 그를 연주(兗州) 동군(東郡)의 태수로 임명했지만 조조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돌아갔다. 연주 역시 황건적의 피해를 입은 곳이지만 동군은 휘하에 15개의 현과 13만 호(戶)의 인구를 둔 제남군과 비슷한 규모의 지역이었다. 즉 조조를 동군태수로 임명한 것은 제남처럼 피폐해진 동군 일대를 안정화 시키려고 보냈을 가능성도 있으며 임무지 이동 내지는 부서 이동에 가깝기 때문에 삼국지톡처럼 단순히 십상시의 음모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36. 37화
- 지난 화에서 조조가 제남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 다음 화인 37화에서 원소와 하진이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의논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상당히 많은 장면이 누락되었다. 우선 간의대부(諫議大夫)[122] 유도(劉陶)와 사도(司徒) 진탐(陳耽)이 영제에게 간언을 올리다가 십상시에 의해 투옥된 뒤 죽은 사건, 그리고 유주에서 일어난 장거와 장순의 난, 손견이 진압한 우성의 난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났고 당시 황제였던 영제가 오랜 주색으로 인해 중병에 걸리자 하진을 불러 후사를 논하던 일과 하진이 영제의 영을 받은 십상시[123] 암살 당할 뻔했던 일 등이 모두 누락되었다. 특히 장거와 장순의 난은 유비가 유우를 도와 공을 세운 뒤 독우를 때린 죄를 사면 받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하는 사건이며 하진에 대한 암살 시도 사건은 환관의 숙청과 십상시의 난의 단초를 제공한 부분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꼭 등장해야 하는 부분이다. 위 두 사건은 과거 주준과 함께 한 유비의 활약이 누락된 것, 그리고 황건적의 난 이전 한나라 말기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부분의 누락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차후 해당 내용이 전개될 지 지켜볼 부분.
- 하진이 여태껏 등장하지 않다가 처음 등장하는데 사실 황건적의 난 당시에 원소보다 더 공을 세웠던 건 하진이었다. 일단 하진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 당시에 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에 임명[124]되었으며 친히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낙양과 궁을 방어했다. 게다가 장각의 수하인 마원의(馬元義)가 환관과 연계해 난을 일으키려던 걸 사전에 발견하고 차단한 것 또한 하진이었다.[125] 삼국지톡에서 연의와 정사를 동시에 취합한 만큼 황건적의 난 시기에 별다른 활동이 없던 원소가 아닌 하진이 더 부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되려 원소가 사대부는 물론이고 백성들의 선망을 받는 걸로 묘사되고 하진은 뒤늦게 얼굴을 내미는 건 상당히 의아한 부분이다. 애당초 연의에서도 원소가 황건적의 난에서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연의에서 원소와 하진이 둘이서 만나 이야기 하는 장면은 사실 한참 뒤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 이전에 하황후와 하진이 합심해
동태후와 그 오라비이자 표기장군이던 동중을 몰아낸 사건이 있었고 이 때 하진이 십상시를 제거하려 했으나 십상시가 황후와 동생
하묘, 하진의 어머니 무양군에게 뇌물을 바쳐 다시 총애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이후 하간(河間)에 유배되었던 동태후를 죽인 후 세간의 의심을 받을까 싶어서 집에 틀어박혀 있던 하진을 원소가 다시 찾아와 충동질 하는 모습이 바로 그 장면이다.
즉, 원소가 하진을 직접 찾아와 십상시의 주살을 얘기하는 장면은 황제가 영제에서 소제로 교체된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37. 38화
- 37화 부분에서 지적된 누락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삼국지톡에서의 묘사로 얘기하자면, 조조와 유비가 벼슬을 때려 치고 십상시에 의해 서원팔교위가 창설된 시기까지의 일이 통째로 증발한 셈이다.
- 서원팔교위를 마치 십상시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방해하는 반대 세력을 때려 잡으려고 창시한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서원팔교위가 창설되던 시기의 기록을 보면 온 사방이 엉망이었다. 우선 황건적의 잔당들이 여전히 전국적으로 분탕을 치고 있었고 흑산적같은 도적 떼와 유주의 장거와 장순, 형주 남부의 우성, 양주의 변장(邊章)과 한수(韓遂) 등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북궁백옥이 이끄는 강족을 포함해 선비족, 무릉만 등 이민족들의 침략도 꾸준히 이어졌다.[126] 즉 서원팔교위의 창설은 수도인 낙양을 방위 하기 위함이 크며 영제 자신도 역대 황제로서는 드물게도 자신을 '무상장군(無上將軍)'이라 칭한 뒤 병력을 이끌고 낙양 서쪽에 해당하는 평락관(平樂觀)을 순회하기도 했다[127] 즉, 십상시의 권력 유지를 위한 기구는 맞는데[128]삼국지톡에서의 묘사처럼 자신들이 군권을 쥐어 반대하는 무리를 마음껏 제거하려는 것보다는 온 사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에서 자신들에게 힘을 주는 정권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설립한 취지가 훨씬 크다.
38. 39화
-
조조가 서원팔교위 중 하나에 임명된 원소를 보고 놀라며 "야" 라고 말하자 원소가 조조의 뺨을 치며 조조에게 말이 짧다면서 '근본 없는 핏줄이라 그런가' 라는 발언을 하는데 조조의 아버지가 환관의 양자로 입적된 것은 당시에는 '합법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19인의 환관들이
순제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 모두를 제후로 봉하고 양자를 두어 세습이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129]. 그리고 그 19명의 환관 중 하나가 바로 조등이었다.
게다가 삼국지 톡에서는 원소가 조조를 보고 '조맹덕, 혹은 하후맹덕'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조조의 하후씨(夏侯氏) 설을 채택하고 있는데 하후씨 역시 한나라의 개국 공신이자 정권을 쥐락펴락 하던 여씨 일가를 주살한 인물인 하후영을 시조로 두고 있는 성씨이기 때문에 '근본 없는 핏줄'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원소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는 뉘앙스가 뒤에 나오긴 하지만 당시 관료층에서 환관들의 양자 입적은 적공에 대한 보답인데다 선대 황제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비난거리라 하기 어려웠다.
사실 가장 이상한 점은, 원소의 해당 발언이 고의로 해댄 비아냥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긴 한데 환관인 상관 건석 앞에서 조조를 집안(환관 가문) 가지고 까고, 건석은 그걸 들으면서 실실거리며 팝콘을 먹는다는 것. 조조가 근본없는 핏줄이면 자기는 근본 뽑힌 놈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먹은 건지....
- 영제가 반 송장 상태로 연명하고 있는 모습이 등장하고 마치 십상시가 그것을 감춘 것처럼 묘사했는데 원전인 삼국지연의에서는 그다지 감추던 게 아니었다.[130] 해당 부분의 구절은 아래와 같다.
中平六年下四月, 靈帝病篤, 招大將軍何進入宮, 商議後事.
중평 6년(189년) 4월 하순, 영제의 병이 깊어지자 대장군 하진을 불러 궁에 오게 했고 후사를 논의했다.
중평 6년(189년) 4월 하순, 영제의 병이 깊어지자 대장군 하진을 불러 궁에 오게 했고 후사를 논의했다.
39. 40화
- 원소나 조조와는 달리 원술이 아무런 직급이 없는 것처럼 표기되었는데 당시 원술은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이었다. 십상시의 난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연의에서는 원술이 거의 행동대장에 가까웠고 실제 정사에서도 호분중랑장이던 원술이 호분의 군사 200명을 차출해 가덕전(嘉德殿)과 청쇄문(靑瑣門)에 불을 질러 십상시를 압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하태후의 경쟁상대이던 동태후, 후한의 황자인 유협의 어머니이자 하황후에게 암살된 왕미인, 황자 유협 등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고 이전에 지적되었듯, 황건적의 난 종결부터 십상시의 난 사이의 굵직한 사건들이 죄다 누락되었다. 다음 시즌에서 이를 다 풀어낼지는 미지수.[131]
- 원술이 원소를 싫어하는 모습이 너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연의나 정사에서 원술이 원소와 직접적으로 멀어진 것이 집필 되는 시기는 반동탁연합 이후다. 게다가 삼국지톡 내의 원술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원소와 조조를 '감시하러 왔다' 고 하는데 호분중랑장인 원술은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서원팔교위 소속의 원소나 조조를 감시할 수 있는 권한 같은 게 아예 없었다. 사실 십상시의 난 당시 원술의 포지션은 원소의 조력자 내지는 행동대장에 가까웠다.
- 하진과 유변이 황후 하씨를 보고 '마마님'이라 부르는데 마마(媽媽)는 궁중에서 조선 시대에나 사용되던 용어고 당시에 황후는 전하(殿下)[132] 내지는 폐하(陛下)[133]였다. 사실 마노라 혹은 마마님에 대한 호칭에 대한 지적은 조선왕조실톡 시기에도 거론된 적이 있으나 작가인 무적핑크가 그 지적한 이의 메일을 수신거부(...)한 적이 있다.
- 십상시들이 하진에게 돈 내놔라, 벼슬 내놔라, 땅 내놔라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대의 황제인 영제가 십상시를 과도하게 총애했지만 어찌됐건 하진의 위치는 과거 순제 시기에 환관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둔 외척 양기와 같았기 때문에 환관들이 저런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외척이나 환관이나 어차피 황제와의 관계성에서 힘을 얻은 탁류인지라 황제의 총애를 더 받는 쪽이 힘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환관들이 여기에서 더 앞서 힘겨루기에서 밀리게 되자[134] 하진이 환관들을 제거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후한서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碩雖擅兵於中,而猶畏忌於進
건석이 비록 병사들을 맘대로 하였으나 오히려 하진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였고...
건석이 비록 병사들을 맘대로 하였으나 오히려 하진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였고...
즉, 건석을 필두로 한 십상시도 명분과 병권을 쥔 하진을 두려워하고 경계했지, 저렇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하면서 막무가내로 나가지는 못했다.
- 해당 화 마지막 부분에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이 추포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 건석은 하진을 피해 궁궐 정원으로 도망갔다가 같은 중상시인 곽승의 손에 죽었고 그들의 연명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즉, 원소나 조조가 아니다. 게다가 하진이 십상시를 죽이려고 생각한 것도 건석의 암살 기도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묘사가 전혀 없다. 그냥 '환관이 나쁘니까 죽이자' 정도의 자못 정의로워 보이는 연출. 마지막의 묘사는 연의에도 정사에도 없는 작가의 창작인데 후한말 조정의 복잡한 인간관계과 권력구도를 다룰 역량도 의지도 없어서 라는게 중론이다.
[1]
사실 2화에서 유비 역시 열심히 노력했음이 나오긴 했지만 당장 1화에 등장한 유비 모습이 너무 일 안하는
니트족처럼 묘사되었다.
[2]
모종강본에서는
정현에게서도 배웠다고 나온다.
[3]
그냥 자 노식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붙은 것같다
[4]
크게 보는 것은 현량방정(賢良方正: 어질고 착하며 태도가 바름), 직언(直言: 곧은 말을 기탄없이 함), 명경(明經: 경서에 밝음), 유도(有道: 학덕이 있음), 무재(茂才: 풍부한 재능을 가짐), 효렴(孝廉: 효성스럽고 청렴함) 등이다.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한무제 시기에 도입된 효렴이었다.
[5]
때문에 유명한 인물들의 인물평인 '향론(郷論)'이 유행했다. 연의에서도 인물평에 능한 명사들이 등장하며
코에이 삼국지에서 갑자기 등장해 플레이어의 인품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명사들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6]
향거리선제로 추천된 인물은 주로 중앙관직으로 진출했다.
[7]
공채는 스스로 국가에서 정하는 일정한 시험에 응시해서 통과하는 형태이지만, 향거리선제는 지방의 관리가 지방의 인재를 국가에 추천한다. 대학교 입학전형으로 비유하자면 전자는 자기 실력으로 수능을 치고 대학을 들어가는 유형이라면 후자는 학교장이 지인이거나 기타등등의 이유로 추천을 하여 학교장 추천전형으로 특별하게 입학하는 경우다. 다만 더 정확히 나누면 공채에 더 가까운 고대 채용시험은 과거시험이었다.
[8]
만약 묘사된 면접이 향거리선제일 경우 탁군의 군수 그 자신, 혹은 그 아래의 관리일 가능성이 있다.
[9]
물론 정사로 얘기하자면 유언은 고향 자체도 형주의 강하군이어서 유주를 다스린 적이 없고 당시에 황실의 제사를 주관하던 태상(太常)직을 맡아 중앙에 있었다. 당시 실제로 유주를 총괄하던 존재는 유주자사
곽훈이다.
[10]
남성은 이 시기를 약관(弱冠)이라 불렀고 여성의 경우는 급계(及笄)라고 불렀다. 특히 급계라는 표현은 훗날 등장할
여포의 딸이 등장하는 편에서 언급되는 단어다.
[11]
공자가 15세부터 학문에 정진한 것에 유례한 별칭
[12]
조선왕조실톡이나 삼국지톡 모두 역사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일부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에 현대의 시점으로 보기에 크게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둘 다 원전 자료가 존재하는데다 현대의 요소를 섞는다면 어느정도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현대의 시점으로 봐도 '푸줏간에서 일하며 부유한 청소년'이나 '학교 체육복을 당당하게 입고 포차 거리에서 유비를 기다리는 장면' 등은 무리에 가까운 묘사다.
[13]
삼톡에서는 도원결의 당시 장비의 나이를 16세 정도로 잡았는데 당시로서는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초반 청년 정도의 위치라고 볼 수 있다.
[14]
원래는 도원결의의 장면은
삼국지평화에서 가장 먼저 나왔고 나관중은 삼국지평화의 해당 내용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15]
사실 삼국지는 뭘 어떻게 구성해도 분량이 엄청나긴 하다.
[16]
소금 산지로 유명하다. 때문에 관우의 사건이 소금밀매업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17]
민간 전설에서는 이 때 관우가
두부를 만들어서 팔았다고도 한다. 때문에 두부 장수들 중에는 관우의 신격인 관제(關帝)를 섬기는 이가 많았다.
[18]
공을 세우러 가기도 전에 살인 + 공무원 폭행 범죄를 벌인 이와 얽힌 것이다(...).
[19]
만약 이 만화 자체가 온전히 고전적인 분위기였다면 삼국지연의처럼 '의협심'으로 때울 수 있겠지만 현대적인 모습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조차도 안 된다. 의협심이든 복수든 뭐든 간에 폭력은 법적으로 정당성이 성립되지 않는 처벌 대상이라는 게 현대사회이기 때문.
[20]
십상시들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것까지 손을 뻗은 상태였다. 연의에서는
손견도 뇌물을 바쳐 벼슬을 얻었다.
[21]
당시 소금매매는 상당히 중요해서 민간이 아닌 국가가 직접 담당하였다.
[22]
재미있는 건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에 의하면
조조가 건안 20년(215년)에 이 계곡에서 3척 6촌짜리 검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검이 바로 맹덕검(孟德劍)이라고 한다.
[23]
이 장면이 설득력이 생길려면 조조가 간언하기 전에 황제가 조조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며 황제가 자기가 물어놓고 왜 읽씹했는지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한다. 그냥 조조 혼자 간언하고 황제가 씹는 장면은 조조의 직책 상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24]
말그대로 북쪽 성문을 담당하던 직책으로 통금시간에 맞춰서 문을 열고 닫는걸 관리하는 인물이다. 그 유명한 '오색몽둥이' 사건이 북부위 시절의 일이다.
[25]
이러한 부분은 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기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아기가 영특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크레파스로 글씨를 쓰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어째 아기가 쓰는 글자가
한글이다(...). 고전 배경이 중국인데 아기가 15세기나 되어야 등장하는 남의 나라의 글자를 쓰는 모습이 괴랄했는지 베댓과 댓글란은 훈민정음과
세종대왕 드립으로 넘쳐났다.
[26]
이 또한 고대와 현대가 뒤섞이다 보니 생긴 오류로 보인다.
[27]
조조가 계란을 맞은 장면을 보면 다크서클 상태가 꽤 심각하다.
[28]
계란을 맞은 조조도 그런 일을 처음 당해 충격을 받은 것처럼 표현된다.
[29]
재밌는 건 환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조선왕조실톡에서도 다뤘다는 점이다. 적어도 같은 소재를 다룬다면 나오기 어려운 오류다.
[30]
한국사에도 고려시대 까지는 환관과 내시는 별개였고 내시는 왕의 측근 역할을 맡는 젊은 유망주 관료들이 임명되는 요직이었다. 내시부를 환관들이 맡게 된건 조선시대 부터다.
[31]
훗날 조조의 맏아들 조비가 이 관직으로 종사하기도 했다.
[32]
유비의
쌍고검,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이 때 만들어졌다.
[33]
조조가 비싼 애마(...)를 끌고 나가는 것과 유비가 교통 수단이 없어 쩔쩔매는 장면은 묘하게 대치된다.
[34]
사족으로 이 자사직은 후에 군사권을 대거 부여한 목(牧)으로 변경되었는데 그것을 추진한 이가 바로 유언이다.
[35]
실제로 삼톡에서는 말을 타고 전투하는 장면도 등장하긴 하나, 말=차나 오토바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페러리로 해석된 적토마나, 동탁이 여포를 시켜 조조에게 좋은 말을 골라주라고 한 연의의 일화가 좋은 차 한대 주하고 한 것 등. 다만 일괄적으로 말=자동차라고 하면 공손찬의 그 유면한 백마부대가 승용차 부대 (...)란 희한한 장면이 되므로 타고 다니는 애마는 차, 그리고 실제 전투에 쓰는 말은 그대로 말로 묘사한 듯.
[36]
이 때문에 한나라의 병종에서
전차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37]
관직 중 태복(太僕)이 황실의 가마와 말을 관리하였다.
[38]
후한 13주 중 양주(凉州),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西凉)이라 불리는 지역이 대표적인 말 사육 지역이었고 말 무역이 이루어지던 비단길과도 인접했다. 여기서 양성된 기병으로 중원을 위협했던 존재로는 동탁과
마초가 있다.
[39]
연의에서 나오는 숫자이다.
[40]
말을 팔아서 사서 주지 않았겠느냐는 재반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시는 황건적이 8개 주에서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시기였다. 어디 가서 말을 팔아 금이나 좋은 쇠와 교환할 수 있을까? 당장에 장세평과 소쌍은 북방에서 말을 팔려다가 길이 막혀 돌아온 상황이었다.
[41]
물론 너무 현대적인 모습과 너무 고전적인 모습이 섞여 있는지라, 앞에 등장한 헬기 촬영 장면과 함께 가장 괴리감이 크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댓글 대부분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그러한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42]
온라인게임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몸 장비품으로 등장한다.
[43]
더군다나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유모차를 끈 아줌마와 뒤에서 도망치는 남성의 복장이 똑같다.
[44]
탁군 출신의 의용군 500명.
[45]
人報(인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사람 편으로 보내진 소식'이란 뜻으로 보아 미리 보낸 첩보원이나 정찰병이 보낸 소식으로 보인다.
[46]
사실 해당 화 내용은 구성면에서 정말 짧은데 장비가 등무를 제압하는 장면이 거의 전부다.
[47]
실제 전쟁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방법으로서 멀리 있는 적이나 다수의 적군을 공격할 때 사용된다.
[48]
해당 만화의 끝 설명 부분에서도 '장비, 황건적 등무 가슴팍 꿰뚫어버리다' 라고 되어 있긴 하다.
[49]
황건적이 생판 처음 보는 유비를 지휘자로 알아차렸다는 게 의아할 수 있으나, 14~15화에 걸쳐 유비는 계속해서 의용군의 맨 앞자리에서 군을 이끌었다. 총지휘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개 병사가 아님을 추측하기는 쉬운 일이다.
[50]
주인공 파티가 불살인 작품이라면 모를까, 바로 뒷 장면이 관우가 황건적을 두동강내는 것이기 때문에....
[51]
대부분의 독자들이 보도자료를 오해해 언론에 대한 비난과
기레기 타령을 하고 있는데 보도자료(Press release)는 기업이나 정부기관 등이 신문기사체로 보도자료를 작성해 기자에게 보내주면 기자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덕분에 베스트 댓글은 기레기 타령 댓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댓글들로 댓글창이 엉망이다.
[52]
연의에 등장하는 유언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짧은데 '유주태수 유언은 강하 경릉(竟陵) 출신으로 한나라 노공왕(魯恭王)의 후예다.' 정도다.
[53]
전근대 전투에서는
병력의 차이가 승패에 절대적이며, 엄청난 병사의 질적 차이나 지휘의 차이가 있지 않으면 승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병사를 처음 지휘해 보는 경력이나 황건적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의용군 등 삼형제 정도의 능력이 아니었으면 확실히 죽음의 위기를 겪었을 상황.
[54]
특히나 연의의 유비는 효성이 지극하기 때문에 없는 살림에 유학을 보낸 어머니를 실망시키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55]
왜냐하면 정사에서 유비는 '구강태수를 지낸 같은 군(탁군) 출신의 노식을 섬겼다' 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 노식이 구강태수로서 반란을 진압하고 낙향한 시기와 일치한다.
[56]
죽인 뒤 시체를 저잣거리에 늘어놓는 기시(棄市)도 있었다.
[57]
오히려 이 형벌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캄비세스 2세가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내린 재판관 시삼네스(Sisamnes)를 죽였을 때 시행한 이야기로 더 유명하다.
[58]
인물들의 일화를 기록한 소설로서 남북조시기에 많이 만들어졌으며 보통 민담에서 차용하거나 작가들이 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59]
세설신어의 이야기는 젊은 원소와 조조가 처녀를 희롱했다가 쫓기게 되었고 원소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조조가 꾀를 써서 '여기 신부를 겁탈한 놈이 있다'고 일부러 소리를 쳐 원소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 함정에서 빠져나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도 이 이야기를 채용하고 있다.
[60]
그러나 이 비판은 지나친 트집잡기고 비판을 위한 비판에 불과하다. '삼국지연의를 전혀 접하지 않은 독자들은 실제로 믿을 수도 있다'는 논리대로면 삼국지 창작물은 단 하나의 대화, 일점일획의 서술도 정사와 연의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판이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것인데, 매우 터무니없다. 더구나 역사적인 흐름이나 사실, 인물에 관한 전문적 논의를 아예 바꿔친 것도 아닌 작은 오리지널리티를 두고 그것 때문에 독자들이 착각하면 어쩌냐는 말은, 연의 자체를 포함해서 모든 역사물이 역사물이란 것만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말밖에 안된다. 하물며 정보가 넘쳐나고 삼국지 공부하려면 얼마든 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 옛날에 봤던 웹툰 내용을 토씨 하나하나 다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건 그 독자가 무식한 것일 뿐이다. 애초 이 논리대로면 유관장이
도원결의까지 가기의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모든 작품이 독자에게 역사를 착각시키는 부적절한 행위란 뜻이다!
[61]
애당초 이 만화에서 원소의 성격이 상당히 오만한데다 허황된 생각까지 품은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넣은 장면일 수도 있다.
[62]
조등이 환관임에도 양아들을 들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외척 양기가 처형된 후, 두무 등 계속해서 대항하는 외척들을 이른바 '22열후'라 불리는 환관들과 힘을 합쳐 싹 청소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서 얻은 권리였다.
[63]
십상시의 수장인 장양이 조등의 수발이나 들 정도였으니 그 권세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64]
아이러니하게도 연의에서 조조의 잔혹한 진짜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동탁 암살 실패 후 달아난 중에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를 죽이고도 뻔뻔하게 '내가 천하를 배신할지언정 천하가 나를 배신할 수 없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은 사건이며, 그 이전에는 조조가 엄격하고 공정한 인물이며 한에 대한 충성도 가진 걸로 묘사되지 냉정하고 잔혹하다는 식의 표현은 거의 없다.
[65]
장사에서 화공전이 벌어진 시기가 대략 2경(밤 10시)이었다. 즉, 어둡지만 별이 떠서 시야가 확보되니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돌아가서 노식을 도우라는 의미다.
[66]
사당을 건립하는 일은 백성을 착취하는데 이용된 것이다. 즉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심히 안 좋았던 셈.
[67]
물론 삼국지톡 내의 표현도 뚜렷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긴 한데 18화에서 노식이 황건적들을 대거 붙잡고 편안한 표정으로 황건적 포로를 희롱하는 장면을 보면 광종의 황건적을 제압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68]
연의에서 백성들을 타인을 모함하는데 이용하려 했던 사례는 후에 뇌물을 털어먹으려고 안희현의 유비를 찾아왔던 독우였다.
[69]
정사인 후한서의 기록에서는 황건적을 광종에 몰아넣고는 장각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던 중이었다.
[70]
물론 노식스쿨에서의 모습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맞으니 해당화처럼 묘사해도 관계없긴 하다.
[71]
후한서 노식열전을 참조하였다.
[72]
유교경전을 돌에 새긴 것. 이 시기 낙양의 태학에 세운 희평석경(熹平石経)이 최초의 석경으로 보인다.
[73]
후한서 효영제기(孝靈帝紀).
[74]
소후(小侯)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은 해당 가문의 어린 자제라도 봉(封), 즉 임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75]
위지 이공손도사장전에서 '공손찬을 탁군의 노식에게 보내 경서를 읽게 했다(遣詣涿郡盧植讀經)'는 기록이 등장한다.
[76]
정사 기준. 공자도 이 나이대에 학문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7]
물론 의용병들의 사후처리를 걱정하는 것이라면 현실적일 수 있겠으나 유비의 고민은 해당 화에 나타나듯이 '노식도 없어서 지원이 끊겼기 때문에 더 싸울 수 없다'에 집중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78]
정사에 언급되는 부분이다.
[79]
출처-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저자: 김성회)
[80]
일본에서도
임진왜란 당시에 전공의 표식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갔다.
[81]
대표적인 인물이 황보숭. 노식이 잡혀간 후, 황건적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미 죽은 장각의 무덤을 파내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82]
그 사이 삽질만 하던 동탁(...)이 중랑장 직에서 파직되고 대신 황보숭이 조조와 함께 광종을 공격해 장량을 죽인 뒤 장각의 묘를 파내 그 목을 수도로 보냈다.
[83]
실제로도 누락된 청주성 전투의 경우는 연의에서 관우, 장비의 무력보다도 유비의 지략과 통솔력이 돋보이는 전투였고 양성 전투는 유비가 장보의 깃발을 화살로 쏘면서 장보의 팔꿈치까지 맞추는 재주를 보여준 전투였다. 이래저래 유비의 활약상이 강조되는 부분은 모두 누락된 셈.
[84]
출처: 후한서 주준열전. 참고로 황보숭은 좌중랑장.
[85]
만약 한자가 비슷한 좌(左), 우(右)를 헷갈렸다면 이해할 만 하지만 북(北)중랑장이라 묘사한 만큼 변명하기 어렵다.
[86]
덤으로 황보숭이 대인배처럼 자신의 공 대부분을 주준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87]
물론 조홍은 그게
방법이 없어서 현타온 것으로 착각했다.
[88]
포위 공격에서 굳이 한 곳을 비워둔 건 적을 너무 궁지로 몰아버리면
되려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이라는 유비의 조언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89]
대표적인 예로
하진과
하태후의 어머니인
무양군(舞陽君)이 있다.
[90]
오서에 등장하는 모든 황후들은 모두 부인으로 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 자체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 된 것이다.
[91]
당시에 중랑장 직을 토벌 지역에 따라 북, 좌, 우로 나눴기 때문에 서주와 형주 일대의 토벌은 우중랑장인 주준이 담당했다.
[92]
파로장군은 손견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직위이며 큰아들 손책은 조조가 추대한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불린다. 오서에서 이 둘의 파트는 별도로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이라 불린다.
[93]
더군다나 화살이 막 목을 꿰뚫는 장면에서는 모자이크조차 없다.
[94]
후한서 포함
[95]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라는 뜻.
[96]
출처: 인간 조조 1 - 천하의 지혜를 모아라(저자: 이재하)
[97]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붉은 글씨의 문서 혹은 바위 등에 새기는 붉은 글씨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율령으로 반포된 법령 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98]
순임금 시대의 법관
[99]
주나라 목왕 시절의 대신으로 형법인 '여형(呂刑)'을 만든 인물이다.
[100]
오늘날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에 가까운 직위다. 하남 지역에 수도 낙양이 있었기 때문.
[101]
정사에서는 좌거기장군에 기주목으로 임명되었다. 투옥된 노식 대신 그 후임이 된 동탁이 황건적에게 털리던 걸 황보숭이 대신 나서서 뒤치다꺼리 한 셈이니 나름 적절한 보상이었던 셈.
[102]
물론 삼국지톡에서는 그러한 설명이 없다.
[103]
구경(九卿) 중 하나인 소부(少傅)의 상서낭중(尙書郞中)을 의미한다.
[104]
1만호 이상의 현을 관리하는 행정관을 말한다.
[105]
현령이 통치하는 지역보다 인구수가 작은 현을 관리하는 행정관이다.
[106]
그런데 정작 해당 장면에서 어떤 베댓이
아랫도리 드립을 치는 바람에 댓글창에 난리가 났고 이러한 지적은 묻혀버렸다.
[107]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왕조실톡에서도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 관련 에피소드에서 당시에 있을 수 없는
감자와
콜레라를 언급한 일이 있긴 하다.
[108]
유비의 출신과 공적을 물었고 유비가 '중산정왕의 후예고 탁군에서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30번 정도 치르면서 작은 공을 세웠다'고 고하자 거짓말이라면서 화를 내었다.
[109]
즉 안희현의 유비를 감독하러 온 독우는 안희현이 속해 있던 중산국에서 파견한 것이다.
[110]
아마도
새마을금고 패러디로 보인다.
[111]
사실 조등의 일생으로 본다면 안제(安帝), 순제(順帝), 충제(衝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등 5명의 황제를 섬겼는데 충제의 경우는 권신인
양기가 억지로 세운 탓에 즉위 당시 2살짜리 아기(...)였고 3살에 요절한 탓에 정식 황제라고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112]
자사는 주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등에게 뇌물을 보내려 했던 이는 촉군태수였기 때문에 충고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113]
물론 당시의 황제였던 환제는 충고의 고발을 믿지 않았다.
[114]
이 표현도 웃긴 게 아버지 조숭은 조등의 양자였기 때문에 혈연적으로는 이어지지도 않았고 조등이 양자를 들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로서 조등 본인의 적공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었다. 환관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건 십상시 탓이 컸다.
[115]
당시 태복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116]
황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직책이다. 이전 10화 오류 지적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117]
연의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을 이용해 기주를 낼름 먹자 원술이 염치도 없이 말 1천필만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 당하자 '이때부터 형제가 화목하지 못했다(自此, 兄弟不睦)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즉 연의에서는 저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잘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118]
서양에서도 고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 '클래식 씰(Classic seal)'이라고 불렀다.
[119]
삼국지연의에서도 관우가 조조를 떠날 때 한 수정후의 관인을 두고 오는 장면이 있다.
[120]
당시 형법에서 태형 300대는 의벌(劓罰), 즉 코를 베어내는 형벌을 대신한 벌이었다. 즉 유비는 거의 형벌 수준으로 독우를 두들겨 팬 것이다(...).
[121]
유교 이외의 제사나 민간제사.
[122]
광록훈 소속으로 황제에게 간언을 하거나 응대를 담당하던 직위.
[123]
영제는 하황후에게서 나온
유변보다는 하황후에게 살해 당한
왕미인의 아들인
유협를 더 황제에 적합한 인물로 보았다.
[124]
물론 이 임명에는 황제의 사돈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125]
물론 연의에서도 이런 하진의 공로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 하진은 이 음모를 막아 신후(愼侯)에 봉해졌다.
[126]
연의에서는 장순-장거의 난과 우성의 난이 언급된다. 간의대부 유도가 영제에게 아뢸 때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고을을 침략하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정사에서 등장하는 반란들도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127]
당시 변장과 한수의 난이 규모가 크고 기세가 대단해 제대로 진압되지 않고 있었고 반란이 일어난 양주에서 낙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삼보 지역까지 전화에 휩싸였기 때문에 황제가 친히 군을 이끌고 군사 시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128]
서원팔교위의 최고직은 상군교위(上軍校尉)였고 그 직책은 당시 소황문, 즉 황문시랑이던
건석(蹇碩)이 맡았다. 놀라운 건 당시 상군교위는 팔교위 말고도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사예교위 이하의 모든 이를 감독했는데 당시 하진이 맡고 있던 대장군은 사예교위 그 이상임에도 건석에게 예속되었다.
[129]
물론 환관의 권한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순렬황후 양씨의 오라비인 '양기'를 대장군으로 삼아 견제하기도 했다.
[130]
연의에서 십상시가 진짜로 감춘 것은 영제가 사망한 사실이었다.
[131]
그러나 손견 첫 등장 때문에 주준과 유비의 활약을 통삭제 한 것처럼 그대로 누락 시킬 확률이 상당히 높다.
[132]
위나라가 급망모드를 타던 시기를 다룬 삼소제기(三少帝紀)에서도 당시 황태후였던
명원황후(明元皇后) 곽씨에게 '전하'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133]
사실 이쪽은 황태후에게 주로 붙던 칭호다.
[134]
서원팔교위를 세우고 십상시인 건석 밑에 대장군이던 하진을 둔 점이나, 병세가 심해졌을 때 건석을 따로 불러 황자인 유협을 부탁한 것을 보면 황제가 하진보다는 십상시를 더 의지하고 있었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