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07:35:54

삼국지톡/오류/시즌1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삼국지톡/오류

파일:삼톡 로고(투명).png
회차 목록 | 등장인물 ( 기타 세력 · 미분류) | 평가 | 비판 ( 조조/비판 · 피해자) | 오류 ( 시즌 1 · 시즌 2)


1. 개요2. 1화3. 2화4. 3화5. 4-5화6. 6-7화7. 8화8. 9화9. 10화10. 11화11. 12화12. 13화13. 14화14. 15화
14.1. 반박
15. 16화16. 17화17. 18화18. 19화19. 20화20. 21화21. 22화22. 23화23. 24화24. 25화25. 26화26. 27화27. 28화28. 29화29. 30화30. 31화31. 32화32. 33화33. 34화34. 35화35. 36화36. 37화37. 38화38. 39화39. 40화

1. 개요

항목이 너무 길어져서 분리되었다.

☆ 표시 -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나 그에 따라 삼국지톡에서도 난 오류를 나타낸다.

2. 1화

3. 2화

4. 3화

5. 4-5화

6. 6-7화

최초로 관우가 등장하는데 부패공무원의 패악질을 제압하며 유비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해당 모습은 아마도 관우의 의협심과 강함을 묘사하기 위해 각색한 장면으로 보인다. 근데 중요한 것은 연의에서 관우는 사례주(司隸州) 하동군(河東郡) 해량현(解良縣) 출신[16]으로 고향에서 토호 하나가 권세를 믿고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서 때려죽이고(!) 5-6년 간 강호를 떠돌아다닌 것[17]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고전이든 현대든 간에 살인으로 수사기관의 추격을 받는 상황이었고 의협심에서 한 일이긴 하나 관리를 두들겨 팬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표현된) 유비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18][19] 또 관우가 의병으로 나선 것 역시 나라를 지키는 충의 이외에도 공을 세워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요량도 있기 때문에 부패공무원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 삽입된 건 관우나 유비에게 있어서 마이너스 요소에 가깝다.
대표적으로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의 경우 황건적을 수없이 격퇴했지만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20] 모함을 받아 관직을 잃고 쫓겨났다. 그 후임자로 들어온 게 바로 동탁. 즉 고위층도 이러한 상황이었는데 그보다 아래인 측의 부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즉 만화 속 상황만 보면 관우는 까딱하면 의병 활동하기 전에 붙들려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 셈이다.

7. 8화

8. 9화

9. 10화

10. 11화

11. 12화

아무리 고전을 현대식으로 풀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연출이 등장하는데 바로 많은 인원을 태울 버스를 구하지 못하자 중고마 딜러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에게서 중고마 구매를 시도하는 장면이다. 현대식으로 장세평과 소쌍을 자동차 딜러로 설정하고[35] '중고마'에 비견할 수 있는 중고 소형차나 오토바이 안되면 자전거를 판다고 묘사할 수 있음에도 쓸데없이 너무 원전에 맞춰 진짜 말장수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차량인 버스를 구하지 못해서 생물인 말을 구매해 이동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누가 차 없다고 말을 사서 타고 다니냐 그리고 말은 생물이기 때문에 중고마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해당 화에서 말하는 장세평과 소쌍의 말이 '병들거나 늙은 말'이나 '남이 타던 말'이 아니라 단순히 '팔지 못한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예 팔지 못한 물건은 재고라고 부르지 중고라고 부르진 않는다.

또한 말이라는 게, 기능 면에서 차량보다 밀리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결코 싼 것이 아니다. 되려 어지간한 차량들 만큼이나 비싼데 경주마의 경우는 2017년 5월 기준으로 평균 낙찰가가 약 4천만원이고 삼성 정유라가 탈 고급 승마용 말을 대신 구매했을 때 들어간 비용이 17-18억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오히려 차량 대신 말을 구매하는 건 금전적으로 손해다. 삼국지연의 초기 배경인 후한 시대 역시 말값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흉노와의 전쟁 이후 기병의 중요성[36]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한무제 시기에는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말이 40만필에 이를 지경이 되었고[37] 농경과 운송 등에도 사용되면서 말은 일종의 필수 품목이 되었다. 거기다가 한나라 안에서도 말을 사육하긴 했으나 워낙에 한정적이었기 때문에[38] 중앙정부에서는 양질의 말을 구하기 위해 서방과 무역을 했는데 비단과 말을 교환한다고 하여 이른바 '견마무역(絹馬貿易)'이라 불렀다. 삼국지연의에서 장세평과 소쌍이 괜히 수고스럽게 매년마다 북방에 말을 팔러 간 게 아니라 그만큼 이문이 남기 때문이며 또한 연의에서 장세평과 소쌍이 양질의 말을 50필[39]이나 유비에게 선뜻 준 것은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12. 13화

파일:조선왕조실톡 13화 한 장면.png 파일:korean similar styles.png
삼국지톡 13화의 해당 장면 고구려-백제의 평민복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어째 고구려-백제의 평민복과 너무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아래 치마 부분만 빼면 거의 완벽하게 비슷할 정도.
파일:직거심의.jpg 파일:위진남북조 직거심의.png
직거심의 도안 직거심의 착용 모습(위-진 남북조 시기)
후한 시기부터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널리 입은 직거심의(直裾深衣)[42]가 그나마 본문의 복장과 흡사하긴 하지만 물론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직거심의 자체는 옷자락을 수직으로 지면에 늘어뜨린 형태였으며 여성들의 복식의 경우는 아랫단이 긴 치마의 형태지만 해당 만화에서는 너무 짧은데다 안에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고 있어서 이상한 느낌을 준다.[43] 물론 만화의 특성 상 복장 고증까지 완벽하게 지킬 순 없겠지만 적어도 과도한 PC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남성과 여성의 복장을 다르게 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별 없이 똑같이 그렸다는 점은 상당히 의아한 부분이다.

13. 14화

유,관,장 삼형제의 첫 전투인 대흥산 전투가 시작되는데 작중 묘사는 유주태수 유언이 유비의 군세[44]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황건적의 추산 병력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보낸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는데 연의를 보면 이미 사람을 보내 적의 규모를 대략적으로 알아낸 상태였고 유비도 이미 그걸 알고 참전했다. 즉, 병력차가 상당하긴 했지만 해당 화처럼 유비가 '이건 사기야' 라는 생각은 안했을 거라는 것이다.
不數日, 人報黃巾賊將程遠志統兵五萬來犯涿郡。劉焉令鄒靖引玄德等三人,統兵五百,前去破敵。玄德等欣然領軍前進,直至大興山下,與賊相見。

(2-3일이 되지 않아, 정찰병이 황건적 장수 정원지(程遠志)가 병사 5만을 이끌고 탁군을 침범해 왔다고 알려왔다.[45] 유언은 추정에게 명을 내려 유비 등 3인과 함께 병사 5백명을 이끌고 가서 적을 격파하게 했다. 현덕 등은 기꺼이 군을 이끌고 나아가 곧 대흥산(大興山) 아래에 이르렀고 도적들과 마주했다.)

14. 15화

파일:삼국지톡 - 포위망.jpg 파일:삼국지톡 - 화살들.jpg 파일:삼국지톡 - 장비방어.jpg

1. 우선 14화에서 황건적 5만 명이 유비의 의용군이 진을 친 곳을 둥글게 포위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그 수에 놀란 유비의 짧은 독백 이후 곧바로 황건적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는데 2번째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황건적이 쏜 화살비는 정면이 아니라 유비의 머리 위 방향으로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알 수 있다.[47] 원형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화살이 일제히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 경우, 병사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방패를 들어서 머리와 측면을 보호하던가 하다 못해 엎드려서라도 화살을 피해야 하는데 어째 그런 모습을 보이는 병사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현실에서도 저렇게 되면 유비의 의용군은 날아오는 화살에 순식간에 전멸당할 위험이 매우 크다. 물론 이런 만화에서 그런 세세한 디테일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어렵다면 애당초 무리해서 화살이 날아오는 불필요한 장면을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장비의 무용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넣은 무리한 구성이 아닌가 싶다.

2. 3번째 그림을 보면 장비가 쳐낸 화살들의 양, 그리고 화살이 떨어진 범위를 보면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황건적들이 장비만을 겨냥해 쏜 것처럼 보일 정도. 하지만 분명히 이전 화에서는 유비의 머리 위로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에 화살이 떨어지는 범위가 꽤 넓어야 하는데 되려 범위가 장비 주변이 된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만약 14화와 15화의 묘사 둘 다가 맞는 게 되려면 장비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서 의용군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한 쪽 방향으로 처내거나(...) 아니면 배후나 측면의 병사들이 화살 맞아 죽든 말든 한 곳에서 날아오는 화살만 쳐냈다고 하면 되는데 둘 다 말이 안되는 소리다. 제 아무리 영웅 띄워주는 것으로 유명한 연의에서도 그런 초인은 없다. 장비가 병사들을 죽게 내버려 둘 위인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 능력 있었으면 손견이나 전위가 화살 맞고 죽는 일은 없었겠지

3. 위의 지적들을 다 떠나서 1번째 그림을 보면 포위한 황건적 군과 의용군 사이의 거리가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높은 포물선을 그릴 거 없이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하면 된다(...). 적이 가까이 있는데 굳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정확도만 떨어진다.

14.1. 반박

장비의 과장된 액션은 만화라는 특성에서 볼 때 용납 가능한 수준이다. 우선 황건적의 포위 장면-황건적의 사격 준비 장면-하늘을 덮는 장면로 장면이 이어지며 마치 포위한 황건적이 전방위에서 화살을 날린 것처럼 보이나, 다음 화를 보면 적어도 만화 내에서 묘사된 바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살이 날아오는 장면은 14화 끝 부분 유비의 시점이며, 15화에서 화살을 쳐내는 것 또한 유비 앞에 나선 장비이고, 해당 장면이 끝난 후에 화살이 널부러져 있는 것 또한 유비의 앞쪽뿐이다.

이를 볼 때 황건적은 전방위에서의 사격이 아니라 지휘관인 유비를 노린 집중사격을 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개이다.[49]

또한 전근대의 전투에서 보병진이 맨 앞에서 서고 궁병진이 그 뒤에서 곡사를 통해 아군을 보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아군 오사를 방지하기 위해 지근거리의 적에게 포물선을 그리는 곡사를 하는 것은 그리 큰 오류가 아니다.

현실성에 대한 지적은 결국 장비의 훨윈드로 귀결되는데, 이는 해당 작품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 만화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이다. 당장 유명한 삼국지 만화로 손꼽히는 창천항로 화봉요원에서도 이러한 과장된 무용 묘사는 빈번하게 나왔으며, 15화가 유관장 삼형제의 첫 출전으로서 그동안 개그캐로만 일관했던 삼형제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첫 무대라는 점에서 임팩트 있는 연출이 필요했음은 자명하다.

다만 등무는 일단 장비가 첫 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으나 실제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삼국지와의 오류가 맞다.[50]

15. 16화

유주태수 유언이 보도용으로 보낼 자료[51]를 작성하는 와중에 굉장히 상황이 절망스럽다는 듯이 결과가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명복부터 비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건 너무 오버스러운 장면이다. 당장에 대흥산 전투 다음에 곧바로 청주태수(青州太守) 공경(龔景)의 요청으로 청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으며 그 병력이 연의 기준으로 오천의 병사였다. 즉, 대흥산의 전투는 거진 의용병들만으로 이긴 것이고 유주에는 이미 황건적에 대비할 상비군이 존재했던 셈이다.

참고로 유주는 치소가 위치한 계성(薊城, 오늘날의 베이징 일대)을 중심으로 한사군을 포함한 꽤 넓은 지역이었으며 오환, 선비, 고구려, 부여 등의 이민족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방비가 삼엄한 곳이었다. 즉 유주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8개 주 중에 하나지만 그만큼 그에 맞설 군대 또한 갖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으로 인해 대흥산 전투 이후 유주만을 지킨 게 아니라 수하장수들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어 다른 주를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언은 정사에서는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고 연의 기준으로도 무능하다는 뉘앙스의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52] 그런데 삼국지톡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 파악과 전달의 부재로 결과적으로 유비 일행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 되었다.[53] 정사의 야심을 품은 유언이나 연의의 무난하게 인자한 관리 모두 아닌 무능한 지휘관으로 묘사해 버린 것이다.

16. 17화

17. 18화

정사와 연의에 등장하는 해당부분은 아래와 같다.
先主不甚樂讀書,喜狗馬、音樂、美衣服。
선주(유비)는 책 읽는 것을 아주 즐기지 않았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
- 삼국지 촉서 선주전
年十五歲,母使游學,嘗師事鄭玄、盧植,與公孫瓚等為友。
열다섯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유학을 보내어 일찌기 정현과 노식에게 배우고 공손찬 등과 벗했다.
- 삼국지연의
즉, 정사와 연의를 혼합하자면 유비는 15살에 유학을 가서 노식에게 배웠고 친구들도 사귀었으나 본인이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 나이나 묘사로 보면 중2병 같다 그러나 삼국지톡에서는 유비가 '가정환경과 불운함' 때문에 학업에 집중을 못했으며 친구 하나 없이 뒤에서 잠만 잔 안타까운 설정을 넣는 바람에 공손찬의 출현이 날아간 것과 별개로 연의와 정사를 되려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왕에 정사가 반영된 만큼 정사에서 묘사되는 유비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少語言,善下人,喜怒不形於色。好交結豪俠,年少爭附之。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에게 잘해줬으며 기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의로운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따랐다.

즉, 유비는 차분하지만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즉, 삼국지톡에 등장하는 노식 앞에서 대놓고 보이는 우울한 모습은 유비의 본 성품과는 완전히 다른 묘사인 셈이다.
오히려 유비가 학문이 그만둔 것은 스승인 노식의 사정일 가능성이 높다. 『후한서(後漢書)』의 노식 열전에 보면 노식은 희평 4년(175년)에 구강에서 일어난 만족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병을 핑계로 물러났고, 상서장구(尚書章句), 삼례해고(三禮解詁)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황상 유비가 이 시기에 수학을 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55] 그러나 노식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집필을 했을 즈음에 다시금 부름을 받았고 이번에는 여강(廬江)의 태수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한 뒤에 의랑, 시중을 거쳐 상서(尚書)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유비가 학문을 그만두게 된 것은 유비가 현실상황을 못 견뎌서 때려친 게 아니라 남쪽에서 다시 발발한 만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노식이 여강태수가 되어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노식스쿨(...)이 해체된 탓으로 보인다.
時張角賊縱十五萬,植兵五萬,相拒于廣宗
그 때, 장각은 십오만의 황건적을 거느렸고, 노식은 병사 5만으로 광종에서 서로 겨루고 있었다.

즉, 북중랑장 노식이 이끄는 5만 군대는 장각의 병력과 '대치하던 상황'이었고 병력차가 15만과 5만이나, 장비와 전투숙련의 면에 있어서 관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서로 함부로 치지 못하는 대치국면이 된 것이다. 이는 정사와도 일치하는 부분인데 후한서의 노식열전에도 노식은 진영을 갖추고 참호를 판 뒤 공성무기인 운제(雲梯)를 사용해 적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 치밀한 계획은 영제가 보낸 환관인 소황문(小黃門) 좌풍이 뇌물을 요구했고 노식이 거절하는 바람에 모함해서 다 망해버렸다. 즉, 노식이 황건적을 상대로 여러 군데에서 승리한 것은 분명 사실인데 그것은 '장각이 광종에 틀어박히기 전'의 일이라는 얘기다.
한서형법지(漢書刑法志)에는 3000가지의 형벌을 기록하면서 크게 5가지의 형벌로 압축되는데 전한의 문제(文帝) 시기에 묵,의,월 의 형벌이 너무 잔혹하다고 해서 수위를 낮춘답시고 태형(笞刑) 등을 도입했는데 매질의 수가 너무 많아서 매 맞다 죽는(...) 사례가 흔했으며 죄인이 차라리 목숨이라도 건지게 신체 부위를 잘라 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한나라 시기의 형벌에 대한 것은 아래를 참조.
형벌명 의미 문제 시기의 변화
묵벌(墨罰) 얼굴에 글을 쓴 뒤에 칼로 그 글자를 새겨버림 머리칼을 자른 뒤 변방으로 보내 성을 쌓거나 수비를 맡는 노역
의벌(劓罰) 코를 베어냄 태형 300대
월벌(刖罰) 무릎뼈나 발뒷꿈치를 잘라냄 태형 500대
궁벌(宮罰) 생식기를 잘라냄 그대로 유지
대벽(大劈) 사형 그대로 유지
중요한 것은 해당 화에서 언급된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방식'이라는 형벌이다. 사형인 대벽에는 목을 자르는 참수(斬首), 허리를 베는 요참(腰斬), 몸을 찢어버리는 거열(車裂) 등이 있었고[56] 해당 화의 언급과 가장 비슷한 형벌은 바로 능지(凌遲)로서 몸의 살을 조금씩 저며서 죽이는 방식인데, 이 방식은 한나라 시대에는 없었고 북송 시기부터 요형(剮刑) 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즉, 당시에 대역의 죄를 범한 이들은 형법에 따라 대벽을 적용해 목이나 허리를 베거나 몸을 찢어 죽이는 방식으로 처리되었지,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은 없었다는 것이다.[57] 후한서 노식열전에도 노식은 1만여 명의 황건적을 참획(斬獲), 즉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만 되어 있지 껍질을 벗겼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황건적의 진압에 대한 다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미 잡힌 황건적을 겁주기 위해 일부러 하는 소리라고 본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오류이기도 하다.

18. 19화

魏武少時, 嘗與袁紹好為游俠
위무제는 일찍이 원소와 더불어 유협하기를 좋아했다. (후략)
조조가 장수를 칠 때 병사들에게 매실 밭이 있다고 속인 망매해갈(望梅解渴)의 일화 또한 세설신어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연의에서 세설신어를 많이 인용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세설신어 자체가 창작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모종강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더군다나 세설신어의 이야기 그대로도 아니고[59] 꼬마 원소가 꼬마 조조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욕을 먹는(...) 장면은 세설신어에도 등장하지 않는 말 그대로 작가의 창작이지만, 삼국지연의를 전혀 접하지 않은 독자들은 그게 실제로 있는 에피소드라 믿을 수도 있다.[60]
게다가 원소는 당시에 무시 당하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저런 행동 자체가 위험한 짓이었다. 게다가 원전의 원소 역시 기본 성격은 오만했지만 적어도 타인을 의식해 예의는 차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19. 20화

卻說玄德引關、張來潁州,聽得喊殺之聲,又望見火光燭天,急引兵來時,賊已敗散。玄德見皇甫嵩、朱雋,具道盧植之意。嵩曰:“張梁、張寶勢窮力乏,必投廣宗去依張角。玄德可即星夜往助。”玄德領命,遂引兵復回。


한편 현덕은 관우, 장비를 이끌고 영주에 왔는데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까지 비추는 불빛이 보였다. 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때 도적들은 이미 패해 흩어진 상태였다. 현덕은 황보숭과 주준을 보고는 노식의 뜻을 상세히 알렸다. 황보숭이 말했다. "장량, 장보는 세력이 궁해지고 힘이 모자라니 반드시 광종의 장각을 의지하러 달려갈 것이네. 현덕은 곧바로 별이 뜬 밤일 때[65] 가서 도우시오." 현덕은 명을 받들어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이후의 장면이 노식이 수레에 끌려서 압송되는 장면이며 조조와 유비가 대화하는 장면은 아예 없다. 왜냐하면 유비의 의용군은 전투가 이미 다 완료된 상태에서 뒤늦게 도착했고 곧바로 노식의 명령을 황보숭과 주준에게 보고한 뒤 황보숭의 명으로 곧바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國有十餘縣,長吏多阿附貴戚,贓污狼藉,於是奏免其八;禁斷淫祀,姦宄逃竄,郡界肅然。

제남국엔 10여개의 현이 있었는데 많은 장리들이 귀척(황제의 친인척)들에게 아부했으며 더러운 뇌물을 받고 거칠고 고약하게 짓밟으니 이에 그 중 8명을 아뢰서 면직해 바로 잡고 음사(민간제사)를 금지하니 간악한 도둑들은 도망가 숨었고 군의 경계가 숙연해졌다.


- 삼국지 위지 무제기

물론 해당 화의 설명에 나온 것처럼 제남의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위서(魏書)에 보면 '이전의 상들은 보이는 것을 들추지 못했다(歷前相不見舉)' 라는 표현과 '제남은 (사당 건축이) 더욱 번성해서 사당이 600개에 이르렀다(濟南尤盛 至六百餘祠)' 는 표현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을 보면 애당초 청주 성양국(城陽國)에 부임한 귀척인 경왕(景王) 유장(劉章)이 자신이 세운 공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그 때부터 유행을 타듯이 음사, 즉 유교의 제사가 아닌 다른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우는 일이 청주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66] 제남은 그러한 부패가 청주의 다른 곳보다 좀 더 심했을 뿐이지 제남만이 고담시티처럼 헬게이트였던 건 아니다. 고담시티의 치안이 불안정한 것은 정부기관에 의한 수탈과 피폐보다는 조커 펭귄, 베인 등이 저지르는 '강력범죄'와 더 큰 연관이 있다.

20. 21화

해당 부분에 대한 연의의 기술을 보면 노식이 유비를 황보숭에게 보낸 후 계속해서 광종의 황건적과 대치했으나 장각의 요술로 인해 번번히 제압에 실패해 장기간 대치중이었고[69] 그 타이밍에 좌풍이 등장해 아직까지 제압을 못한 노식을 근무태만의 죄를 물어 모함한 것이다. 즉,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지지부진 하고 있는 노식을 '근무태만' 이라는 죄목으로 모함한 것이다. 적어도 상황정리가 끝난 상황에서 얼토당토 않게 모함하고 그게 먹히는 삼국지톡의 묘사보다는 훨씬 매끄럽다.
연대 노식의 벼슬 사건
건녕 이전 백수 외척 두무에게 스스로 공치사 하지 말라고 건의했으나 무시됨
건녕(建寧, 168년 - 172년) 박사(博士) 관직생활 시작
희평(熹平) 4년(175년) 구강태수, 여강태수 구강 반란 진압, 낙향, 석경[72] 관련 상소 제출, 여강 반란 진압
희평 5년(176년) - 광화(光和, 178년 - 184년) 의랑, 시중, 상서 중앙관직 생활 재시작
중평(中平) 원년(184년) 북중랑장 황건적의 난 진압
즉, 노식은 그만두고 1년도 안 되게 쉬면서 학생들 가르치고 저술 작업을 했다가 다시 추천받아 여강의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 조정에 복귀한 셈이다. 그리고 활동한 거 보면 쉰 거 같지도 않다 그리고 최초의 관직생활을 건녕 1년(168년)에 했다고 해도 중평 원년(184년)에서 해당년을 빼면 16년 정도다. 즉, 20년이라는 관직 생활은 나올 수가 없는 셈이다. 게다가 삼국지톡 내의 묘사처럼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학생을 가르친 건 희평 4년(175년)이고 이 역시 황건적 시기와 계산하면 겨우 9년 밖에 안 된다. 이래저래 오류 투성이다.

21. 22화

朝廷自有公論 汝豈可造次?
조정에 정해진 공론이 있는데 네가 어찌 급하게 구느냐?
즉, '나라에서 정해진 바가 있는데 네가 왜 나서려 하냐' 는 말로서 북중랑장 노식에 대한 처우를 나라에서 정했으니 그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분명 같은 상황을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유비의 발언에 담긴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셈이다.

22. 23화

23. 24화

그러나 '개나 말은 사냥에나 쓸모 있었기에 대단한 사치품'이라는 말은 엄연히 따지자면 아니다. 이미 18화 부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말은 사냥에도 이용되었지만 우선은 군에서의 기마병 운용을 위해 황실에서도 사육이 활발했으며 민간에서는 농사, 운송, 이동 수단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필수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개 역시 투견이나 애완견으로 기르는 것 말고도 수렵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마냥 사치품이라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말의 경우는 작가가 '대단한 사치품'으로 언급해 버리는 순간 18화에서 버스를 대절할 돈이 없어 장세평과 소쌍에게 말을 받은 유비의 행동은 '대단한 사치행위'가 되어 버린다(...).

24. 25화

三人救了董卓回寨. 卓問三人現居何職. 玄德曰 "白身". 卓甚輕之 不為禮.

세 명(유,관,장 삼형제)은 동탁을 구해 목책으로 돌아왔다. 동탁은 세 명의 현재 직위가 무엇인지 물었다.
현덕이 "백신(벼슬이 없음)입니다."라고 말하자 동탁은 매우 업신여겼고 예를 갖추지 않았다.
즉, 동탁은 이들의 이름조차 묻지 않고 직급부터 물었으며 벼슬이 없다고 하자 무시한 셈이다.

25. 26화

性麤猛有謀 少嘗遊羌中, 盡與豪帥相結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으나 꾀가 있었고 어린 시절 강족 사이를 떠돌며 뛰어난 장수들과 서로 더불어 사귀었다.
즉, '꾀가 있다(有謀)' 라는 표현과 '어린 시절 강족 사이를 떠돌며(少嘗遊羌中)' 라는 부분을 빼고 서로 붙여버린 것이다. 특히 뒷 구절의 경우는 강족 중에서 뛰어난 장수감들을 그것도 어린 시절에 사귀었다는 얘기지, 호걸이라고 무작정 다 사귄 게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이 정도면 자기 입맛에 맞게 사료를 일부만 잘라내어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의] 장비, 동탁의 수하가 되느니 떠나겠다며 질색하다.
하지만 연의에서 실제로 나오는 구절은 상당히 다르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삼국지톡의 장비가 동탁이 싫어 형님들과 떠난다는 식의 표현이라면 원본의 장비는 동탁을 죽이지 못한 분을 못 이겨 만약 형님들이 저 놈 밑에 남을거면 난 딴 길 가겠다고 엄포를 부리는 것이다.
若不殺這廝, 反要在他部下聽令, 其實不干! 二兄要便住在此, 我自投別處去也!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되려 저 놈의 무리 밑에서 굽실거리면서 명령을 들어야 하는데 그건 진짜 싫소! 두 형님이 굽히면서 편하게 살 거라면 나는 스스로 떠나서 내 갈 곳으로 갈 것이오!
장비가 그만큼 정의롭지만 괄괄하고 앞뒤 안 살피는 조급한 성격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렇게 묘사를 한건지 의문이다.
- 장각의 아우이자 지공장군(地公將軍)인 장보를 토벌해 양성으로 몰아넣음.
- 양성 전투에서 마침내 장보를 죽임.[82]
- 황건적의 장수인 조홍, 한충, 손중이 군을 이끌고 반항하기 시작함.
- 주준이 철기병으로 이들을 격파, 세 장군은 완성으로 후퇴해 농성.
- 식량이 떨어진 황건적의 항복을 거절한 뒤 격파.
- 황건적을 이끌던 조홍이 많은 군사로 주준을 공격해 주춤하게 하고 완성을 다시 탈환.
- 손견의 군대가 달려옴.
즉, 지금 현 시점에서 손견이 튀어나온 걸 보면 예전 청주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주준과 유비가 세울 공로와 황보숭 및 조조의 광종 점령이 대거 삭제될 수도 있다.어째 유비가 연의에서 보다 훨씬 잉여로 묘사된다. 작가가 전투 장면이 그리기 싫은건가? 그리고 27화에서 사실이 되었다.

26. 27화


파일:삼톡 주준.png
中平元年, 黃巾賊起, 四府舉植, 拜北中郎將, 持節
중평 원년(184년), 황건적이 일어나자 4부는 노식을 천거했고 북중랑장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렸으며...


- 후한서 제 64권 노식열전
及黃巾起, 公卿多薦儁有才略, 拜為右中郎將, 持節
황건적이 일어나고, 공경의 다수가 주준이 재주와 꾀가 있음을 추천하자 우중랑장에 임명하고 지절을 내렸으며...


- 후한서 제 71권 주준열전
이러한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연의]라는 표기를 넣었지만 정작 삼국지연의에서는 노식, 황보숭, 주준의 직위를 세밀하게 구별하지 않고 통틀어서 중랑장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연의를 충실하게 반영했다고도 보기 어렵다. 삼국지톡에서 좌중랑장, 우중랑장, 북중랑장의 세부적인 직위 구별을 하려면 결국 정사를 인용해야 하는데 결국 엉터리로 인용된 셈.[85] 게다가 후한서의 기록을 더 보면 주준은 영천, 여남, 진국 등에서 황건적을 소탕한 공적을 인정받아[86] 진적중랑장(鎮賊中郎将)에 서향후(西鄉侯)로 진급한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우중랑장도 아닌 한 단계 더 진급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지톡에서의 오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후담으로 이 오류는 2018년 9월 7일 경에 바로잡혔다.
조홍 등이 완성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농성 상태로 들어가자 주준은 10리 밖에 영채를 세우고는 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고, 그 때 손견의 군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주준은 작전을 짜서 손견은 남문, 유비는 북문, 자신은 서문을 공격하고 동문은 비워두기로 했는데[88] 결국 남문으로 간 조홍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기행을 선보인 손견의 손에 죽었고 북문으로 가려던 손중은 유비가 날린 화살에 죽었다.
중요한 것은 유비가 손견과 있다는 것은 둘의 공격로가 일치한다는 얘기가 되고, 또한 완성의 황건적인 손중이 언급조차 없는 거 보면 유비가 손중을 죽이는 장면은 또 생략될 것으로 보였으나 29화에서 손중이 뜬금없이 등장해 유비의 화살에 목이 꿰뚫려 죽는 장면이 등장한 탓에 해결되었다.

27. 28화

[연의] 손견 가문, 시골 젊은이들 1500명을 모아 황건적 토벌군 일으키다.
물론 연의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소리다. 연의에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今見黃巾寇起, 聚集鄉中少年及諸商旅, 并淮泗精兵一千五百余人, 前來接應.
이제 황건의 도적들이 일어나자 시골의 젊은이와 장사치, 나그네를 모두 모았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의 정병 1천 오백 여명을 더해 먼저 온 것이다.

즉, 시골의 젊은이와 장사치, 나그네를 모은 건 사실이나, 천 오백 여명의 인원들은 서주와 양주(揚州)에 배치된 정병, 즉 정예병이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젊은이 등+1500명 정병"으로 무조건 1500명보다 많다는 뜻이 된다. 작가가 26화에서 정사의 동탁의 기록을 제멋대로 잘라 인용했다면, 이번에는 연의의 기록을 뭉떵하게 서술한 것이다.
[정사] 경직된 사회 분위기상, 손견같은 지방 실력자도 대명문가가 까라면 까야했다.
정사에서 손견을 기록을 보자면 양명황제(陽明皇帝)를 칭하던 도적 허창(許昌)과 그 아들 허조(許詔)를 토벌하면서 염독(鹽瀆), 우이(盱眙), 하비(下邳)의 승이 되었고 황건적의 난이 터지자, 우중랑장 주준이 조정에 표를 올려서 손견을 좌군사마(佐軍司馬)로 삼아 달라고 했고[91] 이에 손견이 연의의 기록과 일치하게 상인들 및 회수와 사수의 정병 천여 명을 모집해 주준을 도우면서 전공을 세웠다.
정리하자면 주준은 당시에 승에 불과한 손견을 직접 추천해 공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고 손견은 그에 응해 병사가 될 인원들을 이끌고 간 것이다. 그것을 까라고 해서 깐 거라고 본다면 주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배은망덕에 가까운 표현이다. 게다가 손견의 벼슬이었던 승 자체가 태수를 보조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대명문가가 까라면 깐다'는 식의 표현은 상당히 부적절한 묘사다.
나중에 등장하는 원술과의 관계를 의식한 발언이라면 그거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 원술과 주종으로 보일 정도로 친밀한 제휴 관계를 맺었으나 그건 그 때의 문제지, 원술이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명문가가 까라면 까야했다는 발언을 한다는 건 상당히 뜬금없는 셈. 게다가 정사에서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破虜將軍)[92]으로 추대하고 손견이 자신의 지시로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다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손분(孫賁)이 남은 병력을 끌고 자신에게 오자 조정에 표를 올려 손분을 예주자사로 추대하기도 했다. 즉, 손견이 좀 손해 보긴 했어도 삼국지톡에서의 표현처럼 무조건 까는 게 아니라 서로 이익이 맞아 함께 행동한 것에 가깝다.

28. 29화

[연의] 유비, "도적을 엄벌하는 건 마땅하나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라며 자비 베풀자고 하다.
하지만 실제 연의의 기술은 상당히 다르다.
不容寇降是矣. 今四面圍如鐵桶, 賊乞降不得, 必然死戰. 萬人一心, 尚不可擋, 況城中有數萬死命之人乎? 不若撤去東南. 獨攻西北. 賊必棄城而走, 無心戀戰, 可即擒也.

(주준의 말대로) 도적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게 옳을 것 같습니다. 지금 4면을 철통처럼 에워쌌고 도적들의 항복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기로 싸울 겁니다. 만인이 한 마음이라면 오히려 막을 수 없는데 하물며 성 안에는 수만의 목숨을 걸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동남쪽(의 병력)을 철거하고 오로지 서북쪽만 공격함만 못합니다. 도적들은 반드시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고 전투에 대한 미련도 사라질테니 곧바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앞의 이야기가 누락되는 바람에 임의적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연의의 내용을 보면, 완성의 황건적은 이미 기아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주준에게 항복을 요청했으나 주준은 그 요청을 거부했고 유비가 '왜 한고조처럼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냐'고 묻자 '저들은 그때와 달리 천하가 하나가 된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무엇으로 선한 일을 권할 것이며 또 (항복을 받아들이면) 도적들이 멋대로 노략질 하다가 불리해지면 투항하는 나쁜 뜻만 키우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유비가 그 뜻을 납득하며 한 말이 위의 말이다.
정리하자면, 유비는 '도적을 엄벌하는 게 마땅하다' 고 한 게 아니라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옳다' 고 했으며 자비를 베풀자고 한 게 아니라 적을 손쉽게 잡기 위해 동남쪽을 비워두자고 꽤 전략적으로 한 말이다. 나름 유비가 전투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계책을 냈는데 그 삼국지톡에서는 그 계책의 빛이 바래진 것이다.

29. 30화

聞太祖至, 咸皆舉免, 小大震怖, 姦宄遁逃, 竄入他郡.

태조(조조)가 도착하면 남김없이 다 들춰내고 해직할 것이라는 걸 듣자, 크건 작건 놀라 두려워했고 간사한 도둑들이 달아나 숨거나 다른 군으로 숨어 들어갔다.


- 위서
즉, 당시의 제남국 유지들은 감히 새로 부임하는 조조를 협박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조가 도착한 이후 자신들이 어떤 꼴을 당할지를 풍문으로 듣고는 상당히 놀라 되려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於鑠賢聖, 總統邦域, 封建五爵, 井田刑獄. 有燔丹書, 無普赦贖, 臯陶甫侯, 何有失職? 嗟哉後世, 改制易律, 勞民為君, 役賦其力.

아, 아름다운 현인과 성인이 모든 나라와 땅을 거느려 봉건하고 5개의 작위를 만들었으며 정전과 형법을 세웠네. 단서(丹書)[97]를 불태울 수 있어도 함부로 용서하지는 않으니 고요(臯陶)[98]와 보후(甫侯)[99]가 어찌 일을 잃겠는가? 한탄스럽게도 후세에는 제도를 바꾸고 법을 고쳐 백성을 고달프게 하고 임금이 되니 노역과 부세가 심하도다. (후략)
즉, 조조는 엄격한 법치를 세우고 그 법치를 준수하는 군주 아래에서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는 방식을 원했기 때문에 작중에서 묘사한 것처럼 제남국의 타락한 관원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할 것 같은 묘사는 상당히 부적절한 묘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기록에서도 조조는 부임한 후 조정에 표를 올려 장리(長吏) 8명을 파직하고 사당을 부숴 사태를 진압했다.

30. 31화

31. 32화

權且教省家銓注微名, 待後卻再理會未晚
우선 관청으로 하여금 인물을 선별해 자질구레한 벼슬이라도 줬다가 나중에 재차 확인해서 모자라다 싶으면 도로 빼앗으면 되오.
즉 환관이 직접 나서서 자리를 정해주는 게 아니라 관청에 맡겨서 아무 자리나 보낸 것이다. 이 부분은 20화에서 환관들이 조조를 제남상으로 보내는 장면에도 해당하는 부분이다. 사실 현위를 임명하는 것은 현령(縣令)[104]이나 현장(縣長)[105] 따위가 할 일이었기 때문에 환관들이 직접 위치를 지정해 보내는 장면은 좀 에러인 셈.
署縣事一月, 與民秋毫無犯, 民皆感化. 到任之後, 與關, 張食則同桌, 寢則同床. 如玄德在稠人廣坐. 關,張侍立, 終日不倦.


한달 간 고을 관청의 일을 보면서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자 백성 모두가 감화되었다. 부임한 뒤 관우, 장비와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침상에서 잤다. 현덕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앉으면 관우, 장비가 시립했는데 하루 종일 게을리하지 않았다.

32. 33화

감찰관 독우: 벼슬하는 관리들이 잘 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직책.
일단 틀린 설명이다. 우선 '독우'는 황제에게 보고하는 황문시랑처럼 후한 정부에서 직접 파견하는 게 아니라 군(郡)이나 국(國)에서 파견되며[109] 군과 현의 관리들 한정으로 감찰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20화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후한에는 감찰관이라 불리는 직책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야 한다.
독우: 군과 현의 벼슬하는 관리들이 잘 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감찰 직책.
그리고 삼국지연의를 보면 독우가 자신의 역할과는 별개로 '황건적의 난 이후 벼슬을 받은 이들의 공적을 조사'하는 내용이 있다. 이전 화에서 십상시들이 지들끼리 톡하면서 벼슬을 줬다 뺏으면 된다고 낄낄댔던 게 바로 이런 방식으로 뇌물을 공수하고 자신들을 싫어하는 자들을 쳐내려고 했기 때문. 삼국지톡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전혀 묘사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독우가 '이제 조정에서 조서를 보내(目今朝廷降詔)'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조사가 후한 조정을 대표하는 십상시의 농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통삭제 됨으로서 십상시의 악행에 대한 묘사가 되려 축소 되었다.
我與民秋毫無犯, 那得財物與他?

내가 백성들을 추호도 건드린 적이 없는데 어찌 재물을 얻어 남을 주겠소?
즉, 유비가 서순경의 말을 듣고 계좌를 뒤적거리다가 돈이 없어 황망해 하는 모습 자체가 연의에서 묘사된 유비의 인자한 모습을 깎아먹는 게 되는 것이다.
腾用事省闥三十餘年, 奉事四帝, 未嘗有過.
조등은 30여년 간 궁궐에서 일하며 4명의 황제[111]를 섬겼는데 일찍이 과실(잘못)을 경험하지 못했다.
즉 조조가 제남의 유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든 간에 저런 식으로 까이기엔 너무 훌륭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조등이 유일하게 까이는 것은 원소가 관도대전을 벌이기 전에 천하에 공표한 격문에서 '조등은 중상시로서 요사스런 무리를 만들어 제멋대로 재물을 탐내고 습속을 해치고 사람들을 학대했다'고 표현한 게 전부인데 이 격문은 말 그대로 원소를 띄우고 조조를 깎아 내리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부분이 많다. 실제로 조등은 익주자사 충고(种暠)가 조등에게 보내진 뇌물을 파악하고[112] 조정에 상주해 폭로했음에도[113] 악감정을 가지지 않고 되려 항상 '충고는 유능한 신하' 라고 칭찬했으며 결국 그 충고는 사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정말 뇌물로 깐다면 조등이 아니라 그의 양아들이자 아버지인 조숭이 까여야 한다. 실제로도 영제 시기에 영제가 벼슬팔이 하던 서원에 1억만 전이라는 천문학적인 뇌물을 바쳐 태위 벼슬을 샀기 때문이다. 더러운 환관의 핏줄[114]이라는 표현과 부정축재에 대한 부분에서 아버지 조숭의 내용이 빠진데다 작가의 부가설명까지 없기 때문에 마치 '더러운 환관 조등이 부정축재를 일삼은 것'처럼 묘사가 되었다. 이전에도 이야기 된 거지만 조조가 다시 일어서는데는 아버지가 부정축재한 재물과 할아버지 조등의 명망이 큰 몫을 했다.

33. 34화

中常侍趙忠言於省內曰:「袁本初坐作聲價,好養死士,不知此兒終欲何作。」叔父太傅隗聞而呼紹,以忠言責之,紹終不改。

중상시 조충이 궁안에서 말하기를 "원본초는 앉아서 좋은 평판을 만들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선비를 기르니 이 애송이가 끝내는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소." 숙부인 태부 외가 이를 듣고 호소하며 충(조충)이 한 말로 꾸짖었으나 소는 끝내 고치지 않았다.


- 후한서 원소열전
「群豎不吾從,而從吾家奴乎!」 又與公孫瓚書,云紹非袁氏子...
"놈들이 내가 아니라 가노(家奴)를 따르는구나!" 또한 공손찬에게 준 서신에 '소는 원씨의 자손이 아니다' 라고 했다. (후략)

- 후한서 원술열전
春秋之義,子以母貴。紹母親為傅婢,地實微賤,據職高重 享福豐隆。有苟進之志,無虛退之心,紹罪九也。
춘추에 의하면 자식은 어미로 인해 귀해진다 했습니다. 원소의 모친은 부비(傅婢)이니 태어난 곳과 종자가 미천하나, 지위에 의지해 높고 무겁게 되었고 후한 복을 누렸습니다. 단지 나아갈 마음 뿐이고 물러날 마음이 없으니 원소의 아홉 번째 죄입니다.


- 공손찬이 원소를 탄핵하는 상소문 中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이 있는 게 사서의 기록이긴 하나, 원소의 태생을 종놈이라고 부른 것은 오로지 원술 뿐이고, 공손찬 또한 원술에게서 들은 말을 인용해 상소문에 넣었을 뿐이다. 사가들의 주석들을 봐도 원산송의 후한지에서는 얼자(孼子)라는 표현이 등장하나 배송지의 주석에서는 위서를 인용해 '원소는 원봉의 서자(庶子)였으나 이복형 원성(袁成)의 아들이 되게 꾸몄다(紹即逢之庶子,術異母兄也,出後成為子)'고 말하고 있다. 즉, 원소가 서자 출신인 건 분명한 사실이나 그 어미가 노비 출신이라는 점은 확신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게다가 저 발언은 원술이 본격적으로 원소와 척을 지고 조조-원소 라인에 대적하기 위해 공손찬과 손을 잡으면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반동탁연합군 이후에나 나와야 맞다.
즉, 원술이 원소를 종놈이라고 부르는 장면은 너무 이른 시기에 나왔고 그 발언 속에 담긴 '원소의 어머니는 노비'라는 주장 또한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정사 혹은 나무위키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지톡의 진짜 골자인 연의에서는 원소를 딱히 종놈이라고 부르는 장면도 없다.[117] 그냥 연의의 방식대로 대면대면하면서 어색한 이복형제로 묘사했으면 나오지 않았을 지적인 셈.
파일:무적핑크 트위터 스샷.jpg
당시 중국에서는 황명을 내릴 때는 전국옥새를 사용했고 관리들이 임용되면 그 직책에 맞는 관인(官印)을 내렸으며 그 관인이 관리의 상징이기도 했다.[119] 현대의 면에서도 은행 업무나 주택 관련 사항에서 다들 도장이나 인장, 서명 등을 사용하지 도장용 반지는 너무 옛날 방식이라 사용되지 않는다.

34. 35화

督郵以公事到縣, 先主求謁, 不通, 直入縛督郵, 杖二百, 解綬繫其頸著馬, 棄官亡命.
독우가 공적인 일로써 현에 이르렀고 선주(유비)는 뵙기를 구했으나 통하지 않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결박하고 장(杖) 200대[120]를 때리고 인끈을 풀어 그 목에 걸고 말매는 나무에 묶어둔 뒤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 삼국지 촉서 선주전.
飛大喝:“害民賊!認得我嗎?”督郵未及開言,早被張飛揪住頭發,扯出館驛,直到縣前馬樁上縛住﹔攀下柳條,去督郵兩腿上著力鞭打,一連打折柳條十數枝。
장비가 크게 소리치길, "백성을 해치는 도적놈아! 나를 알겠느냐?" 독우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가까이 다가온 장비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관역(館驛)으로 나갔다. 곧 현청 앞 말을 메어두는 말뚝 위에 묶고 버드나무 가지의 아래를 꺾어 독우의 두 넓적다리 위를 힘껏 채찍질 했다. 한 번 닿으면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졌는데 가지를 세어보니 10개나 되었다.

- 삼국지연의의 서술.

즉, 정사에서는 유비가 독우를 때리고 연의에서는 장비가 때리는데 둘 중 하나를 취하는 게 아니라 둘 다를 취하려는 일환으로 장비와 유비가 동시에 때리는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작가의 역량의 영역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연의와 정사 모두를 취합함으로서 역으로 정사와 연의 모두의 기술을 어긴 셈이 되기 때문에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대신 사이다는 두 배가 되었다.

35. 36화

久之, 徵還為東郡太守, 不就, 稱疾歸鄉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불러들여서 동군태수로 삼았지만 나서지 않았고 병을 핑계로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 위지 무제기
조정에서는 조조의 활약을 눈여겨 본 것인지 그를 연주(兗州) 동군(東郡)의 태수로 임명했지만 조조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돌아갔다. 연주 역시 황건적의 피해를 입은 곳이지만 동군은 휘하에 15개의 현과 13만 호(戶)의 인구를 둔 제남군과 비슷한 규모의 지역이었다. 즉 조조를 동군태수로 임명한 것은 제남처럼 피폐해진 동군 일대를 안정화 시키려고 보냈을 가능성도 있으며 임무지 이동 내지는 부서 이동에 가깝기 때문에 삼국지톡처럼 단순히 십상시의 음모라고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36. 37화

37. 38화

38. 39화

中平六年下四月, 靈帝病篤, 招大將軍何進入宮, 商議後事.
중평 6년(189년) 4월 하순, 영제의 병이 깊어지자 대장군 하진을 불러 궁에 오게 했고 후사를 논의했다.

39. 40화

碩雖擅兵於中,而猶畏忌於進
건석이 비록 병사들을 맘대로 하였으나 오히려 하진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였고...

즉, 건석을 필두로 한 십상시도 명분과 병권을 쥔 하진을 두려워하고 경계했지, 저렇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하면서 막무가내로 나가지는 못했다.

[1] 사실 2화에서 유비 역시 열심히 노력했음이 나오긴 했지만 당장 1화에 등장한 유비 모습이 너무 일 안하는 니트족처럼 묘사되었다. [2] 모종강본에서는 정현에게서도 배웠다고 나온다. [3] 그냥 자 노식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붙은 것같다 [4] 크게 보는 것은 현량방정(賢良方正: 어질고 착하며 태도가 바름), 직언(直言: 곧은 말을 기탄없이 함), 명경(明經: 경서에 밝음), 유도(有道: 학덕이 있음), 무재(茂才: 풍부한 재능을 가짐), 효렴(孝廉: 효성스럽고 청렴함) 등이다.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한무제 시기에 도입된 효렴이었다. [5] 때문에 유명한 인물들의 인물평인 '향론(郷論)'이 유행했다. 연의에서도 인물평에 능한 명사들이 등장하며 코에이 삼국지에서 갑자기 등장해 플레이어의 인품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명사들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6] 향거리선제로 추천된 인물은 주로 중앙관직으로 진출했다. [7] 공채는 스스로 국가에서 정하는 일정한 시험에 응시해서 통과하는 형태이지만, 향거리선제는 지방의 관리가 지방의 인재를 국가에 추천한다. 대학교 입학전형으로 비유하자면 전자는 자기 실력으로 수능을 치고 대학을 들어가는 유형이라면 후자는 학교장이 지인이거나 기타등등의 이유로 추천을 하여 학교장 추천전형으로 특별하게 입학하는 경우다. 다만 더 정확히 나누면 공채에 더 가까운 고대 채용시험은 과거시험이었다. [8] 만약 묘사된 면접이 향거리선제일 경우 탁군의 군수 그 자신, 혹은 그 아래의 관리일 가능성이 있다. [9] 물론 정사로 얘기하자면 유언은 고향 자체도 형주의 강하군이어서 유주를 다스린 적이 없고 당시에 황실의 제사를 주관하던 태상(太常)직을 맡아 중앙에 있었다. 당시 실제로 유주를 총괄하던 존재는 유주자사 곽훈이다. [10] 남성은 이 시기를 약관(弱冠)이라 불렀고 여성의 경우는 급계(及笄)라고 불렀다. 특히 급계라는 표현은 훗날 등장할 여포의 딸이 등장하는 편에서 언급되는 단어다. [11] 공자가 15세부터 학문에 정진한 것에 유례한 별칭 [12] 조선왕조실톡이나 삼국지톡 모두 역사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일부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에 현대의 시점으로 보기에 크게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둘 다 원전 자료가 존재하는데다 현대의 요소를 섞는다면 어느정도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현대의 시점으로 봐도 '푸줏간에서 일하며 부유한 청소년'이나 '학교 체육복을 당당하게 입고 포차 거리에서 유비를 기다리는 장면' 등은 무리에 가까운 묘사다. [13] 삼톡에서는 도원결의 당시 장비의 나이를 16세 정도로 잡았는데 당시로서는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초반 청년 정도의 위치라고 볼 수 있다. [14] 원래는 도원결의의 장면은 삼국지평화에서 가장 먼저 나왔고 나관중은 삼국지평화의 해당 내용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15] 사실 삼국지는 뭘 어떻게 구성해도 분량이 엄청나긴 하다. [16] 소금 산지로 유명하다. 때문에 관우의 사건이 소금밀매업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17] 민간 전설에서는 이 때 관우가 두부를 만들어서 팔았다고도 한다. 때문에 두부 장수들 중에는 관우의 신격인 관제(關帝)를 섬기는 이가 많았다. [18] 공을 세우러 가기도 전에 살인 + 공무원 폭행 범죄를 벌인 이와 얽힌 것이다(...). [19] 만약 이 만화 자체가 온전히 고전적인 분위기였다면 삼국지연의처럼 '의협심'으로 때울 수 있겠지만 현대적인 모습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조차도 안 된다. 의협심이든 복수든 뭐든 간에 폭력은 법적으로 정당성이 성립되지 않는 처벌 대상이라는 게 현대사회이기 때문. [20] 십상시들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것까지 손을 뻗은 상태였다. 연의에서는 손견도 뇌물을 바쳐 벼슬을 얻었다. [21] 당시 소금매매는 상당히 중요해서 민간이 아닌 국가가 직접 담당하였다. [22] 재미있는 건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에 의하면 조조가 건안 20년(215년)에 이 계곡에서 3척 6촌짜리 검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검이 바로 맹덕검(孟德劍)이라고 한다. [23] 이 장면이 설득력이 생길려면 조조가 간언하기 전에 황제가 조조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며 황제가 자기가 물어놓고 왜 읽씹했는지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한다. 그냥 조조 혼자 간언하고 황제가 씹는 장면은 조조의 직책 상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24] 말그대로 북쪽 성문을 담당하던 직책으로 통금시간에 맞춰서 문을 열고 닫는걸 관리하는 인물이다. 그 유명한 '오색몽둥이' 사건이 북부위 시절의 일이다. [25] 이러한 부분은 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기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아기가 영특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크레파스로 글씨를 쓰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어째 아기가 쓰는 글자가 한글이다(...). 고전 배경이 중국인데 아기가 15세기나 되어야 등장하는 남의 나라의 글자를 쓰는 모습이 괴랄했는지 베댓과 댓글란은 훈민정음과 세종대왕 드립으로 넘쳐났다. [26] 이 또한 고대와 현대가 뒤섞이다 보니 생긴 오류로 보인다. [27] 조조가 계란을 맞은 장면을 보면 다크서클 상태가 꽤 심각하다. [28] 계란을 맞은 조조도 그런 일을 처음 당해 충격을 받은 것처럼 표현된다. [29] 재밌는 건 환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조선왕조실톡에서도 다뤘다는 점이다. 적어도 같은 소재를 다룬다면 나오기 어려운 오류다. [30] 한국사에도 고려시대 까지는 환관과 내시는 별개였고 내시는 왕의 측근 역할을 맡는 젊은 유망주 관료들이 임명되는 요직이었다. 내시부를 환관들이 맡게 된건 조선시대 부터다. [31] 훗날 조조의 맏아들 조비가 이 관직으로 종사하기도 했다. [32] 유비의 쌍고검,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장팔사모 역시 이 때 만들어졌다. [33] 조조가 비싼 애마(...)를 끌고 나가는 것과 유비가 교통 수단이 없어 쩔쩔매는 장면은 묘하게 대치된다. [34] 사족으로 이 자사직은 후에 군사권을 대거 부여한 목(牧)으로 변경되었는데 그것을 추진한 이가 바로 유언이다. [35] 실제로 삼톡에서는 말을 타고 전투하는 장면도 등장하긴 하나, 말=차나 오토바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페러리로 해석된 적토마나, 동탁이 여포를 시켜 조조에게 좋은 말을 골라주라고 한 연의의 일화가 좋은 차 한대 주하고 한 것 등. 다만 일괄적으로 말=자동차라고 하면 공손찬의 그 유면한 백마부대가 승용차 부대 (...)란 희한한 장면이 되므로 타고 다니는 애마는 차, 그리고 실제 전투에 쓰는 말은 그대로 말로 묘사한 듯. [36] 이 때문에 한나라의 병종에서 전차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37] 관직 중 태복(太僕)이 황실의 가마와 말을 관리하였다. [38] 후한 13주 중 양주(凉州),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西凉)이라 불리는 지역이 대표적인 말 사육 지역이었고 말 무역이 이루어지던 비단길과도 인접했다. 여기서 양성된 기병으로 중원을 위협했던 존재로는 동탁과 마초가 있다. [39] 연의에서 나오는 숫자이다. [40] 말을 팔아서 사서 주지 않았겠느냐는 재반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시는 황건적이 8개 주에서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시기였다. 어디 가서 말을 팔아 금이나 좋은 쇠와 교환할 수 있을까? 당장에 장세평과 소쌍은 북방에서 말을 팔려다가 길이 막혀 돌아온 상황이었다. [41] 물론 너무 현대적인 모습과 너무 고전적인 모습이 섞여 있는지라, 앞에 등장한 헬기 촬영 장면과 함께 가장 괴리감이 크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댓글 대부분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그러한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42] 온라인게임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몸 장비품으로 등장한다. [43] 더군다나 해당 장면에 등장하는 유모차를 끈 아줌마와 뒤에서 도망치는 남성의 복장이 똑같다. [44] 탁군 출신의 의용군 500명. [45] 人報(인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사람 편으로 보내진 소식'이란 뜻으로 보아 미리 보낸 첩보원이나 정찰병이 보낸 소식으로 보인다. [46] 사실 해당 화 내용은 구성면에서 정말 짧은데 장비가 등무를 제압하는 장면이 거의 전부다. [47] 실제 전쟁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방법으로서 멀리 있는 적이나 다수의 적군을 공격할 때 사용된다. [48] 해당 만화의 끝 설명 부분에서도 '장비, 황건적 등무 가슴팍 꿰뚫어버리다' 라고 되어 있긴 하다. [49] 황건적이 생판 처음 보는 유비를 지휘자로 알아차렸다는 게 의아할 수 있으나, 14~15화에 걸쳐 유비는 계속해서 의용군의 맨 앞자리에서 군을 이끌었다. 총지휘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개 병사가 아님을 추측하기는 쉬운 일이다. [50] 주인공 파티가 불살인 작품이라면 모를까, 바로 뒷 장면이 관우가 황건적을 두동강내는 것이기 때문에.... [51] 대부분의 독자들이 보도자료를 오해해 언론에 대한 비난과 기레기 타령을 하고 있는데 보도자료(Press release)는 기업이나 정부기관 등이 신문기사체로 보도자료를 작성해 기자에게 보내주면 기자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덕분에 베스트 댓글은 기레기 타령 댓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댓글들로 댓글창이 엉망이다. [52] 연의에 등장하는 유언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짧은데 '유주태수 유언은 강하 경릉(竟陵) 출신으로 한나라 노공왕(魯恭王)의 후예다.' 정도다. [53] 전근대 전투에서는 병력의 차이가 승패에 절대적이며, 엄청난 병사의 질적 차이나 지휘의 차이가 있지 않으면 승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병사를 처음 지휘해 보는 경력이나 황건적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의용군 등 삼형제 정도의 능력이 아니었으면 확실히 죽음의 위기를 겪었을 상황. [54] 특히나 연의의 유비는 효성이 지극하기 때문에 없는 살림에 유학을 보낸 어머니를 실망시키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55] 왜냐하면 정사에서 유비는 '구강태수를 지낸 같은 군(탁군) 출신의 노식을 섬겼다' 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 노식이 구강태수로서 반란을 진압하고 낙향한 시기와 일치한다. [56] 죽인 뒤 시체를 저잣거리에 늘어놓는 기시(棄市)도 있었다. [57] 오히려 이 형벌은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캄비세스 2세가 뇌물을 받고 잘못된 판결을 내린 재판관 시삼네스(Sisamnes)를 죽였을 때 시행한 이야기로 더 유명하다. [58] 인물들의 일화를 기록한 소설로서 남북조시기에 많이 만들어졌으며 보통 민담에서 차용하거나 작가들이 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59] 세설신어의 이야기는 젊은 원소와 조조가 처녀를 희롱했다가 쫓기게 되었고 원소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조조가 꾀를 써서 '여기 신부를 겁탈한 놈이 있다'고 일부러 소리를 쳐 원소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 함정에서 빠져나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도 이 이야기를 채용하고 있다. [60] 그러나 이 비판은 지나친 트집잡기고 비판을 위한 비판에 불과하다. '삼국지연의를 전혀 접하지 않은 독자들은 실제로 믿을 수도 있다'는 논리대로면 삼국지 창작물은 단 하나의 대화, 일점일획의 서술도 정사와 연의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판이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것인데, 매우 터무니없다. 더구나 역사적인 흐름이나 사실, 인물에 관한 전문적 논의를 아예 바꿔친 것도 아닌 작은 오리지널리티를 두고 그것 때문에 독자들이 착각하면 어쩌냐는 말은, 연의 자체를 포함해서 모든 역사물이 역사물이란 것만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말밖에 안된다. 하물며 정보가 넘쳐나고 삼국지 공부하려면 얼마든 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 옛날에 봤던 웹툰 내용을 토씨 하나하나 다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건 그 독자가 무식한 것일 뿐이다. 애초 이 논리대로면 유관장이 도원결의까지 가기의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모든 작품이 독자에게 역사를 착각시키는 부적절한 행위란 뜻이다! [61] 애당초 이 만화에서 원소의 성격이 상당히 오만한데다 허황된 생각까지 품은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넣은 장면일 수도 있다. [62] 조등이 환관임에도 양아들을 들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외척 양기가 처형된 후, 두무 등 계속해서 대항하는 외척들을 이른바 '22열후'라 불리는 환관들과 힘을 합쳐 싹 청소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서 얻은 권리였다. [63] 십상시의 수장인 장양이 조등의 수발이나 들 정도였으니 그 권세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64] 아이러니하게도 연의에서 조조의 잔혹한 진짜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동탁 암살 실패 후 달아난 중에 아버지의 친구인 여백사를 죽이고도 뻔뻔하게 '내가 천하를 배신할지언정 천하가 나를 배신할 수 없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은 사건이며, 그 이전에는 조조가 엄격하고 공정한 인물이며 한에 대한 충성도 가진 걸로 묘사되지 냉정하고 잔혹하다는 식의 표현은 거의 없다. [65] 장사에서 화공전이 벌어진 시기가 대략 2경(밤 10시)이었다. 즉, 어둡지만 별이 떠서 시야가 확보되니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돌아가서 노식을 도우라는 의미다. [66] 사당을 건립하는 일은 백성을 착취하는데 이용된 것이다. 즉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심히 안 좋았던 셈. [67] 물론 삼국지톡 내의 표현도 뚜렷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이긴 한데 18화에서 노식이 황건적들을 대거 붙잡고 편안한 표정으로 황건적 포로를 희롱하는 장면을 보면 광종의 황건적을 제압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68] 연의에서 백성들을 타인을 모함하는데 이용하려 했던 사례는 후에 뇌물을 털어먹으려고 안희현의 유비를 찾아왔던 독우였다. [69] 정사인 후한서의 기록에서는 황건적을 광종에 몰아넣고는 장각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던 중이었다. [70] 물론 노식스쿨에서의 모습은 학자로서의 면모가 맞으니 해당화처럼 묘사해도 관계없긴 하다. [71] 후한서 노식열전을 참조하였다. [72] 유교경전을 돌에 새긴 것. 이 시기 낙양의 태학에 세운 희평석경(熹平石経)이 최초의 석경으로 보인다. [73] 후한서 효영제기(孝靈帝紀). [74] 소후(小侯)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은 해당 가문의 어린 자제라도 봉(封), 즉 임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75] 위지 이공손도사장전에서 '공손찬을 탁군의 노식에게 보내 경서를 읽게 했다(遣詣涿郡盧植讀經)'는 기록이 등장한다. [76] 정사 기준. 공자도 이 나이대에 학문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7] 물론 의용병들의 사후처리를 걱정하는 것이라면 현실적일 수 있겠으나 유비의 고민은 해당 화에 나타나듯이 '노식도 없어서 지원이 끊겼기 때문에 더 싸울 수 없다'에 집중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78] 정사에 언급되는 부분이다. [79] 출처-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저자: 김성회) [80] 일본에서도 임진왜란 당시에 전공의 표식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갔다. [81] 대표적인 인물이 황보숭. 노식이 잡혀간 후, 황건적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미 죽은 장각의 무덤을 파내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82] 그 사이 삽질만 하던 동탁(...)이 중랑장 직에서 파직되고 대신 황보숭이 조조와 함께 광종을 공격해 장량을 죽인 뒤 장각의 묘를 파내 그 목을 수도로 보냈다. [83] 실제로도 누락된 청주성 전투의 경우는 연의에서 관우, 장비의 무력보다도 유비의 지략과 통솔력이 돋보이는 전투였고 양성 전투는 유비가 장보의 깃발을 화살로 쏘면서 장보의 팔꿈치까지 맞추는 재주를 보여준 전투였다. 이래저래 유비의 활약상이 강조되는 부분은 모두 누락된 셈. [84] 출처: 후한서 주준열전. 참고로 황보숭은 좌중랑장. [85] 만약 한자가 비슷한 좌(左), 우(右)를 헷갈렸다면 이해할 만 하지만 북(北)중랑장이라 묘사한 만큼 변명하기 어렵다. [86] 덤으로 황보숭이 대인배처럼 자신의 공 대부분을 주준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87] 물론 조홍은 그게 방법이 없어서 현타온 것으로 착각했다. [88] 포위 공격에서 굳이 한 곳을 비워둔 건 적을 너무 궁지로 몰아버리면 되려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이라는 유비의 조언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89] 대표적인 예로 하진 하태후의 어머니인 무양군(舞陽君)이 있다. [90] 오서에 등장하는 모든 황후들은 모두 부인으로 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 자체가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 된 것이다. [91] 당시에 중랑장 직을 토벌 지역에 따라 북, 좌, 우로 나눴기 때문에 서주와 형주 일대의 토벌은 우중랑장인 주준이 담당했다. [92] 파로장군은 손견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직위이며 큰아들 손책은 조조가 추대한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불린다. 오서에서 이 둘의 파트는 별도로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이라 불린다. [93] 더군다나 화살이 막 목을 꿰뚫는 장면에서는 모자이크조차 없다. [94] 후한서 포함 [95]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라는 뜻. [96] 출처: 인간 조조 1 - 천하의 지혜를 모아라(저자: 이재하) [97]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던 붉은 글씨의 문서 혹은 바위 등에 새기는 붉은 글씨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율령으로 반포된 법령 등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98] 순임금 시대의 법관 [99] 주나라 목왕 시절의 대신으로 형법인 '여형(呂刑)'을 만든 인물이다. [100] 오늘날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에 가까운 직위다. 하남 지역에 수도 낙양이 있었기 때문. [101] 정사에서는 좌거기장군에 기주목으로 임명되었다. 투옥된 노식 대신 그 후임이 된 동탁이 황건적에게 털리던 걸 황보숭이 대신 나서서 뒤치다꺼리 한 셈이니 나름 적절한 보상이었던 셈. [102] 물론 삼국지톡에서는 그러한 설명이 없다. [103] 구경(九卿) 중 하나인 소부(少傅)의 상서낭중(尙書郞中)을 의미한다. [104] 1만호 이상의 현을 관리하는 행정관을 말한다. [105] 현령이 통치하는 지역보다 인구수가 작은 현을 관리하는 행정관이다. [106] 그런데 정작 해당 장면에서 어떤 베댓이 아랫도리 드립을 치는 바람에 댓글창에 난리가 났고 이러한 지적은 묻혀버렸다. [107]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왕조실톡에서도 이성계 위화도 회군 관련 에피소드에서 당시에 있을 수 없는 감자 콜레라를 언급한 일이 있긴 하다. [108] 유비의 출신과 공적을 물었고 유비가 '중산정왕의 후예고 탁군에서부터 크고 작은 전투를 30번 정도 치르면서 작은 공을 세웠다'고 고하자 거짓말이라면서 화를 내었다. [109] 즉 안희현의 유비를 감독하러 온 독우는 안희현이 속해 있던 중산국에서 파견한 것이다. [110] 아마도 새마을금고 패러디로 보인다. [111] 사실 조등의 일생으로 본다면 안제(安帝), 순제(順帝), 충제(衝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등 5명의 황제를 섬겼는데 충제의 경우는 권신인 양기가 억지로 세운 탓에 즉위 당시 2살짜리 아기(...)였고 3살에 요절한 탓에 정식 황제라고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112] 자사는 주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등에게 뇌물을 보내려 했던 이는 촉군태수였기 때문에 충고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113] 물론 당시의 황제였던 환제는 충고의 고발을 믿지 않았다. [114] 이 표현도 웃긴 게 아버지 조숭은 조등의 양자였기 때문에 혈연적으로는 이어지지도 않았고 조등이 양자를 들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로서 조등 본인의 적공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었다. 환관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건 십상시 탓이 컸다. [115] 당시 태복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116] 황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직책이다. 이전 10화 오류 지적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117] 연의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을 이용해 기주를 낼름 먹자 원술이 염치도 없이 말 1천필만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 당하자 '이때부터 형제가 화목하지 못했다(自此, 兄弟不睦)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즉 연의에서는 저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잘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118] 서양에서도 고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 '클래식 씰(Classic seal)'이라고 불렀다. [119] 삼국지연의에서도 관우가 조조를 떠날 때 한 수정후의 관인을 두고 오는 장면이 있다. [120] 당시 형법에서 태형 300대는 의벌(劓罰), 즉 코를 베어내는 형벌을 대신한 벌이었다. 즉 유비는 거의 형벌 수준으로 독우를 두들겨 팬 것이다(...). [121] 유교 이외의 제사나 민간제사. [122] 광록훈 소속으로 황제에게 간언을 하거나 응대를 담당하던 직위. [123] 영제는 하황후에게서 나온 유변보다는 하황후에게 살해 당한 왕미인의 아들인 유협를 더 황제에 적합한 인물로 보았다. [124] 물론 이 임명에는 황제의 사돈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125] 물론 연의에서도 이런 하진의 공로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다. 하진은 이 음모를 막아 신후(愼侯)에 봉해졌다. [126] 연의에서는 장순-장거의 난과 우성의 난이 언급된다. 간의대부 유도가 영제에게 아뢸 때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고을을 침략하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정사에서 등장하는 반란들도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127] 당시 변장과 한수의 난이 규모가 크고 기세가 대단해 제대로 진압되지 않고 있었고 반란이 일어난 양주에서 낙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삼보 지역까지 전화에 휩싸였기 때문에 황제가 친히 군을 이끌고 군사 시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128] 서원팔교위의 최고직은 상군교위(上軍校尉)였고 그 직책은 당시 소황문, 즉 황문시랑이던 건석(蹇碩)이 맡았다. 놀라운 건 당시 상군교위는 팔교위 말고도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사예교위 이하의 모든 이를 감독했는데 당시 하진이 맡고 있던 대장군은 사예교위 그 이상임에도 건석에게 예속되었다. [129] 물론 환관의 권한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순렬황후 양씨의 오라비인 '양기'를 대장군으로 삼아 견제하기도 했다. [130] 연의에서 십상시가 진짜로 감춘 것은 영제가 사망한 사실이었다. [131] 그러나 손견 첫 등장 때문에 주준과 유비의 활약을 통삭제 한 것처럼 그대로 누락 시킬 확률이 상당히 높다. [132] 위나라가 급망모드를 타던 시기를 다룬 삼소제기(三少帝紀)에서도 당시 황태후였던 명원황후(明元皇后) 곽씨에게 '전하'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133] 사실 이쪽은 황태후에게 주로 붙던 칭호다. [134] 서원팔교위를 세우고 십상시인 건석 밑에 대장군이던 하진을 둔 점이나, 병세가 심해졌을 때 건석을 따로 불러 황자인 유협을 부탁한 것을 보면 황제가 하진보다는 십상시를 더 의지하고 있었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