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목록 | 등장인물 ( 기타 세력 · 미분류) | 평가 | 비판 ( 조조/비판 · 피해자) | 오류 ( 시즌 1 · 시즌 2) |
1. 개요
항목이 너무 길어져서 분리되었다.[1]☆ 표시 - 삼국지톡이 아닌 원전인 삼국지연의 자체에서 일어난 오류를 나타낸다.
2. 41화 ~50화
2.1. 41화
-
첫 컷에 낙양의 장락궁을 묘사한 듯한 화려한 건축물의 처마가 묘사되어 있는데,
트레이싱 내지는
모작으로 보인다.[2] 그런데 해당 사진의 건축물이
이화원(頤和園)[3]의 배운전(排雲殿)이다. 즉,
청나라 시절의 건축물이라는 것. 사실 외견이 화려해서 황실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부족함이 없고 한나라 시기의 건축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용했다고 할 수 있지만, 다음 시기인
위진남북조 시대의 건축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건축물의 부분에서는 중국 사극이나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고증이 어느 정도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4] 그런 방면에서 자료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구태여 청나라의 건축물을 사용한 것이다. 9컷의 묘사를 보면 완전 자금성이다.
실제 일어난 일로 비유하자면 고구려 시기를 다룬 사극인 칼과 꽃에서 대왕 세종의 세트장을 쓰는 바람에 시대 상으로 있지도 않았을 광화문과 흡사한 건축물이 화면에 등장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5] 물론 역덕후가 아닌 이상은 그런 건축물에 대한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쓸 독자들은 많지 않겠지만 그만큼 스토리 및 설정을 담당한 작가가 자료 조사 및 선정 등에 있어서 신경을 안 쓴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6] 이러한 부족한 자료 조사 및 선정의 문제는 스토리 상에서는 더 많이 발생해 인물이나 사건이 누락되기도 하고 정사와 연의 모두에 등장하지 않는 작가만의 특이한 전개 방식이 등장하는 식으로 도출되기도 한다.
- 조조와 원소가 궁궐에서 나름 복식을 갖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데 중요한 건 관모를 쓰지 않고 있으며 상투에 관을 쓴 괴상한 형태로 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위의 사진은 후한의 광무제의 초상화인데 그 옆에 선 인물들의 복식을 통해 당시의 관복의 형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아무리 작가의 창작의 영역이라지만 조조와 원소가 현재 황제의 즉위식에 참여하러 궁에 들어왔다는 상황 및 공간적인 여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7] 위의 자료 조사 부족과 같은 오류로 보인다.
- 뉴스 기사의 방식으로 조조와 원소가 십상시를 체포한 것으로 묘사되나, 연의나 정사에서나 그런 묘사는 없다. 두 자료 모두 건석이 하진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일이 원인이었고[8] 연의에서는 원소가 금군을 이끌어 군을 통제해 소제가 즉위 하게 한 뒤 건석을 찾았지만 건석은 이미 곽승에게 살해 당했고 하태후의 옹호로 인해 십상시 주살이 실패로 돌아갔다. 정사에서는 하진과 친분이 있고 그를 존귀하게 만든 중상시 곽승이 건석의 하진 암살 계획이 적힌 편지를 하진에게 넘긴 덕에 하진이 건석을 죽이고 그 병력을 거두어 드렸다. 이후 전개는 연의와 같이 황태후의 반대로 십상시 주살이 실패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조조와 원소가 십상시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묘사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의문.
- 황제 즉위식인데 소제가 제대로 된 복장도 갖추지 않고 나온다. 황제의 면류관은 응당 류가 12가닥이어야 한다.
- 갓 즉위한 소제를 긴장해서 어버버 하고 연설문조차 외우질 못해서 손에 적어서 보는 멍청하고 나약한 인물로 묘사했는데 실제 아버지인 영제가 내린 유변에 대한 평은 아래와 같다.
群臣請立太子, 帝以辯輕佻無威儀, 不可為人主...
군신들이 태자를 세우자고 청을 올리자 황제(영제)께서 "변은 가볍고 경박하며 위의가 없어, 사람을 다스릴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셨고... (후략)
군신들이 태자를 세우자고 청을 올리자 황제(영제)께서 "변은 가볍고 경박하며 위의가 없어, 사람을 다스릴 주인이 될 수 없다" 하셨고... (후략)
즉, 황자 유변에 대한 영제의 평가는 나약하다기보다는 '행동거지가 가벼워서 남에게 귀감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윗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 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의에서도 유변은 어머니 하태후가 섭정을 했을 뿐이지, 본인 자신이 특별히 나약하다는 묘사는 없다. 게다가
늑대
무리가 죽고나니
범이 나타나는 상황이 터졌다 흔히 소제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어리석고 약하다'는 말은 동탁이 실제로 황제의 폐위를 논하면서 한 말이다.[9]
2.2. 42화
환관의 세력이 너무 커서 뿌리깊은 나무의 밀본이나 육룡이 나르샤의 무명처럼 조정 안에 자기 사람 채워놓고 맘에 안들면 황제나 외척들까지 제거할 수 있어서[10] '살아남기 위해' 하태후가 그들을 용서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무적핑크는 후한 이전에 전근대 전제왕조 국가 권력구조에 대해서 이해를 전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하태후가 환관들을 옹호한 건 본질적으로 이 둘이 같은 뿌리기 때문이다. 환관과 외척 모두 황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 권력을 쥔 집단이고, 황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황제가 의도적으로 힘을 실어준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의 흥망도 황제의 의중이 좌우했다. 외척은 전한의 왕망이나 북주의 양견처럼 스스로가 세력을 키워 황위를 찬탈한 사례가 있지만 생식능력이 없는 환관은 황권에 기생해야만 했다. 외척 양기나 두무가 환관과 권력다툼 끝에 밀려난 건 단순히 환관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의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태후는 황제의 모후로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를 통해서만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보는 태후에게 잘 보이는 길과 협박하는 길이 있다면 무엇을 택할지는 뻔하다.심지어 이건 연의에서도 그대로 나오는 내용이다.
2.3. 43화
- 외부 군벌들을 끌어들여 십상시를 몰아내자는 원소의 계획에 느닷없이 노식이 나타나 '역모'를 운운하며 반대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 원소의 계획에 좋다고 찬성하려는 하진을 뜯어 말린 사람은 당시 주부(注簿)[12]를 맡고 있던 진림이었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노식은 이후에 하진이 직접 동탁을 끌어들이려 할 때 동탁은 '흉포하고 사나우니(凶悍) 제어할 수 없고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하였다.
- 22컷 설명 부분에 '원소의 숙부인 원외가 젊은 동탁을 한참 아랫사람으로 부린 적이 있다고.' 라고 적혀 있다. 삼국지톡에서의 설명만 보면 원외가 마치 동탁을 밑에 두고 부려 먹은 것처럼 보이나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해당 기록은 정사 오서(吳書)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다.
并州刺史段熲薦卓公府, 司徒袁隗辟為掾.
병주자사 단경이 동탁을 공부(公府)에 천거했고 사도 원외가 불러들여[13] 속관으로 세웠다.
병주자사 단경이 동탁을 공부(公府)에 천거했고 사도 원외가 불러들여[13] 속관으로 세웠다.
그 이전에 양주자사인 성취(成就)가 동탁을 종사(從事=보좌관)로 삼았는데 동탁이 성취의 명으로 도적떼를 1천여명이나 참획한 일이 있었다. 때문에 병주자사 단경이 삼공의 관청인 공부에 천거한 것이고 원외는 그것을 수락한 것이다. 즉, 동탁이 공을 세워 상관에게 천거를 받았고 원외는 승인했을 뿐이다. 이걸 마치 원외가 동탁을 직속부하로 둔거마냥 설명했다.
2.4. 44화
原子建陽, 本出自寒家, 為人麤略, 有武勇, 善騎射. 為南縣吏, 受使不辭難, 有警急, 追寇虜, 輒在其前. 裁知書, 少有吏用.
원의 자(字)는 건양이며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됨됨이가 거칠고 날카로우며 무용을 가졌고 기사[15]를 잘했다. 남현(南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명을 받으면 꺼리거나 사양하지 않았고 급박한 경보가 있으면 늘 앞장서서 도적들을 쫓아가 사로잡았다. 글을 알고 헤아려서 어릴 때부터 관리로 일했다.
원의 자(字)는 건양이며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됨됨이가 거칠고 날카로우며 무용을 가졌고 기사[15]를 잘했다. 남현(南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명을 받으면 꺼리거나 사양하지 않았고 급박한 경보가 있으면 늘 앞장서서 도적들을 쫓아가 사로잡았다. 글을 알고 헤아려서 어릴 때부터 관리로 일했다.
즉, 정원은 거친 군벌들 중 하나였으나 적어도 수하장수가 휘하의 졸병들을 죽이는 걸 보고 웃으며 즐거워 할 정도로 잔혹하고 사리분별 못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히나 연의에 등장하는 정원은 말 그대로 <동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인물이나 양아들에 손에 의해 죽은 비참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되려 연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삼국지톡에서의 묘사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즌3에서 황제 유협을 동탁에게서 구해내고 새차 뽑겠다는 여포에게 국민 세금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며 충고하는 개념인으로 묘사된다.
- 소제가 5류 면류관을 쓰고 나온다. 황제의 면류관은 응당 류가 12가닥이어야 한다.
2.5. 45화
아주 오랜만에 정사 인용문이 등장했다.공손찬, 적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다.<정사>
일단 삼국지톡 시기와 맞추어보면 공손찬이 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하기 전, 혹은 그 이후로 보이는데 딱히 공손찬 측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정사인 후한서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 每聞有警, 瓚輒厲色憤怒, 如赴讎敵...
(전략) 늘 (이민족들이) 경계하도록 알렸으며 찬은 번번이 분노한 기색을 보이기를 원수나 적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후략)
(전략) 늘 (이민족들이) 경계하도록 알렸으며 찬은 번번이 분노한 기색을 보이기를 원수나 적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후략)
瓚志埽滅烏桓, 而劉虞欲以恩信招降, 由是與虞相忤.
찬은 오환을 쓸어서 없애려는 뜻을 세웠지만 유우는 은혜와 신뢰로서 항복을 받고자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우와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찬은 오환을 쓸어서 없애려는 뜻을 세웠지만 유우는 은혜와 신뢰로서 항복을 받고자 했으니 이로 말미암아 우와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전자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이민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손찬이 사용한 방법에 가깝고 후자는 이민족을 대하는 노선이 유우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공손찬이 강경책이면 유우는 유화책이었던 셈. 때문에 공손찬이 이민족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내용과는 무관해지는 셈이다. 또한 정사 삼국지에는 장거-장순의 난 이전에 수십기의 기병을 이끌고 순찰중이던 공손찬이 선비족 기병 수백명과 맞닥뜨려서 그들을 대거 살상했다는 기록도 있긴 하나, 그 다음 문장을 보면 공손찬은 선비족 기병들을 뚫으며 당시 이끌던 기병의 절반을 잃고 나서야 겨우 탈출했다고 되어 있다. 즉, 이 경우는 공손찬과 기병대가 적을 만나 분전(奮戰)을 한 셈이지 일방적으로 학살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初平二年, 青, 徐黃巾三十萬眾入勃海界, 欲與黑山合. 瓚率步騎二萬人, 逆擊於東光南, 大破之, 斬首三萬餘級. 賊棄其車重數萬兩, 奔走度河. 瓚因其半濟薄之, 賊復大破, 死者數萬, 流血丹水, 收得生口七萬餘人, 車甲財物不可勝筭, 威名大震.
초평 2년(191년), 청주 서주의 황건적 삼십만의 군세가 발해군 경계에 침입하여, 흑산적과 합류하려 하였다. 공손찬은 보군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동광 남쪽에서 영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삼 만에 달하는 수급을 취하였다. 적군은 수레 수만 기를 버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적도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손찬이 육박하여 이를 다시 대파하여 전사자 수만에 달하고, 흐른 피가 강을 붉게 만들었다. 포로 칠만 여명을 획득하고, 수레와 갑주, 재물은 셀 수 없이 많이 취하였다.
초평 2년(191년), 청주 서주의 황건적 삼십만의 군세가 발해군 경계에 침입하여, 흑산적과 합류하려 하였다. 공손찬은 보군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동광 남쪽에서 영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삼 만에 달하는 수급을 취하였다. 적군은 수레 수만 기를 버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적도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손찬이 육박하여 이를 다시 대파하여 전사자 수만에 달하고, 흐른 피가 강을 붉게 만들었다. 포로 칠만 여명을 획득하고, 수레와 갑주, 재물은 셀 수 없이 많이 취하였다.
근데 저런 전투에서의 공적이나 적의 수급을 베었다는 기록은 후한서나 정사 등에서도 꽤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학살을 나타낸다고는 보기 어렵다. 동일한 후한서의 열전을 보면 공손찬이 유우를 죽이자 오환사마였던 염유(閻柔)가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인 추단을 포함한 「4천여명의 목을 쳤다(斬丹等四千餘級)」는 기록이 있고 흥평 2년(195년)에 이들이 원소의 장수인 국의와 함께 공손찬을 어양현 포구에서 격파하고 「2만여명의 목을 쳤다(斬首二萬餘級)」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즉, 무적핑크의 논리처럼 (전쟁에서) '적의 목을 자른 행위 = 잔혹함'의 잣대라면 나라의 명으로 청주의 도적떼를 토벌하며 3만 여명의 목을 친 공손찬이나 유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원소와 손잡고 공손찬을 치면서 2만 4천명의 목을 친 염유, 선우보 등이나 하등 다를 게 없으며 따라서 공손찬에게만 '학살자' 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주는 것은 맞지 않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초평(初平)이라는 연호는 다름 아닌 헌제가 황제가 되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저 기록은 현재 삼국지톡 내의 시기인 소제(유변) 시기가 아닌 그 다음 황제이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유협)가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16]에 일어난 일이라는 셈이다. 만약 작가 무적핑크가 이야기하는 '공손찬의 학살행위'라는 게 저 기록을 인용한 거라면 맞지도 않은 시기의 이야기를 들고 온데다 한 사람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만을 가지고 그 인물의 모든 것을 판단한 것이 되기 때문에 오류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어렵다.[17]
2.6. 46화
- 하진이 십상시를 척결하려는 과정에서 범죄자들까지 불러모으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는데 실제 기록은 아래와 같다.
紹等又為畫策, 多召四方猛將及諸豪傑, 使並引兵向京城, 以脅太后.
소(원소) 둥은 또 계책을 꾀하며 사방의 맹장과 모든 호걸들을 많이 불러모아 그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경성(낙양)으로 향하게 해 태후를 위협하고자 했다.
소(원소) 둥은 또 계책을 꾀하며 사방의 맹장과 모든 호걸들을 많이 불러모아 그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경성(낙양)으로 향하게 해 태후를 위협하고자 했다.
즉 하진이 모은 것은 병력을 통솔할 인재들을 모은거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구한 게 절대 아니다. 유비가 독우를 때리고 달아난 죄를 이 시기에 씻었다는 점 때문에 저렇게 묘사한 거 같은데 유비는 하진이 단양(丹楊)[18] 도위(都尉)였던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모병했을 때 참여했고 공을 세워 죄를 씻고 청주 북해국 하밀(下密)의 승이 되었다가 스스로 벼슬을 버린 뒤 다시 청주 평원국의 고당(高唐)의 현위가 되었다가 현령으로 승격했다. 하진은 유능한 인물을 모으면서 그들이 지은 죄의 경중을 보아 죄의 일부를 탕감한 것이지, 범죄자들을 모집한 게 아니다. 묘사 자체가 잘못된 셈.
- 정사를 기준으로 보면 유비는 이미 사면이 된 상황이다. 정확히는 후한서 효영제기에 나오는 중평 6년(189년)에 영제가 서거했을 때의 기록이다.
丙辰, 帝崩于南宮嘉德殿, 年三十四. 戊午, 皇子辯即皇帝位, 年十七. 尊皇后曰皇太后, 太后臨朝. 大赦天下, 改元為光喜.
병진일, 황제(영제)께서 남궁 가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34세였다. 무오일, 황자 변(소제)이 곧 황제에 오르니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라 불렀고 태후가 (임시로) 조정을 다스렸다.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광희로 고쳤다.
병진일, 황제(영제)께서 남궁 가덕전에서 붕어하셨는데 34세였다. 무오일, 황자 변(소제)이 곧 황제에 오르니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라 불렀고 태후가 (임시로) 조정을 다스렸다.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광희로 고쳤다.
황당한 점은 그 이전에도 대사면은 당연히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시작된 중평 원년(184년) 3월 임자일부터 12월 기사일 중평 3년(186년) 2월 경술일, 중평 4년(187년) 정월 기묘일, 영제가 죽기 1년 전인 중평 5년(188년) 봄 정유일까지 대사면령이 있었다. 유비가 독우를 두들겨 패고 달아난 게 저 사이의 일이니 당연히 사면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즉, 유비는 황건적의 난 이후 소제가 즉위하기까지 내려진 5번의 대사면령으로 인해 사실상 사면을 받은 상태고[19], 때문에 만화 속 묘사처럼 굳이 죄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5번의 대사면령 이후에도 유비가 여전히 죄인인 상황이라면 유비가 그 사면령 기간 동안에 꾸준히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저히 사면 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라는 황당한 전개가 된다. 연의에서도 유비가 장거-장순의 난을 토벌하는 유우를 따라 도위로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죄를 씻으려고 애를 썼다는 내용은 없다.
즉, 유비는 황건적의 난 이후 소제가 즉위하기까지 내려진 5번의 대사면령으로 인해 사실상 사면을 받은 상태고[19], 때문에 만화 속 묘사처럼 굳이 죄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5번의 대사면령 이후에도 유비가 여전히 죄인인 상황이라면 유비가 그 사면령 기간 동안에 꾸준히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저히 사면 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이라는 황당한 전개가 된다. 연의에서도 유비가 장거-장순의 난을 토벌하는 유우를 따라 도위로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죄를 씻으려고 애를 썼다는 내용은 없다.
2.7. 47화
하진은 맹장과 호걸을 모으면서 '죄에 대한 사면'을 공약한 적이 없다. 유비의 경우도 하진이 파견한 도위인 관구의(毌丘毅) 밑에서 종사하며 세운 공이 이전에 지은 죄를 덮고 새로 공직생활을 할 만 했기 때문에 하밀의 승으로 임명된 것에 가깝다.2.8. 48화
-
유비는 유우 밑에서 장거와 장순의 난을 토벌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작중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아예 언급도 없다. 삼국지집해 선주전에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유회의 추천을 받아 유우 밑에서 장거-장순을 어양(漁陽)에서 토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유비가 어양에서 도적을 토벌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장순, 장거의 반란군'이 되는데 그걸 작가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을 누락해버린 것이다. 의도적 누락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30컷에 있는 공손찬의 프로필 정보인데 기도위 직은 공손찬이 장거-장순의 난을 진압하고 받은 벼슬이다. 아마도 장거-장순의 난은 유비와의 연관에서 아예 뺀 것으로 보인다.
-
연의에서 유비는 유회의 천거로 토벌군을 맡은 유주목 유우 밑에서 도위로 활약했으며 이후에 하밀의 승(丞), 고당현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즉, 일개 졸병으로서 활동한 게 아니라 나름 군을 감독하는 입장에서 토벌군에 참가한 셈이 되는데 유비 삼형제의 고단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유비가 도위로서 참전한 부분이 누락되었다.
결국 유비의 군사적 재능은 또 누락되었다
- 14컷에 유비가 '현승, 현위 직을 제의받다' 라고 나오는데 제의는 '의견이나 의논, 의안을 내놓는다' 는 뜻이다. 즉, 삼국지톡에서의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유비를 현승, 현위 직에 두자고 건의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정사에서나 연의 둘 다에서 除(제)라는 글자를 사용한다. 이것은 벼슬에 임명했다는 의미로서 유비는 그 벼슬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특히 정사에서는 그를 뒷받침하듯 '다시 벼슬을 버렸다(復去官)' 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즉,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 공손찬의 벼슬이 '도정후, 기도위 역임'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지톡 내 유비가 겪은 전투가 장거-장순의 난이 아니라 볼 때) 잘못된 설명이다. 공손찬은 장거-장순의 난 토벌로 기도위에 임명되었다가 오환 속국의 탐지왕(貪至王)이 항복해 오면서 중랑장 겸 도정후에 올랐다. 즉, 기도위는 예전 직책인 셈.
2.9. 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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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컷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내시)들이 수십년간 황제를 갖고놀아, 매관매직, 부정부패로 백성들 삶이 어려웠다.
상황 자체는 십상시가 정권농단을 한 게 사실인데, 중요한 건 매관매직을 적극적으로 한 이는 당시 황제인
영제였고 십상시들은 영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부패를 재생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황제가 자신의 착복과 향락을 위해 환관들을 기용한 것이지, 환관들이 황제를 가지고 놀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제의 매관매직에 의한 축재에 대한 기록[20]은 아래와 같다.
是歲, 鮮卑寇酒泉. 京師馬生人. 初開西邸賣官, 自關內侯, 虎賁, 羽林, 入錢各有差. 私令左右賣公卿, 公千萬, 卿五百萬.
이 해에 선비족이 주천[21]을 약탈했다. 경사(수도)에서는 말이 사람을 낳았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는데 관내후부터 호분, 우림이 각각 들어가는 돈에 차이가 있었다. 사사로이 좌우로 하여금 공경(公卿)직도 팔았는데 공은 천만전, 경은 오백만전이었다. - 후한서 효영제기
이 해에 선비족이 주천[21]을 약탈했다. 경사(수도)에서는 말이 사람을 낳았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는데 관내후부터 호분, 우림이 각각 들어가는 돈에 차이가 있었다. 사사로이 좌우로 하여금 공경(公卿)직도 팔았는데 공은 천만전, 경은 오백만전이었다. - 후한서 효영제기
時賣官, 二千石二千萬, 四百石四百萬, 其以德次應選半之, 或三分之一, 於西園立庫以貯之.
관직을 팔 때, (녹봉이) 이천석이면 이천만전, 사백석이면 사백만전이었고, 만일 덕으로서 도달한 이는 응당 골라서 그 반을 받거나 혹은 삼분의 일만 받았다. 서원 곳곳에 곳간을 세워 (돈을) 비축하였다. - 산양공재기
관직을 팔 때, (녹봉이) 이천석이면 이천만전, 사백석이면 사백만전이었고, 만일 덕으로서 도달한 이는 응당 골라서 그 반을 받거나 혹은 삼분의 일만 받았다. 서원 곳곳에 곳간을 세워 (돈을) 비축하였다. - 산양공재기
물론 효영제기 기록에 좌우로 하여금 공경직을 팔았다는 기록을 십상시에 의한 매관매직으로 볼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영제의 윤허가 없으면 불가했고 이들이 벼슬을 판 돈 일부도 대부분은 매관매직의 주체인 영제가 받아갔다.
-
하진의 자를 '거고(巨高)'[22]라고 써놨는데 틀린 설명으로 하진의 자는 수고(遂高)이다. 거고는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의 자이다. 다음화에도 그대로 사용했다. 나중에 수고로 다시 수정되었는데 처음 자를 언급하는 컷은 아직도 수정되지 않았다.
역사물이면 검토 좀 해라
2.10. 50화
동탁을 하동 군벌이라고 적어놨는데 어디 삼국지 드라마만 봐도 동탁은 양주 군벌이다. 동탁이 사예교위부 소속 하동(河東) 태수직을 역임한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의 일이다. 동탁은 황건적의 난에서 노식의 후임으로 진압하려다가 패배해 죄를 받았고 이후 한수 등이 농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참전해 전장군(前將軍) 겸 태향후(斄鄕侯)가 되었고 진창 승전으로 반란이 수그러들자 군을 사병화 했다. 군벌화하는 그를 경계한 조정에서 그를 소부로 삼아 중앙으로 부르고 군권을 박탈하도록 시도했지만 군심을 핑계로 거절, 같은해 다시 병주목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넘기도록 했으나 이번에는 자기 군대를 병주로 데려가겠다며 거부해 버텼다.3. 51화 ~ 60화
3.1. 51화
- 연의에선 하진의 부름을 받은 동탁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進使人迎董卓于澠池, 卓按兵不動.
사람을 보내 동탁을 민지(澠池)[23]에서 맞이하려 했으나 탁은 병사들을 누른 채 움직이질 않았다.
사람을 보내 동탁을 민지(澠池)[23]에서 맞이하려 했으나 탁은 병사들을 누른 채 움직이질 않았다.
정사인 후한서에서는 '탁이 이르질 못했는데 하진이 패하였고(卓未至而何進敗)' 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정사인 삼국지에서도 같은 표현(卓未至, 進敗 - 동탁이 이르지 못했는데 하진이 패망했다)을 썼다. 연의에 따르자면 낙양으로 갈 수 있었음에도 때를 기다린 것 이고, 정사에 따르자면 하진에게 십상시를 일망타진 하겠다고 상소를 보내 큰소리 쳤는데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먼저 제거된 탓에 낭패를 봤다. 아무튼 이때까지는 본격적으로 마각이 드러나기 전이라 큰 행패는 없었다. 동탁의 사위인 우보가 섬현(陝縣)에 주둔하고 이각, 곽사, 장제를 보내 영천과 진류 등을 공략한 적이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동탁이 정권을 잡은 이후였다.
- 가후가 '우보의 책사'로 설명되나 틀린 설명이다. 가후는 동탁이 낙양에 입성했을 때 태위연(太尉掾)[24]에 임명되었고 이후 동탁에 의해 평진도위(平津都尉), 토로교위(討虜校尉)로 승진된 이후 우보가 동탁의 지시로 섬현에 주둔했을 때 그 군에 있었다. 즉, 가후가 우보 밑에 있던 건 동탁이 정권을 쥐고 난 이후이며 애당초 가후와 동탁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도 동탁이 낙양에 입성한 이후다.[25] 동탁의 낙양 입성 전에 등장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인 셈.
-
맹진의 화재 동영상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한다.
도적들의 기세가 너무 대단해, 이전 황제 시절 벼슬을 주거나 사면령을 내려 달랬다.
이전 황제라고 한다면 영제 시기를 말하는데 후한서의 효영제기를 참고하자면, 영제 시기에 대사면령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나오며[26] 주로 2월 정월이나 역병이 돌거나 홍수가 났을 때, 그리고 연호를 바꿀 때 주로 있었으며 당고의 금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점차적으로 사면을 내렸으며 죄인들의 경우는 아직 형을 살고 있거나 집행되지 않은 이들을 사면하기도 했다.[27] 즉, 위기의 순간이 올 때나 불만이 높아지거나 정국을 안정시킬 요량으로 대사면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도적떼에 대한 사면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도적에게 벼슬을 줬다는 부분은 장연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는데 장연이 자신과 함께 하던 장우각(張牛角)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리가 장연을 따르도록 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장연이 도적떼를 백만에 가깝게 규합해 흑산(黑山)이라 이름짓고 북방에서 난리를 쳐도 영제가 하지 못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 먼저 장연이 낙양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따라 영제가 명목상이지만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장연의 세력이 워낙 감당이 안 되게 컸기에 생긴 특별한 경우이지, 삼국지톡에서의 내용처럼 도적들이 생길 때마다 벼슬을 줘서 무마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기사가 훨씬 많다.
또한 도적에게 벼슬을 줬다는 부분은 장연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는데 장연이 자신과 함께 하던 장우각(張牛角)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리가 장연을 따르도록 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장연이 도적떼를 백만에 가깝게 규합해 흑산(黑山)이라 이름짓고 북방에서 난리를 쳐도 영제가 하지 못한 것은 분명 사실이나, 먼저 장연이 낙양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보냈고 그에 따라 영제가 명목상이지만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장연의 세력이 워낙 감당이 안 되게 컸기에 생긴 특별한 경우이지, 삼국지톡에서의 내용처럼 도적들이 생길 때마다 벼슬을 줘서 무마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기사가 훨씬 많다.
3.2. 52화
-
4컷에 맹진에 화재 "인명피해 속출"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정작 정사[28]를 보면 해당 일이 벌어지기 전에 '태후를 협박하려 했다(脅太后)'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즉 원소 등이 하진에게 계책을 냈으나 이는 아무리 설득해도 십상시를 죽이지 않는 태후를 협박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기 때문에 실제로 백성들에게 위해를 가해 스스로의 명분을 내던지는 짓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후한서가 인용한 속한서(續漢書)에 등장하는 정원의 행적을 보면 더 명확하게 등장한다.
何進欲誅中常侍趙忠等, 進乃詐令武猛都尉丁原放兵數千人, 為賊於河內, 稱黑山伯, 上事以誅忠等為辭, 燒平陰, 河津莫府人舍, 以怖動太后.
하진은 중상시 조충 등을 베고자 했고 이에 거짓으로 무맹도위(武猛都尉) 정원에게 천 명의 병사를 풀어 하내의 도적처럼 가장하고 흑산백(黑山伯)이라 부르게 했다. 앞의 일을 근거로 조충 등을 베라는 말을 올리고 평음(平陰)과 나루터가 불타 마을과 집과 사람이 없다고 함으로써 태후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후한서의 기록 또한 마찬가지다.
...使武猛都尉丁原燒孟津, 火照城中, 皆以誅宦官爲言. 太后猶不從.
(전략) 무맹도위 정원으로 하여금 맹진을 불태우고, 불빛이 성 안까지 비추자 모두가 환관을 베라고 말하였다. 태후는 되려 따르지 않았다.
자꾸 망설이는 하진과 하태후를 움직이기 위해 벌인 일이라 발상이 돌아이스러워 그렇지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된 일이라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낮다. 참고로 진수는 조조의 서주대학살에 대해서는 잔륙이라는 표현을 써 학살을 인정했다. 후한서야 그렇다쳐도 정사 삼국지에서 원소를 어떻게 다뤘는지 생각하면 대규모 학살이 있었으면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다.
- 군벌들이 낙양 주변으로 모이자 환관들이 위기감에 동태후에게로 몰려드는 장면이 존재하는데, 연의에서 동태후는 그 시기에 이미 죽은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후계 싸움에서 황자 유협을 내세우던 동태후가 패배한 뒤 유배를 갔고 이후 하간(河間)[29]의 역참에서 독살을 당했다. 정사에서도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하태후와의 충돌이 발생하자 하진이 삼공(三公) 및 동생 하묘를 데리고 가 "효인황후(孝仁皇后)[30]는 죽은 중상시 하운(夏惲) 및 영락태복 봉서(封諝) 등과 함께 매관매직했다" 는 이유로 탄핵하게 했고 '제후의 비(蕃后)는 궁에 둘 수 없으니[31] 고향으로 보낸다'는 명목을 내세워 하간으로 쫓아냈다. 이후 하진이 군사를 몰아 동태후의 오빠이자 표기장군이던 동중을 죽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동태후는 두려움과 근심 끝에 병에 걸렸고 '급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래저래 하진이 사망할 즈음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 주부 진림의 등장이 또 누락되었다. 사실 연의에서 하진이 군벌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한 것도 진림이고, 하진이 십상시의 흉계로 궁에 들어가기 전에 그걸 뜯어말린 것도 진림인데 그냥 누락된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진림이 나중에 하진이 죽은 후 원소 휘하에서 일하게 되며, 관도대전 당시의 격문을 작성한 것도 진림이고 나중에 조조에게 잡혀서 그 밑에서 일하게 된 것도 진림이라는 점이다. 상당히 중요한 인물임에도 결국 얼굴 한 번 비추질 못했고 장량이 카톡으로 하태후인 척 연기한 걸로 떼워지고 말았다. 역시나 카톡이라는 소재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중요 인물의 등장 시기가 또 뒤죽박죽이 된 셈.
3.3. 53화
- 원소가 호위병도 없이 입궁한 하진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은 톡을 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연의에서는 하진이 궁으로 가기 전에 십상시의 음모니 가지 말라고 말리다가 결국 조조와 함께 자신들이 군을 이끌고 하진을 따르겠노라고 해서 '함께' 이동했고 청쇄문(青瑣門)을 통해 궁에 들어갈 때만 하진 홀로 들어갔다. 즉, 원소가 멀리서 '귀가하시라'고 연락하는 장면은 원전과는 상당히 다른 셈이다.
-
십상시 장량이 하진의 목을 내던지면서 역적을 처벌했다고 말하는 대상이 '백성들' 로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하진을 호위하고 온 제장들과 금군들에게 한 말이었다. 아래는 연의에 등장하는 장량의 말이다.
何進謀反, 已伏誅矣! 其余脅從, 盡皆赦宥.
하진이 반역을 꾀했으나 이미 베었다! 그 나머지는 위협에 따랐던 것이니 모두 너그러이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삼국지톡에서는 원소의 목을 베라는 말이 덧붙여졌는데 당연히 원문에는 없는 작가의 창작 내용이다.
- 원술이 원소에게 '가문을 역적 집안으로 만들었다' 면서 칼을 들이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연히 이 부분도 작가의 창작이다. 정사나 연의나 원술은 십상시의 난에 있어서 주동적인 인물이었다. 정사에서는 원술이 호분중랑장으로서 자신이 임의로 호분에서 뽑아온 병사들을 풀어서 궁으로 들어가 환관을 도륙했고, 연의에서는 하진의 부장인 오광(吳匡)이 청쇄문에 불을 지르고 원소가 십상시를 치라고 명령하자 원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십상시를 도륙했다. 즉, 원소나 원술이나 적극적이었는데 묘사가 상당히 잘못 되었다. 간혹 어차피 다음 화에 원술이 등장하니까 관계없지 않냐고 하는 팬들도 있는데 원술은 십상시의 난에 있어서 원소와 '의견을 같이한' 사이다. 즉, 원술이 원소에게 반항하며 멱살잡고 따지는 장면 자체가 정사 및 연의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오류가 되는 것이다.
- 원외가 원소에게 원씨 가문의 병사를 내어주며 비장하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 역시 창작이다. 낙양에 거주하는 이들은 당연히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고 궁궐은 남군, 도성 내의 수비는 북군이 맡아 담당했다. 이쯤되면 삼국지는 무시하고 어디 육룡이 나르샤보고 스토리 짜는게 아닌가 의심된다.
- 원소의 지위를 계속 서원팔교위의 직위인 중군교위로 부르는데, 정사 기준으로 당시 원소는 하진과의 인연을 계기로 중군교위에서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진급한 상태였다. 장안과 낙양의 주변부인 하남윤, 하내윤, 하동윤, 홍농태수, 경조윤, 우부풍, 좌빙익의 관리들을 감독하는 직위로서 자사(刺史)와 기능은 흡사하나, 훨씬 높은 직책이었다. 하진이 죽었을 시 신속하게 군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원술이 호분중랑장으로서 호분의 병력을 끌고 온 것도 있지만 수도 근방을 감독하는 원소의 직책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다.
3.4.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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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정사> 조조, 하진과 원소 의견에 반대해 잠수타다.
실제로 연의를 제외하고는 조조가 십상시의 난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하진과 원소의 의견에 반대해서 잠수를 탔다는 내용 또한 없다(...). 그냥 자신이 소속된 가문이 환관 조등의 가문이다 보니 나서기도 애매한 입장이었고 조조 자신이 보기에도 바깥의 장수들을 불러 태후를 압박하고 환관을 몰살시킨다는 계획은 허술한데다 위험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32] 발을 뺀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진림을 황실미디어대응팀 기자로 묘사했는데 주부(注簿) 직은 삼공부(三公府)부터 각 지방 군까지 널리 있던 직책으로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즉, 현대의 기자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만일 기자에 맞게
그나마구색을 갖추려면 진림이 주부가 아니라 당시 조신과 황제 사이의 문서를 담당하던 상서성(尙書省)의 시랑(侍郞)[33] 정도가 되어야 한다. 즉, 문서 담당을 맡은 주부 진림을 기자로 묘사해 버린 건 연의나 정사 모두[34] 어긴 셈이다.
3.5. 55화
- 장양이 전 황제인 영제(유굉)를 이용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전에도 나왔던 지적이지만 나라망친 간신, 혹은 간신집단은 동양사학에서 고전적인 클리셰로 왕을 비판할 수 없는 전근대 왕조국가 특성상 왕의 책임까지 몰아준 경우가 많다. 생식능력이 없어 황권에 기생해야하는 환관은 특히 그런 면이 강하다. 후한말 환관의 난맥상은 영제가 이들에게 권한을 줘서 부리면서 발생한 것으로 조조 역시 정사와 연의 모두에서 '엄수의 관(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당대의 군주과 부당하게 총애와 권력을 주어 이 지경이 된 것이다(閹豎之官, 古今宜有, 但世主不當假之權寵 使至于此)' 라고 평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후한의 혼란은 환관 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과도한 총애를 준 황실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삼국지톡에서는 그 모든 책임을 환관에게만 돌리고 있는 것이다.
-
☆ 흔히 조조의 명검으로 알려진 의천검(倚天劍)이 등장하게 되는데 의천(倚天)이라는 말 자체는 진-한 교체기의 시인인 송옥(宋玉)의 대언부(大言賦)에 등장하는 싯구이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검이다. 연의에서도 중반쯤[35]에나
청강검이 언급되면서 등장했다.
曹操有寶劍二口 一名倚天, 一名青釭.倚天劍自佩之, 青釭劍令夏侯恩佩之...
조조에게는 보검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의천(倚天)이라 불렸고, 하나는 청강(青釭)이라 불렸다. 의천검은 자기가 찼고 청강검은 하후은으로 하여금 차게 했으며 (후략)
3.6.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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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인 것 때문에 그의 아버지 조숭이 집안 재산을 팔아 건석에게 헌납하고 며칠을 건석의 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다.
그보다 건석의 표정이 자기 숙부가 죽었는데 너무 해맑은 것에서 개연성 박살이다일단 조숭 자체가 삼국지톡의 묘사처럼 되바라진 인물이 절대 아니었을 뿐 더러[36] 조숭의 양부이자 조조의 양할아버지인 조등은 황제를 보위하여 양자를 들일 권리를 얻은 인물이자 십상시를 손수 꼬마시절부터 키운 인물로 전성기엔 황제조차 갈아치우는 세도를 누린 십상시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때문에 십상시는 광동 조아만이 뭔 짓을 하든 건드릴 수가 없었으며, 조조는 젊어서 그리 망나니짓 하고도 무탈히 관직에 나가 비교적 평탄하게 공무 생활을 지냈다.[37] 후한서 효영제기에 중평 4년(187년) 11월에 당시 태위였던 최열(崔烈)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대사농(大司農)이던 조숭을 앉혔으나[38][39] 달랑 6개월만인 중평 5년(188년) 4월에 파직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조조가 건석의 숙부를 죽였던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무에 그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 조조가 단독적으로 조충, 정광, 하운, 곽승을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해 놨는데 십상시의 난은 연의 및 정사 공통으로 원소와 원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연의에서는 원소와 조조가 빗장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고(袁紹曹操斬關入內) 위의 네 명의 십상시가 취화루(翠花樓) 앞에서 붙잡혀 다진 고기(肉泥)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40] 즉, 조조가 원소 일행과 합류하지 않고 따로 행동했다던가 십상시 중요 구성원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순수 작가의 창작인 셈.
3.7. 57화
-
8컷에 '조조가 혼세를 한탄하며 쓴 시'라면서 일부 구절을 삽입했다.
왕조 스무해 내내 / 벼슬한 이들 실로 형편없구나.
원숭이가 모자쓰고 띠를 매고선 / 우둔한 주제에 큰일을 꾀했도다.
실제 이 시는 조조가 지은 해로행(薤露行)이라는 시로서 16행의 긴 시임에도 딱 4줄만 인용했다.[41] 삼국지톡에서 인용한 실제 호리행의 부분은 아래와 같다.
惟漢二十世
생각해보니 한 왕조도 20대[42]가 지났는데
所任誠不良
소임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沐猴而冠帶
원숭이가 관복(관과 띠)을 입었으며
知小而謨强
아는 것은 적으면서 꾀하기에만 힘쓴다.
생각해보니 한 왕조도 20대[42]가 지났는데
所任誠不良
소임에 정성을 다하지 않고
沐猴而冠帶
원숭이가 관복(관과 띠)을 입었으며
知小而謨强
아는 것은 적으면서 꾀하기에만 힘쓴다.
문제는 해로행은 조조가 동탁의 강제 천도로 인해 폐허가 된 낙양을 보고 쓴 시라는 점이다. 즉, 해로행의 문구가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점인 셈이다.
- 15컷에 사예교위가 황궁 문을 잠그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일단 사예교위가 중앙관리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나 후한 시기에 부활하면서 감찰의 역할보다는 수도 주변을 통괄하는 중앙장관에 가깝게 변했다. 때문에 삼국지톡에서의 설명은 이른바 삼독좌(三獨座)[43]로 불리던 '전한 시기'에 가깝다.
- 가절(假節)을 무슨 직책처럼 써놨는데 가절이라는 말은 '부절(符節)[44]을 받았다' 는 의미로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것이지 직책 같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가절을 받은 이가 처벌할 수 있는 영역은 '전시에 군령을 어긴 이' 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십상시가 아니라 되려 십상시를 토벌하는 와중에 군령을 어긴 자가 된다.
- 원소가 사예교위와 가절의 권한을 모두 가졌으므로[45] 기소권과 판결권을 모두 쥐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미 언급되었듯이 당시 사예교위는 후한 정부에 의해 부활하면서 사실상 감찰 역할에서 행정직으로 변화한 상태[46]였고, 가절 또한 처벌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었다. 실제로 관리에 대한 감찰과 탄핵은 어사대(御史臺)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3.8. 58화
- 제갈근이 '사립자유중학교' 라는 어느 학당에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정사인 오서(吳書)에서 제갈근이 살았던 학문을 배운 곳은 '수도(낙양)'라고 떡하니 나온다.
瑾少游京師, 治毛詩, 尚書, 左氏春秋.
(제갈)근은 어릴적 경사(수도)에서 유학을 했고 모시(毛詩), 상서(尚書),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제갈)근은 어릴적 경사(수도)에서 유학을 했고 모시(毛詩), 상서(尚書),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즉, 십상시의 난이 터지는 현장에 제갈근이 있는 셈인데, 마치 딴 지역에서 소식을 접하는 양 묘사가 된 것이다.
-
노식이 낙양 외곽 공터에서 황실을 겁박해 가는 환관 무리와 마주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47] 연의에서는 아직 낙양은 커녕 황궁의 일부인 북궁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장양이 황제와 진류왕을 북망산으로 끌고가는 장면이 이후에 나오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앞에서 너무 질질끄는 바람에전개 속도를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변경으로 보인다.[48]
3.9. 59화
결국 이전 화에서 예상되었던 것처럼 노식이 하태후를 구출한 뒤 십상시를 추적해 단규와 장양 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몰아붙였던 민공의 등장이 누락되었다.3.10. 60화
유협을 계속해서 '황자(皇子)'라고 부르는데 황자는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유협은 전황제인 영제의 아들이지, 현 황제인 유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형제를 의미하는 황제(皇弟) 내지는 유협의 당시 공식 직함인 '진류왕(陳留王)' 이라고 칭하는 게 맞다.
[1]
이후 분량이 수십배다...
[2]
사진 출저는 무적핑크가 애용하는 포토리아로 보인다.
해당 사진의 출처.
[3]
해외에서는 여름 궁전(Summer Palace)으로 불린다.
[4]
특히 장안에 있는 전한 시대의 궁인 미앙궁(未央宮)의 경우는 완전한 복원도까지 제작이 된 상태다.
[5]
이러한 문제점은 '세트 돌려쓰기'라는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해당 문제를 비판한 오마이뉴스 기사
[6]
이게 심해지면 분명 특정 시대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대한 고증이고 뭐고 옛 자료라면 무조건 사용하는 행태가 일어날 수 있다.
[7]
군인에 비유하자면 대통령 취임식 같은 큰 행사에 참여한 영관급 내지는 장성급 군인들이
전투모도 없이 나타난 것과 똑같다.
[8]
삼국지톡에서는 이 암살 모의 사건이 누락되었다.
[9]
"황제는 어리석고 약해서
종묘를 받들고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소!(皇帝闇弱, 不可以奉宗廟, 為天下主!)" - 후한서 동탁열전
[10]
다만 이는
당나라 중후반기엔 어느정도 맞다.
[11]
탁류는 지방에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유학을 내세워 성장한 청류와는 뿌리부터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반목하면서도 한편으론 협력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후한도 200여년간 지속된 왕조다. 나쁜 점만 있었다면 광무제 사후 150년이 아니라 15년만에 망했겠지만 100년 이상 이어지다 환관과 외척이 모두 무너졌을 때 등장한 동탁에 의해 멸망을 길로 들어섰다.
[12]
관청의 문서나 기록을 담당하는 직분이다.
[13]
벽소(辟召)라는 말은 '임금이나 상관 등이 불러 벼슬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14]
그냥 심하게 제압한 걸로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병사들이 "한대만 때리면 우리 다 살아!" 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보아
여포를 막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혹독한 방식으로 보인다.
[15]
말타고 활쏘기를 말한다.
[16]
즉위한 해인 189년의 연호는 소제 시절의 연호인 광희(光熹), 소녕(昭寧)과 헌제 시절 첫 연호인 영한(永漢)이었는데 다음해인 190년에 모두 폐지했다.
[17]
위 오류를 조조에게 적용하면, 조조가 세운 많은 업적, 특히 군사, 문학적인 면에서 기여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인물들이
서주대학살 만을 가지고 조조를 단순히 '인간말종' 이라고 까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말종이
아니라는건 아니고
[18]
단양군은 후한의
양주(揚州) 지역에 있었다.
[19]
단 184년의 사면에서 당고의 금으로 인해 갇힌 자들은 제외되었고 이후 사면에서 황건적의 난의 주모자인 장각만은 유일하게 제외되었다.
[20]
후한의 광화 원년, 즉 178년의 일이다.
[21]
양주(凉州)의 주천군을 말한다. 치소는 복록(福祿)에 있었다.
[22]
크고 높음이라고 쓰잘데없는 설명까지 붙였다(...).
[23]
오늘날의 하남성의 몐츠 현. 낙양과 상당히 가까운 홍농(弘農)에 속한 곳이었다.
[24]
태위를 보좌하는 속관.
[25]
이전에 가후는 효렴으로 낭(郎) 직을 담당했으나 병이 나서 물러나 있었다.
[26]
대사면령이라는 용어만 해도 18번이나 등장한다.
[27]
다만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장각은 사면되지 않았다.
[28]
정원이 하진의 명을 받아 맹진을 불태운 일 자체가 연의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29]
동태후와
영제의 고향이다.
[30]
동태후의 공식적인 명칭이다.
[31]
영제의 아버지 유장(劉萇)은 해독정후(解瀆亭侯)였다. 전 황제인
환제가 아들이 없이 죽어 유장의 아들
유굉이 환제와 그의 정실
두태후의 양자 자격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영제의 생모인 동태후는 번비의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들이 황제인 덕에
두태후 일족이 몰락한 이후, 장락궁에서 살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하진 역시 동태후를 지칭할 때 장락태후(長樂太后)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32]
위서에는, 조조가 하진과 원소의 계획을 듣고 '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군주의 과도한 총애와 내려준 권력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들을 벌하려면 옥리를 시켜 원흉만 주살해도 되는데 어째서 바깥의 장수들을 부르는가? 환관을 모두 주살하려고 든다면 계획이 드러날테니 실패할 게 뻔하다' 면서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33]
시랑은 공경들의 사무를 돕는 상시조(常侍曹) 소속되어 있는데 문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는 인물이다. 물론 이들이 작성하는 문서의 초안은 기자들이 정부로부터 제공 받는 보도자료와는 전혀 다르지만 삼톡식으로 대충 끼워맞추면 얼추 들어맞게 된다.
[34]
둘 다 진림의 관직을 주부라고 제대로 기록하고 있다.
[35]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면서 신야를 불태우고 달아나던 시기.
장판파에서 조운과 장비가 활약하기도 했다.
[36]
조조 묘사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조조는 삼국지톡에서 묘사한 냉철한 인텔리가 아니라 조씨네 날건달, 파락호에 가까웠다.
[37]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를 북부도위로 기용한 사람은 사마의의 아버지 사마방이다.
[38]
조등열전에 따르면 1억전을 들여 태위직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남의 자리를 돈으로 강탈한 것.
[39]
공교롭게도 최열 역시, 전 태위였던 장온(張溫)이 파직된 이후 태위직을 맡았다는 점이 동일하다.
[40]
살이 다 다져질 정도였으면 사람 하나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41]
삼국지톡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서 늘 자료의 일부만을 가져와 자신이 묘사한 장면에 끼워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42]
세(世)는 대(代)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43]
어사중승, 상서령, 사예교위를 일컫는 말.
[44]
권한을 나타내는 신표 등을 의미한다.
[45]
후한서 하진열전에
하묘의 발언에서 등장하는 부분이다.
[46]
물론 주목제가 부활하면서 사예교위 또한 행정과 군사 모두를 통솔하는 게 가능했다.
[47]
황당하게도 황실 인원들을 헬기로 태우는 장면은 없는데 정작 수색에 헬기를 사용하는 황당한 장면이 등장한다.
[48]
이렇게 될 경우 황제와 진류왕을 구출해 보호하고 있던 하남중부연(河南中部掾)인 민공(閔貢)의 등장이 누락되거나 노식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민공은 연의와 정사 모두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며 노식과 함께 십상시의 난에서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