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승 관련 틀 '''
|
||||||||||||||||||||||||||||||||||||||||||||||||||||||||||||||||||||||||||||||||||||||||||||||||||||||||||||||||||||||||||||||||||||||||||||||||||||||||||||||||||||||||||||||||||||||||||||||||||||||||||||||||||||||||||||||||||||||||||||||||||||||||||||||||||||||||||||||||||||||||||||||||||||||||||
<colbgcolor=#ece5b6><colcolor=#800080>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司馬承 사마승 |
|
작위 | 譙王) |
시호 | 초민왕(譙愍王) |
성 | 사마(司馬) |
이름 | 승(承) |
자 | 경재(敬才)[1] |
가족 | 부친: 사마손(司馬遜) |
생몰기간 | 264년 ~ 322년 |
[clearfix]
1. 개요
서진의 황족이며 자는 자제(子悌)로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진의 손자, 사마손의 아들이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작위는 초왕(譙王).2. 생애
광희 원년.[2] 진혜제가 낙양에 돌아온것을 맞이하여 유격장군에 임명되었다.영가 연간에 유초 한나라 군대가 서진을 침략하자 사마승은 몰래 남행하여 양양(襄陽)의 정남장군 산간(山簡)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영가 6년.[3] 사마승이 도착했을 때 산간이 죽자 다시 남하하여 낭야왕 사마예에게 의탁하였다.
건무 원년.[4] 낭야왕 사마예는 전년도 장안이 유초 한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진민제가 포로로 잡히자 진왕(晋王)으로 불렸다. 진왕 사마예는 일찍이 석륵에게 죽임을 당한 사마수의 봉국을 그의 삼촌인 사마승이 잇게 하였다.
태흥 원년.[5] 진민제가 죽임을 당하자 진왕 사마예가 황제로 즉위하고 사마승은 둔기교위(屯骑校尉)로 개배하고 국장군(國將軍)을 가보하고 좌군장군(左軍將軍)을 거느렸다. 뒤에 산기상시를 추가하였다.
태흥 3년.[6] 8월 상주자사 감탁(甘卓)이 양주자사로 전출되자 왕돈(동진)은 그 후임으로 자신의 막료인 심충(沈充)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진원제는 왕돈의 추천을 묵살하고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임명해버렸다. 얼마 후 감탁과 사마승의 행동이 불온하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왕돈은 무창으로 돌아가 두 사람을 모두 죽였다.
후에 왕돈의 난이 평정되자 조정은 사마승에게 거기장군으로 추승하였고, 시호를 민(愍)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