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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16:38:59

사마방


사마진 추존 · 비정통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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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추존 존령
사마방 | 司馬防
묘호 없음
시호 무양성후(舞陽成侯) → 경조부군(京兆府君)
생몰 149년 ~ 219년
사마(司馬)
방(防) 혹은 방(芳)?[1]
건공(建公) 혹은 문예?
부친 영천부군
모후 불명
정실 기정(奇庭)
1. 개요2. 생애3. 사후 추서4. 사마방잔비와 사마방(芳) 문제5. 창작물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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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며 는 건공(建公)으로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초한지》에도 나오는 은왕 사마앙의 후손이자 사마팔달로 유명한 사마랑, 사마의, 사마부 형제의 아버지로 정서장군 사마균(司馬鈞)[2]의 증손자, 예장태수 사마량(司馬量)[3]의 손자, 영천태수 사마준(司馬雋)[4]의 아들이다.

집에 있을 때도 위엄을 지켰고, 주군에서 천거되어 낙양령, 경조윤 등을 역임했다가 동탁이 장안을 수도로 세우면서 낙양에 머무를 때 사마방은 치서어사의 관직을 맡고 있었는데, 사마랑을 보내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의 현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노년에 기도위로 전임되었고, 마을에 거주하면서 문을 닫고 살다가 사망했다. 엄숙함을 넘어 위선적이고 교조적이었던 당대 '효'(孝) 관념에 충실해 아들들을 굉장히 엄격하게 대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아가라 말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했고, 질문하지 않으면 말하지 못했으며, 앉으라는 말이 없으면 감히 앉지 못했다고 한다.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젊을 때 사마방은 상서우승을 지내고 있었는데, 조조를 낙양북부위로 기용했고 후에 조조가 왕이 되자 사마방을 업으로 초대해 함께 술을 마시며 “오늘 내가 다시 (북부)위가 되면 안 되겠소이까?” 라고 말하니, 사마방이 “그 옛날에 대왕을 (북부)위에 천거한 것은 가히 (북부)위가 되는 것이 적당했기 때문입니다.” 라 답했고 이에 조조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배송지는 위 일화에 대해 사마표의 《서전》을 살펴보건대 그는 상서우승을 지낸 적이 없으므로 의심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배송지는 왕은의 《진서》에 조왕(사마륜)이 찬위해서 할아버지(사마방)를 황제로 추존하고자 하니 박사 마평의가 경조의 부군이 예전에 위무제(조조)를 북위로 천거하자 적이 경계를 침범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징험이 있었다고 칭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3. 사후 추서

242년, 조위 조정에 의해 무양성후(舞陽成侯)로 추봉되었다.

265년, 증손자 사마염 서진을 건국하자 경조부군(京兆府君)으로 추존되어 무제조(武帝朝)의 칠묘, 즉 종묘에 배향되었고 운손자 진목제가 361년 죽자 묘역이 철거되었다.

371년, 곤손자 진간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묘역이 복구되었으며 372년 잉손자 효무제가 죽자 묘역이 철거되었다.

4. 사마방잔비와 사마방(芳) 문제

장안에서 발견된 사마방잔비에는 동진 멸망후 북위의 장군이된 사마씨 후예들이 후한대 세워진 비석울 정비했는데 이것을 사마방 잔비라고 부른다. 이곳의 사마방은 후한 사례교위,경조윤을 맡았다고 적혀있는데 자가 건공이 아닌 문예라고 쓰여 있어 본문의 사마방과 동일인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5. 창작물에서

화봉요원에 등장. 언급으로 나오는 인물로 관동군이 동탁군의 계책을 간파하는 것을 논의하다가 사마의와 제갈량이 서로 지혜를 겨루게 되는데, 이때 사마휘의 언급으로 사마방은 관동군이 일어나기 7년 전에 사마의를 사마휘의 문하에 데려가서 아들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다. 또한 조조와 여포의 싸움에서 조조가 탈출할 때 사마방이 조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언급한다.

드라마 영웅조조에서는 장양과 함께 조조가 건석의 숙부인 건도를 죽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린 아들 사마의가 조조와 바둑으로 내기를 해서 이기는 것을 보고 돈을 가져가자 이를 꾸짖는다.

조조가 건도를 때려죽인 일로 아버지 조숭이 화나서 집으로 왔다면서 대인(사마방)과 바둑을 두려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아드님께 크게 졌다면서 아드님의 실력이 이 정도면 그 아버지는 말할 것 없다면서 가려고 하는데, 사마방은 녀석(아들)이 어려서부터 워낙 총명해 바둑 뿐만 아니라 글 읽기도 자신이 뛰어넘었다고 말한다.

조조와 함께 바둑을 두려고 했다가 건도를 죽인 일 때문에 조조를 찾으려고 한 조숭이 찾아오면서 사마방은 조숭과 바둑을 두며, 건도가 죽은 일로 건석이 앙심을 품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조조를 죽이기 위해 돈구 현령으로 보낸 것에 대해 사마방은 북부위 취임 몇 달 후에 돈구현령이 된 것은 이 나라 관리 승급 제도에 따르면 수 년이 소요되는 일로 엄청난 재물이 있어야 따르는 행운이라고 말한다.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에서의 모습은 깐깐한 모습은 나오지 않고 자식들을 아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하면 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연의인 사마의전(상)에서 등장하는데, 깐깐한 모습으로 등장해 사마의가 어릴 때 공부하다가 형인 사마랑과 산책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모습을 보이자 꾸짖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사마의에게 학문을 익히게 하는 등 엄한 모습을 보인다.

사마 가문이 백성들의 봉기로 집이 습격당하자 사마랑에게 부탁해 사마 가문을 피난시키도록 하며, 낙양으로 돌아온 후에는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자 또다시 사마랑에게 사마 가문을 피난시키게 한다.

조조가 황제를 옹립하면서 허도에서 가족들과 재회하고 아들 사마의를 장춘화와 결혼시킨다. 그런데 사마의가 이전에 장춘화와 길을 마주쳤다가 서로 길을 막게 된 이유로 인해 얻어맞은 일로 악연이 생겼기에 장춘화와의 혼인을 거부하자 꾸짖는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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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 )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 [3] 친부는 의양성왕 [4] 친부는 안평헌왕 [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 [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 [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 [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 [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 [13] 친부는 회남충장왕 [14] 여기까지 서진 [15] 친부는 오효왕 [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 [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 [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 [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 [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 [23] 친부는 진무제 [24] 친부는 제헌왕 [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 [26] 친부는 제헌왕 [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 [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 [29] 여기부터 동진 [30] 친부는 진문제 [31] 윤통(閏統) [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 [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 [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 [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 [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 [37] 친부는 남궁현왕 [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 [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 [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 [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 [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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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방잔비 [2] 사마앙의 운손자(雲孫子). 자는 숙평(叔平). [3] 자는 공도(公度). 여남문성왕과 동음이인이다. [4] 자는 원이(元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