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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3 00:09:14

부락(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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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전진의 반란자
苻洛 | 부락
시호 없음
작위 행당공(行唐公)
(苻)
(洛)
불명
생몰 ? ~ 385년 9월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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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세조 선소황제 부견의 사촌동생. 낙안남 부랑의 아버지.

2. 생애

용맹스럽고 재능이 많아 앉아서 달리는 소를 능히 제압하거나, 활을 쏘아 강철도 뚫을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안북장군, 유주(幽州)자사에 임명되었고, 행당공(行唐公)에 봉해졌다.

건원 12년(376년) 10월, 선소제 부견이 부락을 북토대도독으로 임명해 유주와 기주의 병력 100,000명을 거느리고 탁발부 대나라를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병주(并州)자사 구난(倶難)도 진북장군 등강, 상서 조천(趙遷), 이유(李柔), 전장군 주융(朱肜), 전금장군 장자(張蚝) 등도 200,000 대군을 둘로 나눠 각각 화룡(和龍), 상군(上郡)에서 동서로 출진하였다.

건원 12년(376년) 11월, 부락은 흉노족 철불부 유위진을 길잡이로 삼아 대나라로 향하면서 대왕 탁발십익건이 파견한 백부(白部)와 독고부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석자령(石子嶺)에서 남부(南部)의 대인 유고인이 이끄는 100,000 기병대도 궤멸시켰다. 당시 병이 들어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던 탁발십익건은 여러 부를 거느리고 음산 북쪽 너머로 도주하려 했지만, 평소 대나라의 침략에 시달렸던 고차국에서 길을 막아 실패하였다.

건원 12년(376년) 12월, 부락이 군자진(君子津)에 주둔해 대나라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대나라 수도 운중(雲中)에서 탁발십익건의 서장자 탁발식군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갑작스런 군주의 죽음과 탁발식군의 반란으로 대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고, 살해당한 탁발십익건 아들들의 부하들이 탈영하여 전진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부락은 장자와 이유를 앞세워 운중을 손쉽게 점령하였고, 반란하였던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사로잡아 장안(長安)으로 압송하였다. 대내라 정벌로 화북을 통일한 선소제 부견은 조서를 내려 부락에게 정북장군을 더하고, 그의 형 북해공 부중(苻重)을 예주(豫州)자사로 삼아 낙양(洛陽)을 진수케 하였다.

건원 14년(378년), 북해공 부중이 낙양에서 모반을 꾸미다가 걸려, 선소제 부견은 장수 여광을 보내 부중을 대신케 하였고, 부중은 함거에 갇혀 장안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부중은 2년 후에 사면받고 진북대장군에 임명되어 계(薊)를 진수하였다. 선소제 부견은 본래 용맹한 부락을 무척 꺼렸는데, 그의 친형인 부중이 모반을 획책한 이후로는 더욱 경계하여 두 형제를 항상 변방에 머물게 하였다. 부락은 스스로 대나라를 멸망시킨 공이 크다 여겨 선소제 부견에게 개부의동삼사를 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원망하고 분해 하였다.

건원 16년(378년) 3월, 선소제 부견이 부락을 산기상시, 사지절, 도독익녕서남이제군사(都督益寜西南夷諸軍事), 정남대장군, 익주목으로 삼아 서남쪽의 이민족 토벌을 명하고, 이궐(伊闕)에서 출발해 양양(襄陽)을 거쳐서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다. 이에 부락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황실의 종친임에도 주상께서는 나를 장상(將相)으로 삼지 않으시고 변방의 비루한 곳으로 내보내신다. 이번에는 서쪽 끝자락으로 보내져 수도를 들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니, 이는 필시 양성(梁成)[1]으로 하여금 나를 한수에 침수시키려는 음모이다. 죄인으로 포박되어 진양(晉陽)의 일을 따르기보다는 사직을 바로잡을까 하는데, 제군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자 유주치중 평규(平規)가 나아가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말하며 부락에게 거병을 적극 권하니, 부락이 마침내 거병을 결심하고 외쳤다.
"나의 계획이 정해졌으니, 막으려는 자는 참하겠다!"
그리고는 대장군, 대도독, 진왕(秦王)을 자칭하고, 평규를 보국장군, 유주자사로 임명해 참모로 삼았다. 또, 현도(玄菟)태수 길정(吉貞)을 좌장사, 요동(遼東)태수 조찬(趙讃)을 좌사마, 창려(昌黎)태수 왕온(王蘊)을 우사마, 요서(遼西)태수 왕림(王琳), 평북(北平)태수 황보걸(皇甫傑), 목관도위 위부(魏敷)를 모두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이후 선비, 오환, 고구려, 신라, 백제, 휴인 등 여러 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병력을 요청하고, 형 부중이 있는 계로 군사 30,000명을 보냈다.

여러 국가들이 모두 부락의 반역에 따를 수 없다며 원군을 거절하자, 부락은 두려워 반란을 앞두고 망설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왕온, 왕림, 황보걸, 위부 등은 부락을 미덥지 못하다 여겨 선소제 부견에게 반란을 밀고하려 하였는데, 부락에게 걸려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던 길정과 조찬은 지금이라도 반란을 그만 둘 것을 청하면서 부락의 마음을 흔들었으나, 그때 평규가 나아가 말했다.
"어차피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는데, 어찌 지금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조서를 사칭하여 유주와 병주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으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중산(中山)을 거쳐 상산(常山)으로 향한다면 양평공은 필시 교외로 영격하러 나올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를 붙잡아 기주를 점거한 뒤, 관동(關東)의 무리를 통솔하여 진주(秦州), 옹주(雍州)를 도모한다면 가히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락은 평규의 계책을 따랐다..

건원 16년(378년) 4월, 부락이 화룡(和龍)에서 70,000 군사를 발동해 장안으로 진격하니, 관동이 소란스러워지고 전진의 다른 적들의 동향도 심상치 않게 되었다. 선소제 부견은 부락에게 사자를 보내
"천하가 한 집안이 아닐지라도 형제 간은 비적과 다른 법이거늘 어찌 반란할 수 있느냐? 화룡으로 돌아간다면 유주(幽州)를 영원히 네 봉지로 주겠노라."
라며 회유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부락은 사자에게
"너는 돌아가 동해왕께 이렇게 전하라. 유주는 좁고 험한 지역이라 만승(萬乘)에 이를 수 없으니, 고개를 돌려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고조의 업을 이루리라. 하나, 만약 동관(潼關)으로 나와 황제의 수레를 영접한다면 상공(上公)의 작위에 봉해 본국으로 돌려보내주도록 하마."
라 하였고, 이를 전해들은 선소제 부견은 매우 노하여 좌장군 두충(竇衝)과 보병교위 여광에게 40,000 군사를 주어 부락 토벌을 명하였다. 또, 우장군 도귀(都貴)를 업(鄴)으로 보내 기주병 30,000명을 거느리게 하고, 양평공 부융을 정토대도독으로 삼아 토벌군 전부를 통솔케 하였으며, 둔기교위 석월(石越)로 하여금 기병 10,000기의 별동대를 이끌고 동래(東萊)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자 계성(薊城)을 지키던 부락의 형 북해공 부중(苻重)도 성에서 나와 부락과 군사를 합쳐 중산(中山)에 주둔하니 그 수가 100,000명에 달하였다.

건원 16년(378년) 5월, 양평공 부융이 좌장군 두충과 함께 중산에서 부락, 부중의 반란군과 싸워 그들을 대파하였다. 부융은 부락과 그 장수 난수(蘭殊)를 생포해 장안으로 호송하였고, 여광으로 하여금 계로 도망친 부락의 형 부중을 추격하게 하여 그를 참수케 하였다. 둔기교위 석월도 화룡으로 도망친 평규를 토벌하여 그를 붙잡아 참수하고 유주를 다시 평정하였다. 부견은 부락과 난수를 사면해주고, 난수는 다시 장군으로 기용하는 한편, 부락은 양주(涼州)의 서해(西海)로 유배보냈다.

태안 원년(385년) 9월, 비수대전으로 전진이 패망하고 선소제 부견은 후진 요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양주자사 양희(梁熙)는 양주로 들어오려는 안서장군 여광을 막기 위해 부하들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다. 이때 미수(美水)현령 장통(張統)이 말했다.
"여광은 과감하고 용맹하며, 지략도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지금 서역에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예기는 마치 맹렬한 불길이 들판을 덮는 것과 같아 가히 그의 적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대대로 나라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고, 충성을 다하여 공훈을 세우셨으니, 지금 여광과 맞설 수 있습니다. 행당공 부락은 남아있는 종실의 사람들 중 어른이고, 한때 그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친 바 있습니다. 장군께서 그를 받들어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충의를 다하여 호족 무리를 통솔한다면 제아무리 여광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예병을 이끌고 동쪽의 모흥(毛興) 세력과 합친 뒤, 왕통(王統), 양벽(楊璧)과 연합해 4주의 무리를 결집시켜 여러 흉역한 이민족들을 토벌해 황실을 편안케 한다면, 이것이 바로 (桓文)의 의거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양희는 장통의 말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보내 서해에 있던 부락을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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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형주(荊州)자사로 양양에 주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