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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6대 공작 볼레슬라프 2세 Boleslav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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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볼레슬라프 2세 (Boleslav II) |
출생 | 미상 | |
사망 | 999년 2월 7일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967년 또는 972년 ~ 999년 | ||
자녀 | 볼레슬라프 3세, 바츨라프, 야로미르, 올드르지흐 | |
아내 | 엠마 | |
형제 | 두브라우카, 믈라다, 스트라치크바스 | |
아버지 | 볼레슬라프 1세 | |
어머니 | 비아고타? |
[clearfix]
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6대 공작.2. 행적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의 장남이다. 볼레슬라프 1세의 시대에 주조된 여러 동전에서 언급된 비아고타(Biagota)가 그의 어머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할 루토프스키는 비아고타가 게르만족 또는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슬라브인이었을 거라 추정했다. 형제자매로 두브라우카, 믈라다, 스트라치크바스가 있었다. 967년 또는 972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973년 마인츠 대주교구에 종속된 프라하 주교구가 성립되었고, 작센 출신의 데트마르가 첫 주교에 선임되었다.973년 5월 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사망했다. 이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함게 하인리히 2세를 도왔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와 하인리히 2세의 내전이 발발했다.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 전사들의 지원을 받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976년, 오토 2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보헤미아로 망명했다. 이후 오토 2세는 보헤미아를 상대로 2차례 공세를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977년 오토 2세를 주군으로 인정할 테니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고, 978년 크베들린부르크에서 오토 2세를 알현해 경의를 표했다.
977년 미에슈코 1세의 아내이자 볼레슬라프 2세의 여동생이었던 두브라우카가 사망했다. 그후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우호 관계가 악화되었다. 980년 봄 또는 여름,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이후 미에슈코 1세의 장남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딸[1]과 결혼했다. 하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985년에 락다그가 사망하면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마이센 성을 공략하고 마이센 주교 볼콜트를 추방하자, 미에슈코 1세는 며느리가 쓸모 없다고 보고 결혼을 무효화한 뒤 헝가리 대공 게저 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 유디트와 장남을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가 폴란드와 헝가리 연합에 둘러싸일 위험에 처하자, 984년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굳건히 했다.
이 무렵, 보헤미아 북동부의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와 쿠트나 호라를 거점으로 삼은 슬라브니크(Slavník) 가문의 위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슬라브니크는 서쪽으로는 보헤미아,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모라비아, 북쪽으로는 폴란드에 걸쳐 상당한 영토를 가진 강력한 영주였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슬라브니크의 아내로 명시된 스트르제지슬라파(Střezislava)는 볼레슬라프 1세의 누이였을 거라고 추정하며, 슬라브니크는 볼레슬라프 1세로부터 보헤미아를 경유하는 상인들의 여행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리라 추정한다.
981년 슬라브니크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소베슬라프는 보헤미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와 작센과 외교 활동을 벌였다. 이를 경계한 볼레슬라프 2세가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고, 소베슬라프는 2차례 영토를 떠났다가 복귀하길 반복했다. 그러던 983년 프라하의 주교 데트마르가 사망한 뒤, 소베슬라프의 형제인 보이치에흐가 새 주교에 선임되었다. 이로 인해 슬라브니크 가문의 위세가 더욱 강해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슬라브니크 가문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화폐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986년, 독일 왕위를 찬탈하려는 하인리히 2세와 대적하던 오토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지원하는 보헤미아를 응징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크게 패해 마이센으로 도피했고,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는 즉시 오토 3세를 알현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이후 오토 3세와 미에슈코 1세는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를 공격해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992년, 오토 3세에게 복종한 볼레슬라프 2세는 오토 3세와 함께 폴라비안 슬라브족을 정벌하는 원정을 진행했다. 995년, 그는 보헤미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브르쇼브치(Vrshovichi)를 지원해 갈수록 강해지며 독립을 꾀하는 슬라브니크 가문을 공격하게 했다. 브르쇼브치 가문은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를 공략하고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한 스피티미르, 포브라슬라프, 포르제이, 카슬라프, 소베보르 등 5명을 처형했다.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했던 프라하 주교 보이치에흐는 이에 분노해 브르쇼브치 가문을 파문하면서, 그들이 3번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후 보이치에흐는 프라하를 떠나 로마로 망명했다.
996년, 교황 요한 15세는 보이치에흐가 프라하 주교로 복귀하게 하자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즈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당국에 요청했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후 보이치에흐는 폴란드로 이동한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시에 따라 고대 프로이센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지만, 그 해 4월 23일에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999년 2월 7일에 사망했고, 장남 볼레슬라프 3세가 뒤이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엠마(? ~ 1005/1006): 부르군트 왕국의 국왕 콘라트 3세의 딸이라는 설,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로테르의 딸이라는 설, 프로방스 백작이자 이탈리아 국왕 로타리오 2세의 딸이라는 설 등이 제시되지만, 정확한 기원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1]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