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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0:33:35

헨리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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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헨리크 2세 포보즈니
Henryk II Pobożny
'''
파일:헨리크 2세.webp
출생 1196년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241년 4월 9일
폴란드 대공국 레그니차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238년 ~ 12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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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헨리크 1세
어머니: 실롱스크의 헤드비히
배우자 아네슈카 프르셰미슬디카
자녀 5남 5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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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레그니차 전투에서 몽골 제국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2. 생애

1196년경 실롱스크 공작 헨리크 1세와 이스트리아 변경백 베르톨트 4세의 딸인 실롱스크의 헤드비히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그네스, 볼레스와프, 콘라트, 소피, 거트루드 등이 있었다. 형 볼레스와프가 1206년에 요절하고 1213년 동생 콘라트가 사망한 후, 그는 헨리크 1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13~14세기에 익명의 실롱스크 수도자가 작성한 <폴스카-실롱스크 연대기>에 따르면, 헨리크는 자신의 모든 유산을 장남 헨리크 2세에게 물려주려 했다. 이에 또다른 아들 콘라트가 반발하면서, 헨리크 2세와 콘라트간의 갈등이 불거졌고, 급기야 내전이 벌어졌다. 헨리크 2세는 독일인의 지원을 받았고, 콘라트는 폴란드인의 지원을 받았다. 1213년 오폴레 인근의 스투드니카 전투에서 맞붙은 결과, 콘라트가 패배했다고 한다. 19~20세기 초 폴란드인 문인들은 콘라트를 신성 로마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 영웅으로 승화시켰지만, 현대 학자들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으며, 콘라트는 1213년 사냥 중에 말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다른 연대기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다고 본다.

1216년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1세의 딸인 12세의 공주 아네슈카 프르셰미슬디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0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아들들은 궁정 사제들에 의해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딸들은 트셰브니차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1222년 아버지와 함께 수도원에 기부했고, 1224년 별도의 인장, 궁정, 공증인을 갖게 되었다. 1227년 11월 24일 폴란드 대공 레첵 1세가 고싸바에서 암살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아버지 헨리크 1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충직한 기사인 비젠부르크의 페레그리누스가 자기 몸으로 가려서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는 아버지가 회복될 때까지 통치를 대행했다.

1228년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로부터 크라쿠프 총독에 선임되고 대폴란드 공국에 대한 상속을 약속받은 헨리크 1세는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와 대결했다. 1228년 여름, 콘라트 1세가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이에 헨리크 2세가 아버지를 대신해 반격을 가해 바위 전투, 브로치에레즈 전투, 미엥지보르제 전투에서 잇따라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콘라트 1세는 포기하지 않고 1229년 재차 원정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헨리크 1세는 친족간의 갈등을 진정시키기로 마음먹고, 스피트코비체에서 콘라트 1세와 평화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에 콘라트 1세의 추종자들에게 공격당해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프워츠크에 투옥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 헤드비히의 노력 덕분에 풀려날 때까지 실롱스크를 대리 통치했다.

1229~1230년 루부슈 원정에 착수해 튀링겐 변경백국을 물리치고 지배권을 확립했으며, 1233년과 1234년에 아버지가 소폴란드와 대폴란드를 장악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을 때 동행했다. 헨리크 1세는 그런 아들에게 자신의 직위를 물려주려 노력했다. 1234년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영지와 권한을 분할했다. 이때부터 헨리크 1세는 실롱스크 공작과 크라쿠프 공작을 맡았고, 헨리크 2세는 실롱스크 공작과 대폴란드 공작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이 대공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헨리크 1세가 오트무후프-니사 일대의 금광 수입을 브로츠와프 주교구로부터 회수한 일 때문에 브로츠와프 주교 토마스 1세에게 파문된 일 때문에 대관식이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238년 3월 19일 크로스노 오드잔스키에서 사망했다. 헨리크 1세는 파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수도원에 안장되는 게 거부되었지만, 헨리크 2세가 오트무후프-니사 일대의 금광 수입을 브로츠와프 주교구에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해 아버지에게 걸린 파문이 풀리게 한 덕분에 겨우 안장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40세였던 그는 아버지의 영지를 온전히 물려받아야 했지만, 곳곳에 문제가 남아 있었다. 대폴란드에서는 헨리크 1세와 치열한 내전을 벌였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여전히 건재했고, 소폴란드에서는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도사렸다. 또한 폴란드 귀족들은 군주의 직위 세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투표를 통해 군주를 세우기를 선호했다. 한편, 오포에와 산도미에시에서는 어린아이인 오포에의 미에슈코 2세, 볼레스와프 5세가 명목상 공작을 맡았고, 그는 이들의 후견인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했다. 하지만 두 아이가 장성하면 오포에와 산도미에시를 넘겨줘야 했다. 결국 그가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영지는 실롱스크 뿐이었다. 게다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은 헨리크 1세가 사망한 틈을 타 산토크 요새를 점령하고 루부슈를 위협했다.

그러던 1239년 6월 5일, 아버지와 대폴란드 영지를 놓고 오래도록 전쟁을 벌였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사망했고, 그의 두 아들 프셰미수와 볼레스와프는 아직 어렸다. 그는 이 때를 틈타 그니에즈노를 비롯해 오도니치의 영지 대부분을 인수하고, 나크워와 우이시치에를 두 아이에게 명목상으로 넘겼다. 이후 아버지가 가담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간의 관계를 끊고 교황청의 편에 합류해 교회와의 갈등을 즉시 종식시켰으며, 자신의 딸 콘슈탄치어를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의 아들 카지미에시와 결혼시킴으로써 콘라트 1세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이후 1239년 루부슈를 포위 공격하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군을 요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일전에 빼앗겼던 산토크 요새를 탈환했다.

이렇듯 산적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던 그였으나, 동방에서 최악의 상대가 등장했다. 1241년 1월,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 헝가리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바투는 폴란드 대공국이 헝가리를 도우려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10,000명 가량의 기병대를 오르다[1], 바이다르[2], 카단[3]에게 맡겨 폴란드를 공격하게 했다. 그들은 먼저 투르스크 비엘키와 타르체크에서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 기사들을 격파했고, 1241년 3월 18일에는 크라쿠프 보이보드(voivode) 브워지미에르츠와 크라쿠프 영주들을 상대로 크미엘니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브워지에르츠를 사살했다. 이후 몽골군은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를 포함한 소폴란드 전역을 파괴했다.

몽골군이 심각한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헨리크 2세는 소폴란드에서 겨우 빠져나온 병사들을 수습하고, 대폴란드, 실롱스크 전역에서 병사들을 가능한 한 긁어모았으며,[4] 독일, 오스트리아 공국, 보헤미아 왕국 등 서방 통치자들에게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통치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교황 사이의 대립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오직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 성전기사단, 구호 기사단이 구원병을 보냈다. 그나마도 바츨라프 1세는 레그니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배치해 두고 상황을 지켜봤다.

1241년 4월 9일, 헨리크 2세가 이끄는 폴란드군 및 기사단과 몽골제국군 레그니차 평원에서 맞붙었다. 그는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편이었으나, 불행히도 몽골제국군은 너무도 강한 상대였고, 결국 패배를 면치 못했다. <유명한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오포에 공작 미에슈코 2세가 도중에 휘하 기사들을 이끌고 달아나자, 헨리크 2세는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고 한다.
"spadło na nas wielkie nieszczęście!"
"큰 불행이 우리에게 닥쳤구나!"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헨리크 2세는 어떻게든 포위를 뚫기 위해 분전하던 중 검을 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앞을 막은 타타르인을 쳐 죽이고자 했다. 이때 또다른 타타르인이 창으로 그의 팔 아래를 찔렀다. 헨리크는 치명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졌고, 타타르인들은 그를 잡고 전투 지역에서 석궁 2발이 닿는 거리까지 끌고 나간 뒤 칼로 머리를 자르고 배지를 찢고 벌거벗은 몸만 남겼다고 한다. 반면 폴란드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베닉딕토가 귀위크 칸의 궁정으로 가는 여정을 함께 했던 드 브리디아가 1247년에 작성한 <타타르의 역사(Historia Tartarorum)>에 따르면, 타타르인들은 헨리크 2세를 붙잡은 뒤 산도미에시에서 살해된 귀족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한 뒤 그의 목을 벤 후 머리를 가지고 모라비아를 거쳐 헝가리로 가서 바투 칸 앞에서 다른 머리들 사이에 던졌다고 한다.

3. 사후

헨리크 2세의 유해는 전장에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이 "그의 왼발에 6개의 발가락이 있다"는 아내 아네슈카 프르셰미슬디카의 증언을 토대로 찾아낼 수 있었다. 이후 브로츠와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4년, 독일 과학자들은 그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낸 뒤 그가 아리아인인지 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유해는 1945년 2월 13일부터 5월 6일까지 소련군 독일군 간의 브로츠와프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에 사라졌다.

헨리크 2세는 단 3년간 통치했지만 몽골제국군의 침략으로부터 용감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이자 이상적인 기사로서 후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2015년, 레그니차에서 설립된 <헨리크와 실롱스크의 아네슈카의 자매 및 형제 협회>의 주도로 그를 복자로 시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2017년 5월 4일, 레그니차 주교 즈비그뉴 키에르니코프스키와 브로츠와프 교황청 신학부 부총장인 스타니스와프 아라슈추크는 정식으로 교황청에 시복 절차를 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 6월 23일, 교황청은 헨리크 2세의 시복 과정을 시작하도록 했다. 2021년 6월 5일, 레그니차의 성 십자가 찬미 대성당에서 헨리크 2세의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헨리크 2세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의 아내 아네슈카 프르셰미슬디카는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지 않았음에도 폴란드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그녀 역시 남편처럼 시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4. 가족



[1] 주치의 장남, 바투의 형 [2] 차가타이의 차남 [3] 오고타이 칸의 아들 [4]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금광을 캐던 광부까지 징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