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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21:45:19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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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Władysław I H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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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ladyslaw_Herman.jpg
출생 1043년
폴란드 대공국
사망 1102년 6월 4일
폴란드 대공국 프워츠크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079년 ~ 11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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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카지미에시 1세
어머니: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
배우자 프셰츠와바
유디트 프르셰미슬디카
슈바벤의 유디트
자녀 2남 3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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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2. 생애

1043년경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 키예프 루스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딸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의 차남으로 출생했다.형제자매로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 미에슈코,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 오토가 있었다. 1058년 형 블레스와프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되었을 때, 그는 마조프셰의 공에 봉해졌다. 1079년, 볼레스와프 2세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숙청을 단행하는 것에 분노한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볼레스와프 2세를 축출한 뒤 그를 옹립했다. 그가 이 정변에 가담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동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볼레스와프 2세는 1076년 12월 25일에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한 바 있었지만, 그는 귀족들의 압력에 따라 국왕을 칭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공에 취임했다. 이후 스타슈프-토포르치크 가문의 가주이며 볼레스와프 2세를 축출하는 반란을 주동했던 시에시에흐(Sieciech)가 궁정백의 자격으로서 실권을 잡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동전을 주조할 정도로 사실상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본래 마조프셰 귀족 프셰츠와바와 결혼해 즈비그뉴를 낳았지만, 1079년 권좌에 오른 뒤 결혼 무효화되었다.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오랜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086년 12월 25일에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가 사망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의 딸이며 하인리히 4세의 누이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재혼해, 볼레스와프 2세 시절에 벌어졌던 양국간의 갈등 역시 종식하고자 했다. 이후 시에시에흐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성직자 서임권 분쟁을 벌이는 하인리히 4세를 지원해, 황제의 호의를 사고자 했다.

1089년, 볼레스와프 2세의 외아들이며 1086년부터 크라쿠프 공작에 봉해졌던 미에슈코 볼레스와비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세간에는 시에시에흐가 잠재적인 대공위 경쟁자인 미에슈코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 1세가 첫 아내 프셰츠와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즈비그뉴가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브와디스와프 1세가 두번째 아내 유디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볼레스와프 3세가 대공위를 순조롭게 계승하도록 했다. 1090년, 시에시에흐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향한 원정을 성공해 그곳을 폴란드에 종속시켰다. 이때 그는 그곳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비대를 지키고 나머지 도시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포메라니아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포메라니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090년 말 반란을 일으켜 수비대를 몰아내고 폴란드 국경 지대를 연이어 습격했다.

1091년, 시에시에흐가 포메라니아인들을 향한 보복 원정에 착수했지만 우다 강변에서 패배했다. 그때부터 상황은 시에시에흐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093년, 실레시아 귀족 마그누스가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되는 귀족들을 연이어 숙청하는 시에시에흐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그누스는 보헤미아 국왕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폴란드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즈비그뉴를 수도원에서 빼돌린 뒤 브로츠와프로 모셨다. 시에시에흐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헝가리 지원군이 도착하자 즉시 브로츠와프로 진격했다. 그런데 헝가리군은 도중에 폴란드 귀족들의 로비에 넘어가 시에시에흐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3세를 납치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두 사람이 풀려나게 하게 위해 사생아로 간주되었던 즈비그뉴를 정식 아들로 삼고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시에시에흐는 복수를 벼르다가 1095년 라슬로 1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 왕국이 칼만과 알모스 왕자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즈비그뉴를 공격했다. 그 결과 1096년 고프워 전투에서 즈비그뉴의 군대가 시에시에흐에게 패배했고, 시에시에흐는 즈비그뉴를 사로잡고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민심이 갈수록 불온해지자, 1097년 또는 1099년에 즈비그뉴를 석방해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는 내란이 일어날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즈비그뉴와 볼레스와프 3세를 포메라니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두 공자는 군대를 크라쿠프로 돌린 뒤 아버지에게 지금 즉시 분할 상속해줄 것을 강요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강요에 못 이겨 영지를 그들에게 상속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소폴란드, 실레시아, 대폴란드 서쪽 부분, 루부츠 일대를 상속받았고, 즈비그뉴는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쪽 부분, 쿠아비아, 웽치차, 시에라츠, 마조프셰 등지를 상속받았다. 시에시에흐는 이렇게 분할되면 자신의 지위가 약화될 거라 보고, 두 왕자가 맡은 구역의 관리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움으로써 실질적인 통치를 이어가려 했다. 여기에 두 형제를 아버지에 반역을 일으킨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했다.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뉴는 시에시에흐의 계획을 눈치채고 스카비미르를 비롯한 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한 뒤 시에시에흐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단행했다. 1099년, 필리차강 인근의 차르노비에츠에서 시에시에흐의 군대와 두 공자의 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두 공자가 승리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해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1100년, 두 공자의 군대는 시에시에흐가 숨어 있던 시에시에호프를 포위했다.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1세가 돌연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시에시에흐를 도우러 달려왔다. 이에 두 공자는 아버지를 완전히 실각시키기로 합의하고 프워츠크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시에시에흐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결국 두 공자에게 완전히 굴복한 브와디스와프 1세는 시에시에흐를 독일로 추방하는 데 동의해야 했고, 이후 대공위를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받는 대가로 모든 권력을 아들들에게 넘겨야 했다. 그 후 프워츠크에서 조용히 지내다 1102년 6월 4일에 사망했고, 프워츠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