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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2대 공작 콘라드 2세 Konrád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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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콘라드 2세 (Konrád II) |
출생 | 1136년 또는 1141년 | |
사망 | 1191년 9월 9일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189년 ~ 1192년 | ||
아내 | 비텔스바흐의 헬리차 | |
형제 | 아르노슈트, 헬레나 | |
아버지 | 즈노이모의 콘라드 2세 | |
어머니 | 마리아 스브르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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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22대 공작.2. 행적
1136년 또는 1141년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와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1세의 딸인 마리아 스브르스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르노슈트와 헬레나[1]가 있었다. 116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즈노미오의 통치권을 물려받은 그는 1173년 브르노도 물려받으면서 올로모우츠를 제외한 모라비아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올로모우츠를 마저 공략하고 모라비아를 보헤미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시킬 기회를 노렸다.1176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2세와 갈등을 빛은 끝에 면직되자, 아달베르트의 삼촌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와 함께 아달베르트를 지지했다. 1178년 소베슬라프 2세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위에서 축출되었던 베드르지흐가 독일에서 용병대를 고용한 뒤 보헤미아로 쳐들어가자, 오스트리아의 신임 공작 레오폴드 5세와 함께 그를 지지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전쟁에서 패해 해외로 망명하고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한 뒤, 그는 올로모우츠를 대가로 받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베드르지흐는 그 대신 자신의 동생이며 소베슬라프 2세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한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선임했다.
1182년, 콘라드 2세는 모라비아에서 반기를 일으켜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에서 몰아내고 즈노이모, 브르노, 올로모우츠를 통합해 모라비아 전역을 통일시킨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달려간 뒤 도움을 호소했고, 황제는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을 계속 맡는 대신 콘라드 2세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고 보헤미아 공작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185년, 오타카르 1세가 이끄는 베드르지흐의 군대는 모라비아를 보헤미아의 지배하에 되돌리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즈노이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타카르 1세와 콘라드 2세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오타카르 1세는 철수해야 했다. 1186년, 양자는 크닌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콘라드 2세는 변경백 칭호를 유지하면서도 보헤미아 공작의 패권을 인정했으며, 베드르지흐의 후계자가 되었다. 1189년 3월 25일 베드르지흐가 사망한 후, 콘라드 2세가 크닌 협정에 의거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즉시 모라비아 변경백에서 물러났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1190년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즈노이모 인근의 라우키에 수도원을 세웠다.
콘라드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지령을 받들어 프리드리히 1세와 많은 갈등을 벌였던 베틴 가문의 영지인 마이센 인근에 군대를 배치해 압박을 가한 끝에 마이센 변경백으로 프리드리히 1세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오토 2세가 세워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는 1189년 사드스카에서 최초의 보헤미아 법률인 <콘라드 법령(Statuta Konrádova)>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영주 가문은 농노를 세습할 수 있으며,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되었다. 반면 과부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범죄에 적용되는 관습법을 성문화했으며, 국왕이 사법권과 행정권을 좀더 강하게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 대가로, 보헤미아 귀족들의 재산은 오랜 법적 절차을 거치고 관습에 어긋나지 않아야만 몰수될 수 있는 등 귀족들의 특권이 보장되었다.
1191년, 콘라드 2세는 프리드리히 1세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한 하인리히 6세를 따라갔다. 그 해 4월 로마에서 열린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뒤,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 재편입하기 위해 남하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거점 나폴리를 포위 공격할 때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9월 9일 진영에서 나돌던 페스트에 걸려 병사했다. 그는 생전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샤이베른 백작 오토 4세의 딸인 비텔스바흐의 헬리차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에 따라 소베슬라프 2세의 남동생인 바츨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