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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7대 공작 볼레슬라프 3세 Boleslav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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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볼레슬라프 3세 (Boleslav III) |
출생 | 965년경 | |
사망 | 1037년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999년 ~ 1002년 |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003년(복위) | ||
형제 | 바츨라프, 야로미르, 올드르지흐 | |
아버지 | 볼레슬라프 2세 | |
어머니 | 엠마 |
[clearfix]
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7대 공작.2. 행적
965년경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와 엠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요절한 바츨라프와 야로미르, 올드르지흐가 있었다. 999년 아버지가 사망한 보헤미아 공작에 오른 그는 형제들을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001년, 그는 야로미르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거세했다. 이후 올드르지흐까지 살해하려 하자, 야로미르와 올드르지흐는 바이에른으로 도주했다.1002년, 보헤미아 유력 귀족인 브르쇼프 가문이 폭정을 자행하는 공작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볼레슬라프 3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노르가우 변경백인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에게 망명했다. 이후 블라디보이가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원으로 보헤미아 공작에 올랐지만, 1003년 1월에 사망했다. 이에 볼레슬라프 3세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게 독일왕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는 봉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고, 볼레스와프 1세는 이를 믿어주기로 하고 볼레슬라프 3세의 복위를 주선했다.
1003년 2월, 볼레슬라프 3세는 폴란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곧 이를 뒤집고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사들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그가 폭정을 일삼아 보헤미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뒤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두었다.
그 후 볼레스와프 1세 본인이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프라하를 장악한 뒤 공작을 맡았다가, 1004년 가을 하인리히 2세에 의해 보헤미아에서 쫓겨났고, 야로미르가 보헤미아 공작에 등극했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에 따르면, 볼레슬라프 3세는 폴란드 감옥에서 오래도록 고통받다가 1037년에 옥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