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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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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41년경 | ||
폴란드 대공국 쿠야비아 | |||
사망 | 1288년 9월 30일 (향년 47세) | ||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279년 ~ 128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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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쿠야비야의 카지미에시 1세 어머니: 브로츠와프의 콘슈탄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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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할리치나의 그리피나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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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2. 생애
1241년경 쿠야비야 공작 카지미에시 1세와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의 딸인 콘슈탄치어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지에모미슈가 있었다. 1257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카지미에시 1세는 오폴레 공작 카지미에시의 딸인 에우프로시네와 재혼해 브와디스와프 1세, 카지미에시 2세, 지에슈미트, 에우프로시네를 낳았다. <대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에우프로시네는 자신이 낳은 아들들이 쿠야비아 공작위를 차지하게 하기 위해 콘슈탄치어의 자식들을 독살하려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콘슈탄치어의 두 자식과 에우프로시네 및 그녀가 낳은 자식들간의 불화가 심했던 것은 분명하다.1261년, 레첵 2세는 쿠야비야 공작 후계자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1] 당시 카지미에시 1세는 폴란드 대공위를 놓고 볼레스와프 5세와 내전을 벌이고 있었고, 헨리크 2세가 자신에게 양도했던 카스탤란을 도로 빼앗으려는 실레시아 공작 볼레스와프와의 전쟁도 별도로 치르고 있었다. 많은 귀족들은 쿠야비야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졌는데도 계속 모험적인 원정을 감행하는 카지미에시 1세에게 반감을 품었다. 레첵 2세는 이 덕분에 많은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고, 카지미에시 1세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산도미에시 공국을 넘겨줘야 했다.
레첵 2세는 산도미에시 공작으로서 노바 브레즈니차, 루토미에르스크, 볼보르츠, 라돔스크 등 여러 도시에 특권을 부여했고, 독일인들을 대거 받아들여서 적은 인구를 늘리고자 노력했으며, 쿠야비야 주교와도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러던 1265년,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5세는 아내 쿠니군다가 순결을 평생 지키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자식을 볼 수 없게 되자, 지난날 킵차크 칸국의 침략 때 크라쿠프에서 산도미에시로 피신한 자신을 받아줬던 레첵 2세를 양자로 삼고 폴란드 대공의 정당한 후계자로 삼았다.
1267년 카지미에시 1세가 사망했고, 쿠야비야는 그의 다섯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때 가장 나이가 많은 레첵 2세는 이미 가지고 있던 산도미에시에 웽치차 공국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 1266년 3월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부다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이 자리에서 볼레스와프 5세, 레첵 2세,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 그리고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1268년, 지에모미슈가 친 독일 정책을 펼치는 것에 반감을 품은 이노브로츠와프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를 새로운 통치자로 내세웠다. 지에모미슈는 1271년까지 이노브로츠와프 시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의 침공에 버티지 못하고 레첵 2세에게 망명했다. 볼레스와프는 2년간 이 도시를 다스리다가 1273년에 레첵 2세에게 예기치 않게 넘겨줬다. 레첵 2세는 1278년 8월 24일 랑드에서 열린 공회에 참석한 뒤 형제 지에모미슈에게 돌려줄 때까지 이노브로츠와프를 다스렸다. 1273년 7월, 리투아니아인들이 루블린 일대를 침공해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레첵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73년 12월 리투아니아를 공격했다. 1278년 리투아니아인들은 재차 루블린을 공격했지만 레첵 2세에게 패배했다.
1273년, 오포예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대공위를 노리고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크라쿠프의 귀족들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레첵 2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에게 호응했다. 그 해 6월 4일, 볼레스와프 5세는 보구친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의 군대와 귀족들의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흐샤누프를 포함한 크라쿠프 일대의 일부 영토를 빼앗겼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와 레첵 2세가 군대를 집결시켜 오포예로 진격할 준비를 하자, 브와디스와프는 협상을 제안했다. 1274년, 볼레스와프 5세와 레첵 2세는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대공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흐샤누프를 돌려주는 대가로, 브와디스와프가 점령한 크라쿠프 영지를 계속 가지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279년 12월 7일, 볼레스와프 5세가 사망했다. 이후 폴란드 대공이 된 레첵 2세는 곧 도전에 직면했다. 1280년 2월, 할리치나 공작 레프 2세가 자신이 크라쿠프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리투아니아인, 타타르인 및 일부 루스인의 지원을 받으며 쳐들어온 것이다. 그의 군대는 루블린 지방을 휩쓴 뒤 비스툴라 강을 건너 산도미에시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산도미에시 시를 공략하는 데 애를 먹었고, 그 사이에 병력을 규합한 레첵 2세가 반격을 가했다. 1280년 2월 23일에 벌어진 고즐리체 전투에서, 레첵 2세는 적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레프 2세를 몰아냈다. 이후 그는 보복 원정에 나서 르비프 등 폴란드-할리치나 국경지대 도시 및 마을들을 파괴했다.
1281년,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가 브로츠와프 공국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열린 상호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한 글로고프 공작 헨리크 3세, 브르주하티의 헨리크 5세,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를 모조리 체포해 투옥한 뒤 정치적 양보를 하라고 강요했다. 레첵 2세는 공작들을 구출하겠다는 명분을 걸고 브로츠와프 공국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헨리크 4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크라쿠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1282년,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던 요트빙거족이 루블린 일대를 심각하게 파괴했지만 우오피엔니크 전투에서 현지군에게 패퇴했다. 레첵 2세는 철수하는 침략자들을 추격했고, 나레프 강 어귀에서 그들을 따라잡고 철저하게 살육했다. 1283년 리투아니아인들이 요트빙거족의 참패에 보복하고자 쳐들어와서 산도미에시 일대에 진입한 뒤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로위니 마을 인근에서 그들을 함정으로 유인해 격파했다.
이렇듯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지만, 폴란드 대공으로서의 그의 입지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재위 기간 내내 내부의 정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1280년대 초, 그는 성직자들이 너무 많은 면책 특권을 누린다고 여기고 일부 특권을 회수했다가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볼레스와프 5세의 미망인인 쿠니군다가 지참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노비사치가 헝가리 왕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 직할지로 삼아버리면서, 선행을 많이 베풀고 기독교 신앙이 투철한 쿠니군다를 존경했던 귀족 및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1282년, 산도미에시 총독 야누스 스타자가 레첵 2세가 요트빙거족 및 리투아니아인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바쁜 틈을 타 산도메이시와 라돔 성을 체르스크 공작 콘라트 2세에게 넘기려다가 발각되었다. 레첵 2세는 야누스 스타자의 입지가 탄탄한 상황에서 함부로 처벌했다가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겨 불문에 붙였다. 1282년 또는 1283년에는 와구프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파벨을 체포해 시에리츠로 압송했다가 폴란드 교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어쩔 수 없이 석방했고, 1286년 11월 30일 3,000 그지브나(grzywna)를 지불하고 성잭자들의 면책 특권을 종전대로 허용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맺어야 했다.
1285년 4월, 야누스 스타자와 크라쿠프 총독 제에고타, 주교 파벨 등이 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레첵 2세는 이 반란을 예상치 못했기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반란군은 체르스크 공작 콘라트 2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콘라트 2세는 레첵 2세에게 충성하는 크라쿠프 시민들이 방어하고 있던 바벨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크라쿠프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사이 헝가리로부터 지원을 받은 레첵 2세가 돌아왔고, 1285년 5월 3일 보구지체 전투에서 콘라트 2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콘라트 2세는 체르스크로 도피했고, 레첵 2세는 반란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추방했다. 이 덕분에 그의 입지는 탄탄해질 수 있었다.
1287~1288년, 킵차크 칸국의 6대 칸인 탈라부가 칸과 노가이 칸이 루스 공작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폴란드로 쳐들어갔다. 기사들과 주민들은 요새화된 도시로 피신해 농성했고, 레첵 2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헝가리로 향했다. 소폴란드는 1241년과 1259년에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보다 준비가 잘 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요새화된 도시, 특히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는 적의 맹공을 잘 막아냈다. 여기에 헝가리군이 소폴란드로 밀려올 예정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탈라부가 칸과 노가이 칸은 소폴란드의 농촌들로부터 약탈한 전리품들을 챙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레첵 2세는 1265년에 막소(Macsó)의 바나테이자 할리치나 공자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딸 그리파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1271년 그리피나가 레첵 2세가 발기부전이기 때문에 부부간의 결합이 좀처럼 성립되지 않는다고 폭로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1274년까지 별거했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의 중재로 재결합했고, 레첵 2세는 여러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하던 레첵 2세는 1288년 9월 30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로 죽었고,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했다.
[1]
몇몇 연대기에는 지에모미슈가 반란에 가담했다고 기술되었지만, 다른 연대기는 지에모미슈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