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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21:57:19

미에슈코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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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미에슈코 4세 플롱토노기
Mieszko IV Pląton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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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에슈코 4세.jpg
출생 1131년에서 1141년 사이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211년 5월 16일
폴란드 대공국 바벨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210년 ~ 12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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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
어머니: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
배우자 루드밀라
자녀 1남 4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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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실레시아 공작으로서 미에슈코 1세, 폴란드 대공으로서 미에슈코 4세로 일컬어진다.

2. 생애

1131년에서 1141년 사이에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와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드 3세의 딸인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볼레스와프 1세 비소키, 리체차, 콘라트 라스코노기, 알베르트가 있었다. '플롱토노기(Plątonogi)'는 별명으로, '얽힌 발'을 의미한다. 1146년 아버지가 이복 형제 볼레스와프 4세, 미에슈코 3세에게 축출된 뒤 작센의 알텐부르크 성에서 지냈다.

1163년, 볼레스와프 4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두 아들인 볼레스와프와 미에슈코가 실레시아와 루부슈로 돌아와서 영주로 군림하는 걸 허락했다. 그 대신 실레시아와 루부슈의 주요 도시인 브로츠와프, 레그니차, 글로구프, 오폴레, 라시보르즈를 계속 지배함으로써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계속 통제했다. 두 형제는 처음에는 볼레스와프 4세에게 공손하게 대했지만, 삼촌이 프로이센인들과의 전쟁에서 완패하자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볼레스와프 4세가 통제하고 있던 도시들을 모조리 확보하고 볼레스와프 4세를 따르던 관료들을 축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볼레스와프 4세는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두 조카가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완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170년, 그는 형제이자 실레시아 공작인 볼레스와프 1세의 장남이자 자신의 조카인 야로슬와프와 함께 볼레스와프 1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켰다. 여기에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4세까지 지원하자, 볼레스와프 1세는 더 이상 저항자히 못하고 국외로 탈출했다. 그러나 1173년, 볼레스와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고 실레시아로 돌아와서 브로츠와프 공작으로서 실레시아를 계속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형제 미에슈코와 장남 야로스와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떼어주는 것에 동의해야 했다. 또한 볼레스와프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8,000 그지브나(grzywna) 상당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실레시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미에슈코 4세는 보헤미아 프로셰미슬 가문 출신인 루드밀라와 결혼해 당시 강성해지고 있는 보헤미아 공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1177년, 미에슈코 4세는 볼레스와프 1세가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3세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에 동참한 틈을 타 볼레스와프 1세의 영지를 급습해 단숨에 공략한 뒤 미에슈코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1179년 미에슈코 3세가 반란군에 밀려 국외로 망명했고, 카지미에시 2세가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되었다. 그는 즉시 카지미에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소 폴란드에서 분리된 시비에르츠, 오시비엥침, 비톰 등지의 영주에 선임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다시 실레시아 공작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글로고프 공국 일부를 카지미에시 2세의 형제 콘라트 1세에게 떼줘야 했다.

1195년 카지미에시 2세가 급사하자, 미에슈코 4세는 조카 야로슬라프와 함께 폴란드 대공에 복위하려는 미에슈코 3세를 지원했다. 1195년 9월 13일, 미에슈코 3세가 이끄는 군대와 카지미에시 2세의 어린 아들 레첵 1세를 지지하는 군대가 모즈카와 전투를 치렀다. 미에슈코 3세는 이 전투에서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를 잃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퇴각했다. 얼마 후 실레시아에서 파견된 군대가 같은 장소에서 레첵 1세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번에는 실레시아군이 승리했지만, 미에슈코 3세가 이미 참패하고 물러났다는 걸 알게 되자 즉시 귀환했다.

1201년 3월 22일, 조카 야로슬라프가 사망했다. 여기에 형제 볼로슬라프 1세가 1201년 12월 7일 또는 8일에 사망했다. 그는 즉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오포에와 브로츠와프를 확보하고 두 곳의 공작위를 겸임했다. 이후 살레시아 공작을 칭했다가 볼로슬라프 1세의 아들인 헨리크 1세와 협상한 끝에 1,000달란트를 보상받고 실레시아 공작을 헨리크 1세에게 넘겨줬다. 그 후 자기 영지를 무탈하게 이끌던 그는 대폴란드 영지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간의 내전이 심화되고 폴란드 대공 레첵 1세는 갈리치아 내전에 개입하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대공에 오를 기회를 엿보았다.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실레시아 귀족들의 로비에 따라 피아스트 왕조 일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미에슈코 4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삼으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츠는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도 없었기에 그 해 7월에 보르지코바에서 공작과 귀족들도 참석한 공의회를 소집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는 레첵 1세,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 교황에 의해 대공으로 추천받은 미에슈코의 아들 카지미에시, 헨리크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군주가 사망한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권을 완전히 포기할 테니 교령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때 미에슈코 4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함께 바벨로 들어간 뒤 대공을 칭하며 통치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1211년 5월 16일에 미에슈코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방문한 사절단은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레첵 1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고, 실레시아의 헨리크는 루부슈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