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의원 ( 미야자키 2구) | ||||
선거구 개편 | → |
제41~42대 에토 다카미 |
→ |
제43~50대 에토 다쿠 |
역임 지위 | |||||||||||||||||||||||||||||||||||||||||||||||||||||||||||||||||||||||||||||||||||||||||||||||||||||||||||||||||||||||||||||||||||||||||||||||||||||||||||||||||||||||||||||||||||||||||||||||||||||||||||||||||||||||||||||||||||||||||||||||||||||||||||||||||||||||||||||||||||||||||||||||||||||||||||||||||||||||||||||||||||||||||||||||||||||||||||||||||||||||||||||||||||||||||||||||||||||||||||||||||||||||||||||||||||||||||||||||||||||||||||||||||||||||||||||||||||||||||||||||||||||||||||||||||||||||||||||||||||||||||||||||||||||||||||||||||||||||||||||||||||||||||||||||||||||||||||||||||||||||||||||||||||||||||||||||||||||||||||||||||||||||||||||||||||||||||||||||||||||||||||||||||||||||||||||||||||
|
일본국 제16대 총무청장관 | |
일본국 제62대 운수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33-42대 중의원 의원 에토 다카미 江藤隆美 | Etō Takami |
|
|
|
출생 | 1925년 4월 25일 |
미야자키현 휴가시 | |
사망 | 2007년 11월 22일 (향년 82세) |
베트남 호치민시 | |
학력 |
구제 토미타카 실업학교 (졸업) 미야자키 농림 전문학교 (졸업) |
정당 |
|
의원 선수 | 10 (중) |
의원 대수 | 32, 33, 34, 35, 36, 37, 38, 40, 41, 42 (중) |
지역구 | 舊 미야자키 1구 → 미야자키현 제2구 |
악력 |
미야자키현 현의회 의원 중의원 의원 (제32-42대 / 舊 미야자키 1구 → 미야자키 2구) 제16대 총무청장관 제49대 건설대신 제62대 운수대신 신도쿄 국제공항 문제 담당대신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2. 생애
1925년 4월 25일 일본 미야자키현 휴가시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그의 집안은 소작농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사정이 어려웠고, 에토는 소학교 5학년의 나이(만 11세)에 타 지역에서 하루 55센의 돈을 받고 육체노동을 하며 가계를 꾸려나갔다.이후 구제 토미타카 실업학교(현: 미야자키현립 카도카와 고등학교)를 거쳐 1947년에 구제 미야자키 농림 전문학교(현: 미야자키대학)를 졸업했다. 농림학교 졸업 후 미야자키현의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3선의원을 역임하였다.
1969년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미야자키현 제1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1] 당선 직후 자민당에 정식 입당해 1973년 나카가와 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등이 결성한 강경 우파 성향의 파벌 세이란카이(청람회)의 결성에 참여했다. 1974년 농림정무차관, 1976년 국토정무차관을 거쳐 1983년에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으며 이 무렵부터 당인파 의원으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5년 12월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개조내각에서 건설대신직에 처음으로 입각해 1986년 7월까지 7개월 동안 재임했다. 1989년 우노 소스케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리직을 맡았지만 우노 총리의 스캔들과 소비세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 일본사회당 도이 다카코 위원장을 위시한 마돈나 열풍 등의 요인으로 인해 그해 7월 열린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유례없는 대참패를 당하며 그도 간사장 대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8월에 출범한 제1차 가이후 도시키 내각에서 운수대신으로 입각해 그해 12월까지 4개월을 재임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직전 운수대신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회당 돌풍에 밀려 선거구에서 낙선했다.[2]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1995년 무라야마 개조내각이 출범하자 총무청장관으로 입각했다. 하지만 후술할 망언 논란으로 인해 주변국들의 큰 반발을 샀고, 결국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9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에토는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했지만 가지야마는 온건파인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1998년 가메이 시즈카와 함께 신 파벌인 지수회를 결성했고, 2000년에는 자민당 종합농정조사회 최고고문 겸 대책본부장으로서 당시 일본 열도에 퍼지고 있던 구제역 조사를 진두지휘했다. 이듬해인 200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가메이 시즈카를 지지했지만 가메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로부터 9개의 정책협정을 맺고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며 사퇴했고, 고이즈미가 자민당의 새 총재직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선거 다음날 에토, 모리 요시로, 가메이의 회동 자리에서 지수회 소속 히라누마 다케오가 가메이에게 전화를 해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직을 부탁받았다고 보고를 했다. 가메이가 고이즈미와 맺은 9개항의 정책 협정에는 인사 상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이즈미가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인사를 결정한 것이었기에 가메이는 분노했지만 히라누마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해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에토가 고이즈미의 전화를 빼앗아 화를 내며 끊어버려 히라누마는 정조회장에 취임하지 못했다. 히라누마는 대신 경제산업대신이 되었으며 정조회장 자리는 총재선에서 3위를 한 아소 다로에게 돌아갔다.
이후 고이즈미가 국정공약인 개혁정책의 일원으로서 도로공단 민영화를 주장하자 에토는 과거 운수대신, 건설대신을 역임한 도로족 의원으로서 고이즈미의 개혁에 맹렬히 반발했다. 그러자 고이즈미는 우정민영화 반대파의 핵심인 가메이 시즈카와 함께 에토와 가메이 두 의원을 구태 정치인이자 저항 세력으로 규정했고 에토도 고이즈미와 그의 측근이자 경제재정정책 대신인 다케나카 헤이조를 "미국 물을 먹은 어설픈 무리들"이라며 비난했다.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고, 지역구는 장남인 에토 다쿠가 세습하였다. 다카미는 2007년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던 베트남 농업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호치민시를 방문하고 있던 도중 호텔에서 투숙해 휴식을 취하던 중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논란
- 1995년 10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언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여기서부턴 잡담이다. 기사에 쓸 얘기는 아니고 메모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젊은 여러분께 참고삼아 말씀드린다"라며 " 한일 병합 조약은 법적으로 유효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을 했다"라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 작자는 해당 발언을 당초 오프 더 레코드(비공개 회견)로 정했지만, 한 일본의 월간지가 에토의 발언을 보도한 것이 한국의 언론사에도 보도되며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3] 파장이 커지자 이 작자는 오프 더 레코드 규정을 지키지 않은 언론을 비난하며 레코드 해제를 거부하는 등 해당 발언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계기로 제출된 종교법인법 개정 심의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에토는 그해 11월 13일 장관직을 사임했다.[4]
- 2003년 7월 12일 후쿠이현 후쿠이시에서 열린 개인 강연회에서 이 작자는 일본이 과거에 일으킨 전쟁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총리 대신들이 어째서 과거 전쟁들에 대해서 주변국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또한 한일병합조약에 대해 "양국이 조인하고 국제연맹이 조건 없이 승인했다"라고 말했으며[5]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도 "난징 대학살의 사망자가 30만 명 정도라는 것은 날조된 거짓말"이라는 망언을 해 한중 양국의 공분을 샀다. 이 작자는 또한 위의 발언에서 한국인, 중국인 불법체류자가 무리를 지어 강도를 저지르고 있으며, 신주쿠의 가부키초는 제3국인이 지배하는 무법지대라는 망언도 했다. #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5 - 1969 | 정계입문 |
|
1969 - 2007 |
입당 정계은퇴 사망 |
5.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5 | 미야자키현 현의회 선거 | 휴가시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 당선 | 초선 |
1963 | - (-%) | 재선 | ||||
1967 | - (-%) | 3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미야자키 1구 | 76,257 (25.2%) | 당선(1위) | 초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3,434 (21.1%) | 당선(2위) | 재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611 (18.0%) | 당선 (3위) | 3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2,070 (19.4%) | 4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1,404 (22.9%) | 5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4,419 (21.1%) | 당선 (2위) | 6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4,557 (29.3%) | 당선 (1위) | 7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1,661 (23.7%) | 낙선 (4위)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4,699 (35.1%) | 당선 (1위) | 8선[6]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미야자키현 제2구 | 106,858 (55.48%) | 9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1,725 (66.55%) | 10선 |
6. 기타
- 극우에 가까울 만큼 강경한 그의 정치성향과는 다르게 의외로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반대파 진영과 친분을 가진 인물이었다. 에토는 1989년 나리타공항 문제에 대해 공개 질문서를 보낸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반대동맹) 아츠다파에게 "지역에 충분한 설명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문제의 장기화를 초래했다" 라며 나리타공항 문제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입장을 표했다. 이후 1990년 나리타 현지를 방문해 관용차 대신 승합차를 타고 나타나 지역 노인들의 손을 일일히 잡아주고 도게자를 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 이후 지역 공민관에서 열린 반대파와의 회담에서 일부 반대파 인원들의 " 전차를 끌고가 짓밟아 버리겠다" 등의 과격한 말과 태도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지역민들에게 나리타공항 보상에 대해 설명해 반대파 주민들로부터 호감의 인상을 샀다. 아츠다파는 1993년 에토가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하자 축하환을 보냈으며, 그가 욱일대수장 수상과 정계에서 은퇴하자 에토를 지역으로 초대해 축하회를 열어주었다.
7. 관련 문서
[1]
이때 자민당의 추가공인을 받았다.
[2]
운수대신 시절
나리타 국제공항 제2기 공사를 추진하기 위해 치바현으로 현지 시찰을 자주 나갔고, 이때 다른 후보들을 지원하러 다녀 본인의 지역구인 미야자키현은 거의 방문하지 않은 것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3]
이때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한중 정상회담 당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자리에서 에토의 망언에 대하여 일본놈들의 버르장 머리를 고쳐 놓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4]
이 오프 더 레코드 문제에 대해 관련된 일화로
오키나와현지사 오타 마사히데가
주일미군 군용지 강제 사용 절차에 대한 대리 서명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나자 방위시설청 장관 호슈야마 노보루가 이 오프 더 레코드 사건을 두고 "무라야마 총리는 멍청한 인간"이라고 비판했다가 장관직에서 사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5]
여기서 알아둬야 할 사실은
국제연맹은 1920년,
유엔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설립된 기관이며, 한일병합은 두 기구가 설치되기 전인 1910년에 체결되었다.
[6]
일본 중의원 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