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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08:46:49

민사당

일본사회당 민사당 신진당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파일:일본 민사당 로고.svg
[ruby(民社党,ruby=みんしゃとう)] | 민사당
<colcolor=#fe0000><colbgcolor=#ffffff> 영문 명칭 Democratic Socailist Party
한글 명칭 민사당
창당일 1960년 1월 14일
해산일 1994년 12월 9일 ( 신진당과 합당)
전신
()
이념 사회민주주의 (우익 사민주의)
반공주의[A]
일본 내셔널리즘[2]
보수주의[3][4]
친미[A]
스펙트럼 중도 ~ 중도좌파
당 색
빨간색 (#FE0000)
주소 도쿄도 미나토구 토라노몬 2초메 3-13
(東京都港区虎ノ門2丁目3-13)
중앙집행위원장 요네자와 타카시 / 8선 (, 33~40대)
중앙집행부위원장 요시다 유키히사 / 재선 (, 15~16대)
아베 모토오 / 3선 (, 37~38·40대)
니시무라 쇼조 / 5선 (, 34~38대)
누키야마 에이코 / 초선 (, 13대)
집행부서기장 나카노 칸세이 / 7선 (, 34~40대)
정책조사회장 이토 에이세이 / 4선 (, 37~40대)
국회대책위원장 아오야마 타카시 / 5선 (, 34~38·40대)
참의원 의원회장 요시다 유키히사 / 재선 (, 15~16대)
참의원
4석[6] / 252석 (1.6%)
중의원
15석[7] / 511석 (2.9%)
국제 조직

후계 정당
1994년 12월 9일 기준
1. 개요2. 역사3. 역대 선거결과
3.1. 중의원 의원 총선거
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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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5953949-ml.jpg
1959년부터 1994년까지 존속한 일본의 사민주의 정당. 이후 일본신당과 함께 신진당으로 합당되었다.

2. 역사

1959년 지방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개헌저지선 확보에 실패하여 부진하자 니시오 스에히로를 중심으로 한 우파사회당 일부 세력이 1960년에 탈당해서 만든 정당이었다. 당시에는 민주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8] 그러나 1960년 중의원 총선과 1962년 참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참패하면서 야당표만 까먹는 정당이라는 욕을 들이먹기도 했다. 다만 1970년대 들어서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세를 어느정도 확보하게 된다. 창당 초기에는 민주사회주의를 주창했지만 1960년대 중반 방위산업 관련 노조가 민사당에 가입하면서 특히 외교, 국방정책에서 자민당보다 우파라고 불릴 정도로 우측으로 기울어졌다.[9] 자위대의 존재와 집단 자위권 행사가 현행 헌법상의 해석으로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창당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의 개입이 있었다는게 2006년 미 국무부 안건에서 발견되었다. 창당 년도인 59년부터 64년까지 매년 CIA의 7만 5천불 규모의 원조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좌우의 전체주의를 배격하겠다는 당의 규약은 무시한 채 칠레 피바다로 만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반공주의를 국시로 했다는 이유로 옹호했고[10], 심지어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당시 전두환에게 김대중을 석방하지 않으면 북한과 수교협상을 하겠다고 압박을 넣은 스즈키 젠코 총리를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비판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에 당내에서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자공민 연대파와 공산당, 자민당 빼고 다 뭉치자는 사공민[11] 연대파가 대립해서 내분이 있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복지를 중시하는 경제정책과 노조의 영향력 때문에 대도시 지역[12]에서는 지지율이 그럭저럭 있었던 편이었다. 아이치현 출신 중앙집행위원장(카스가 잇코, 츠카모토 사부로, 오우치 케이고) 재직시에는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대쪽으로 기울어졌고, 반대로 간사이 출신 중앙집행위원장(사사키 료사쿠, 나가스에 에이이치) 재직시에는 사공민 연대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특징이다.

어쨌든 그 1970년대 중, 후반에 세가 강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 중, 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일본사회당, 공명당과 연합전선[13]을 짜서 정권교체까지 노렸으나 오히라가 선거운동기간 중에 사망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38석을 확보해 세를 확보했을 때도 있었지만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 하에서 세가 약해졌고, 특히 리크루트 사건에 츠카모토 사부로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의 정권교체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14]

그 직후 자민당과 정책적으로 연합을 꾀하기도 했지만 별 이득을 보지 못했고, 1993년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자 일본사회당, 공명당, 일본신당, 신생당, 사회민주연합,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7당 연립정권 호소카와 내각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4년 신생당, 일본신당과 연합해서 새로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자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이에 반발해서 연립정권에서 이탈했고 하타 내각이 단명으로 끝나면서 다시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1994년 12월에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되었다. 여하튼 구 민사당 출신 의원과 민사당을 지지했던 노조 '동맹' 등의 조직은[15] 신진당 해산후 이합집산을 거쳐 대다수가 민주당으로 이적했고, 이는 현재의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일부는 자유연합을 거쳐서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

혐한, 혐중 발언으로 악명이 높은 카와무라 타카시가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카스가 잇코의 비서 출신이다. 사실 민사당의 노선 자체로만 본다면 노다 요시히코 수상 당시의 민주당의 노선과 비슷하다.[16]

3. 역대 선거결과

3.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직전회차 선거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증감] 정당투표
득표수 득표율
1960(29회) 105 17 [▼23] 3,464,148 8.77%
1963(30회) 59 23 [▲9] 3,023,302 7.37%
1967(31회) 60 30 [▲7] 3,404,464 7.40%
1969(32회) 68 31 [-] 3,636,591 7.74%
1972(33회) 65 19 [▼10] 3,660,953 6.98%
1976(34회) 51 29 [▲10] 3,554,076 6.28%
1979(35회) 53 35 [▲7] 3,663,692 6.78%
1980(36회) 50 32 [▼4] 3,896,728 6.60%
1983(37회) 54 38 [▲8] 4,129,908 7.27%
1986(38회) 56 26 [▼11] 3,895,858 6.44%
1990(39회) 44 14 [▼11] 3,178,949 4.84%
1993(40회) 28 15 [▲1] 2,205,682 3.52%
정당 해산 (신진당 창당에 합류)

4. 여담

민사당이 창당되기 13년 전인 1947년에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도 민사당이 창당되었는데, 기존에 있던 사회당[17]에서 공산당[18]과의 협력에 반대하는 당내 우파가 탈당하여 민주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했다는 점이 유사했는데, 둘다 미국 CIA의 공작 결과라는 걸 생각하면 딱히 놀라울 건 없다.

5. 관련 문서


[A] 반공 외에도 자민당보다 외교적 친미성향이 훨씬 강했다. 또한 CIA의 비밀리 후원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중일수교당시에는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던때인지라 이를 환영하는 논평을 냈다. [2] 당대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했고, 당시에 온건했던 자민당보다 내셔널리즘 성격이 강했다. [3] 보수주의 관련 출처: # [4] 민사당은 공식적으로 민주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등 혁신정당이였으나 안보,외교,사회문화 정책에서 혁신정당인 일본사회당이 아닌 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에 더 가까워 이쪽으로도 평가받는다. [A] [6] 지역구 1석, 비례대표 3석 [7] 지역구 15석 [8] 1969년 11월 당명을 대폭 줄여 민사당이란 이름으로 정식 변경하게 된다. [9] 참고로 프락치라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민사당은 엄연히 안보투쟁에 참여했던 정당이었다. [10] 이 때문에 2005년 칠레 대선에서 반 피노체트 투사였던 미첼 바첼레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당 민사협회[19] 출신 인사들이 칠레 대사관에 사과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본인들의 선배 정치인이 했던 잘못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한 것. [11] 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12] 특히 나고야시가 있는 아이치현에서. [13] 1970년대말 사회당이 반자민/비공산 야권연합 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4] 이 당시 일본 야당연합[20]이 얻은 표 자체는 1983년 중의원 총선때와 비슷한 수준이이었지만 일본사회당으로 표가 쏠리면서 효율적인 표 배분에 실패했다(...) [15] 실질적으로 민사당 지지 노총이었던 전일본노동총동맹은 사회당 지지성향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와 통합을 하여 렌고(연합)이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고,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민사당-공명당과 별개로 공천을 내기도 했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11석의 당선자를 내면서 선전을 거두기도 했지만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PKO법을 둘러싼 민사당-공명당과 사회당과의 갈등과 사회당 내의 혼란으로 의석을 얻지못하면서 참패. [16] 물론 노다 요시히코는 민사당 출신은 아니다. [17] 일본사회당, 이탈리아 사회당 [18] 일본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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