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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9: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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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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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조조 , 조등 왕준, 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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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후비전(后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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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 , 유정, · 사마랑 · 양습 , 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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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혼 , 정태, · 창자 ,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 손관, · 문빙 · 여건 ,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 방육 ,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 조거 · 조우 · 조림(林) · 조곤 · 조현 · 조간 · 조표 · 조정 ·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 시묘, · 양준 · 두습 · 조엄 · 배잠 ,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 신헌영, · 양부 , 왕이, · 고당륭 ,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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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타 · 두기(夔) ,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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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양장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팔건장
장료 장패 학맹 성렴
송헌 위속 조성 후성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ang_Liao_Portrait.jpg
시호 강후(剛侯)
작위 관내후(關內侯) → 도정후(都亭侯)
도향후(都鄕侯) → 진양후(晉陽侯)
최종직위 전장군(前將軍) 가절(假節)
성씨 (張), 섭(聶)
(遼)
문원(文遠)
생몰 기간 169년[1] ~ 222년
고향 병주(幷州)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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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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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정원) 종사(從事)
여포군 기도위(騎都尉)
노국상(魯國相) 겸 북지태수(北地太守)
후한( 조조 조비) 중랑장(中郞將)
비장군(裨將軍)
행 중견장군(行 中堅將軍)
탕구장군(盪寇將軍)
탕구장군(盪寇將軍) 겸 가절(假節)
정동장군(征東將軍) 겸 가절(假節)
전장군(前將軍) 겸 가절(假節)
조위( 조비) 전장군(前將軍) 겸 가절(假節)[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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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는 문원(文遠)으로 병주 안문군 마읍현 출신. 후일 유비 촉(蜀)을 취하여 삼국이 정립되었을 당시 (對蜀) 전선 장합과 더불어 대(對吳) 전선을 책임졌던 명장. 하지만 장합과 마찬가지로 항장 출신인지라 도독을 지내지 못했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본래 섭일(聶壹)의 후예인데 원한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다.[4]

젊어서 군리(郡吏)가 되었다. 한나라 말, 병주 자사 정원은 장료의 무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다 여겨 불러서 종사(從事)로 삼고,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하진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모병해 천 여 명을 모았다. 경도로 돌아온 뒤 하진이 패망하자 군을 이끌고 동탁에 속했다.

2.2. 여포 휘하

동탁이 패망하자 군을 이끌고 여포에 속했고 기도위로 관위가 올랐다. 여포가 이각, 곽사에게 패하자 여포를 좇아 서주로 달아났다. 노국의 상에 취임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선주전> 주석 《 영웅기》에 따르면 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시켜 금을 지니고 사례 하내군으로 가서 말을 사오게 했는데 유비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포는 중랑장 고순, 북지 태수 장료 등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조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깨뜨리자 장료는 자신의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중랑장에 임명되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2.3. 관도대전

<관우전>에 따르면 당초 조조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말했다.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조조)께서 후히 대우 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이를 의롭게 여겼다.

<관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장료는 조조에게 고하려니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웠고, 고하지 않으려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공(조조)은 군부(君夫)이고 관우는 형제로다!
결국 조조에게 이를 고했다. 조조가 말했다.
주인을 섬김에 그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천하의 의사(義士)로다. 언제 떠날 것 같소?
장료가 말했다.
관우가 공의 은혜를 입었으니, 필시 공을 세워 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입니다.

<관우전>에 따르면 원소가 대장 안량을 보내 동군 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하자,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 안량의 휘개(麾蓋)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비장군으로 관위가 올랐다. 원소를 깨뜨리자 별도로 장료를 보내 예주 노국의 여러 현들을 평정하게 했다.

2.4. 창희 토벌

장료는 하후연과 함께 서주 동해군에서 창희를 포위했는데, 여러 달이 지나 군량이 소진되자 회군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장료가 하후연에게 말했다.
며칠 사이 매번 포위된 곳을 순시할 때마다 창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이 화살을 쏘는 일이 드물었소. 이는 필시 창희가 마음속으로 망설이는 게 있어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그와 얘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어쩌면 그를 달랠 수도 있을 것이오.
이에 창희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공(조조)께서 남긴 명이 있어 장료를 통해 전하게 했다.
그러자 창희는 과연 성 아래로 내려와 장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장료가 창희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조께서 뛰어난 무용이시고 바야흐로 그 덕으로 사방을 품으시니 먼저 귀부한 자가 큰 상을 받았소.

이에 창희는 투항을 허락했다. 이에 장료는 단신으로 삼공산(三公山)에 올라 창희의 집으로 가 그의 처자식에게 예를 갖추었다. 창희가 매우 기뻐하여 장료를 따라가 조조를 배알했다.
조조는 창희를 돌려보내고 장료를 꾸짖으며 말했다.
이는 대장의 법이 아니오.[5]
장료가 사죄하며 말했다.
명공의 위엄과 신망이 사해(四海)에 떨치고 있고 저 장료가 임금의 뜻을 받드는데 창희가 감히 저를 해치지는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2.5. 하북 평정

조조를 수행해 여양에서 원담, 원상을 토벌했고 공을 세워 행(行) 중견장군에 임명되었다.
조조를 수행해 의 원상을 공격했는데 원상이 굳게 지키자 함락시킬 수 없었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갔는데, 장료를 보내 악진과 함께 기주 위군 음안현을 함락케 하고 그 백성들을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켰다.

다시 업을 공격할 때 조조를 수행해 업을 깨뜨렸다. 장료는 별도로 기주 조국, 기주 상산군을 공략하고 여러 산적들과 흑산적 손경을 불러 투항케 했다. 조조를 수행해 원담을 공파했다. 별도로 해안지대를 공략하고 요동적 유의(柳毅) 등을 격파했다. 업으로 돌아올 때 조조가 친히 나가 장료를 맞이하며 함께 수레를 탔다. 장료를 탕구장군으로 임명했다.

또한 별도로 형주를 공격해 강하의 여러 현들을 평정하고 돌아와 예주 영천군 임영현에 주둔했다. 도정후에 봉했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유성을 정벌하려 하자 장료가 간언했다.
천자( 헌제)는 허현(허도)에 계시는데 공은 멀리 북쪽을 정벌하시니, 만약 유표가 유비를 보내 허현을 습격하면 공의 세력이 꺾일 것입니다.
조조는 필시 유표가 유비에게 일을 맡기지는 못할 것이라 하고는, 마침내 북쪽을 정벌했다.

조조를 수행해 유성에서 원상을 정벌했다. 갑작스럽게 오랑캐와 조우하자 장료는 조조에게 싸울 것을 권하며 기백을 심히 떨쳤다. 조조가 이를 장하게 여겨 자신이 소지한 대장기를 장료에게 주었다. 마침내 원상을 공격해 대파하고 선우 답돈을 참했다.

<하기전>에 따르면 모평현의 도적 종전(從錢)의 무리 또한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하기는 군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장료와 함께 토벌하여 평정했다.

2.6. 진란 토벌

진란, 매성 저족의 육현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우금, 장패 등을 보내 매성을 치도록 하고, 장료는 장합, 우개 등을 이끌고 진란을 치도록 했다. 매성이 우금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우금이 돌아가자 그 군을 이끌고 진란에 합류해 첨산으로 들어갔다.

첨산에는 천주산이 있는데 높이가 20여 리에 달했고 길이 험하고 협소해 걸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진란 등은 그 위에 보루를 쌓았다. 장료가 진군하려 하자 제장들이 말했다.
병사는 적고 길이 험하므로 깊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장료가 말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한 명 대 한 명의 싸움으로, 용맹한 자라면 가히 전진할 만하오.
이에 진군하여 산 아래 도착하여 영채를 내리고 공격해 진란, 매성의 머리를 베고 그 무리들을 포로로 잡았다.
조조가 제장들의 공을 논하면서 말했다,
천산의 험준한 곳에 올라 진란과 매성을 죽인 것은 탕구(장료)의 공이다.
식읍을 늘리고 가절(假節)했다.

2.7. 형주 정벌

형주가 아직 평정되기 전, 다시 장료를 보내 예주 영천군 장사현에 주둔하게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군중에서 반란을 꾀하는 자가 있어 밤중에 난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자 일군이 모두 동요했다. 장료가 좌우에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이는 한 군영 전체가 모반한 것이 아니라 필시 변고를 꾀하는 자가 있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군중에 영을 내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자는 조용히 앉아 있으라 했다. 장료는 친병(親兵) 수십 명을 이끌고 진(陳) 중으로 들어가 섰고 그 얼마 후 반란의 주모자를 붙잡아 죽였다.

조엄전에 따르면 당시 우금은 영음에 주둔하고 있었고, 악진은 양적에 주둔하였으며, 장료는 장사에 주둔하였는데, 그 장수들은 기질에 따라 행동하고 대부분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조엄에게 세 군대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했다. 조엄은 매번 규분이 있을 때마다 훈계하여 깨우쳤으므로 결국 서로 친하게 되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 태수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

2.8. 환성 전투

<오주전>에 따르면 214년 5월, 손권이 환성을 정벌했다. 윤달에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 태수 주광과 참군 동화,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몽전>에 따르면 얼마 후 장료가 협석(夾石)까지 왔으나,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퇴각했다.

2.9. 2차 합비 공방전[6]

장료의 명성을 드높여 준 전투가 바로 이 합비 전투다. 당시 남쪽의 손권은 유비의 서촉 정벌 이후 형주 남부의 장사, 계양, 영릉 3군 반환 문제로 마찰을 빚던 중 조조가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정벌한 소식과, 마침 합비 방면 장강 북쪽 군과 현의 백성을 내지로 이주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 참에 눈엣가시던 합비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10만의 군사를 동원했다.

한편 조조는 213년 유수구에서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온 뒤, 장료를 보내 악진, 이전 등과 함께 7천 여 명을 이끌고 합비에 주둔케 했다. 10만의 오나라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였다.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호군 설제에 교서를 주었는데 서신의 겉봉에는 적이 도착하면 뜯어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손권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자 함께 뜯어보았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손권이 오면 장료,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은 수비하고 호군(설제)은 싸움에 참여하지 마시오.
제장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하자 장료가 말했다.
공께서는 원정하느라 바깥에 계시므로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적군이 우리를 깨뜨릴 것이 분명하오. 이 교서의 뜻은, 적이 미처 집결하기 전에 요격해 그들의 예기를 꺾어 군심을 안정시켜야 지켜 낼 수 있다는 것이오.
용맹한 장료와 이전은 먼저 선봉을 꺾고 신중한 악진이 방비를 튼튼히 하는것에 이전 또한 장료와 의견이 같았다.

이전전에 따르면 악진, 이전, 장료는 평소에 서로를 싫어했는데[7], 장료는 이 상황에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개하였다.
성패의 기회는 이 한 판의 전투에 달렸소. 여러분들이 만약 의심한다면 나 장료 혼자서 군대를 거느리고 결판을 낼 것이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이전도 맘을 달리 먹었다.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 당신의 계책이 옳은지 틀린지를 볼 뿐이지, 내가 어떻게 사사로운 원한으로 공의를 돌아보지 않겠소! 청컨대 그대를 따라서 나갈 것이외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접은 이전을 보고 악진도 진심으로 뜻을 동참하기로 선언했다. 이에 장료는 밤중에 용맹히 뒤따를 군사들 8백 명을 뽑고 소를 잡아 장사(將士)들에게 먹였다. 그 다음날 큰 전투가 있었다.

새벽 녘 동틀 무렵, 장료는 갑옷을 입고 극을 들고 선두에 서서 적진을 함몰시켰다. 수십 명을 죽이고 2명의 장수를 베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보루를 뚫고 들어가 손권의 대장기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손권은 크게 놀랐고 주위의 사람들은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손권은 달아나 높은 무덤 위로 올라갔고 장극(長戟)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장료가 손권을 욕하며 내려와 싸우자고 했으나 손권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장료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사들을 모아 장료를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장료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급히 공격해 포위를 뚫었다. 휘하의 수십 명을 이끌고 포위를 벗어나자 뒤에 남은 군사들이 외쳤다.
장군은 우리를 버리십니까!
장료는 다시 포위망 안으로 돌입해 남은 군사들을 구했다. 손권의 병사와 말들은 모두 초목이 바람에 휩쓸리듯 무너져 내려 그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새벽부터 낮까지 계속된 싸움으로 오인(吳人)들의 예기를 꺾었고 합비로 돌아가 수비를 강화하자 군심이 안정되고 제장들은 모두 탄복했다.

손권은 합비를 10여 일 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장료는 제군을 이끌고 이를 추격해 또 다시 손권을 거의 사로잡을 뻔 하기도 했다.

<감녕전>에 따르면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 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虎士) 1천여 명과 여몽, 장흠, 능통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 북쪽에 있었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 능통 등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 질렀다. 그는 웅장하고 강인했다.

<반장전>에 따르면 합비 싸움에서 장료가 급습했을 때, 장수들은 무방비 상태였고, 진무는 분투하다 죽었으며, 송겸이나 서성은 모두 후퇴하였다. 반장은 후방에 있었지만,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말을 비껴 송겸과 서성의 병사들 중 달아나는 두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돌아와서 싸웠다.

<하제전>에 따르면 당시 성 안에서 나온 적병과 전쟁하는 중에 서성이 부상을 입어 창을 잃게 되자, 하제가 병사를 이끌고 대항하여 서성이 잃었던 것을 찾았다.

<능통전>에 따르면 손권이 선두의 병력의 뒤쫓아 가 되돌리려 했으나, 병력이 이미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사세가 서로 미치지 못하였는데, 능통이 친근히 대우하던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를 무너뜨리며 손권을 붙잡고 지켜 내며 탈출하였다. 적들이 이미 다리를 무너뜨렸지만, 다리에 속한 양쪽 판은 그대로 있으니, 손권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고, 능통은 다시 돌아서 싸우니, 주위 병사들은 거의 다 죽었고 자신 또한 상처를 입었지만, 수십 인을 죽였다.

<오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진교(津橋)에서 준마에 탄 채 있었는데, 진교 남쪽은 이미 철거되어 한 길 남짓 널빤지가 없었다. 곡리가 말 뒤에 있다가 손권에게 안장을 꼭 잡고 고삐를 늦춰 잡게 한 다음, 채찍으로 말이 뛰는 것을 도와 드디어 진교를 건너뛰게 했다.

<하제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하제는 이대 병사 3천 명을 인솔하여 소요진 남쪽에서 손권을 맞이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오나라 장수들의 용맹함이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중앙에서 군대를 통솔하고 지휘해야할 최고위 장수진들이 모두 일개 병사처럼 직접 무기를 쥐고 처절하게 싸울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는 것이다.

<능통전>에 따르면 능통은 손권이 이제는 화를 면했을 거라 생각하여 이내 돌아왔다. 다리는 무너지고 길은 끊겨 능통은 갑옷을 입은 채로 자맥질하며 왔다. 손권이 이미 배에 올랐는데, 그를 보고 놀라 기뻐했다. 하지만 능통은 친근히 대우하던 병사들 중 돌아온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애통해했다.

<오주전> 주석 《 헌제춘추》에 따르면 장료가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항복한 장수가 말했다.당황한 장료와 악진은 서로 쳐다보다가 말할 새도 없이 뛰쳐나가 다시 추격했지만 결국 이것으로 만족해야 했다.[8]

여하튼 조조는 장료를 매우 장하게 여기고 정동장군에 임명했다.

당나라 시대의 아동용 교재 몽구(蒙求)에 따르면 장료의 무용은 강동에도 널리 퍼졌으며, 강동에선 거의 망태기 할아버지 취급을 받았는지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다가도 료래료래(遼來遼來)라 말하면 반드시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장료를 합비성 방어 총책임자로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건안 11년(206년)에 조조가 천자에게 표문을 올린것을 보면 '조조가 악진, 우금, 장료를 칭찬했다. 우금을 호위장군, 악진을 절충장군, 장료를 탕구장군으로 승진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셋 다 잡호장군으로 동렬인데 단, 조조가 표문에 이름을 적은 순서대로 조조 진영 내부에선 확실하게 서열이 갈린다.

우금은 오자양장 장악우장서 중 가장 먼저 사방장군 중 하나인 좌장군으로 승진했고 7군 수몰 사건이 있기 전까진 조조의 직통 라인에선 조씨와 하후씨 그리고 조엄을 비롯한 극소수의 장군을 제외하곤 부동의 서열 1위였다. 장패 손관이 우금보다 관직과 서열이 높긴 했는데 이들은 이 전후 시점에선 조조의 부하가 아니라 휘하 군벌이라 조조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다. 같은 잡호장군이라도 장료는 우금에게 비벼볼 위치가 아니었다. 관건은 악진인데 악진이 장료보다 서열에선 앞서긴 하는데 우금 정도의 차이는 아니다.

정리하면 우금이 넘사벽이고 악진, 장료, 이전 순이 된다. 장료가 이전보단 약간 끗발이 있었고 악진에겐 좀 밀렸다. 215년 합비 전투가 벌어졌을 때 굳이 책임자를 하나 찝으라면 조조가 서열을 좀 더 높게 봐준 악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근데 실제 상황은 장료가 주도권을 쥐고 이전을 부장으로 삼는 형태로 손권을 대파했다. 장료는 관직은 동렬이지만 자신보다 군부 내 서열이 높은 악진을 자신의 초인적인 무력으로 오히려 아래로 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각종 기록에서 보이는 조조군 내부 서열은 분명 악진이 위이다. 악진을 필두로 3명의 장수가 공동지휘하는 체계였다. 조조가 기대한 건 훈령에서 보이는 대로 악진의 견고한 방어, 장료의 날카로운 공격, 이전의 적절한 지원이라는 완벽한 삼박자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상황을 주도한 건 장료였다.[9]

2.10. 조조 휘하

<온회전>에 따르면 조조는 합비에 주둔하고 있는 장료와 악진 등에게 말했다.
양주자사( 온회)는 군사적인 일에는 통달하였으니, 모두 그와 함께 상의하여 행동하시오.

<호질전>에 따르면 장군 장료는 그의 호군 무주(武周)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장료는 자사 온회를 보고 호질을 청하여 구했지만, 호질은 병을 들어 사양했다. 장료는 나가서 호질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마음을 의탁하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무고한가요?
호질이 대답했다.
무백남( 무주)는 바른 인물로 과거에 장군이 그를 칭찬함이 끊임이 없었으나, 지금은 서로 싫어하고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저는 재능이 적은데, 어떻게 좋은 관계를 끝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장료는 그의 말에 감동되어 또다시 무주와 친하게 되었다.

2.11.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216년, 조조가 다시 손권을 정벌하는 길에 합비에 도착했는데, 장료가 싸운 곳을 순행하며 실로 오랫동안 탄식했다.

<장패전>에 따르면 장패는 조조를 좇아 손권을 유수구에서 정벌할 때, 장료와 더불어 선봉이 되었으나, 도중에 큰 비를 만났는데, 손권의 대군이 먼저 도착하고 수위가 높아져 적의 배가 점차 전진해왔으므로 장사는 모두 불안에 떨었다. 장료는 철퇴할까 생각하였는데, 장패가 이를 막으며 말하였다.
공께서는 유리함과 불리함을 따지는 일에 밝으십니다. 우리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습니까?
다음 날, 과연 철퇴 명령이 내렸다. 장료는 귀환하자 장패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였다. 조조는 이에 감동하며 장패에게 양위장군의 관직을 내리고 가절로 삼았다. 이후 손권이 항복을 간청하였으므로, 조조는 귀환하여 장패와 하후돈 등에게 수비를 맡겨 거소에 주둔케 했다.

이에 장료의 군사를 늘려주고 제군을 남겨 거소로 옮겨 주둔케 했다.

2.12. 번성 공방전

219년, 관우가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했고 10월에 때마침 손권이 스스로 번국으로 칭했으므로 조조는 장료와 그에게 남겼던 제군을 불러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장료가 미처 도착하기 전, 서황이 이미 관우를 격파해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장료는 돌아가지 않고 조조가 주둔하던 마피에서 회합했다. 장료군이 도착하자 조조는 수레를 타고 나가 그 노고를 위로했다. 되돌아가 예주 진군에 주둔했다.

2.13. 조비 휘하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전장군으로 전임했다.

《위서》에 따르면 왕(조비)은 장료에게 비단 1천 필과 곡식 1만 곡을 하사했다.

봉지를 나누어 장료의 형인 장범(張汎)과 아들 한 명을 열후에 봉했다.

손권이 다시 모반하자 장료를 합비에 주둔하게 하고 도향후로 올려 봉했다. 장료의 모친에게 수레와 병마를 보내 장료의 가족이 장료의 주둔지로 가는 것을 전송하게 하는 한편, 모친이 도착할 때 수행원들을 이끌고 영접하도록 명했다. 장료가 이끌던 제군의 장수와 관원들이 모두 도로변에 늘어서서 장료의 모친에게 배례했는데, 지켜보는 자들이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조비는 황제가 되자 장료를 진양후에 봉하고, 식읍을 1,000 호 늘려 예전과 합해 모두 2,600호가 되었다.[10]
221년, 장료는 낙양궁에서 조비를 배알했는데, 조비는 장료를 건시전으로 불러 접견하고 오를 격파할 때의 상황에 관해 친히 물었다. 답변을 듣고난 후 조비는 탄식하며 좌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 사람이 또한 옛적의 소호(召虎)로구나.
장료를 위해 저택을 짓고 또한 특별히 장료의 모친을 위해 전각을 만들었으며, 장료를 수행해 오군을 격파한 보졸들을 모두 호분(虎賁)으로 삼았다.

손권이 다시 번국을 칭하자 장료는 연주 진류군 옹구현에 주둔했는데 병을 얻게 되었다. 조비는 시중 유엽을 보내 임금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하던 의원을 데리고 가 장료의 병증을 살펴보게 했는데, 그 소식을 전하는 호분(虎賁)들이 도로에 연이었다.

조비는 장료의 병이 낫지 않자 궁성 밖에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맞아 들이고 임금의 수레를 타고 친림해 장료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고, 임금의 옷을 하사하고, 음식을 담당하는 관원은 매일 임금의 음식을 보내도록 했다. 병이 다소 차도를 보이자 주둔지로 돌려보냈다.

2.14. 동구 전투

손권이 다시 모반하자, 조비는 남정했고, 장료를 보내 배를 타고 조휴와 함께 해릉에 이르러 장강 가에 주둔하도록 했다. 손권이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꺼리며 제장들에게 명했다.
장료가 비록 병들었다 하나 쉽게 대적할 수 없으니 신중히 대처하시오!

<여범전>에 따르면 조휴, 장료, 장패 등이 공격해오자, 여범 서성, 전종 등을 지휘해 수군으로 동구에서 조휴 등을 막았다.

<여범전>에 따르면 그 당시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고 사람들은 물에 빠졌는데, 익사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군대를 돌렸다.

그 해, 장료는 제장들과 더불어 손권의 장수 여범을 격파했다.

2.15. 죽음

222년, 장료는 병이 깊어져 마침내 강도에서 죽었다. 조비는 눈물을 흘렸고 시호를 내려 강후(剛侯)라 했다. 아들 장호가 후사를 이었다.

225년, 조비는 장료와 이전의 합비에서의 공을 추념하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합비 전투에서 장료와 이전은 보졸 8백으로 적군 10만을 깨뜨렸으니 예로부터 용병함에 있어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장료와 이전의 식읍 중 각각 1백 호를 떼어내 그들의 아들 한 명 씩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도록 하라.
장호는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장호가 죽자 그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장통(張統)이 후사를 이었다.

3. 삼국지연의

장료의 인물상은 고고하고 지혜로우며 의리를 아는 무인. 관우와 친우 관계로 나오는 게 특징이다.

연의에서는 정원, 하진, 동탁 휘하에 있을 때의 행적이 전부 생략되었고 처음부터 여포 휘하 팔건장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유비가 조조군을 기다리며 소패성에서 농성할 때, 장료가 쳐들어오자 관우가 설득해서 돌려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에 장비가 쫓아가서 치려고 하자 관우는 '저 자는 우리를 두려워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도의 때문에 돌아가는 거다. 저 자의 무력은 우리와 동급이다.'라고 만류한다.

여포가 패배한 후 조조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자 그깟 죽음이 뭐가 두렵냐고 여포를 꾸짖으면서 백문루에서 조조를 욕하다가[11] 사형에 처해질 뻔한 것을 유비와 관우가 변호하여 조조가 살려주고 예우하자 거기에 감복하여 조조군에 등용된다.

유비가 서주에서 패배했을 때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할 각오를 보이던 관우를 찾아가 지금 죽으면 안되는 세 가지 이유를 대며[12] 투항하도록 설득했다.[13]

문추가 장료와 서황을 피해 도망치던 도중 화살을 쏘았는데 장료의 말이 문추의 화살에 맞아 낙마, 그대로 문추에게 죽을 뻔했으나 서황이 구조하여 살아남았다. 그 다음 서황도 문추에게 패배하였으나 관우 문추를 죽였다.

관우가 조조에게서 떠나고 관우의 오관육참 도중, 관우와 싸우려는 하후돈을 말렸다.

정사에서 1차 합비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는데 연의에서는 이 전투의 진정한 공신인 장제를 빼버리고 장료, 악진, 이전이 활약하는 전투로 바뀌었다. 게다가 정사에서는 이미 풍토병으로 병사하고 없는 태사자의 계책을 역이용해 태사자를 전사시키는 지능적인 면모까지 부각시켰다.[14]

2차 합비 전투에선 이전과 악진을 지휘하는 중후한 지휘관으로 나온다. 원래는 이전이 먼저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화합했는데 연의에선 장료가 화합을 주장한다. 물론 장료가 행한건 명령이 아닌 권유이므로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접은 이전의 결심도 폄하되지 않도록 묘사된 명장면중 하나이다.

조조 사후 조비의 오나라 정벌 때 종군하였지만, 조비의 위기를 구하려다 정봉(丁奉)이 쏜 화살을 맞고 싸움이 끝난 후 상처가 깊어져 224년, 사망한다.[15]

무인은 싸움터에서 전사하는 걸 더 명예롭게 보던 시대였기 때문에 각색된 것.[16]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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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시 소요진 공원의 장료 동상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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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항목



[1] 굳이 따지면 169~171년 사이다. [2] 산서성 숴저우시 성관 일대 [3] 상존호주(上尊號奏)에 따르면 사지절(使持節) [4] 섭일은 한무제 흉노 선우를 속여 마읍으로 유인했던 인물로 흉노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성씨를 바꾼 것이다. [5] 대장의 신분으로 혼자 몸으로 적진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한 것을 질책한 것이다. [6] 다시 말하지만 아래에 기술된 장료의 비현실적인 전공은 극적 요소가 가미된 연의가 아닌 정사에 기술된 내용이다. [7] 흔히 이전의 숙부 이건을 장료가 죽여서 이전이 그를 싫어했고 악진은 둘 사이에 덤터기로 낀 처지로 나오나 이는 후대의 창작이다. 정사상으로 이건은 장료가 아닌 설란 이봉의 통수로 죽었고 이전이 장료를 싫어했던건 과거 여포의 동맹이었던 그와 한솥밥을 먹어야하는 처지가 된 걸 못마땅하게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악진의 경우도 본래 악진은 조조와 함께 초창기부터 활약한 거병동기인데 자신이 직접 격퇴시킨 전적도 있는 장수를 상관으로 모셔야하고 주변 분위기도 장료를 떠받드는 걸 아니꼽게 여겨서 싫어했을 가능성이 크다. [8] 이 부분 때문에 장료에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장료가 만나본 적도 없는 손권의 얼굴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을 테고, 설마 군의 지휘관이 퇴각하는 군대 후위에 남아서 직접 추격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겠냐고 여겼을 것이다. [9] 즉, 악진은 성에서 수성을 하고 장료는 외부에서 진을 쳐 상대를 받아들이며 이전은 그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각군을 지원하는 형세. 상대가 합비성을 공격하면 장료가 상대의 옆구리를 치고 상대가 장료를 치면 이전이 구원하는 그림으로 망치와 모루 전술의 일종이나 장료는 이를 이전과 함께 나가 싸우는 것으로 해석했고, 소수의 군사로 손권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것도 궤멸적으로. [10] 위군 장수들의 식읍순위로 돌아다니는 것이 있고, 이것으로 장수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ex. 삼국전투기 작가 최훈) 그래서 상대적으로 식읍순위가 최상위가 아닌 장료는 대우를 그렇게까지 좋게 받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기준이다. 왜냐하면 이 식읍순위는 최종식읍이다. 따라서 정확한 비교가 힘들다. 식읍으로 장수의 공적이나 역량을 정확히 비교하려면, 오히려 당대식읍을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운동선수의 역량을 비교할 때도 통산기록보다는 시즌별 또는 대회별 기록으로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217년을 기준으로 식읍서열을 정리하면, 하후돈(2500호) 바로 다음(1600호)이다. 참고로 장료 다음이 조인(1500호). 이러한 기준이면 오히려 장료는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밑에 나오는 임금의 옷을 하사하고 손을 마주잡고 임금의 음식을 먹이고 임금의 궁 옆에 두었단 것부터가 엄청난 대우다. 전근대 전제국가에서 일국의 지배자이자 지존인 황제가, 그것도 대의명분과 황제의 위엄이 중요시되던 유교가 대중적이던 시절에 일개 신하에게 이런 대우를 한단 것부터가 대단한 것이다. 물론 조비는 자신에 감정에 솔직하고 깊이가 없기 때문에 위엄은 신경 안 쓰고 그랬을 수도 있지만. [11] 여포에 대한 충성심 혹은 조조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앞서 3명이 처형당한 상황에서 자신도 죽으리라 생각하여 여포처럼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것처럼 묘사된다. [12] 도원결의를 통해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어기는 것이 첫째, 주군의 처를 데리고 있는데 죽으면 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음이 둘째, 대의를 위해 일어났다면서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지 않겠느냐가 셋째다. [13] 이에 관우 역시 세가지 조건으로 투항하는데 1) 자신은 조조가 아닌 한나라 조정에 투항하는 것, 2) 감부인과 미부인의 안전을 보장할 것, 그리고 3) 유비의 행방을 알면 떠나겠다는 것을 요구했다. 먼저 첫번째야 자기가 한나라 조정의 실세이니 무리 없이 받아들였고, 두번째도 본인도 굳이 유비의 처를 해치는 식의 간악무도한 짓을 벌일 생각까지 없었으니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아무리 그런 조조라도 세번째 조건은 좀 마음에 걸렸는지 장료에게 '첫번째와 두번째는 그렇다 쳐도 세번째는 좀 그렇지 않냐. 만약 정말로 관우가 훌렁 떠나버리면 나만 죽 쒀서 개주는 꼴이 아닌가.'라며 투덜댔지만, 장료가 관우를 데리고 있는 동안 잘 대우해주면 진심으로 전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간언하자 결국에는 역시 수용했다. 판본에 따라선 세번째 조건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애초에 관우에게 홀딱 빠져 있던(...) 조조였는지라 장료의 대답에 그 말이 맞다고 인정하며 바로 받아준 것으로도 나온다. [14] 태사자는 정사에서 그냥 풍토병으로 병사했는데 더 활약할 무대를 만들어 주었으니 태사자의 폄하까지는 아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게 장료의 계책에 완전 놀아난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5] 정사에서는 222년 병사한다. [16]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인이 전장에서 죽는 건 매우 명예롭게 생각했다. 심지어는 전장이 아닌 사형을 당할 때조차 검이나 총같은 전장을 상징하는 무기로 죽기를 원한 군인에 대한 기록은 21세기에도 등장한다. 반대로 그렇기에 모욕적으로 죽이고 싶으면 총살형 같은 게 아니라 교수형으로 처형하였고 실제로도 2차대전 나치 전범들 중 사형당한 이들은 소련측의 반대로 총살형을 원했음에도 교수형을 당했다. 다만 전사라고 무조건 명예롭게 여기진 않은 듯하고, 개죽음이거나 급이 안 맞는 격하의 상대에게 허무하게 죽는 것은 오히려 너프로 친다. 예로 정사에서 병사한 서황은 연의에서는 맹달과 싸우다가 유시에 맞아 죽는데, 나관중이 관우를 죽게 만든 장수들의 최후를 하나같이 비참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서황 역시도 불명예 죽음 처리하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아니 무슨 서황이 맹달한테'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사항이기도 하고. [17] 張遼를 일본 독음으로 발음하면 ちょう りょう(쵸-료-)이다. '오', '요' 발음 뒤에 오는 'う(우)' 발음은 앞 글자의 장음처리가 되므로 '오' 발음이 된다. [18] 여담이지만 '장료'라는 이름의 상고한어음을 복원하면 트량 (츠)레우(trjang c-rew), 탕 레우(tang reew), (클)랑 (그)레우(k-lang 'g'reew)에 가깝다고 한다. [19] 사장 지시 받고 출장갔다 오니 사장은 물론 윗사람이 전부 갈려 있는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