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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6:48:39

여몽


의 군권 1인자
주유 →  노숙 →  여몽 →  육손 →  주연 →  제갈각 →  손준 →  손침 →  주적 →  정봉 →  육항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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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蒙
여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Lu_Meng.jpg
작위 잔릉후(孱陵侯)
최종직위 도독(都督) 겸 남군태수(南郡太守)
성씨 (呂)
이름 (蒙)
자명(子明)
생몰기간 178년 ~ 219년
고향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부피현(富陂縣)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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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손책, 손권 휘하의 무장. 는 자명(子明). 예주 여남군 부피현 사람. 손오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관우를 패망시킨 인물로 특히 유명하다.

2. 생애

2.1. 오하아몽

어린 시절 남쪽으로 강을 건너 자형인 등당에게 의지했다. 등당은 손책의 부하 장수가 되어 수차례 산적을 토벌했다. 여몽이 15~16세에 등당을 몰래 따라가 도적을 공격하니 여몽의 존재를 알아챈 등당은 꾸짖었으나 여몽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등당은 집에 돌아가서 여몽의 어머니에게 그것을 알렸다. 여몽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여몽을 벌주려고 했는데 여몽이 말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에는 머물 수 없고, 잘못을 벗겨내 공을 세우면 부귀가 오게 될 것입니다. 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습니까?
여몽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론한 것인데, 여몽의 어머니는 애달프게 여겨 용서해주었다.

이때 등당의 관리가 여몽의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며 말했다.
저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기를 호랑이에게 먹여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날, 이 사람이 여몽과 만났는데 또 모욕을 주니 화난 여몽은 칼로 그를 죽이고 달아나 동향인 정장(鄭長)의 집으로 도망쳤다. 후에 교위 원웅에게 자수했는데 원웅이 여몽을 위해 변론해주었다. 이 사건을 들은 손책은 여몽을 불러 보고 그의 비범함을 기이하게 여겨 측근으로 삼았다.

몇 년 뒤에 등당이 죽자 장소의 천거로 여몽이 등당을 대신하게 하여 별부사마에 임명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고 그의 동생인 손권이 뒤를 이었다. 곧 손권은 군단의 통폐합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여몽은 외상까지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병사들에게 진홍색 옷과 행전을 구비해주고 열병식에 임했다. 손권은 여몽 군단의 훌륭함과 잘 훈련된 것에 기뻐해 여몽 군단의 병사를 늘리게 했다. 이후 단양을 토벌하는데 종군하여 가는 곳마다 공적을 세워 평북도위가 되었고 광덕현의 장(長)에 취임했다.

208년, 황조와 벌이는 전투에서 여몽은 선봉을 맡았는데, 황조가 수군을 이끌라고 출진시킨 도독 진취를 직접 목을 베었다. 장수와 병사들이 승세를 타고 그 성을 진공해 들어갔고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병사들이 추격해 사로잡았다. 손권은 이번 일의 승리는 여몽이 진취를 죽인 공적 덕분이라고 하며 여몽을 횡야중랑장으로 삼고 돈 천만을 내렸다.

이렇게 크고 적은 공을 많이 세웠으나 16살 때부터 싸움질 밖에 한 게 없는지라 학식이 부족하여 상소를 할 때 글이 아닌 말로 할 정도로 지식이 부족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과 장흠에게 그대들은 큰 임무로 새 임지로 떠나니 공부 좀 해서 견식을 넓히라고 말했다. 여몽은 '문관이나 공부하지 싸우는 무관인 내가 왜 공부함?'이라고 생각하여 부대의 일이 바빠 공부할 여유가 없다고 답했다. 손권은 "내가 자네들 보고 박사가 되라는 것이겠냐? 단지 과거의 것을 많이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나는 어렸을 때 주역을 제외하고 시경, 서경, 예기, 춘추좌씨전 등을 다 읽어봤으며 형님의 위업을 이어 군주가 돼서 너보다 바쁘지만, 군주가 된 뒤에도 삼사와 병서를 정독한다." 하면서 나도 하는 공부를 왜 하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손권이 "여몽과 장흠 자네들은 군사들을 이끌거나 무예를 익힐 때 순발력과 판단력과 재치가 좋으니, 공부만 한다면 금방 늘 것이다."라고 의욕을 붙돋아주었다. 그리고 손수 옛 위인들의 독서 습관까지 알려줬다. 여몽은 손권의 권유에 깨달음을 얻고 주위 사람들 중 누구도 여몽에게 학문으로 이길 수 없는 수준까지 공부에 힘썼다.

2.2. 남군 공방전

적벽대전 이후 주유군과 유비군은 남군(강릉)에서 조조군의 조인을 포위했다. 이때 익주 습숙이라고 하는 인물이 병사를 이끌고 투항해 왔다. 주유는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려고 했으나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만하다고 칭찬하고 오나라를 사모해 먼 나라에서 귀화해 온 것을 평가해 의리상 오히려 병사를 늘렸으면 늘렸지 빼앗으면 안된다고 했다. 손권은 이를 칭찬하며 습숙에게 병사를 돌려 주었다.

주유는 감녕에게 명령해 따로 이릉을 점거하게 했는데 조인이 군을 나눠 이릉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감녕은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한다. 모두 병사가 적어 군대를 둘로 나누어 구원하기엔 어렵다고 주장하나 여몽만은 주유와 정보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주유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이릉으로 향해 그 날 전투로 적의 절반 이상을 죽이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도주하던 적은 땔나무에 막힌 길과 조우하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고 아군은 말 300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아군은 기세를 얻어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싸워 조인을 남군에서 퇴각하게 만들었다. 손권군이 남군을 점거하자 여몽은 편장군과 심양현령에 임명되었다.

2.3. 괄목상대

주유가 죽고 노숙이 주유를 대신하게 되어 육구로 가던 길에 여몽의 군영 아래을 지나가게 되었다. 노숙은 평소 여몽을 얕보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여몽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니 만나보라고 하여 만나서 술을 마셨다. 노숙은 여몽과 이야기를 하다가 달라진 여몽의 식견에 '옛날 오나라에 있을 무렵의 어린 여몽이 아니다.(非復吳下阿蒙)'라며 놀라워했고 여몽은 '선비와 헤어지고 3일이 지나면(士別三日) 곧 다시 눈을 비비고 상대해야 한다.(卽更刮目相待)'라고 답했다. 이것이 고사성어의 유래로 오하아몽(吳下阿蒙)은 학식의 진보가 없음을 뜻하게 되고 괄목상대(刮目相待)는 크게 학식이 진보함을 뜻하게 되었다.

술에 취하자 여몽이 노숙에게 노숙이 인접하게 된 관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고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이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고는 관우를 상대할 대책을 묻는다. 노숙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답한다. 여몽이 말했다.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이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노숙을 위해 서너 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그것을 경청한 노숙은 비밀로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 그의 발전한 식견에 감탄한 노숙은 여몽의 모친에게 절하고[1] 우의를 맺은 다음 헤어진다.

손권은 항상 학문에 힘쓴 무장으로서 여몽과 장흠을 예로 들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차피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향상해 가는 것이지만, 여몽, 장흠 정도로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2.4. 손오의 명장

여몽은 성당, 송정, 서고라고 하는 자들과 주둔지가 가까웠는데 이 세 사람이 죽고 그들의 자제가 유약해서 손권은 그들의 병사를 여몽의 군단에 편입하려고 했다. 여몽은 손권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서고 등이 모두 나랏일을 부지런히 애썼는데, 자제들이 어리다고 폐할 수 없다고 하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들어주었고 세 사람의 자제에게 스승을 붙여주었다.

조조는 조국의 사기(謝奇)를 기춘의 전농(典農)에 임명했고 환현(환성)의 들판에서 둔전을 행하려고 했다. 그 둔전병이 손권의 영토에서 수차례 약탈을 행하자 여몽은 그들에게 귀순을 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틈을 노려 습격했다. 적군은 사기가 떨어져 퇴각하니 그 부하인 손자재(孫子才), 송호(宋豪)는 노약자를 업고 여몽에게 가서 항복했다.

그 후 212년 ~ 213년 유수구 전투에서 조조와 손권이 장강을 끼고 싸우자 여몽은 수차례 뛰어난 계책을 내었다. 오록에 따르면 손권이 보루를 만들려고 하자 부장들이 말했다.
해안 위로 올라가 적을 공격하고 나서 물을 건너 배로 들어오면 되는데, 보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몽은 손권에게 강물 입구를 끼고 둑을 세우라고 권했다.
같은 병기에도 날카로운 것과 둔탁한 것이 있으며, 싸움에 있어서도 백 번 이기지는 못합니다. 만일 만에 하나 적의 보병과 기병이 육박하여 와서 물가까지 퇴각할 틈이 없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배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손권이 그렇다고 그것을 만드니 이 보루가 바로 유수오다. 방비가 철저하니 조조는 퇴각했다.

조조가 여강 태수 주광을 보내 환성에 주둔하며 농지를 개간하고 첩차를 시켜 파양의 도적 무리를 회유하여 내통하게 하려고 했다. 여몽은 환성의 토지가 비옥해 몇 년 정도 지나면 군세도 증강되어 손을 쓰지 못할 것을 걱정해 지금 멸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손권은 이것을 받아들여 214년 5월에 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진했다. 손권은 제장을 모아 계략을 묻자 여몽은 감녕을 승성독으로 추천해 감녕을 선봉으로 삼고 조민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 공격한다고 하는 작전을 세웠다.

오서에 따르면 이때 다른 제장들[2]에게서 공성을 위해 토산을 만들고 병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 신중론이 나왔다. 여몽은 그러면 시간이 흘러 적이 성의 방비를 갖추고 외부에서 원군이 올 것이라며 적이 준비가 부족할 때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것을 물리쳤다. 또한 빗물을 이용해 들어가도 만약 지체되어 시간이 지나면 물이 말라서 귀환하는 길에서 고생하리라고 보았다.

새벽에 진군하는데 여몽이 스스로 큰 북을 쳐 병졸들을 고무했고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도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솔선수범하니 사병들이 모두 펄펄 뛰었고 밥 먹을 때 쯤 적을 격파했다. 여몽 건은 애초에 성 하나를 목적으로 새벽에 적군이 방심하는 사이 기습적으로 침공해 성을 딴 것이라고 봐야겠다. 원래 손자병법에도 공성전에는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이 필요하고 공성전에선 공자 측이 3배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기도 하니까.

이때 조조의 원군으로 장료가 협석(夾石)까지 왔는데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퇴각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태수인 주광을 사로잡았고 수만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은 전과를 올렸다. 여몽은 이 공적에 의해 여강태수에 임명되었고 노획한 인마, 심양의 둔전민 6백 명과 관속 3백 명이 내려졌다.

여몽은 심양으로 돌아왔는데 1년 후에 여릉에서 반란이 발발했다. 여러 장수들이 공격했으나 누구도 토벌하지 못하자 손권이 말했다.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물수리 한 마리만 못하구나.
손권이 여몽에게 토벌을 명하자 반란을 진압한 여몽은 우두머리만을 주살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해방해 평민으로 돌아가게 했다.

2.5. 익양대치

215년, 유장 익주까지 얻은 유비가 손권의 형주 반납 요청을 거절하자, 손권은 여몽에게 선우단, 손규, 서충과 병사 2만 명을 주어 장사, 영릉, 계양 3군 공격을 명했다. 여대, 손무(孫茂) 등 장수 10명이 포함된 인원이었다. 여몽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세 군에 귀부하라고 편지를 보내니 장사 태수 요립은 도망쳤고 장사 계양은 바로 항복했다. 단 영릉 태수 학보만은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장사군에 속한 안성현, 유현, 영신현, 다릉현의 관리가 음산성으로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이들은 여대에게 즉시 격파되었으며 여대는 남아서 장사를 지켰다.

처음 여몽이 장사를 평정하고 마침 영릉으로 가는 길에 영현을 지나면서 학보의 옛 친구 등현지를 수레에 태워 주었는데 여몽은 그를 이용해 학보를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비가 공안까지 와서 관우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손권은 여몽에게 영릉을 포기하고 귀환하여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하고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손권에게 돌아오라는 전갈을 일단 비밀로 하면서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일러주었다. 새벽이 되자 성을 공격하는데 여몽은 등현지에게 거짓말을 전하게 했다. 등현지가 이 거짓말을 학보에게 전하자 겁을 먹은 학보는 여몽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 등현지가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자 여몽은 곧바로 네 장수에게 병사 백 명을 주고 학보가 나오면 성문을 점거하도록 명령했다.

잠시 후 학보가 나오자 여몽은 환영하며 그의 손을 잡고서는 함께 배에서 내렸다. 말이 끝나자 여몽은 지금 유비와 관우가 쳐들어오니 영릉의 학보는 내버려두고 빨리 되돌아와 익양에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손권의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선 손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학보는 그 편지를 보고 여몽이 전한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자 부끄러워 땅 속에 숨고 싶어 했다. 여몽은 손교를 남겨 영릉을 맡기고 그날로 군대를 이끌고 익양으로 갔다. 이로서 여몽은 최초에 지시받은 영릉, 장사, 계양의 공략을 완료하였다.

관우와 노숙의 회담 이후 장로의 한중을 조조가 점령하자, 급박해진 유비는 결국 형주를 분할하고 화친을 맺었다. 유비가 동맹을 청하니 손권이 학보도 영릉과 함께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게 했다. 여몽은 이 공으로 심양과 양신을 봉읍으로 획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학보 관련 일화는 아예 사라져서 그냥 관리를 보냈는데 관우에 의해 거부당하자 손권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니 제갈량이 "저들이 합비를 공격하는 대신에 세 현을 주죠." 하여 넘겨졌다고 바뀌었다.

2.6. 능력 위주의 인사 기용

같은 해인 215년 손권은 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여 2차 합비 공방전이 발발한다. 불과 7천의 방어군에 의해 초전에 체면을 구긴 손권이 퇴각함으로서 원정은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퇴각하는 군대의 후진에 군악대와 남았던 손권은 장료에 의해 추격당했는데, 여몽과 능통이 죽을 힘으로 막아냈다.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유슈로 진출해 장료를 선봉으로서 손권군을 공격했다. 손권은 여몽을 독에 임명해 이전에 건설해둔 제방 유수오를 먼저 점거하고 그 위에 강노 1만 대를 배치해 대항했다. 조조군의 선봉 부대가 진채를 세우기도 전에 여몽이 이를 공격해 격파했고 조조는 퇴각했다. 여몽은 호위장군, 좌호군이 되었다.

<감녕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아버지 능조의 원수를 갚겠다고 칼춤을 추는 능통과 그에 대항하여 쌍극무를 추는 감녕의 사이에서 칼과 방패를 들고 둘의 싸움을 말린 일도 있었다.

항상 부곡(部曲)에 대해서 강하태수 채유는 여몽의 잘못을 고자질했는데 여몽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후에 예장 태수 고소(顧邵)[3]가 죽자 손권이 후임으로 쓸 만한 자를 물었더니 여몽이 직무에 열심히라는 것을 이유로 채유를 추천했다. 그의 인성에 감탄한 손권은 웃으며 여몽을 기해(祁奚)[4]에 비유하고서 채유를 등용한다.

감녕은 난폭하고 살생을 좋아해서 여몽의 신임을 잃고, 때때로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해서 손권이 분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몽은 번번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감녕같은 얻기 힘든 장수는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고 청하여 손권이 감녕을 후히 대하도록 했다.

2.7. 번성 공방전

노숙 조조가 살아있으니 촉과 오는 서로 도우며 원수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몽은 노숙과 다르게 촉에게는 강경한 입장으로 형주에서 땅을 나눠 접한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 데다 오를 공격할 것 같고 나라의 상류에 있어서 형세가 오래가기 어렵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여몽은 양주 북부와 서주를 둘러싸고 조조와 싸우고 있는 중인 손권에게 몰래 계책을 말했다.
정로장군( 손교)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5], 장흠은 유격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면 됩니다.

손권은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였지만 얼마 후 여몽과 또 서주를 공격할 것을 의논했다. (...) 얘기를 콧구멍으로 들었나 여몽은 조조는 원가를 격파해 북방에 있어서[6] 동오를 신경쓸 겨를이 없고 서주가 수비병이 부족해 일단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합비를 넘어 서주로 진출해도 이 지역은 여러면에서 공격을 받기 쉬운 평지이며 기병의 땅이라 7-8만을 주둔시켜도 근심하게 될 것이라며 남쪽 병사에겐 익숙한 곳이 아니니 포기하고 차라리 유비의 형주를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여몽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7]

<엄준전>에 따르면 217년 노숙이 죽자 처음에 후임 예정이었던 엄준이 사퇴해서 여몽은 노숙의 후임으로서 그의 뒤를 이어 육구에 주둔한다. 노숙의 군대 인마 1만여 명이 모두 여몽에게 속하게 되었고 한창태수가 되고 하준(下雋), 유양(劉陽), 한창(漢昌), 주릉(州陵)이 식읍으로 주어졌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 4현은 원래 주유의 봉읍으로, 주유가 죽은 후 노숙에게 속했고, 노숙이 죽은 후 여몽에게 속하게 된 것이다. 여몽은 처음으로 육구에 갔을 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만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오록》에 따르면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많은 군사기물을 태우고 관우가 미방을 질책했던 적이 있었다. 미방은 내심 두려움을 품었다. 219년 관우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면서 동오를 경계하여 공안 남군에 병사를 남겨 수비하도록 했다. 손권은 위나라로 사자를 보내 비밀동맹을 맺었다.

<관우전>에 따르면 남군 태수 미방 강릉에 있고 장군 사인(부사인)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후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관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마땅히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들을 꾀어내자 미방은 몰래 사람을 시켜 손권과 내통했다.

여몽은 상소를 올려 관우가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자신의 뒤통수 치기를 경계하는 것이니 늘 병이 있는 자신이 병 치료를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그리하여 관우가 이를 들으면 수비병을 양양으로 철수시킬 것이라 예상했다. 손권은 여몽을 소환한다는 격문을 공개하고 몰래 같이 계획을 도모했다. 관우는 여몽의 계책에 속아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오범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과 함께 관우를 습격할 일을 미리 모의하고, 신임하는 가까운 신하들과 상의하였는데,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에 관해 오범에게 질문을 하였다. 오범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관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시의전>에 따르면 여몽이 관우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손권은 시의에게 의견을 물었다. 시의는 여몽의 계획을 칭찬하고 손권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

<전종전>에 따르면 219년, 유비의 장수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자, 전종은 상소를 올려 관우를 토벌할 수 있는 계획을 진술했다. 손권은 당시 벌써 여몽과 관우를 습격할 일을 은밀히 의논하고 있었으므로 일이 누설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전종의 표를 받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육손전>에 따르면 여몽은 병이라 칭하고 건업으로 돌아온다. 방문한 육손이 관우와 국경을 접하고서 걱정해야 하는데 왜 내려왔냐고 따지자 여몽은 육손의 말이 옳지만 자신의 병이 심해서 돌아왔다고 답한다. 육손은 갑자기 관우를 까댄다.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관우는 시작하자마자 큰 공을 세워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손은 여몽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하면 관우는 더욱 방비를 게을리하리라고 계책을 내었다. 여몽이 답했다.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여몽이 손권에게 도착하자 손권이 누가 여몽 그대를 대신할 수 있냐고 묻자 여몽은 육손이 뛰어난 인재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 관우가 방심할 것이라며 육손을 추천한다. 손권은 곧 육손을 불러 편장군 우부독으로 임명하고 여몽을 대신하도록 했다. 육손이 육구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그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관우는 우쭐해져서 오를 경계하고 방비하기를 게을리하였다.

조조는 우금, 방덕 등으로 하여금 번성의 조인을 구원하게 했으나 마침 내린 비 때문에 관우에게 패하여 방덕은 참수되고 우금은 항복했다. 관우는 3만에 이르는 우금의 포로 병사와 말 때문에 군량이 부족해져 손권군의 영역권 안에 있는 상관 지역의 곡식을 맘대로 강탈했다. 이를 듣고 명분이 생긴 손권은 마침내 형주 공격을 실행하기로 하고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손교전>에 따르면 여몽이 남군을 습격하려고 할 때 손권은 손교를 여몽과 함께 좌우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몽이 강릉을 공격할 때 주유와 정보가 서로 좌우독으로 임명되어 생겼던 어려움을 생각해보라고 하자, 손교는 후속 부대로 임명되어 종군하게 된다. 군의 전권을 맡은 여몽은 육손, 장흠과 함께 형주를 공격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이 때 여몽은 우번이 의술에도 두루 정통하다는 이유로서 우번도 자신을 따르도록 할 것을 요청했는데, 사실 이를 핑계로 좌천된 우번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여몽은 심양까지 왔을 때 관우가 설치한 관측소의 감시를 경계하여 장병들은 배 안에 숨기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모습을 하게 하고 노를 젓게 했다.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도착하자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관우 등은 여몽의 진군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서》에 따르면 공안(公安)의 장군 사인이 막아 지키니 여몽이 우번에게 명하여 그를 설득하게 했다. 우번이 성문에 도착하고 수비병에게 "나는 너희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라고 했으나 사인이 서로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우번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서신을 읽어본 사인이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 우번이 여몽에게 이는 기만일 수도 있으니 사인을 데리고 가도록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하라고 말했다.

여몽은 우번의 말에 따라 사인을 데리고 남군으로 갔는데 남군태수 미방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몽이 사인을 그에게 보여주자 미방은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여몽은 아직 군의 성을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성 밖의 광장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우번이 여몽에게 말했다.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 뿐입니다. 성 안의 사람들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습니까?
진짜 성 내부에서 어떤 자가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여몽이 우번의 진언을 듣고 관악을 장악한 탓에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여몽이 점령지에서 관우군의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보호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약속했다. 심지어 자신과 동향인 휘하 병사가 관품인 갑옷을 덮기 위해 백성의 삿갓을 빼앗았는데 여몽은 군령을 어겼으니 동향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 엄격함에 군사들은 무서워서 길에서 흘린 것이라도 줍지 않았다.

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노인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쇄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오주전>에 따르면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번성에서 서황에게 격파된 관우는 돌아오는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 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 받아가게 한다. 관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자기네 가정이 무탈하면서 옛날보다 더 대우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미방과 사인의 항복으로 근거지를 잃은 관우는 맥성에서 농성하는 처지에 이른다.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오범전>에 따르면 관우는 맥성에 있으면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청하였다. 손권은 오범에게 질문했다.
그는 결국 본심으로 투항하려는 것이오?
오범이 말했다.
그에게는 달아나려는 징후가 있습니다. 투항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입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서쪽으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10여 명의 기병만이 관우를 따랐다. 여몽은 반장, 주연에게 그 지름길을 끊게 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오범전>에 따르면 정찰하는 자가 돌아와 관우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오범이 말했다.
비록 떠났을지라도 모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손권이 관우를 체포하게 될 시간을 묻자, 오범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정오입니다.
손권은 해시계와 물시계를 장치하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정오가 되었는데도 관우가 붙잡혀 오지 않자, 손권이 그 까닭을 물었다. 오범이 이에 대답하였다.
시간은 아직 정오가 안되었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 휘장을 움직이자, 오범은 손을 치며 말했다.
관우가 붙잡혀 왔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밖에서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고 관우를 붙잡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반장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손권이 관우를 살려주어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대적하려고 했으나 좌우에서 반대하며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손권은 좌우의 말을 듣고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혀 이에 관우와 관평을 참수했다. 배송지는 여몽과 손권이 각각 위치해있던 임저에서 강릉까지 200~300리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며 이 일화의 사실성에 의문을 표했다. 그렇기에 관우는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 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외로 관우의 후손 관중진의 족보에 따르면 관평의 아들 관월을 성을 문(門)씨로 개명시켜 보호해줬고, 서진에 의해 오가 멸망한 뒤 다시 관(關)씨로 관우 집안의 성이 복귀됐다고 한다. 족보의 특성상 조작일 수도 있지만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어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은 아니라고 단정내린 상태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 태수로 삼고 잔릉후로 봉하였고, 1억 전과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공안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여몽은 질병으로 사양하였다. 손권이 웃으며 말했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은, 자명의 모책이었는데, 지금 대공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경사스러운 상이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즐겁지 못한 모양이란 말인가?
이에 여몽에게 크게 수여하고 여몽이 군영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악단이 눈부셨다. 손권은 여몽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금전을 하사했다.

2.8. 죽음

관우의 망령이 나타나 여몽의 멱살을 잡으며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말한 뒤 "나는 관우다"라고 외치자, 여몽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 -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77회에서 관우와의 대결에서 이긴 다음 형주를 차지한 기념으로 연 연회 자리에서 1등 공신이라면서 가장 먼저 을 받은 뒤 마시려다가 관우의 귀신이 들려 갑자기 술잔을 내던지며 손권을 향하여 욕을 하다가 칠공분혈을 하면서 호러스러운 장면으로 최후를 맞지만,[8] 이는 당연히 픽션이다. 여몽의 죽음이 연의를 비롯한 픽션에서 유독 비참하게 그려지는 건, 아무래도 관우를 죽게 한 장본인이라 다름없는지라 관우 신봉자들에게 유난히 미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런 급작스런 전개조차 개연성이 느껴질만큼, 실제 역사에서도 여몽은 형주정벌 직후 갑자기 지병이 도지면서 빠르게 앓아눕게 된다. 공안에 있던 손권은 여몽을 내전에 두고 여몽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내린다고 모집하였다. 여몽에게 을 쓰면 손권이 아파했고, 여몽의 안색을 보고 싶어도 여몽이 불편할까봐 벽을 뚫어 들여다보았다. 여몽이 조금이라도 음식을 넘기면 기뻐하여 주위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하고, 그러지 못하면 탄식하며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병이 좀 낫자 손권은 그를 위해 사면령을 내리고 신하들은 하례를 올렸다. 하지만 다시 병이 심해져 손권이 직접 가서 살폈다. 주연전에 따르면 호위장군 여몽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권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병상에서 대답한다.
주연은 대담함과 지조에 있어서 남음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를 임용할 만합니다.

또한 손권은 도사들에게 명을 내려 성신 아래서 여몽을 위해 천명을 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이 부질없게도 219년 말, 여몽은 41세라는 한창 나이에 결국 내전에서 숨지면서 역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관우가 죽은 년도와 같은 해였으니, 말 그대로 관우를 잡자마자 죽은 것이다.[9]

여몽은 임종 직전에 하사받은 여러 금과 보물을 모두 관부의 창고에 넣어 자신이 죽는 날 모두 상부에 돌려주고 초상은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손권은 매우 애통해하며 그를 위해 먹는 반찬 수를 줄였고, 여몽의 유언을 듣고 더욱 비통해했다.

주연전에 따르면 창업 공신으로서 질병에 걸렸을 때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서는 여몽과 능통에 대한 것이 가장 무거웠고, 주연이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2.9. 사후

여몽의 사후에는 어째서인지 장남이 아니라 여몽의 차남인 여패가 잔릉후를 계승했다. 그에게 식읍 3백여 호를 주고 전지 50경(頃)의 조부를 면제시켜 주었다. 여패가 죽자 직계가 잇지 않고 여패의 형이자 여몽의 장남인 여종(呂琮)이 후작을 이었다. 여종이 죽자 또 직계가 잇지 않고 여몽의 삼남인 여목(呂睦)이 후계를 이었다.

여몽은 죽기 전에 후임으로 주연을 추천했지만 사실상 형주에서의 전투에서 활약한 육손이 이후 오의 군사상 책임자가 되었다.

782년, 당나라 안진경이 뽑아 무성왕과 함께 배향한 역대 명장 64명에 뽑혔다.

1123년, 송나라에서 배향을 지낼 때 뽑은 역대 명장 72명 중에도 이름을 올렸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관우가 신으로 모셔지자 관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여몽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단, 이것은 주로 민간에서 그런 것이었다. 다만 명, 청 시대 학자들이 '여몽의 계책이 과연 옳았나?' 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함은 사실이다. 이는 현대 일각에까지 이어져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 역시 여몽의 전략 자체엔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서구권에서 후한 말의 분열기와 지방정권 성립과정을 연구한 호주의 동양사학자인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는 꽤나 고평가를 내렸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난징(건업) 인근을 점령했을 때 삼국지연의의 관우를 매우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일본군 장교가 명하여 여몽의 무덤은 파헤쳐져 부관참시되고 완전히 폭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일설에는~ 이라는 전제를 달고 2013년 무렵까지 이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으며, 그리고 다시 엔하위키 리그베다 위키에도 실리면서 인터넷상에 널리 퍼진 것 같지만, 사실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실제 여몽의 묘는 난징이 아니라 1978년 장시성 난창시에서 부장품 20여 점과 함께 최초로 발굴됐고, 바이두 백과 등을 비롯해 중국 쪽 자료 어디에도 일본군이 훼묘했다는 말은 전혀 없다.

여몽묘에 대한 얘기를 더 하자면, 여몽묘가 있는 난창시는 관우가 참수되자 조조가 한나라 조정에 상주해 손권을 남창후(南昌侯)에 봉했을때의 바로 그 봉토이다. 여몽은 손권이 이 작위를 미처 받기도 전에 병사했지만 손권이 여몽의 공로를 높게 기려 자신의 봉토인 남창에 안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바이두 백과는 공을 세워 얻은 자신의 영지에, 그 영지를 얻는데 공로가 컸던 부하를 후히 장사지내는 것은 손권의 인애와 현명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관왕묘에는 여몽의 후손 및 여씨들은 참배를 할 수 없다는 전설이 있다. 과거에도 여씨성의 한 사람이 관왕묘를 참배하다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식으로 여몽를 증오하는 관우가 같은 성씨인 여씨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전설이다. 이에 관해선 해방 전후 정치인 여운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성이 여씨인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하고 당연히 그럼에도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넘어서 아예 여몽이 살던 강동 지방에서는 오히려 여몽 사당에 관우가 잡신 취급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전설집인 자불어에 따르면 여몽이 쌓은 강소성 단양의 여몽성 사방 50여리에는 관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몽은 죽은 후 이 지역의 토지신이 되었는데 관묘를 세우려고 하면 새벽마다 병장기들로 격투하는 소리가 났고 현지주민들은 이를 경계하여 관묘를 아예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날은 어떤 점쟁이가 이 지역 토지신의 사당에 투숙했다가 뇌우가 크게 일어나고 옥상의 기와가 전부 날아다녀 시끄러웠는데 현지인이 뭐 때문인지 그를 만나 찾아보니 점쟁이가 관우의 초상이 그려진 깃발을 등에 메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현지인들이 그를 내쫒아 두번 다시 강남의 토지신 여몽의 사당인 여후묘(呂侯廟)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2.10. 그 외

감녕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던 아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자 여몽에게 투항했다.[10] 여몽은 감녕 성격을 잘 알다보니 일단 숨겨줬지만 감녕이 곧 찾아와 여몽의 모친에게 직접 예물을 바치고 친근한 모습을 보인 뒤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돌려보냈지만 감녕은 아이를 뽕나무에 묶은 뒤 직접 활을 쏴 죽였다. 그리고 바로 배 안에 드러누우며 태연하게 있었는데, 이를 안 여몽이 분노해 병사를 동원하여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감녕은 알고도 배째라는 태도로 나왔다.

사정을 안 여몽의 모친은 "주군(손권)께 중임을 받은 네가 같은 주군의 신하인 감녕을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죽게 만들면 그건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며 말리고, 여몽은 화를 푼 뒤 감녕에게 찾아가 웃으며 모친이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오라고 화해를 청해 감녕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고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그 아이만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한 셈이다.

이는 오의 군사 체계가 얼마나 형편 없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감녕 주방 소속의 어린이였다지만 소속을 따지며 스스로 탈출해 투항한다든지, 대놓고 상관인 여몽의 말을 개무시한다든지 군사 대 군사로 맞붙으려 한다든지 손권 직속 휘하가 아닌 각 군사 세력의 연합 체제 같은 오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3. 평가

여몽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약간씩 갈린다.

여몽이 촉한정통론 관우신앙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 시대에도 무성왕묘에 배향되거나 십칠사명장전과 광명장전 등에 포함되는 등 여전히 명장으로서는 인정받는 등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촉한정통론이 본격적으로 퍼진 남송- 시기에도 나쁜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11]

3.1. 긍정적 평가

손권이 주유 노숙과 같은 급으로 두었다는 것에서 나타나듯 여몽의 이른 병사는 손오에게 있어선 참으로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여몽은 기존에 오군이 연달아 좌절을 경험한 합비 대신 형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했는데, 이는 장강 상류 지역인 형주를 동맹으로서 신뢰할 수 없는 촉군에게 놔둬서는 손오의 근거지인 양주를 방어할 수 없다는 전략적 식견에서 기인하였다. 여몽은 설령 서주를 공략하여 얻는다고 해도 위군의 기병대를 상대로 장기간의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간주하였으며, 따라서 형주를 복속시킴으로서 장강 방어선을 완비하는 안을 주장하였다.

초기를 빼면 항상 극단적인 위협과 도발, 거짓말[12]을 일삼은 유비 집단을 상대로 여몽과 손권은 신중하게 처신하며 관우와 유비의 틈을 찾아 점점 형주를 잠식했고 결국 관우의 패망을 이끌어 남형주를 온전히 소유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기실 지세상 형익 겸병보단 양주를 중심으로 양형 겸병이 더 안정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음이 명백하다. 파촉 중심부인 성도 강릉 거리가 너무 심각하게 멀고 보급이나 빠른 지원도 주변이 산악에 덮힌 익주 지형 특성상 매우 어렵다. 일찍이 송나라 시기 책인 삼국잡사에서 당경이 이를 지적한 바가 있었으며, 현대에는 마오쩌둥이 형익 겸병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여몽의 주장대로 만들어진 장강 방어선은 오의 멸망대까지 무리없이 기동하며 위의 대규모 원정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 오는 촉한 멸망 이후 익주 방향에서 수군이 몰려올 때까지 국체를 온존할 수 있었다. 형주를 손에 넣고 지세를 굳힌 결과 오나라는 형후 60여년 간 안정적인 장강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심지어 촉한 멸망 이후에도 수십년간 버티는게 가능했다. 이후 남중국에 자리 잡은 남조들이 모두 손오가 쌓은 기반을 토대로 그 모델을 본받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13]

손권은 결국 이 전역에서 얻어낸 형주를 안정적으로 굳히는데 성공했으며 뒤이어 벌어진 이릉대전 조비의 남정을 연이어 이겨내고 비로소 오를 독립국가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즉 여몽의 형주확보를 통해 손오가 최종적으로 독립국가로서 성립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확보한 남형주(형남)는 이후 오의 북벌루트로 활용되었으며[14] 촉의 멸망 이전까지 장강방어선이 작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손오가 국체의 보전에 성공한 것은 남중국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새로 점령한 형주에서 손권은 적극적인 형주 산월 식민화와 개척을 벌였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남중국 개발의 시초로 간주하며 적극적인 식민화와 개척을 삼국 중 오에서 벌어진 독자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15][16] 오의 산월 식민화와 개척사업은 사서에서 별다른 찬미의 말을 찾기 어려워 팬덤에서는 대체로 무시당하는 주제였으나, 현대 역사 연구에서는 강남의 손오 정권이 대단히 큰 성장을 거뒀음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17][18]

결국 손권이 이끈 손오의 번영과 남중국 개발사의 안정적 초석을 제공한 일등공신 중 하나는 여몽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면에서 대국적 시각이 부족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다분히 촉 편중적인 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3.2. 부정적 평가

여몽의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자들도 존재한다. 당장 미야자키 이치사다나 왕무횡 같은 사학자들이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왕무횡의 경우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줬으니, 대략 정보[19]는 남군을 지킬 수 없다고 근심했고, 조조가 오직 유비만을 꺼리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였기에 그의 힘을 빌려 조조를 막고자 한 것이라며 여몽의 형주 공격은 공이 아니고, 강동의 패업을 무너지게 할 뻔한 짓"이라고 평가했다.

한모려(韓慕廬)가 말하길 "왜 노숙은 장강을 나눠 이를 지키고자 했겠는가? 일각이라도 조조를 잊지 않아서이다. 여몽이 엿보던 바는 협소한 것으로, 먼 근심을 걱정하지 않고, 가까운 이익을 달게 여겨, 오, 촉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실마리를 시작되게 했고, 조씨의 찬탈을 이루어지게 한데다, 손권 또한 신하를 칭하고 남에게 굽히며, 해마다 전쟁이 일어났다. 슬프구나! 공을 탐내다 어둠을 불러들여, 나라를 그르치게 함이 적지 않구나."라고 했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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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신다는 뜻으로 '우리는 진짜 친구!'라는 셈이다. [2]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성이 말한다. [3] 승상 고옹의 장남 [4] 춘추시대 진(晉)나라 중군위를 역임했던 인물. 고령으로 중군위를 사임하려하자 진도공이 기해에게 후임자를 물었는데, 기해는 평소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해호를 추천했다. 그러자 진도공이 "해호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어찌 해호를 추천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기해는 "주공께서는 저에게 후임자를 물으셨지, 저의 원수가 누구인지 물으신 게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해호가 취임도 못하고 사망하자 진도공이 다시 후임자를 물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을 꽂아넣었다. (...) [5] 하작이 말하길 양양을 점거하거나, 형주를 취한 후 다시 양襄, 번樊 으로 향한다고 해도, 만약 백제성이 촉에 있다면, 반장은 무엇에 근거하여 곧 가서 머물 수 있겠느냐며 이 계획에 의문을 품었다. [6] 하작은 조조가 원상, 원담을 격파한지가 10년인데 원씨를 새로이 격파하고, 유, 기를 위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조조 또한 멀리 하북에 있을 수는 없으니, 사서가 잘못되었다고 했고 주수창도 같은 의견을 냈다. [7] 이 당시 형주를 치는데 손권군 내에서 동조하는 기록은 있는 반면, 반대하는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손권군의 형주 공격은 이미 분위기상 확정된 듯하다. [8] 이후 오나라에서는 여몽의 사인이 관우의 귀신이 씌여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제사를 지내서 관우의 혼백을 위로했다. [9] 관우는 12월에 참수당했다. [10] 위군, 촉군도 아니고 손권이라는 같은 주군을 모시는 휘하 무장들인데도 투항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11] 자치통감》에 주를 단 송말원초 학자 호삼성 평론만 해도 "여몽이 간사한 계책을 썼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육손과 함께 영웅의 뜻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12] 상류에서 내려와 손권 세력을 멸망시킨다는 언사, 범의 새끼를 어떻게 오월 오소리에게 주느냐는 지역 드립적인 모욕을 일삼은 관우나 익주의 유장을 치는 것은 동족을 치는 것이니 인정상 어쩔 수 없다고 손권에게 말해놓고선 정작 자신이 동족의 뒤통수를 치고, 본인이 형주 땅을 되돌려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옹양주 먹으면 형주 상납한다고 농락을 했던 유비의 일화 등이 있다. 또한 이렇게 형주는 빌린 땅이라는 주장은 유비 측의 과격한 강경파인 관우도 노숙 앞에서 반박을 못할만큼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사실'에 불과했다. [13] 양양과 번성을 얻지 못한걸 두고 여몽을 비판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손오가 이 지역을 장악하는 것도 성공한 바가 있으나 촉한의 침공을 맞아 어쩔수 없이 후퇴한 것에 가깝다. 오히려 한실부흥이라는 표면적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단지 관우의 복수를 위해 본인을 따르던 모든 이들의 반대를 다 무시하는 폭압적인 행태로 대의를 저버리고 형주 반환 문제로 오에 대한 신의를 전혀 지킨적이 없는 유비와 관우를 응징한 오를 공격해 오의 위나라 상대로의 북부 진출을 좌절시킨 부분으로 보면, 유비라는 인간이 가진 대의명분이 얼마나 얄팍하고 알량한지만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14] 오서 오주전.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합비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지만 널리 퍼진 오해와는 달리 형주 방면으로도 수 차례의 공세를 펼쳤다. [15] Rafe de crespigny, Generals of the South. [16] 가와카쓰 요시오,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17] Rafe de crespigny, Generals of the South. [18] 주를 나눠서 계산할 경우, 형주의 현 증가율은 반올림해 88%이며 교주의 경우에는 증가율이 116%에 달한다. 양주는 둘 사이이다. 익주와 비교할 경우 익주 전체의 현 성장율은 20%에 불과하다. 제갈량의 남중정벌 당시 공략대상이 된 4군 지역의 현 성장율은 18%로서 익주 평균보다 성장율이 낮다. 즉, 이민족이 다수인 구역이라는 이유만으로 별도의 국가적 정책 없이도 현이 자연스럽게 증가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 [19] 이 당시 정보는 남군태수를 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