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7:30:30

이병규(1974)/선수 경력

라뱅쓰리런에서 넘어옴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병규(1974)
1. 아마추어 시절2. LG 트윈스 1기 (1997~2006)3. 주니치 드래곤즈 (2007~2009)
3.1. 라뱅 쓰리런
4. LG 트윈스 2기
4.1. 2010 시즌4.2. 2011 시즌4.3. 2012 시즌4.4. 2013 시즌4.5. 2014 시즌4.6. 2015 시즌4.7. 2016 시즌4.8. 2017 시즌
5. 국가대표 경력6. 연도별 성적
6.1. KBO6.2. NPB

1. 아마추어 시절

서울청구초, 서대문중, 장충고 시절에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모교인 당시 장충고등학교가 워낙 약체라 전국대회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동기인 신일고등학교의 강혁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편이었다. 그래도 고교 시절 활약을 보고 당시 연고 구단이던 LG 트윈스에서 꾸준히 영입을 시도했지만 프로와 대학 간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단국대학교 경영학과(93학번)로 진학한다.[1] 고교 시절과는 다르게 당시 단국대는 대학야구 강호였고,[2] 아마 최다 타점 기록인 한 경기 11타점 기록을 세우는 등 # 이 때부터 대학야구 최고의 타자로 떠오르며 아마야구에서 이름을 떨쳤다.

당연히 대학 최고의 타자였던 이병규를 두고 서울 연고 구단이던 LG 트윈스 OB 베어스는 서로 이병규를 1차 지명으로 뽑겠다고 선언하였고, 결국 LG가 주사위 싸움에서 OB를 이기자 주저없이 이병규에게 1차 지명권을 쓰면서 이병규는 LG 유니폼을 입게 된다.[3] 결국 1년 전 박재홍 현대 유니콘스와 계약할 때 받았던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4억 3천만원)보다 1천만원 더 많은 4억 4천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LG에 입단한다.

2. LG 트윈스 1기 (1997~2006)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7, 1999, 2000, 2001, 2004, 2005)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2103004660000.jpg
[4]
파일:external/image.kbreport.com/%EC%9D%B4%EB%B3%91%EA%B7%9C3.jpg
파일:9,6,2.jpg
[5]

데뷔 시즌인 1997년에 5번 타자로 활약하며 .305의 타율로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6]그리고 이병규는 2019년 시즌까지 LG가 배출한 마지막 신인왕이었다. 하지만 2019년 시즌 후 정우영이 신인왕을 거머쥠으로써 마지막 신인왕, 다만 골든글러브의 경우 삼성 라이온즈 신동주 최익성보다 부족한 성적을 올렸음에도[7] 수상했기 때문에 지금 팬들은 잘 모르는 논란거리.

1998년은 약간의 2년차 징크스를 겪으며 .279의 타율에 그쳤으나, 방콕 아시안 게임 드림팀으로 참가하여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3년차인 1999년에 기량이 만개하여, 30홈런 - 30도루라는 괴물 같은 성적을 내며 30-30 클럽에 올랐다. 이는 한국인 좌타자로는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이다. 데뷔 이후 첫 두 자릿수 홈런 시즌을 30홈런으로 장식하며 장타율 또한 무려 2할이나 상승했다. 다만 이 1999년이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1999년에만 30-30 가입자가 이병규, 제이 데이비스, 홍현우 3명이나 되었고, 홈런으로만 한정해도 양준혁, 심정수, 마해영 등이 30개 이상을 쏘아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즌 이병규의 WAR은 KBO 단일 시즌 중견수 WAR 2위이다.[8] 같은 잠실을 홈으로 쓰는 거포 우즈, 김동주, 심정수의 홈런 개수도 각각 34개, 22개, 31개 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포보다는 교타자에 가까운 이병규가 잠실을 홈으로 30-30을 기록한 것이 대단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타고투저 시즌이 있었으나 잠실을 홈으로 쓰는 선수 중 30-30을 달성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이병규가 유일하다.[9] 게다가 기록한 타점 수가 99타점으로 1타점만 더 올렸다면 3할-30홈런-100타점도 달성할 수 있었으니 역대급 시즌이라 할 수 있다.[10]

이후로도 두 자릿수 홈런에 60~70타점 이상을 칠 수 있는 타격으로 꾸준히 활약했다. 그렇지만 도루의 경우 크게 감소하는 양상이었는데 2002년부터 겨우 8~10개를 왔다갔다 하다가 2006년에는 겨우 3개를 기록할 정도로 급격히 감소해 버렸다. 도루 감소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2003년 시즌 도중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해 발이 예전만 못해진 게 그 원인인 듯 싶다.[11] 볼넷:삼진 비율도 계속 나빠져서 2004년 50 : 72, 2005년 34 : 62, 06년 31 : 65. 일본 진출 후엔 슬러거도 아니면서 삼진이 100개를 넘어갔다. 극악의 볼넷:삼진 비율 또한 변명하자면, 첫번째 이유로는 팀의 열악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1번과 3번을 넘나드는 우악스러운 타순 변경이 이유가 되겠고,[12] 두번째 이유로는 선두타자로 나서는 경우 풀카운트까지 공을 끌어내 후속 타자들에게 더 많은 공을 눈에 익게 하려는 임무 수행 과정의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만 3번으로 가도 그 특유의 배드볼 히팅은 그칠 줄을 모르니 그냥 공에 배트가 끌려나가는 성향이라고 봐야할 듯. 그럼에도 3할대의 타율과 100안타 이상을 매 시즌 기록했다.

한편 꾸준히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는데,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동메달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예선 일본전에서 9회 끝내기 상황에서 나온 안타를 잡아 홈으로 쇄도하던 2루 주자를 보살시키던 장면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이다.

3. 주니치 드래곤즈 (2007~2009)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afe59aa7.jpg
파일:a0114992_49ac178fd97ed.jpg

2006년 시즌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자 일본으로 진출, 주니치 드래곤즈 와 3년 계약을 맺는다. 사실 이병규의 일본리그 진출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과연 갈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견해가 많았는데, 직전 시즌 성적이 상대적으로 평범했던데다[13] 이병규의 스타일 자체가 흔히 외국인 타자에게 기대하는 슬러거 유형도 아니었기 때문. 심지어 팬들 중에는 FA 몸값 올리려고 언플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2006년 즈음 주니치 쪽에서 "오랫동안 이병규를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고, 실제로 주니치에서 모셔가는 수준으로 계약에 성공했다.[14] 주니치 쪽에서 이병규를 원했던 이유가 있었는데, 2007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는 팀의 간판타자인 후쿠도메 고스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한 상태라 외야에 공백이 생길 것이 예정된 상태. 중장거리 타자이고 운동 능력이 뛰어난 타입이라는 점에서 두 선수가 비슷한 유형이기 때문에 대체 선수로서의 매력이 있고, 적응기간 1년 뒤에는 후쿠도메의 자리를 메꿀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한 것.[15]

첫 시즌인 2007년에는 후쿠도메 고스케, 타이론 우즈에 이은 5번 타순에 배치되었는데, 초반에는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문제없이 일본 무대에 연착륙하는 듯 했으나 서서히 약점이 노출되면서 결국 .262 .295 .370 9홈런 46타점 WAR 0.4, wRC+ 78 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특히 이 해에 기록한 108개의 삼진은 이병규의 커리어 역사상 유일한 세자릿수 삼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37타수 6안타로 영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6안타 중에 5개가 장타였고 3홈런에 11타점이 있었으며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이 타점들이 영양가 만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해 주니치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꺾고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며 개인 통산 첫번째 우승을 맛보게 된다. 코나미컵에도 출전했지만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4타수 무안타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팬들은 이를 두고 조국(한국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성적을 내팽겨친 열사라고 칭하며 '라면병규 + 열사'를 합쳐 '라열사'라고 불렸으나, 정작 이병규는 결승전에서 구원으로 올라온 김광현을 상대로 쐐기 투런포를 때려내 주니치에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코나미컵이 주니치의 우승으로 끝나기도 했고, 김광현을 상대로 홈런을 치자마자 당시 국내야구 갤러리에서 순식간에 매국노인 이완용과 합성되어 '라완용'이라고 불렸다.

후쿠도메가 시카고 컵스로 떠난 2008년에는 이전 시즌보다 훨씬 많은 16개의 홈런과 65타점을 기록했지만, .254 .293 .416의 슬래시 라인은 여전히 낙제점이었고, 세부 스탯도 WAR 0.4, wRC+ 94로 좋지 못했다. 또한 수비 역시 필딩율 .983, FS -4.4, rRng -3.5로 작년에 비해서 현격히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16][17] 다만 WPA는 양수로 쳤다 하면 영양가는 만점이었다.

그리고 3년차인 2009년엔 별다른 부상이 없음에도 계속 2군에 상주하다가 1군에 올라와 단 3경기만을 뛰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 주니치 외야의 공백이 생기면 1군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2군으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다 시즌을 마쳤다. 2009년 최종 성적은 타율.217 (101타수 22안타) 8타점 3홈런 으로 FA 먹튀 확정. 계약 만료 후 이병규 본인은 재계약을 원했으나 구단에서는 가차없이 거부한다. 그렇게 이병규는 주니치를 떠나게 된다.[18]

일본에서의 통산 기록은 3년 동안 타율 0.254에 28홈런 97득점 119타점 OPS.676 WAR 0.5. wRC+ 84[19] 출처 한국에서도 볼넷을 많이 얻는 유형이 아니었지만, 일본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져 51볼넷 234삼진으로 삼진이 볼넷의 거의 5배에 달했다. 통산 출루율은 3할도 되지 않는 0.290로 1000타석 이상의 외국인 선수 중 역대 최저 출루율이란 불명예스러운 기록까지 세웠다.[20]

이병규가 일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배드볼 히터인 이병규의 스타일 자체가 철저하게 약점을 파고들며 유인구 위주의 승부를 하는 일본 야구의 트렌드와 상극이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결국 이병규의 최대 무기였던 컨택 능력이 상위 리그인 NPB에서 쉽게 통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21]

이러한 이유로 이병규가 팀에서 뛸 당시 주니치 팬들의 여론은 당연히 좋지 못했다. 마쓰이 히데키가 양키즈에 입단할 당시 받은 금액과 필적하는 계약으로 데려온 선수였고, 중계권료는 전경기 출장시 3000만엔 정도로 연봉의 상당 부분을 한국 방송사가 책임진 이승엽과는 경우가 달랐던 데다가 입단 당시 주니치 계열의 일본 언론이 한국의 이치로라고 선전을 하면서 기대치가 너무 높아져 있었다. 여기에 주니치의 이전 외국인 선수였던 알렉스 오초아[22]에 비해 공수 양면에서 너무나 떨어진 모습을 보인지라 그와 비교되어 폭풍처럼 까였으며, 일본 웹에서는 '칠 수 없고, 지킬 수 없고, 달릴 수 없는' 선수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돌아다녔다. 일본 넷 문화의 혐한 보정을 감안하더라도 만족할만한 성적은 아니었던 것.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임팩트 있는 활약이 있었고,[23] 팀에는 잘 융화했다는 점, 이후에도 이대호가 일본 진출할 당시에 해 준 조언 등이 번역되어 알려지면서 일본 야구를 존중하는 자세가 재평가되어 야구는 못했지만 성격은 좋았던 선수 정도의 평가로 정리되었다.

정말 여담으로 주니치에서 데려올 때 한국의 이치로라고 별명을 붙여주며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면서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렸는데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넷상에서는 한국의 이치로(웃음)이라는 굴욕적인 별명도 자주 회자되는 선수.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치로라면서 이치로의 상징인 타율은 2할5푼에 도루는 3년간 딱 한 개 성공했고 오히려 뜬금없는 장타력이 그나마 장점이었을 정도로 플레이스타일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더 임팩트가 컸다.

3.1. 라뱅 쓰리런

파일:attachment/uploadfile/3run.jpg
이병규가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홈런 중 쓰리런이 유독 많았다. 이 시기 동안 그래도 자주 중계되던 이승엽 경기와는 달리 중계도 제대로 되지 않고 이병규의 출장도 드물었던 주니치 경기에서 이병규가 홈런을 쳤네 마네 하는 낚시가 인터넷 상에서 빈발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08년 5월 4일 한신 타이거스전 일본 최강의 마무리 투수 후지카와 큐지에게 쳐낸 끝내기 홈런. 후지카와의 2008년 유일한 패배가 이 홈런 때문이었다.[24] 영상에도 나오지만 이 홈런을 치기 전까지 이날 이병규의 기록은 삼진-1땅-1땅-삼진이라는 막장스러운 기록을 남기며 영 좋지 않은 타격감을 보여주던 중이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후지카와를 상대로 덜컥 홈런을 때려버린 것.

그래서 야갤에서는 이병규가 타석에 서면 라뱅 쓰리런이라고 도배하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다. 미묘한 투런도 너무 적은 솔로도 지나치게 많은 만루도 아닌 적절한 임팩트의 밸런스 잡힌 쓰리런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라뱅 쓰리런!! 이후 쓰리런은 야갤에서 전혀 예상치 않은 뜬금포가 터졌을 때 주로 쓰였다. 긍정과 부정적 의미를 가리지 않고.

한국 복귀 후 야갤에서 이 '라뱅 쓰리런 놀이' 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병규가 타석에 등장하면 제목이 '라뱅 쓰리런ㅋㅋㅋ'이라는 글이 폭발하며, 물론 진짜 치면 더 폭발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라뱅 다음에는 바로 쓰리런이 튀어나올 정도가 되더니 드디어 ' 호접지몽' 를 패러디한 일체설까지 나왔다.

너무 남발한 나머지 이제는 별 뜻없이 타석에 등장하기만 해도 쓰며, 다른 선수가 쓰리런을 칠 때도 결정적인 장면의 경우 종종 사용된다.
1. 일본 야구가 진행 중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행됐다. 이병규의 국내 복귀 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2. 홈런은 반드시 '-리런' 이어야 한다. 예)솔로 홈런 = 솔리런 or 1타점 쓰리런, 투런 홈런 = 투리런 or 2타점 쓰리런, 만루 홈런 = 만리런 or 4타점 쓰리런.
3. '쓰리런' 다음에는 을 반드시 2~3개 이상 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4. 투수 앞 땅볼이든, 6-4-3으로 이어지는 병살이든 라뱅의 쓰리런엔 제한이 없다.[25] 다만 삼진을 당했을 경우 쓰리런 대신 쓰리진을 사용한다.
5. 야구가 아니어도 좋다. 소재에 제한은 없다. 예시
6. ' 장합쓰리런' or ' 장합쓰라린', '라뱅쓰라린'으로 대체될 수 있다.[26]
7. 주로 결과가 흥했을 때 XX쓰리런, 망했을때는 XX쓰라린, 가끔 관광의 의미로 쓰리썸이라고 한다.

이병규의 은퇴로 더 이상 라뱅쓰리런이라는 말 자체는 잘 쓰이지 않으나, 위에서 유래한 솔리런, 투리런, 쓰라린, 만리런과 밀어내기 볼넷으로 점수를 줬을 때 사용하는 밀리런 등은 여전히 디시를 비롯한 각종 야구 커뮤니티에서 빈번하게 사용된다.

4. LG 트윈스 2기

4.1. 2010 시즌

재계약에 실패한 이병규는 2010년 1월 8일, 원 소속팀인 LG 트윈스와 2년간 연봉 4억원 + 계약금 1억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일단 외야 포지션은 박용택 - 이대형 - 이진영으로 주전만으로도 포화 상태인데다가 '유망주를 잘 발굴해보겠다'는 박종훈 감독의 발언[27]과 히어로즈에서 38억원과 2군 선수 2명을 내주고 이택근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그가 설 자리는 매우 좁기만 하다. 이 해 박용택이 전업 지명타자로 전환하며 좌익수 이택근, 중견수 이대형, 우익수 이진영으로 가려다 이택근을 1루로 돌리고 좌대형 혹은 좌병규에 중병규 우진영으로 고정시켰으나 이번엔 이진영이 커리어 로우를 찍으며 결과적으로 의도하지도 않았음에도 교통정리가 이뤄지고 말았다.

4월 2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이병규의 외야 수비 장면 리플레이가 나왔는데, 허구연이 라면 드립을 쳤다.

개막전부터 쭉 4번타자로 선발출장했으나 5월 1일까지 108타석 99타수 23안타 0.232의 타율에 홈런 3개 타점 7개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부진했다.[28] 결국 5월 2일 SK전에서 4번 자리는 이진영에게로 넘어가게 되고 6번타자로 출장했는데 1회부터 2사 만루 기회를 날리고 4회 선두타자 삼진을 기록하면서 4회말 수비 때 교체되는 수모를 당했다. 5월 4일 두산과의 어린이날 시리즈 1차전에서는 4타수 1안타를 기록한 뒤 어린이날 당일인 5월 5일에 시즌 처음으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고 4:2로 뒤진 9회말 1사 1루에서 대타로 투입되었지만 이용찬을 상대로 LG 패배를 확정짓는 끝내기 병살타를 기록하는 굴욕을 당했다.

한동안 대타로만 출장하다가[29] 5월 12일 청주 한화전에서 이진영의 햄스트링 통증으로 인한 이탈로 인해 선발 4번타자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김혁민을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야갤 화력이 폭발했다. 다음날에도 홈런 1개를 기록했지만 LG의 피스윕을 막지 못했다. 5월 15일과 16일 롯데와의 잠실 홈경기에서 연속 멀티히트를 기록했고 5월 19일 대구 삼성전에서 5타수 3안타 2타점에 홈런 1개를 기록하면서 타율도 0.250까지 올라갔다. 5월 20일 대구 삼성전 4타수 2안타, 5월 21일 두산전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면서 한때 0.216이었던 타율이 0.264까지 올라갔다. 5월 월간 0.321의 타율로 살아나며 누적 타율은 0.270으로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6월 8일 잠실 한화전에서는 수비에서 1루에서 3루로 가려던 전현태를 보살로 잡아내고 타격에서는 류현진을 상대로 적시 2루타로 LG에 2-0으로 달아나는 점수를 안기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5회말 2사 만루 볼 카운트 2-0에서 류현진이 던진 바깥쪽 낮은 공을 전일수 주심이 스트라이크로 판정, 삼진아웃을 선언하자 이에 불복하고 항의했고 퇴장 명령을 받았다. 타석을 벗어난 이병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배트와 헬멧을 1루 쪽 뒷그물에 집어던지기도 했다.

6월 25일 한화전에서는 6타수 4안타에 5타점을 기록하는 등 무시무시한 포스를 보여줬고 타율은 0.299가 되었다. 다음날 5타수 2안타 2타점으로 좋은 감을 이어가며 처음으로 타율 3할을 돌파했다. 6월 월간 0.360의 고타율로 18타점을 기록하면서 어느덧 누적 타율도 3할을 찍었다.

그러나 7월에는 기복이 심한 행보를 보이며 월간 0.208의 타율로 부진했다. 결국 전반기가 끝나기 전 1군에서말소되기도 했다. 8월 초 1군에 복귀했지만 페이스를 그냥저냥 유지하며 부상 시즌을 제외하면 커리어 로우 수준의 성적인 0.290 9홈런 64타점 3도루의 최종 성적을 기록했다. 주전으로 뛰던 1997-2013년 중 한국에서 유일하게 wRC+가 100을 못 넘는 시즌이다.(94.7)


8월 13일 넥센전에서는 4회말 넥센 유한준이 친 홈런 타구를 잡아내는 멋진 수비를 보여주었다.

4.2. 2011 시즌

파일:/image/001/2011/05/05/PYH2011050506280001300_P2.jpg
2011년 5월 5일 두산 베어스와의 어린이날 더비에서 좌월 3점 홈런을 치고난 후의 모습.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1072419262160006100-001.jpg
2011년 미스터 올스타 수상식에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병규(1974)/선수 경력/2011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3. 2012 시즌

시즌 전 투표를 통해 선수단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병규 본인에게는 2004년에 이어 8년만에 주장 자리를 다시 맡게 됐다.

4월 7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개막전에 5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차우찬을 상대로 3회초 무사 만루의 찬스에서 우측 담장을 넘기는 만루홈런 (2012시즌 1호 만루홈런)을 기록하였다. 이날 이병규의 만루포는 LG의 6:3 승리의 결승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병규는 이날 4타수 1안타 1홈런 4타점 1득점을 기록했다. 이날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이병규는 "( 김기태) 신임 감독에게 첫승을 빨리 안기고 싶었는데 개막전에서 승리해서 기쁘다. 나와 감독님,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의미있는 홈런이었다."고 밝히며 "많은 사람들이 올해 LG를 최하위 후보로 꼽았는데 누가 그랬는지 다 알고 있다. 그들이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애교섞인 경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lee_1337131632.jpg

5월 15일 당시의 핫&콜드존. 정말 미스테리하다.[30]

그리고 6월 1일 잠실 한화전에서 한일통산 2,000안타 달성!!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00, 출루율 0.333, 장타율 0.400 41타점 52득점 5홈런으로 마감했다. 타격 생산력은 장타율이 겨우 4할에 턱걸이하는 등 OPS형 타자가 드문 크보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하게 저하되었지만[31] 불혹을 눈앞에 두고 3할 타율을 기록했다...

2012년에 2/3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준수한 모습을 보인 7번 이병규가 다시 외야로 전향하면서 차기 시즌은 지명타자로 뛸 가능성이 높아졌다.

4.4. 2013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13)

파일:201308042009472223_1.jpg
2013년 8월 4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역전 적시타를 친 모습.

어느덧 우리 나이로 40세에 진입했고 시즌 초에 햄스트링 부상으로 약간의 공백기를 가졌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 기록과 최고령 타격왕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과시했다. 게다가 2011년과는 달리 팀도 간만에 신바람을 맛보며 암흑기에서 탈출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병규(1974)/선수 경력/2013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5. 2014 시즌

만 40세가 되어 맞이하는 시즌으로, 지난 시즌 부상 때문에 미뤄진 2000안타에 도전했고 5월 6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윤규진을 상대로 역대 4번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에이징커브가 이 해부터 시작되었고 팀내 입지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병규(1974)/선수 경력/2014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6. 2015 시즌

시즌 초반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4월 9일까지 8경기 20타수 4안타 1타점 1득점이란 성적을 올렸다. 이에 쥐갤에서는 지게뱅과 같은 멸칭을 선사하기에 이르렀다.

4월 10일 두산 베어스와의 잠실 홈경기에서 2-1로 뒤진 8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라뱅 쓰리런을 치며 LG 트윈스의 팬들과 야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해당 경기는 LG가 2-5로 승리하여 결승타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심하게 까이고 있다. 양상문도 까이는데, 이유는 왜 이딴 놈 안 내리냐고. 까이는 이유를 가장 두드러진 부분들만 정리하면 현재 부상으로 전력질주도 불가능한데다가 수비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지명타자나 대타롤이라는 지극히 제한적인 역할만 한다. 홈런이라도 쳐주면 모를까 매번 홈런을 치면 대타나 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대타나 지명타자 역할을 충실하게 하느냐면 그것 역시 아님에도 끝까지 1군에 두며 기용하니 연봉 옵션 챙겨주기나 프런트의 관여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팬들에게는 이진영, 작은 이병규 등과 함께 철밥통들로 까이는 중. 5월 6일 두산전에서 1사만루 4-5로 추격하는 도중, 대타로 나와 병살을 적립시키며 경기를 종료시켰다. 거기에 5월 13일 NC전에서는 또다시 대타로 나와 병살을 적립. 이 병살도 아주 가관인 것이 첫 판정은 삼진이었지만 이병규가 배트에 맞았다고 주장하며 파울로 정정, 다시 타격하며 병살이 된 것이다. 정당한 항의였고 번복된건 문제는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루 주자가 작뱅이었다.

5월 13일 경기 종료 기준으로 성적은 63타수 11안타 1홈런 6타점 3득점 11삼진 3병살, 타율 .175 출루율 .221 장타율 .270. KBReport 기준의 WAR는 -0.68로 뒤에서 3위, 팀에서는 독보적인 뒤에서 1위로 눈을 썩게 하는 성적을 보이고 있다. 같이 까이는 이진영보다도 못하고 있는 상태며, 7번 이병규는 타율이 낮고 삼진을 많이 당했어도 장타율과 출루율이 한참 높기 때문에 비교할 급 자체가 안 되고 있다.

5월 14일 NC 다이노스와의 5차전에 10회말 0-0 1사 1루 상황에서 손주인의 대타로 나와서 맥빠진 스윙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4구만에 삼진을 적립했다. 이젠 팬들이 '병살 안 쳤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하는 수준이다...

5월 15일~16일 SK 와이번스와 경기에서 두 번 모두 대타로 출전하여 각각 2루타, 동점 1타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아직 비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연속 안타를 때려내자 여론이 어느정도 수그러들긴 하는 상황이다. 다만 팀은 5-2, 7-6으로 연패했다.

17일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선 선발 출장, 3타수 1안타(2루타)를 기록했다.부활의 조짐이 보이는게 다행.

5월 18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2루타 포함 2타수 2안타를 기록하고 부상 때문에 이진영과 교체되었다. 최근 나흘간 7타수 5안타(2루타 3개)를 기록 중이다. 하필 부활의 날개를 펼치려는데 부상이 재발하여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8월 6일 기준으로 2군에선 0.222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8월 26일까지 퓨처스 타율은 0.253이다.

그러다 9월 1일자로 1군에 복귀했다. 확장 엔트리에 끼어 올라온 것. 올라오자마자 넥센전에 대타로 나와서 오랜만에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였다.

이후 중요한 상황에서 대타로 나오거나, 경기의 맨 마지막 타석에 나오고 있다. 여전히 잠실야구장의 LG팬들은 이병규의 등장에 환호하고 있으나 찬스때마다 번번히 젊은 투수들의 공에 맥없이 헛스윙만 하고 있어 LG팬들에게 분노와 안쓰러움을 주고 있다.

9월 21일 대타로 1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이후 10월 6일 시즌 최종전까지 10연타수 무안타를 기록하였다.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를 쳐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시즌 최종성적은 53경기 92타수, 타율 .217, 20안타 1홈런. 그야말로 폭망하였다. 14년에도 기대 이하였지만 15년의 성적은 종전보다 훨씬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팬들은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평가.

이후 이진영과 함께 40인 보호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KBO 대기록 중 하나인 3000루타 1000타점 1000득점에 28루타, 28타점, 5득점차로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고 있는데, 사실상 마지막 시즌인 2016년에 달성할지 여부도 하나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40인 명단과 스프링캠프 명단에도 못 들어간 걸로 보아 16시즌 중 1군 출전 가능성도 낮은 현실.

4.7. 2016 시즌

파일:2016100801201_0.jpg

FA계약의 마지막 시즌인만큼 2016시즌 종료 후 은퇴할 가능성이 높았다. 은퇴 암시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시무식 때 1차 스프링캠프 명단에서 제외됐다는 게 밝혀졌다.

오키나와에서 진행되는 2차 스프링캠프에도 합류하지 못했다. 컨디션이 올라오지 못한 듯하다. # 양상문 감독은 컨디션이 올라오면 오키나와에 언제든지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시범경기에서는 그런대로 좋은 성적을 거뒀고 2군에서 5월 12일을 기준으로 4할 6푼 2리의 맹타를 쳤다.

6월 18일 경기까지 2군에서 108타수 44안타, 타율 0.407를 기록하였다.

6월 21일 주간야구에서 이병규를 1군에서 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얘기했는데, 양상문 감독은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더 주기 위해 이병규를 올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6월 말 이병규가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8월 8일 경찰과의 퓨처스 리그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복귀전에서 1타수 1안타 2볼넷을 기록했다.

복귀한 후에도 퓨처스 리그에서 5경기 13타수 7안타 4볼넷 0피삼진, 타율 0.538로 맹타를 휘둘렀다. 8월 16일까지 누적 타율은 0.421.

한편 2군에 있는 동안 김광삼을 살렸는데, 이는 김광삼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9월 확대 엔트리 때 1군에 등록되어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결국 8월 31일 기사로 확대 엔트리 시행 후에도 이병규 콜업은 하지 않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과거 양상문이 롯데 감독을 하던 시절에 2군에서 맹타를 휘둘렀으나, 양상문 감독이 기회도 안 주고 떠밀 듯이 은퇴시켰던 박정태가 생각나는 부분이다.[32]

'100% 가동' LG, 전력질주로 가을야구 향하다 위 기사에 따르면 양 감독과 프런트는 이병규(9번)의 콜업 시기를 조율 중이다. 아직 확실한 시점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최소한 정규시즌이 끝나기 전에는 이병규를 1군에 올릴 계획이다. LG 구단 고위관계자는 15일 “감독님께서 이 부분을 두고 매일 고민 중이시다. 확실한 점은 순위가 어느 정도 정해지는 시점이 되면, 이병규를 올린다는 것이다. 이병규가 끝까지 1군 무대에 오르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고 전했다. 라고 한다.

10월 6일 부로 LG가 4위를 확정지음에 따라 10월 8일 두산과의 정규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1군에 등록되었다. 당초 양상문 감독은 4위를 확정지으면 마지막 경기에는 1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전 시키겠다고 공언을 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4위를 확정짓자 엘지팬들은 큰 기대를 하였으나 정작 경기 당일이 되니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고 대타로 대기한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이병규를 3번타자 우익수로 선발 출전시키려 했으나, 이병규 본인이 선발로 뛸만한 몸상태가 아니라고 고사하였다. 퓨처스리그가 이미 한 달 전에 모든 일정이 끝나버린 상황이었고, 콜업 시기가 늦는 바람에 이병규 본인이 다시 몸을 만들기에 시간이 모자랐다고 한다.

4회말에 니퍼트의 구원 등판에 맞춰 대타로 나와 안타를 쳤으나 작뱅이 홈으로 들어오다 아웃되어 타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1군 경기는 올해 처음인데다가 상대 투수인 니퍼트는 선발이 아니라 불펜으로 나와서 투구수도 많지 않던 시점에서[33] 절묘한 안타를 기록했다. 적토마의 클러치 히터로서의 능력을 느끼게 하는 스윙이었다. 다만 같은 이름을 가진 민폐 중의 민폐가 아웃을 먹어버려[34] 타점을 추가하지는 못했다.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도 제외되었다. 부인의 인스타에 의하면 여행을 떠난 듯하며,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결국 2016년 11월 25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미련은 남아 있었지만, 보류선수명단 공시를 앞두고 협상 테이블에서 옥신각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같다는 생각에, 현역 마무리도 LG에서 끝내자고 결심한 후 보류선수명단 제출 전날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게다가 은퇴 의사를 밝힌 날은 그의 음력 생일이라고 한다.

한편 이병규가 영구결번이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통산 2000안타를 쳤으며 30-30도 했고, 사이클링 히트도 기록했으며 LG에서 20년동안 뛰면서 팀 공헌도가 굉장히 높았다. 생각해 보자. LG에서 앞으로 그 누가 이병규의 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
만일 영구결번이 이뤄진다면 1999년 김용수에 이은 LG의 2번째 영구결번이 된다.

2017년 6월 21일, LG 트윈스 구단 측에서 은퇴식 일정을 공개함과 동시에 이병규의 등번호였던 9번을 영구 결번하기로 결정, 발표했다.

4.8. 2017 시즌

파일:2017070901000436100030571.jpg

2017년 7월 9일 잠실 한화전에서 은퇴식과 함께 영구결번 지정 행사가 진행된다.

LG 트윈스/2017년/7월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파일:0000399823_001_20170718152714944.jpg
적토마의 9번은 2017년 7월 18일부터 LG의 1호 영구결번 노송과 함께, 잠실야구장 내야에서 LG의 경기를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은퇴하자마자 후배의 음주운전 사실이 밝혀지면서 전설의 은퇴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윤지웅 본인은 누구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잘못만 시인했으나 이병규가 참여한 구단 회식에 참여한 뒤에 사고가 생겼다고 잘못 보도되었다. 이병규 본인은 회식에 참여하지 않고, 가족들과 집에 있었다고 한다.

5. 국가대표 경력

연금점수는 75점이다. 성적에 비해서는 박용택과 함께 국가대표 경력이 그리 크지는 않다. 물론 발탁 자체가 한번인 박용택보다는 훨씬 낫다.

5.1.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대표팀은 결승에서 일본에게 아쉽게 패배, 준우승했다.

5.2.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1997시즌 KBO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리그 탑 외야수로 올라선 이병규는 사상 첫 최정예 드림팀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상당한 국민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출범한 팀이었다. 사상 첫 프로선수들 중심의 정예 A대표팀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역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비롯해 미국 진출을 확정지은 서재응, 김병현의 합류는 이러한 기대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은 대만, 일본[35], 중국을 모두 이기고 6승 0패로 전승 우승의 업적을 거뒀다.

이병규 역시 대회내내 박재홍, 심재학과 함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일본과의 예선 1차전, 예선 2차전[36] 중국과의 4강전에서 홈런을 터트리며 대회 홈런왕[37]에 오르기도 했다.

5.3.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4홈런 맹타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이병규는 1999년 시즌 후,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다시 한번 선발된다.

일개 지역대회에 불과했지만 해당 연도의 대회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을 겸한 대회였기에 중요도가 매우 높았다.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중국[38], 태국, 대만, 일본을 모두 격파하고 전승 우승을 차지했다.[39]
또한 대회 우승의 부상으로 올림픽 본선의 직행티켓까지 얻어냈다.

이병규는 지난 아시안게임과 달리 홈런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이번 대회 역시 팀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며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또한 지난 아시안게임부터 국제대회 11연승이라는 기분 좋은 기록을 남긴 채 귀국할 수 있었다.

5.4. 2000 시드니 올림픽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9 37 13 2 0 0 4 6 .351 .385 .405 .790 4 7 2 -
지난 두 번의 국제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친 이병규는 1999~2000년 말 그대로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99시즌 30-30클럽과 안타왕, 2000시즌 안타왕을 기록한 이병규가 올림픽 본선에서 대표팀의 주전 외야수로 발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병규는 팀의 주전 외야수이자 테이블 세터로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치른 9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입지를 과시했다.

이병규는 팀에서 가장 많은 타석을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0.385의 출루율과 4개의 도루로 상대 배터리를 완벽하게 흔들었다. 또한 6득점을 기록하며 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였다.

테이블 세터로서 출루에 집중했기 때문에 비록 홈런은 없었지만, 2루타 2개를 비록해 0.351의 타율은 그의 타격이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먹힐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러한 이병규의 활약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일본[40],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아공을 꺾고, 5승 3패로 동메달 획득에 성공했다.

이 당시 김응룡호가 딴 동메달은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다.

5.5.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6 22 8 1 1 0 5 9 .364 .400 .500 .900 1 5 3 -
지난 3번의 A대표팀이 출전한 국제대회에 모두 개근한 이병규는 이번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 역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종범, 박재홍과 함께 주전 외야수로서 호흡을 맞출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 대회[41] 홈런왕 출신인 이병규는 이번 대회에서 단 한개의 홈런도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표팀이 치른 6경기에 모두 나와 0.364의 고타율과 9개의 득점으로 팀의 테이블세터로서 역할을 100% 이행했다.

이번 국제대회 역시 맹타를 휘두른 이병규의 활약에 힘업어 대한민국 중국[42], 일본, 대만[43], 필리핀을 꺾고 6승 0패로 전승우승에 성공했다. 이병규는 이로써 2개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됐다.

5.6. 2006 WBC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7 26 4 1 0 0 3 4 .154 .179 .192 .371 0 6 1 -
2003년, KBO리그에서 부상으로 시즌아웃을 겪은 이병규는 당해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불참했다.

이전에 이병규가 참가한 4번의 국제대회에서 모두 최고의 성적을 거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대만, 일본에 패하며 2004 아테네 올림픽 본선진출에 실패했다. 이로써 대표팀 내에서 이병규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병규는 부상 복귀후 2004~2005년 다시 리그 탑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WBC 직전 시즌인 2005시즌에 타율 1위, 안타 1위로 2관왕 석권하며 당당히 2006 WBC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됐다.

이병규는 대회기간 동안 이종범과 함께 팀의 주전 외야수 겸 테이블 세터로서 출전했다. 하지만 종전의 국제대회들과 달리 이번 대회에서 최악의 부진을 경험했다.
팀이 치른 7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고작 0.154의 타율을 기록했다. 장타도 2루타 하나 뿐이었다.

첫 경기인 대만전부터 꼬였었다. 1번타자 겸 좌익수로 출전했지만 4타수 0안타를 기록했다. 잔루도 2개나 남겼다.

뒤이은 1라운드 중국전 4타수 2안타(2루타 1)와 2타점-2득점, 일본전 3타수 1안타와 1타점을 기록했지만
2라운드 멕시코, 미국, 일본과의 경기에서 12타수 2안타, 1볼넷 만을 기록했다.
결국 이병규는 4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4타수 1안타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비록 이병규 개인으로서는 최악의 타격 부진을 겪었지만 대한민국은 메이저리거들이 즐비한 미국, 맥시코, 일본을 비롯한 팀들을 상대로 승리하며 6승 1패, 대회 3위를 기록했다.

5.7.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이미 1998년, 2002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건 이병규는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김재박호의 일원으로 다시 한번 출전했다.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우승해야 본전일 정도로 국민들의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었다. 지난 2번의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연초 열린 유일한 야구 메이저 국제대회인 WBC에서 기적같은 3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재박호는 연초 WBC에 참가한 대표팀과는 전혀 다른 팀이었다. 2006 WBC 당시 미국에서 뛰던 박찬호, 서재응, 김병현, 김선우, 봉중근, 구대성과 일본에서 뛴 이승엽이 모두 불참하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또한 과한 자신감으로 김재박 감독은 KBO리그의 최정예 선수들을 제외한 채 군미필 선수들을 중심으로 엔트리를 꾸렸다. 이 당시 엔트리에서 무려 10명 이상이 A급 국제대회 출전이 처음인 선수들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병규는 종전 대회들처럼 테이블세터가 아닌 3번타자로서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별 다른 활약 없이 팀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투타 부진속에서 대한민국 일본, 대만에 패하며 동메달에 만족해만 했다.

5.8. 2007 대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6시즌 종료후 일본 프로야구로 진출한 이병규는 입단 첫해인 2007시즌 매우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니치 드래곤즈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을 겸한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 유일한 타자 해외파 선수로서 출전하게 됐다.[44]

당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일본, 대만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여 올림픽 본선티켓 획득과 4년전 동 대회에서의 경험을 설욕한다는 목표로 대회에 임했다.

4년전 동 대회에서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이병규는 이번 대회에서 주전 외야수로서 출전하며 대만, 필리핀전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대표팀이 일본에 3:4 석패하며 우승에 실패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최종예선을 통해 올림픽 본선에 재도전해야하는 처지로 밀려났다.

6. 연도별 성적

6.1. KBO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7 LG 126
(1위)
495 .305 151
(3위)
31
(4위)
8
(2위)
7 69 82 23 43 .442 .368
1998 124 499 .279 139 31
(4위)
5
(5위)
9 67 75 11 36 .415 .329
1999 131 550 .349
(2위)
192
(1위)
43
(1위)
8
(3위)
30 99 117
(2위)
31 34 .620 .394
2000 129 527 .323 170
(1위)
28 1 18 99 99
(3위)
14 52 .482 .383
2001 133
(1위)
542 .308 167
(1위)
30
(5위)
4
(4위)
12 83 107
(1위)
24 54 .445 .373
2002 109 389 .293 114 25 0 12 43 54 9 50 .450 .375
2003 44 154 .279 43 9 2 5 30 20 1 21 .461 .365
2004 129 496 .323
(5위)
160
(3위)
26 2 14 64 95
(2위)
8 50 .468 .397
2005 119 466 .337
(1위)
157
(1위)
24
(6위)
2 9 75 62 10 34 .455 .388
2006 120 478 .297 142
(3위)
29
(2위)
1 7 55 51 3 31 .406 .344
2010 117 404 .290 117 14 1 9 64 49 3 36 .396 .345
2011 127 485 .338
(3위)
164
(2위)
24 0 16 75 64 2 28 .487
(5위)
.375
2012 118 420 .300 126 25 1 5 41 52 5 22 .400 .333
2013 98 374 .348
(1위)
130 19 3 5 74 39 2 22 .455 .384
2014 62 195 .251 49 6 0 2 25 23 1 8 .313 .288
2015 54 96 .219 21 7 0 1 9 3 0 5 .323 .255
2016 1 1 1.000 1 0 0 0 0 0 0 0 1.000 1.000
KBO 리그 통산
(17시즌)
1740 6570 .311
2043
371
(10위)
38 161 972 995 147 526 .452 .365

6.2. NP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7 주니치 132 478 .262 125 23 1 9 46 43 0 23 .370 .295
2008 105 418 .254 106 16 2 16 65 40 1 23 .416 .293
2009 28 101 .218 22 3 0 3 8 14 0 5 .337 .255
NPB 통산
(3시즌)
265 997 .254 253 42 3 28 119 97 1 51 .386 .290


[1] 참고로 진학 당시 단국대라고 하기에 집과 가까운 한남동 캠퍼스를 통학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천안캠퍼스였다고 한다. 물론 이병규가 진학할 때 단국대 야구부 숙소가 서울에 있기는 했다. [2] 당시 단국대는 최만호, 김재걸, 심성보, 강동우와 같은 프로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들이 있었다. 특히 동기인 최만호는 대학 시절 단체 훈련이 끝나면 이병규와 함께 웨이트와 스윙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3] 이병규를 놓친 OB는 1차 지명으로 한양대 투수 이경필을 뽑는다. 이경필은 데뷔 초기였던 97~99년까지만 해도 선발투수로 자리잡아 이닝 잘 소화해 주고 준수한 성적을 거둬주며 둘 다 윈-윈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병규가 그 이후 롱런하며 LG의 프랜차이즈로 자리잡은 반면 이경필은 99년 이후로는 점점 하락하는 성적에 투수가 부족한 두산의 사정상 재활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부상에 신음해왔고, 결과적으로 2004년 말 병역비리에 연루된 뒤 선수 생명이 사실상 끊겼다. 서른이 넘어 공익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다시는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2007년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4] 컴투스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선수 카드 이미지로 사용된다. [5] 왼쪽부터 이병규, 유지현, 김동수. 세 명 모두가 LG의 신인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촬영 시기는 1999년 여름으로 추측된다. 당시 LG가 민소매 유니폼을 하계 유니폼으로 도입하였고 그 해 시즌 종료 후 김동수가 삼성으로 이적했기 때문. 여담으로 이 해에 세 명 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2021년을 기준으로 1군에서 감독, 수석코치, 타격코치로 함께했었다. [6] 1997년 신인왕 수상 당시 성적이 0.305/7홈런/69타점/23도루. 상식대로라면 테이블 세터로 기용되었어야 했지만 2번 자리에 동봉철[45]이 있었기 때문에 4번 심재학과 하위 타선의 김동수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5번 타자에 자리했다. [7] 최익성은 3할 타율을 치지는 못 했지만 20-20을 했고 신동주는 아예 타율이 0.326으로 이병규보다 더 높았다. [8] 1위는 2022년의 이정후. [9] 참고로 저때 당시에는 수비 WAR을 계산하지 않을 때라 넓은 잠실을 홈으로 쓰는 발빠른 중견수 이병규라면 수비 스탯을 반영했을때 종합 WAR이 더 올라갈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0] 이 시즌 1타점이 부족해 30홈런 100타점에 실패했던 이후 LG에서는 2024년 외국인 타자인 오스틴 딘이 구단 역사 최초로 달성했다. [11] 당시 전문가들은 이병규가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지만 이병규는 그 다음 시즌에 완벽하게 부활한다. [12] 실제로 한 해에도 1번과 3번을 왔다갔다한 적이 부지기수다. 1번과 3번의 임무가 천양지차인 점을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이 느껴진다. 더 이병규가 대단한 것은 어느 타순에 가도 중간 이상의 결과를 끌어냈다는 것. 이는 같은 팀의 박용택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에 따라 1번과 클린업을 오갔으며 강한 2번 드립도 종종 나왔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4번 자리는 친 적이 별로 없는데, 2010년이 그나마 유일하다. 2001년부터 일본 진출 전까지 4번을 친 선수들은 댄 로마이어(2001, 퇴출 후에는 양준혁)→매니 마르티네스(2002~03)→ 박용택(2004~06)이었다. 그리고 박용택은 4번 타자 도루왕을 기록한다. [13] 세이버나 타 선수와의 스탯을 비교해 보면 투고타저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은 시즌이라 절대 평범하지는 않았다. [14]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활약 영상도 안 보고 뽑았다. 당시 이병규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그리고 이병규에게 주전 중견수라고 발표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 이후 이병규가 부진했을 때도 오치아이는 그를 2군으로 강등하는 게 아닌 타순을 조정해 선발 출장 시키기도 했다. [15] 다만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좌타 외야수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병규와 후쿠도메는 상당히 다른 유형이다. 이병규는 KBO에서 타율 대비 출루율이 낮은 대표적인 선수로 커리어 내내 한 시즌도 4할 이상의 출루율을 기록하지 못한 반면 후쿠도메는 MLB 진출 이전 NPB에서의 9년간 절반 넘는 5시즌의 출루율이 4할 이상이었다. 이 중 3회는 출루율 리그 1위일 정도로 높은 출루율이 강점인 선수였고 먹튀 소리를 들은 MLB에서의 5시즌 통산 타율도 0.258에 그쳤지만 출루율은 그보다 1할 이상 높은 0.359로 양호했다. NPB에서 3년간 타율 0.254, 출루율 0.290이었던 이병규와는 확연히 다르다. [16] 출처 [17] 컨택은 2007년에 비해 저하돼 시즌 초에 팀 내 최저 타율 및 최다 삼진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오치아이 감독이 2군에 내리지 않았던 건 향상된 장타력 때문이었다. (다만 결국 낮은 타율에 부진이 길어지자 6월 중에 2군에 보내긴 했다.) 당시 나왔던 장타의 대부분이 쌓이고 쌓여 우리가 흔히 아는 라뱅쓰리런이 된 것이기 때문. 실제로도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외국인 타자에 대해 '현장에서 봤을 때 외국인 타자는 경기에서 임팩트를 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병규를 감싸는 의도의 인터뷰였던 셈. 2007년, 2008년 스프링캠프 모두 '이병규의 주전을 보장한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이 때 활약 덕분에 이병규는 재계약을 위해 2009 시즌 목표를 3할-20홈런으로 잡고 준비를 하게 된다. [18] 본인도 한국 복귀시 '방출당한 게 아니라 그냥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19] 이병규의 WAR은 KBO리그에서 일본프로야구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타자 중 손 꼽힐 정도로 낮은 편이다. 비슷한 클래식 성적을 기록하고 함께 일본 진출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종범도 3년+8경기 동안 WAR 6.3, wRC+ 103을 기록하며 용병으로는 부족해도 년 평균 1군 주전급이라 볼 수 있는 성적을 남겼으며, 1시즌과 31경기만에 돌아간 김태균은 WAR 2.0, wRC+ 112. 사실상 2군에만 있었던 이범호가 48게임 동안 WAR -0.2를 기록한 덕에 최하위를 면한 정도이다. 이외에 하재훈 역시 WAR -를 기록하면서 이병규보다 낮았고, 용병 쿼터는 아니지만 1군을 아예 못 밟은 신성현이나 송상훈까지 따지면 일본에서 이병규보다 실패한 선수가 없는 건 아니다. [20] 현재는 2014-2017년에 뛰었던 루이스 크루즈의 출루율 0.273로 기록이 경신된 상태다. [21] 실제 NPB 2군 성적을 보면 KBO 리그에 나왔던 성적과 매우 흡사했으며, 매번 2군 폭격 → 1군 부진 → 2군 강등 패턴이 반복되었다. 사실상 수치로 봤을 때 수준차로 인한 실패가 분명한 셈. [22] 리그 최고의 강견이라 평가받으면서 주니치의 중견수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타선에서도 적당한 장타력으로 후쿠도메와 우즈의 뒤를 받치는 5, 6번 타자로 활약했다. 주니치와 재계약에 실패한 이듬해인 2007년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해 2년간 준수한 성적을 낸 뒤 은퇴했다. [23] 특히 07년 일본시리즈에서의 활약이 아주 좋았다. 이 때 차지한 우승이 53년 만의 우승임을 감안하면 임팩트는 더 컸다. [24] 추가로 해당년도 후지카와 큐지는 63경기 출전 8승 1패 38 세이브 ERA 0.67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당해년도 피홈런도 고작 2개로 그 2개 중 하나를 이병규가 그것도 끝내기로 기록한 셈. 참고로, 엄청난 비율 스텟에도 불구하고 후지카와의 세이브 숫자 등 볼륨이 다소 부족한 이유는 당해년도 시즌 중반 쯤 올림픽에 차출되어 누적 스텟은 다소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이를 제외하고, 비율 스텟 세부 스탯 세이버 스탯은 난공불락 마무리에 걸맞은 성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대략 2011 오승환 정도 수준의 투수였다고 보면 된다. [25] 예) 땅볼 시 "라뱅 땅볼쓰리런ㅋㅋㅋㅋㅋㅋ", 병살타가 나올 시 "라뱅 병살쓰리런ㅋㅋㅋㅋㅋㅋ" 등. [26] 국내 복귀 후 추가된 항목. 삼국지 8의 한 장면을 캡처해 만든 이 짤방이 ' 야갤러 감별짤방'으로 사용되면서(정상인이면 '장합 쓰라린'으로 읽지만, 야갤러 라면 '장합 쓰리런'으로 잘못 읽는다.) 퍼진 말이다. '쓰라린'과 '쓰리런'을 한글로 썼을 때 시각적으로 비슷하기 때문. [27] 그런데 LG 프런트에서 필요한 건 안 사주고(선발투수), 자꾸 쓸데없는 것(외야수)만 사다주니 문제... 한편 이 때 작은 이병규가 발굴되긴 했다. [28] 정작 5월 1일 문학 SK전에서는 작은 이병규와 함께 4회초에 홈런을 기록했다. 물론 12:1로 벌어진 상황에서 친 홈런이지만. [29] 5월 11일 청주 한화전에서 9회초 2아웃에 대타로 나섰는데 삼진당하며 류현진의 9이닝 17K 신기록의 허용타자가 되었다. [30] 이 사진에 나와있는 것은 엠스플에서 메이저리그에서 사용하는 핫&콜드존을 도입해 스트라이크존 코스별로 타율을 표출 한 것. 빨간색은 그 코스에 강하다는 표시, 파란색은 그 코스에 약하다는 표시 되시겠다. [31] 특히나 코너 외야수라면 더욱 안 좋은 수치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뭐. 거기다 2012년은 투고타저였으니 어느 정도의 하락은 감안할 수 있으며, 비슷한 스탯을 찍은 2010년보다 wRC+가 높다는 점에서 이 해 성적이 절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박종윤과 자웅을 겨루는 타출갭은 여전히 흠이라면 흠. [32] 박정태는 실제로 양상문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한 번 써보지도 않고 대놓고 홀대했고, 결국 그 해 겨우 30대 중반의 나이로 은퇴했다. 반면 이병규는 양상문이 감독이었던 2014, 2015년 지명타자로 300타석 정도를 뛰었으나 OPS 0.600도 간당간당한 비율스탯에 WAR 음수를 찍으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다. 2년 연속으로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양상문이 그를 제외한 것이고, 냉정히 말해서 이미 나이 마흔을 넘었고 에이징커브가 온 이병규가 1군에서 잘 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건 사실이나, 2020년 현재 감독인 류중일을 비롯해서 어떤 감독이었어도 마흔 살이 넘은 지난 2년간 OPS 6할대에 WAR이 마이너스인 지명타자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2군에서 4할 중반을 치는 선수라면 이전 2년의 활약과 무관하게 확대 엔트리 시기에는 올렸어야 한다는 게 팬들의 의견이지만 2016 LG는 마지막까지 순위 싸움을 했었기때문에 이병규를 콜업시키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7번 이병규가 시즌 내내 부진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콜업해 보는 게 맞지 않았냐는 의견도 있다. 지명타자로 나왔다지만 수비가 불가능한 선수도 아니고. [33] 니퍼트가 불펜으로 나오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긴 하다. 투구수가 좀 있는 시점에서 그 날 컨디션이 보이는 천생 선발. [34] 당시 좌익수 박건우의 송구가 정확했기에 보살로 볼 수도 있지만 2아웃 상황에서 안타가 나왔는데 3루 주루 중 뒤를 돌아봤다. [35] 프로가 아닌, 실업야구 선수들 중심의 팀이다. 일본은 아시안게임만큼은 최정예 멤버를 뽑지 않고 실업리그 위주로 뽑았는데, 일본 실업야구는 NPB 3군이라 불릴 정도로 언제든 NPB 구단에서 지명이 가능할 정도로 프로야구 선수들과 수준 차가 크지 않아 충분히 위협적인 편이다. [36] 멀티홈런 [37] 4개, 물론 이 당시 아시안게임이 나무배트가 아닌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 [38] 2번 [39] 5승 0패 [40] 2번 [4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42] 2번 [43] 2번 [44] 투수에는 현역 메이저리거인 박찬호, 류제국이 포함됐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426
, 8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426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45] 이 때 김재현은 신장염으로 97 시즌 내내 나오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