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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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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대회는 시범 종목.
11회 12회 13회 14회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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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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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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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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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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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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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17회 18회 19회 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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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광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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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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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항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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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아이치·나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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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75
대륙간컵
1976
하를럼 베이스볼 위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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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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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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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야구 선수권
1980
서울컵
1980
세계 야구 선수권
1981
월드 게임
1981
대륙간컵
김응룡호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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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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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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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1년|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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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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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2
세계 야구 선수권
1983
대륙간컵
1984
세계 야구 선수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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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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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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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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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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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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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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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86
세계 야구 선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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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IBAF 야구 월드컵
1988
서울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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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AF 대륙간컵
성기영호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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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김병우호
1988
김충남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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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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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AF 대륙간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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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AF 대륙간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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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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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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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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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rowcolor=#ffffff>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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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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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김충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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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이 분기점이 되는 이유는 KBO 리그 소속 선수 선발을 책임지는 KBO가 참여하기 시작한 대표팀이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이기 때문이다.
1998년 이후 A급 야구 대표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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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참가 선수3. 예선과 본선4. 결승전5. 한국팀 관련
5.1. 대회 전 분위기5.2. 대회 개막, 그리고 결승까지5.3. 결승전 패배 원인5.4. 대회 이후
6. 여담

1. 개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야구 종목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야구는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으나, 북경 대회 당시는 대한민국, 일본, 중국, 대만 4개국만 참여했기에,[1]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실질적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제대로 진행되는 첫 야구 대회였다.

특징으로는, 프로선수들의 참가가 금지된 상태에서 아마추어 선수들의 참가만 허용이 되었고,[2] 아마야구답게 알루미늄 배트를 먼저 선보임으로 시작이 되었다.

현재는 사라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홈구장인 히로시마 시민구장, 구레시니코야 야구장, 히로시마 코카콜라 야구장 등 3개의 구장에서 경기가 펼쳐졌고, 대회 방식은 대회 참가 6개국끼리 A/B 두 조로 나누어 예선을 치르는 경기였다.

A조는 일본/중국/태국, B조는 한국/대만/몽골

2. 참가 선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명단
감독 1명 김충남(연세대학교 감독)
코치 2명 김병일( 한국화장품 감독), 윤병선(건국대학교 감독)
투수 7명 위재영(인하대),[3] 임선동(연세대),[4] 전병호(영남대), 문동환(연세대),[5] 조성민(고려대),[6] 차명주(한양대), 손민한(고려대)
포수 3명 최기문(원광대), 진갑용(고려대), 권오영( 상무)[7]
내야수 6명 홍원기(고려대), 백재호(동국대), 강혁(한양대),[8] 안희봉(연세대),[9] 김종국(고려대), 김재걸(단국대)
외야수 4명 박재홍(연세대),[10] 이병규(단국대), 이영우(건국대), 조경환(고려대)[11]

3. 예선과 본선

예선
A조
순위 국가
1위 일본 2 0
2위 중국 1 1
3위 태국 0 2
일본(1승) 25-2(5회 콜드 게임) 태국(1패)
중국(1패) 1-10 일본(2승)
태국(2패) 1-16(6회 콜드 게임) 중국(1승 1패)

B조
순위 국가
1위 한국 2 0
2위 대만 1 1
3위 몽골 0 2
한국(1승) 21-0(5회 콜드 게임) 몽골(1패)
대만(1패) 0-9 한국(2승)
몽골(2패) 0-20(5회 콜드 게임) 대만(1승 1패)

5위 결정전
태국 20-3 몽골(5회 콜드 게임)

준결승
한국 14-0 중국(7회 콜드 게임)
일본 13-3 대만(7회 콜드 게임)
동메달 결정전
중국 4-9 대만

4. 결승전

팀명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R H E
일본 0 0 0 2 0 0 2 0 2 6 0 0
대한민국 0 0 0 3 0 0 0 0 2 5 0 0

한국과 일본은 각각 조 1위 및 콜드게임으로 올라왔다. 특히 대회 2달 전인 1994년 8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서로 1승 1패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12] 그만큼 일본 내에서는 관심이 많았으나, 국내에서는 관심이 적었다.[13] 오히려 축구와 마라톤이 눈에 띄게 많이 알려졌다.[14]

한국은 선발투수 문동환이 경기중반까지 호투하며 일본타선을 막아냈지만, 구원투수로 등판한 조성민의 난조로 아쉽게 패배한다.

경기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4회초에 먼저 2점을 허용했지만, 5회 2사 1·2루서 안희봉이 3점홈런을 터뜨려 3-2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이후 7회 무사 1루에서 상대의 희생번트를 어설프게 처리하다 안타를 만들어주면서 2사 2·3루의 위기를 맞았다. 여기서 대타 다카기 다이세이가 투수 키를 넘는 빗맞은 타구를 쳤는데, 유격수와 2루수가 타구처리를 서로 미루다가 2점을 내줘 4-3으로 재역전당했다.

그렇게 9회초에 일본은 추가 2득점을 하였고, 9회말에 한국은 추격전을 했으나 결국 주저앉고 1점차로 패배하였다.

5. 한국팀 관련

5.1. 대회 전 분위기

5.2. 대회 개막, 그리고 결승까지

5.3. 결승전 패배 원인

5.4. 대회 이후

6. 여담




[1] 금메달 대만, 은메달 한국, 동메달 일본. [2]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때부터 허용된다. [3] 태평양 돌핀스 기지명. [4] LG 트윈스 기지명. [5] 롯데 자이언츠 기지명이었으나 실업야구 팀인 현대 피닉스에 입단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동환 문서 참고. [6] 훗날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7] 한화 이글스 기지명. [8] OB 베어스가 강혁을 기지명했는데 강혁이 한양대를 입단해서 강혁은 KBO에서 영구제명 됐다. 4년 뒤 활약으로 영구제명이 풀린 후 1999년 프로에 입단했다. [9] 태평양 돌핀스 기지명. [10] 해태 타이거즈 기지명. [11] 롯데 자이언츠 기지명. [12] 예선에서는 일본 승리, 준결승에서는 한국 승리. [13] 동시기에 한국에서는 KBO 포스트시즌이 진행중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아마선수들이 출전하는 아시안게임 야구에 대한 관심도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14]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때까지는 축구의 나이제한이 없었기에 최정예멤버들이 출전했다. 또한 마라톤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황영조가 출전했다. 당연히 축구와 마라톤에 전국민적인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5] 최종순위는 쿠바에 이어 2위. [16] 고교시절의 부상 영향으로 병역이 면제된 상태였다. [17] 특히 심재학은 대학시절 국가대표 4번타자를 도맡았던 선수였다. [18]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대회. [19] 경기 자체는 한국이 연장 끝에 6대5로 승리한다(조성민에 이어 등판했던 투수는 차명주- 임선동) . 그리고 이 경기 승리로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티켓도 획득하게 된다. [20]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듬해인 1995년에는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2위, 1995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위(올림픽 본선티켓 획득) 등 성과를 내기도 했다. [21]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부진에 묻혔지만, 김충남 대표팀 감독은 1994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2위, 1995년 유니버시아드 2위, 1995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위(올림픽 본선티켓 획득) 등 성과도 적지않게 있는 감독이다. 계속 2위만 기록하지 않았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1990년대 중반 세계 아마야구는 쿠바 전성기 시절로써, 세계대회에서 쿠바의 벽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외 미국이나 일본 등이 까다로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22] 특히 병역혜택이 걸린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이와 같은 논란이 더욱 두드러졌다. [23] 1996년 당시 (타자 기준) 92학번의 김종국, 박재홍, 이영우, 홍원기 등이 졸업과 동시에 프로에 진출함에 따라 대표팀의 타선이 그전보다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속에서 김동주까지 대표팀에서 제외함으로써, 안 그래도 약화된 전력을 방임한 셈이었다. 참고로, 김동주를 대신해서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발탁된 몇몇 선수들은 대회내내 부진했고, 이로 인해 1996년 당시에도 엔트리관련 인맥 논란-나눠먹기 논란 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24] 상대적으로 (고려대 소속) 조성민 손민한은, 주로 불펜으로 투입되거나 약팀 상대 선발투수로 투입되는 빈도가 많았다. [25] 대학졸업 후 프로에 바로 입단한 선수들도 있었고, 대학졸업 후 실업팀 현대 피닉스나 군팀 상무 야구단을 거친 다음 프로에 입단한 선수들도 있었다. [26] 프로 12명+아마추어 10명. [27] 첫번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