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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3:17:59

독일 해군(나치 독일)

독일 국방군 해군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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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육군 엠블럼.svg 파일:나치 독일 공군 엠블럼.svg 파일:나치 독일 해군 엠블럼.svg
Heer
육군
Luftwaffe
공군
Kriegsmarine
전쟁해군

파일:독일 해군 로고.svg 독일 해군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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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해군
Kriegsmarine
파일:나치 독일 해군 엠블럼.svg
해군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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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미기 지상기[1] }}}
존속기간 1935년 6월 1일 ~ 1945년 7월 22일
소속 파일:나치 독일 군기(1938–1945).svg 독일 국방군
군종 해군
규모 누적 1,500,000명
최고사령관 에리히 레더
카를 되니츠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어형3. 구성4. 역대 최고사령관5. 역사6. 전력
6.1. 함정
7. 전공8. 해군 기지
8.1. 수상함 기지8.2. 유보트 기지
9. 주요 인물
9.1. 고위 지휘관 및 행정가9.2. 함대 사령관9.3. 수상함 함장9.4. U-보트 지휘관9.5. 그 외
10. 평가11. 대중매체에서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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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5년부터 1945년까지의 존재했던 독일 국방군의 해군. 전간기의 독일 국가해군(Reichsmarine)을 계승했다.

2. 어형

공식 명칭은 "Kriegsmarine"이며, 한국어로는 주로 "전쟁해군"으로 번역된다. 오늘날에는 이 명칭이 사실상 독일 국방군 해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굳어졌으나, 독일 해군만의 고유한 이름은 아니다. 기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공식 명칭인 " 황립 및 왕립 전쟁해군(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이다.

어원은 "Krieg"와 "Marine"의 합성인데, Krieg의 뜻은 "전쟁"이지만 Marine의 원래 뜻은 "해군"이 아니다. Marine 로망스어계 차용어로서 라틴어 " Mare"(바다)에서 왔으며, 그 뜻은 "해상에 관한"(형용사) 및 "그러한 것"(명사)이다. 즉, 선박과 선원 등 "해양력 전반"을 가리키며, 이는 독일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2] 로망스어권에서는 marine의 뒤에 붙는 수식어로써 상선단 어선단, "전쟁선단"(해군)을 구별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세 유럽의 상선단과 해군은 명확히 구별되는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Marine가 평상 시에는 무역에 종사하다가 적성국 선박을 보면 해적질도 하고 필요하면 국가에 의해 징발되어 해군을 구성하기도 했다.[3] 따라서 Marine 또한 상선이 될 수도 있고 전투함이 될 수도 있는 무언가들의 집합이었고, 개별 Marine의 구체적 성격은 현재 수행하는 임무에 따라서 뒤의 수식어로 나타냈었던 것이다. 예컨대 이탈리아어에서 상선단과 해군은 각각 "marina mercantile"(상업함대) "Marina Militare"(군사함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중세 말에서 근대 초 사이 육성되었던 군주들의 직할 선단은 상업활동에는 종사하지 않는 순수 군사력으로서 해군에 가까웠고, 동시기 육상과 해상을 막론하고 국가 내 각종 무력은 군주에게 귀속되는 방향으로 통합되어갔다. 따라서 전쟁이나 군사를 가리키는 말 대신에 군주를 뜻하는 말이 붙은 표현이 곧 해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왕국에서는 "Marine royale"(왕립함대)라는 말이 쓰였으며,[4]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국체에 따라서 프랑스 제국 시절에는 "Marine impériale"(황립해군), 공화국 시대에는 "Marine nationale"(국립함대)로 바뀌었으며, 후자의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독일어권 내에서도 이들 지중해권 해양전통의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에서는 "Handelsmarine"(상선단)와 "Kriegsmarine"(전쟁선단)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반면, 한자동맹을 비롯한 독자적 해양전통을 쌓아올린 북독일권에서는 선단을 가리키는 게르만어계 고유어휘 "Flotte"가 이미 존재하였다.[5] 따라서 상선단은 이미 "Handelsflotte"라고 부르는 것으로 굳어졌고, 나중에 들어온 Marine는 해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전 시대의 독일 제국 해군은 "Kaiserliche Marine"(황립 해군)이라고 불렸다.

과거 밀덕 문화에서는 독일 애호 경향을 지닌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일어 단어들을 그대로 음차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영향으로 리그베다위키 시절의 문서들은 물론이고 현 나무위키에서도 거의 모든 문서들의 나치 독일 해군 서술을 "크릭스마리네"라고 바꿔 적어 놓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역덕이나 밀덕이 아닌 이상 이 명칭을 알아듣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용례상 가리키는 바를 보면 "독일 해군", 혹은 의미를 명확히 하더라도 "나치 독일 해군" 정도로 사용될 뿐인데, 음차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번역하는 편이 언어 순화적 측면에서도 옳다. 위의 어원 설명에서도 보이듯이 크릭스마리네는 무슨 특별한 고유 명사가 아니라 전쟁선단(해군)을 뜻하는 독일어의 오스트리아식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어 화자 관점에서는 "황립해군"이나 "전쟁해군" 등의 표현도 그 어원을 설명하거나 공식 명칭을 밝히거나 특별히 문학적 수사가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번거로우므로 단순히 "해군"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 굳이 음차를 하여 그보다도 더 비직관적인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조상인 독일 제국 해군(SMS, Seiner Majestät Schiff)이나 미국 해군(USS, United States Ship), 영국 해군(HMS, His/Her majesty's ship)와는 다르게 함선 이름 앞에 접두어가 붙지 않는다. 해외 웹에서는 간간이 DKM(Deutsche Kriegsmarine Schiff)이나 KMS(Kriegs Marine Ship)이라는 접두어가 쓰이기는 하나, 이는 개인이 쓰는 것일 뿐 공식적으로 나치 독일 해군은 함선 이름 앞에 접두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3. 구성

파일:external/www.kbismarck.com/kriegsmarine-panzerschiffe.jpg

전진하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6][7]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OKW) 예하의 해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Marine;OKM)가 최선임 기관이었고, 이곳의 총수는 전쟁해군 최고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Kriegsmarine)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Z 계획이 제대로 구현되기도 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전하는 바람에 해군력이 약소했으므로, 함대 단위의 체계[8]를 갖추지 못했다. 예하 부대 단위로 해역사령부(Marineoberkommando), 전단, 전대가 있었다.

해역사령부는 크릭스마리네의 최상급 전투 단위로, 담당하는 구역 역시 가장 넓었다. 사령관에는 상급대장이나 대장 계급의 제독이 맡았다. 한편 항공전대 등을 정식으로 편제하고 운용했던 미국 해군이나 일본 제국 해군과는 다르게 크릭스마리네의 해상작전은 그보다 작은 전단 단위로 치러졌는데, 전단장(Flottenchef)이 여러 함정을 혼성 편제하여 그때그때 임무에 맞게 조직했다 해체하는 임시 조직인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일종의 테스크 포스나 해군판 임무형지휘였던 셈.

또한 일종의 행정 조직에 더 가까운, 함종별로 묶인 전투전대들이 해역 사령부 예하에 배속되었는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어뢰정, 초계정 등 함종별로 묶어 관리하다가 작전시 차출되어 전단을 구성하는 식이었다.

해군 항공대 공군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의 욕망 때문에 사실상 보유하지 못했다.[9][10] 주요 항공기와 승무원, 정비원 등을 루프트바페에서 파견받는 형식으로 운영했는데, 해군에서 전군한 이들 위주로 파견대를 조직했다.

가장 많이 파견된 항공기는 순양함 이상에 함재기로 실리는 수상 정찰기 Ar 196이었고, 지상 발진하여 유보트 등에게 호송선단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장거리 정찰기 Fw 200 등도 파견되었다.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에 탑재될 Bf 109T 전투기 등도 공군 파견대로 조직되었으나, 사실상 건조가 중단된 이후는 지상에서 통상적인 공군 전투기 부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포는 육군과 해군이 분할해 맡았는데,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 프랑스 해안의 해안포 부대는 다수가 해군 산하였다. 대표적으로 파 드 칼레 지역의 해안포 부대들.[11] 이들은 해안포 운용 뿐 아니라 해안 지역의 상륙에 대비한 지상전 및 경계 임무도 수행했으며, 해상 감시 레이더인 제타크트(Seetakt)도 운용했다. 고사포 군단급 이상에만 배치해 그 이하는 공군 파견대에 의존한 육군과 달리, 주요 해군 기지는 자체 방공망을 갖추고 있어 공군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적지 않은 숫자의 해군 육전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부 상륙작전에서는 함 승조원을 차출해 투입했으나 점차 상설 육전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 크릭스마리네의 육전대는 2차대전 개전 당일인 1939년 9월 1일, 베스터플라테(Westerplatte) 전투 당시 구형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차출 편성된 해안 상륙 부대(Marinestoßtruppkompanie)를 단치히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하면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또한 나르비크 전투에서도 육군 산악사단과 함께 최일선에서 상륙작전을 수행[12]한 이래 노르웨이 전역 내내 적지 않은 수가 지상전을 치렀으며,[13] 채널 제도 점령 때도 해군 육전대가 동원됐다. 육전대는 1944년 9월엔 '동쪽 전나무 작전(Operation Tanne Ost)'이라는 이름으로 한 때 동맹국이었던 핀란드의 전략 요충지인 고틀랜드 섬 상륙 작전을 치렀으나 이는 실패했다. 1944년 6월 이후 공군 야전사단과 공수부대가 대폭 증강된 공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상실한 함정과 해군 기지 등의 잔류 인원과 지원 부대 축소 등을 통해 확보한 인력으로 해군 사단(Marinedivision)을 편성해 육군의 지상전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어 1945년 1월에는 6개 사단 40개 연대 규모까지 커졌다. 상당수는 아예 육군으로 사단이 통째로 해군사단이란 이름만 남긴 채 전군되거나[14] 차출된 인원이 육군으로 전군되어 국민척탄병 사단들에 배치되었다.

그 외에, 함정의 설계와 건조 등을 감독했던 조함단(Marineamt)이 OKM의 직할로 존재했다. 다만 독일의 패망과 Z 계획이 사실상 흐지부지되면서, 이들이 설계한 함정들은 대부분 페이퍼플랜으로 남았다.

4. 역대 최고사령관

파일:나치 독일 해군 엠블럼.svg
나치 독일 전쟁해군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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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

파일:external/www.reenactor.net/kriegsmarine1.jpg
크릭스마리네의 모병 포스터[,]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이후 독일군의 무장은 상당히 제한되었는데, 독일 해군은 오직 15,000명의 병력, 10,000톤 미만의 구식 전함 6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어뢰정 12척만 허용되었으며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소유 금지당했다.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는 대양해군은 고사하고 지역해군 노릇조차 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조약에서 제한하는 기준을 무시하고 12,000톤을 넘는 배수량을 가지는 새 군함을 진수해 냈는데 이것이 바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16] 또한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따라 1935년 6월 18일 독일-영국 해군 조약을 통해 독일은 영국 해군의 수상함의 35%, 잠수함의 45%에 달하는 전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전함의 최대 배수량도 35000톤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독일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위반하고 타국에게는 조약을 준수했다고 거짓말을 해가면서 새 전함을 진수했는데 바로 비스마르크급 전함이었다. 그리고 1939년 4월, 유럽에 긴장감이 맴돌면서 독일은 일방적으로 이 조약을 파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 특히 영국 해군과 비교해서 크나큰 열세였다. 알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육군이나 육전대가 대규모로 지속적인 공격을 펼치려면 재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17] 이에 따라 1939년 1월 독일은 새로운 해군 증강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Z 계획이다. Z 계획이 완료되면 독일은 항공모함 4척, 전함 10척, 순함전함 12척 등 대 함대를 보유할 예정이었으나...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결국 Z 계획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18]

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군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독일군의 해상 수송이란 목표를 훌륭히 달성한 것이다.[19] 그러나 노르웨이 전역의 제해권 장악을 위해 벌어진 여러 차례의 해전, 그중 특히 제2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독일 해군의 악몽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를 위시한 영국 왕립 해군은 독일 해군을 작살내버렸고 결국 노르웨이 전역에서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이 격침당하거나 손실되었다. 이는 바다사자 작전 진행에 큰 차질을 가져왔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 작전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1941년 5월, 독일 해군의 최강, 최대의 수상함인 비스마르크가 비스마르크 추격전 끝에 격침당해 독일 해군은 더더욱 전면전을 기피하게 된다.

개전 초기 죄다 털려버린 수상함대와는 달리, 유보트를 필두로 한 잠수함대는 영국, 소련[20] 등으로 가는 수송선들을 대거 격침시키면서 연합군, 특히 영국의 보급과 경제 사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상함대는 1942년말 벌어진 바렌츠 해 해전에서 완전 망신을 당하고 전력의 다수를 상실했다. 이에 격분한 히틀러는 독일 해군의 대형함의 해체를 지시했고 이에 반발하여 에리히 레더 제독이 사임하였고, 후임인 카를 되니츠 제독의 설득 끝에 대형함 완전 해체 명령은 취소되었으나, 히틀러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의 건조 중지를 명했고, 수리를 기다리던 그나이제나우가 해체된다. 이때 살아남은 대형함인 샤른호르스트 티르피츠는 연합군의 북극 항로 견제를 위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해안에 배치 되었다가 샤른호르스트는 1943년 12월 26일 KGV 3번함 듀크 오브 요크에 의해 격침당했고, 티르피츠는 1944년 11월 12일 영국군의 공격레이드끝에 톨보이에 직격을 맞고 격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말부터 유보트에 의한 전술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는데, 이는 미국의 참전, 호위 항공모함의 개발[21]로 인하어 에어갭(Air Gap)[22]이 닫힌 점, 기존의 폭뢰에 비해 명중률이 대폭 상승한 헤지호그 폭뢰의 개발 및 실전배치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군의 암호인 에니그마가 털려버린 것으로 이를 통해 연합군은 유보트의 모든 작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독일 해군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결국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을때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했으며 재해권 또한 빼앗겨 벼렸다.

1945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상황이 더더욱 암담해졌다. 그때쯤 되면 독일 공군은 전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 해군 함정들은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였던 군항에서조차 무차별 공습을 당해야 했고, 결국 수많은 소형 함선들과 구축함, 유보트, 심지어는 아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드미럴 셰어나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쾰른 등 대형함들까지 항구에서 가라앉게 된다. 급기야 전쟁 말인 1945년 4월에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까지 자침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형함인[23]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 프린츠 오이겐은 전후 미국에게 넘어가 1946년 7월 비키니섬 핵실험에 사용되었다.

6. 전력

6.1. 함정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해군 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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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함 <colbgcolor=white,#191919> 구축함 1934, 구축함 1936, TA16급, 구축함 1937, 구축함 1938, 구축함 1942, 구축함 1944, 구축함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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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공

군함 총합 80척 격침.

유보트를 위시한 크릭스마리네였기에 잠수함, 즉 유보트로 세운 전과가 상당히 많다. 당장 전함 부분에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이 격침시킨 후드를 제외한 버럼[32]과 로열 오크[33]는 유보트로 인해 격침되었으며, 항공모함 역시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의 포격으로 침몰한 글로리어스를 제외하고서는 전부 유보트로 세운 전과다. 순양함 부분은 3척을 제외하고서는 역시 전부 유보트의 전과.

물론 여기에 언급된 전투함 격침 전과 외에도 비전투함을 격침하여 해상보급을 방해한 전과, 통상파괴 역시 높게 평가되고 있다.

8. 해군 기지

8.1. 수상함 기지

8.2. 유보트 기지

9. 주요 인물

9.1. 고위 지휘관 및 행정가

9.2. 함대 사령관

9.3. 수상함 함장

9.4. U-보트 지휘관


#

9.5. 그 외

10. 평가

크릭스마리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정규함대다운 함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재무장에 편승해서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력확충을 꾸몄지만, 영국과의 전쟁이 너무 빠르게 시작된 탓에 제대로 된 해상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력은 잠수함대 뿐이었다. 하지만 에니그마와 울프팩 전술을 통해 잠수함과 한줌의 수상함대로 영국 해군에게 대항하였으나 영국 해군은 굳건히 버티면서 잠수함대에게 반격을 가했고 영국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에니그마가 해독(그나마 독일군 조직 중 해군이 암호전에서 가장 오래 버텼다.)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52] 잠수함대마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이 주로 물자를 이동시킨 선단은 HX와 SC인데 유보트가 한창 악명을 떨쳤던 1942년에도 HX 선단과 SC 선단의 소티 대비 손실률은 2.5% 수준이고 전쟁 전 기간을 합치면 1.7% 수준에 불과하다.[53] 따라서 유보트가 영국을 말려죽이기 직전까지 갔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 있는 셈이다. 오히려 유보트 자체에 의한 피해보다는 수송선단의 조직으로 인한 피해가 더 컸는데 수송선단의 조직으로 인해서 상선의 효율이 2/3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 덕분에 영국은 단독으로 유보트를 따돌릴 수 있는 상선(속력이 빠르다거나)들은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 단독으로 항해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했다.[54]

수상함대의 경우에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 급이 있었지만, 헤르만 괴링을 위시한 루프트바페와의 알력으로 인해 기껏 진수된 항공모함은 목재 창고로만 쓰이다가 종전 후 이를 전리품으로 삼은 소련 해군의 사격표적이 돼서 파괴되었다.[55] 하지만 실체는 문제덩어리였던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를 이용한 라인강 연습작전 등 영국 해군의 주력함 1척을 수상전에서 격침시킨 전적이 있으며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티르피츠 등은 북해에 머무르면서 영국과 미국의 신경을 계속 살살 긁어놓게 만들어서 북해를 통해 독일 본토에 직접 상륙을 가할까 라고 고민하던 영, 미 연합군에게 다른 방향을 고르게 하는 위엄을 선보이기도 하였다.[56] 다만 의문인 점은 전함 개발건은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도 됐을 거라는 점이다. 물론 전략 병기 취급 받던 전함이니만큼 공유나 도움이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탈리아는 추축국내의 유럽권 국가 중 제일 가까웠던 동맹이였던데다 과거 1차대전 승전국이었고 전함 설계를 포스트 유틀란트로 구성할 만큼 구식 설계에 매달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해군의 함선 설계 자체는 꽤나 고평가를 받는다. 소련마저 돈을 주고서라도 이탈리아에 전함 설계를 맡겼던 것을 보았을 때, 독일로써는 구식 구조의 설계를 바탕으로 전함들을 건조하는 것보단 나았을 거라는 것. 문제는 이건 가정인데다, 두 국가 간의 해군 기술 교류는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크릭스마리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쉬울 점이라고 생각된다.

무차별 폭격을 실시하였던 루프트바페, 많은 학살을 저질렀던 헤어 등에 비해서 독일 국방군 중 여전히 가장 평이 좋은 군대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세계대전 중 해상에서의 전투는 종결 후 상호간에 적함 승조원도 구조하는 등 인도적인 모습을 보인 편이었고 이는 각종 국제 조약들 및 관습법과 함께 뱃사람 특유의 국적을 뛰어넘는 유대감이 현장의 해군 장병들에도 작용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해군이 육공군에 비해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를 크게 줄이기도 했다.[57][58] 크릭스마리네는 비교적 우위하에 전쟁을 치렀던 육군 및 공군에 비해 열세에서 시작했었고 이후에도 연합군 해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가졌던 적이 없으며, 이런 가운데 연합국에게 나름대로 피해를 안겨주며 패전 때까지 유보트 등을 앞세워 끈질기게 항전했던 이미지 덕에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와 더불어, 독일 해군으로부터 잠수함 관련 노하우를 전달받으며 친분을 쌓은 점과, 크릭스마리네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미 해군의 영향으로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한국 해군 잠수함 승조원들 위주로 정보가 민간에 전달된 점으로 인해, 우호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태평양 중부해역군 사령관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검사단의 질의에 대해 되니츠 제독의 전시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응답했는데, 이러한 자세가 미 해군에서 한국의 잠수함 요원들에게로, 다시 전사(戰史)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1. 대중매체에서

12. 관련 문서



[1] 지상에 있는 해군기지에 게양하거나 열병식에서 해군 소속 병력들이 들고 행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2] 이 점은 영어 " Navy"도 동일한데, 용례상 거의 해군을 가리키다시피하지만, 사전적으로는 분명히 민간 선단들도 포함할 수 있다. [3] 이렇게 민간선단을 징집해서 해군을 구성하던 흔적이 현대의 상선사관 어선사관 제도이다. [4] 특히 해군은 가장 대표적인 군주의 무장력이었기에 아예 황제군이나 국왕군을 표상하는 단어가 되기도 하였다. 가령 Marine royale은 간단하게 "La royale"(왕립; 왕의 것)으로도 불렸으며, 심지어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La royale" 자체는 계속 프랑스 해군의 별명으로서 살아남았다. 일찍이 군사력이 국왕(King)이 아닌 국가(Country)에 귀속되었던 영국에서도 해군만큼은 "Royal navy"(왕립해군)로 불린다. [5] 함대를 가리키는 "Fleet"나 전단을 의미하는 "Flotilla", 떠다니는 것( 부유)을 나타내는 "Float" 등과 동원어이다. 로망스어권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대 말 즈음에 합류한 단어이므로 곧잘 쓰이는 게르만어 계통 어휘이다. [6] 사진에서 앞의 3척은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으로 추정되는데, 자세히 보면 선두함/두 번째 함과 세 번째 함의 함교 모양이 다르다. 도이칠란트급의 1번함 도이칠란트는 이전 경순양함들처럼 얇은 원통형 마스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외형이 약간 다르다. 따라서 앞의 2척은 도이칠란트의 자매함 아드미럴 셰어와 그라프 슈페로 보인다. 또한 맨 앞 함선의 함수문장을 보면 앞에서부터 슈페-셰어-도이칠란트 순으로 추정되며, 사진에서 슈페가 보이는 걸 감안하면 그라프 슈페가 격침당하기 이전인 1939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7] 도이칠란트급 뒤에 따라오는 함선들은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이나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으로 보인다. [8] 유일하게 함대 명칭을 썼던 곳은 발트 함대 뿐이었다. 여기는 그나마 독일의 앞바다였던 관계로 함대 명칭을 썼다. [9] 정찰기, 뇌격기, 소해전용 항공기, 수상기 등을 모은 5개의 연안비행대(Küstenfliegergruppen)를 보유하긴 했으나, 군수지원을 공군에서 받아야 했는데 협조가 원활하지 않았다. [10] 아무리 공군 원수여도 해군 항공대까지 방해할 권한이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겠지만 권력욕이 대단했던 괴링은 나치 독일의 공식 2인자이자 히틀러의 최측근이라는 자신의 초월적인 직위를 이용해 하늘에 날아다니는 건 모조리 자기 관할이랍시고 단 한기의 정찰기조차 해군에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괴링은 수렵청장까지 역임하는 바람에 조류 사냥까지 그의 허가가 필요했다. [11] 다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진행된 해안은 육군의 해안포 부대가 관할했었다. [12] 이후 나르비크 항내의 해전으로 상실한 구축함의 생존 승조원들도 합류했다. [13] 노르웨이 전역 등으로 해군은 육군 산악부대와 꽤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노르웨이에서 나르비크 전투 이후 대거 육전부대로 투입된 해군 장병들은 육군 산악사단으로부터 그 전투력을 인정받아, 이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상징인 에델바이스 배지를 모자에 다는 것을 허용받기도 했다. 독일 육군 산악병과가 현 대한민국 육군 특공여단에 해당하는 전투력 및 역할을 가졌던 걸 생각하면 꽤 대단한 일이다. 이후에도 산악사단은 그 높은 전투력으로 인해 상륙전시 선봉으로 많이 투입됐는데, 이때 해군과 함께 구르면서 관계가 긴밀해진 편이기도 하다. [14] 제1/2 해군사단의 경우 초기에 해군 소장이던 사단장이 후기엔 육군 대령이 보직되었다. [,]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저것과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에 깃발만 독일 제국 해군의 깃발로 교체한 포스터가 있다. 그런데 포토샵을 잘못해서 함선 선수에 달린 깃발은 안바꾸었다. [16] 도이칠란트급 장갑순양함은 11인치 3연장 포탑 2기를 장착함으로 배수량 대비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했으나, 대응방어는 꿈도 못 꾼다는 단점이 있었다. [17]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도 해군력이 빈약해 바다사자 작전을 펼칠 수 없어 독일 해군은 손빨고 구경이나 하였고 대신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수행하였다. [18] 때문에 많은 독일의 전함들이 페이퍼 플랜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H급 전함이 있다. [19] 하지만 노르웨이 수비군의 항전으로 아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블뤼허가 격침 당하는 등 손실도 있었다. [20] 수송선들은 렌드리스를 위해 북극해를 통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21] 이전에는 오더시티와 같은 상선개조 호위항모를 소량 운용했기 때문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미국이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을 비롯한 대형 호위항모 80여척(...)을 취역시키면서 게임이 끝나 버렸다. [22] 육상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의 항속거리 부족 문제로 인하여 수송선들이 항공엄호를 받을 수 없는 지역을 뜻한다. [23]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라이프치히와 뉘른베르크,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뤼초도 공습에서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대체로 중형 함선으로 분류되니 예외로 한다. [24] 오죽했으면 히틀러가 대형함 폐기 명령을 내렸을 정도. 다만 여기에는 바렌츠 해에서의 졸전도 컸다. [25] 엠덴급 1척 + 도이칠란트급 전함 3척 +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3척 + 쾨니히스베르크급 3척 + 라이프치히급 2척 + 아트미랄 히퍼급 3척 + 샤른호르스트급 2척 + 비스마르크급 2척. 총합 1+5+3+3+2+3+2+2= 21. 게다가 도이칠란트급 전함 3척은 노후화가 너무나 심해서 사실상 중요 전력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26] 영국은 순수 전함들만 따져도 넬슨급 2척+ 퀸 엘리자베스급 5척 + 킹 조지 5세급 5척= 도합 12척이나 되었다. 참고로 독일이 보유한 전함은 비스마르크급 2척 + 샤른호르스트급 2척= 도합 4척... (그중에서도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는 화력이 꼴랑 11인치라 대전함전은 사실상 무리였다.) 게다가 이는 리나운급, 리벤지급, 어드미럴급 등 영국의 순양전함들은 다 빼고 계산한 건데도 전력차가 이 정도다. [27] 일례로, 현재 나무위키에 작성된 크릭스마리네들의 대형함 문서에 “활약상” 부분에는 대부분 “기뢰 부설”, “함포 사격 지원” “피난민 수송” “통상파괴작전”이라는 단어만 꽉 차있다. [28] 하노버, 슐레지엔,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프린츠 오이겐 [29] 독일이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항해에 호위구축함 한 척 못 붙여준 이유이다. [30] 일단 전쟁 전,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잠수함대 전력 증강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약속한 전력 증강을 하기도 전에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해 버렸고, 보유하고 있던 잠수함들도 노르웨이 침공 등에서 꽤 많이 잃어버린다. [31] 심지어 일부 깡 좋은 어뢰정들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연습하던 영국 본토 해안을 습격해 미 해군 LST를 격침시키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뒤 피해 없이 도망치기도 했다! [32] U-331이 격침. [33] U-47이 격침. [34]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의 마지막 함장. 슈페를 자침시키고 자살했다. [35] 비스마르크급 전함 비스마르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함장, 위에서 이미 설명한 뤼첸스 제독과 함께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전사. 여담으로 수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에 반면, 뤼첸스 제독은 썩 인상이 별로였다고. [36]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샤른호르스트의 마지막 함장. 노스케이프 해전에서 전사. [37]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의 함장.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프린츠 오이겐을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 인물들과는 다르게 전후까지 생존했다. [38] 당시 독일 해군은 항공모함이 한 척도 없어서 왜 해군이 파일럿을 보유했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시 해군 파일럿은 미래의 전쟁을 대비한 함재기 파일럿 육성직이었고, 공군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조종사들이 훗날을 고대하며 오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들이 전투기를 모는 일은 없었다. [39] 해당 맨해튼 야경 사진의 화질은 당시 카메라의 한계와 흔들림까지 겹쳐진 관계로 상당히 나쁘나, 독일은 이 사진을 보정한 다음 전국 각지의 영화관에서 이 사진과 유보트 전투영상을 상영, 프로파간다로 상당히 요긴하게 써먹었다. [40] 여담으로 포로가 되었을 때 자신과 성이 똑같은 한 SS 장교가 있었는데, 하데겐은 필사적으로 자신과 그는 동명이인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41] 당시 해당 지역에 진입한 영국군은 자유의 몸이 된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우려하려 독일군 출신 경계병들을 뤼트의 자택 앞에 세워놓았다. [42] 그냥 스스로 자살하지 왜 굳이 손을 빌려 죽었냐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뤼트가 가톨릭교도여서 그랬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고, 따라서 눈 가리가 아웅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사살당하는 식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 [43] 당시 U-47은 영국 해군의 구축함 2척에게 쫓기고 있었던 관계로 그들에게 격침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U-47의 잔해나 유해가 현재까지도 일체 발견되지 않은 관계로 일단 실종으로 분류된다. [44] 에크도 바보는 아니라서 이걸 미리 소각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45] 참고로 이것 말고도 2차 세계대전 도중 잠수함 선원들이 격침된 배의 생존자들을 공격한 사건은 몇번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합군 잠수함이었던 HMS Torbey 나 USS Wahoo, 같은 독일군 소속 잠수함이었던 U-247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유독 에크만이 잘 알려진 이유는 연합군 쪽은 대체로 (승전국인 것도 있고 나치가 워낙 악마였기 때문에) 쉬쉬하는 분위기로 넘어간 것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도 USS 와후는 1943년, U-247은 1944년에 격침되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선 이미 승조원 전원이 사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임주체를 물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와후의 경우 어뢰 피격 후 가라앉는 수송선에서 단정으로 퇴선하는 일본 육군 병력 수백 명이 대상이었는데, 이들이 생존해 상륙할 경우 아군 병력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공격한 것이지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게 아니다. [46] 참고로 버럼이 기울다가 폭발하면서 가라앉는 장면은 아직도 카메라에 기록된 가장 거대한 폭발 중 하나로 남아있다. [47] 되니츠의 사위 [48] Oberfeldwebel은 국방군 기준 원사 정도의 계급으로, 이는 독일군의 상급부사관(Unteroffiziere mit Portepee) 신분이다. 독일 국방군엔 준사관 신분 자체가 없다. 해당 항목 참조. [49] 군법회의에 걸릴 정도로 꽤나 큰 거지만, 이 당시 유보트 승조원들은 자신들이 유보트를 오래 타야하는 점을 알기에 군법회의의 허점을 악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군복팔이. U-556에 근무하는 볼프강의 동기가 그런식으로 군복들을 처분하고는 술마시는데 다 써버렸었다만, 그 다음 출격에서 격침돼서 전사했다. [50] 이것도 꼬인 게, 칼스루헤쪽에서는 동기들이 왔겠거니 하고 확인도 안하고 보고하고, 어뢰정의 정장은 베저위붕 작전등으로 당장 숙련병이 필요한 상황이었었고, 인사부에 보고를 해야하는 걸 잊어버렸다. [51] 칼스루헤에 안 타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이 훈련도 지원함에서 쉬고 있다가 갑작스레 변경된 훈련일정때문에 꼼짝없이 지원함에 머무르고 있었고, 접촉사고 이후 복귀한 상황에서 볼프강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고 동기가 귀띔한다. 이후 함장 한스 게오르크 피셔 소령과 얘기하면서, 함장은 이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대꾸했다. 칼스루헤때도 그렇지만, U-109가 충돌사고로 침몰했다면, 해군에서 빠져나와서는 전쟁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109의 충돌사고 때에는 지원함의 통신사가 알고 있었다고는 대답했고, 이에 소령은 그럼 다른 유보트에 태웠을 테니 오래는 못 살았을 거라고 응수했다. [52] 전쟁기간 동안 유보트에 의해서 손실을 입은 상선이 1,500만톤이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건조한 상선이 600만톤, 영연방에서 찍어낸 게 600만톤이고 그외 국가들에서 얻어온게 300만톤이다. 저건 미국이 건조한 상선은 제외한 수치인데도 현상유지였고 여기게 미국이 혼자서 2,500만톤을 건조하면서 격침되는 수보다 더 많은 상선이 쏟아져 나온다. [53] 그리고 유보트가 격침시킨 선박의 절반은 빈 배이므로 실질적인 물자 손실은 저 수치보다도 적을 것이며 정말 중요한 물자는 빠른 수송선에 실어서 매우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건넜기네 피해를 본 사례가 극히 드물다. [54] 단독으로 항해하는 경우, 최소한 유보트 한 척에게 상선 여러 척으로 이루어진 수송선단 한 개가 삭제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55] 물론 건조되었어도 연안 하나 제대로 못 지킬 정도로 전력이 빈약했던 크릭스마리네이기에 제대로 된 활약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6] 물론 이건 라인강 연습작전 등 수상함대가 엄청난 실책들을 저질러서 히틀러의 미움을 사서 순양함 이상의 대형함들이 해체될 뻔한 것을 되니츠 제독이 필사적으로 사정해서 얻어낸 성과다. 직접적인 전적은 없지만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에 직접 상륙군이 처들어오는 것을 막아낸 것은 나름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57] 전후 크릭스마리네에서 전범으로 총살된 사람은 딱 세 명이었다. 국제법을 무시하고 격침시킨 민간 상선의 표류중인 선원들을 살상한 IXD형 U-852의 함장 하인츠 빌헬름 에크(Heinz-Wilhelm Eck) 항해소령과 부장 아우구스트 호프만(August Hoffmann) 항해대위, 그리고 군의관 발터 바이스페니히(Walter Weisspfennig) 의무중위. 이 외에 서부 해역 사령관 겸 비스마르크 지원 작전의 총지휘관을 지낸 해군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Alfred Saalwächter) 제독 또한 모스크바에 끌려가 처형되었으나 잘베히터 제독의 경우 무리한 처벌이었음이 인정되어 소련 해체 이후인 1994년에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58] 굳이 따진다면 '잠수함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선에 대한 공격을 수행할 때, 필히 상선에게 경고를 하고 임검을 실시해야 하며 모든 화물과 승객의 안전한 하역이 완료된 상태에서 선박에 대한 나포, 혹은 침몰처분을 시킬 것.' 이라는 조항을 어기기는 했는데 이걸 다 지키면 잠수함이 어떻게 배를 가라앉히고 민간인을 인근 항구로 돌려보내주냐는 문제가 있어 현실적으로 지키는게 불가능한지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가와 진영을 불문하고 사문화되었다. 유일하게 전쟁 초기 영국은 진짜로 지켜가면서 하려고 했는데 경고를 받은 상선이 도망가면서 자국군을 호출하고, 그 동안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은 무방비 상태가 되는 등 문제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결국 때려치우게 된다. [59] 비행선은 선박과 운용하는 법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라프 체펠린 1호와 2호를 몰았던 인원들도 해군 소속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군용 비행선은 육군 항공대가 아닌 해군 항공대 소속이었다. [60] 함장: 이제 그만! 우린 SS가 아니야, 독일 해군이다! 우린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당신들과 협력했어! 이건 전쟁이 아냐! [61] 실제 모습과 달리 기함이 이름을 따온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얼굴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