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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2:50:14

더 크라운/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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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즌 12. 시즌 23. 시즌 34. 시즌 45. 시즌 56. 시즌 67. 프리퀄 시리즈

1. 시즌 1

시즌 1 속 실제 사건들을 모아놓은 영상
"여왕에 즉위한 어린 엘리자베스. 정치적 사안과 개인사가 쉴 새 없이 부딪히고 삐걱거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이 두 세계를 잘 다스릴 수 있을까?"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결혼하는 1947년부터, 마거릿 공주의 결혼 스캔들이 터지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령이 집권하는 1955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시즌 1은 생각보다 드라마 분위기가 진지하고 무거운 편이다. 시대 배경이 배경인데다, 그 살 떨리는 시대에 엘리자베스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따로 개인교습을 받았던 탓에 정치나 시사, 과학 분야의 상식이 부족해 실수를 연발하고 왕실 규범에도 미숙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1] 쇠락해 가는 제국의 어린 왕이라는 점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이 때문에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정치인이나 잔뼈 굵은 왕실의 보좌관에게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라며 조언을 주거나 때로는 휘둘리기도 하며 본의 아니게 가족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당시의 영국은 사실상 ' 대영제국'의 위상을 상실한 직후였다. 엘리자베스의 즉위 기준(1952년.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으로 5년 전인 1947년에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 제국이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으로 분리 독립을 시작하여 결국 1948년 완전히 독립을 이뤘으며 외에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2년 전인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터지며 냉전이 가시적으로 시작되었고,[2] 가뜩이나 영향력을 잃고 있는 영국은 자유 세계의 주도권을 미국이 차지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을 크게 소모한 영국은 국내 경제를 활성화할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47년에 미래의 여왕인 엘리자베스가 결혼할때도 식량과 의복의 배급제가 계속되고 있었기에, 왕세녀가 입을 웨딩 드레스를 위해 영국 정부가 300장의 의복 쿠폰을 지급하고 영국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소문을 들은 영연방 국가들이 통조림을 버킹엄궁으로 보냈을 정도[3]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3년 뒤에 1948 런던 올림픽을 치룰 때 천막을 선수촌으로 쓰고,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을 치룬 1953년에도 국민들이 배급으로 생활할 정도로 경제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 1952년에는 사상 최대의 스모그까지 런던 시를 기습해 유례 없는 환경 위기를 낳고 있었다.[4] 이런 상황에서 조지 6세의 갑작스런 서거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25살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국왕의 권한이 크게 제한된 입헌군주제 국가라고 해도 국왕으로서 가지고 있는 위치와 상징성, 의무는 결코 가볍지가 않은데 이런 대내외적으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황을 20대의 어리숙한 왕이 모두 문제없이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윈저 가문의 외부인인 필립은 대중과 괴리된 유서깊은 왕가들이 사라진 것을 기억하면서 왕실과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3년의 여왕 대관식을 TV로 중계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오려고 노력한다.

시즌 후반부에는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부부관계에 긴장감이 고조된다.[5] 그리고 필립은 호주로 장기간 외유를 떠나게 된다.

2. 시즌 2

시즌 2 속 실제 사건들을 모아놓은 영상
"새로운 시대, 엘리자베스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한다. 흔들리는 결혼 생활과 도전에 직면한 군주제.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꺾일 수가 없다. 그녀는 영국의 여왕이기에."
시즌 2는 수에즈 전쟁이 터지는 1956년부터 여왕 치세의 3번째 총리인 해롤드 맥밀란 내각 집권기를 거쳐 1963년의 프로푸모 스캔들(Profumo scandle)까지 다룬다.

3. 시즌 3

시즌 3 속 실제 사건들을 모아놓은 영상
Times change. Duty endures.
시대가 변한다. 의무를 다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지나면서, 충돌과 배신의 위기를 맞는 왕실. 난관은 그뿐만이 아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직면한 그들은 오랜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프로푸모 사건으로 보수당이 실각한 1964년부터[24]마거릿 공주가 이혼한 1978년까지를 다룬다. 시즌 1~2의 엘리자베스는 군주의 역할을 배워가며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물이었던 데 반하여, 시즌 3에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왕의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인물로서의 성장이 없다고 볼 수 있다.[25] 또한 남편 필립 공과의 결혼생활도 평탄한 단계에 들어서서 인간적인 갈등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자연스럽게 여왕 본인보다 주변 인물이나 사건들의 비중이 커졌다. 고난과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찰스 왕세자 진주인공이라는 평도 있으며, 루이 마운트배튼 등 그 전까지는 조연에 불과했던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시즌 3에서 빠진 중요한 사건으로는 앤 공주가 정신질환 병력이 있는 남성에게 납치된 사건이 있다. 작중에서 앤의 비중이 크지 않으며, 여왕이나 시즌 3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찰스 3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 아니라 빼버린 모양.

4. 시즌 4

시즌 4 속 실제 사건들을 모아놓은 영상
Change will challenge tradition.
변화는 전통에 도전할 것이다.
"1980년대, 격동과 변화의 시대가 열린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와 갈등을 빚는 엘리자베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어긋난 채로 시작된다."
지금까지도 영국 근현대사를 다룰 때 가장 뜨거운 논쟁의 주인공인 마거릿 대처[37] 총리 재임기를 그린다.[38] 약 1979년부터 1990년까지를 다루며, 다이애나 스펜서, 여왕, 마거릿 대처 세 명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즌 공개 후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특히 이번 시즌은 이전 시즌들에 비해 실제 역사와 다른 장면들을 많이 삽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왕실에 관한 글을 쓰는 휴고 빅커스(Hugo Vickers)는 시즌 4의 내용이 '지나치게 다이애나에게 옹호적'이라고 평가했다. # 엔터테인먼트 캐나다는 찰스 3세의 측근을 인용해 왕실 인사들이 이 드라마가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둘러싼 논란들을 다시 격화시킬까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이에 다이애나 역을 맡은 엠마 코린이 직접 방송에 출연해 이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39]

BBC에서도 이를 주제로 한 인터뷰가 있었다. # 한 패널은 왕실 일가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상 반론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고 지적했으며, 드라마가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영국 인터넷 곳곳은 왕실이 다이애나를 부당하게 대우해놓고서도 또다시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다이애나의 사망 후 태어난 사람들은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사랑해, 그게 어떤 뜻인진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한 장면이 실화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5. 시즌 5

A house divided.
가문의 분열
"다이애나와 찰스가 언론 전쟁을 벌이고, 군주제의 역할이 도마 위에 오른 90년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가장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시즌 6을 끝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확정되었으며, 캐스팅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역에는 새롭게 이멜다 스턴톤[60][61]이, 필립 공에는 조나단 프라이스가 캐스팅 되었다. 찰스 3세는 도미닉 웨스트[62], 그리고 엘리자베스 데비키가 다이애나 스펜서를 맡게되었다. #

시즌 5 공개일은 2022년 11월 9일로 확정되었다. 이 일정은 2021년 9월에 이미 확정 발표된 것이었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과 찰스 3세의 즉위가 일어난 지 2달 뒤라는 상당히 묘한 시점이 되었다. 공개일 발표와 함께 짧은 분량의 포로모션 영상도 공개되었다. # 공개일 발표 이후, 왕실 관계자로부터 드라마 공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 찰스 3세가 즉위한 이후 허니문 효과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생애에 가장 크고 민감한 논란을 다루는 드라마가 공개될 경우 대내외적인 이미지 손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6. 시즌 6


===# 공개 전 정보 #===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발표된 시즌 6의 촬영은 시즌 5의 제작이 완료되는 시점인 2022년 8월에 바로 이어서 시작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로 인해 국장 기간 동안 추모의 의미로 잠시 제작이 중단되었다. # 2023년 4월말에 촬영은 종료.

아직 공개 일자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이전 시즌들이 시즌 2(12월 초)를 제외하고는 전부 11월에 공개된 것을 생각하면 시기는 2023년 11월이 될 가능성이 높으나 여왕의 서거로 인한 제작 중단의 영향이 크다면 이보다 조금 늦춰질 수 있다.

시즌 6의 초반을 장식할 것은 이번에도 다이애나일 것이다. 일단 확실하게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시즌 5의 마지막 시간대는 다이애나가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관람한 1997년 6월 3일이다.

이후 다이애나의 실제 행보는 다음과 같다. 6월 18일에 뉴욕에서 마더 테레사와 만나고, 22일에 자선 경매에 '리벤지 드레스'를 포함한 자신의 물건들을 내놓는다. 30일에는 배니티 페어의 표지를 장식하며, 7월 17일에 파예드 부자와 남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낸다. 7월 22일에는 잔니 베르사체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8월 10일에 지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8월말에 도디의 호화 요트를 타고 지중해 크루즈를 즐기다가 8월 30일에 파리에 오지만, 도디와의 열애를 담은 사진 값이 폭등한 것에 눈이 뒤집힌 파파라치들에게 쫓기다가 31일 새벽에 차량 전복 사고로 사망한다.[187] 9월 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치뤄지는 장면과 다이애나의 사망으로 인한 후폭풍에 휩쓸린 영국 왕실의 모습이 주요하게 묘사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어느 시점까지 갈 것인가일텐데, 제작자이자 극본가인 피터 모건은 지금 시점에서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 메건 마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할지 모르겠다면서 둘과 관련된 이슈를 더 크라운에서 다루어야 된다는 요구에 거부감을 표명했으며[188], 충분한 평가가 쌓인 20년 정도 지난 사건들만 다루겠다는 '20년 규칙'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시즌 5가 공개되기 전 영국 언론들은 이 드라마가 2000년대 초반에서 마무리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2002년이 종료 시점으로 많이 지목되었는데, 이 해는 이전 세대인 마거릿 공주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가 사망했으며 무엇보다도 재위 50주년 골든주빌리이기 때문이다. 시즌 3이 25주년 실버 주빌리 장면으로 마무리 된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싸 해 보이는 예상.

케이트 미들턴 배역의 캐스팅이 발표된 것도 사실 이런 예측을 그렇게 크게 흔드는 것은 아니었다. 둘의 만남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피터 모건의 말에 따르면 2011년 결혼이나 2010년 약혼까지 다룰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캐스팅 공지도 18세 당시(2000년 전후)의 케이트 미들턴과 16~21세(1998~2003년)의 윌리엄 왕자를 연기할 배우[189]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선의 2022년 7월 보도에 따르면, 원래는 2002년 시점에 끝낼 예정이었으나 2005년에 있었던 찰스와 카밀라의 결혼식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고 한다. 격동의 시기가 끝나고 다음 세대인 윌리엄과 해리가 대중의 관심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떠오르는 시점이라 작지만 꽤 중요한 터닝포인트라는 것에서 의의가 있다고. 그리고 아마 이 두 왕자와 찰스 3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뒤 열린 결말로 끝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런 시기의 변화로 인해 불륜이 공표되고 다이애나가 사망한 이후 영국 대중들이 대놓고 적대시했던 카밀라가 공적인 활동을 통해 왕위 계승자의 배우자로 공인될 수 있을 정도로 평판을 회복하는 과정이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며, 시즌 5에서 소개된 PR 전문가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왕실이 타블로이드지를 먹여 살리던 시기라 그런지 시즌 5에서는 여왕 및 왕가와 직접 관련 없는 정치사회경제적 사건들이 이전 시즌들과 다르게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 예외는 소련의 붕괴와 노동당 집권 및 홍콩 반환 정도. 이런 기조가 시즌 6에서도 이어진다고 해도, 냉전만큼이나 전세계에 큰 파급력을 끼친 9.11 테러는 어떻게든 언급이 나올수 밖에 없을 것이며, 1999년에 있었던 호주의 공화국 전환 여부 국민투표는 여왕이 그토록 애지중지한 영연방의 큰 위기였던 만큼 중요하게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벨파스트 협정도 현대 영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 드라마가 북아일랜드 분쟁을 그렇게 많이 언급하지 않아왔기에 미지수.[190]

데일리 메일은 2005년 찰스 3세의 재혼으로 결말이 바뀜에 따라, 향후 케이트 미들턴과 메건 마클 등 새로운 세대의 왕실을 다루는 속편 시리즈가 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

그러나 드라마가 마무리되기 전에 여왕이 서거했으며, 제작진은 더 크라운이 "여왕에게 바치는 러브 레터"라고 했을 정도니 끝 마무리에는 어떻게든 이것이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극 중 마지막 시점에서 시간을 뛰어넘어 2022년 여왕의 서거를 일부 다루는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즌 6 공개 이후, 직접적으로 이것이 다루어지진 않았을지라도, 마지막 화의 엔딩에서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먼저 떠나는 필립과 상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함께 그 뒤를 이어 떠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필립 공과 여왕의 서거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나타났다.

7. 프리퀄 시리즈

넷플릭스 측에서 '더 크라운'의 제작사인 레프트 뱅크 픽쳐스와 드라마의 이전 시점을 다루는 프리퀄 시리즈의 제작을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1901년부터 '더 크라운'이 시작된 시점인 1947년까지를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데일리 메일의 보도에 따르면, 3~5 시즌으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하며, 에드워드 7세부터 조지 6세 통치기까지 다룰것으로 예상된다.[191]

다만, 아직 기획 단계에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타이틀이나 분량은 미정이다.


[1] 한 예로 엘리자베스가 윈스턴 처칠을 처음 접견할 때 처칠의 의자와 차를 내오려고 하자, 처칠이 기겁하며(...) 왕실 관례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빅토리아 여왕 이래로 총리는 국왕 앞에 오직 서서 보고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실제로 작중 비교되는 모습으로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한 처칠이 총리로 임명받기 위해 오기로 하자 조지 6세는 시종에게 처칠이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이니 의자를 빼라고 능숙하게 대응하기도 한다. [2] S1E3에서도 한반도 상황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S1E7에서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보던 신문에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에 관한 헤드라인 기사가 있다. [3] 식량 같은 경우는 조찬에 배급 대상이 아닌 자고새가 나올 정도여서 사실 통조림을 받을 정도로 궁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4] 스모그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하는 처칠의 비서 베네시아 스콧은 가상인물이다. [5] 두 사람이 서로 물건까지 집어던지며 싸우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그대로 찍혔었다. 물론 이 모습은 필름을 파기했기 때문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작중에는 여왕이 직접 기자들에게 해당 장면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는데, 실제로는 기자들이 직접 카메라를 열어서 필름을 햇볕에 노출시켰다고 한다. [6] 영국의 상징 중 하나인 미니의 탄생 배경이 이 시기 유가 폭등이다. [7] 엘리자베스가 필립의 가방에서 사진을 발견하는 러시아 발레리나 갈리나 울라노바의 경우 런던을 실제로 방문한 적은 있지만 필립과의 혼외 정사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대신 다른 여성들과의 염문은 엄청나게 나오긴 했다고. [8] 다만 필립 공이 직접적으로 정사를 벌였음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9] 대영제국 유지와 영국 인종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극우단체 회원에게 얼굴을 가격당하기도 했다. [10] 당시 무명의 언론인이던 올트링엄 경은 폐지할 것 3개와 개시할 것 3개를 조언한다. 폐지할 것 3가지로 사교 입문 파티 폐지와 왕실에서 이혼한 자를 자유롭게 할 것, 시종의 전체 세대 교체를 시작할 것, 개시할 것으로는 여왕 자신을 대중들에게 알릴 것, 성탄절 연설의 TV중계, 평범한 사람들을 만날 것을 조언한다. 원래는 부보좌관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만나서 올트링엄 경의 조언을 들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각색이 아니라 실화다. 마지막에 올트링엄 경의 조언은 결과적으로 모두 수용되었다고 설명하는 자막이 나온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이 판단은 수많은 왕실 스캔들과 영국병으로부터 왕실이 폐지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했고 엘리자베스 2세의 주 업적이 되었다. 이후로도 올트링엄 경은 언론인이자 역사가로 오랜 기간 활동하며 이름을 남겼다. [11] 나치와의 협력, 영국에 대한 공습 방조 [12]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히틀러의 통역관 파울 슈미츠는 조수 폰 뢰슈에게 기밀 문건들을 모두 폐기할 것을 명령한다. 폰 뢰슈는 대부분의 문건을 불태웠으나, 에드워드 8세 문건들은 몰래 챙겨두고 연합군에 넘겼다. 이것이 마르부르크 문서이다.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은 이 문건을 비공개로 할 것을 명령했으나, 미국 국무부에서 사본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에드워드 8세의 나치 협력 내용은 에드워드 8세 문서의 '나치스와의 연관성, 진짜 반역자?' 문단에도 나와 있으니 참고바람. [13]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조지 6세와 같이 이 문건을 봤고 이후 조지 6세가 에드워드 8세의 뻘짓을 수습하느라 얻은 과로 및 과한 흡연 등으로 건강을 해쳐 사망하자 더욱 악감정이 심해졌다. 토미는 시즌 1에서 에드워드 8세에게 "제가 나라를 욕되게 할 지는 모르지만 전하에게만큼은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14] 통칭 스노든 경(백작), 1930~2017 [15] 안토니는 자유분방한 인물로 3~4명의 여성과 관계하거나 남성과도 관계하는 등 양성애자이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며 무시하는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것이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마거릿과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16] 마거릿 공주와 암스트롱-존스는 결국 이혼하게 된다. [17] 재클린이 사석에서 엘리자베스를 흉봤다는 창작과 1962년 재클린 케네디가 런던에 재방문하러 온 것을 '사과하러 오는 장면'으로 각색하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는 군주의 위엄을 한껏 과시하는 연출로 독자 시점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압도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어서 재클린이 불우한 부부 관계와 각종 산후 우울증이 원인이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엘리자베스 2세가 그녀를 동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실화는 아니지만, 실제로 참모들에 의하면 두 사람만이 사적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고 전해진다. [18] 당연하지만 드라마처럼 재클린에 대한 반발심리로 외유를 떠났을 가능성은 적다. 다만, 은크루마 대통령과 여왕이 춤을 춘 것은 사실이다. [19]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찰스는 자신의 두 아들을 모두 귀족학교인 이튼 스쿨에 보냈다. [20] 참고로 여기서 필립 공의 회상으로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가 언급된다. [21] 자신의 방에 찰스의 사진이 아니라 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고한다. [22] 그러나 후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 일은 이 성매매여성이 프러퓨모와 주영 소련 대사관 직원을 고객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기레기들이 이 성매매 여성인 크리스틴 킬러 (Christine Keeler)를 "소련 간첩"이라고 확증하는 선정적인 보도를 내보냈기 때문에, 이 여성은 그렇게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간첩혐의가 아니라 이 일에 관련된 재판에서 위증혐의로만 재판을 받았다. [23] 이외에도 Misadventure 에피소드에서는 곳곳에 필립이 다른 여인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암시는 주지만 소송방지용인지 정설로 채택하지는 않는다. [24] 당시 총리인 알렉 더글러스 흄은 1화에서 몇 번 언급되는걸 제외하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25] 첫 화에서 시즌 1-2에서 배역을 맡은 클레어 포이의 모습을 한 과거의 우표에서 새로운 우표를 공개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배역을 맡은 올리비아 콜먼을 소개한다. [26] 윌슨이 아니라 왕실에 고용된 저명한 미술사학자 앤서니 블런트가 소련의 스파이인 것이 마지막에 드러난다. 블런트의 코드명이 바로 올딩. 케임브리지 5인조 중 한 명이다. [27] 실제로 엘리자베스 2세가 윌슨을 스파이라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여왕은 이미 윌슨이 총리가 되기 이전부터 앤서니 블런트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비밀 문건으로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고 한다. [28] 해럴드 윌슨의 부인이자 정치적 동지인 메리 볼드윈 애버밴 참사 당시 "여왕의 행동은 명백한 지배층의 무관심이다, 왕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한다, 여왕에게 칼을 꽂아야 한다." 등의 급진적인 말들을 해댄다. 그리고 작중에서 내각진들도 왕실에 긍정, 온정적인 시각을 보내지 않는다. [스포일러] 엘리자베스 여왕은 노동당 내각이 왕실에 책임을 돌리려는 것을 알고난 후 에버벤에 방문한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온 후 윌슨 총리를 불러서 "처칠은 불만을 직접 말할 결단과 용기가 있었다. 이든도, 맥밀런도 나에게 직접 문제를 말할 용기가 있었으나. 그 누구도 당신처럼 등에서 칼을 꽂지 않았다."라고 총리를 질책한다. 작중 윌슨 총리는 왕실에 화살을 돌리자는 메리 볼드윈의 주장에 반대했지만, 당내 일각에서 퍼부은 공격을 묵인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기는 했다. [30] 애버밴 사건의 대응이 늦은 것과 결합하여 실제로 1960년대 후반 영국 내 여론조사에서는 왕족이 낡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답변이 많이 나왔다고 하며, 청년층에서는 후계자가 35세가 되면 자동으로 승계를 시켜야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었다고 한다. [31] 이 'Royal Family' 다큐멘터리는 1969년 6월 21일에 BBC를 통해 흑백으로 초연되었을때 2,300만명이 시청했고, 그 다음주에 ITV에서 칼라로 상영되었을때 1,500만명의 시청자수를 기록했다. 영국 성인의 2/3이 시청하였으며 한때 영국 군주제에 10~20년의 생명을 더 했다는 호평을 받기도 한 이 다큐멘터리는 하지만 작 중에도 나오듯이 70년대 이후 단 한번도 전체 내용이 다시 상영된 적이 없다. [32] 이때 옆에서 포체스터경, '포치'가 여왕을 수행하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둘이 친구관계 이상이라는 소문이 계속 있었다. 심지어 90년대 말까지도 필립이 앤드류 왕자가 그의 아들이 아니지 않냐(= 포치의 아들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 정도. 다만 여왕의 측근들은 이런 소문들을 격렬하게 부인했다. [33] 1960년대 당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난 쿠데타들을 언급하며 그 중 한 예시로 5.16 군사정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언급한다. [34] 실제로 마운트배튼의 역할이 어느 정도까지였는지는 공개된 증거가 부족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 역사가는 버킹엄궁에서 들은 정보라면서 이 쿠데타를 막은 건 여왕이라고 주장했는데, 드라마는 이 설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35] 에드워드 밀워드 박사. 플라이드 컴리 부당수로, 실제 역사에서도 9주간 찰스 3세에게 웨일스어를 가르쳤다. 2020년 4월 18일 사망. [36] 실제로 여왕은 윈저 공이 죽기 10일전 윈저 공의 집을 전격 방문한다. 다만 드라마에서는 필립이 방문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와 찰스도 동행했다. 방문 중 여왕과 에드워드 8세는 실제로 몇분간 다른 사람들 없이 둘이서 독대했는데 과연 드라마처럼 묵은 앙금을 말끔히 풀어내고 화해했는지는 영영 알수없는 일. [37] 마거릿 대처는 드라마 엑스파일로 잘 알려진 배우 질리언 앤더슨이 연기한다. [38] 신기하게도 캘러헌 내각을 건너뛰고 윌슨 내각에서 바로 대처 내각으로 이어진다. [39] 반면 많은 화제를 모은 발모랄 성에서의 이른바 '발모랄 테스트'는 사실이라고 한다. 텔레그래프 [40] 여기서 내각에 다른 여성은 없냐는 질문을 받은 대처는 여자는 높은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역사가 도미닉 샌드브룩의 말에 따르면 실제 대처는 남성이 감정적이고, 조각날 때가 많으며 여자가 의사 결정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경력 내내 여성이 남성보다 낫다고 말했으며 여성이 일하도록 격려해야한다고 말했다고. 다만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오른 그녀는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41] 실제로는 그런 편지를 쓴 적은 있지만 그게 마지막 편지는 아니었으며, 찰스 3세에게 에드워드 7세를 언급한 적도 없다는 모양. [42] 실제로도 대처는 밸모럴에 올때마다 격식에 맞는 신발을 가져오지 않아서 장화를 빌렸다고 한다 [43] 당시에는 새롭게 맞춘 반지가 아니라 누구도 살 수 있는 기성 반지(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평민의 반지')를 준 것에 대해 여론이 들끓었다고 한다. 찰스와 이혼을 한 뒤에도 다이애나는 이 반지를 계속 착용했고, 이후 그녀의 아들인 웨일스 공 윌리엄 캐서린 미들턴의 약혼 당시 이 반지를 약혼 반지로 준다. [44] 실제로 자식 4명 중 3명의 첫번째 결혼은 파탄나고, 그나마 사생활이 깨끗한 편인 에드워드도 개인 사업을 말아먹게 된다 [45] 여왕이 이 전쟁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한다. 대처와의 갈등을 부각하기 위한 극적 설정인 모양. 다만 전쟁을 개전할때 자신의 아들들이 참전하는 만큼 탐탁찮아 한것은 맞다. 그저 전쟁에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시원찮게 본 것이지 전쟁자체를 나쁘게 보진 않았다 [46] 실제로 페이건과 여왕은 10분간 페이건의 가족 얘기로 대화(라기보단 페이건의 신세타령)를 나누었다. 물론 드라마처럼 대처를 미친듯이 까댔다는 증거는 없다. 페이건의 2012년 인터뷰에 따르면 방에서 뛰쳐나간 여왕은 메이드를 불러다가 팬트리에서 담배를 꺼내오겠다면서 관심을 돌리고 경찰을 불렀다고 한다. 페이건은 40여년 뒤 여왕이 사망한 후 다시 인터뷰에 출연해 여왕의 명복을 빌었다. [47] 이 부분은 각색된 것이다. [48] 드라마에는 안나오지만 찰스는 농담한답시고 따뜻한 우유와 캥거루 분쇄육을 대접받았다는 말을 해서 동물 애호가들의 분노를 샀다 [49] 1937년 섭정법에 따르면 공식행사에서 영국 군주를 대리 할 수 있는 고위 왕족은 최대 6명이다. 왕대비와 필립과 여왕의 4명의 자녀로 인해 마거릿은 밖으로 밀려 버린 것 [50]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오빠의 셋째딸(캐서린 보우스라이언)과 다섯째 딸(너리사 보우스라이언)을 비롯한 또다른 외조카들(이도리아, 에설드리다, 로즈메리), 즉 여왕과 마거릿 공주의 외사촌들은 정신지체 장애를 앓았다. 그러나 가문과 왕실의 치부로 여겨 공식적으론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었다. [51] 영연방에 대한 대처의 태도는 고르바초프나 레이건과 이야기 할 시간에 왜 관심도 없고 영국의 정책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잠비아의 대통령과 잡담이나 하고 있어야 하냐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처는 남아공 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남아공 정부를 옹호했다. ANC나 그밖의 흑인 운동 단체들은 사실 대처와 상극인 공산주의 진영이나 리비아 같은 반서방국가의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52] 대처의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정책 및 강경 보수주의는 여왕이 선호하는 온건보수와는 상극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시즌 4 내내 번번이 충돌했다. 이렇게 누적된 갈등이 남아공 경제제재 문제에서 폭발한 것. 하지만 여왕은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입장을 내비치면 안되기에, 1986년 슬쩍 언론에 내막을 흘리는 언론플레이를 했고 이것이 대처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 되었다. (사실 이렇게 대처가 남아공을 옹호한 것은 두고두고 정적에 의해 비판받았으며, 대처의 흑역사가 되고 있다)대처는 이에 반발하여 여왕과의 접견에서 강력히 항의를 했고, 이 때문에 영국정치 역사상 보기 드물게 내각과 버킹검궁의 갈등이 언론을 타면서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이런 갈등은 영국의 전통을 심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기에, 여왕의 공보비서 마이클 시어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다만 제작진측은 결말 자막으로 넬슨 만델라가 남긴 "남아공 제재는 인종차별 철폐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인용하여 여왕이 그 사안에서는 옳았다는 식으로 결론을 낸다. [53] 당시 선데이 타임즈의 편집자였던 앤드류 닐이 시즌 4가 공개된 이후 더 타임즈에 쓴 글에 따르면, 계속 정치에 대해 견지해온 태도를 생각하면 드라마의 묘사처럼 여왕이 직접 공보비서에게 사실을 흘리라고 지시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외교관 출신인 마이클 시어가 자신의 의사로 그런 말을 흘렸을 가능성도 없으니, 그건 확실히 여왕과 찰스 3세를 포함한 버킹엄궁의 여론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한다.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진 후에 왕실에 가까운 인사와 이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때 사실인 걸 알았기 때문에 극렬히 부정했어야 했다고 답하기도 했다고. 한편, 이에 대해 한참 뒤에 대처가 인터뷰를 했을때 오프더 레코드로 버킹엄궁이 당신의 기반을 깎아내리려고 한 걸 인지하고 있었냐는 질문을 받자, 대처는 물론 알고 있었고, 문제는 여왕이 사회민주당(보수당보다 좌측에, 노동당보다는 우측의 이념성향을 가진 중도 정당)에 투표할 여자("The problem is the Queen is the kind of woman who could vote Social Democratic.”)였던 거라고 답했다고 한다. [54] 이후 찰스 본인이 윌리엄과 해리한테서 손주들을 보게되면서 앤드류 왕자의 계승서열이 밀려나게 된다. [55] 사망한 수행원 휴 린지의 미망인은 린지의 사망을 다루지 말아달라고 드라마 제작진에게 서한을 보냈지만, 제작진은 이 사건을 뺄 수는 없다고 거부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최소한도로만 언급되긴 한다. [56] 실제로는 장관들과 면담을 마친 후, 대처는 다음날 아침 내각회의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임 성명서를 읽었고, 그 사이에 여왕과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한 역사가는 실제 역사와 대처의 성격과 여왕과의 관계를 심각할 정도로 왜곡하는 내용이 튀어나와서 놀랐다고 평했을 정도. [57]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대개 총리가 의회해산권을 지니나, 영국은 오랜 입헌군주제 전통과 관습법 특성상 실질적인 해산 결심은 총리가 하되 형식적으로는 국왕에게 존재하는 해산권을 재가받아 발동한다. 여왕의 지적이 강제력이 있는 거부가 아니라 충고인 것은 이 때문. [58] 실제로는 사임 후 2주 뒤 [59] 실제 다이애나는 그 전부터 죽기 전까지 꾸준히 에이즈 환자들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60] 한국에서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덜로리스 엄브리지 역으로 유명하다. 벨라트릭스 레스트레인지 역의 헬레나 본햄 카터가 시즌 3~4의 마거릿 로즈를 맡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우연. [61] 당초 제작진측에서는 영화 '더 퀸'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했던 헬렌 미렌에게 캐스팅 제의를 했으나, 헬렌 미렌 본인이 이미 했던 연기를 또 해야 하고, 이전에 누군가가 하던 역할을 이어서 연기해야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 출연을 최종 고사했다고 한다. [62] 드라마 디 어페어에서 노아 역을 맡은 배우. 불륜남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63] 정확히는 제 3대 버마의 마운튼배튼 백작이자 1979년에 IRA에게 암살당한 루이 마운트배튼의 손자 노턴 내치불과 페넬로페 내치불 부부. 왕실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찰스는 이들의 결혼식에서 들러리 역할을 맡기도 했다. [64] 1991년의 일은 아니지만 1989년에 중동을 공식 방문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65] 다이애나와 그녀의 자식들의 관계가 왕실에선 보기 힘들 정도로 각별했던 것은 당사자들 및 관계자들의 발언으로 확인된다. [66] 완벽하게 동일한 사건은 없다고 한다. 다만, 1991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식 방문 당시 부부가 프라하에서 다른 층을 썼다는 사실이 기사화 되는 등, 이 시기에 둘이 결별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만한 보도들이 나왔다고 한다. [67] 사실 극중 시점인 선데이 타임즈 8월 11일 판에 여왕에 대한 언급은 여왕의 이름을 딴 크루즈 선에 대한 광고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여론조사 자체는 있었다. 시점이 1990년 1월로 다를 뿐. [68] 실제 여론조사에서 선양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가장 컸던 시점은 드라마의 시점보다 조금 이른 1990년이다. 이때 찬성과 반대는 둘다 40%대 후반이었지만 이후 연이은 사건으로 인해 찬성 여론은 폭락하게 된다. 하지만 극의 뉘앙스와 다르게 여왕에 대한 지지도 또한 높았다. [69] 1980년대 후반부터 실제로 사용되었던 표현이라고 한다. 약자를 따서 QVS라고도 했다는 모양. [70] 이 당시 데일리 미러 데일리 익스프레스 같은 타블로이드지들이 계속 다뤘던 주제가 찰스가 자신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을 놓고 안달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데일리 텔레그래프 같은 정론지에서도 찰스가 얼마나 기다려야 되겠냐는 기사를 냈을 정도다. [71] 이에 대해서 존 메이저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보낸 서한에서 찰스와 만나서 여왕의 퇴위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한적 없으며 드라마의 내용은 "헛소리로 가득한""해롭고 악의적인 소설"이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72] 다이애나의 개인 비서였던 패트릭 젭슨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에서 찰스가 총리에게 여론조사를 들어 자신이 섭정으로 임명될 수 있게 해 달라는 내용의 대화를 한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메이저가 아니라 전임자하고 말이다. [73] 존 메이저는 시종일관 군주제 옹호제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체제에 환멸을 느낀 적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74] 그 뒤 레오노라가 사망한 후 몇 년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녀의 이름으로 레오노라 아동 암 기금이라는 자선 기금을 설립했다. 부부는 그녀가 죽기 전부터 Wessex Cancer Trust의 공동 회장을 맡아 암 자선 단체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아프고, 고통받고, 궁핍한 어린이들의 구호"에 전념하는 이 자선 단체는 나중에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이라는 이름의 신탁과 결합하여 The Edwina Mountbatten 및 Leonora Children's Foundation을 설립했다 . 레오노라의 어머니 페넬로페와 언니 알렉산드라는 현재까지 자선단체의 이사로 남아 있다. [75] 실제로 마차 타기로 인해 필립과 페넬로페의 관계는 친밀해졌고, 페넬로페는 2022년 필립의 장례식에 참여한 30명 중 한 명이었다. [76] 다소 동떨어진 듯한 이 이야기를 넣은 것에 대해, 제작진이 이 둘 사이의 '친밀함'이 선을 넘은 것이었음을 암시하는게 아니냐는 영국 언론들의 추측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화 마지막에 여왕과 필립이 한 부부간의 비밀에 관한 대화는 왕세자 부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닌 것이다. 다만 정도를 넘은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사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도 어디까지나 지적 교류일 뿐이다. [77] 다이애나가 결혼하기 전부터 절친이었다고 한다 [78] 사실 모튼과의 대화가 시작된 시점은 1화에서 다뤄진 이탈리아 여행 전이다. [79] 찰스의 측근 정도가 아니라 찰스 본인의 목소리가 직접 담기는 책이 나오긴 하지만 이는 이 시점인 1992년이 아닌 1994년의 일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5화에서 잠시 언급된다. [80] 앤드류 모튼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81] 추월하려는 버스에 밀리는 바람에 도로의 움푹 패인 곳에 걸려 넘어진 적은 있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콜서스트의 말에 따르면 다이애나는 그가 자전거를 타다가 습격당할 것을 정말로 걱정했다고 한다 [82]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누가 그랬는지는 불명이며, 2017년에 있었던 모튼의 인터뷰에 따르면 없어진 것은 카메라뿐이었다고 한다. [83] 1988년에 앤서니 홀든이란 작가가 찰스에 대한 비공식 전기를 쓸때 그의 집이 반복적으로 도난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수사를 한 경찰은 이것이 정보기관의 소행임을 넌지시 작가에게 흘렸다는 말이 있긴 하다. 별도의 증거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84] 아로마테라피스트, 점성가, 침술사, 지압사 등.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풀어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85] 모튼은 다이애나가 사망한 후에야 그녀가 직접 책 작성에 긴밀하게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책 제목에도 그녀가 직접 한 말이라는 것을 밝히는 부제가 붙는다. [86] 나중에 메건 마클 오프라 윈프리와의 2021년 인터뷰에서 왕가를 'The Firm'이라고 칭한다. [87] Diana: Her True Story. 1992년 6월 16일 발간. 한국에도 '나, 다이애나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1997년에 출간되었다 [88] 이외에 실제로 책에 실린 내용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내야했으며, 약혼 1주째에 찰스가 다이애나가 '통통하다(chubby)'고 말한 것을 듣고 폭식증에 걸렸고,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알고서 약혼을 취소하려 했으며, 왕실에 합류한 후 궁전의 모든 이들에게 무시당했고 왕실 규범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며, 결혼 생활 동안 수없이 자해와 자살 시도를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89] 사실 출간 직후에는 완전한 허구라는 이유로 일부 서점들이나 슈퍼마켓에서의 판매가 금지당했고 믿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90] 실제로도 코카콜라 및 재봉틀 판매원이었다고 한다 [91] 하지만 1946년에 윈저공 부부가 거주지인 프랑스를 떠나 이집트를 방문한건 픽션이다. [92] 호텔리어 찰스 리츠의 미망인인 모니크 리츠로 보이는 여성은 모하메드가 사우디 출신인지 쿠웨이트 출신인지 모르겠다고 비아냥대면서 은행들이 전부 문전박대하지 않았냐고 힐난한다 [93] 성희롱 및 성폭행 혐의가 여러번 제기되었다. 해로즈에 지원한 젊은 여성들은 HIV 검사와 산부인과 진찰을 받곤 했으며, 선택 받은 경우에는 파리에서 그와 주말 동안 함께하곤 했다고 [94]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P. G. 우드하우스, 러디어드 키플링, 찰스 디킨스를 읽어야한다. 애프터눈티는 서두를게 아니라 음미해야하는 의식이다. 런던 도심에서는 연회복 상의로 암청색을, 전원에서는 청바지와 셔츠를, 골프를 칠때는 코듀로이와 체크를 입어야한다. 여가 생활로 사냥터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골프와 폴로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영국 사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실과의 관계다 등 [95] 모하메드가 자신이 여전히 아웃사이더임을 자각해야했던 사례로는 1970년대 영국의 한 풍자 잡지가 그에게 "가짜 파라오"라는 별명을 붙여 조롱 한 것과, 1995년에 알 파예드가 신청한 영국 여권의 발급이 거절당한 일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96] 그리고 영화를 제작하는 기간 동안 도디는 브룩 쉴즈, 캐시 리 크로스비, 조앤 왈리와 같은 유명 여배우들과 사귀면서 바람둥이로서 명성을 떨친다. [97]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시즌 2에서 다룬 바 있다. [98] 물론 모하메드와 왕실이 향후 맺을 악연을 감안하면 진심은 시드니가 말한 쪽에 가까울 것이다. 참고로 빌라 윈저는 여전히 모하메드가 임대한 상태다. 정원은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어 있지만 건물은 미공개 [99] 모하메드는 시드니의 병수발을 들기까지 한다. [100] 실제로는 해로즈 이사회의 일원이었던 그녀의 계모 레인 스펜서의 소개로 처음 만났으며, 폴로나 자선 행사등을 통해 친분을 쌓아나갔다고 한다. [101] 1995년 해로즈의 홍보 담당자가 "다이애나는 모하메드와 편안한 사이입니다. 모하메드는 그녀에게 압도되지 않으며, 서로 잘 어울리죠"라고 했을 정도 [102]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휴양지 [103] 정확히는 데일리 미러 [104] 이는 아버지를 방금 잃은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찍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자 사진기자들이 카메라를 내리는 등 왕실에게 경외심을 보였던 시즌 1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105] 누가봐도 다이애나를 의식한 발언이지만 이 말이 나올때 나오는 것은 마거릿의 모습이다. [106] 앤은 1992년 4월에 필립스와 이혼했으며, 12월에 티모시 로렌스와 결혼한다. 국교회에서 허용하지 않는 재혼이었기에, 결혼식은 스코틀랜드에서 치뤄졌으며[192] 하객은 30명으로 한정되었다 [107]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를 칭하는 Prince Charming에서 C를 빼버린 것. [108] 화재는 개인 예배당의 고장난 조명으로 인해 커튼에 불이 붙는걸로 시작되었다. [109] 드라마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화재가 난 날은 여왕과 필립의 45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50주년인 1997년 11월 20일에 수리가 완료된다. [110] 화재는 윈저 성 전체 방의 20%에 달하는 115개 방에 손상을 입혔지만, 파손된 예술 작품은 윌리엄 비치의 그림 한점과 로즈우드 찬장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재배선 작업중이라 화재를 입은 구역들이 비워져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111] 이는 1978년에 출간된 피터 타운센트의 회고록에도 써 있는 일화다 [112] 이 시점으로부터 약 3년뒤인 1995년에 사망 [113] 이로 인해 직접 비용을 마련해야했던 영국 왕실은 버킹엄 궁전을 대중에 공개하게 된다 [114] 왕위를 계승할 일이 없는 공주, 이혼 경력이 있는 시종무관이 상대 [115] 1월 사라 퍼거슨의 불륜 사진 공개. 3월 앤드루 왕자 부부의 별거 발표. 4월 앤 공주 이혼. 6월 다이애나의 책 발간. 8월 사라 퍼거슨과 새로운 불륜 상대의 사진 공개. 11월 윈저성 화재. 연설 이후의 일이지만 12월 왕세자 부부의 별거 발표 [116] 로얄 앨버트홀의 왕실석 간혹 일반 공개, 일부 왕실 구성원에 대한 묵례와 무릎 인사를 의무에서 해제, 영국 왕립 공군 군악대의 역할 확대 [117] 왕실 재정 자립, 여성의 참여 적극 확대, 남자 왕족의 같은 세대 여성에 대한 왕위 상속권 우위 종식 [118] 실제 Way Ahead Group은 세금 지원을 받는 왕실 인원을 여왕, 왕세자, 왕대비로 축소하고 나머지 인원의 활동비는 여왕이 지불하는 것과 윈저 성의 수리 비용을 왕실이 지불하는 등의 좀 더 급진적인 변화에도 동의했다. [119] 둘의 대사는 드라마의 창작이 아닌 실제 대화를 거의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특히 심했던 부분을 따서 이를 "탐폰 게이트"라고도 부른다. 도청인지 아마추어 기사가 맞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후자가 유력하다. [120] "도덕성 문제로 교회를 멀어지게 하고, 부적절한 행실로 정계가 등을 돌리게 했다. 하원에서는 왕세자가 자폭 버튼을 눌렀다고 난리가 났다." [121] Charles: The Private Man, the Public Role이라는 2시간 30분짜리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서 2년 동안 180시간의 녹화가 진행되었으며, 방영되지 않은 나머지 177시간 분량의 영상은 추후에 누구도 쓸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다고 한다. 아마도 테이프는 윈저성의 금고에 보관 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122] 실제로 찰스는 카밀라가 '나의 친애하는 친구(a dear friend)'이자 '나의 정말 좋은 친구(great friend of mine)'라고 말했고, 이후에 찰스의 공보관이 문제의 여성이 카밀라가 맞다고 확인했다. 아무튼간에 찰스가 카밀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23] 1300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럼리스트들은 미래의 왕으로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평들을 내놓았고, 더 선이 진행한 전화 설문조사에서도 답변자 중 2/3이 찰스가 통치자로서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답했다고 하지만, 당시 더 타임즈의 기사에서도 나오듯이 개인으로서는 "맹비난 보다 더 많은 공감을 이끌어낸 것"은 사실로 보인다. [124] 1994년 6월 29일에 인터뷰가 ITV를 통해 방영되었으며, 같은 날 밤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기금 모금 만찬이 열렸다. [125] 검은색 짧은 오프숄더 드레스. 위키피디아에 항목이 별도로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다. 이 드레스는 이후 1997년에 있었던 자선 경매에서 39,098파운드로 스코틀랜드의 한 부부에게 낙찰되며, 이 부부는 다이애나의 사망 이후 드레스를 은행 금고에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6] 이를 통해 다음날 신문 1면을 두고 다이애나가 찰스에게 도전한 것이라는 분석들이 나왔으며, 'War of the Waleses'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까지 여겨진다. [127] 이 단체의 혜택을 본 사람이 바로 배우 이드리스 엘바이다. [128] 그리고 뜬금없이 찰스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모습이 나오는데, 시간대는 다르지만 영상으로도 남아있는 실제 상황이다. # [129] 1980년대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조지 5세가 로마노프 일가가 영국에 오는 것을 꺼린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극중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로마노프 가문 지원 여부에 대한 총리의 서한과 영국 왕실의 결정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 사실 왕비가 최종결정 권한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130] 이 과정에서 옐친에게 늘 따라다니는 알코올 중독과 술버릇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131] 기념사진을 찍을때 바로 옆에 여왕이 있는데도 "여왕이 뭔데 나한테 설교냐", "말 조심해야지 그러다가 자기 궁둥이에 총검을 맞게 된다", "이게 뭔 궁전이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변소가 이것보다 크겠네" 등등의 말을 러시아어로 한다. [132] 실제로 옐친이 여왕 바로 옆에서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영국측 통역이 한명도 없을리가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133] 실제로는 1970년대에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1991년에 발굴, 1993년에 신원 확인이 되었다. [134] 실제로도 필립은 혈액 샘플을 제공했다. [135]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 유일한 방문이다. [136] 이런 장면은 결혼 관계였지만 지난 몇십년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았던' 영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공식 만찬에서의 여왕의 연설과 오버랩된다. [137] 실제로 러시아 정교회는 장례식때까지도 해당 유해들이 로마노프 일가의 것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138] 사실 실제 여왕은 1994년 방문에서는 차르와 자신의 연결점을 부각하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고 한다. [139] 필립은 그리스 왕가 출신이며, 그리스의 종교는 정교회다. 여왕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 [140] 여왕과 필립 간에 이런 긴밀한 대화가 있었다고 해도 당연히 외부인이 알 수는 없지만, 1990년대에 특별하게 둘의 관계가 멀어진 듯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정 반대라고 [141] 그리고 이게 정설이다. 영국 왕실은 독일 색을 빼기 위해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에서 윈저 왕조로 개명했으며, 조지 5세는 평판이 좋지 않은 차르 일가를 데려오는 것이 러시아의 신생 혁명 정권에 공감하고 있는 영국 노동자계급을 자극하는 일이라는 점을 걱정했다고 한다. [142] 페니와 필립이 우정을 쌓아올린 것은 맞지만 그 이상의 관계에 대한 것은 모두 추측일 뿐이라고 한다. [143] 최종적으로 1998년에 차르와 차리나와 자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회에 매장된다 [144] 촬영 도구로 쓸 것이라는 바시르의 요청으로 이 확인서를 만든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는 다이애나와 그녀의 동생을 속이기 위해 해당 문서가 사용되었다는 의심을 품고 데일리 메일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제보하였고, 파노라마 인터뷰 5개월 뒤에 BBC의 보도 윤리를 지적하는 기사가 데일리 메일 일요판에 실린다. 이후에 BBC 보도 총책임자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토니 홀 주도로 1996년에 내부 조사가 시행되지만, 바시르는 이 확인서를 인터뷰를 이끌어내는데 활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았으며 되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칭찬까지 받는다. 대신 이 사실을 제보한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희생양이 되었고, BBC와의 업무 계약이 끊겼다고 한다. 2020년대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후에야 디자이너는 합의를 통해 75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받는다. [145] 다이애나는 정말로 자신의 전화가 정기적으로 도청되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다만 1990년대 이전의 통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유포된 적은 있으며('Squidgygate'), 이것도 카밀라와 찰스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무선기사가 녹음한 것이었다는 설명이 붙었다. 하지만, 사실은 GCHQ가 제작한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고 정부 차원의 조사까지 진행되었지만 공식적으로 개입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146] 2008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재조사에서 그의 전 연인인 하스낫 칸 박사는 브레이크가 조작되어 있다고 믿은 다이애나가 차를 바꿔탄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147] 다이애나는 자신의 집사에게 무슬림인 칸과의 결혼식을 주재할 사제를 찾아달라고 요청했으며, 윌리엄과 해리에게도 소개했고, 파키스탄에 있는 그의 부모님 집까지 방문했을 정도로 진심이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이 관계를 공개함으로 인해 자신의 일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을 칸이 주저한 것이 컸기에 결국 둘은 결별한다. [148] 2021년 BBC 조사와 이후 인터뷰들에서 바시르는 조작된 서류를 만든 것까지는 인정했지만, 자신에게는 다이애나와의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왕실에 대한 그릇된 주장을 퍼뜨린 책임이 없다면서, 그런 주장들은 다이애나 자신이 만들어낸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사 중에 "마틴 바시르는 어떠한 문서도 보여주지 않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라고 1995년 12월에 다이애나가 직접 쓴 문서가 발견되었다. 영국 언론들은 드라마에서의 묘사처럼 바시르가 강박적일 정도로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이었다고까지는 보지 않는다. [149] 이때 나온 중상모략 중에는 에드워드 왕자 AIDS 치료를 받고 있다, 여왕이 심장병을 앓고 있으며 조만간 퇴위할 것이다, 찰스가 자식들의 유모와 바람을 피고 있다는 것들이 있다. 특히 마지막 건의 경우 바시르가 다이애나에게 가짜 낙태비용 영수증을 제시했다는 의혹도 있다. [150] 2021년 조사는 최종적으로 BBC 가이드라인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가 있었으며, "높은 수준의 무결성과 투명성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으로 끝났으며, 범죄 행위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BBC는 다시는 이 인터뷰를 방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서 윌리엄 및 해리 왕자에게 사과 서한을 보냈으며, 유모에게 상당한 손해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151] 제 2차 세계대전 이탈리아 전선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의수로 대체했다. [152] 이튼은 남학교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계승자 시절에 이튼의 부학장으로부터 헌법사를 배웠기에 명예 동문회원으로 인정받았다. [153] 수잔 허시. 1960년부터 여관(女官)의 직위인 Women of the Bedchamber에 임명되어 찰스 3세가 즉위한 후에도 계속 일해왔으나, 2022년 11월 한 행사에서 흑인 여성에게 어디서 왔냐고, 근본이 어디냐고 계속 되물은게 논란이 되어 사임했다. 다만, 이 사건은 시즌 5 공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관련 묘사가 드라마에 반영될 수는 없었다. [154] 윌리엄은 2021년 조사 이후에 이러한 기만이 다이애나가 생애 마지막 몇년간 겪은 두려움, 편집증, 고립감에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155] 이 당시 BBC의 사장이었던 존 버트는 2021년 조사 이후 바시르를 "산업적인 규모의 연쇄 거짓말쟁이"이며 "방송 역사상 최악의 범죄 중 하나"라고 비난했다. [156] 바시르는 이후 다이애나와의 인터뷰로 얻은 유명세로 마이클 잭슨과도 인터뷰를 따내는데 성공하고, 여러 상들을 수상하는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다. 하지만 2021년에 파노라마 인터뷰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자 건강 문제를 들어 BBC에서 사임한다. [157] 하지만 다이애나의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죽기 전까지 이 인터뷰를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158] 다이애나가 여왕에게 먼저 사실을 통보하거나 관련 대화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는 왕실 전체가 인터뷰를 보고서 경악했다고 한다. 인터뷰 방영 직후 여왕과 오찬을 함께한 당시 BBC 이사회의 일원인 리차드 에어 경은 여왕이 "끔찍한 일을 했어. 내 며느리가 끔찍한 일을"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159] 다이애나의 비서였던 패트릭 젭슨은 다이애나와 여왕의 1대1 면담은 없었다면서, 공식적인 업무를 보기 위해 탄 재규어 안에서 옆에 다이애나가 있는 가운데 자신이 여왕 개인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파노라마 인터뷰에 대해서 알린 것이 전부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여왕의 집무실에 있던 언론 비서관이 BBC로부터 직접 정보를 받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고. [160] 이 시점에는 모튼의 책에 다이애나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공식화되기 전이었기에, 다이애나의 목소리로 결혼 생활에서의 카밀라의 존재에 대한 발언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161] 영국에서만 2300만명이 시청했다 [162] 2021년, BBC는 인터뷰 성사 과정 방식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사과한다. [163] 이후 BBC는 여왕의 크리스마스 특별 메시지의 독점 제작권을 상실한다. 왕실이 댄 공식 사유는 달라진 미디어 상황에 대응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BBC, ITV, Sky News가 로테이션으로 제작한다. [164] 실제로 1995년 12월에 여왕은 켄터베리 대주교와 메이저 총리와의 상의를 거쳐 이혼을 승인하는 편지를 둘에게 보냈다. [165] 인터뷰 직후 여론조사에서 80% 이상의 응답자가 그녀의 편을 들었을 정도로 다이애나를 결혼의 피해자로서 동정하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왕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감을 표시했던 찰스를 건너 뛰고 손자 윌리엄에게 여왕이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다만, 찰스에 대한 호감도는 폭락했지만, 여왕에 대한 여론은 그렇게 악화되지 않았다. 젊은 애들의 문제라는 생각이 컸다는 모양. [166] 바시르에 의해 다이애나를 감시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그녀의 개인 비서 패트릭 젭슨은 파노라마 인터뷰로 인해 다이애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이끌고 보호해주었던 왕실 내의 지지 체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고 회고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최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나 그녀의 안위를 돌볼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이애나는 "취약하게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167] 다이애나가 사망한 후 경찰과의 인터뷰에서 칸은 "우리가 결혼하는 것에 대해 제가 가졌던 가장 큰 걱정은 그녀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내 삶이 지옥이 될 것이란 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68] 마크 볼랜드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찰스의 개인 비서로 일하면서 다이애나 사망 이후에 찰스에게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내고 2005년에 찰스와 카밀라의 결혼이 인정받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찰스를 위해 일하던 시절 20%대까지 폭락했던 찰스에 대한 지지율은 75%까지 증가한다. 하지만 카밀라를 위해서 다른 왕실 일원들을 깎아내린다는 비판을 받고 사임한다. [169] 다이애나는 카밀라를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권력기관을 동원해서 자신을 옥죄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카밀라는 자신과 찰스의 이야기들이 측근들을 통해 다 새나가는 것에 화를 내고 잠깐 주차한 차가 견인되려는 것을 보면서 다이애나는 이런 일이 없을텐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변변찮은 외모를 한탄할 정도로 위축된 모습이다. [170] 대처 재임기 중에 상황은 계속 악화되면서 폭탄테러가 잇다르고 1991년에는 다우닝가가 박격포 공격을 받을 정도였지만, 메이저의 재임기 중에 다우닝가 선언등 큰 돌파구들이 마련된다. 벨파스트 협정으로 The Troubles라고 불리던 북아일랜드 문제에 일단락이 지어진 것은 블레어가 총리가 된 이후이긴 하지만 말이다. [171] 1990년대에 온갖 스캔들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메이저와 왕실의 관계가 긴밀해졌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가 다이애나가 사망 한 후 메이저를 윌리엄과 해리의 특별 후견인으로 임명한 것이며, 2018년 해리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에 전직 총리 중에는 유일하게 초대되기도 했다. [172] 다이애나가 존 메이저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총리가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정도로 1996년에 웨일스공 부부의 이혼을 중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메이저는 여왕과 총리의 논의는 비밀로 지켜져야한다는 입장이기에 여왕이 그런 요청을 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메이저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아직 왕세자 부부가 별거를 하기 전인 1992년에 둘에게 조언을 해주기는 했다고 한다. 다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혼이 지속 불가능한게 너무 명확해지자 헌법적인 지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집중했다는 모양. [173]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아니나 이렇게 합의를 이루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다. [174] 결별 후에 둘이 이처럼 다시 만났다는 증거는 없다. 공식적으로 찰스가 다이애나를 다시 본 것은 1997년 그녀의 시신이 있는 병원을 방문했을때다. [175] 이혼 관련 사건들을 시간으로 정리하면 1986년 부부의 외도(찰스와 카밀라, 다이애나와 제임스 휴이트) → 1987~92년 부부 간의 불화에 관한 루머가 파다하게 퍼짐 → 1992년 5월 앤드류 모튼의 책 출간 → 1992년 12월 하원에서 왕세자 부부의 별거가 발표 → 1995년 11월 파노라마 인터뷰 → 1996년 8월 공식 이혼 순이다. [176] 켈리 피셔. 아르마니, 캘빈 클라인 등에서 모델로 일했으며, 1996년 7월 파리에서 도디와 처음 만난 후 1997년 8월로 결혼 시기까지 잡았으나 도디가 다이애나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약혼 여부를 두고 소송까지 갔으나, 도디가 사망한 후 철회했고 이후 러시아인 조종사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7] 하이니 바덴. 핀란드 출신이며, 새로운 모델을 찾고 있던 도디 파예드가 그녀를 파리에 데려온 후 아버지에게 소개했고, 이후 도디의 계모가 된다. 모하메드가 도디에게 여자 보는 눈이 있다고 한건 이를 두고 한 말로 보인다. [178] 1997년 찰튼 텔레비전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Monarchy: The Nation Decides' [179] 과반수가 세금값을 못한다고 응답, 83%의 응답자가 왕실이 하는 유익한 일 3가지를 말하지 못함, 군주제의 미래에 관한 국민투표를 원하냐는 질문에 70%가 찬성 [180] 사실 메이저는 끝까지 왕실 요트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 했다. 최종적으로 1997년 1월에 국고 자금 지원을 승인하긴 하지만, 같은 해 5월 1일 선거에서 대승한 노동당은 자금 지원 결정을 바로 뒤집어버린다. [181] 블레어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런 제안을 할법도 하지만, 실제로 이런 말을 한적은 없다고 한다. 이 해 노동당의 총선 캠페인을 도배한 것 중 하나가 새로운 왕실 요트 계획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고. [182] 메이저와 다르게 블레어와 왕실의 관계는 그렇게 매끄럽지 못했다. 자신을 토니라고 부르라는 블레어의 요청은 거절당했으며, 블레어의 아내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인사법을 거부함으로써 왕실 의례를 어겼다. 그리고 총리 부부는 발모랄 초청도 거부했다. 애초에 여왕이 선호하는 것은 시골, 시골 스포츠, 말, 개였지만 블레어는 도시, 바베이도스에서의 휴가, 테니스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취향도 정말 맞지 않았다. [183] 데일리 메일과의 법정 다툼 중에 공개된 찰스의 일기장에 따르면 "자리가 왜 이렇게 불편해보이는지에 대해 어리둥절했지만, 이것이 1등석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에드워드 히스, 더글러스 허드 전 외무장관, 로빈 쿡 신임 외무장관 등이 1등석에 앉은 것을 보고 "이것이 제국의 종말이구나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184] 블레어는 실제로 시간이 꽤 지난 후에 브리타니아의 퇴역에 관여한 것을 깊게 후회했다고 한다. 왕실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고. [185] 추후 공개된 일기에서 찰스는 블레어와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지만, "항상 서두르는 감이 있다"고 썼다. [186] 군주제 토론회에서 나온 여론조사는 왕실에 긍정적인 반응이 더 많았고, 찰스에 대한 지지율은 그것보다 낮았다. [187] 2022년 10월, 이 장면을 촬영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188] "그것에 관해서 쓰지 않을 거라 기쁩니다"라고까지 말했다. [189] 실제로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되는 16세의 윌리엄과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 입학하는 21세의 윌리엄을 서로 다른 배우가 맡게 되었다. [190] 루이 마운트배튼의 죽음이 다뤄지긴 했지만 북아일랜드 분쟁이 중심이라기보단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심리적 안정감을 얻지 못하던 찰스 왕세자가 크게 의지하던 든든한 왕실 어른의 죽음으로 그려진다. [191] 이때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러시아 혁명과 에드워드 8세의 양위 사건 등이 일어나며 윈저 왕조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다. '더 크라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조지 왕자와 헨리 왕자도 비중있게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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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스코틀랜드의 국교인 장로회는 이혼에 상대적으로 관대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