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 대한 내용은 윤종화(배우)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7A6657><colcolor=#fff> 윤종화 尹鍾華 |
|
이명 | 윤장섭(尹章燮) |
창씨명 |
이사카 카즈오 [ruby(伊,ruby=い)][ruby(坂,ruby=さか)] [ruby(和,ruby=かず)][ruby(夫,ruby=お)] |
출생 | 1908년 3월 1일 |
충청남도 청양군 | |
사망 | 몰년 미상[1] |
본관 | 칠원 윤씨[2] |
가족 |
아들
윤석순 조카손자 윤상현 |
학력 |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사가고등학교[3] (졸업)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
약력 |
일본
고등문관시험 합격 창녕군수 김해군수 경기도청 경찰부 보안과장 종로경찰서장 황해도청 경찰부장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에 창녕군의 군수와 종로경찰서의 경찰서장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참고로 국회의원 윤상현의 작은할아버지다. 그리고 아들 윤석순은 제11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4]
2. 생애
1908년 3월 1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나 공주고등보통학교, 일본 사가고등학교[5]를 거쳐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 양과(兩科)에 합격하여 경상남도청의 내무부에서 근무했다. 1937년 경상남도 창녕 군수로 부임하여 재직하던 중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등의 전시 업무를 수행했다. 1939년 김해군수로 옮겨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국채소화(國債消化)와 저축 장려 등의 업무를 수행하여 《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곧이어 함경남도청의 경찰부(1940년)와 경기도청의 경찰부(1942년)에서[6] 보안과장을 역임하고, 1943년 9월에 조선인 최초로 경기도의 경성부에 위치한 종로경찰서의 경찰서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1일자 《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근로태세 정비할 터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상층 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활동가로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 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하 긴급 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 정비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상층 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활동가로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 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하 긴급 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 정비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
황민화운동추진위원회[7]의 고문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이사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 조선인 최초로 황해도청의 경찰부장으로 승진하여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8]
해방 후 1945년 9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평양 삼합리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2월 중국의 훈춘, 러시아의 그로데코보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1982년 3월 17일자로 부재자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1]
최소 1946년(향년 38세) 이후에 사망했다. 물론 소련에 이송된 만큼 좋은 꼴은 못 보았겠지만.
[2]
39세 종(鍾) 항렬.
[3]
현
사가대학
[4]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는데, 그 이유가 윤종화의 친일 전적이
부산 시민들에게 퍼져서였다는 말이 있다.
[5]
구제고등학교 과정으로 현재의 대학교 교양과정에 해당됨.
[6]
지금의
지방경찰청(
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의 경찰관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2제국의
경찰행정법을 본받아 내무성 직할의 경보국과 도쿄 시내의
경시청에서 근무하는 중앙경찰 및
도도부현의 민정관청에서 근무하는 지방경찰로
인사
체계가 분리되어 있었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민정문관이 XX군수로 승진한 뒤에 XX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순환근무도 흔했다. 당연히 일본 본토의 현청 직제를 모방하여
조선총독부의 13개 도청에서는
도지사의 지휘를 받는 5개의 부국(경찰부, 내무부, 재무부, 농상부, 광공부)이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의
관료제는 현대 시대의 1급~10급 공무원(국민의 충복)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정1품~종9품 문무관리(국왕의 충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7]
경성부 종로 관내 유력가인
윤치호·
한상룡·
이광수·한규복(韓圭復) 등 6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황민화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
[8]
조선인
경찰서장들 가운데
경시정으로 승진한 사람은
구연수(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무관), ___(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무관보), 최경진(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사무관), 윤종화(황해도청의 경찰부장) 뿐이고, 나머지는 보통경찰 계통을 아예 벗어나 XX
군수로 수평이동해 XX도청의 XX부장으로 승진한 다음에
도지사와 도참여관 및 총독부 사무관과
중추원 참의로서
정년퇴직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