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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09:12:51

이광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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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광우.jpg
본관 경주 이씨
출생 1925년 3월 19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정 621번지
(現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사망 2007년 3월 26일 (향년 82세)
부산광역시
가족 배우자 함시복, 슬하 2남 4녀
차남 이상국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52호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2. 생애3. 기타
3.1.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파일:이광우1.jpg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 금마를 만나모 직이뿌라. 금마는 사람이 아이데이. 인두껍을 쓴 짐승이라."'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2. 생애

파일:이광우 지사.jpg
젊은 시절의 이광우.[1]

1925년 3월 19일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정(現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621번지에서 태어났다.

1942년 5월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부산진공립보통학교(現. 부산진초등학교) 동창생 5명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친우회'[2]를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일본 제국 태평양 전쟁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조선방직주식회사 등의 군수품 제조공장과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을 추진하는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해 6월 이들은 "일본은 망한다", "조선독립만세", "우리가 일제에 핍박받고 있을 수 있느냐" 등 일제의 침탈상을 고발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항일 전단지 200여 장을 제작해 조선방직주식회사 기숙사, 부산도매어시장, 부산진시장, 관부연락선 제1부두 등지에 뿌리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1943년 3월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친우회 총책 이광우와 부총책 정종기, 조직원 김수복 등 3명은 항일투쟁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일본 군사시설 파괴모의 혐의로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과 외사계에 이른 바 '친우회 불온전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울산공산당사건(울산ML연맹)으로 체포된 여경수(呂敬守), 이미동(李美東)[3] 등의 여러 청년들이 같은 시기에 체포된 까닭에 일본 제국 경찰은 두 사건을 병합하여 규모를 크게 부풀리기 위한 사건 조작을 기획하고 고문을 자행했는데 악랄한 고문으로 인해 여경수는 옥사했고 일본 제국 경찰의 사건조작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친우회 총책이었던 그를 제외한 나머지 검거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는 부산지방법원에서 1945년 2월 27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선고받았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1년 5개월 20일간의 옥고를 치른 뒤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가석방되었다.

이때 친일 경찰 '고문귀' 하판락[4]이 자신과 같이 유치장에 수감된 동지들을 고문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았으며 본인도 하판락에게 다리관절 꺾기고문, 고춧가루 물고문 등과 같은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당시에 보았던 잔혹한 광경에 대하여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해방 후 그는 평생 하판락을 증오하면서 살았다.[5][6] 그의 증언으로 하판락의 악행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착혈 고문'이었다. 마침내 KBS, MBC의 뉴스 및 시사보도 프로그램 등에서 하판락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판락은 2003년에 사망했으며 4년 후에 그는 평생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지병으로 인해 2007년 3월 26일 오전 부산광역시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2007년 3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3.1. 대중매체



[1]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 [2] '친우회' 명칭은 일본 제국 경찰이 붙여준 사건명이다. [3] 창씨명은 카타야마 미토(片山美東). [4]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고문 형사로 김덕기, 노덕술 등과 함께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특히 주사기로 독립운동가들의 피를 뽑아 뿌리는 착혈 고문을 활용한 사실을 이광우가 최초로 증언했다. 해방 후 21세기까지 오랫동안 살아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5] 자신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려는 목적으로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차남 이상국에게 한 말이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죽여버려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였을 정도다. [6]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하판락을 만났을 때 주먹질을 하며 몸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