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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7-12-22 21:25:07

나무위키:연습장/반불교

1. 개요2. 역사3. 교리에 대한 비판
3.1. 윤회에 대한 비판3.2. 여성 차별3.3. 과학성과 철학성에 대한 논란
4.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
4.1. 일본불교의 승병과 제국주의 협력 논란4.2. 로힝야족 학살 옹호및 적극적인 참여
4.2.1. 미얀마 불교에 대한 옹호 의견.4.2.2. 옹호에 대한 반박
5. 한국 불교의 친일 논란
5.1. 황우석 사건 당시 김수환 추기경 모함
5.1.1. 달라이 라마의 신사참배 논란
6. 방생 문화에 대한 비판
6.1. 반론
7. 현재8. 기타 불교의 비행9. 함께 보기

1. 개요

反佛敎. 불교에 대해 적대/반대하는 태도이다. 반종교의 한 종류.

2. 역사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때까지는 국교의 위치에 있었던 불교를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고려 망국의 원흉이나 마찬가지로 보았기 때문에 조선 500년간 반불교에 입각한 숭유억불은 국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간헐적으로 불교 우대적인 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에 비하면 일관적으로 반불교 성향이 강했다. 승려를 천민과 동격으로 쳤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 구한말에 탄압이 풀리자 불교계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이 한양 조계사를 세운 일이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에 대한 반감이 더 높은 데다 개신교 신자들이 늘어나 딱히 반불교가 강조되지는 않는다.

3. 교리에 대한 비판

3.1. 윤회에 대한 비판

若有故作業,我說彼必受其報,或現世受,或後世受。若不故作業,我說此不必受報。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ㅡ중아함15경 사경(思經) 업상응품(業相應品)[1] [2]

불교는 모태가 되는 바라문교( 브라만교)와 더불어 윤회설을 주장하는 종교 중 하나인데, 윤회설의 비판점은 '불평등 합리화'라는 차원에서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전근대 시기에서 신분제는 사회가 유지되는 데 공통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들이 지식과 무력, 재화를 독점하고 사람을 부리던 때였고, 종교는 이를 합리화하는 도구였다. 불교도 이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분명한 점은, 불교의 업설은 바라문교의 업설보다 훨씬 진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라문교의 업설이 더 높은 카스트로 올라가기 위해 카스트 제도에 복종하고 선업과 수행을 쌓는 게 목적이라면, 불교의 업설은 어떤 카스트든 선업과 수행을 쌓고 악업을 자비로 풀면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게 요체다. 또한 불교는, 업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자유 의지를 존중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자유의지 항목

하지만 바라문교든 불교든 힌두교든 중요한 문제점은 업과 윤회라는 개념에 있다.

이들 자체가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불교의 업설은 어느 계층이든 수행과 선업을 쌓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나, 문제는 인과 자체가 전생과 후생을 초월한다는 데 있다. 즉, 현생에 겪는 고통은 전생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에 현생의 차별과 불평등이 합리화될 수 있다. 그리고 교리상으론 죽음과 함께 몸이 부서지며 기억이 단절되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이 후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기억나지도 않고 뭔지도 모르는 전생의 죄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인정한다는 게 될 수 있다.

물론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나 힌두교 같은 경우 지금 살면서 내가 전생에 좋은 선업을 많이 쌓아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른 생명이나 자기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을 괴롭히거나 하면 악업이 쌓여 그 과보로 다음 생에서 좋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회적인 차별과 지금 현재의 괴롭고 힘겨운 상황과 대우를 당사자 본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인도의 경우, 바라문교가 대중적이던 고대부터 힌두교가 대부분인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참혹한 인권 탄압의 좋은 도구가 되어왔으며, 카스트 제도에 반발해 나왔다는 불교조차 신분제를 완전히 철폐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교를 믿었던 마우리아 왕조, 쿠샨 왕조 조차도 500년 동안 고치지 않았다. 애초부터 아소카 왕과 카니슈카 대제가 불교를 국교로 세운 건 사회 유지였지 평등 사회 건설이 아니다.[3]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봐도 설명이 가능하다. 비롯한 동북아에 불교가 들어올 때 처음에 반발하던 지배층들이 오래가지 않아 불교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업설이 신분제를 합리화하는데 토속신앙보다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교 도래 이전 토속신앙에 기초한 신정일치제 시절의 경우, 왕은 신의 자손으로서 집권할 수 있지만 동시에 리스크도 컸다. 외부 세력의 침략에 패배하거나, 자국이 이겨낼 수 없는 수준의 천재지변이나 역병 등 재해가 닥쳐오거나 하면 신의 자손이라는 지배자의 신성한 권능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피지배층의 충성심이 흔들리고, 이게 반복되면 안정적인 충성의 기반이 흔들린다. 당장 한국사만 봐도 과거 부여에서는 재해가 들면 왕을 죽여버렸다.

불교의 환생설에 따르면 왕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기 때문이고, 귀족으로 태어난 것은 왕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았던 것으로 합리화하기 유리하고, 여기에 왕즉불 사상까지 가면 지배자는 불교를 후원하는 만큼 무제한적인 충성 세력과 집권의 합리화가 가능하다. 실제로도 그런 이유로 과거 왕실에서 불교를 많이 후원했던 것 또한 사실.

이 부분에서 불교와 유교 간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유교 의식이 많이 왜곡되어서 그렇지 유교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피지배층의 충성의 자세 못지않게 지배층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와 대의명분에 대한 강조 역시 만만치 않다. 조선시대 국왕들이 그렇게 집권해서도 성군 이미지에 집착하고 왕이 되어서도 죽어라 공부했던 것도 이것 때문이고, 중국사를 봐도 천명 사상에 따라 갖은 재해와 외침에 나라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천명이 다한 것으로 판단되어 반란 세력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혁명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혁명이라는 말은 본래 천명을 새로이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교는 어찌 되었건 지금 생에 좋게 태어난 건 전생의 공덕 때문이고, 그에 따라 금생에 합당한 보답을 받는다는 논리 구조이기에 지배자의 자세와 태도 문제에서도 유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더욱이 나랏돈으로 지어주고 승려들 먹이는 것도 큰 공덕을 쌓는 것으로 취급받으니, 불교계 전체를 지지세력으로 쥐고 흔들기도 편하다. 그래서 한국, 중국보다도 더 심각한 일본 신토와 불교의 윤회관이 결합하여 덴노는 2차대전 전까지 신의 현현으로 추앙받았고, 역성혁명이 없었으며, 신분제가 공고화되어 오늘날 부라쿠민 차별 문제의 근원들 중 하나가 되었다.

3.2. 여성 차별

一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各各器盛食在道側,胡跪授與沙門。
첫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모든 시주[4]들이 항상 그릇그릇마다 음식을 담고 길 가에서 무릎을 꿇고 스님들께 공양할 것이다.
二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與衣服卧具逆於道中,求沙門受用
둘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모든 시주들이 항상 의복·침구 따위를 시주하되, 길에서 맞이하여 스님들이 받아 쓰도록 할 것이다.
三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乘象馬車乘在於道側,以五體投地求沙門蹈而過。
셋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이 항상 코끼리나 마차를 타고 있더라도 길 가에서 오체투지함으로써 사문이 밟고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四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在於路中,以發布地求沙門蹈而過。
넷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마땅히 길에서 머리카락을 땅에 펴 스님이 밟고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五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恭敬心,請諸沙門至舍供養。
다섯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공경심으로 스님들에게 집으로 와서 공양하기를 청할 것이다.
六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見諸沙門常應恭敬心凈掃其地,脫體上衣布地令沙門坐。
여섯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공경심으로 자리를 깨끗이 하고 상의를 벗어 땅에 펴 스님이 앉도록 할 것이다.
七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脫體上衣拂比丘足上塵。
일곱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상의를 벗어 비구의 발의 먼지를 털 것이다.
八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舒發掃比丘足上塵。
여덟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머리카락으로 비구의 발의 먼지를 털 것이다.
九者若女人不出家者,沙門威德過於日月。況諸外道豈能正視於沙門乎?
아홉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사문의 위덕은 태양과 달에 버금갈 것이니, 하물며 외도들이 어찌 능히 사문들을 똑바로 볼 수 있겠는가.
十者若女人不出家者,佛之正法應住千年,今減五百年。
열째, 만약 여인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년을 머무를 것이지만, 이제 오백년으로 감하였다.
ㅡ<비니모경>에서 석가의 말씀.

위의 비니모경의 내용은 아함경 116경 구담미경(임품)을 풀이한 내용이다.[A] 석가의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와, 이하 500명의 샤카족 여인들이 출가하려고 하자 내내 거절하다가 아난다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이런 말을 하면서 들어준 것이다. 애초에 석가는 여자도 성불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 어렵다는 입장이다.[6] 사실 말이 이렇지 석가 아래의 여인들은 비구니 법계를 받고 잘도 수행했다. 심지어 비구 250계보다 더 가혹한 비구니 348계를 지키면서.

어쨌든 석가는 비구니를 받아들이기 위해 팔경법(팔존중법, 팔경사법)을 만들긴 했다. 내용은 이러하다[7][A]
① 출가한 지 100년이 된 비구니라도 바로 그날 계를 받은 비구에게 먼저 합장해야 한다.
②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는 안거를 해서는 안 된다.
③ 한 달에 두 번씩 비구 승단에 나아가 계율을 반성하고 설교를 들어야 한다.
④ 안거를 마친 뒤에는 비구들에게 나아가 안거 중의 잘못을 참회하고 의심난 일들은 물어야 한다.
⑤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는 대중의 처소에서 떠나 보름 동안 별거해야 한다.
⑥ 비구니가 되려는 자는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계를 받아야 한다.
⑦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
⑧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

또한, 석가는 사리풋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舍利弗。此八佛土皆悉清淨。無有女人亦無五濁。舍利弗。若善男子善女人住大乘者。聞此八佛名號。受持不忘并為他說。若生三塗八難處者無有是處。若有女人聞八佛名號。自能憶持兼為他說。若更受女身無有是處。
사리불이여. 이 여덟 부처[9]의 정토는 다 청정하여 여자가 없고 5탁(濁)도 없나니, 사리불이여, 대승(大乘)에 머무는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만약 이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받아 지녀 잊지 않는 한편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한다면, 그는 3도(塗)와 8난(難)이 있는 곳에 태어날 이치가 없으며, 여자로서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스스로 기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한다면, 그 또한 여자의 몸을 다시 받을 이치가 없으리라.
ㅡ팔길상경(八吉祥經)에서

이 석가의 말씀은 여자는 불국정토에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삿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며, 불도를 지니고 선행을 베풀고 그 가르침을 베풀면 정토에 남자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다. 결국 여성은 성불할 수 있어도, 여성의 몸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교리 자체가 여성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약사여래에겐 전여득불(轉如得佛)이라 하여 여성이 불리한 조건으로 성불할 수 없다면 남성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서원이 있으며, 초일명경 등에서는 여자가 선업을 쌓아 내생에 남자로 태어나라는 등의 막장 교리도 있다. #[10]

사실 양성차별은 어느 종교든 존재하지만, 이렇게 구원론 차원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다. 비구니는 이 팔경법으로 인해 종단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고 있으며 비구(남성 승려)의 똥군기에 시달리면서도 그들 대신에 궂은 일을 하느라 불경 공부나 설법을 듣는 등 수행이 쉽지 않으며 종단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학교로 치자면 비구는 10년 공부에 수1, 수2, 미적분까지 땐다면 비구니는 중1, 2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몇 천년동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막장상황은 현대로 넘어와서 자유주의 및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겨우 나아진 것이다. 몇몇 여성차별 교리는 사문화된 사항이지만 아직까지도 보수적인 불교 종단에서 차별의 흔적이 전통처럼 강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한국의 비구니들은 참종권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실정이다. #

3.3. 과학성과 철학성에 대한 논란

불교신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주장하며[11]때로는 과학적이거나 철학적, 혹은 무신론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달라이 라마가 적극적으로 밀고 가는 설이기도 하다. # 실제로 불교는 자기네들 가르침을 과학과 결부시켜서 합리화하려는 학술적, 포교적 움직임이 창조과학만큼 왕성하다. # # #

하지만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는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일 뿐, 불교의 교리는 위의 환생설처럼 반증 불가능한 것도 많다. 또한 불경의 내용은 영적인 수련과 철학적인 사유로 저작되기에 형이상학적인 내용도 많은데,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특정 이론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주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불교를 과학으로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는 셈. 또한 불교의 내용이 철학적이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고, 때문에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어느 종교나 그 종교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종교와 철학이 융합하는 경우는 존재한다.

물론 불교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이런 불교의 행태를 창조과학과 똑같은 짓이라 지적했다. #

4.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

평화의 종교라는 미명과 달리, 불교 또한 정치적 폭력 세력으로 변질하여 타 종교권에 대해 문화 등으로 침략을 행한 적이 있으며, 한국, 중국,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준 선불교의 무아론, 열반론, 번뇌론이 전체주의 파시즘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제기된 적 있다. 실제로 난징대학살중국인의 번뇌를 없애주는 일본 불교의 자비라며 정당화한 적이 있다. #

일각에서는 일본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본 불교의 폭력 그 이전부터 불교가 어느 정도의 폭력성이나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도 기존 바라문교의 승려들의 교리와 수행을 외도(外道)라 비하하며[12] 기존 바라문교의 분노를 샀다. 사실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진리이니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가 크다.[13][14]

물론 불교계에서는 살생을 금지하는 평화적인 구절 등을 언급하며 저건 불교가 아니다, 일부의 문제다.라며 변호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불교에서도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후, 방편론의 강조와 함께 자기 방위적 물리력 행사에 대해서까지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았다. 승병이 발호해 무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무장의 거짓말은 무략이라 하고 승려의 거짓말은 방편이라고 하니 그 사이에 끼인 백성들만 가엾구나"고 한탄했다는 것이 유명.

문제는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빨갱이기독교 광신도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기독교인 중에 불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본 문서에서의 불교 비판의 출처는 무신론자들이나 회의주의자, 불교 승려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독교인도 아닐 뿐더러 특정 종교를 위해서가 아닌, 지식과 이성으로 불교의 자화자찬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불교인들은 이들의 비판을 수용하기보다는 아무런 근거없이 기독교의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4.1. 일본불교의 승병과 제국주의 협력 논란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아미타불)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도조 히데키의 유언 #
자비심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 나은 보살행은 없다.
ㅡ 승려 난텐보 [B]
선에는 특별한 교리도 철학도, 일련의 개념도 지적인 법칙도 없다. ……
선은 아나키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무신론이나 관념론,
혹은 어떤 정치적·경제적 독단론과도 결합할 수 있다.
ㅡ 승려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 [B]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불교의 대자대비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는 때로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한명을 죽이는"자비의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대승불교는 이를 매우 진지하게 승인한다.
일본의 불교 지도자
ㅡ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증언

일본의 경우, 센코쿠 시대엔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승려인 척했던 게 태반인[17] 소헤이처럼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불교 측에서 "부처극락 야소지옥"을 외치며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 기록도 있다.[18]

불교 지도자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군국주의에 뛰어들어 행동하기도 했다.[19] 대표적인 것이 일본 식민지에 대한 불교 전도 사업인데, 일본의 주요 불교도들은 중국과 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불교는 후진적이고 수동적이며 사회적 요구에 무관심한 반면에, 일본 불교는 능동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과학적이기 때문에 일본 불교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참된 불교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일본의 참된 불교를 아시아의 민족들, 심지어 서양인에게까지 전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또한 식민지 곳곳에 전파된 일본의 불교 사원은 그 지역의 일본군에게 든든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다.

일본 불교 특유의 폭력적인 승려 양성 문화도 일본군 병영부조리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있다.[20] 사실 이는 묵조선(조동종)과 진언종에서는 사찰 내 똥군기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편이다. 이 문제는 한국에도 개봉된 바 있는 영화 《팬시 댄스》를 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참고, 참고 2.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21] 1997년에 내놓은 <불교 파시즘(원제: Zen at War)>이라는 책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2013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군 해군에서 쓰였던 정신주입봉도 사실은 다른 것도 아닌 일본 죽비에서 변형된 것. 일본 죽비는 거의 몽둥이에 가까운 수준으로, 타악기에 가까운 한국 죽비와는 차원이 다르다.

스즈키 데이타로 등 불교 지도자들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전후 일본에서 좌익 정당이 성장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일본회의 우익 단체의 기반이 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 일본이 전쟁 당시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고 암시하는 것을 모두 교과서에서 제거하려 했다. 도리어 서양에 불교를 전파하며 " 너희 서양의 기독교는 폭력적이며 [22]우리 불교가 참되고 평화적인 종교"라며 포교를 했는데, 68운동 당시 기독교 전통을 거부하고 오리엔탈리즘에 영향을 받은 서양인들이 일본 불교의 전략에 제대로 낚여버렸다.[23] 아직도 일본에서는 타 종교를 깎아내리며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식이라는 반응 및 언플이 많다. # # # # http://okanejuku.blog92.fc2.com/blog-entry-675.html

정복부터 대항까지, 외세에 대한 침략에 대해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 대부분이었던 한민족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종교 자체가 침탈에 자주 이용되어 온 역사는 외국에서 흔한 이야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에서 임진왜란까지 불교의 영향이 컸었고. # 멀리서 가면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헬레니즘 제국, 바이킹, 십자군, 제국주의 서구열강 등 종교의 힘을 빌어서 침탈을 자행해 온 사례는 굉장히 많다. 일제와, 일제시대의 불교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4.2. 로힝야족 학살 옹호및 적극적인 참여

미얀마의 불교는 현재 버마족 군부가 행하는 로힝야 족 학살을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데, 먼저 불교계가 무조건[24] 미얀마를 옹호한다고 보는 것은 편견임을 밝힌다. 하지만 버마인이 아닌 불교신도들도 몇몇이 로힝야족을 종교적으로 증오하는 건 사실이며, 불교계에서도 버마 불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이러한 불교 프레임이 로힝야 학살을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여기서는 의견이 갈린다.

4.2.1. 미얀마 불교에 대한 옹호 의견.

로힝야 사태는 과거 벵골인이었던 로힝야족이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 영국의 비호 아래 이주하여,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박해를 가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즉, 이 문제는 19세기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이로 인한 민족간의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한 로힝야 족의 무제한적인 인구 증가는 실제로 기존의 미얀마 인들의 문화와 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사태의 핵심은 로힝야 족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과 거주권 등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친일파 토지 환수 문제와 비슷하게 사법적인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불교계 언론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영제국이 분쟁의 씨앗을 뿌린 민족분쟁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그 외에 늘어나는 로힝야 인구와 이에 비해 사라져가는 버마인들의 정체성과 불교를 지켜야하는 의무감, 불교민족주의와 미얀마 군부의 야욕 등도 원인으로 꼽고 있다. 즉, 버마족과 로힝야 족 모두가 피해자라고 보고 있으며 불교 교리적인 영향은 적거나 아예 없다고 보고 있다. #, #, # 즉, 불교의 자체의 잘못은 아예 아니라는 것.

게다가 네이버 등에서는 극단적인 댓글이 판치고 있었다. # # #

4.2.2. 옹호에 대한 반박

위의 옹호의견은 버마족=불교=선 로힝야족=이슬람=악이라는, 편견에 기초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의존하고있다.

첫째, 버마족은 불교를 믿는 평화 민족이 아니다. 과거 버마족은 인도네시아나 같은 불교 국가인 태국을 공격하고[25], 타 민족을 학살한 전과가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미얀마의 민족주의에 영향을 끼쳐온 미얀마 불교가 이 문제에 연관이 없다고 볼 순 없다.

둘째, 로힝야족이 버마족을 학살한 원인은 이슬람 신앙보다는 버마족이 일본군과 협조하여 로힝야족의 땅을 환수한 것이 크다. 일제의 동남아시아 침략이 시작되자 미얀마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고 일본군에게 협조적으로 대했다. 영국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벵골인과도 차별받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귀축영미의 아시아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다는 선전을 하던 일본군은 이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점령지의 벵골인들의 농장을 해체하여 땅을 다시 미얀마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이미 그 지역에서 거의 100년을 살아온 로힝야족도 자연히 일본과 미얀마인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영국은 이런 분노를 대일항전에 있어 전선 유지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로힝야족을 무장시켰는데, 이런 영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로힝야족은 일본군과 싸우는데는 별 관심이 없고, 농토를 돌려받은 미얀마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주에서만 아라칸인들을 2만명이나 죽였다. 분명 로힝야족이 버마족을 학살한 것은 악행이 맞지만, 버마족도 극악무도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잠깐[26]이나마 협력했고, 이슬람 신앙이 로힝야족과 버마족의 갈등에 영향이 없지는[27]않겠지만 단순히 이슬람에 미친 광신도 테러리스트들이 불교인들을 죽였다는 불교신자들의 주장은 비약이 크다.

셋째, 결국에는 미얀마 불교의 행위도 과거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이 행했던 종교간 보복과 서로의 악행에 대한 앙갚음을 하는 것 뿐이다. 미얀마 불교의 논리대로라면 과거 기독교가 행했던 십자군전쟁과 종교재판 또한 이슬람 해적과 로마제국의 이교도에게 고통받던 기독교의 보복으로 정당화되고, 알 카에다, ISIL의 테러행위 또한 서구 국가에 당했던 식민지배에 대한 보복으로 정당화되고도 남는다. 지금까지 불교신자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내세운 것은, 타 종교의 종교전쟁과 서로에 대한 보복[28]은 그들이 그냥 사악해서 행한 것이고 우리 불교는 증오와 원한의 연쇄와 업보를 끓는 평화적인 종교라며 선전한데 있다. 그런데 미얀마의 불교는 증오와 원한의 연쇄와 업보를 불교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하고, 그러한 정당화에 대한 비판마저 불교 신자들은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편견으로 차단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불교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옹호만큼 만만찮다. 조계종과 신대승네트워크가 타 종교와 운동권과 힘을 합쳐 반대 시위를 펼쳤고, # 거기서 신대승네트워크는 로힝야족 난민 인권실태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

5. 한국 불교의 친일 논란

佛敎中央敎務院
慰問金募集

시내 수송정(壽松町)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서는 비상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야 부내 각 사암(寺庵)과 포교소(布敎所)를 위시하야 황군 위문금을 모집중이든 바 우선 二白五十一원 六十一전을 경성부윤을 통하야 헌납하였으며 게속하야 전 조선 一千五百여 사찰 승려(僧侶)와 신도 二十三萬명을 총동원하야 황군원호에 유루 없도록 지령을 발하고 위문군 모집, 출동부대 송영접대,출동군인가족 유족의 위문격려등 총후의 임무에 성심을 다하고 있다.

1937. 09.02. 동아일보 #

우선 모든 종교가 친일논란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을 해야 하며, 친일 문제는 당시 한국의 모든 종교가 거의 피해가기 힘든 주홍글씨와도 같다.

그렇지만 불교는 가장 일제와 마찰이 적었고, 개화사상가이자 친일 승려인 이동인의 적극적인 협력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제에 순응적인 종교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조선은 망할 때까지 숭유억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의 자유에 제약이 심했던 데다 임진왜란의 승병 활약 이후로 조선 후기에 불교의 자유가 조금이나마 허용이 되긴 했어도 아직까지도 승려의 사회적 입지는 천민이었다. 게다가 일본도 막 신토를 앞세운 폐불훼석으로 불교가 많이 된서리를 맞아 침체되어 있었다 뿐이지 한국보다 불교가 주류였던 사회다 보니 조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불교를 내세워 접근하기 딱 좋았다.

어느 시대나 상대국에 침투할 때는 상대국의 반발이나 경계심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상대국과 자국의 공통점을 찾아내 그 방면으로 접근한다던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경우는 단지 그 수단 가운데 불교가 있었을 뿐이므로 불교가 마냥 일제에 순응적이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종교로 보기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조선 불교 입장에서는 헬조선보단 일제가 낫다는 생각을 가진 승려들이 많았다.

독립운동도 다른 종교계보다 불교계가 가장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많은데, 3.1운동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이 가장 낮았고[29] 내세울 만한 독립운동가들 또한 한용운 백용성, 김법린 정도 밖에 없다는 것.[30][31]

이완용은 사찰령 이후, 조선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1917년 2월 불교옹호회를 설립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 사람을 일제에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불교 옹호회는 불교 신자인 조선 귀족들이 주로 맡았고,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이완용은 후에 조선총독부가 개설한 삼십본산연합사무소란 불교계 중앙 기관에 평의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가 폐지된 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개편되어 민족주의 성향의 불교인들을 겁박해 완벽한 친일 성향의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이완용은 총독부와 함께 조선내 불교의 친일화의 기틀을 어느정도 닦아놓은 셈이다.

이종욱은 승려로 활동하면서 월정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고, 1937년에는 여러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 조계종)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중에 총본산건설위원회의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종욱은 창씨개명에까지 참여하여 廣田鍾郁(히로타 쇼이쿠)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 시기 미국에 충성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친일단체 국민회에 몸담은 적이 있다. 광복 이후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고 1951년에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을 지내며 떵떵거렸다.

최범술은 한때 덴노 암살을 모의했으며 항일비밀단체 '만당(卍堂)'[32]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실체적인 활동도 하지 못하고 일제에게 압력만 받고[33] 변질되어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친일 행적은 책임을 지지 않았고, 실체가 불분명한 독립운동 경력만 인정받아 대한민국 초기에 제원의원으로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권상로 소헤이(僧兵)처럼 한국의 승려들도 태평양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였고, 일본 승려인 누카리야 가이텐과 함께 불교계에까지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해방 이후 에도 수많은 불교서적과 연구를 해왔으며,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으로도 활동 했다.아래의 위키백과 권상로 문서를 찾아보면 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설호는 일제가 사명당 비석을 네 토막내는 데 일조했음에도 단죄받지도 않고 89살까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위의 인물들 이외에도 이회광 등의 친일 불교인사들이 많은데, 이들의 친일 행적은 다른 친일인사들이 그러했듯 청산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불교계의 친일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3년 태고종 승려인 임혜봉이 <친일불교론>(상하2권)을 펴내면서의 일이다. # # 임종국 선생이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것이 1966년. 친일불교론을 처음 펴낼 때에도 친일인사로 거론된 후손들이나 관련자들의 항의소동으로 출판이 1년간 유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2005년 출간한 <친일승려 108인>에서 친일행적을 밝혔던 최범술의 유족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판결은 무죄). # 임혜봉은 이밖에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위원을 맡았고,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등 일제강점기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연구해 저서를 내고 있다.

5.1. 황우석 사건 당시 김수환 추기경 모함

2005년 황우석 사태 당시, 단지 황우석이 불교 신자라는 이유로(...) 개신교 천주교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방해하려 황우석을 모함했다 음모론에 낚인 당시 은해사 주지 법타 스님 등 불교 신자들이 일제 시대 당시 친일을 했던 천주교가 불교신자인 황우석을 모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적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역시 황우석을 옹호했는데, 사실 이때 황우석에게 낚였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므로(...) 황우석을 홍호했다는 것이 큰 흠결까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 김수환 추기경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김 추기경의 친일 논란은 사실무근이라는 쪽으로 판명이 났다. 항목 참조.본래 이 항목에도 반론이 제시되어 있었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항목을 보는 것이 더 자세하다.[34]

당연히 당시 불교계 내부에서도 단순히 불교신자라는 이유로 황우석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이 맞냐는 반대 의견이 나왔었다. 불교평론의 주간이었던 조성택 고려대 교수는 "한국의 불교인들이 그토록 시달려온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불교인들이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경전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네 가지 준칙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는 준칙은 이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라며 불교계 주류 인사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황우석을 지지하는 사태에 대해 지적했고 #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허남결 교수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의 본질은 과학적 진실성과 연구용 난자의 공급을 둘러싼 도덕성 문제이지 결코 개인의 성품이나 말솜씨, 그리고 그가 신심 깊은 불자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불교계 일각의 황우석 지지자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애써 알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 #

그리고 반전이라고 하면 반전인데 황우석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은 안드레아라고... # # 이뭐병.

5.1.1. 달라이 라마의 신사참배 논란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신사참배, 그것도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참배를 행한 적이 있다. 아카이브 개신교의 모함이라며 우기는 분들도 있다.

달라이 라마에 있어서도 흑역사로 간주되는 사건인데, 어쨌거나 전범들이 안치된 곳이니 만큼 평소 평화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외면했다고 보일 소지가 있는 모순적인 행동임은 사실이다. 다만 전 항목에서 '강행'이라고 적은 것은 다소 무리수에 가깝고 달라이 라마 입장에서는 일본 티베트 독립운동 등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에 대한 호의로 참배한 것이고 단순히 "전몰자들이 모셔진 곳"이라는 정보만 접한 상태에서 모르고 참배했거나 이용당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동시에 티베트 독립이라는 정치적 운동의 구심점이기도 한 달라이 라마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은 것이 세계적으로 중국의 서슬 아래서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고 달라이 라마를 초청해 주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다.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위구르인의 대모로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가 있던 위구르 독립 운동가 레비야 카디르 여사도 201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는데, 양자 모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에서 행한 것이었다는 변론도 제시될 수 있는 것. 한국도 전쟁 피해 당사국이니만큼 달라이 라마의 야스쿠니 참배에 문제가 있고 비판받을 점임은 틀림없지만 티베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그의 입장에서 참작의 소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본 항목에서 거론한 로힝야 사태에 대해서도 "석가모니라면 로힝야인을 도왔을 것"이라며 아웅 산 수치를 향해 로힝야인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미얀마 정부를 비판했기 때문에 # #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달라이 라마의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인격적 문제 또는 반불교 논지까지 끌어들이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문제는 일본이 불교를 이용해 제국주의를 정당화한 국가이며, 그러한 국가에서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써 그 국가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불교 관련 행적으로 비판의 소지가 있다.

6. 방생 문화에 대한 비판

일단 불교의 방생 문화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며 소중히 하자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문제는, 생명을 잡아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았다가 다시 풀어주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흉기와 함께 길가던 타인을 납치해 살해 위협을 하다가, 갑자기 풀어주며,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운명이었던 너를 풀어주겠다.며 주장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논리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는 아예 따로 방생 법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경우 아주머니들이 물고기나 거북을 판다. 하지만 붉은귀거북이나 배스 등 외래종을 풀어주기도 해서 생태계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나온 생물을 사다가 풀어주는 건 자비라고 보기 힘들다. 막 풀어줬다가 얼마 못 가 떼죽음 당하기도 하고. # # 때문에 과거 붉은귀거북이 문제가 되어 네이버 기사에 나온 적 있었는데 #, 거기서 한 네티즌이 불교의 방생문화를 비판하자 다른 네티즌들이 너 기독교인이지?라며 기독교를 비난하는 답글을 올린 적 있다. 이 네티즌이 기독교인이라서 불교를 공격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네티즌들의 극성때문에 위의 댓글은 삭제되어야만 했다. 실제 불교 신자들의 방생문화가 피해를 준 실제 사례가 존재하는데 말이다.

6.1. 반론

해당 예시는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다. 생명을 죽이려 했던 당사자와 생명을 살려준 당사자가 동일하다면 했던 말을 번복하면서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에 대해 논리적 오류를 제시할 수 있겠지만 방생의 경우 양자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서로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블루길이나 배스 등의 외래종 어류들을 최초로 풀어준 행위 자체에는 방생 내지 방생이 목적으로 하는 불교적인 목적을 염두에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방생이라는 이름으로 외래종을 풀어주는 바람에 하천 생태계가 교란된 결과가 생겨난 것은 틀림없지만, 외래종의 범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최초 외래종의 방사 행위는 방생이 아닌 사회적인 오락 내지 식생활에서의 수요를 목적으로 행해졌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외래종의 범람에 방생이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은 다소 선후 관계를 살피지 않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35]

그리고 외래종의 방생이 토종 생물들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등 피해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파괴된 생태계 복원에도 방생이라는 행위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공주대학교 생명공학과 유영한 교수에 따르면 생태계에서 중요한 것은 종 다양성이며, 일단 자연에 풀려나 침입종이 된 외래종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외래종으로 인해 생태계가 망가져 외래종이 크게 번성한 지역에서는 오히려 토종 물고기를 복원해 종의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 외래종의 억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황소개구리 때문에 교란된 습지에 가물치, 메기 등 토종 물고기를 복원해 풀어 종 다양성을 높임으로써 황소개구리의 수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36]

방생이라는 행위 자체가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외래종의 유입이 생태계에 크게 영향을 주거나 그러한 생태계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와 현재의 차이에 다소 따라가지 못한다는, 다시 말해 과거의 문화가 시대의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해 뒤처지는 현상에 비판의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7. 현재

반기독교와 비교할 때 반불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다소 적은 편이다. 종교의 교리상 선교의 의무가 기독교처럼 강하지 않아 외부에 민폐로 여겨지는 행위도 비교적 덜하기도 하고, 기독교, 이슬람처럼 특정한 을 숭배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자기 수련에 중점을 두는 철학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듯 하다.

사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넷상에 안티불교 활동이 꽤 있었으며, 특히 한 안티불교 블로그의 상당한 안티활동이 맹위를 떨친 이후로 안티불교 사이트도 몇몇 만들어져 불교의 교리적 비판과 동시에 스님들의 비도덕을 낱낱히 밝혀냈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훼불행위라며 경계심이 꽤 높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성의 목소리도 없이 강경하게 대했다. # #

결국 그 안티불교 블로그가 삭제됨과 동시에 # 반불교 활동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신론자들이 대부분인 당시 안티불교 주동자들에 비하여 나머지 참가자들이 대부분 정상적인 기독교도가 아닌 바로 예수쟁이들인데 안티기독교에 대한 미러링을 위해 반불교를 이용했기 때문이다.[37] 이들은 안티불교까페를 여럿 만들다가 정작 불교비판 자체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기독교 편향적인 행동만 하다 보니 별 호응도 못 받았고 폐쇄만 반복하고 사라졌다.

결국 무신론 운동에서 반불교 성향이 몇몇 보일 정도로 쇠퇴하였다. 불교 측에선 '불교를 배워야 안티를 하고 공부해도 심오한 교리 때문에 안티 못한다'라는 당당한 입장이다. 사실 교리가 다소 직설적이라 알아듣기 좋은 도가 종교, 아브라함계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는 교리 설파에 대해서 현학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일반 신도가 교리에 대한 공부가 쉽지 않고, 거기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쉽지 않다.

즉, 현재 불교에 호의적인 분위기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른 종교에 비해 적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불교가 과학적, 철학적이며 평화적이고 윤리적이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례에서 보듯, 제국주의나 극단적 민족주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협력, 교리의 문제점 등,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낫다고 보기 힘들다는 비판이 많다. 불교가 다른 종교를 낮추면서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것 자체도 문화 상대주의적으로 볼 때도 옳지 않고, 불교가 비판한 타 종교에 대한 단점이나 위험성은 불교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비판이 있을 때, 불교신자들이 합리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재고해 보기보단, 도리어 비판자들을 타 종교의 스파이로 몰거나 타 종교의 과오만 강조하며 비판을 차단하려 한 측면이 없지 않다. 불교외의 다른 종교나, 반종교적인 무신론, 종교로 구분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조차도 비판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만 회피하려는 태도는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건전한 신앙심을 가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8. 기타 불교의 비행

종교적 교리와는 상관이 약하거나 없는 차원에서 신자들의 잘못이나 한계점도 불교에서 존재한다. 상기했듯이 예수천국 불신지옥같은 경우엔 불교에서는 없어서 광범위한 민폐는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38], 앞서 있던 친일불교도 있고 후술할 여러가지 비행들이 계속 속출하고 있는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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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의적으로 저지르지 않는 업은 응보를 받는지는 모르나, 고의적으로 저지른 업은 후세에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2] 여기에서, 분명 불교는 힌두교와 바라문교보다 현실적이다. 열반경에서 현세의 업에 있어 대게 현세에 푼다고 한다. # 하지만 석가가 중아함에 이와 같이 말하면서 고의적인 업이 후세에 이어간다고도 말한다. 이것이 링크된 기사와 달리, 불교가 어느정도 숙명론적 성격이 있다는 의미다. [3] 마우리아 왕조는 당시 세계 최대의 강국을 건설한다고 수많은 피를 흘렸고, 쿠샨 왕조는 실크로드에서 동서양(한나라와 로마 제국)의 여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국민 통합이 필요했다. 이 수요는 배타적인 바라문교로선 불가능하며, 민중친화적이며 타 문화에 융화적인 불교가 가능했다. [4] 음차하자면 단월(檀越, danapati)이다. 사어이기에 시주로 대체. [A] 범어적 해석은 이 링크를 참고 [6] 다만 이건 석가의 고육지책이라는 해석이 있다. 평등을 외치던 석가가 당시 남성 제자들의 양성관의 한계에 부딪쳐 겨우 합의안을 만들어 낸 것. # # [7] 조선왕조실록사전 [A] 범어적 해석은 이 링크를 참고 [9] 여래, 응공, 정변지 등을 말한다. [10] 본 기사는 석가가 비구니를 들면서, 또한 비구니들의 수많은 업적을 들어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사지만, 위에 내용을 보면 구원관이 얼마정도인지 생각해보면 비판의 여지가 있다. [11] 실제로 국가신토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념이라 주장하며 신사참배 강요를 합리화했다. [12] 석가는 바라문교의 고행에 대해,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인데 굳이 고행을 해야 하냐며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다. 석가는 지나친 고행은 오히려 제 몸만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입장이었다. [13] 정확히 말하자면 본지수적에 입각하여 타 종교를 자신의 종교를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원래 종교(宗敎)라는 말 자체가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siddhānta)'이라는 말로 불교를 스스로 높히 부르는 말이었다. [14] '모든 종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들 모두 순수함과 자제심을 갈구한다(아소카 칙령 Nb7 #)' [B]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B]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17] 다케다 신겐이나 무사시보 벤케이처럼. [18] 물론 초기 키리시탄 전체가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성향이 일어난 탓도 있지만, 일본 불교 또한 분쟁과 폭력 사태를 일으키며進者住生極楽 退者無間地獄, 나아가는 자는 극락왕생, 물러나는 자는 무간지옥(...)을 외치면서 만만찮게 성깔이 있었다. [19] 그 중에서도 특히 앞장선 것이 일련정종이었다. [20] 물론 불교가 병영부조리의 전적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인 영향을 끼친 책임을 부정할 순 없다. [21] 작가 본인도 에이헤이지에서 수행하고 고마자와 대학을 나온 미국인 불교 승려였지만 일본 불교사를 공부하는 와중에 이런 더러운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2] 안창호 여운형, 쑨원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불교가 협력했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는 점에서 이 주장 또한 반박가능하다. [23]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으로 불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서양 지식인들은 꽤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리처드 도킨스, 오리아나 팔라치가 그 대표적. 이들이 본 불교는 대게 일본 불교다. [24] 달라이 라마등은 반대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 [25] 이는 태국이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26] 나중에는 일본군의 미얀마인 학살로 반일 국가로 돌아섰다. [27] 실제로 이슬람이 타 종교에 비관용적인가 관용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8] 사실 이러한 분쟁은 단순히 어느 종교가 악해서 행했다고 보기엔 정치적,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29] 물론 아예 참여도 하지 못한 가톨릭이나 유교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겠지만. [30] 민족 대표 33인의 종교별 구성은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이었다. 천도교가 주도한 독립선언에 당시 마침 105인 사건으로 탄압받고 있던 개신교가 적극 참여했고, 가톨릭은 각 단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불참, 대종교는 친일파였던 단군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을 꾸리고 있었다. 유림은 가톨릭처럼 학파별로 참여 여부를 놓고 논쟁하다 뒤늦게 김창숙 등 2인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임이 끝나버린 뒤였다. [31] 이외에도 105인 사건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등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다. [32] 한용운이 주도해 창설했던 단체다. [33] 애초에 만당의 성향 자체가 과격해서 친일 성향의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찍혀있었다. [34] 한국 천주교가 불교와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이러한 갈등은 종교교리를 가지고 일어난 갈등이라기 보다는 특정지역들을 놓고 가톨릭 성지냐 불교 성지냐의 영유권 분쟁에 가깝다. 최소한 한국 천주교나 그 구성원들이 천주교의 이름으로 한국불교와 구성원들을 공격한 적은 없다. [35] 여담으로 그리고 방생이 '생명을 잡아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았다가 다시 풀어주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행위'라고 할 것 같으면 식용 또는 낚시 같은 목적으로 잡아서 풀어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도덕적 결함이 있는 행위라 할 것이다. [36] 막 풀어줘봐야 얼마 못가서 떼죽음을 당하는데 토종 복원이랍시고 풀어준들 방생이 생태계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하는 견해도 단순히 방생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지리산 반달가슴곰 방사 사례를 가지고도 반박할 수 있는데, 종 복원을 위해서 인공적으로 키운 반달가슴곰도 초창기에는 산에 적응하지 못해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죽는 경우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반달가슴곰을 방류함으로써 추구하는 종 복원이라는 목적 자체가 재검토되거나 그러한 목적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부정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으며, 최근에 반달가슴곰이 지리산에서 서식지를 틀고 새끼를 낳은 '정착'의 흔적이 확인되면서 무의미한 지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7] 왜 미러링이냐면, 당시 초기 안티기독교의 주체는 악성 불교도와 환빠였기 때문이다. 이때 무신론은 차용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의 반기독교 운동은 이들이 쇠퇴하고 나서 무신론자들이 주축이라 이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 [38] 상좌부든 대승이든 불교는 자력 구원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39] 사실 이건 윤회설에서 별 이상한 해석은 아니다. 단지 운게른슈테른베르크 자기만 악업을 쌓아 손해며, 죽은 사람이 현세에 진 업을 풀 기회를 앗아가는 악랄한 행위다. 애초에 석가가 살생을 금한 이유는 이런 이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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