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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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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외 고양이사(史)
1.1. 도시의 형성과 인간과의 공존1.2. 중세 및 근대 유럽1.3. 이슬람 문화권과 고양이1.4. 대항해시대 이후의 쉽 캣(Ship Cat)들
2. 한국 고양이사(史)3. 역사 속의 유명인과 고양이

1. 국외 고양이사(史)

1.1. 도시의 형성과 인간과의 공존

파일:external/www.etorrent.co.kr/beb7944ff89e9b1e391e56a8d9afb3f5_5o7MGm6vsag6W3lXnP.jpg 파일:external/upload.inven.co.kr/i4996379040.jpg
2천여년 전 고대 로마 시대 지붕 기와에 새겨진 고양이 발자국. 사진 속 필사본 도서는 15세기경에 저술되었다고 한다. #
고양이, 인류 동반자 되기까지 두 번에 걸친 大이주 있었다
'악마 숭배자의 사악한 친구'가 '인간의 동료'된 사연
고양이 역사 5000년(이동진 파이아키아)

야생의 고양이들의 가축화는 1만 2천~1만 년 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진행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애완 고양이 유적은 2001년 키프로스 섬 남동쪽의 실로우로캄보스에서 발견된 약 9500년 전의 무덤이다. 이 지역 고대 유굴을 발굴하던 장 드니 빈 박사와 프랑스 파리 자연사박물관 팀이 발굴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사람과 함께 한 고양이의 뼈로 인정받는다. 한 살 정도인 어린 고양이이며 머리뼈에 약간 금이 가 있고 부장품들과 같이 묻힌 것으로 보아 확실하진 않으나 순장시켰다고 추정된다. 이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고양이가 인간의 곁에서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아쉽게도 키프로스 섬의 고양이는 인간과 고양이의 동거를 증명해줄 뿐, 고양이의 가축화 동기를 설명해줄 농경문화 모델 가설에 필요한 증거로는 부족했다. 그러다 2014년에 5300년 전 중국 콴후쿤의 신석기 주거지에서 발견된 고양이 뼈를 분석했다. 그 결과 당시부터 이미 고양이들이 집쥐와 곡식, 인간의 음식을 먹고 살았던 것으로 드러났다.[1]

고양이는 를 잡아주는 역할을 맡아 인간과 동거하게 되었다는 것이 대중적인 설명이지만, 진짜로 단지 귀여워서 키우게 되었을 수도 있다. 카자흐스탄 남부 잔켄트 유적지에서 애완 고양이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이 고양이를 키운 오우즈족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쥐잡이가 있을 필요성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이다.[2] 고양이는 체구, 울음소리, 눈망울 등등이 아기와 비슷해서, 인간이 아기를 볼 때 본능적으로 분비되는 옥시토신 분비를 이끌어낸다. 실제로도 고양이를 태어나서 처음 본 태평양 원주민들도 유럽인의 탐험선에 있는 함재묘를 보게 되자 열광하여 만지고 쓰다듬고, 심지어는 훔치려고까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닭이나 토끼 같은 다른 가축들도 처음에는 신기한 애완동물로 교역 대상으로 먼저 쓰였다고 하니 고양이가 귀여워서 가축화되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본격적인 고양이 가축화에 대한 사료는 역시 이집트가 많다. 5700년 전쯤으로 추정된 많은 이집트 무덤에 고양이뼈가 나왔는데, 정성스럽게 매장한 흔적이 많아서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각별한걸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는 농업을 하면서 쥐를 잡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고양이를 기르라고 장려했다. 고양이가 바스트 여신의 화신으로 추앙받기도 했으며, 신의 아들인 파라오를 제외한 누구라도 고양이를 죽이면 사형당했다. 고양이를 기르는 가정은 세금 감면 혜택까지 받았다고 한다. 또한 현재 내려오는 고양이(Cat)의 각종 이름은 바스트가 들고 있던 성물 '우자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3] 오죽하면 이집트와 전쟁을 하던 페르시아가 펠루시움 전투 당시 살아있는 고양이들을 방패에 묶어 진격했다던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로는 고양이 및 각종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동물들을 잔뜩 군대 앞에 풀어 놓고, 바스테트 여신 그림을 방패에 그렸다고.... 당연히 이집트군들은 당황했고 싸움에서 참패했다.[4] 영화 미이라에서 이모텝이 고양이만 보면 기겁하고 달아나는 장면을 괜히 넣은 게 아니다.[5]

고대 이집트에선 고양이들의 국외 반출도 금지되어 있었다. 바스테트 같은 고양이 모습을 한 신도 있었을 정도이며,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미라로 만들며 장례식까지 지내줘서, 이집트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고양이 미라도 있다. 고양이 주인을 속인 사기꾼도 그 때부터 생겼나보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쥐를 잡는 용도로 초기에는 족제비류를 사용했으나, 고양이가 반입되면서 도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족제비류는 체취(體臭)가 심해서[6]라고 한다.[7] 이솝 우화 역시 사실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원래 족제비가 등장하는 이야기였던 것이 고양이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유럽에서는 약 2400여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그리스 동전에 고양이가 새겨진 게 보기드문 고대 그리스 시대 고양이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과학적으로 따른 고양이 가축화의 역사를 분석해보면 모든 고양이의 조상은 아프리카들고양이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가축화가 되었음에도, 비교적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페르시안, 러시안 블루와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고양이의 번식은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고양이가 아직 100% 가축화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가축종 고양이와 야생종 들고양이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고양이는 들고양이에 비해 공포반응은 줄어드는 쪽으로, 학습능력은 발달하는 쪽으로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음이 확인되었다.

번식을 통제하지 않았는데도 유전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일견 모순적인 결론은 다른 가축의 경우와는 다른 고양이만의 특이한 가축화 과정에 의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가축과 달리 고양이는 인간에게 스스로 다가와서 병존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개도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인간과 가까워진 늑대에게서 탄생한 것으로 추정하고는 있으나, 가축화가 된 직후 인간에 의해 여러 용도에 적합하게끔 수많은 교배, 개량이 이루어지며 완전히 인간의 통제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반면 고양이는 그런 게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실제로 인간은 고양이의 번식만 컨트롤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먹이조차도 주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육식동물인 고양이에게 고기를 구해다 줄 만큼 인류의 식량 사정이 풍족했던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완벽히 통제하는 닭이나 소 같은 가축에 비해 고양이는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이는 돼지, , 처럼 식량을 제공하지도, 처럼 노동력을 제공하지도 않고 처럼 전쟁에 동원되거나 교통수단이 될 수도 없다. 당연히 개처럼 사람의 통제와 명령을 받고 철두철미하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가죽도 가치 없고 고기의 맛도 좋지않다. 따라서 고양이는 인류에게 있어 가축화를 시도할 필요가 없는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이 고양이를 적극적으로 가축화하기 위해서 노력했을 가능성은 낮고,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아프리카들고양이들이 스스로 쥐 등을 노리고 인간 거주지 근방으로 오는 것을 인간은 내쫓거나 잡지 않고 그냥 방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과 가까워지며 자연스럽게 가축화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고양이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비슷한 모습을 보였지만, 삼국시대 말~고려 초기 즈음 이미 가축화가 된 고양이가 들어오면서 완전한 야생동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양이가 없었다면 삵이 가축화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한 마디로 인간과 수천 년 넘게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다가 반려동물이 되어버린 셈이다.

1.2. 중세 및 근대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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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실타래로 놀아 주는 수녀 삽화.[8]

고양이는 인간과 공존하게 되었지만, 육축용으로나 노동력의 제공 어느 면에서도 쓸모를 느끼지 못한 지역에서는 고양이를 불길한 동물이라 하여 때려잡거나 먹었다. 중세 및 근대 유럽에서는 마녀 패밀리어라는 인식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본래 마녀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에서 동네 점쟁이 내지는 무당의 개념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점쟁이들이 자주 키우는 애완동물이 고양이였는데, 중세 말기부터 근대 시기에 이런 마녀들에 대한 사회적 숙청 작업( 마녀사냥)이 시작되면서 고양이까지 쌍으로 이 일에 엮여든 것이다. 때문에 고양이들을 죽이거나 마녀재판에 고양이들을 같이 산채로 불태워 죽이는 일도 꽤 있었다. 여기에서 아홉 개의 목숨이 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나인 라이브즈라는 별명이 붙는 원인이 되었다.[9]

1233년 6월 13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Vox in Rama'라는 칙령에서 검은 고양이는 사탄의 분신이라고 하여 고양이 지옥 시대가 열렸다. 이것이 기독교가 고양이를 학대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모든 고양이는 아니고 검은 고양이만이다. 원래 교회 가르침대로라면 검은 고양이만 죽여야 하는데, 죽이는 김에 다른색 고양이까지 죽이는 일도 당연히 많았다. 다만 아래 나오듯 교회가 다른색 고양이는 귀여워하던 일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10] 그래서 유럽에서는 1200년대에서 1300년대까지 검은 고양이는 물론이고, 다른색 고양이도 학살당하는 등 고양이 학살이 가장 심했고 그게 흑사병의 원인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또한 이런 인식 때문에 고양이가 흑사병을 옮긴다는 오해가 만들어지면서 인식이 더 안좋아지는 악순환까지 일어났다. 그러다 14세기부터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유럽 전체가 흑사병으로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 정신없던 통에 차츰차츰 흐지부지 되었다. 이 고양이 학살에 대해서 흔히 '쥐가 흑사병의 매개인데 고양이를 잡는 바람에 쥐가 창궐해서 흑사병이 더 창궐했다'는 말이 상식처럼 퍼져있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이 상식도 살짝 틀린 것인데, 흑사병에 감염된 고양이가 사람을 물거나 하면 흑사병을 옮길 수 있으며 흑사병의 중간숙주인 쥐벼룩 또한 고양이에게 기생이 가능하다.[11] 다만 중세는 도시 안에도 마구간과 축사를 짓던 시절이며 털짐승 전체가 같은 기전으로 흑사병의 매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딱히 고양이나 쥐만 흑사병의 주범이라고는 할 수 없다. 때문에 고양이는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애꿎이 희생된 것은 맞다.

1648년 단 10살이던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30년 전쟁 종전 기념으로 고양이 화형식을 열어 직접 고양이를 불구덩이로 내던져 태워죽이고 잔치를 열었는데 밑에 서술하듯이 루이 14세를 이어 제위한 루이 15세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던 걸 생각하면 참 기묘하다. 그밖에 1665년 런던의 흑사병 발병이 고양이 탓이라고 하여 고양이 20만 마리 이상을 태워죽인 적이 있다. 이 흑사병 창궐로 당시 런던에 유학 중이던 아이작 뉴턴이 런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바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서는 새끼 고양이들을 자루에 담아 돌을 넣고 강에 던져 버리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구미(歐美) 쪽에도 고양이를 불길하게 여기는 관념은 존재했던 듯하다. 검은 고양이라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참고하자.[12] 시대가 앞서긴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읽어봐도 애완묘 두 마리를 제외한 고양이들을 죄다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야생으로 쫓아내고, 애완묘들이 낳는 새끼는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 밖에도 '고양이 오르간'이라고 해서 고양이 괴롭히기 악기까지 있었다. 오르간 안에 살아있는 고양이를 묶어두고, 오르간을 연주할 때마다 고양이 몸이나 수염, 꼬리가 당겨졌다. 당연히 고양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고, 이 고통소리가 악기소리였다고 한다. 또한 중세 유럽인들은 고양이 목숨 내기라는 내기까지 했는데, 고양이 꼬리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물에 집어넣고 얼마나 견딜 수 있나 하는 내기를 즐겨했다. 아주 드물게 사람을 구했다든지 해서 대우받던 일부 고양이[13]도 있지만, 당시 고양이는 이렇게 실컷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고양이 박해 및 학살은 18세기에서도 수가 엄청 줄었어도 종종 벌어졌다.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일부 시골 지역에 마녀재판이 벌어졌는데 사람 대신 고양이를 태워 죽여 액땜을 했다. 물론 이게 알려지자 엄청나게 비난받았고, 에드워드 기번이나 볼테르가 해당 사건들을 격렬하게 성토하며 법적 금지 및 처벌을 주장하던 것도 유명하다. 그리고 마녀재판도 아님에도 고양이를 죽이는 액땜도 많았는데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서는 5월이면 고양이를 높은 성탑에서 내던져 죽이면 악귀가 물러난다고 하여 많은 고양이가 이렇게 끔살당했다. 놀랍게도 이런 고양이 끔살은 1970년까지 이어졌다가 당시에 동물학대 및 미신에 미쳤다는 비난 속에 고양이를 던지는 게 금지되고 대신 고양이 인형으로 대신하여 지금도 고양이 인형을 내던지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유럽 사회에서도, 고양이는 여전히 나름 메이저한 애완동물이기도 했다. 진짜로 다 때려잡았으면, 박해할 고양이가 애초에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 곡식을 저장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쥐를 잡기 위하여 고양이를 키웠다. 또한 황당할지도 모르지만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은 오히려 교회였다. 특히 수도원에서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키웠다는 기록이 무척 많이 남아 있다. 수도원은 자체적으로 농사를 짓고 서적 필사 또한 수도원의 주요 과업이었는데, 양피지를 쥐가 쏠아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에 고양이와 친할 수밖에 없었다. 1400년대 잉글랜드 엑세터 대성당에서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주급 1페니(물론, 1페니 어치의 먹이로 추정된다)로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수녀원에서는 대접이 아주 좋아서 많은 수녀들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웠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다른 동물은 다 안되지만 고양이만은 애완동물로 허용한다는 규칙도 남아 있을 정도였다. ## 그러한 이유로 수녀인 성녀들 중에서 고양이와 함께한 모습의 성화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노리치의 율리안나와 니벨레스의 제르투르다와 같은 인물이 있다.

그 밖에도 웨일스의 국왕 허우엘 다(Hywel Dda)가 고양이를 죽이는 걸 금지했다던지, 고양이가 쥐로부터 성을 지키는 유머러스한 삽화(14세기)가 남아있다던지 해서 의외로 중세 유럽에서도 무조건 박해받지 않고 애완동물로서 대접받고 살았던 녀석들도 꽤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16세기까지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선 여신 디아나의 분신으로 고양이를 우대하기도 했다.

훗날 에스파냐 국왕에 오르는 펠리페 2세는 아버지인 카를 5세에게 성경 어디에 고양이가 악마라고 나오지도 않는데[14], 고양이를 태워 죽이는 게 무슨 기독교 신앙이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럽에서도 고양이로 팔자 펴는 동화가 존재한다. 장화신은 고양이 이야기 이외에도 보통 '위팅턴과 고양이'라고 알려진 이야기로, 가난한 청년 딕 위팅턴이 런던으로 상경하여 한 부잣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는데 숙소에 쥐가 무척 많아 길거리에서 새끼고양이를 사다가 길렀다. 부잣집 주인인 피츠워렌은 무역상으로 상거래를 위해 떠나는 길에 딕의 고양이를 함께 가져갔다. 이후 어느 나라에 도착하여 왕을 배알하였는데 그 나라에는 고양이라는 동물이 없었다. 성대한 잔치자리에 쥐가 판을 치자 피츠워렌은 쉽캣이었던 딕의 고양이를 데려와 쥐를 잡게 하고, 왕은 고양이를 자신에게 팔라고 한다.[15] 왕은 고양이 값으로 왕가 재산의 반을 피츠워렌에게 건네주었다. 혜자 피츠워렌은 런던으로 돌아와 고양이를 판 돈을 딕에게 건네주고, 딕은 이후 거상이 되어 돈을 많이 벌었으며 피츠워렌의 딸 앨리스와 결혼하고 런던 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다만 이 동화는 이슬람권 고양이 동화를 베껴 만든 것으로 1350년대 영국의 실존 인물이자 거상이었던 리처드 위팅턴의 생애와 고양이로 부자가 된 페르시아 고아의 이야기를 동화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후 근대에 접어들면서 고양이는 다시 사람들 곁에서 친근하게 번식했다. 15~17세기의 소위 대항해시대 및 그 이후 근대까지도 배에 타는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태웠다.[16] 심지어 남극 탐험선에도 타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고양이의 대우가 마냥 좋아졌던 것만은 아니기도 했다. 가령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서는 18세기, 1730년대에 프랑스 생-세브랑 가의 인쇄소에서 인쇄공들이 벌인 무자비한 고양이 대학살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읽다보면 유럽에서 고양이의 사회적 대우가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사실 이는 딱히 유럽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고 고양이에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동물도 생명이므로 사사로이 죽여서는 안된다는 개념이 형성되지 못했던, 전근대시기의 흔한 야만성 중 하나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장 도도새의 멸종 이유 중 하나가, 유럽인들이 단지 '재미로'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의 경우도 서구의 현대적 애완동물 개념이 보급되기 전에는 개나 고양이를 때려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7]

1.3. 이슬람 문화권과 고양이

이슬람 문화권에선 다른 문화권에 비하여 고양이들이 꽤 대우받았다. 이슬람교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는 어찌나 고양이를 귀여워했는지 이런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가 기도하는데, 귀여워하던 고양이 '무에자'가 와서 장난치다가, 어느새 무함마드 옷자락 뒤에 누워 잠을 자버렸다. 기도를 드리느라 미처 몰랐다가 이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무함마드는 칼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옷자락을 잘라버리고 무에자를 그대로 자게 놔두었단다.[18]

하지만 무에자와의 일화는 이슬람 학자들에 의하면 아랍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고양이들을 좋아했으며 고양이의 대접이 이슬람에서 상당히 좋은 것은 사실이다.[19]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우두[20]를 하기 위해 그릇에 물을 받아놓자 고양이가 와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고, 무함마드는 그릇을 기울여 고양이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양이가 떠난 후 그 물로 세정하기 시작하자, 이를 본 동료들은 "왜 짐승이 입을 대서 더러워진 물로 세정을 하려 하십니까?" 라고 묻자 무함마드는 "고양이는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라고 하였다.

게다가 예배 중 고양이가 주변에 어슬렁거리거나 예배하는 사람 앞을 지나가도 예배는 무효가 되지 않으며,[21] 고양이는 청결한 존재로 간주되어 고양이와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고양이가 먹던 음식을 사람이 먹는 것도(…) 허용된다. 심지어 예배를 보는 모스크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와도 막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라 모로코나 튀니지나 튀르키예에 예배를 보는 모스크에 고양이가 마음껏 들어와도 막지 않는다. 한 여행자는 튀니지에 가서 관광객이 들어오는 게 허용된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 편하게 자는 고양이 여러 마리를 보았는데 예배 보던 무슬림은 누구 하나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사례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예배 보는 무슬림이나 이맘에게 가서 놀아달라고 툭툭 쳐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2023년 현재에도 알제리에서 라마단 예배를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고양이가 난입해서 방해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냥 괜찮다고 놔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

한 국내 튀르키예 관련 책자에서도 앞 표지에 거리에서 카페트를 깔고 예배를 보는 무슬림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진이 있었다. 이것만 보면 고양이 신에게 예배드리는 모습이라는 제목이 어울릴 정도다. 누구 하나 거부감 없이 그냥 예배를 했는데 책 내용에서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튀르키예라고 이 이야기를 했다. 만일 예배하는데 사람이 지나가면 버럭거리며 나오라고 할 것이고, 개나 다른 동물이라면 마찬가지로 욕하며 내쫓을테지만 오로지 고양이만은 예외라고 한다. #

개는 불청결한 존재로 간주되어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이 금지되고, 예배당에 들어오거나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으며[22], 특히 검은 개를 보면 피해서 도망가거나 겁을 주어 내쫓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좋은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슬람권 국가의 공항에서는 마약탐지견도 더럽다 하여 사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여서, 이슬람권에 마약이 퍼지는 것을 막기 힘들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가장 공신력 있는 하디스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슬람의 대학자 아부 후라이라(Abu Hurairah, أبو هريرة)도 고양이를 아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니, 애초부터 이름인 아부 후라이라(아기고양이들의 아버지)를 보면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예배당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그들과 어울려 놀며 시간을 보냈다. 이를 본 무함마드와 동료들은 아부 후라이라에게 '고양이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는데, 이게 이름으로 완전히 굳어져서, 후에는 아부 후라이라의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후세의 학자들도 이에 관해 논쟁을 벌였으나 결론은 나지 않고, 아부 후라이라의 진명에 대한 설은 30개에 육박한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주장은 그의 이름이 압드 알라흐만 빈 사흐르 알아즈디(Abd al-Rahman bin Sakhr Al-Azdi)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예언자가 귀여워 한 고양이를 일종의 신앙심 차원에서 연결하여 애지중지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물론 신학자들은 절대로 예언자가 고양이를 우상화한 것이 아니기에, 이는 신앙심과 별개라고 주장하며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도 우상화를 경계하였을 뿐, 고양이들을 박대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시절, 고양이 보호소나 고양이 수의사들도 양성했으며 우대했다.[23] 당시 유럽에서 흑사병이 퍼져가고 있을 때, 중세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고양이를 이슬람에 연루하며 박대했다는 주장까지 있다. 아예 바이바르스는 1270년 세계 최초로 고양이 보호소를 만들어서 애지중지했다.이 보호소는 고양이라면 늙어도, 장애가 있어도 털빛깔을 가리지도 않았다.

현대에도 이집트인들은 고양이에 대해 아주 호의적인데, 이는 고대 이집트의 영향도 무시 못할 것이다.[24] 이집트의 길고양이 보호단체에서도 대놓고 고대 이집트 시절에는 고양이가 대접받았는데 오늘날 길고양이들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사실을 앞세울 정도다. #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고양이는 대접받으니 이래저래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듯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카이로에서 수백마리의 고양이를 독살해 문제가 된 적도 있다. # 그래도 전반적으로 이집트 사람들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좋은 편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이집트에서 몇 해 동안 거주한 이가 겪은 일인데[25] 밤중에 음식물이 담긴 쓰레기를 찢는 고양이[26]를 보고 빗자루로 내쫓다가, 이웃들이 고양이도 먹고 살기 위해 그럴 수도 있는거지 왜 그러느냐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야길 하자, 고대 시절부터 고양이를 신성시하던 인식이 전해져서 고양이를 박대하지 않는 이집트 사람들이 많으니, 함부로 그들 앞에서 고양이를 때리는 짓 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들의 사람들은 고양이를 무척 아끼며, 이들의 길거리에선 고양이들이 많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전 세계 여러 유명 대학들을 찾아가 거기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책을 보면[27]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 학생들에게 '고양이가 발정 나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걸 어찌 생각해?' 하자, '그냥 귀를 막고 알아서 피하면 되지. 그럼 고양이를 구타하는 추악한 짓을 저지르겠다는 거야?' 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에선 검은 고양이가 밤에 지나가는 사람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던 걸 보면, 그들도 검은 고양이는 안 좋게 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기록에서 황실 전용 고양이들을 위한 보호소에도 검은 고양이들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갔다고 하는 걸 보면, 그 검은 고양이는 '잘 모르는' 검은 고양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슬람권에서 고양이가 대우받는 것은 이슬람의 종교관과 연관되어 있다. 개는 먹이를 주는 인간을 신처럼 보기 때문에 불경하지만, 고양이는 인간이 신이 아니라 신의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건 우상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권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양이가 인간과 절대적인 친밀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대접받는 것이다.

다만 이슬람 문화권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고양이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고 두바이에선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면 벌금이 부과된다. #

1.4. 대항해시대 이후의 쉽 캣(Ship Cat)들

자세한 내용은 함재묘 문서로.

2. 한국 고양이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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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황묘농접도, 간송미술관 소장. 18세기 후반 추정. 고양이 전문 화가로 유명했던 변상벽의 국정추묘. 간송미술관 소장.

서아시아에서 길들여진 고양이는 이후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우리나라에 고양이가 처음 들어온 때는 4세기 후반으로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되면서 배 등에서 대량의 불경을 싣고 왔고 쥐가 경전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고양이들을 함께 들여왔다고 한다.

대구 광역시에서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5~6세기경의 가야 집모양토기중에는 집 안에 있던 두마리의 쥐가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표현된 유물도 존재하는데, 이는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런 풍경을 소재로 할만큼 고양이가 당시에도 가까웠던 동물이라는 설도 있다.

고양이가 들어오기 전에는 삵을 가축으로 키웠다. 선사시대 김해 수가리 패총과 안면도 고남리 패총에서 고양잇과 유골 일부가 발견되었다. 아마도 야생에서 잡은 을 식용하고 남은 흔적으로 보인다. 유라시아 동남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이러한 야생 삵(Prionailurus)은 중국 북부에서 농경의 발달과 함께 길들여졌고, 따라서 이들은 서아시아에서 기원한 현생 고양이(Felis)와는 서로 별개의 집안이다. 대구에서 출토된 집모양 토기(기원후 5~6세기)에도 쥐와 살쾡이가 묘사되어 있다. 또한 경주 인왕동의 우물 유적(기원후 8~9세기)에서는 제물로 바쳐진 짐승 가운데 5마리의 살쾡이가 확인되기도 했다. 한국 고양이의 역사 ① 살쾡이에서 고양이로

그러나 살쾡이는 점차 고양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야생에 남아 있던 친척들에게로 흡수되었다. 기원전 45년 한나라 황족 유건(劉建)의 무덤에 부장된 고양이는 그 전조가 되는 물증이다.

국내에서 고양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은 동문선에 실린 김부식(1075~1151)의 아계부(啞鷄賦)이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닭이 울지 않자 이를 꾸짖는 내용의 시인데, 여기에는 삵(貍)과 고양이(猫)가 구분되어 등장하고 있으며, 고양이는 개와 대구를 이루고 있어서 이제는 삵과 분리된 품종의 고양이가 개와 나란히 열거될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육묘(育猫)기는 해도 애묘(愛猫)라고 하기는 어렵다. 쥐를 잡는 고양이의 기능을 보았지, 고양이에 대해 어떠한 미적 가치를 근거로 애호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는다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도 득흑묘아(得黑猫兒)와 책묘(責猫)라는 고양이에 관한 시를 썼다. 득흑묘아는 검은 고양이를 데려와 키우며 고양이가 쥐를 잘 잡아주길 바라는 감상을 담은 것이고, 책묘는 고양이가 잡으라는 쥐는 안잡고 곳간의 고기나 빼먹는 것을 보고 고양이를 꾸짖는 내용이다.

그러다 여말선초에 이르러 본격적인 애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필두는 목은 이색(1328~1396)이었다. 목은집을 보면 4편의 시에 고양이가 등장한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다(貓生子)', '고양이와 개의 싸움(猫狗鬪)', '추위가 두려워서(畏寒)'와 즉흥시 1수가 그것으로, 이들에는 고양이에 대한 친근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17년에 세자(훗날의 양녕대군)가 신효창의 집에 사람을 보내 금빛 고양이를 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효창은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에게 이를 알렸고, 서연관이 이에 대해 간언하자 세자는 "사람들이 늘 말하길, 금빛 고양이는 숫놈이 적다기에 보고 돌려보내려 했다"고 변명했다. 이는 앞에서 본 권근의 시와 함께 당시 고양이 분양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세자가 언급한 속설은 사실이 아닌데, 실제 유전적인 문제로 수컷이 희소한 것은 검은색, 갈색, 흰색이 섞인 삼색고양이다. 금빛(치즈) 고양이는 오히려 암컷이 드물다고. 아마도 속설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같은 속설이 생겨나고 전파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당시에 고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고양이에 대한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고양이 사육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자료가 또 하나 있다. 이순지(1406~1465)가 지은 선택요략은 여러 행사에서 날짜와 방위에 대한 길흉을 모은 책인데, 이 가운데 가축의 일종으로 고양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양이의 거세를 가리키는 정묘(淨猫)라는 단어는 당시 고양이의 중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고양이는 가축이 아니라 가죽으로도 종종 사서에 등장하고는 한다. 이후 1295년에 고려가 원나라에 바친 조공품 중에도 "들고양이 가죽(野猫皮) 83장과 누런 고양이 가죽(黃猫皮) 200장"이 등장한다. 여기서 들고양이는 삵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누런 고양이에 대해서는 치즈태비 고양이를 가리킨다는 견해와 족제비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갈린다. 다만 전자라고 하면 당시 고양이 가죽은 얼마간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던 셈이다.그러나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양이 가죽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 삵 가죽은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품이 되었는데, 성종실록에 따르면 1493년에 누군가 삵 가죽을 고양이 가죽으로 대신 바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죽에 꼬리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뒤섞인 다음이어서 범인을 잡을 수 없었지만, 중간의 여러 관리들이 검수 소홀로 의금부에 끌려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계유정난 전후 세조를 보필한 서거정(1420~1488)은 고양이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서, 사가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무려 14편에 고양이가 나온다. 그의 시 속에서 고양이는 주로 "꽃그림자 농밀한데 고양이는 졸고 있는" 한가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거정의 시 중에는 고양이 그림에 관한 시가 여럿 있어서, 이 시기부터 고양이 그림이 널리 그려지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서거정은 단순히 쥐를 잡는 용도로 고양이를 키우는데 그치지 않고 오원자(烏圓子)[28] 라는 고양이를 키웠다. 확실한 반려동물로 키운 것인지 잠도 같이 자고 했다고 한다.

성종 시기 서거정이 파직당하고 집에서 쉬는 동안, 오원자가 얼쩡거리기에 새장 속 병아리를 노리는 줄 알고 지팡이를 들어 화를 내려는 찰나 두 동물이 지나갔는데, 큰 동물은 오원자였고 작은 동물은 쥐였다. 이후 오원자는 벌써 쥐를 잡아 죽인 다음 자신은 태연히 자기 거처에 가 있었던 것. 이를 본 서거정은 자신의 의심으로 고양이를 해하려 했던 것을 반성하며 오원자부(烏圓子賦)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를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거정은 성종의 부름을 받아 복직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이암(1499~?)이 그린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2폭이 지금도 남아 전해지는데, 조선 후기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한국적인 정취가 이색적이다. 고양이는 모두 등과 꼬리는 검고 배와 발은 흰색인 전형적인 턱시도 털빛[29]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전설은 아마도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 설화일 것이다. 강릉 오대산 상원사에 거동하여 법당에 들어가려는 세조의 옷자락을 고양이들이 물고 잡아당기자,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 안을 수색하여 자객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이에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를 위한 밭을 내렸고, 지금도 상원사에는 두 마리의 고양이 석상이 남아 있다.다만 이 설화의 진실 여부는 회의적이다. 설화상으로 이 사건은 세조가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듬해인데,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는 1462년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1466년이 되어서 상원사를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또한 고양이 석상도 본래 사자상인데 후대에 오인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다만 이러한 설화가 생겨난 사실 자체가 고양이를 영물로 바라보던 당대인들의 시선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고을 이름이 고양이인 경우도 있었다. 지금의 고흥군은 고려시대에 고이부곡(高伊部曲)이었는데, 이때 고이는 고양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30] 그러니까 고이부곡은 '고양이 부곡(猫部曲)'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곳 사람인 류청신(?~1329)이 몽골어를 배워서 권세를 얻자 고이부곡은 1285년에 고흥현으로 승격되었고,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남해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말선초 내내 왜구를 피해 치소를 이전했다가, 대마도 정벌로 왜구가 잠잠해진 1441년에 오늘날의 위치로 돌아오면서 흥양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914년에 다시 고흥군으로 이름을 되돌려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 후기 당시 사람들은 시간에 따라 고양이의 동공이 달라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는 수축되고, 어두운 곳에서는 확장되는 특성 때문에 날이 맑으면 오전에는 점점 가늘어지고(세로동공) 오후에는 점점 둥글어지는데, 이것을 보고 시간을 알아내는 일종의 해시계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양이를 관찰하기 어려운 밤중에는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잦았다. 성호 이익은 오전 0시 전후인 자시(子時)에는 고양이의 동공이 다시 좁아진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자오(子午)를 남북으로 세로선에 대응시키는 전통적인 방위관념 때문이었다. 좀 틀리긴 했어도, 하나의 질서 있는 세계관을 고양이에게 투영하여 바라보았던 것이다.

산짐승처럼 밤에 눈이 빛나는 것과 처럼 세로로 째진 눈 때문에 요물이라고 기피하기도 했다. 구한말 미공사 알렌에 의하면 미 공사관을 찾아온 양반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았는데, 공사관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그 양반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앉자, 점잖던 양반이 놀라서 그대로 혼절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성호 이익이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정전기를 관찰하고, 이것에 대해 기록한 사실이다. 고양이 털가죽 안에 불티가 있다고 생각한 이익은 차가운 서극(해 지는 서쪽을 추운 곳으로 생각한 듯)에서 온 고양이가 어떻게 열기를 품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세상에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글을 맺었다. 이것도 역시 고양이에게서 세상의 이치를 찾고자 한 작은 시도였다.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의 문화적 저변이 확대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고양이를 사유하는 방식도 달라졌는데, 이전까지는 고양이가 애완동물인 동시에 쥐를 잡는 가축이라는 가치를 같이 지니고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쥐를 잡지 않더라도 애완동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영조 시절 양반가에 묘마마(猫媽媽)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양이를 많이 기르며 비단을 입히고 음식을 먹이며 곁을 떠나지 않으니, 사람들이 묘마마라 불렀는데 묘마마가 죽자 고양이 수백 마리가 집을 둘러싸고 며칠을 슬피 우니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고.( 오주연문장전산고)

숙종이 대표적인 애묘가로 유명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부분에서는 숙종이 기르던 고양이 이름 금손(金孫)과 숙종이 총애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11월 9일자 상소에는 "선왕께서 고양이를 대하고 우 임금이 어질어 죄인을 보고 울었던 일을 본받아 금손(金孫)이라 이름을 내리셨으니, 덕이 금수에 미치도록 힘쓴 것"이라는 글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양이 생가죽을 팔 아픈 데 붙이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떠돌았는데, 그냥 떠도는 풍문 수준이 아니라 어의가 영조에게 건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는 "이 방법이 퍼진다면 조선에서 고양이의 씨가 마를 것이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궁궐에서 고양이가 많이 노는 것을 봐 와서인지 그런 건 못할 짓이다."라고 거절했다. 《영조실록》 영조 13년(1737년) 5월 24일 기록. 그 뒤로도 어의와 대신들이 무려 16번이나 진언했지만, 영조는 끝까지 고양이 가죽을 쓰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들을 두고 유교 사회였던 조선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이 고양이를 외국인보다 더 무서워했다는 둥, 고양이에 대한 대우가 더 안 좋다는 등의 이야기가 몇몇 애묘가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는 사실 조선시대나 유교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 반영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이 항목에서 위에 중세 유럽에서 고양이를 흉물로 여긴 적이 있다는 기록을 보자. 고양이 문서에도 나온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고양이에 대해 미지의 두려움을 가진 것이나 꺼림직하게 인식한 것은 딱히 조선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의 전근대사회에서 많이 발견된다. 유교의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에서도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권농을 위함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며, 예기 교특생 편에서는 음력 12월에 고양이와 호랑이에게 올리는 제사가 천자가 지내는 여덟 가지 제사 가운데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거기에 상술된 목은 이색은 고려 말엽을 대표하는 대유학자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호랑이가 멧돼지를 잡아먹기 때문에[31] 농사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것.다산 정약용은 지역 수령들의 창고 관리 방법 중에 고양이를 기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요즘이야 공중 위생이 발달하여 쥐로 인한 피해는 웃어넘길 수준[32]이지만 당시만 해도 쥐로 인한 피해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귀중한 곡식을 쏠아버리는 것은 기본이고 질병까지 옮기고 다니니..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고양이보다는 오히려 구렁이를 쥐를 잡아주는 동물로 여겨 업신으로 숭상했다.

조선의 기록에는 위 이야기처럼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도 많았지만 유례 없는 기록덕후 국가인 조선인만큼 오히려 고양이에 대한 긍정적인 설화나 기록, 전설도 많다. 밑에 열거된 세조와 숙종과 관련된 일화도 그렇고 조선시대 예술품 중에 고양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자. 당장 숙종 시기 도화서 소속 화원이었던 화재 변상벽의 별명이 변묘(卞猫), 즉 고양이 변씨였다! 즉 조선시대 고양이의 대접은 사람 취향마다 달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오늘날과 별 차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동양화에서 고양이가 그려지면 그것은 '70 노인'이라는 뜻의 상징으로 쓰인다고도 한다. 고양이를 뜻하는 한자 '묘(猫)'의 발음이 70 노인을 뜻하는 한자 '모(耄)'와 비슷해서라고. 예를 들어 고양이와 나비가 있는 그림은 '70 노인이 80 되도록 사십시오'[33], 고양이와 참새가 있는 그림은 '부모는 70 노인이 되도록, 아들들은 높은 벼슬을 하도록'[34]이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신화와 전설에서도 고양이에 대한 표현은 극과 극이다. 세조를 자객으로부터 구한 고양이, 숙종의 뒤를 따라 굶어죽은 고양이, 그외에도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을 잃어버린 주인 부부에게 구슬을 되찾아준 고양이도 있는 반면에, 반대로 주인의 살림살이를 자꾸 망가뜨리자 화가 난 주인이 고양이를 내쫓거나 혹은 죽였더니 주인 부부 아들에게 해코지하고 심지어 거대한 불고양이가 되어서 돌아와 주인 가족을 해코지하다가 주인이 기르던 개에게 퇴치된 이야기와 집앞에 있는 나무로 인해 화가 난 농사꾼이 나무를 베었더니 나무 속에 오래전 쫓아낸 고양이 시체가 썩지 않고 있었다는 등 평가가 극단으로 나눠어져있다. 마지막 얘기는 에드거 앨런 포의 ' 검은 고양이'스럽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묘사되는 모습을 보면,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고양이가 똑똑한 영물이라고 생각하긴 했던 듯하다.

3. 역사 속의 유명인과 고양이

고양이에 대하여 인식이 크게 달라진 데에는 예술가들이 한몫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 찰스 디킨스같은 유명 작가들은 고양이를 애지중지했으며, 디킨스가 아끼던 고양이 미티는 디킨스가 밤늦게 촛불을 켜고 글 쓰면 와서 촛불을 훅 불어서 끄기까지 했다고 한다. 디킨스가 촛불을 다시 켜면 야옹 화내면서 또 꺼버렸고, 어둠 속에서 글을 쓰자 또 야옹거리면서 화냈기에, 마지못해 잠자리에 들면 비로소 얌전하게 곁에서 잠이 들었다.[35] 그래서 디킨스는 글로 '이 고양이 때문에 내가 잠자야겠다, 녀석이 내가 잠 안자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내 어찌 녀석의 기분을 거스를 수 있겠나'라는 글까지 썼었다. 디킨스가 남긴 말 "고양이에게 사랑받는 일처럼 즐거운 일은 없다"는 걸 봐도 그가 얼마나 고양이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저 고양이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쯤 디킨스의 걸작을 몇 편 더 읽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수면 부족으로 건강 해칠 것을 막아준 것일 수도 있다

프랑스 성직자이자 정치인인 리슐리외 추기경도 고양이를 무척 귀여워했다. 덕분에 그는 개인 취향을 공적인 정치에 반영하여 고양이 학살이나 박대를 상당수 금지하였다. 14마리나 되는 고양이를 키웠으며, 지금도 진품은 사람 먹기에도 비싸고 당시에는 더더욱 비쌌던 푸아그라까지 먹게 해줄 정도로 엄청나게 귀여워했다. 유언으로도 고양이들을 맡을 집과 돈, 돌볼 사람까지 다 준비하게 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도 고양이를 아껴서 대신들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덕분에 당시까지도 고양이를 꺼림칙하게 여기던 인식이 크게 타격을 받게 되는데, 국왕이 주는 고양이를 외면할 수도 없거니와, 성직자들도 더 이상 고양이가 악마라는 소릴 삼가게 된다. 그리고 고양이를 선물로 받은 대신은 그걸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위에 서술한 대로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 고양이를 사람 대신 태워 죽이는 마녀재판이 있자 이걸 전해듣은 루이 15세가 격분하여 해당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이라고 명령했다가 신하들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죽이는 건 참았지만 관련자 일부를 10년~15년 징역형을 내리게 했다. 볼테르는 이걸 무척 찬양했는데 고양이를 불살라 죽이면 10년 이상 징역형이라는 엄벌이 기다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양이를 불살라 죽이는 일은 차츰 줄어들게 된다.

루즈벨트나 윈스턴 처칠이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으며, 몽고메리 같은 장군도 고양이를 아꼈다. 특히 처칠은 죽기 전까지, 나이 아흔이 되어가는 늘그막 사진을 보아도 고양이를 안고 다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애묘인인데, 그의 교황 취임 당시, LA의 추기경은 "그분이 고양이를 좋아한다(love)는 소문은 틀렸습니다. 그분은 고양이를 흠모(adore)합니다."라고 증언했다. 그야말로 Cat-holic.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고양이는 신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다'라거나 '고양잇과 동물들 중 가장 작은 그것이야말로 걸작이다'라거나 '가장 작은 고양이조차도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고양이만을 좋아한 게 아니라 모든 동물을 다 사랑했다.

T. S. 엘리엇은 《노련한 고양이에 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이라는 시집을 썼다. 시집 전체가 고양이 이야기. 고양이 이름 짓기 같은 시를 보면 고양이에 대한 애정빠심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저 유명한 뮤지컬 캣츠의 원작이기도 하다.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도 유명한 애묘인. 평소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2가지 방법은 음악과 고양이'라고 말했을 정도.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도 고양이를 좋아해서, 어째서 고양이가 보다 우월한지에 대해 수필도 썼다. 크툴루 신화와 그의 다른 작품들의 고양이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으며,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끔살당한다.[36] 그가 어렸을 때 기르던 고양이인 Nigger Man은 단편 벽 속의 쥐에서 주인공의 애완 고양이로 등장한다. Nigger Man은 1904년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필립 말로시리즈의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 또한 '타키'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20년 가까이 키웠다고 한다.

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도 대단한 애묘가이다. 생전에도 많은 고양이를 길렀고 그 중 길고양이도 상당히 많았다. 자신의 솔로 앨범인 Mr. Bad Guy에는 "이 앨범을 우주의 모든 애묘인들에게 바칩니다"라고 쓰기까지 했다.[37] 그리고 그의 생전 마지막 퀸의 정규엘범인 Innuendo에 자신의 고양이를 위해 쓴 노래인 Delilah를 남기기도 했으며 심지어 죽었을 때 재산을 그의 전 연인과 가족들, 그리고 고양이들한테 준다고 말할 정도였다. 록스피릿 집사

이 외에도 고양이가 주인보다 더 유명한 경우도 있다. 바로 F.D.C. 월러드란 고양이. Jack H. Hetherington란 물리학자는 논문을 쓴 뒤, 글을 검토하다가 'I'를 'We'로 쓴 것을 발견했다. 이를 고치기 싫어서[38] 고민한 끝에, 공동 저자 이름에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이름을 붙여서 논문을 내버린 것. 이 덕분에 월러드는 과학 논문을 쓴 고양이가 되었다. 참고로 월러드는 주인이 붙여준 예명이자 이 고양이의 어미의 이름이었으며, 실제 이름은 체스터(Chester)였다. 이름의 F.D.C. 도 '집고양이 체스터'란 뜻의 Felis Domesticus Chester에서 따온 이름. 논문에 들어가는 서명은 고양이 앞발에 잉크를 묻힌 뒤 발자국을 찍어서 했다고. 나중에는 F.D.C. 월러드의 단독 저작이 대중 과학잡지 La Recherche에 나오기도 했다. 사실은 La Recherche의 기사 방침을 비판하던 한 학자가 가명으로 쓴 장난이었다.
이 외에도 학자들이 논문이나 책을 집필한 뒤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준 인물'에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의 이름을 올리는 장난을 가끔 치긴 한다.

스펀지에는 고양이 악보[39]라는 게 소개되기도 했는데, 오스트리아의 화가,조각가였던 모리츠 폰 슈빈트(1804~1871, 슈베르트 문서에 나오는 친구)가 음표를 고양이 그림으로 대신하여 만든 악보이다. 스펀지에서 각종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알아내서 연주해보니, 그야말로 한 마리의 고양이가 사뿐사뿐 춤추는 듯한 명곡이 나왔다고.

한국에선 특이하게도, 평민도 아닌 임금 숙종이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金孫)이라 이름 붙여, 손수 먹이를 먹이며 정사를 볼 때도 곁에 두고 쓰다듬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40] 자세한 부분은 숙종 문서를 참조. 숙종실록을 보면 고양이가 궁궐 내에 들어와 깽판(?)을 친 기록이 남아있고, 유독 고양이가 궁궐에서 깽판을 치는 기록이 숙종실록 이후 영조실록에까지 많이 나타난다. 궁궐에 고양이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 이 외에도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숙종대에 가장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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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이 괴양이는 품고 있느냐?[41]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또한 숙종의 고모이자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도 고양이를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 "시집을 갔으면 남편에게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끌어안고 있으면 어찌하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무렵을 다룬 드라마 마의에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공주로 각색된 인물은 숙명공주의 동생인 숙휘공주.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세조 때 불단에서 절하던 세조를 고양이가 절하는 걸 방해해서, 세조를 노리던 암살자로부터 구해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평창 상원사에 고양이 상이 서 있고, 인근의 기름진 땅들을 고양이를 키우기 위한 논으로 절에 내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평창 상원사에 가면, 절 주변에서 뛰어놀고 있는 고양이들을 볼 수 있다.

세조~성종 연간에 활약한 문인 서거정[42]도 고양이를 길렀는데, 고양이에게 오원자(烏圓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이 고양이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43] #

그 외에도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눌재(訥齎) 박상(朴祥, 1474~1530)이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연산군의 폭거에 항거했다가 사약을 받을 뻔했으나, 직접 서울로 올라가 당당한 자세로 대죄(待罪)할 것을 결심하고, 사람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장성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다. 그런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박상 선생의 앞을 가로막고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잡아당기며 숲으로 향했다. 분명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따라간 그는 사약을 가지고 오던 금부도사와 엇갈려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박상 선생은 이 일로 자신의 친가가 있는 오산 마을에 그 고양이를 제사 지내는 논인 묘창답(描倉畓)을 수십 두락을 두어 정양사(正陽寺)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이 땅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면 곡식이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44]

반대로 고양이를 싫어하는 인물도 여럿 되는데, 그 중 하나로 아돌프 히틀러가 유명하고,[4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유달리 고양이를 싫어하여, 식구 중 누군가가 고양이를 귀여워하자 언짢은 얼굴을 하며 손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카이사르, 알렉산더 왕,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같은 이들이 고양이를 싫어했다고 한다. 참고로 히틀러는 블론디 셰퍼드는 애지중지했다. 이들이 유명한 장군이나 독재자들이기 때문에 "독재자는 충성스런 개를 좋아하며 반항적인 고양이는 싫어한다"는 속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취사선택된 사례들이기에 재미로나 들을 말이다.[46] 수문제도 고양이를 싫어했다. 이유는 "고묘술"이라는 저주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고묘술은 죽은 고양이의 혼령을 부려서 사람을 죽인다고 전해지는 저주술이었다고 한다. 수문제 시기에 고묘술을 부렸다는 이유로 독고황후의 외척인 독고타가 처형당했으며, 수문제는 고양이를 키우는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측천무후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정적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를 죽인 바 있는데, 이때 왕씨와 소씨는 "내가 고양이로 환생하여 널 죽여버릴 것이다" 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그것 때문에 고양이를 무서워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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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ouse Cat Origin Traced to Middle Eastern Wildcat Ancestor [2] 고양이는 고양이과 동물답게 배가 고프지 않으면 잘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며 마냥 영역을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눈앞에 다른 동물을 살려두지 않는 기질은 개가 훨씬 더 강하고, 영국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 대신 소형 견종을 육종했다. [3] 참고로 고대 이집트어로 고양이는 miw라고 읽는다. 미~우 영어로 고양이가 우는 야옹 소리가 meow인데 이 미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란 주장이 꽤 설득력이 많을 정도. 물론 의성어가 비슷한 건 전세계 모든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라서, 그냥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도 높다. [4] 페르시아군들이 이집트 성을 공격할 때 고양이들을 투석기로 날려 공격하면, 이집트군이 고양이를 잡는 데 열중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여 패한 적도 있었다는 말도 있다. 이후로도 적군들이 이 방법을 쓰자, 이집트는 마지못해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했고, 당연히 용병들은 고양이가 죽든 말든 공격을 계속했다. 국군 병사들 군복에 김일성 사진을 크게 인쇄해 붙여놓으면 북한군을 무혈 제압할 수 있다는 주장이 떠오른다. [5] 그러나 완전히 부활하지 못했을 때만 해당되고 부활 이후에는 그런 거 없다. [6] 현대에 애완용으로 키우는 족제비류인 페릿도 이 체취 문제 때문에 대개 중성화수술을 받은 뒤에야 애완용으로 키울 수 있다. [7] 출처: 《고양이 문화사》, 데틀레프 블룸 저, 두행숙 역, 2008, 들녘 [8] 출처:삽화집 The Maastricht Hours 14세기 벨기에 [9] 이러한 고양이 박해의 원인에는, 북구 신화의 여신 프레이야가 고양이가 끄는 전차를 탄다는 설정 때문으로, '이교도의 상징물 = 악마'라는 논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설은 신빙성이 낮은데,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이교도의 상징물이라고 해서 박해하지 않을 정도의 지성은 있었다. 당장 독수리만 하더라도 로마인들이 유피테르(제우스)의 상징물이라면서 깃발에 박아놓았던 것이지만 동로마 제국부터 후대의 유럽 국가들은 그게 간지난다면서 독수리 깃발 잘만 돌려썼고(...) 심지어 (드라코)은 성경에서는 악마, 사탄의 상징임에도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걸 그대로 버젓이 군기로 쓰기도 했다. 또한 고대 이집트 다신교의 문물인 오벨리스크가 크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성 베드로 대성당 한복판에 떡하니 박아놓기도 했고, 1430년 기사 수도회에 ' 황금양털 기사단(Orden del Toisón de Oro)'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교회에서 "이거 이교도들 건데 좀 그렇지 않아?"라고 찝찝해 하는 소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어차피 이교도들의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존재들이잖아. 오벨리스크를 박아놓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든 그게 뭐 어때?"에 가까운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타문화들이 본격적으로 공격 받은 건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가톨릭 측에 기독교의 순수성 논쟁을 건 이후이다. [10] 모순되는 말 같지만, 중세 교회야말로 교황의 말을 철저히 따르는 집단이었으니 다른색 고양이까지 잡아죽일 필요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을 대충 전해들은 농민들이 검은 고양이를 죽이는 김에 그냥 다른색 고양이까지 싸잡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11] 외국에서 캣맘이 길고양이에게 물려 흑사병에 감염된 사례가 다수 있다. [12] 아이러니컬하게도 포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가난에 시달려 난방을 제대로 할 돈도 없을 때 키우던 고양이를 안고 그 체온으로 추위를 견뎠다. [13] 16세기 잉글랜드 귀족 헨리 와이어트란 인물이 런던탑에 갇혀서 굶어죽게 되었을 때, 한 도둑고양이가 새나 쥐를 잡아서 그가 갇힌 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굶어죽느니 그거라도 먹자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 귀족은 고양이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여겨서, 나중에 석방될 때 그 고양이를 소중히 데려가서 평생을 애지중지 돌봐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14] 의외로 성경 자체는 고양이(Felis catus)에 대해 침묵하다시피 해서, 구교 계열 기독교에서만 제2정경으로 인정하는 <예레미야의 편지> 중, "이방의 우상들은 그 몸통과 머리 위에 박쥐, 제비와 다른 새들 뿐 아니라 고양이들까지 올라와 앉으니 그것들은 신도 아니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내용으로 딱 한번 언급되는 게 전부다. 그 외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고양이가 아예 안 나온다. [15] 왕과 왕비는 처음에는 악귀처럼 쥐를 잡는 고양이를 맹수라도 되는 양 두려워했으나 피츠워렌이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어주자 고양이는 피츠워렌에게 애교를 부렸고, 이를 본 왕비도 용기를 내어 고양이를 쓰다듬어 본다. [16]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고양이가 아이템으로 나온다. 2편의 예를 들어보면 쥐떼가 나타났을 때 사용하면 쥐떼가 사라지며, 평상시에 사용하면 그냥 야옹~ 하는 대사만 나온다. [17] 조선 이전에도 농경사회였던 한반도에서 개와 고양이는 소나 닭 등의 다른 가축을 지키거나 쥐 등으로부터 저장된 곡식을 지키는 가축으로 쉽게 잡아먹거나 죽이지 않았다. 다만 춘궁기 등이 닥칠 때 먹을 것이 없거나 혹은 고기 등의 단백질을 공급해 주어야만 하는 환자 등을 위하여 농사의 필수품인 소를 잡을 수는 없으므로 대신 잡아먹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이 역시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서민의 삶이 담겨있는 풍속화나 민화 등의 소재로도 즐겨 나오며, 이를 통해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텨텨하는 풍속화도 있다는 게 함정 [18] 이 설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중국 전한의 애제가 자기 남자 애인 동현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랬다는 이야기와 엇비슷하다. [19] 무함마드는 해로운 동물로 돼지, 쥐, 솔개, 개를 지정했다. 돼지야 불길하고 더럽고 쥐는 사람 먹을 걸 건드리고 오염시키며, 솔개는 귀중한 양을 노리며, 개도 더럽고 피해를 준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 동물이 직접 해가 안된다면 쥐를 빼면 되도록이면 죽이지 말라고 글을 남겼으며(이유는 이들도 다 같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에서도 목축견은 유목민들에게 귀한 친구이니 목축견만은 예외로 뺐다. 더불어 무함마드도 유목민들과 항상 왕래하던 상인 출신이었기에 목축견을 귀여워했다. 그가 개에 대하여 거부감을 보인 이유는 반무함마드군들이 추격하던 군견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는 야사가 있다. [20] 이슬람에서 예배를 하기 전에 행하는 세정. [21] 예배 중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 어슬렁대면 예배가 무효화되기 때문에 예배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한다. [22] 이슬람권 나라에서 드물게 개를 박대하지 않고 오래 전부터 개를 아끼던 튀르키예나 인도네시아같은 나라들도 지금도 예배당에 개가 들어오면 내쫓는다. 물론 개만 그런 게 아니라, 고양이를 제외한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한 모스크에서는 염소가 예배 중 들어오자, 발길질로 내쫓던 여행자 목격담도 있다. [23] 참고로 세계 최초로 수의사가 나온 곳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대왕 시절이라고 한다. [24] 오늘날에는 이슬람 문화권이지만 이집트인들은 고대 이집트의 영광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이슬람교 국가들과 달리 과거의 문명을 이단시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모든 통화에는 이슬람 사원이 그려져 있는 한편 다른 한쪽면에 파라오, 스핑크스나 이집트 전차 같은 고대 이집트와 관련된 도안이 그려져 있다. 직접 이집트 사람들에게 고대 이집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도 이교도였던 건 좀 그렇지만 훌륭한 문명을 만들어낸 것이 자랑스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사실 안 그러면 이상한 것이 인류 역사상 이집트가 초강대국이었던 기간이 무려 수천 년이나 되니까... [25] 출처: 《그래도 사랑해 이집트》, 문윤경, 2009, 밀리언스마일북스. [26] 이집트는 21세기인 현재도 분리수거 체계가 법으로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탓에 분리수거에 대한 인식이나 규정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다. 이 때문에 일반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뒤섞어 통째로 버리는 가정이 매우 많아 악취와 벌레 번식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 [27] 《캠퍼스 로드》, 박정범, 권용태, 김성탄 지음, 세종서적 [28] 까마귀 오 자가 들어가는 것으로보아 코숏 중에 검은색 단색 고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9] 조선시대 때 예전 우리말로 턱시도 무늬의 고양이는 '까치고양이'라고 불렀다는 게 밝혀졌다. 묘상지설(貓相䑛說)에서 노비가 키우는 고양이가 몸은 검고 가슴은 희어, 까치 고양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왔다. [30] 자세한 사항은 고양이 문서의 명칭 및 어원 문단으로. [31] 항목 보면 알겠지만 멧돼지도 산에서 내려와 농작물을 파먹는 등 농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32] 미국이나 호주처럼 땅도 넓은 곳은 그렇지만도 않은지 농장주들이 쥐라면 학을 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는 아예 쥐 사냥용 총이 있을 정도고, 호주도 쥐를 전문적으로 박멸하는 업체들이 적잖게 있다. [33] 나비를 뜻하는 한자의 발음이 80 노인을 뜻하는 한자의 발음과 비슷해서. 이게 함축된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도이다. [34] 이때 참새는 보통 아들들 수만큼 그린다고 한다. 역시 참새를 뜻하는 한자 '작(雀)'과 벼슬을 뜻하는 한자 '작(爵)'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35] 개묘차는 있으나, 실제로 고양이는 자신만의 하루 일과와 루틴이 있어서 그것이 헝클어지면 대단히 언짢아한다고. [36] 대표적인 예가 <울타의 고양이들(The Cats of Ulthar)>에 등장하는 노부부. 한 소년의 고양이를 죽였다가 그 소년의 저주로 인해 도시의 고양이들 전부에게 공격당해 잡아먹힌다. [37] 그 바로 뒤에는 "딴 사람들은 다 꺼져라"(Screw everybody else)라고 쓰여있다(...) [38] 당시(1975년)에는 워드프로세서가 없었고 그가 논문을 제출할 학회는 2인 이상 공동논문에만 We를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39] 고양이 심포니로도 알려져 있다. [40] 다음웹툰 탐묘인간 85~89화 [41] "너 시집 갔으면 시가에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품고 있으면 어쩌니?"라는 의미다. [42]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의 유래가 되는 사람이다. [43] 사가시집 권1 <오원자부> [44] 그런데, 이 논은 결국 해방 후에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어? 다른 '사람'이 아니고 '국가'라서 괜찮나 보다. [45] 히틀러는 잘 알려진 애견가를 넘어 개빠다. [46] 예컨대 블라디미르 레닌은 공과가 어쨌든 독재자로 평가받지만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로 굉장한 애묘가여서, 사진과 영상을 살펴보면 회의석상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대화하는 등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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