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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2:29:23

8時だョ!全員集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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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원집합.jpg

1. 개요2. 기획 의도3. 프로그램 구성4. 전성기5. 시청률 하락, 그리고 종영6. 여담

[clearfix]

1. 개요

8時だョ!(全員~ 集合~!!)
8시라구!(전원~ 집합~!!)

行ってみろ~!!
가보자~!!

- 이카리야 쵸스케가 외치던 오프닝 멘트


1981년 5월 23일 전원집합의 오프닝 장면[1][2]

일본의 전설적인 오와라이 그룹 더 드리프터즈가 주도하던 TBS의 공개 콩트 프로그램이자 일본 1970년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예능 프로그램 이다.

1969년 10월 4일 첫 방송을 개시한 이래 매주 토요일 저녁 8시마다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며 1985년 9월 28일까지 약 15년 6개월간 총 803회가 방영되었다.[3] 약칭은 전원집합.

수시로 회전하면서 바뀌는 대규모 무대 장치와 대야가 머리 위로 떨어지거나 책상 또는 문짝에 얼굴을 부딪혀 나자빠지는 것으로 대표되는 호쾌한 몸개그, 치밀하게 연출되어 있는 콩트, 도리후 멤버들의 뛰어난 연기력, 평소 이미지는 팽개치고 기꺼이 망가지면서 폭소를 유발하는 게스트 등이 적절히 조화된 이 프로그램에 일본의 시청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광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무한도전이나 1박 2일 1기에 동급으로 맞먹는 전설적인 예능 프로그램이었으며, 매주 토요일 저녁 시간대에 생방송으로 송출된 점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와도 비교된다. 같은 시대 MBC TV에서 방영한 웃으면 복이와요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 일본 TV 코미디의 대부격인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1980년 방영된 TBC(현 JTBC)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4]은 제목부터 포맷, 심지어 방송 시간대까지 전원집합을 모조리 카피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KBS에 통합된 이후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역시 이름을 카피한 '전원집합 토요대행진'을 방했으며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토요일 전원출발'을 방송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전자는 음악 버라이어티였고 후자는 스타들이 게스트로 출연한 1990년대 전형적인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다.

2. 기획 의도

당시 토요일 저녁 8시 시간대에 드라마를 방영하던 TBS는 경쟁사 후지 테레비콩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コント55号の世界は笑う)[5]에 밀려 시청률이 바닥을 긁고 있었고, 대책으로 콩트 55호에 대항할 새로운 오와라이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검토를 거듭한 끝에 오와라이 밴드로 이름을 날리던 더 드리프터즈(이하 도리후)를 끌어들여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개 방송을 만들게 되었다.

타이틀인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은 광고 스폰서인 라이온유지의 광고부장이 "토요일 저녁 8시가 되면 모두가 TV 앞에 집합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제시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붙였다고 한다.

3. 프로그램 구성

1976년 시무라 켄이 이 코너에서 불렀던 히가시무라야마 온도(東村山音頭) 대박을 치면서 시무라 켄이 코너의 중심을 맡게 됐으며 히가시무라야마 온도 외에도 시무라 켄의 많은 유행어가 이 코너에서 탄생했다. 1983년 2월 19일을 마지막으로 종영되었고 1년 7개월 후인 1984년 9월 29일에 특집으로 방영된 "15주년이다! 전원 집합"에서 한번 부활했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실제 소년 소녀 합창단이 출연한 적도 있었다. 이 코너가 끝난 뒤 바로 게스트의 노래 2와 짧은 콩트가 이어졌기 때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가수 및 도리후의 멤버들은 코너가 끝나고 무대 시작 시간에 맞춰 재빨리 옷을 갈아 입어야만 했다.
나카모토 코지의 체조 코너, 카토 챠의 『 조금만이에요(チョットだけよ) 』, 우유 광고 콩트, 시무라 켄의 수염 댄스, 부부 콩트, 나카모토 코지와 시무라 켄의 가위바위보 결투는 모두 이 코너의 일부로서 방영되었다. 또한, 1970년 중반까지는 여성 레귤러와 도리후 멤버 중 1명이 출연하는 라인 댄스 풍 단막극이 존재했다.
프로그램 말기에는 중간 광고가 끝난 뒤 방송되었으며, 전반 콩트 종료 후에 게스트의 노래 1을, 짧은 콩트 종료 후에 게스트의 노래 2가 나오는 구성으로 변경되었다.

4. 전성기

초기에는 도리후 콩트 외에 노래 공연, 게스트를 초대하는 토크 코너와 대형 미끄럼틀을 이용한 퀴즈 코너 등을 주된 내용으로 방영하여 시청률은 10% 초중반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고 시청자들도 상당히 좋은 반응을 보였지만, 경쟁자인 콩트 55호가 여전히 막강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어 그 아성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았다. 프로듀서 이즈쿠리 요시미(居作 昌果)는 고민 끝에 '결국 시청자는 습관적으로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된다. 먼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오는 것이 급선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파일:전원집합_1.jpg

이후 이즈쿠리 PD는 여러가지 시행 착오를 거치며 도리후의 콩트 슬랩스틱 코미디 위주로 틀을 뜯어 고쳤고, 대담하게도 1시간 가까운 공개방송을 전부 생방송으로 편성하는 파격을 행사했으며[8] 당시 TBS의 인기 드라마에 출연 중이던 탤런트들을 게스트로 초빙하여 콩트에 참여시키는 등의 볼 거리를 제공하며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4~15%로 시작한 시청률은 1970년대 들어 쑥쑥 올라가면서 1973년 4월 7일 방영분[9]50.5%라는 일본 역대 예능 프로그램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고 한창 시절엔 평균 40~50%, 못 해도 30%는 기본으로 찍으면서 전원집합은 이른바 괴물 프로그램이라 불릴 정도로 토요일 밤 8시라는 황금 시간대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10]

덧붙이자면 당초 TBS가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후지 테레비콩트 55호의 세계는 웃는다는 급 부상한 전원집합에 밀리며 방송시작 1년 9개월 만인 1970년 4월 콩트 55호의 할거야 봐달라구!(コント55号のやるぞみてくれ!)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이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하며 불과 2개월 만에 아예 문을 닫고 말았다(...).

파일:전원집합_2.jpg

1974년 도리후의 레귤러 멤버인 아라이 츄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면서 위기가 찾아왔지만,[11] 후임으로 들어온 시무라 켄이 적응기간을 거쳐 1976년 히가시무라야마 온도(東村山音頭)를 히트시키며 프로그램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1970년대 내내 TBS를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간판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대의 유명한 여성 아이돌 스타들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스가와라 분타, 타미야 지로, 고 히로미 등의 거물급 게스트들도 전원집합에 출연하여 콩트에서 사정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전원집합의 생방송은 일본 각 지역의 극장이나 시민회관, 체육관 등에서 매주 전국을 순회하는 형식으로 전파를 탔지만, 시청률이 하락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간토 지역으로 한정되었고 방송 말엽에는 TBS 스튜디오를 사용하게 되었다.

5. 시청률 하락, 그리고 종영

1981년 멤버인 나카모토 코지 시무라 켄과 함께 불법 경마 도박사건에 연루되어 약식 기소당한 후 벌금형에 처해지며[12] 도리후와 전원집합 이미지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터졌고,[13] 그 해 10월 10일 토요일 밤 8시의 콩라인이란 쓴맛을 보며 칼을 갈고있던 후지 테레비 비트 다케시, 아카시야 산마, 시마다 신스케를 앞세워 작정하고 방영 개시한 오와라이 프로그램 우리들은 익살족( オレたちひょうきん族)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전원집합의 시청률은 하락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14] 도리후 내 멤버간의 갈등마저 표면으로 떠올랐다.[15]

1982년 9월, 전원집합의 창시자인 이즈쿠리 요시미 PD가 인사 이동에 따라 제작국 차장 겸 연출 3부 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선에서 물러나며 후임 프로듀서인 다카하시 토시아키가 분위기를 쇄신하려 했지만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프로그램을 되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83년 8월 13일 방영분은 9.2%로 방송개시 이후 처음으로 한 자리수 시청률이라는 굴욕을 당했고[16] 이후로도 줄곧 10% 대에 그치면서 전원집합은 갈수록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17]

1985년에 접어들며 전원집합은 시청률 경쟁에서 완전히 나가 떨어졌고, 결국 TBS는 7월 19일 "생방송을 공개 형식으로 계속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넌센스 개그도 소재가 바닥을 드러냈다"라는 이유로 전원집합을 종영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전원집합은 그 해 9월 28일, 고별 방송을 마지막으로 총 15년 6개월, 803회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파일:전원집합_최종화.jpg

전원집합 마지막 방송에 출연한 도리후. 맨 우측에 전 멤버인 아라이 츄도 있다.

이후 도리후도 완전 해체는 아니지만 거의 와해 상태가 되어 오와라이 계에는 시무라 켄 카토 챠만 남아 활동하고, 이카리야 쵸스케는 연기[18], 타카기 부는 음악, 나카모토 코지는 주로 무대 행사 쪽으로 각자 집중하게 되었다.

6. 여담


[1] 오프닝 멘트 후에 부르는 노래는 조금만이야! 전원집합!!(チョットだけョ!全員集合!!)이며, 원곡은 홋카이도 민요 홋카이본우타(北海盆唄) 이다. 이 노래는 1971년 10월 2일 방송부터 오프닝 곡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도리후의 신곡을 오프닝 때 불렀다. [2] 그 외 엔딩곡으로 いい湯だな를 불렀다. 이후 러브히나에서 리메이크 노래이기도 하다. [3] 햇수로만 따져보면 거의 16년이지만 6개월이 빠진 이유는 도리후가 어른의 사정으로 타 방송사에 이적하여 1971년 4월 3일부터 9월 25일까지 다른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상세한 내용은 하단의 여담 참조. [4]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라 불리던 김경태 프로듀서가 연출했으며 이주일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삽시간에 인기 코미디언으로 떠오른 바 있다. [5] 콩트 55호는 1966년 하기모토 킨이치사카가미 지로가 결성한 오와라이 콤비. 1975년 사실상 콤비가 와해된 이후로 하기모토는 예능인, 사카가미는 배우로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두 사람이 가끔 협연하기도 했지만, 2011년 사카가미가 사망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6] 머리에는 하치마키를 두르고 있는데, 전통적인 일본 일꾼들의 의상같기도 하지만 오키나와의 전통 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7] 둘 다 일본어로 홋카이도(북해도)와 시코쿠(사국)을 훈독으로 잘못 읽은 것. [8] 모든 방영분이 생방송은 아니었다. 방영 초기에는 녹화로 방송되었으며, 종종 도리후 멤버들의 스케줄 사정 상 생방송이 어려울 경우에는 사전에 녹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9] 이 날 게스트로 당시 WBC WBA 슈퍼웰터급 통합 챔피언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복서 와지마 고이치(輪島 功一)가 출연하여 권투 도장을 소재로 한 콩트를 선보였다. 참고로 와지마는 1970년대 대한민국의 유명 프로권투 선수이던 유제두와 두 차례 맞붙은 적이 있어 한국의 올드 권투 팬들이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10] 전원집합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 TBS는 토요일 저녁 프로야구 중계를 거의 편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11] 당시 콩트 55호 멤버이던 하기모토 킨이치가 진행을 맡은 후지 테레비킨쨩의 쾅 하고 해보자!(欽ちゃんのドンとやってみよう!)에 잠시 시청률 1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12] 시무라는 베팅 금액이 적었던 관계로 기소유예 되었다. [13] 이 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건 기사의 제목이 가관이다. 불법 경마라구! 전원집합!!(...) [14] 이 시기의 시청률 경쟁은 토요일 8시의 전쟁이라고 불리었다. 우리들은 익살족은 전원집합 종영 후 4년이 지난 1989년에 방송을 마쳤다. [15] 당시 50대인 이카리야 쵸스케와 30~40대의 시무라 켄, 카토 챠 사이의 대립과 내홍이 격화되었다. 게다가 TBS의 고위층들은 나이 든 이카리야보다 그나마 젊고 팔팔한 시무라와 카토를 더 선호하면서 갈등을 더욱 부채질했다. [16] 하필 그 날은 오봉 연휴가 한창일 때라,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바깥 나들이를 간 영향도 크기는 했다. [17] 그렇다 해도 전원집합의 모든 방영분 평균 시청률은 27.3%이다. 1980년대에 왕창 까먹기는 했어도 한창 시절에 벌어들인 시청률이 워낙 넘사벽이었는지라... [18]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춤추는 대수사선 와쿠 헤이하치로 역이며 한국에서도 와쿠 형사로 유명하다. [19] 당시 크레이지 캣츠는 우에키 히토시는 물론이고 하나 하지메, 타니 케이 등 주요 멤버들이 개인적으로도 연예계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20] 밝고 아름다운 달과 더러운 진흙에서 살면서 얼굴도 못난 자라를 빗댄 관용구. 우리 말로 하자면 천지차이 정도와 맞먹는다. [21] 초기 몇 회는 곽규석이 출연했다. [22] 전원집합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웃으면 복이와요 1기는 사회적으로 큰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고 시청률도 제법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사의 야구단인 MBC 청룡(현 LG 트윈스)을 운영하며 프로야구 중계 시간을 늘리는 과정에서 종영되었다는 것이다. [23] 이후 Wire puller 이벤트의 정신적 전작격 이벤트라고 보면 된다. [24] Take-o라는 명의를 사용한 아티스트의 8 o'clock tripping이라는 악곡이었다. 정황상 특유의 빽빽거리는 신스음 사용이나 실사 차용 BGA, 특유의 고BPM 때문에 정체는 PUFF라는 개그 BMS 전문 아티스트로 추측될뿐, 공식적으로 밝혀진건 없다. 당장 해당 bmssearch 링크에서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PUFF의 부명의는 PE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