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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야 쵸스케† | 타카기 부 | 나카모토 코지† | 카토 챠 | 시무라 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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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리프터즈 관련 틀 |
더 드리프터즈 ザ・ドリフターズ THE DRIFT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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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일본 |
멤버 |
이카리야 쵸스케†(베이스) 타카기 부(키보드) 나카모토 코지†(기타/보컬) 카토 챠(드럼/보컬) 시무라 켄†(기타) |
이전 멤버 | 아라이 츄†(오르간) |
활동 시기 | 1956년 ~ |
소속사 | |
공식 사이트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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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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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라 켄 합류 이전[1] |
일본의 몬티 파이선같은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이며[2] 1970년대 일본 코미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코미디(오와라이)밴드[3]이다. 일본의 코미디 밴드. 영칭 The Drifters, 약칭 도리후(ドリフ).
원래 훨씬 이전인 1956년에 결성되었지만, 3대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밴드를 재정비한 1964년부터 그 역사를 센다. 그 이전의 시기에 대해선 '전기 밴드 시대'로 구분한다. 전기 밴드 시대엔 코미디랑은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1962년에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가 일으킨 TV 코미디 붐 시대에 코미디 밴드로 방향을 선회, 이것이 대박을 터트려서 당대 일본 코미디계의 1인자가 되었다.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가 60년대 고도성장시대를 대표한다면, 더 드리프터즈는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경제 안정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980~1982년의 만담( 만자이)붐 전까지 TV 코미디의 주류는 도쿄발 콩트 방송이었고 현재 일본 예능계를 지배하고 있는 요시모토 흥업이 TV 진출에 실패하여 도쿄 지사를 폐쇄했고 일본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서 "코미디 부분에서 관서는 관동을 절대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정도로 오사카의 영향력은 상당히 약했다.
본업이 코미디 밴드, 즉 가수로 시작했지만 현재에 와선 오와라이 게닌으로 훨씬 유명하다. 8시라구! 전원집합( 8時だョ!全員集合)은 이 바닥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다. 실제로 각 멤버들의 예명은 하나 하지메가 지어준 것으로 두 밴드는 매우 친했다.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 30년 기념방송의 게스트가 더 드리프터즈였을 정도이다.) 다만 하나 하지메가 처음 예명을 지어줬을 때는 도리후 멤버들이 이름이 너무 단순하고 튀지 않는다고 징징댔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오히려 간단하고 기억하기 쉬운 예명도 성공 요인으로 꼽히니 결론은 해피 엔딩
도리후의 전성기 시절 일본내 인기는 각 멤버들 한명 한명이 이경규, 유재석, 강호동, 김국진, 신동엽 정도의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다만, 이 사람들의 전성기인 70년대~80년대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 시대인데다가 당시 사회 전반에 반일 정서도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고 2020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던 시무라 켄을 제외하면 전원집합이 종영된 1985년 이후 멤버들이 슬슬 코미디언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전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도리후의 멤버들은 국내에선 코미디언으로 유명하지 않고 탤런트로 유명하다. 춤추는 대수사선의 와쿠 헤이하치로 역으로 유명한 이카리야 쵸스케라든가. 그렇지만 상당수 개그는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하기도 한데,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개편철이 되었거나 아니면 마땅히 쓸만한 아이템이 떠오르지 않으면 PD들이 부산으로 가서 일본 TV프로그램 포맷이나 아이템을 은근슬쩍 베껴서 썼던 악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리후의 특징 중 하나는 역시 멤버들의 나이차. 탈퇴한 아라이 츄와 준 멤버였던 스와조노 치카하루를 제외한, 흔히 도리후 하면 떠오르는 5명의 편성으로 갖다놓아도 최연장자 이카리야 쵸스케와 최연소자 시무라 켄의 나이차는 무려 19살. 우에키 히토시를 비롯한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의 경우 이카리야 쵸스케에겐 형님들 정도지만 시무라 켄에겐 그야말로 대선배. 애초에 우에키 히토시의 장남인 작곡자 히로 코이치가 시무라 켄보다 나이가 2살 많으니.
2. 멤버
2.1. 이카리야 쵸스케(いかりや長介)
자세한 내용은 이카리야 쵸스케 문서 참고하십시오.2.2. 타카기 부(高木ブー)
자세한 내용은 타카기 부 문서 참고하십시오.2.3. 나카모토 코지(仲本工事)
자세한 내용은 나카모토 코지 문서 참고하십시오.2.4. 카토 챠(加藤茶)
자세한 내용은 카토 챠 문서 참고하십시오.2.5. 시무라 켄(志村けん)
자세한 내용은 시무라 켄 문서 참고하십시오.2.6. 탈퇴한 멤버
2.6.1. 아라이 츄(荒井注)
아라이 츄 荒井注 | Arai Ch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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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본명 | 아라이 야스오 ([ruby(荒井 安雄, ruby=あらい やすお)], Arai Yasuo) |
출생 | 1928년 7월 30일 |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 |
사망 | 2000년 2월 7일 (향년 71세) |
시즈오카현 이토시 | |
국적 | 일본 |
직업 | 게닌, 탤런트, 배우 |
신장 | 158cm, 75kg |
학력 |
릿쿄대학 문학부 (종교학과 / 중퇴) 니쇼가쿠샤 대학 문학부 (국문학과 / 학사) |
키 158cm로 굉장히 작았지만 꽤 탄탄한 체구와 남자다운 외모로 배우 활동도 해서 도베르만 형사 TV드라마 판에서 모리 경부를 맡거나 쇼치쿠에서 제작한 에도가와 란포의 미녀 시리즈에서 주역 나미코시 경부를 맡기도 했다.(1978~1985, 1992)[4] 이후 2000년 2월 9일 (수요일) 오전 4시 30분에 시즈오카 현 이토의 자택에서 목욕 도중에 간부전으로 인해서 71세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서 2000년 1월부터 송출된 후지 칼라의 필름 카메라 광고인 '설날을 찍자!'가 생전 마지막 영상이 되고 말았다.[5] 생애 마지막 CM영상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This is a pen」, 그리고「なんだ、バカ野郎(뭐야, 바보 자식아)」,「文句あるか(불만있냐)!」, 「何見てんだよ(뭘 봐)!」 등등이 있다. 활용 사례를 보면 「 This is a pen」은 아라이가 영어로 말해야 할 상황에서 맥락 따위는 무시하고 무작정 내뱉고 보는 치트키에 가까우며 「なんだバカ野郎」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시비조로 말하는 것이 포인트.
아라이 츄가 사망한 이후 이카리야 쵸스케는 아라이를 추도하는 의미로 그와의 추억을 쓴 자전적인 소설인 '안돼! 이건.....'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의 발인 시에는 영구차의 경적과 동시에 참석자 전원이 아라이의 유행어 개그인 '뭐야? 바보 자식아!를 외쳐 배웅했다. 이때 나카모토 코지는 인터뷰에서 '우리 쪽 이야말로 바보자식 이었어요.'라고 울면서 대답했다.
2.6.2. 스와조노 치카하루(諏訪園親治)
1952년(昭和27),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요시노정 출신.
환상이 되어버린 도리후 제6의 멤버에 가장 가까웠던 남자. 도리후에 삘이 딱 꽂혀서 면접까지 봤지만, 떨어졌다. 그래도 간청하여 사정사정해서 결국 카토 챠의 운전수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카리야 쵸스케에게 발탁되어 준 멤버가 되고, 이카리야 쵸스케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1985년(昭和60)에 도리후와 결별. 탈퇴 후, 스와 신지(すわ 親治)라는 예명으로 연극쪽에 종사하고 있다.
비록 준멤버였기는 하지만, 실제로 니치게키의 도리후 공연에서도 6인조로 활동하는 등 실질적으로 멤버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고, 도리후의 대표 프로그램인 '전원집합'에는 시무라 켄 보다도 먼저 도리후 멤버로써 출연했다. 타카기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유행어가 없다.
사실 스와조노 치카하루는 정치풍자 코미디 집단인 더 뉴스페이퍼의 창시자로서 더 유명하다. 2023년 도리후 신년 SP에 출연해 타카기 부, 카토 챠와 같이 공연했다.
2.7. 전기 밴드 시대의 멤버
자세한 내용은 사카모토 큐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역사
- 전기 밴드 시대 : 1955년에 초대 리더 키시베 키요시를 중심으로 마운틴 보이즈와 도쿄 웨스턴 보이즈가 합쳐져 결성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키시베 키요시는 리더의 자리를 2대 리더 사쿠라이 테루오에게 양도하고 탈퇴, 작곡가로 전업하여 대성하였다. 사쿠라이 시대 때부터 순수 음악에서 코메디 밴드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하지만 4년 뒤인 1964년, 도리후에 내분이 일어나 멤버 일부가 동키 카르텟[6]으로 독립해나가고, 3대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를 중심으로 한 잔류 멤버들이 밴드를 재결성하면서 전기 밴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참고로 전기 밴드 시절 거쳐갔던 멤버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일본 가요계의 전설 사카모토 큐. 이 인연으로 사카모토 큐는 전원집합 1회의 게스트로 출연했다.
- 재결성~아라이 츄 탈퇴 : 현재 멤버로 고정되기 전까지 1년간 계속 밴드 멤버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뒤로 그럭저럭 인지도 있는 코메디 밴드로 있다가, 1969년 TBS 테레비에서「 8시라구! 전원집합」을 시작하면서 아주 대박을 친다. 평균 시청률 30% 이상, 최고 시청률 50%를 넘긴 적도 있을 정도.[7] 그 뒤로 제1의 전성기가 찾아오지만, 1974년, 아라이 츄가 체력의 한계를 이유로 탈퇴를 선언, 전성기를 구가하던 도리후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 때, 아라이 츄의 대타로 들어온 사람이 그 시무라 켄이었다.
- 시무라 켄 가입~시청률 경쟁 : 시무라 켄 가입 이후에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도리후, 전원집합마저 최초로 시청률 1위를 빼앗기고 만다. 이에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는 8년간 계속해오던 주연 영화 시리즈를 종료시켜버린다. 그리고 이듬해, 그 결실을 맺어 시무라 켄이 「히가시무라야마 타령」을 히트치면서 그 동안의 부진을 일소하고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다음 해에 후지 TV에서 시작한 「 드리프 대폭소」까지 히트를 치며 계속 일이 잘 풀렸지만, 1981년에 나카모토 코지와 시무라 켄의 불법경마 문제가 터졌다. 다행히 서류송검에 그쳤음에도 이는 드리프터즈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주게 되어 전원집합 인기 하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후지 TV의 '우리들은 익살족'까지 등장해[8] 1년만에 시청률 1위를 탈환하면서 지금도 토요일 8시의 전쟁으로 불리며 회자되고 있는 시청률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평균 시청률은 전성기의 반토막도 안 되는 10% 후반대를 유지. 게다가 도리후 내의 기성 코메디언인 이카리야 쵸스케와 신진 코메디언인 카토 챠와 시무라 켄의 대립까지 격화된다. 여기에 TBS의 높으신 분들도 이미 늙어서 50대에 접어든 이카리야 쵸스케보다는 30대 중반의 시무라와 40대 초반의 카토 챠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했다. 비유를 하자면 무한도전 내에서 50대가 된 박명수와 유재석 등 노장파가 아직 젊은 정형돈과 하하 등 신진파와 대립하고, 여기에 MBC의 높으신 분들도 늙은 유재석과 박명수를 치우고 정형돈과 하하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상을 보면 대립하는 멤버들의 표정이 굳어있거나 어색하기 짝이 없다.
- 전원집합 종영~현재 : 1985년이 되자 시청률 경쟁에서 완전히 뒤쳐져 결국 오랜 역사를 뒤로 하고 전원집합은 종영. 그 이후 이카리야 쵸스케는 연기, 타카키 부는 음악[9], 나카모토 코지는 무대나 행사에 집중하게 되고, 오와라이에는 카토 챠와 시무라 켄만 남게 된다. 도리후 다섯이 다 모여서 하는 정기 방송은 도리후 대폭소를 제외하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것도 쇼와 시대가 끝나며 완전히 없어졌기에 전원집합의 종영을 사실상의 해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후 98년에 도리후 대폭소도 비정기적 방송으로 바뀌고 카토 챠는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서며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인정하고 오와라이에서 은퇴. 하지만 시무라 켄은 잠시 슬럼프도 있었으나 개그계 원로로 재기해 활발하게 현역으로 뛰었다.
198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연공서열' 콩트. 이카리야가 리더가 되고부터 아라이 탈퇴, 시무라 가입 이후 80년대까지 도리후의 간략한 역사와 각 멤버들의 사건사고를 알 수 있다. 상세한 내용은 위에 적혀있는 대로이다.
4. 코미디 활동
도리후의 코미디 활동은 형식상으로 나누자면 「 8시라구! 전원집합」 풍의 생방송 공개 코미디와 「 도라후 대폭소」 풍의 녹화 콩트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인 만자이는 하지 않았고, 콩트를 주로 찍었다. 보통은 이카리야 쵸스케가 츳코미를 맡고, 다른 멤버가 보케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렇다고 이카리야 쵸스케가 보케를 안 했던 건 아니다. 슬랩스틱은 들어갈 때도 있고 안 들어갈 때도 있다. 도리후 콩트에서 각자가 주로 맡았던 역할들에 대해선 본인 항목 참조.
5. 음악 활동
수많은 히트곡들을 냈으며, 재결성 데뷔곡이었던 「즛코케 쨩」이나 TBS계 인형극 방송 「날아라! 손오공」의 주제가 「고 웨스트」을 제외하면 일본 민요나 유행가들을 도리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게 음악활동의 특징이다. 도리후가 많이 재미봤던 점이 군가 리메이크. 옛날 군가들을 편곡하고 당시 시대상과 애환을 녹여낸 가사로 바꾼 뒤 레코드로 냈던 게 히트곡 「도리후의 즌도코부시」[10]와 「도리후의 정말로 정말로 고생씨」[11]. 그래서 나중에 원곡이 된 군가들만 불러 따로 CD로 낸 앨범이 있다. 그러나 정작 도리후 노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잠깐뿐이야! 전원집합」[12].와 「이이유다나」는 각각 홋카이도 민요인 북해분패 리메이크와 군마현 민요 이이유다나의 재해석이다. 역시 음악 활동도 크레이지 캣츠에 비하면 활발하지 못 했다. 30년간 꾸준히 앨범을 내왔던 크레이지 캣츠에 비해 도리후는 70년대 중반에 음악활동이 많이 줄어든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키보드를 담당하는 아라이 츄의 탈퇴가 음악활동에 직격탄이었기 때문.[13]앨범 순서 | 출시연월일 | 앨범제목 | 비고 |
1 | 1968년 6월 10일 | 즛코케쨩/좋은 탕이다(ズッコケちゃん/いい湯だな) | A면의 「즛코케쨩」은 밴드 재정비 이후 신생 도리후의 데뷔 타이틀로 오리지날 곡이다. 근데 B면의 「좋은 탕이다」가 공전절후의 대히트를 치면서 오히려 이 곡이 서브 취급을 받고 있다. 「좋은 탕이다」는 군마현 민요의 리메이크다. 카토 챠가 특유의 하이톤으로 내뱉는 비바논논~이라는 후렴구가 트레이트 마크. 한국 노래방에 수록되어있는 유일한 도리후의 노래. 한국에는 짱구 극장판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의 엔딩곡으로 음만 알려진 곡이다. 이후 "좋은 탕이다" 는 도리후 대폭소의 엔딩곡으로 쓰이게 된다. 참고로 일본 3대 중창단 중 하나인 듀크 에이세스가 바로 전에 일본의 노래 시리즈 군마편으로 이 노래를 냈었지만 도리후의 히트로 묻혔다..2019년에는 데스 스트랜딩에 이스터 에그로 삽입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
2 | 1969년 5월 1일 | 미요쨩/놋떼루온도(ミヨちゃん/のってる音頭) | 「미요쨩」은 유행가 리메이크, 「놋떼루온도」는 아키타현 민요 아키타온도의 리메이크다. |
3 | 1969년 11월 1일 | 도리후의 즌도코부시/다이헨우타이코미(ドリフのズンドコ節/大変歌い込み) | 「도리후의 즌도코부시」는 해군에 징집돼서 떠나는 청년의 모습을 그린 일제 군가 해군소패의 개사편곡 버전. 원래의 1절을 마지막 6절에 넣고 나머지는 아예 가사를 새로 썼다. 80만장 이상을 팔아먹은 히트곡 중 하나. 「다이헨우타이코미」는 미야기현 민요 사타로부시의 리메이크다. |
4 | 1970년 4월 25일 | 도리후의 정말로 정말로 고생씨/농담탄갱절(ドリフのほんとにほんとにご苦労さん/冗談炭坑節) | 「도리후의 정말로 정말로 고생씨」는 군대의 엿같은 여러가지를 고생[14]을 그린 일제 군가 군대소패의 개사편곡버전. 우리나라에도 군대 관련 노래로 개사되었다. 「도리후의 즌도코부시」와는 다르게 원곡 가사가 안 남아있다. 도리후의 대표 히트곡 중 하나. 「농담탄갱절」은 후쿠오카현 민요 상반탄갱절(常磐炭坑節)의 리메이크다. 농담과 상반(지명)이 비슷한 발음[15]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
5 | 1970년 11월 5일 | 누군가씨와 누군가씨/도리후의 오코사부시(誰かさんと誰かさん/ドリフのおこさ節) | 「누군가씨와 누군가씨」는 스코틀랜드 민요 밀밭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나면[16]의 리메이크. 「도리후의 오코사부시」는 아키타현 민요 오코사부시의 리메이크. |
6 | 1971년 5월 5일 | 도리후의 츤츤부시/도리후온도 홋카이봉우타로부터(ドリフのツンツン節/ドリフ音頭 北海盆歌より) | 「도리후의 츤츤부시」는 여러 학교의 전승곡인 츤츤부시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소시민이 겪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가 압권.「도리후온도 홋카이봉우타로부터」는 홋카이도 민요 홋카이봉우타의 리메이크다. 8시라구! 전원집합의 오프닝으로 쓰인 그 노래와는 다른 버전. |
7 | 1971년 12월 20일 | 도리후의 츠레로부시/도리후의 연인씨(ドリフのツーレロ節/ドリフのラバさん) | 「도리후의 츠레로부시」는 대만 민요를 리메이크한 샹랑부시라는 노래의 리메이크. 도리후의 연인씨는 쇼와 10년대에 유행한 추창의 딸 리메이크. 두 노래의 원곡인 이름 모를 대만 민요와 마셜 제도가 배경인 추장의 딸 모두 남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노래다. |
8 | 1972년 4월 25일 | 도리후의 새빨간 봉투/도리후의 핑퐁팡(ドリフの真赤な封筒/ドリフのピンポンパン) | 「도리후의 새빨간 봉투」는 당대의 유행가가 원곡이다. 「도리후의 핑퐁팡」은 핑퐁팡체조라는 체조 음악이 원곡. |
9 | 1973년 6월 10일 | 8시라구! 전원집합 대특집 잠깐뿐이야! 전원집합/「일본의 노래」 시리즈 "좋은 탕이다"로부터 도리후의 비바논온도(8時だヨ!全員集合大特集 チョットだけヨ!全員集合/「にほんのうた」シリーズ"いい湯だな"より ドリフのビバノン音頭) | 「8시라구! 전원집합 대특집 잠깐뿐이야! 전원집합」은 8시라구! 전원집합의 오프닝 곡이었다. 원곡은 홋카이봉우타. 6번 앨범의 도리후온도와는 다른 노래다. 「「일본의 노래」 시리즈 "좋은 탕이다"로부터 도리후의 비바논온도」는 8시라구! 전원집합과 도리후 대폭소의 엔딩곡으로 쓰였다. 원곡은 군마현 민요 좋은 탕이다. 역시 1번 앨범의 좋은 탕이다와는 다르다. 아라이 츄가 탈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앨범이다. |
10 | 1976년 3월 20일 | 도리후의 바이노바이노바이/도리후의 영어학원(ドリフのバイのバイのバイ/ドリフの英語塾) | 「도리후의 바이노바이노바이」의 원곡은 도쿄부시. 도쿄 부시의 원곡은 미국의 군가 조지아를 거치는 행진(Marching Through Georgia). 들어보면 알겠지만 독립군가의 원곡인 그거 맞다. 「도리후의 영어학원」은 오리지날 곡이다. 시무라 켄이 참가한 첫 앨범이다. |
11 | 1976년 9월 5일 | NHK 모두의 노래로부터 카토챠의 처음의 납니다/시무라 켄의 전원집합 히가시무라야마 온도(NHK みんなのうたより 加藤茶のはじめての僕デス/志村ケンの全員集合 東村山音頭) | 「NHK 모두의 노래로부터 카토챠의 처음의 납니다」는 NHK의 모두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역시절의 미야모토 히로지가 나와 부른 처음의 납니다라는 노래를 카토 챠가 리메이크한 것.「시무라 켄의 전원집합 히가시무라야마 온도」는 시무라 켄의 고향 히가시무라야마시의 민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 히가시무라야마 온도가 대히트를 치면서 도리후는 아라이 츄 탈퇴 이후의 부진을 일소하고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게다가 히가시무라야마시는 이 노래 하나로 전국적인 네임드 시가 되었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시장이 직접 고맙다고 역전에 시무라 켄의 나무를 심어줬겠는가. 참고로 가사에 나오는 히가시무라야마 욘쵸메, 산쵸메, 잇쵸메는 실제로 없는 지명. |
12 | 1978년 4월 20일 | TBS계 TV 「날아라 손오공」으로부터 고 웨스트/도리후의 즌도코부시(TBS系TV「飛べ孫悟空」より ゴー・ウェスト/ドリフのズンドコ節) | 「TBS계 TV 「날아라 손오공」으로부터 고 웨스트」는 도리후가 출연하는 날아라 손오공이라는 인형극 프로그램의 테마송이다. 오리지날 곡. 12번 앨범의 즌도코부시는 3번 앨범의 즌도코부시에서 아라이 츄의 파트를 시무라 켄에게 넘긴 버전. 일명 신 도리후의 즌도코부시. |
13 | 1981년 12월 21일 |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가라오케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ドリフの早口ことば/カラオケドリフの“早口ことば”) |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는 8시라구! 전원집합에서 쓰이던 말장난 네타 노래다. Diana Ross & Marvin Gaye의 "Don't Knock My Love"이라는 팝송의 개사곡. 「가라오케 도리후의 "하야구치코토바"」는 가창이 없는 버전. |
6. 영화 활동
1967년부터 8년간 도리후 본인들이 주연인 영화 21편을 찍었다. 상기했다시피 시무라 켄 가입 이후 위기 극복을 위해 이카리야 쵸스케가 접어버렸으므로 시무라 켄이 출연한 영화는 겨우 4편 뿐이다. 다만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 주연 영화보다 평가가 낮다. 물론 흥행 성적은 비등비등했지만.7. 게임화
드리프터즈 멤버들중 카토 챠와 시무라 켄이 플레이어 캐릭터로 나오는 카토짱 켄짱(カトちゃんケンちゃん)이라는 게임이 PC 엔진용으로 나온적이 있다. 횡스크롤 액션게임이지만 똥싸는 동작이라든지 화장실 유머나 슬랩스틱같은 연출이 특징. 이 둘이 큼지막한 2등신 캐릭터로 나온다. 게임 난이도가 높은 탓도 있고 크게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PC 엔진 유저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강한 인상을 남겨준 탓인지 아는 사람은 아는 정도의 아주 듣보잡은 아닌 B급 게임 정도의 위치인듯. 의외로 북미판도 존재하는데, 북미에서는 아무래도 일본 코미디의 저명성 때문인지 JJ와 제프라는 인물로 대체되었다. 한국에서는 이주일과 자니 윤쇼 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다.8. 영상
1966년 6월 30일 비틀즈 일본공연 당시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재키 요시카와 & 블루 코멧츠 무대 후 3분 20초부터 등장한다. 맨 앞에 나오는 양반은 일본의 비틀즈 + 프랭크 시나트라인 카야마 유조.
1970년대 밴드 컨셉 꽁트가 많았다.
대표곡(1970~1979) 모음. 카토 챠 리드보컬이 대부분이다.
1970년 일본 TBS 테레비에서 방송한 도리후타즈의 노래 즌도코타령(ズンドコ節)
역대 도리후대폭소(ドリフ大爆笑) 오프닝 모음. 초창기에는 다른곡이 였다가 1978년부터 오프닝 노래가 바뀌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래가 점점 비슷해진다.
2003년 12월 방영한 도리후 대폭소 오프닝과 막간 영상들. 원년 멤버의 마지막 무대였다.[18]
1/5, 2/5, 3/5, 4/5, 5/5 순으로 풀 영상이 있다. 로딩이 꽤 오래 걸리니 정지해놓고 있으면 되겠다.
9. 여담
- 쇼와라는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예능인들이었던 만큼 패러디도 많이 된다. 아마 오덕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건 은혼의 카토 켄과 카리야 일당이며, 괴짜가족의 이타리아 쵸스케, 20세기 소년의 이가라시 쵸스케[19]도 등장. 사카낙션의 新宝島의 뮤비는 도리후의 대폭소의 패러디. 그리고 용자 요시히코와 마왕의 성 5화에서도 패러디가 등장한다.
- 처음 밴드 이름은 미국의 음악 그룹 The Drifters의 아들(Son)이라는 의미로 '선즈 오브 드리프터즈'라는 이름이었는데 1958년에 밴드 보컬이 된 이노우에 히로시의 이름을 넣어 '이노우에 히로시와 드리프터즈'로 바뀌었다. 이후 2대 리더로 교체되면서 쭉 밴드명에 리더의 이름을 붙였다가 1965년에 현재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 2021년 12월 27일에 이자와 오피스에서 제작하고 후지 테레비에서 방송한 2시간짜리 특집극인 시무라 켄과 도리후의 대폭소이야기 (志村けんとドリフの大爆笑物語)가 방영되었다. 메인각본과 종합연출은 실제로 시무라 켄이 출연했던 NHK 콩트 프로그램인 이웃집 시무라의 각본을 집필했던 후쿠다 유이치가 담당하였으며 주된 내용은 시무라 켄 (야마다 유키 분)을 주인공으로 1968년 도리후의 적임자로써 처음 들어와서 코미디 활동을 시작하였던 상황부터 시작하여 정식 멤버로 활동했던 시기 (1970년대 부터 1990년대 까지)에 다른 멤버들과 함께 경험한 가혹한 스케줄이나 인기 뒤에 숨겨진 멤버의 감정, 좌절이나 고뇌를 그렸으며 이렇게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으로써 일대 최전성기를 누린 시무라 켄의 전반기 생애를 담고있다. 또한 이카리야 쵸스케 역으로 엔도 켄이치, 카토 차의 역은 카츠지 료, 타카기 부는 카지 마사키, 나카모토 코지는 마츠모토 가쿠, 아라이 츄의 역할은 카네다 아키오가 캐스팅되었다.
[1]
뒷줄 왼쪽 위부터 아라이 츄, 카토 챠. 앞줄 왼쪽은 타카기 부, 이카리야 쵸스케, 나카모토 코지.
[2]
몬티 파이선은 1969년 결성했고 드리프터즈는 그 이전에 결성. 하지만 파이선과 드리프터즈가 인기를 끌게 된
몬티 파이튼의 비행 서커스와
8시라구! 전원집합(
8時だョ!全員集合)이 방영을 시작한 시기는 비슷하다.
전원집합은 1969년 10월 4일
TBS테레비 계열을 통해 처음 방송되었고 그 다음날인 10월 5일에
몬티 파이튼의 비행 서커스가 영국
BBC를 통해 처음 방송되었다. 참고로 비행 서커스는 일본에서도
TV 도쿄 계열에서 1976~1977년에 방송되었다.
[3]
현재 일본 예능계를 지배하고 있는
다운타운,
톤네루즈 등이 게닌 3세대를, 80년대 만자이(만담) 붐을 일으켰던 소위 빅3
아카시야 산마,
타모리,
비트 타케시가 게닌 2세대를 대표한다면 게닌 1세대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더 드리프터즈이다.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이주일,
심형래와 같은 80~90년대 전설적인 콩트시대 개그맨들이 2세대 빅3라고 보면 되고, 더 드리프터즈는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한국 코미디 1세대 트로이카와 같은 위치에, 활동 시기 역시 비슷한 70년대 도쿄발 콩트 코미디의 전성기를 견인한 코미디 그룹. 다만 연령대로 본다면 더 드리프터즈가 구봉서를 비롯한 한국 1세대 코미디언보다 더 어리다.
[4]
왜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나면 1985년에 이 시리즈에서
아케치 코고로 역을 맡았던 배우
아마치 시게루가 지주막하출혈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시리즈가 중단돼서 강판되었기 때문이다,(시리즈는 이듬해 재개했지만 주역배우들은 전부 교체되었다.) 그 뒤 1992년에 복귀했지만 딱 1편만 다시 나오고 그 뒤론 안 나왔다.(그리고 시리즈는 1994년 딱 1편 더 나온뒤 끝났다..)
[5]
칠복신을 컨셉으로 하여 모닝구무스메의 멤버인 타나카 레이나가 벤자이텐 역을 맡았고 아라이츄가 비사몬텐 역으로 나왔으며 여기에 도리후 멤버 5명 전원이 가세하여 6인방의 공동출연이 되었다. 당초에는 출연 멤버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칠복신의 출연진이 1명 부족했기 때문에 광고 대리점이 아라이에게 제의를 하더니 아라이가 바로 승낙하여 출연하게 되었다.
[6]
독립 이후 흥행참패로 결국 1970년 해산.
[7]
1973년 4월 7일에 기록한 50.5%. 일본 예능 시청률 역대 1위.
[8]
'3대 게닌' 중 하나로 꼽히는
비트 다케시를 스타덤으로 올린 콩트 프로그램이다.
[9]
특히 하와이안 스타일의 음악
[10]
해군 속요가 원곡. 후렴구가 즌즌즌즌즌즌도코라서 즌도코부시라는 별명이 있음.
[11]
군대소패가 원곡. "싫지는 않으십니까 군대는~"라고 시작하는 노래. 역시 후렴구가 정말로 정말로 고생이네. 한국에서는
사가로 널리 불려진 "소령중령대령은"의 원곡이다.
[12]
8시라구 전원집합 오프닝. 엥야고라야또 돗코이쟌쟌 고라야또
[13]
밴드 시절을 함께 했던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시무라 켄은 코메디를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므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14]
밥반찬이라는 게 정 떨어진다던가, 수송선에 여자가 없다던가.
[15]
농담은 じょうだん, 상반은 じょうばん
[16]
일본에서는 고향의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17]
상기 표는 레코드 음반만 정리한 것이다. CD 등은 없다.
[18]
이 방송이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의 마지막 활동이다. 그는 방영 후 불과 3개월 만에 사망했다.
[19]
이쪽은 연기인 이카리야 쵸스케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