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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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楊方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학자로 자는 공회(公回)). 양주 회계군 회계현 출신이다.
2. 생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재능이 있었다. 장성한 뒤에는 군령(郡鈴) 밑에서 일하면서 학문을 이어나가 《 오경(五經)》을 틈틈이 공부했다. 그것이 회계내사 제갈회의 눈에 띄어 문인의 예를 갖춰서 귀인으로 그를 초빙했다. 제갈회는 양방을 만나 글을 한번 짓어보게 하고는 만족하여 그를 군의 공조주부로 천거하였다.당시 명사 우희, 우예 형제가 유학으로 명성을 널리 떨치고 있었는데, 이들이 양방과 무척 친하게 지내자 양방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졌다. 우희 형제는 양방의 글을 지인인 명사 하순에게 서신으로 보내면서 양방을 칭찬하였다. 이에 하순도 글을 읽어 보고는 답장을 써서 극찬했다.
그의 글에는 뜻이 있어 속되고도 범상한 다른 말들과 다르니, 그 큰 재능을 글로써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함이 이와 같습니다. 또, 그의 글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어, 깊이 숨겨져 있는 뜻이 드러나면 한 나라를 밀어낼 수 있을 정도이니, 어찌 군(郡) 안에만 머물 재능이겠습니까?
그러고는 양방을 수도로 불러 자신의 스승으로 섬겼다. 사도
왕도는 양방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속관으로 삼았고, 이후 동안태수, 사도참군사 관직을 역임하였다.양방은 수도로 이사한 뒤로 동진의 벼슬아치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극진한 대접이 부담스러웠던 양방은 빨리 수도를 떠나, 먼 지방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책이나 쓰면서 살길 원했다. 왕도는 그의 뜻대로 해주고 고량태수로 임명시켜 주었다. 마침내 그는 수도를 떠나 고량군에서 조용히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집필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때 양방은 《오경구침(五經鉤沈)》을 저술하고 《오월춘추(吳越春秋)》를 개찬하여 문필을 병기하니, 훗날 이 책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양방이 노환으로 더이상 태수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자 은퇴하고 고향인 회계로 돌아갔다. 그가 수도를 지나갈 때, 대각(臺閣)에서 업무를 보던 왕도가 나와 그를 맞이하고는 함께 고향까지 동행하였다. 양방이 집에 도착하자 왕도는 이별하여 다시 수도로 돌아갔다. 그 이후의 양방에 관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이미 늙어서 은퇴한 것을 보면 집에서 편안히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