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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비정통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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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명 초대 광통왕
주휘잡 | 朱徽煠 |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연호 | 현무(玄武, 1451) |
봉호 | 광통왕(廣通王) |
성 | 주(朱) |
휘 | 휘잡(徽煠) |
{{{#f9d537 부왕}}} | 민장왕(岷莊王) 주편(朱楩) |
생몰 | ? ~ ? |
재위 | 명 광통왕 |
1429년 ~ 1451년 | |
명 비정통 황제 | |
1451년 8월 ~ 1451년 10월 |
[clearfix]
1. 개요
명나라 초기의 황족으로 태조 홍무제의 손자이자, 민장왕(岷莊王) 주편(朱楩)의 아들이었다.2. 생애
1429년 광통(廣通)을 분봉받아 광통왕에 즉위했다.주휘잡은 용력이 좋았다고 전해지며 그에겐 단유홍(段有洪)이라는 가솔이 있었는데 단유홍 역시 능력이 출중해 주휘잡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날 단유홍은 주휘잡에게 천하를 거머쥘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며 아부했고, 실제로 주휘잡은 그 말을 믿어 1451년에 거병했다. 그는 현무(玄武)로 개원하고, 제7대 대종 경태제와 대립하는 독자적인 황제로 즉위했다.
주휘잡은 단유홍 등을 보내 묘족을 지휘하도록 하여 경태제의 북경 정권을 공격하게 했으나 묘족의 수장이었던 양문백(楊文伯)이 이를 꺼렸고, 1451년 10월 단유홍이 주휘잡의 이복형인 민왕 주휘유(朱徽煣)에게 생포당하자 주휘잡의 계획이 탄로나게 되었다. 경태제는 이 사실을 알고, 군대를 보내 주휘잡의 왕작을 삭탈했으며 그를 높은 담장 안에 연금시켰다.
이후 주휘잡은 복권받지 못한 채, 봉양(鳳陽)으로 보내져 조상의 황릉(皇陵)을 지키는 일을 맡았으며 1458년 탈문의 변을 통해 이복동생인 경태제를 축출하고, 복위한 영종 천순제( 정통제)의 자비로 주휘잡의 자녀들은 혼인권을 보장받았다. 제9대 효종 홍치제의 치세때, 특별사면령이 내려졌는데, 이때 주휘잡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므로 그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