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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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何澄생몰연도 미상
동진의 인물. 자는 계현(季玄). 양주 여강군(廬江郡) 잠현(灊縣) 출신. 안풍태수 하예(何睿)의 손자. 하준의 아들. 목장황후 하법예의 남자 형제.[1]
2. 생애
하징은 초기에 비서랑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지나치게 불교를 신봉하던 아버지 하준이 재산을 절에 모두 공양하는 바람에 가난하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후 비서승으로 옮겨져, 청렴, 정직하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어 누차 승진해 비서감, 태상, 중호군을 역임하였다. 효무제 사마요가 즉위하자, 하징은 황제로부터 특별히 총애를 받아 관군장군, 오국내사에까지 올랐다.태원 17년(392년) 11월, 효무제 사마요가 아들 사마덕문을 낭야왕으로 삼고 외지로 내보냈다. 이때 하징은 낭야왕의 스승으로 선발되어 따라나섰고, 얼마 뒤에 상서, 영 낭야왕사(領瑯邪王師)에 임명되었다.
융안 4년(400년) 6월, 조정에서 하징을 상서좌복야로 삼고 낭야왕사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하징은 다리에 병이 났다는 이유로 굳게 사양하자, 조정에서 특별히 편의를 봐주어 집에서 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이후 영 본군대중정에 임명되었는데, 환현이 정권을 잡는 것을 보고 조정에 상주하여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사망하였다.
원흥 3년(404년) 5월, 유유가 거병하여 환현의 무리를 제거한 뒤, 환현이 폐위시켰던 안제 사마덕종을 복위시켰다. 안제는 하징을 금자광록대부로 추증해주었다.
하징의 장남 하적(何籍)은 요절하였고, 차남 하융(何融)은 공제 사마덕문 재위기에 대사농에 지냈다.
[1]
하징이 삼남이라는 점에서 동생일 가능성이 크지만 하징의 생몰년을 몰라 확정 지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