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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0:06:51

쇄국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전근대
2.1.1.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정책2.1.2. 중국의 폐관 정책2.1.3. 일본의 쇄국 정책
2.1.3.1.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차별성?
2.2. 근현대
2.2.1.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쇄국 정책2.2.2. 북한의 쇄국 정책2.2.3. 중국의 쇄국 정책2.2.4. 근현대 대한민국의 쇄국 정책2.2.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과의 비교

1. 개요

쇄국([1])은 국경을 폐쇄하여 타국과의 통상 및 교역을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은 사사로운 수출입과 도항(渡港)을 금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2. 역사

2.1. 전근대

현대적인 사회에서는 생활에 필수적인 생산품을 충족함에 더 나아가 특정 생산품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면서 다른 부족한 요소는 다른 사회에서 받는 것으로 해결하는 생산력을 극대화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무역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교한 구조가 불가능하다. 애초에 배를 타고 원양항해를 하는 것이 매우 위험했고 도로도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교한 유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인 국가에서는 무역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전근대 사회의 산업과 관련된다. 전술했다시피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전문적인 생산 시스템과 유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급자족적인 생산이 기본이었다. 자급자족 사회는 모든 생산과 소비가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폐쇄적이고 전문적인 생산인력이 없으면 유출되기에 충분한 생산분의 확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역을 함은 내부에서 소비해야 할 부가 유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의식주가 내부에서 충족되는 자급자족 사회에서 외부로부터 받을 만한 것은 사치품이나 원료, 특산품 정도인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A라는 자급자족 사회에서 100명이 120인분을 생산하고 20인분의 잉여 생산분을 수출하여 40인분의 가치를 얻었다 가정했을 때 전체적으로는 140인분의 가치를 얻었다고 볼 수 있지만 설령 20인분만이 팔렸다고 할지라도 100인분은 필수분이며 잉여생산분을 외부에 팔 수 없고 40인분의 가치는 사회 내에서 교환을 할 수 없어 욕구 충족을 위한 사치품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 대항해시대를 열었다는 후추를 생각해 보자.

더욱이 공무역(즉 조공무역등의 국가무역)이 아닌 사무역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사무역이 계산기마냥 20인분만 딱딱 팔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팔려고 99인분의 생산분만 가지는 순간 생산품의 가치는 1명분의 목숨값만큼 오를 것이다. 즉, 사무역의 통제 불가는 물가가 요동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헤이안 시대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국가에서 목숨 걸고 견당사를 보내면서 당나라와 교류했는데 근래 들어 당나라 상인들이 사적으로 교역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 물가가 요동치니 사무역을 드디어 통제한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멀리 갈 것 없이 근대를 보더라도 아편전쟁이 있는데 영국은 고작해야 자급자족하는 농본주의 사회인 청나라에 딱히 팔 상품이 없었고 엄청난 무역적자에 영국이 보유한 은이 빨려나가자 마약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례가 존재한다.

국가가 사무역을 통제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다. 위의 예와 같이 120인분으로 140인분의 가치를 낼 수 있듯 무역은 부를 가져오지만 여기에는 중앙정부와 국가 외의 세력이 경제력, 즉 힘을 가진다는 문제가 있다. 해상왕이라고 불리는 장보고 등 대외 무역이 가장 활발하여 중동과도 교역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신라 시대 말기, 안사의 난 이후 재정 확보를 위해 사무역이 발전한 당나라, 그 당나라와 사무역이 활발했던 헤이안 시대, 그리고 유럽과 교류했던 전국시대 다이묘들 등의 예를 보면 모두 율령시스템이 혼란해지고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지방 세력이 힘을 기르기 시작했던 시기와 매우 의미심장하게 일치한다. 특히 에도 시대 일본이 쇄국정책을 통해 날뛰던 지방 다이묘들의 개인적인 무역을 금지하고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 막부만이 직접 교역하도록 허락한 것은 종교적 이유보다는 바로 다이묘들의 재정을 통제하려고 한 목적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서양의 대항해시대와 유목민들은 상업이 활발했는데 여기에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 사무역을 통제하는 것이 힘들었고 지리적 여건으로 생산이 부족하여 자본으로 때워야 했다는 배경 등이 있다.[2] 송나라도 무역이 활발했다고는 하지만 무역 장려의 원인은 북송 초기나 남송시대의 혼란에 의한 재정 악화에 있으며 금전에 직결되는 구리 등의 자원 수출을 통제하는 등 여러모로 무역을 통제하고자 했다.

2.1.1.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정책

한국사에서 쇄국 정책이라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가리킨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전까지 시행되었다. 흔히 흥선대원군을 쇄국 정책의 대명사로 알지만 흥선 대원군 집권기 이전인 철종, 헌종, 순조, 정조 재위기에도 서양의 함선은 간헐적으로 접근해 왔다. 가령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 21년(1797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지금의 부산 남구 용당동)에 닿은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 이미 18세기 말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조선 정부는 일관적으로 통상 수교를 거부해 왔다. 쇄국이란 단어 자체는 1800년대 일본의 난학자인 시즈키 다다오가 만든 단어로서 당시 조선에는 쇄국이란 용어는 없었다. 교과서에서는 이에 따라 쇄국 대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조선 왕조가 대외 무역을 억압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당시 각국의 무역 현황과 비교해 보면 매우 폐쇄적인 태도를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세계 안에서 비교해 보면 일본의 해외 출국한 국민의 재입국 금지, 포르투갈 상인 추방과 중국의 공행 무역의 폐쇄성을 비교해 보면 조선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편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폐쇄적으로 흘러간 원인부터 찾자면 신라부터 고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와 교류가 꾸준히 있었는데 이 나라들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중국이 당시 개방적인 성향의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였던 덕분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남중국에 상주하고 바다를 넘는 데 제도적 제약이 적으며 육로로도 색목인 상인단이 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며 한반도 지역도 원거리 국가들과의 교류가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는 초기 정화의 원정 이후로 폐쇄적인 농업사회로의 회귀를 지향했고 조선도 거기에 따랐으며 국교가 제한적이라 이에 따라 무역도 그랬을 뿐이다. 일부러 정책으로 억압할 필요도 별달리 없는데 국내 시장과 상공업이 극히 제한적으로 발달한 나라가 활발한 대외 무역이 가능할 리가 없다. 조선 시대는 청백리로 대표되는 사치를 멀리하고 검약을 강조한 시대였기 때문에 신라, 고려 때처럼 귀족층의 해외 사치품 수요가 많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대외 무역은 더욱 줄었다.[3]그러나 청나라와 일본과의 민간교류 양은 한국사의 어느 시대보다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대외 무역을 크게 억압하지 않았을 뿐이지 굳이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겨우겨우 찾아온 이양선(異樣船)[4]은 여러가지 핑계로 돌려보냈다. 흥선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대명사 정도로 잘못 알려졌어도 이러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길게는 정조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 때도 이양선이 오면 더 알아보려고 하기보다는 되돌리는데 신경썼다. 네덜란드 상선 드 혼드 호가 우연히 조선에 정박했을 때는 지방 변장들이 36명의 군졸들을 데리고 무력 진압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정조 시절에도 이양선의 출현에 무력 진압을 시도하다가 이양선 선원들의 반격으로 군졸들이 놀라 달아나는 바람에 처참하게 깨지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말 이전에 조선에 다다른 이양선들은 보통 본국이나 중국,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에 밀려 조선에 우연히 온 경우가 많아 조선과의 무역보다는 귀환에 더 관심이 많았다. 쿠로시오 해류가 직통으로 닿는 일본과 동남아시아 연안만 따라가도 닿는 중국과 달리 한반도는 쿠로시오 해류 거의 다다르지 않고, 한반도가 있는 위치 문제로 다가가기 힘들다보니 관심이 떨어지기도 했다.

순조, 헌종, 철종 대에도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했지만 교역할 생각 없다고 뻗댔다. 대원군이 전쟁 불사까지 외치면서 강경하게 나간 것도 있지만 대원군 시절의 대표적인 이양선인 제너럴 셔먼호는 다른 이양선들이 가라고 하면 순순히 따랐던 데에 비해서 조선 군관을 억류하는 등 행패를 부리고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며 어그로를 팍팍 끌어서 제 명을 재촉한 격이다. 거기에 자극받은 서양이 줄줄이 개입하면서 일이 커졌고 결국 그것 때문에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1871년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서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가속화했다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으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끝났다.

그러나 1880년대의 세계는 이미 조선이 자리잡기에는 너무나도 크게 변해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은 보신 전쟁 시기에 국제정세가 일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엄청난 행운이 따라주면서 영국식 제도와 독일식 법전을 갖춘 근대 제국을 형성해 국제적으로 외교적 입지에 올랐으며 이미 이와테현 가마이시시를 시작으로 제철소가 가동에 들어가 중화학 공업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다.[5] 중국은 아직 청나라 봉건 왕조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광활한 영토와 생산력을 가졌으며 아편전쟁 이후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빠른 속도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1881년에 허베이성 탕산시에 중국 최초의 철도가 깔렸으며 주요 대도시(베이징, 난징, 시안, 청두 등)에 전신선이 가설되고 있었다.

2.1.2. 중국의 폐관 정책



본래 중국은 당, 송, 원을 거쳐 명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정화가 멀리 아프리카까지 항해하고 올 정도로 해외 진출에 상당히 적극적인 나라였지만 정화의 해외 원정 이후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인들이 해외로 가는 걸 엄금하고 제한적인 조공 무역만 받아들일 뿐이었다.

명나라의 이러한 기조는 청나라 때도 유지되었다. 왜냐하면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 한족들이 계속해서 반청복명 운동을 벌였고 정성공 같은 경우는 아예 대만 식민지로 다스리고 있던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그곳을 기지 삼아 명나라 부흥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정성공 세력이 진압되자 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청나라는 명나라의 해금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서양과의 교역도 오로지 조공을 목적으로 했을 경우에만, 그것도 오직 광저우 한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6] 이를 현대 중국에선 폐관 정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청나라의 교역 방침은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바로 역사상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아편전쟁이다.

2.1.3. 일본의 쇄국 정책

전국시대의 일본은 중앙 정부가 유명무실하고 규제가 없다 보니 지방 세력들이 개별적으로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하고 일본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해서 니혼마치(日本町)라 불리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동남아시아 곳곳에 생겼을 정도로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는 에스파냐의 침공으로부터 태국을 방어한 공로로 시암 공주와 결혼하고 송탐(ทรงธรรม) 국왕으로부터 태국에 자신의 영지를 받아 일본인 거주지의 영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덴쇼 소년사절단은 유럽인들에게 일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했는데 이들은 펠리페 2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만나고 왔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은 통일되었고 일본 전국을 통제할 능력이 있는 막부는 외세와의 교류를 꺼렸다. 무역으로 부를 쌓고 신무기를 손에 넣은 각지의 지방 영주들이 막부에 대항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괜한 우려가 아니었는데 실제로 다테 마사무네 같은 이들은 스페인 세력을 끌어들여 에도 막부를 뒤엎기 위해 사절단을 유럽에 보내기까지 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그 사절단의 대표이며 그는 유럽에서 교황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오늘날에야 이를 두고 당대 일본의 국제성이라며 홍보하지만 실상 당대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 중앙정부인 에도 막부의 시각에서 보면 마사무네의 행동은 자칫 스페인 식민제국의 침략을 불러올 수 있던 이적행위였다. 실제로 막부는 다테가가 유럽에 사신단을 보낸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심각한 안보 문제로 보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대 일본은 서아프리카 부족 국가들만큼은 아니어도 유럽의 주요 노예 공급처 중 하나였다. 규슈의 다이묘, 특히 가톨릭 신도였던 다이묘들은 상대 번국과 전쟁을 벌여 얻은 포로들을 서양 상인들에게 팔아치우고 그 대가로 조총 화약을 사 왔고 이는 다시 일본 국내의 전란을 격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지방 다이묘들에 의해 일본인 노예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자 말 그대로 격노하여 유럽인 추방령을 선포한다. 일국의 위정자로써 이는 당연한 조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대표적인 공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에도 막부도 쇄국 정책을 이어받아 유럽인들을 내쫒고 일본인들의 도해를 금지한 뒤 일본 국내에 남아 있는 가톨릭 공동체들은 시마바라의 난을 통해 분쇄해 버렸다. 본격적인 쇄국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등과 차례차례 관계가 끊어지면서 종국에는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국교가 끊어졌다. 그 네덜란드마저도 '기독교인(기리시탄)'이라는 이유로 초기에는 관계가 험악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설명하고 데지마를 나가지 않을 것과 선교 금지를 약속한 후 막부의 군사 정책의 협조하는 번거로운 조건들을 전부 통과한 후에야 일본과의 제한적인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용 창구 데지마 조선 통신사, 속국화한 류큐 왕국[7], 아이누용 창구인 홋카이도 남부의 마츠마에번 같은 예외적인 몇몇 사례를 뺀 모든 해외 교역을 중단했지만 막부 말 흑선을 비롯한 열강의 출현과 빠른 굴복으로 조선보다 20여년 가량 이른 시기에 개항하였으며 이후 막말의 내전 과정에서 신식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 결과적으로는 그레이트 게임, 남북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서양 열강이 일본 내전에 개입할 여력이 전혀 없었고 그 사이에 보신전쟁에서 개화파가 승리해 메이지 유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에는 아시아의 신흥 열강으로 성장했다.
2.1.3.1.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차별성?
전근대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무역량이 축소되고 국가의 엄격한 규제가 추가되었을 뿐 교류 자체는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다만 에도 막부의 무역은 당대 청나라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청나라 수도 베이징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비롯해 다수의 유럽인들이 활동했고[8] 개항장인 광둥성을 중심으로 한 무역은 데지마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활발했다.[9]

특히 에도 시대는 난학(蘭学)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학문이 유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1776년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소개된 에레키테르(エレキテル)를 이용한 전기 실험에서부터 수소, 산소 등 유럽의 각종 화학적 지식이 수입되기도 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사회적 주류 학문은 유학이었다. 난학에 대해서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아 심심찮게 모진 탄압이 가해진 바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쇄국이란 말을 지양하고 있으며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기존에 있던 쇄국이란 단어가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퍼진 탓에 이 둘을 절충한 '쇄국 등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청나라, 네덜란드와 교역하였으며 대마도로는 조선, 사쓰마로는 류큐 왕국[10], 마츠마에로는 에조와 무역을 했다. 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이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끊겼을 뿐이지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은 유지되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규모는 축소되었을지언정 무역 자체는 계속되었다. 당장 이웃한 동아시아의 청나라, 조선과의 교류는 오히려 도쿠가와 정권이 나서서 임진왜란의 책임도 어느정도 청산은 하고 당당하게 나가사키 부교, 조선통신사라는 공식 제도를 통해 정권 차원에서 공식 교류하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안정적이고 늘었다는 시각도 있다.

와타나베 히로시가 대표적으로 에도 시기 이베리아발 서양과의 해상무역을 통한 접촉은 전국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비해 줄었지만 반대로 조선, 청과의 교류는 더 깊어졌기 때문에 에도 시대의 '쇄국'은 성리학적 농경사회를 공식적인 관의 이데올로기로 밀어주며 현실보다 더 정적인 사회상을 연출하려고 했던 막부와 탈아입구적인 결과론적 관점에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같은 서양세력과의 교류에 더 주목하는 후대인들의 시각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다.

2.2. 근현대

2.2.1.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쇄국 정책

알바니아는 특이하게도 유럽 국가 중에서 근현대까지 쇄국을 고집하였다. 이는 알바니아 인민공화국 시기에 무려 41년이나 장기집권한 독재자 엔베르 호자 때문인데 호자 시기의 알바니아는 북한보다도 더한 폐쇄적인 국가였다. 실제로 호자 시기 알바니아에서는 공무원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의 해외 출국이 금지되었으며 해외에 출국한 공무원이 알바니아에 돌아오지 않으면 운이 좋아야 징역 10년, 최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극히 일부의 외국인들만 알바니아에 입국하도록 허락한 후 외국인들도 에스코트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호자가 얼마나 폐쇄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는지 알바니아에는 이렇다 할 항공사도 없었던 데다[11] 알바니아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히던 1980년대에도 알바니아인의 대다수는 알바니아를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국가'로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알바니아는 원래 같은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와 친하게 지냈다가 티토와 스탈린이 결별하자 엔베르 호자가 티토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이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고 스탈린 격하 운동을 펼치고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면서 헝가리를 침략하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하는 바람에 동유럽 공산 국가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자 중국과 사실상 연을 끊고[12] 아예 포기했는지 알바니아는 세계 유일의 정통 원조 사회주의 국가라고 선언하였다. 심지어 같은 쇄국 정책을 펼치던 북한마저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해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외톨이가 되었다.

덕분에 냉전 기간 동안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고 쇄국 정책의 후유증으로 알바니아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 채로 1990년대에 체제 전환을 겪어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물론 현재는 선거 등에서 부정부패 의혹이 끊이질 않지만 과거의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개방하였으며 꾸준히 경제가 성장하고 금융사기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불안정하던 치안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크라이나, 코소보, 몰도바에 버금가는 유럽에서 빈곤한 국가로 손꼽힌다.

다만 개방 이후 오히려 더 추락하고 제1세계 제2세계에 잠식당한 경제와 명예살인과 같은 각종 악습이 부활하는 등의 이유로 이를 고평가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2.2.2. 북한의 쇄국 정책

2024년 현재 북한 에리트레아와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고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로 꼽힌다. 김일성 시대부터 주체를 주창하며 중국과 소련 사이에 줄다리기를 하느라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가 원래 좋지 못했고 90년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구 동구권 국가들을 배신자로 비난하면서 구 동구권, 서방권과 사이가 사실상 모두 단절되었다.[13] 1983년 김정일이 방중했을 때 덩샤오핑이 개방, 개혁을 권유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불쾌하게 여겼는데 "중국엔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없고 있는 건 수정주의뿐"이라고 비난하였을 정도였다. 북한 정권은 개방이라는 말을 몹시 꺼리며 당 간부들도 이런 말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김일성 시기에는 지금 북한도 저리가라 할 수준으로 폐쇄적이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80년대 말까지도 북한인들은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인 줄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부터의 회복, 핵 무력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수교국만 늘었지만 진지한 관계개선은 이뤄지지 못한 채 10여년을 보냈다. 2012년 도쿄신문에 의하면 김정은은 간부들 앞에서 "개방이라는 말 사용하지 말라"고까지 당부하였다. 기사

북한이 쇄국을 그만두게/그만두도록 하는 것은 남북통일 이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제1차적 목표이기도 하다. 사실 통일이 돼야 가능하다고 알려진 북부지방 방문 등 많은 것들이 북한이 쇄국만 그만두면 그 날로 제한적으로라도 가능하게 된다.[14] 당장은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기는 시기상조라고 해도[15] 예를 들어 쇄국으로 북한에서 막혀 있던 인터넷이 풀리면 한국에서 만든 한국어 사이트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양측 국민간에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일단 정권 차원에서도 북한이 정상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돼야 좀 더 구체적이고 추가적인 논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백두혈통을 필두로 한 수뇌부는 외국 문화와 제품을 잘만 향유하고 있다. #

2.2.3. 중국의 쇄국 정책

중국, 인터넷 쇄국주의 노골화..온라인 규제 만리장성 쌓는 中…韓인터넷 기업 적신호

중국은 유튜브 구글 관련 서비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구 트위터) 등의 자국 접촉을 금지해 놓았다. 해외기업을 배척하고 자국 IT기업을 키울 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이같은 조치는 인터넷 검열을 통한 정치 사상 단속으로, 시진핑의 3선 집권 연장을 통한 독재를 강화할 목적에서 시행한 것이다.

2.2.4. 근현대 대한민국의 쇄국 정책

일본 문화 유입을 차단할 목적으로 한국에서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왜색이 짙은 부분들을 검열삭제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일부 가요들도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 이 같은 문화 검열은 일본문화 수입 개방이 된 2000년대에도 이어졌다.

1970년대 유신독재 체제가 출범했을 때는 자유분방한 미국 문화도 배척되었는제 영어 단어들이 너무 많이 적힌 T셔츠를 입은 청년이 경찰에 체포되는 일까지 있었으며 계층간 빈부격차를 핑계로 수입품 거래를 막기도 하고 컬러티비 방송을 송출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정책을 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소설, 가요를 부르고 시바스 리갈을 마시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89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이 실행되기 전까지는 공무원이나 기업인 같은 특수 직업 종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들은 해외 여행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에 나간 한국인에게 외국인이 종종 묻는 말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냐?"였다. 워낙 오랫동안 국민들이 해외로 나가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살았고 국민들이 해외로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해서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매우 뜸했으니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인지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2010년대 초반까지 서양 대중 중에는 한국이 동남아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인 국가인 줄 아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한국은 국력 대비 인지도가 심각하게 떨어지는 국가였다.

2.2.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과의 비교

2020년대 초반에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각국이 출입국 및 외국 여행 제한에 들아가면서 사실상 쇄국 체제에 들어갔는데 자세한 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국가별 대응 문서 참조. 다만 각국도 문을 닫고 싶어 닫은 건 아니라 관광 등 비필수적 인적 교류가 차단되었을 뿐 외교나 무역 분야의 교류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쇄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인터넷에선 화상으로 국경을 넘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코로나 19의 대유행이 끝난 2023년에 와서는 단계적 일상회복이 이루어져 인적 교류도 재개되면서 코로나 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 쇠사슬 쇄(鎖)를 쓴다. [2]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산이 많아 농업하기에 불충분하거나 네덜란드는 독불영 사이 한가운데 있다는 입지, 이탈리아는 십자군 전쟁 등의 배경 등 [3] 사실 그 고려도 아랍보다는 주변국과 더 많이 교류한 듯 하다.예를 들어 아라비아 상인이 고려를 방문한 건 3차례지만 송 상인은 무려 150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4] 물론 이 이양선들의 목적은 대개 강제 개항 + 불평등 조약 강요였다. 뭐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쿠로후네 사건이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만 봐도 답이 나온다. [5] 일본보다 수십년은 근대화가 빨랐던 베트남과 이집트의 운명을 생각하면 일본같이 내전 상황은 나라가 조각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신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에 그레이트 게임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의 경쟁, 서부개척시대의 개막과 남북 전쟁으로 대표되는 미국 정세는 일본에게 군사적인 영향력을 끼치기엔 무리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보신 전쟁을 외세의 개입이 약해진 시기에 내전의 규모에서 끝내고 근대화된 문명을 형성하자 열강들은 '미개한 동양인이 스스로 우리와 격을 맞췄다'는 이유로 일본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맞아줬다. [6] 예외로 포르투갈령 마카오도 있었지만 어차피 광저우 근처고 포르투갈인들의 꼼수가 묵인돼 존재했던 곳이라 따로 넘어간다. [7]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속국화한 뒤 류큐가 중국에 조공하고 하사품을 받는 형식으로 일본은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역했다. [8] 예수회 선교사들은 강희제에서 건륭제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청나라 조정 곳곳에서 관직을 맡으면서 유럽 지식을 전파했다. 육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 제국과는 몽골 일대에서 교류했다. 베이징에는 우크라이나계 코사크의 후손인 알바진인 집단도 거주했다. [9] 건륭제의 무역 축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해안 곳곳의 항구에 유럽인들이 드나들었다. 광동십삼행 한 곳으로 개항장이 축소된 후에도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미국, 스웨덴 스페인까지 6개 국가가 상관을 두고 상시 무역을 이어갔으며 인접한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인들이 머물렀다. 오스트리아 역시 잠시 무역선단을 보냈던 바 있다. [10] 이 시기의 류큐 왕국은 사실상 일본에 점령당한 상태여서 이것을 국제 무역으로 볼 수 있는가가 조금 애매하지만 류큐 왕국 명의로 중국에 조공 무역을 하면서 일본은 간접적으로 중국과 교역했다. [11] 그 북한의 고려항공(당시에는 조선민항)도 김일성 시기에는 공산권 국가는 물론이고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 쿠웨이트, 심지어 스위스까지 취항한 적이 있었던 것과 달리 알바니아의 유일한 항공사였던 Albtransport는 자체적인 항공기도 없이 알바니아 공군으로부터 임대받은 Il-14 3대만 가지고 국내선과 동구권 노선 극소수만 산발적으로 운항했을 정도였다. [12] 1976년 전에 1억 달러를 넘었던 교역량이 겨우 165달러로 떨어질 정도였다. 참고로 이는 2022년 환율로 환산해도 865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3] 북중관계는 좀 특이한데 일단 북한은 무역이 식량까지 구입할 정도로 중국에 지나치게 예속되어 있다. 반면 한국은 전 세계에 시장을 다각화해서 수출, 수입을 한다. [14] 비슷하게 이념 문제로 인한 분단국가 중국 대만, 키프로스 북키프로스도 남북한처럼 서로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결코 아니며 허가를 받아서 상대편을 여행하거나 상호 국제결혼 등 교류가 가능하다. 과거의 분단국가였던 독일, 예멘,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15] 일단은 외국을 갈 때 여권 비자가 필요하듯 통일부에서 발급하는 방문증명서를 받아야 갔다올 수 있는 허가제가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