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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17 11:44:22

진수(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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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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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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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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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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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秦秀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내용

1. 개요

서진의 관리이며 박사(博士)[1]를 지냈으며 자는 현량(玄良)으로 진랑의 아들.

2. 내용

병주 신흥군(新興郡) 운중현(雲中縣) 사람으로 진나라에서 박사를 지내면서 278년에 하증에 대해 오만하고 사치해 천하에 이름이 있었지만 만약 시호를 주는 규정을 엄격하게 따른다면 시법(諡法)에 따라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은 것이 무(繆), 품행이 방탕한 것을 추(醜)라 하므로 그에게는 무추공(繆醜公)이라는 시호를 줘야 한다고 혹평했다.

아첨하거나 참소하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해 가충을 가벼이 여겼으며, 279년에 오나라를 공격할 때 가충이 대도독이 되자, 진수는 친한 사람에게 가충은 변변한 재능도 없는 문관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자신은 출진하는 군사들을 울면서 배웅하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춘추시대 때 건숙이 아들이 전쟁나기 전에 패배할 것을 알고 울면서 배웅한 것을 말하며, 그 때와 지금은 달라서 진나라가 오나라의 국경만 도달해도 싸우지 않고도 오나라를 무너뜨릴 것이니, 지금 우는 것은 진과 오의 상황을 무시한 처사라면서 진수가 우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

손호 왕준에게 투항한 때에 가충은 오나라를 평정할 수 없다면서 증원을 요청했는데, 가충의 증원 요청과 손호의 항복 소식이 낙양으로 동시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가충은 사람들보다 위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혜는 주위 사람보다 아래라면서 모두 진수의 올바름을 인정했다.

280년에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때 왕혼이 왕준을 모함하자 표문을 올려 왕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으며, 282년에 가충이 죽으면서 그에게 무슨 시호를 줄지 논의하면서 곽괴가 억지를 부려 외손자 한밀(韓謐)을 아들 가려민(賈黎民)의 양자로 들인 일을 두고[2] (비록 가충 본인이 한 게 아니지만) 종족을 제치고 외손자를 후사로 삼음은 예법을 위반하고 개인적인 정에 빠져 윤리를 어지럽힌 일이라고 규탄하며 증(鄫)가 외손자인 거자(莒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걸 춘추에서 거나라 사람이 증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쓴 걸 제시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를 단절시켜[3] 사회를 어지렵혔으므로, 가충은 기강과 절도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시호를 황공(荒公)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되었다.

283년에 사마염 사마유를 봉국(封國)으로 돌려 보내면서 태상(太常)[4]에게 명령을 내려 사마유에게 하사할 물건을 의논하게 하자 박사 유부, 태숙광, 유돈, 무울, 곽이, 부진 등과 함께 사마유를 봉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사마염은 이들이 올린 표(表)를 보고 크게 노하여 상소문을 올린 이들을 처벌하였다. 진수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나중에 다시 복직되었다. 진수는 이처럼 강직하여 남들과 자주 충돌했다. 박사를 총 20년 동안 지냈고, 재직 중에 사망했다.


[1] 중국 고대 관직 이름. 문헌ㆍ기록 관리, 문서 편찬ㆍ작성, 학문 전수, 후학 양성 등의 일을 맡았다. [2] 일본에서야 기시 노부오의 사례를 보면 이런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런 너그러움(?)은 일본에서만 먹히고 그나마도 일본 황실에서는 안 적용된다. [3] 다시 말하지만 동아시아는 종족을 중시하고 소목을 중시하여 서양자 따위를 절대 안 인정하다. [4] 중국 고대 관직 이름. 종묘ㆍ사직의 제사, 장례, 의전 등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