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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2:06:26

펠릭스 제르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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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제3대 내무장관
펠릭스 제르진스키
Фе́ликс Дзержи́нский | Felix Dzerzhinsky
파일:Feliks_Edmundowicz_Dzierżyński_20200318_000435.jpg
본명 펠릭스 에드문도비치 제르진스키 (러시아어)
Фе́ликс Эдму́ндович Дзержи́нский[1]
Felix Edmundovich Dzerzhinsky
펠릭스 제르진스키 (폴란드어)
Feliks Dzierżyński[2]
출생 1877년 9월 11일
러시아 제국 빌냐 현 이뱌네츠
(現 벨라루스 공화국 민스크)
사망 1926년 7월 20일 (향년 4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제3대 내무장관
1919년 3월 30일 ~ 1923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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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혁명가, 정치가
종교 가톨릭 무종교 ( 무신론)
주요 서훈 적기훈장 }}}}}}}}}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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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RIAN_archive_6464_Dzerzhinsky.jpg
1918년 당시의 모습
소련의 정치가. 소련 자체 뿐만 아니라 이후 생긴 수많은 공산국가들이 운용한 공산권 비밀경찰, 정치경찰의 아버지라 봐도 무방한 인물이다.

2. 생애

벨라루스 지역 태생이며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리투아니아 김나지움[3]을 졸업하기 전 혁명에 관련했다는 이후로 퇴학당했다. 그러자 제르진스키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리투아니아 사회혁명당에 가입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사회 민주주의라는 단체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 때문에 수많은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897년 1900년 두 차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으나 제르진스키는 그곳에서 탈출하여 베를린에 도착하여 '외국인 위원회(Komitet Zagraniczny)'를 조직하여 혁명 활동을 계속했다.[4] 제정 러시아 당시의 반정부 활동가치고 후대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면 시베리아 유형 한번쯤 안 가본 사람이 없고, 거기서 탈출을 시도해서 실패한 사람도 거의 없다. 탈출해서 다시 정치활동을 하다가 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진 뒤 또 탈출해서 또다시 정치활동을 하다가 또또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지만 다시 탈출하기를 몇번씩 거듭한 인물도 흔할 정도.(예를 들어 스탈린은 7회 탈출했다.) 이는 제정 러시아 시기의 시베리아 유형 자체가 철저한 감시를 동반한 수감생활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찮은 반정부 활동가들을 정치-사회적 중심지(예를 들어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와 옛 수도이자 제2도시 모스크바)에서 보이지 않도록 당시로써는 미개척 지역이던 시베리아로 '치워'버리는 정도에 불과했고, 사실 당시 제정 러시아 정부의 행정력으로는 머나먼 시베리아의 유형를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할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형수들은 단지 시베리아의 개척도시로 보내졌을 뿐 현지에서 집과 일자리를 구해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등 유형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 (물론 혹독한 환경과 척박한 개척지의 삶을 몹시 고되었겠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치범 유형수들은 지식인 계층이 거의 이주하지 않는 시베리아 개척도시의 거의 유일한 지식인 집단으로써 나름 개척의 중추역할을 하여 일종의 시베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이런 지식인 계층 유형수들이 현지의 지식인 계층 사회를 구성하여 유형수들끼리 정치토론을 벌이거나 투쟁 방법을 교류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 역시 간단했는데, 유형수 신분증으로는 기차에 탈 수 없으니 일단 위조 신분증을 구한 뒤, 그냥 마을을 빠져나가 가까운 기차역등으로 가서 교통수단을 이용해 원하는 곳으로 가면 끝나는 일이었다. 물론 명목상 감시를 위한 경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도시나 마을 하나를 경관 몇명이 감시하는 수준이라 길가다 벼락맞을 정도로 운이 나쁘지 않은 한 감시인과 맞부딪히지 않고 그냥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었던 것. 물론 종종 감시가 삼엄해지는 상황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탈출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표트르 크로포트킨 처럼 명망높은 인물은 이 인물의 탈출을 기꺼이 도우려는 지지자들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었고, 이들이 미리 탈출로의 길모퉁이마다 한명씩 서 있으면서 크로포트킨이 다가갈때마다 "경찰은 저쪽으로 갔소" 라고 알려준 덕분에 경찰의 추적을 쉽게 따돌리고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거나, 레프 트로츠키처럼 머리 좋은 인물은 아예 처음 유형지로 끌려갈때부터 부츠에 위조 여권과 금화를 숨겨가는 것으로 시간낭비 없이 도착 직후 주변 상황이 좋아지자마자 탈출할 준비를 해 두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이런 탈출에 실패한 인물을 굳이 찾아보자면 네차예프 정도인데, 이 인물은 간수를 두들겨 패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 요새의 감방에 갇혀있느라 탈출하지 못한 경우였다. 이랬던 시베리아 유형이 살아서는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엄중한 수감생활이 된 것은 바로 제르진스키 자신을 비롯한 인물들이 철저한 행정력에 기반한 감시체계를 구축한 소련 성립 이후의 일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스위스에서 요양 중이던 약혼자가 결국 사망하는 바람에 잠시 활동을 중단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가 1905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다시 탈출에 성공. 이후 당을 재건하는데 주력하면서 러시아 제국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었다.

1910년에는 당원이었던 조피아 무스카트[5]와 결혼하나 이번에는 부인이 체포되었다. 조피아는 시베리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제르진스키는 조피아가 옥중에서 출산한 아이를 데리고 도피 생활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의 제르진스키는 각종 계략을 체득하여 경찰들의 추적을 회피하는 데에도 도가 터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1912년에 다시 체포되었다.

2월 혁명으로 석방된 제르진스키는 폴란드 혁명을 구상하다가 볼셰비키에 감화되어 여기에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제르진스키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4월 테제를 크게 지지했고, 10월 혁명 때는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레닌은 제르진스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반혁명세력 척결을 위한 방법을 구상케 했는데, 제르진스키는 '반혁명 사보타지 분쇄를 위한 전러시아 위원회(Всероссийск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комиссия по борьбе с контрреволюцией и саботажем), 줄여서 체카(ЧК)라는 기구로 이에 화답하였다. 이 체카는 몇 번의 재정비를 거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데, 그 이름은 다름아닌 KGB. 제르진스키는 스스로 체카의 총수가 되어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을 박멸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6] 러시아 내전 때에는 체카가 자체적인 병력을 소유하는 등 갈수록 제르진스키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반혁명세력으로 의심되는 인사를 미리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한 적색 테러는 유명한데, 하룻밤 사이에 1500명을 사살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강도가 엄청났다.[7]

이후 제르진스키는 내무인민위원장, 통신인민위원회 인민위원, 국가경제최고회의장 등의 고위 직책을 맡으며 세력을 불려 나갔다.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잡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에 초연하고 혁명에만 분투하는 제르진스키의 모습 때문이었다. 제르진스키는 오직 혁명 성공을 위해서만 일했기 때문에 당시 볼셰비키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사실 제르진스키는 공안기관과 자체병력(소련 내무군의 전신이 되는 수십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을 거느렸기 때문에 레닌 사후 권력투쟁에 끼어들만한 발판은 갖추고 있었으나,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는 달리 전혀 권력투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반혁명세력 처단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러시아 내 혁명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작 폴란드 공산당에 대해서는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8]
파일: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장례식.jpg
제르진스키의 관을 운구 중인 소련 공산당원들[9]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 내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을 지지했다. 1926년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에서 제르진스키는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연설을 했는데, 주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항하는 '통합반대파'의 인물들, 즉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연설 도중 제르진스키는 굉장히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결국 연설 직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10] 스탈린 왈, 제르진스키는 프롤레타리아의 충실한 기사였다.[11]

소련은 제르진스키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현 벨라루스 민스크 근처에 있던 폴란드인 거주 구역을 제르진스카야로, 그 중심지를 제르진스크로 명명했다. 참고로 이 구역은 대숙청 기간에 해산되었으며 관련 행정관들은 모조리 처형되었다.[12]

제르진스키가 만든 체카의 후신인 KGB에서는 당연히 제르진스키를 드높이는 데에 앞장섰다. KGB 본부 앞 루뱐카 광장 중앙에는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세워져 '철의 펠릭스'라고 불리기도 했다.[13] 제르진스키의 출신지인 당시 폴란드 인민 공화국 측에서도 제르진스키를 기리며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가 생겨났으며 동상도 세워졌다.

그러나 소련 정부 붕괴 이후 제르진스키는 처절한 보복을 당한다. 루뱐카 광장에 있던 철의 펠릭스는 러시아인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철거당했다. 2002년 모스크바 시장 유리 루즈코프가 이를 복원하려다가 엄청난 반대에 못 이겨 철회한 적도 있다. 하긴 소련 시절 공포 정치의 중심이었던 KGB를 만든 인물이나 다름없으니 치가 떨릴 만도 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다시 세워졌으며, 공산당 후보로 두 번이나 나선 니콜라이 하리토노프 또한 루비얀카 앞에 제르진스키의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서서히 재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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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1] 드제르진스키'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дз'(d͡z)나 'з'나 한국어 발음으로는 /ㅈ/이므로 '제르진스키'가 옳다. 심지어 성인 제르진스키가 해당 규정의 예시로 나와있다. [2] 발음은 '지에르진스키'에 가깝다. [3] 훗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군을 지휘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장군과 동창이다. [4] 탈출 자체는 아주 쉬웠다. 자연환경 자체가 혹독해서인지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 않았기 때문. 그런데 시베리아에서 유럽까지 건너오는 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다. 시베리아 최서단 지역과 당시 러시아 제국 서쪽 국경간의 거리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700km에 달했으며, 베를린까지의 거리는 3,500km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마 실제로는 이것보다도 먼 거리를 주파했을 것이다. 탈출이 아니라 대장정 [5] 이미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6] 당시 소련 밖으로 망명한 차르 지지세력과 소련 안에 남아서 공산정권의 눈치를 보는 구 세력 양쪽에서 공산정권을 뒤엎고 옛 차르 시절로 되돌아가려는 모의가 있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는데 제르진스키는 '트러스트 작전'이라는 희대의 역공작으로 이를 분쇄했다. 체카에서 가짜 저항조직을 만들어서 진짜 저항조직인양 행세시킨것인데, 가짜 성직자가 있는 지하성당까지 만들어 국내외의 반체제세력을 완벽하게 낚았고, 서방 정보기관조차도 완벽하게 속아넘어갔을 정도였다. 이 작전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로 눈치를 채고나서야 끝났는데, 나중에 적으로 돌아섰기는 햇지만, 젊은 시절에는 제르진스키와 알고지냈던 사이였고, 레닌과도 연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7] 당시 사형수들의 비명소리와 총소리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자동차 시동을 켜놓고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8] 나중에 폴란드 공산당은 친소 성향 때문에 대다수의 폴란드인들에게서 분노를 샀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폴란드 동부의 소수민족들에게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다가 1938년에는 반폴란드 감정이 있던 스탈린에게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아 지도부와 당원들이 대량학살당한 다음 스탈린이 직접 명령을 내려 해체했다. [9] 왼쪽부터 알렉세이 리코프, 겐리흐 야고다, 미하일 칼리닌,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톰스키, 니콜라이 부하린, 칼리닌 뒤의 흰 옷을 입은 자들은 레프 트로츠키, 레프 카메네프 [10] 그리고 그 이후의 후계자들이 라브렌티 베리야까지 자연사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후임인 뱌체슬라프 멘진스키는 자연사했고, 멘진스키의 후임인 야고다, 예조프, 베리야가 제명에 못살고 갔다. [11] 참고로 스탈린과 제르진스키 간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스탈린이 소련 내 그루지야의 반대파들을 칼로 위협하며 강제적 소비에트화에 관한 논쟁을 벌이다가 찬성파였던 스탈린이 측근인 세르고 오르조니키제(Sergo Ordzhonikidze)와 함께 반대파의 일원인 아카키 카바히제(Akaki Kabakhidze)를 폭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한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진상조사 명령을 받아 현장에 파견된게 제르진스키였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나중에 오르조니키제는 1937년 2월 자살하는데 이게 정말로 자살인지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2] 제르진스키의 이름을 딴 도시가 여럿 있었다.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에 있는 제르진스크,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에 있는 드네프로제르진스크. 마지막은 앞서 언급한 벨라루스의 제르진스크(지금은 스토프치 주 소속)이다. 그러나 소련붕괴 이후의 탈공산화의 영향으로 벨라루스의 제르진스크는 원래 이름이었던 코이다나바,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제르진스크는 현재 카미얀스케로 불리고 있다. [13] 루뱐카 역 문서 참조. [14] 폴란드 국내군은 애초에 나치 독일 못지않게 소련도 증오했던 망명정부 계열 레지스탕스였고, 좌익 계열 폴란드 인민군은 이미 41-42년 다 소련쪽으로 탈출하여 소련군과 같이 진주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독일 점령지 내부 세력이라 보기도 힘들었다. [15] 폴란드어, 러시아어, 이디시어, 라틴어. [16] 1917년 4월 당대회에서 레닌이 제르진스키를 비난한 적이 있다. [17] "대도시의 치킨"(Курица города большого, Kurica Goroda Bolshogo)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인터넷상에서 돌아다녔던 KFC 로고를 KGB로 패러디한 것의 영향을 받은것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18] 누구보다 공산주의 정권에 열정적이었던 그의 위상이, 자본주의 그 자체인 패스트푸드 프렌차이즈에 쓰이고 있단 것이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