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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20:50:33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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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시대
2.1. 제1회2.2. 제2회2.3. 제3회2.4. 제4회2.5. 제5회2.6. 제6회2.7. 제7회 ~ 제8회2.8. 제9회2.9. 제10회2.10. 제11회2.11. 제12회 ~ 제14회2.12. 제15회2.13. 제16회2.14. 제17회 ~ 제18회2.15. 제19회 ~ 제20회2.16. 제21회 ~ 제23회2.17. 제24회 ~ 제25회2.18. 제26회 ~ 제28회2.19. 제29회 ~ 제30회2.20. 제31회 ~ 제32회2.21. 제33회 ~ 제34회2.22. 제35회 ~ 제36회2.23. 제37회 ~ 제38회2.24. 제39회 ~ 제40회
3. 조선시대
3.1. 제41회 ~ 제42회3.2. 제43회 ~ 제44회3.3. 제45회 ~ 제46회3.4. 제47회 ~ 제48회3.5. 제49회 ~ 제50회(마지막회)
4. 여러 회에 걸친 비교

1. 개요

KBS 대하사극 《 정도전》의 극중 전개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의 비교를 정리한 문서.

2. 고려시대

2.1. 제1회

2.2. 제2회

2.3. 제3회

2.4. 제4회

2.5. 제5회

2.6. 제6회

2.7. 제7회 ~ 제8회

2.8. 제9회

2.9. 제10회

2.10. 제11회

2.11. 제12회 ~ 제14회

2.12. 제15회

2.13. 제16회

2.14. 제17회 ~ 제18회

2.15. 제19회 ~ 제20회

2.16. 제21회 ~ 제23회

2.17. 제24회 ~ 제25회

2.18. 제26회 ~ 제28회

2.19. 제29회 ~ 제30회

2.20. 제31회 ~ 제32회

2.21. 제33회 ~ 제34회

2.22. 제35회 ~ 제36회

2.23. 제37회 ~ 제38회

2.24. 제39회 ~ 제40회


3. 조선시대

3.1. 제41회 ~ 제42회

3.2. 제43회 ~ 제44회

3.3. 제45회 ~ 제46회

3.4. 제47회 ~ 제48회

3.5. 제49회 ~ 제50회(마지막회)

4. 여러 회에 걸친 비교


[1] 우현보 집안 사람들이 자신의 혈통 중 노비의 핏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고신을 늦게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개국 당시 더 철저하게 박살을 내서 정몽주등과 가까웠던 우현보의 아들 셋을 죽였다고. [2] 장남인 이방우(진안대군)의 부인. 지윤의 또다른 딸은 정종의 후궁(성빈 지씨, 숙의 지씨)으로 들어간다. [3] 이인임이 최만생의 불안을 듣고 홍륜을 제거할 것이란 것을 알아채고 은밀히 수하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을 지시하는 모습이 있다. [4] 최만생이 환관인데도 수염이 나 있는데, 무인시대에서도 의종의 직속 환관인 왕광취와 명종의 직속인 조 환관은 수염이 나 있었다. KBS에서는 고려시대의 환관을 국왕의 근신인 내시와는 별개로 구분하고 고자도 아니었다고 설정한 반면, MBC에서는 고려 말에는 환관이 고자였음을 상정하고 배역을 정했다. 신돈에서 환관인 박불화와 안도치는 수염이 없었다. 사실 거세한 환관을 두는 제도는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으로 도입된 것이라서 MBC의 묘사가 정확한 듯. [5] 사실 그때는 북원이나 고려나 빈사 상태라 힘을 합쳐봐야 소용도 없었다. 위화도회군 당시 고려군 총 병력이 5만에 불과했으니 한마디로 북원과의 동맹은 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인임의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 신진사대부들이 괜히 선왕인 공민왕이 세운 친명 정책 뒤엎고 나라 말아 먹으려고 작정했느냐면서 깐 게 아니다. 당시 북원과의 통교를 반대한 정몽주의 상소 [6]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다고 돼 있었는데 명칭 자체는 중국의 춘추시대에 이미 있었다. 하위 지배 계급인 사(士)와 그보다는 높은 계급인 대부(大夫)를 함께 일컬은 것. [7] 다만 최근에는 이런 접근법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기존에 고려 말~조선 초의 신진사대부라고 부른 계층이나 권문세족은 서로 통혼을 하기도 했고 실제론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 권문세족이라는 용어는 당대에 지배층 내에서 강한 권세를 가진 측을 비난하기 위해 딱지를 붙인 수준이다. 게다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반대파로 몰려 권력에서 배제된 가문의 대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복귀하기도 했고. [8] 사실 '심양왕'이라는 칭호는 초창기에 잠깐 쓰였을 뿐이고 이후엔 '심왕'으로 승급되었다( 심양왕 문서 참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심양왕이 아니라 심왕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9] 한시에서 자주 보이며,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종종 나오는 國人이라는 말도 '나라 사람들' 이 아니라 '수도 사람들'. 더 나아가 중앙 귀족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10] 여기서는 父의 음이 보가 맞다. 비유적으로든 아니든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 아닌 남자를 지칭할 때는 보로 읽는다. 答田夫로 기록하고 있는 곳이 있으나 원문은 答田父. 전보는 밭 가는 노인네라는 뜻. [11]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12] 해배되는대신 도성에서 살 수는 없는것. [13] 사실 이 일화는 황산대첩 일화는 아니지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긴 하다. [14] 사실 위화도 회군 당시 인질로 억류당할 것 같자 일가친척들을 데리고 함흥으로 피신하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 바로 이방원이었고 공양왕 4년 이성계가 황해도에서 머무르다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정 내에서 반이성계파가 득세하게 되고 정몽주가 이 기회를 타고 정도전 등 친이성계파를 유배보내자 바로 황해도로 내려가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오기도 하는 등 조선개국에서 이방원의 공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15] 뒷날 태종이 된 이방원은 장인의 집에 찾아가 술자리를 열었는데 술에 취해서 "오늘은 장인어른을 옛날처럼 사부님이라고 부르고 싶으니, 장인어른께서도 저를 이 선달이라고 불러 주십시오"라고 제안하여 그대로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6] 삼국지연의에서의 방통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17] 안변책이니 안변지책(安邊之策)이니 하는 건 훗날 붙여졌고, 당시엔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으로만 일컬어졌던 그 상소의 주된 내용은 '평시에도 백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갑작스런 외인들의 침공에 대비케 해주고, 관할 지역에서 거둔 세금으로 군량을 자급할 수 있게 해줄 것, 세 가구를 일호(一戶), 백호를 일통(一統)으로 삼아 장수의 군영에 속하게 해줄 것, 권문세족 출신 수령과 장수들은 가렴주구가 심하니 청렴한 자를 선발해 보내 줄 것'등이었다. 이 계책이 조정의 재가를 받은 이후 동북면은 군사권과 행정권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18] 게다가 정황상 당시 건원칭제를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고려의 요동 공격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도 결국 고려는 명나라와 협상을 해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을 것이다. 고려가 용케 요동을 점령하고 명나라와 교섭이 시작됐다고 전제해 보자. 그때 명나라가 만약 건원칭제 사실을 알면 고려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을 것이다. 명나라가 건원칭제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면 고려는 건원칭제를 지켜내는 대가로 다른 걸 포기해야 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때 가서 건원칭제를 취소하면 국내적으로 우왕의 권위가 실추되는 등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니 딜레마에 빠진다. 우왕과 최영이 당시 성급하긴 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생각 못 했을까? 이런 정황 때문에 건원칭제가 요동 정벌 직전에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추진됐을지 매우 미심쩍다. 그리고 고려가 외왕내제를 하던 시절에도 독자 연호는 거의 쓰지 못했고 요나라 금나라의 연호를 쓴 경우가 많은데, 우왕 때 황제 칭호를 쓰는 것(칭제)을 넘어서 독자 연호를 선포하는 것(건원)까지 하는 건 굉장한 무리수이다. [19] 전통 시대에는 같은 한자에 수많은 이체자(異體字)들이 있어 전부 통용되었다. 오늘날에야 각국별로 표준 한자 형태가 표준화했지만 과거엔 그게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종종 서예가들이 일부러 옛날처럼 이체자로 썼는데 틀린 글씨 아니냐며 비전문가들의 태클에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 당시 지명은 포주였는데, 똑같은 표기법의 19금 적인 단어가 있어서 현재 지명으로 소개한 듯하다. 아니면 단순 오류거나... 한편 오늘날 지명 가운데 인천이나 포천처럼 천(川)으로 끝나는 것들 상당수는 과거에 주(州)였다가 조선 초에 강등된 곳이다. 강등시킬 때 지명을 새로 짓기 귀찮아서 주(州) 자에서 점을 뺀 천(川)으로 바꾼 것이다. 다만 조선 초에 주(州)를 강등할 때 천(川)이 아니라 산(山)을 집어넣은 경우도 있다. 조선 초에 주(州) 지역의 강등이 이뤄진 이유는 주가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조 조정 [21] 다만 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주요 무장들이 하나같이 모두 자신의 사가에 없었던 데다가, 분노했을 우왕이 가솔이나 측근에게조차 피해를 입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우연히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정보나 낌새가 이미 새어나가서 대비한 결과 우왕의 발악이 무산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있다. [22] 대표적인 예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다만 인수대비처럼 한문뿐 아니라 범어에까지 능한 여성이나 시인 또는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여성도 있기는 했다. [23] 실제로는 4년간 집에서 서책을 탐독하며 토지개혁을 구상하는 정도였다. [24] 특히나 시장 문을 닫는 것은 오늘날에는 문자 그대로 파업이지만, 고려사를 찾아보면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될 때 기우제와 함께 시행되거나 국왕이 서거하는 등 중대사를 당했을 때에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25] 사문난적이라는 말 자체가 《 논어》에 나온다. [26] 조선 건국세력이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우와 창은 신돈의 자손이며 따라서 진짜 왕씨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 [27] 예컨대 조비에게 선위한 후한 헌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조비가 황제가 된 뒤 헌제는 제후인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졌다. 하지만 의복 등 관례를 황제였던 시절과 같게 하고, 조비에게 글을 올릴 때 신(臣)이라고 쓰지 않아도 되었으며 사후에 황제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28] 정종을 부각시키면 태종과 이후 국왕들의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종을 높이는 걸 꺼렸다. 태상왕이었던 태조가 사망한 뒤 정종은 계속 상왕으로만 불렸지 절대 태상왕으로 높여지지 않았다. 또한 세종은 즉위 직후에 정종을 제치고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이려고까지 했었다. 단지 태종이 "형(정종)이 태상왕이 아닌데 어떻게 내가 태상왕이 되냐"며 사양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세종을 정종을 태상왕이라고 높이지 않고 그냥 '더 연로한 상왕'이라는 뜻의 노상왕으로 올렸다. 정종에 대한 미약한 대우는 사후에도 확인된다. 정종과 달리 태종은 세종의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여 끝내 죽기 전에 태상왕으로 불리게 됐다. 정종은 또한 묘호를 못 받아 시호의 두 글자를 따서 공정왕 또는 공정대왕이라고 불렸을 뿐이며, 시호도 다른 왕과 달리 여덟 자가 아닌 딱 네 자만 받았으니 대우가 어땠는지 알 만 하다. 정종은 세월이 한참 지난 숙종 때에야 일반 국왕과 마찬가지로 묘호를 받고 시호의 글자 수도 늘어났다. [29] 이건 용의 눈물도 마찬가지였다. [30] 대표적인 예시가 월인천강지곡. 이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직후에 편찬한 책인데,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찬불가다. 그 외에도 세조는 세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불경을 언문으로 풀이한 석보상절을 썼고, 즉위 이후에는 월인천강지곡과 이것을 합쳐 월인석보를 펴냈다. [31] 특히 이지란 역의 선동혁도 선죽교 사건을 낮으로 설정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 # [32] 용재총화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권근이 이때 정몽주를 만났는데 일단의 군사들이 정몽주 일행을 앞질러가니 정몽주가 권근더러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33] 정치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가 아니라 겸양의 의미였다. [34] 출처는 고려사 공양왕 4년 7월 갑신일. [35] 공민왕으로부터 동맹 서약문의 초본을 쓰도록 명받은 이방원은 '나라끼리 동맹을 맺는 사례는 있었으나 임금과 신하가 동맹을 맺는 사례는 없다' 라고 반대했다가 어쨌든 써 달라는 명을 받는데, 이를 보면 춘추전국시대에 나라끼리 동맹을 맺는 사례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는 있다. 한편 4대 60년간 실권을 장악한 최씨 무인정권 하에서 명목적으로나마 고려 왕조가 남았던 것과 비교하기도 한다. 다만 당시 최씨 정권은 어쨌든 고려 왕조를 아예 무너트리고 최씨 왕조를 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이성계는 이미 확고한 지지 기반과 함께 새 왕조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르다. [36] 또한 이 실록 기사는 태종 당대에 편찬된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방원을 꼬박꼬박 '전하' 라 부르는 등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으며, 설령 객관적이라고 본다 하더라도 사료 하나 딸랑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역사 해석이 아니라 소설의 영역이다. [37] 이때 합격한 사람중 하나가 나중에 이방원의 심복이 되는 이숙번. [38] 소도공(昭悼公)이라고도 불렀다. [39] 다른 왕자들은 생전에 존호(尊號)를 받았지만 '소도'는 사후에 애도하는 의미를 담은 시호로서 준 것이다 [40] 이때는 이미 왕자에게 대군의 작위를 쓰고 있었지만, 태종이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후궁격으로 격하시켜 버렸기 때문에 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석은 후궁 소생으로 취급되어 군의 작위를 받았다. 덧붙여 조선 건국 직후에는 왕자와 공신들이 모두 '군'이었고 이후 공·후·백으로 바뀌었다가, 태종 때 다시 각각 대군·부원군·군으로 바뀌었는데 이방석의 동복형인 무안군도 후궁 소생으로 취급되어 군이 대군으로 바뀌지 않았다. [41] 따라서 이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는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의 존호를 '군'에서 '공'으로 바꾸어서 표기했어야 옳은데 이 점은 반영되지 않았다. '대군'이라고 쓰는 오류를 내지 않은 건 좋았으나 '공'으로 바꾼 건 반영되지 않은 점은, 방석을 의안군이라고 잘못 지칭했던 것과 더불어 아쉬운 대목. [42] 흔히 '재야사학'을 자칭하는 부류들이 주장하는 맹목적 사대주의가 아니라 정도전 집권기에 경색되었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펼친 정책이였다. 조선이 황제국 용어를 고집하면서 얻을 수 있는 내부적 이익은 이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43] 책 편찬, 제도 정비 같은 업적의 경우 드라마에서 필요한 갈등요소가 끼어들 틈이 많지 않기 때문, 잘해야 조선경국전이나 한양 천도에서 얽힌 스토리인데 작가의 창작이 너무 많이 개입되면 기황후처럼 왜곡될 수도 있다. 당장 정도전도 양지 스토리에 비중을 두었다가 시청자의 비판을 받았으니... [44]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2월 2일(무신) 1번째기사 [45] 남편이 정안군(靖安君)이니 '안' 자를 뜻이 통하는 '녕' 자로 바꾼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부부의 작호를 세트로 지은 것. [46] 함안 윤씨는 영의정 윤희보의 딸로서 매우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는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홍주목사 서의에게 시집갔다가 한 번 서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 판사 김세덕와 재혼했으나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보국사의 중과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임이 윤씨에게 뇌물을 받고 이지란이 공이 많다고 하여 결혼을 주선했다는 기록이 있다.(…) [47] 이 기사에서 산수 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1장의 지도로 압축되었다. [48]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49] 왕의 스승이 되는 스님 [50] 무학대사의 본명이 박자초이다. [51] 법명인 무학은 태종실록부터 등장한다. 불교를 배격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의 실록에서 승려의 법명을 쓰기는 좀 그래서 본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52]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 [53] 사실 조선시대 기준으로 따져도 이 지역은 성저십리 지역으로 사실상의 수도 지역이었다. [54] "풍수의 도참이 옛 사람에 의해 말해진 것이라면, 신(臣)이 드리는 말씀(성현의 말) 역시 옛 사람이 말씀하신 바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전하께서는 선비의 말은 듣지 않으시고 술수하는 자의 말은 믿으시겠습니까?" [55] 조준이 정궁에다가 이름을 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장면이 있는데 본디 고려시대의 본궐에는 딱히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일듯. [56] 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7월 19일(갑술) 1번째기사. [57] 용의 눈물 같은 경우 조사의의 난이 터졌을 무렵 명에 파견된 하륜에게 영락제가 '그대의 임금과 짐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무척 친해졌었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58]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타이라고 쓰긴 했지만 실제 한국인이 저 발음을 들어 봤을 때 타이에 좀 더 가깝게 들린다. [59] 중국인들한테 '왕'은 군주라기보다 군주의 신하 정도로 생각하여 명목상 조선 왕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이긴 했지만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외국의 왕들을 황제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60] 다만 중국 역시 자국의 번왕과 제후국의 국왕의 예를 다르게 생각한 것은마찬가지여서, 조선의 국왕은 자국의 황자들보다 높게 쳐 주었다. 다만 차기 제위를 이을 황태자의 경우는 얄짤없이 조선 국왕보다 위였다. [61]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이 썼을 중국어는 현재의 표준 중국어와는 달랐겠으나 마찬가지로 조선 초기의 조선어도 현재의 한국어와 다르고 사극에 고어를 부활시켜서 사용하진 않으므로 현대 표준어 발음대로 옮기면 될 것이다. 더불어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으로 적힌 중국어 학습서 등을 토대로 볼 때 당시 표준적인 중국어 발음은 현대의 표준중국어보다는 산동 방언이나 상해어( 오어·吳語)의 발음 체계에 좀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중국어를 기준으로 봤을 때 산동 방언과 상해어가 현대 표준어보다 보수적인 발음 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 그리고 이색이 주원장을 만났을 때 이색이 구사한 중국어(당대의 북경어)를 주원장이 알아 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다가 여러 정황을 보면 그가 당대의 남방 방언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당대의 해당 지역 발음을 구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편찬된 당대 중국어 발음을 훈민정음으로 옮긴 기록들은 현대에 명· 시대 중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62] 이성계가 즉위하기 직전에 낙마 사건으로 이성계 일파들이 정몽주에게 역습을 당해서 조선 건국이 무산될 뻔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4년 뒤 시점에서도 충분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63] 곱사춤을 춘것은 용의 눈물의 오마주이다. [64] 고려 말 ~ 조선 초에 활동한 내시. [65]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중전에게까지도 비의 칭호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 초기에 소헌왕후가 '공비' 의 품작을 받은 이후로 곧 중전은 따로 비의 칭호를 받지 않게 되었다. [66] 하지만 첩자 등 비공식 루트로 미리 정보를 얻었을 수는 있다. 당시 조선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요동과 명나라 수도에 첩자를 심어뒀을 가능성이 있다. 극중에서도 공식적인 사신을 통해 알게 된 게 아니라 현지에 심어놓은 간자(첩자)들의 밀서로 알게 된 것으로 나온다. [67]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1번째기사 [68] 공자는 "처음 (나무 또는 흙으로 된) 인형을 만든 자는 후손이 없으리라!(始作俑者其無後乎)"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공자는 순장을 강하게 비난하는 사람이었는데, 무덤에 인형을 묻는 풍습에서 확대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과거에 인형을 처음 만든 사람을 당시 기준에서 최고로 심한 말로 저주한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당대의 인식과 달리 순장이 먼저 있었고 이후에 인형을 묻는 풍습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긴 하지만, 아무튼 이 표현에서 후손이 없다는 게 옛 사람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후손의 존재는 노후 복지일 뿐만 아니라 사후 복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69] 뒷날 이방원은 즉위 후에 "남은이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70] 신주(神主), 위패 [71] 이 명칭은 1369년(공민왕 18년)에 붙여진 것이고, 그 전에도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다. [72] 이것을 상좌(尙左)라고 한다. 하지만 항상 상좌였던 건 아니고 역사적으로 상우(尙右)였던 시대도 있고 한다. 덧붙여 '강등'의 의미로 쓰이는 말인 '좌천(左遷)'이라는 단어는 상우였던 시대에 만들어진 단어인데 훗날 상좌로 바뀌었어도 계속 본래의 의미대로 강등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73] 직책명에서 '수(守)'는 계비직고(階卑職高), 즉 품계는 낮지만 직책은 높은 것을 맡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74] 다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석을 의안군이라고 한 것은 오류이다. [75]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중언부언하자면, 태종 때 들어서서 공·후·백이 각각 대군· 부원군·군으로 다시 변경됐다. 오등작은 원래 천자만이 신하에게 줄 수 있는 작위인데 반해 군은 제후도 줄 수 있는 작위이다. 당시 태종은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둬서 외교 마찰의 여지가 있는 오등작을 폐지하고 제후가 하사할 수 있는 '군' 계열의 작위로 바꾼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오등작 말고도, 죽은 왕에게 붙였던 묘호나 능호도 역시 본래 제후가 쓰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냥 두었다. 아무래도 이것들은 왕과 직접 관계돼 있어서 이걸 없애면 대내적으로 왕의 권위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어서인 듯(...). 과연 철권 독재자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