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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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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단어의 문제성3. 단어의 생성 이유
3.1. '잠재적 가해자'가 지목되는 기준과 원인3.2. 심리적 혐오감 및 편견3.3. 모함을 위한 궤변3.4. 실제로 범죄 피해를 겪어서 생긴 트라우마3.5. 남성에 의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4. 관련 논란
4.1. 순찰을 하는 이유는 잠재적 가해자 때문이다?4.2. 잠재적 피해자가 아닌 잠재적 가해자가 압력을 받아야한다?4.3. 여성혐오, 남성혐오와 엮여 생기는 논란4.4.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긍정 논란
5. 피해 사례6. 철학적 고찰
6.1.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6.2. 오독의 발생6.3. 사회정의론과 '잠재적 가해자'의 발생6.4.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이지
7. 관련 문서

1. 개요

/ potential offender

말 그대로는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을 뜻하지만 실질적인 용례는 정체성 정치 발언으로써 자신이 속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는 헤이트 스피치의 일종이다.

한국에서 가장 이슈화된 잠재적 가해자론은 래디컬 페미니즘이 한국에서 유행하던 2010년대 후반에 남성혐오를 목적으로 사용된 '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이다. 그 외에도 특정 직업군이나 특정 정당 지지자 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혐오 발언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잠재적 가해자 담론을 주장하는 측의 주요 이념은 보통 연대책임과 수직적 집단주의, 진영논리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자기책임의 원리와 개인주의 사고관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상대방이나 상대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는 모욕적인 행동이며, 일상생활에 불가능할 정도로 영향을 준다면 피해망상인지 상담해 보는 것이 좋다. 특정한 사람이 불특정사건의 가해자가 될 것이라고 의심하고 모함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삼가야 한다.

2. 단어의 문제성

국내에서 봤을 때 가해자의 비율은 극히 일부이며,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은 살인범죄율이 전 세계 평균의 1/10보다 낮은 국가이다. 꼭 형사 처벌로 이어진 경우를 한정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괴한의 신체적 위협으로부터 상당히 안전한 국가다.[1] 이러한 위해 행위들이 한 성별에 이루어진다는 극단적인 가정을 하여도 한 성별에 '잠재적 가해자'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는 너무나도 작은 숫자다. 이러한 배경을 고의로 무시하며 일반 여성들에게 불안감과 이성 혐오감정을 조장하는 세력이 사회에 끼치고 있는 악영향은 실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잠재적 범죄자라는 통념이 유의미할 정도로 치안이 나쁜 사회라 해도 일반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라고 단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일상적인 사회 내에서 잠재적 가해자라고 일컫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단어이며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애초에 '잠재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은 상태로 존재하는'이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잠재적 가해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뜯어보자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범죄는 저지를 수 있다. 어떤 연령대도, 어떤 성별도, 그 어떤 사람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을 특정 성별이나 인종에 의도적으로 사용하는건 그 자체로 모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상대 집단 중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간다면, 본인 또한 어떤 집단에 속해있고 그 집단에 범죄자가 있을 것이므로 잠재적 가해자이다. 즉, 누군가를 비판하고 자신에게 피해자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잠재적 가해자"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용어가 합리화되는 것은 "이유만 붙인다면 혐오 발언을 합리화될 수 있다"는 선언과 다름이 없다. 즉, "어린이집 내 아동 학대의 가해자 중에는 여성이 많으니 여성은 어린이집 내 아동 학대에 대한 잠재적 가해자다.", "군대 내 폭행 가해자 중에서는 남성이 많으니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등의 논리가 합리화될 수 있다는 소리다.

이 단어를 특정 성별에 사용하는 것이 더더욱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각 인간이 가진 성별은 생득적이며 본인이 선택한 적 없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삶에 대해 스스로 행한 선택들만을 갖고 평가받는다면 그들은 전혀 다르지 않다. 똑같이 떳떳하게 살아왔는데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성별로만 묶이고 매도당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인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것이다.

3. 단어의 생성 이유

3.1. '잠재적 가해자'가 지목되는 기준과 원인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인식이 생기는 원인은 두 종류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생리적 혐오감이나 편견,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작정하고 특정 대상을 없애려고 중상모략을 짜는 경우이다. 전자 중의 일부는 후자를 겸하기도 한다.

집단괴롭힘, 폭행 등으로 PTSD 등을 앓는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존재가 한 것과 비슷한 행동을 보고 이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도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흉악 범죄자의 인권을 신경쓰는 사람도 이런 낙인이 찍히기 쉽다. 국민정서법에 가열된 범죄자 비난 여론은 보통 보편 인권을 잘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3.2. 심리적 혐오감 및 편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불신과 혐오, 그리고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의 본능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웬만하면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문제 중에서는 인종 차별이 뜨거운 감자이다. 특히 흑인=범죄자라는 편견이 있다. 백인 경찰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던 흑인 여성의 차량을 '선팅을 짙게 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억지 검문하다가 그 여성의 직업이 주 카운티 검사 역관광당하게 된 사례라던가 흑인 10대 소년이 무단횡단 같은 사소한 경범죄[2]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폭행을 하거나 수갑을 채우는 등의 과잉방어를 하는 사례 등으로 증명되고 있다.

생리적 혐오감과 편견에서 비롯된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이러한 시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혐오감을 느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범죄자로 몰 수 있는 정당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전과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면 전과자를 보고 그런 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전과자보다 비전과자가 훨씬 많이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이 꼭 범죄를 저지르리라는 보장도 없다. 쉽게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그 사람을 때린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된다. 만일 정당하다면 맞은 상대편도 똑같이 자기를 때려도 할 말이 없어야 되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식으로 주고받으며, 주고받고 싶어할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을 두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 같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신에게 올 위협을 미리 막으려면 선수방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주장은 "저 사람ㆍ집단은 나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규제, 제재를 가하면서 짓밟아놔도 상관없다."라는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성별을 막론하고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3.3. 모함을 위한 궤변

대상에게 갖는 혐오감에 상관없이,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거짓을 날조하고 이를 증거로 삼아서 모함을 하는 경우이다. 혐오감에서 비롯된 잠재적 가해자를 만드는 태도에 비해 훨씬 치밀하고 교활하며, 고의이므로 훨씬 악질적이다.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무고를 하는것은 이미 무고죄라는 이름의 범죄다.

3.4. 실제로 범죄 피해를 겪어서 생긴 트라우마

지속적인 학대, 위축 등으로 발생하는 복합성 트라우마는 가해자의 특정한 조건 (나이, 성별, 인종, 지역 등등 매우 다양하다.)을 엮어 그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경우 그대로 굳어져 하나의 인지도식이 될 수 있으며, 확장되어 집단 전체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의 시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잠재적 가해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잉일반화와 낙인찍기(Over-generalizing or Labeling)에 빠져 중요한 논리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의견이 자정되지 않는 이유는, 말 그대로 인지도식이기 때문이다. 인지도식은 고치기 매우 어렵다.

3.5. 남성에 의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주로 남성들이 딸이나 여자형제, 여자친구에게 하는 말들에서 나온다. 성욕을 참지 못하는 남자, 심하게는 성범죄 사건 기사를 보고 남성 스스로가 "남자들은 다 그렇다", "남자는 다 늑대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 (나이가) 80이라도 그런 유혹 앞에서는 견딜 수도 없어."라고 두둔[3]하곤 한다.

실제로 딥페이크 처벌을 논의하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김오수 법무부 차관 역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기 컴퓨터로 그런 짓 많이 한다" 면서 딥페이크 가해 행위를 사회규범 상 정상적인 것처럼 미화했던 적이 있다. # 이런 발언들은 마치 우리 사회에서 모든 남성들이 성범죄를 다들 한 번씩은 한다는 식으로 싸잡아 일반화하며, 따라서 성범죄 행위를 괜히 문제삼으면 안 된다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강화한다.

그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어릴 때부터 평생을 저런 말들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듣고 자라다 보면 '모든 남자는 여자만 보면 성범죄를 저지르고 싶어하는 축생이구나' 라는 반지성주의적 헛소리를 진실이라고 진심으로 믿어버리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이는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를 떨어트리는 큰 사회적 문제가 된다.

4. 관련 논란

4.1. 순찰을 하는 이유는 잠재적 가해자 때문이다?

경찰들이 순찰하는 이유는 시민들을 다양한 상황에서 그때그때 돕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간 범죄의 예방을 목표로 한다. 우발적인 범죄는 주변 환경(심리적 압박 등)에 의해 쉽게 제어될 수 있기 때문에 순찰이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순찰에 힘을 쓰는 이유는 순찰을 안 돌 때 생길 수 있는 순간적인 피해가 순찰을 지속적으로 돌 때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는 순찰 여부에 차이가 생기는 국가들을 비교하는 통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단순히 "잠재적 가해자를 막기 위해 있지 않겠느냐" 라는 의견은 편향된 결과론적 추론이며, 차별만 조장하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기 힘든 무적논리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대상조차 불분명한 "잠재적 가해자"를 막으려고 법 등으로 강력히 제어하면 여기저기서 인권유린 행위가 발생할 것이다.

4.2. 잠재적 피해자가 아닌 잠재적 가해자가 압력을 받아야한다?

잠재적 가해자론은 흔히 다음과 같이 정당화된다. (예시)"우리는 흔히 여성들에게 조심해서 귀가하라든지 통금을 지키라는 말을 하며 여성들을 잠재적 피해자 취급한다. 그런데 잠재적 피해자가 있다면 그들이 혼자 피해를 받는 것도 아니고 피해를 줄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그들이 바로 잠재적 가해자들이다. 잠재적 가해자는 누구이겠는가? 바로 남성이다. 잠재적 피해자가 조심하라는 걱정과 간섭을 받듯이 똑같이 미러링하여 잠재적 가해자들도 행실을 똑바로하라는 사회적 압력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당화는 사실 제대로 된 정당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조심하라고 권유하는 것과 신뢰를 쌓도록 제대로 행실하라는 명령은 서로 동등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여자에게 늦은 밤 수상한 사람을 조심하라고 권유할 때, 또한 아이들에게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를 조심하라고 권유할 때, 그러한 권유는 내가 상대를 믿지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믿지만, 상대 주위에 있을 불특정 다수를 믿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4] 사회가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조심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즉 "너를 믿지만,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건 너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와 관계없이 발생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반면, 사회가 남성들에게 "너는 잠재적 가해자이므로 늦은 밤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라."라고 명령하는 것은 조심하라는 권유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네가 남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라는 권유에는 "너는 믿지만, 불특정 다수를 못 믿겠다"라는 메세지가 담겨있는 반면 "네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해서 다녀라"라는 훈계에는 "너를 못 믿겠다."라는 메세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너를 신뢰하지 않으며, 너의 도덕성은 매우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는 사람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약하자면, 상대를 잠재적 피해자로 여기는 것은 상대의 도덕성을 폄하하는 일이 아니므로 무례한 일도 아니지만, 상대를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 것은 상대의 도덕성을 폄하하는 것이기에 매우 무례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4.3. 여성혐오, 남성혐오와 엮여 생기는 논란

이 단어는 일상에서 그렇게까지 자주 회자되는 단어는 아니었으나 2016년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특히 여혐과 관련해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5] 워마드 메갈리아, 여성시대 등의 여초 커뮤니티 및 해당 살인 사건의 추모 행사에 참여했던 인원 중 일부가 남성들은 언젠가 범죄를 일으킬 것이며 이에 대해 자아비판,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고 내세우면서 갑자기 시끌해졌다.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남성은 여성보다 '월등한 근력'을 가지고 있고 성욕이 왕성한 대부분의 남성들은 언제든지 주변 여성을 강간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짐승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2. 그 근력을 바탕으로 강간이나 살해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위험분자들이며, 실제로도 여성에 비해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
  3. 따라서 남성들 스스로가 이를 미리 인지하고 참회하며 여성들 앞에서 고해성사함으로써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음을 인증해야 한다.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자신의 행동원리를 전투적 페미니즘로 설정한 과격 페미니즘 진영의 "젠더 권력" 개념 및 "사회정의" 개념의 오독 및 오남용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남성 타도"나 "남성 배격"등의 과격한 목표로 유명한 페미니즘의 사례는 사상적으로는 아래 언급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운동 양상은 전형적인 래디컬 페미니즘과 유사했다. 인터넷의 극단적인 페미나치 커뮤니티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류 여성단체들도 잠재적 가해자 논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사

4.4.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 긍정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남성 대상 증오발언 영상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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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페미니스트 학자인 원장 나윤경이 직접 출연한 젠더온 영상을 통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했다. "좋은 남성임을 입증하라" 이게 여가부 산하 '성인지 강의' 동영상 내용(디시인사이드 링크)[6]

2020년 2월 18일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린 이 영상은 1년이 더 지난 2021년 4월 논란이 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에 양평원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비하한 영상을 2021년 4월 22일 유튜브에는 비공개 처리하고 홈페이지에는 남겼다.

이에 대해 질문을 받자 여성가족부는 역시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인 장관 정영애가 생물학적 남녀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어 남성을 가해자-여성을 피해자로 보는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을 동의할 수 없다 했다. 2021년 4월 15일 다음-뉴시스 달라진 여가부장관..'남자=잠재적 가해자' 교육 동영상 비판

정영애는 '생물학적 문제이기보다는 권력 문제와 연관돼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문제들은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지위 상승에 따라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권력에 따라 충분히 여성도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또한 정영애 장관에 의하면 나윤경 역시 '여러 전문가 의견을 듣고 수정·보완하겠다'고 말하고, 유튜브 영상도 내렸다.

이것을 두고 정영애와 여성가족부를 통해 국가기관에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와 지위 상승을 조건으로 내걸었기에 현 시점에서 생물학적 구분 외에 사회적 구분에 의한 잠재적 가해자론을 포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시점에서 여성이 권력을 가진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향후 여성가족부의 행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2023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점점 거세지자 한국 페미니즘은 잠재적 가해자론을 펼친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본인부터 그랬다는 증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

5. 피해 사례

6. 철학적 고찰

6.1.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현대 페미니즘에 줄리아 크리스테바[16]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라고 한다고 하면 근대 언어학 및 정신분석학에서 기표-기의 개념을 차용하여 오늘날 사회의 근저에 자리잡은 여러 개념들과 그것의 상징성 및 기호화 양상이 전적으로 남성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특정 성별에 기대되는 표면적 행동양식을 기호화 및 이식화 함으로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성역할의 전형화, 표본화 및 양식화를 굳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분석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애초에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치학이나 대중운동의 측면에서 보다는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언어학과 정신분석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소위 여성성으로 회자되는 가치나, 상징성, 기호는 사회 저변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으로부터 소외된 것들의 집합체이며 주변적 의미만을 가지기에 그 여성성에 집착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이라는 통상적 정의는 정작 '여성'이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기 보다는 '남성이 아닌 자'로 정의되며, 결국 이에 의거한 여성성의 논의는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의 젠더권력에 여전히 예속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크리스테바는 본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여성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방인, 영속적인 주변성으로 개념화 되는 것이며, 그 현실이 결국에는 변화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상징적 질서 속에서 여성이 갖는 이중적 측면, 한편으로 사회적 질서의 침묵하는 보증인이자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질서를 위협하고 전복할 수 있는 잠재적 동력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크리스테바의 작업은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크리스테바의 언어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전복의 윤리학은 그의 페미니즘에도 적용된다.[17]

즉, 이 계통의 철학적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이 상징적 질서 속에서 폐쇄되고 고정된 심급으로 머물거나, 순응하지 않고, 집단과 체계가 동질적이자 억압적인 페쇄성으로 고착되지 않도록, 언제나 항거하면서 일종의 경계인, 이방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여성해방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평등을 위하는 투쟁은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실천이 아니며, 여성들의 투쟁만으로 사회적 질서가 변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는 스스로를 구성하기 위해 사회적 강제와 억압을 행사하므로, 문제는 이 강제를 부수고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 재구성의 동력은 부정성과 거부를 원리로 하는 기호론적 실천이다. 따라서 여성들의 투쟁은 혁명적 투쟁,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기호론적 실천은 여성 및 모든 억압된 사회층들, 담론, 생산과 재상산관계에서 억압되는 모든 사회층들간의 횡단적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위 문단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일단 위 문단을 이해하기 위하는 최소한의 단어 설명을 하자 하면 다음과 같다.

구조주의 철학이 늘 그렇지만 헤겔 철학에서 인식론과 의미론을 먼저 이해해야 이 담론을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개념이란 A = A이다. 고전 논리학에서 '정의란 A를 A이게 만들어주는 어떠한 속성들의 집합'이다. 속성이 주어지고 그 속성에 따라 그것과 나머지가 뒤에 구별된다. 따라서 개념은 도화지 위에 그린 ★이 된다. 고전 논리학이라고 해서 현재 안 쓰이는 것은 아니다. 가장 기초학문이라 할 수 있는 수학에서의 정의는 일부 분과의 수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분과에서는 아직도 이 개념의 정의를 사용한다. +나 -, 복소수, 미분 같은 과목을 배울때 정의부터 배우는데 그때 행하는 정의가 바로 이런 부류이다. 수학을 제외하고서 다른 응용학문들은 99%가 이런 정의를 사용한다. 물론 수학입장에서의 응용학문이니까 말하자면 수학을 제외한 모든 이과 학문이라는 의미다.

헤겔 철학에서의 개념은 A = ~(~A)가 된다. A가 아닌 것이 아닌것이라는 이중부정성이 곧 긍정과 동일하며 그들 사이에 선후관계는 부정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빛이 없는 노란색 우주안에 사는 생물은 노란색을 인식할 수 없다. 이들이 노란색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우주안에 파란색이건 빨간색이건 어쨌건 노란색이 아닌 아닌 다른 것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노란색과 노란색이 아닌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경계선이 있어야 알 수 있고 경계선만 존재한다면 그 둘의 진정한 속성 따위는 전혀 몰라도 차이만으로도 각각의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다. 개념은 그 사이에 경계선을 그리는데 그 경계선 자체가 진정한 최초의 규정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헤겔철학의 개념은 도화지위에 그린 ☆ 이 된다. 헤겔철학에서 부정이 긍정보다 선행한다. 부정이 곧 긍정이다. 라는 말은 이런 의미로 하는 말이다.

사실 부정과 긍정 중 무엇이 선행한다는 서술 자체도 오해를 부르기 십상이다. 이 둘 사이는 시간석 선-후 관념이 적용될 수 없으며 인과적 관계도 설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부정성을 긍정성 앞에 놓은 서술은 이해를 위해 고의적으로 오서술한 개념이다. 이때 초월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즉 규정과 부정은 어느 한 군데에 절대 멈춰있을 수 없다. 그 때문에 그 유명한 정반합이라는 헤겔 변증법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중부정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원용했다면 당연히 페미니즘이 어떠한 경계선에서 영원히 멈춰있을 수 없다는 개념을 이해해야하는데 현실 페미니즘은 그 이해를 따라가지 못했고 편한데로 해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실 여기까지 따라오는 와중에 현기증을 느낄수도 있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이 부분은 철학과목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과목이고 학부과목에서도 원서 6장짜리 서술을 한학기동안 수업하며 석사단위에서는 들뢰즈 서술 단 4줄가지고 한 학기를 강의한다. 철학과목의 기본단계를 모두 거친 학생들을 데리고도 그런 시간이 걸리는데 위키 설명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아예 버리자. 대충 저렇다. 정도까지만 이해한다면 당신은 상위 2%의 이해력을 가진 학생일 것이다.

약 20~30년 전 이론인 포스트 모더니즘을 접목한 사회학에서 에서 흔히 나오는 경계인이나 부정성이나 긍정성 같은 개념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헤겔논리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작 철학과목 중에서도 굉장히 난해한 부분이며 1960년대까지는 주류였지만 지금은 주류도 아니라서 철학과임에도 헤겔원서를 공부하거나 대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 서문등을 공부하는 철학도는 거의없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활발히 연구되던 시절에는 그나마 돌아가지만 2010년대 이후 학부과정에서는 최소 수강인원도 못 채워서 폐강되기 일쑤이다. 한국 칸트학회 학회장이 직접하는 수업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비철학 항목에서 헤겔철학의 기초개념을 배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석사 이상이라고 해도 저 위의 개념들을 오독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로인한 오독은 비단 일반인이 아니라 철학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회학과 박사-교수 단위에도 널려있는 일이라, 다음 문단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6.2. 오독의 발생

위와 같은 이론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현대철학 및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중요한 문제제기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철학과 결합 된 분석적 이론들이 늘 그렇듯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실제 정치운동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나"에 대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을 제시하고 고찰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기 보다, 애초에 기호학적, 언어학적, 철학적 견지에서 차별과 젠더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담론을 제시한 것이며, 모든 철학 이론이 그러하듯 그 핵심적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은유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다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추상적으로 띄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가장 비슷한 사례라면 역시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 및 그 후계운동의 관계인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철학적인 관점과 정치적인 관점 양자 모두에서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져 있으며, 그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론적 분파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분파 중에서 실제로 정치투쟁과 정치혁명의 이론적 원동력이 된 한 갈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이고, 소련 및 공산권과는 달리 서유럽 역사학계와 철학계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논의 된 것들은 마르크스의 소외이론; 통칭 '초기 마르크스 이론'들이다.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은 하나의 정체로서 노동자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역학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한 실제 돈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생활하느냐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존재론적 소외에 대한 고뇌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철학적 견지에서 존재론의 일종이기에, 예컨대 단순히 노동자 복지를 늘린다든지, 노동자들의 발언권을 확충한다든지 등 기존 체제 질서 내에 종속된 상태를 간과하는 노동자운동 등은 궁극적으로 존재로서 노동자의 해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착한 자본가도 있다"든지, "자본가들도 노동자 권익에 관심을 갖고 공존할 수 있다"든지 하는 차원의 개인적 도덕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그에 예속되어야만 하는(예속될 수 밖에 없는) 존재론적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자본가도, 노동가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혁명이라는 과정은 자본주의 단순히 자본주의를 부수는 것이기 보다는 그것의 극복,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에 중점을 두는 개념정의이다.

이와 유사하게, 크리스테바의 페미니즘 이론 역시 현상론이나 정치운동으로서 성차별 및 불평등을 접근한다기 보다는 관념철학의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 자체로 객관적 사실이나 특징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흡사 언어학에서의 기표-기의의 관계와 같이, 이미 무의식적으로, 정신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는 '남성성'에서 '여성성'이 파생되는 하위개념의 관계이기에 이러한 관계의 핵심을 부수지 못하고 사회 내에서 피상적으로 여성복지, 여성권익을 부르짖거나, "남자지만 나는 여성의 권익에도 관심 있다. 나는 '착한 남자'다(바로 위에 서술한 '착한 자본가'와 비교해보자)" 라는 식의 운동이나 인식은 결국 그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같은 구차한 개념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그 자체, 위에 인용된 토릴 모이의 평처럼,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젠더권력에 대한 구조적 항거 및 파괴 행위, 그 현존 질서에 대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탈피하는 그 행위ㆍ인식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여성해방운동이라는 뜻이다.

6.3. 사회정의론과 '잠재적 가해자'의 발생

1980년대에서 2000년까지 근 20년을 풍미한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의 중요한 한 축 답게 난해하다.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중시하는 담론유희와도 같은 철학적 사변의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은 즉, 철학 파고 드는 사람들이 아닌 일반 대중은 솔직히 이해하기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이론인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계통에 있는 여성학을 읽고 공부하는 경우에는 죽~ 나열된 사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결국 머릿 속에 남는 것은 마지막 구절들 뿐이다. 즉, 바로 위에 서술된 내용;
"따라서, 여성해방이라는 것은 '남성성'이나 '여성성'같은 구차한 개념들에 종속되기 보다 그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행위 그 자체"
"상징적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주변성과 관련된 부정성과 거부의 속성을 여성에게 부여하려는 시도"
"존재론적 측면에서 젠더권력에 대한 구조적 항거 및 파괴 행위"
"현존 질서에 대한 아웃사이더가 되어 탈피하는 그 행위-인식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자 여성해방운동"

철학적 개념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론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독하는 순간, 이것은 (쉽게 말해서), " 현존 질서는 죄다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그걸 전부 까고 부수고, 거기(현존 질서)에 반항하는 그 모든 행동은 다 여성운동이다"라는 식으로 읽히게 된다. 아니 오독이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이 철학과 짬뽕된거잖아.[18]

즉, 이 맥락에서 젠더권력 이라는 것은 실제로 관료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여성억압이라는 목적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권력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잡은 일족의 철학적 관념이며,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정신적 억압 및 개념적 종속성의 폭력이다. 그것은 사회정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원래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남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정의론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개념이다.

예를 들어, 식민지 현실 아래 조선에서 생활하는 착한 일본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등학교 윤리 수업 정도에도 나오는 내용이므로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적 현실 아래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본인'과 '착한 일본인'의 차이는 없다. 한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착취를 하는 구조 아래에서 보편적 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구조 속에 있는 모든 일본인은 결국 그러한 수취, 착취행위의 잠재적 동조자이자 공범자다. 개인의, 개인도덕의 측면에서 조선인을 멸시하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해 주며 착하게 사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 대일본제국'이라는 압제적, 제국주의적 권력이 만들어낸 그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개인적 처신이 훌륭한 인격자라고 해도 전체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까방권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착한 일본인과 나쁜 일본인을 구별해서 독립투쟁을 해야 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도식에서 '일본제국'을 '젠더권력', '제국주의'를 '성차별', '일본인'을 '남성'으로, '조선인'을 '여성'으로 치환하면 원래 "잠재적 가해자로서 남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너무 거대한 예인 것 같으니 비교적 작은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의 학벌구조 하에서 이름 있는 대학을 간 사람들은 문화권력을 소유하게 되며, 본인이 의도하든 아니든간에 학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이익을 얻고 피해를 주는 위치에 서게 되며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19]

사용한 단어 자체가 어폐가 있으나 원래 '잠재적 가해자'라는 개념은 이러한 정치적, 구조적, 철학적 이해의 차원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물론 이는 거대담론이자 거시적 분석의 문제이며 개별적인 도덕적 판단이나 실천강령에 적용되는 내용은 절대 아니다. 실제 독립투쟁에서도 일본인이라고 해서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식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드물었고[20], 오늘날에 있어서도 '적국' 사람은 다 죽여도 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며 그 이전에 인도적인 관점에서 국제적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복잡한 관념철학으로서 크리스테바 계통 페미니즘 이론과 사회정의론에 입각한 '보편적 가해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독하고, 깊은 고민 없이 바로 투쟁운동에 접목을 시도한 결과가 바로 '남성 잠재적 가해자론'과 같은 사회적 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구조로부터의 탈피, 파괴가 곧 해방"이라는 구절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로 나온 것이라, "그러니까 모든 남성은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가해자로서(사회정의론 오독), 그 구조를 파괴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까고 해체하는 나의 활동은 곧 여성해방의 일환이다(페미니즘 오독)"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한 것이 바로 오늘날 메갈리아 및 워마드 같은 부류의 자칭 여성운동의 가장 큰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론의 오독 및 오용의 사례는 사실 한국만의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다. 크리스테바 계통의 정신분석학적, 언어학적, 기호학적 '투쟁의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도 매우 비슷하게 "남성구조로부터의 탈피와 해방 = 남성 조져버려"라는 문화대혁명이나 킬링필드와 같은 식으로 운동을 했던 페미니즘 계통이 존재했다. 문제는 남들이 다 거쳐간 길을 이제야 가면서도 뒤쳐졌다는 생각을 못 하고 과거의 극단적인 것들에만 매달리며, 수십년이 지난 2020년대 사회와의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무지성으로 좇아간다는 것이다.

6.4. 그것은 전체주의일 뿐이지

크리스테바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자신의 저작을 오독했다고 여기고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숨은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언어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자기 이론의 골자는 아니다. 언어는 또한 역사적 스펙트럼 및 개인의 심리적, 성적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접근을 접한 특정 사회적 집단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에 압제적 의도가 숨어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집단주의적 논리를 개인정체성 위에 두는 행위는 해로운 것이며, 이러한 식으로 성별적,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그 자체에 정치적함의를 덧씌우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일 뿐이라고 크리스테바는 얘기하고 있다.

- 정체성의 정치학에 대한 거부, (영어 위키백과, Julia Kristeva 문서 중 발췌[21]) -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권에도 소위 '메갈리아와 같은 전투적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이미 한 차례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크리스테바 본인의 언급한 내용이 바로 위에 인용한 대목이다.

즉, 크리스테바 본래의 관심사는 구조적 언어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의 구조'에 대한 연구이며, 그러한 '무의식의 구조'가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로 '성차별'의 문제를 바라보았기에 그 특유의 유의미한 페미니즘 이론들이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모호한 개념 아래 서로간의 '힘싸움'이라는 형태로 대립을 거듭하는 식의 여성운동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며, 일단 근저에 깔려있는 그 무의식적 구조의 파괴, 타파, 그러한 차원에서 개인의 고찰 등을 얘기하는 측면이 훨씬 크다.

그러나 이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이론이 아니며, 그 자체를 하나의 정치운동, 투쟁운동의 이론으로 삼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결국, 일부 여성운동 집단에서 자기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영어 마저도 사실은 남성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언어이기 때문에 타파해야 한다라는 무리한 주장들이 나오는 둥 여성운동의 내부에서도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일들이 많이 발생하였으며, 그에 대해 크리스테바는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평을 내린 것이다. 즉, 오독이라고.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대목은 집단주의적 논리를 개인정체성 위에 두는 행위는 해로운 것이며, 이러한 식으로 성별적,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 그 자체에 정치적 함의를 덧씌우는 것은 결국 전체주의일 뿐이라는 부분이다. 즉, 철학적 측면에서 제시 된 담론을 조심스레 다루지 않고, "집단주의의 논리" - 즉, 집단간 대립의 논리에 자기자신(개인)을 그대로 대입하는 태도는 자신의 이론을 오독하고 전체주의를 밀어붙이기 위해 오용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쉽게 말해서, 위에서 설명 된 각종 페미니즘적 개념과 철학적 담론을 공부하고 습득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신중하게 다루지 않고, 단순하게 별 생각없이 남자 vs 여자로 진영을 나누어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공격하고 모욕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제대로 된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라 그저 전체주의의 일종이라는 말이다.

애초에 현대 사회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용어들 그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각인 된 억압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허상같은 것이라, 그에 집착하는 여성운동이나 해방운동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이쪽 계통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틀임을 생각해보면, 그냥 전형적인 패거리싸움에 고급 이론의 개념 몇개 도용해서 가져다 붙인 채로 한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행위가 "여성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면 크리스테바가 뒷목잡고 쓰러질 일이다.

7. 관련 문서



[1] 흔히 보편적 인권 의식이 매우 높다고 여겨지는 주요 유럽 국가의 국민들 중 2023년 기준으로 강도나 신체적 위해를 겪은 비율이 17.5%가 되는데, 대한민국은 그 비율이 1.5%에 불과할 정도다. # [2] 무단횡단 자체가 사소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단횡단은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며 그걸 피하려던 차량이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져 자칫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이를 대처하는 경관의 과잉방어의 과도한 정도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3] 심지어 링크의 사건은 가해자의 주변인들로부터 오히려 피해자를 향해 '어떻게 처녀가 술을 떡 되게 그렇게 먹냐고', '어린 애도 아니고 그 시간까지 같이 있을 때는', '그 사람도 원인 제공이야. 싫었으면 가야지'식으로 온갖 탓하는 말이 쏟아졌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몰상식한 태도에 크게 분노했다. [4] "나는 내 딸과 여자친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내 딸과 여자친구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내 딸과 여자친구가 선량하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발생한다.", "나는 내 아이가 초록불에 신호를 지켜 횡단보도를 건널 것임을 믿는다. 그런데 차량이 신호를 위반하여 내 아이를 치는 것은 나의 아이에 대한 믿음과는 상관없이 발생한다." [5] 물론 잠재적 범죄라는 말은 강력범죄가 아닌사건에서는 은근히 자주 쓰이고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잠재적 표절이었다. [6] 본 동영상 강의에서 말하는 "시민적 의무" 가 본 문서의 6.4단락에서 해설하는것을 본떠 전체주의의 대표가인 나치즘으로 빗대어 비유(사실상 풍자)한 이 만들어졌다. 디시인사이드 링크 2 에펨코리아 링크 [7] 해당 시설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 자원봉사자도 포함한다. [8] 1990년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 1997년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2008년 울산 계모 살인 사건, 2015년 인천 어린이집 폭행 사건, 2017년 인천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 경남 여교사 초등생 의제강간 사건 [9] 교장, 교감, 행정실 직원 등 [10] 물론 비환자의 입장에선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앞서 말한 증상의 경우에는 굉장히 피곤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정신질환이 망상을 동반하여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 경우도 많고 주변 환경이 변할 경우 적응을 어려워 하는 경우도 많지만, 진짜 인성이 나빠서 그것이 자신이 편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연기를 하는것은 아니다. 더불어 망상 증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증상이고 경증의 경우 자신이 망상이 있는걸 알기 때문에 진실과 망상을 구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많다. 환자 스스로도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인성과 질환은 별개의 문제이기에 분명 구분해야 할 필요도 있다. 실제 배척 같은 피해 경험으로 인해 없던 피해의식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무작정 매도하여 질환자를 배척한다면 환자 당사자가 정말 피해의식이 생기더라도 할 말이 없게 된다. [11] 사별, 이혼으로 인한 별거 포함 [12]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3] 페미니스트들은 동춘동 사건이나 부산 사건처럼 여성이 가해자인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동춘동 사건은 가해자가 메갈리아 등에서 사용하는 남혐 용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알려져 있으니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14] 서울 시청역 교차로 차량 돌진 사고의 가해자도 급발진이라고 주장했다. [15] 다만 노인의 비율이 높은 시골에서는 대중교통 인프라가 매우 열악하여 노인들이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려면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16] 본래는 구조주의 철학자이며, 이 사람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사랑에 대한 정의인데, 참고로 읽어 보자. # 그런데 KGB와 긴밀히 협력한 불가리아 국가보안위원회(CSS)의 스파이(암호명 '사비나')였다는 점이 2018년 3월 뒤늦게 밝혀졌다. [17] 토릴 모이,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18] 상기 문단에서 서술했듯이, 철학적 개념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정의될 수 없어서 개인의 생각에 의해 평가하고, 읽히고, 해석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19] 흥미롭게도 잠재적 가해자론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문화권력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것을 과시하고 심지어 문화권력과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기까지 한다. [20]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한 사람의 일본인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민족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돌아선 후에는 억압받는 일본인들과 연대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투쟁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21]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