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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17:19:41

유은(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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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fff> 대창문헌공(大昌文獻公)
劉殷 | 유은
시호 문헌(文獻)
작위 대창공(大昌公)
(劉)
(殷)
장성(長盛)
생몰 ? ~ 312년 6월
출신 병주(幷州) 신흥군(新興郡)
국적 서진 전조
자녀 7남 2녀
1. 개요2. 생애3. 일화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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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 전조의 인물. 후한 시기 광록대부를 지낸 유릉(劉陵)의 현손자.

2. 생애

유은은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예가 지나칠 정도로 몹시 슬퍼하여 몸이 야위었고, 상을 치르는 3년 동안 이빨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유은은 증조할머니 왕씨(王氏)에게 거두어져, 그녀를 봉양하면서 효로 명성을 얻었다. 장성하고 나서는 경서와 역사에 통달하여 여러 사람들의 말을 치밀하게 파고 들었고, 읽지 않은 문장이나 시가 없었다고 한다. 또, 포부가 크고 기개가 있어 장차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품었고, 생활은 항상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하니, 고향 친척들 중 그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郡)과 주(州)에서는 각각 주부, 종사로 임관할 것을 권유했으나, 유은은 자신이 떠나면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다며 모두 거절하였다. 유은은 사공, 제왕 사마유로부터 속관으로 부름 받고, 정남장군 양호로부터 참군사로 부름 받았으나, 이번에도 그는 병을 핑계로 전부 사양했다. 동향에서 견식 있는 선비로 이름난 장선자(張宣子)는 유은을 찾아가 이들의 부름에 응할 것을 권유하자, 유은은
"오늘날 두 공께서는 진나라의 기둥이십니다. 저 역시 서까래가 되어 그들처럼 나라의 보탬이 되고 싶고, 이번 기회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 그 뜻을 능히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 저의 집에는 왕모(王母)님이 계시는데, 제가 명에 응하게 된다면 신하의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어 결과적으로 왕모님을 부양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과거 자여(子輿)가 불편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제나라 대부에서 사직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장선자가 답했다.
"선생의 말씀을 어찌 범용한 이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후로 선생께서는 마땅히 저의 스승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자신의 딸을 유은의 처로 시집보냈다. 장선자는 병주의 부유한 호족이었기에, 장선자의 처는 노하여
"우리 딸은 올해로 14세이 되었소. 자태가 이와 같은데, 어찌 공후(公侯)의 비(妃)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못 하고 갑자기 시집을 가 유은을 섬기리오!"
라며 따졌다. 장선자는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라 답하고 자신의 딸을 불러 당부했다.
"유은의 효심은 지극하여 사람을 은밀히 감응시켰고, 재능과 식견은 이 세상을 초월하였다. 이와 같은 인물은 언젠가는 반드시 원달하여 명재상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니, 너는 그와 함께 하면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도록 하라."
장씨의 성정 역시 완순했기에, 시집살이를 하면서 왕씨를 봉양해 효심이 깊기로 소문났고, 유은을 마치 아버지 대하듯이 극진히 모셨다. 얼마 뒤, 왕씨가 사망하자 유은과 그의 부인 장씨는 몸이 상할 정도로 심히 애도한 나머지 바싹 야위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영희 원년(290년) 4월, 무제 사마염이 붕어하고 혜제 사마충이 즉위하자, 양 태후의 아버지인 태부 양준이 정권을 잡았다. 양준은 예의를 갖추어 유은을 초빙하였는데, 유은은 노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양준은 그를 표창하고, 조서를 내려 그 높은 뜻을 이루도록 허락했다. 또, 칙사를 보내 그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하게 하고, 부역을 면제했으며, 비단 200필과 곡식 500석을 하사했다.

영강 2년(301년) 정월, 정변으로 황후 가남풍을 제거하면서 정권을 손에 넣은 조왕 사마륜이 야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사마륜의 최측근인 손수는 유은의 명성을 중히 여겨, 그를 산기상시로 징소하려 하였다. 유은은 이를 거절하고 안문(鴈門)으로 도주했다.

영강 2년(301년) 6월, 제왕 사마경이 사마륜을 제거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나있던 혜제 사마충을 복위시켰다. 이때 유은은 사마경의 부름에 응해 대사마 군자좨주를 지냈다. 그가 입조하자 제왕 사마경이 물었다.
"선왕(先王:제왕 사마유)께서는 겸허히 그대를 불렀으나, 그대는 응하지 않았소. 오늘날 그대는 나의 부름에 응했는데,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유은이 답했다.
"세조 무황제께서는 대성하여 천명에 응했고, 선왕께서는 지극한 덕으로 세조를 보좌하셨습니다. 이는 곧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왕위에 올랐을 때, 직(稷)과 설(契)이 그 보좌를 맡았던 당우(唐虞)의 시대와 같아, 저는 바람대로 필부가 되어 천승의 직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부월지육(斧鉞之戮: 형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뛰어난 무용과 총명함으로 역적을 제거하셨으나, 전하의 성적(聖跡)은 다소 거칠고, 위엄은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만약 응하지 않았다가는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감히 이곳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경은 그가 예사의 인물이 아님을 느끼고 신흥태수로 내보냈다. 유은은 신흥(新興)에 부임하여 형벌은 명확히 하고 선행은 드러내어 표창하니, 지역은 대단히 잘 다스려졌다.

영가 2년(308년) 정월, 흉노족의 한나라에서 무군장군 유총, 보한장군 석륵, 진동장군 왕미 등 수많은 장수를 앞세워 대대적으로 진나라를 침공해왔다. 이때 유총의 공격을 받게 된 유은은 신흥을 들어 한나라에 항복했고, 유총은 유은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 여겨 시중으로 삼았다. 이후 광문제 유연의 눈에 들어 광록대부로 옮겨졌다.

하서 2년(310년) 7월, 광문제 유연이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자, 유은은 좌복야에 임명되어 우복야 왕육(王育), 이부상서 임의(任顗), 중서감 주기(周玘) 등과 함께 국정을 도맡았다.

광흥 원년(310년) 8월, 광문제 유연이 시름시름 앓다가 붕어하고 유화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유총이 정변을 일으켜 유화를 살해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황위에 오른 소무제 유총은 유은을 무척 중용하여 그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유총의 총애 아래 유은은 대사도, 녹상서사, 태보를 역임했고, 대창공(大昌公)에 봉해졌다.

가평 원년(311년) 11월, 소무제 유총이 태재 유예(劉乂)의 간언을 무시한 채 유은의 두 딸을 좌, 우 귀빈으로 맞아들였고[1], 유은의 네 손녀도 취하여 귀인으로 봉했다. 유총은 이 여섯 미녀를 모두 총애하여 침실 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척 드물었기에 전조의 모든 정사는 중황문(中黃門)에서 결정하였다.

가평 2년(312년) 6월, 태보 유은이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헌(文獻)'. 유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유은은 그 중 5명에게는 각각 오경 중 하나씩 가르치고, 남은 2명 중 1명에게는 《태사공》(太史公)을, 나머지 1명에게는 《 한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3. 일화

4.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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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영, 유아의 이름은 모두 본명이 아니라 유총이 하사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