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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타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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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 제2대 대칸
오고타이 칸 | ᠥᠭᠡᠳᠡᠢ ᠬᠠᠭᠠ
원 추존 황제
태종 | 太宗
파일:우구데이.jpg
출생 1186년 11월 7일
카마그 몽골 막북 초원
사망 1241년 12월 11일 (향년 55세)
몽골 제국 막북 고원 행궁
재위기간 몽골 제국 대칸
1229년 9월 23일 ~ 1241년 12월 21일
(12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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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오고타이(Өгэдэй)
窩闊台(와할태), 諤格德依(악격덕의)
ᠥᠭᠡᠳᠡᠢ
부모 부황 태조 칭기즈 칸
모후 광헌익성황후 보르테 우진 카툰
종교 텡그리교
묘호 태종(太宗)
시호 영문황제(英文皇帝)
칸호 오고타이 칸
窩闊台汗(와할태한), 諤格德依汗(악격덕의한)
ᠥᠭᠡᠳᠡᠢ ᠬᠠᠭᠠᠨ
언어별 표기 둘러보기 }}}}}}}}}

1. 개요2. 이름 표기3. 생애
3.1. 내치에서의 실패
3.1.1. 오해에서 기인한 잘못된 평가
4. 기타5. 가계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몽골 제국 제2대 대.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영문황제(英文皇帝). 휘는 오고타이(窩闊台).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

2. 이름 표기

파일:Ogadai_Khan.jpg
언어별 표기
한국어 오고타이 칸 / 우구데이 칸
중국어 窩闊台汗
일본어 オゴデイ・カン
몽골어 ᠥᠭᠡᠳᠡᠶ ᠬᠠᠭᠠᠨ
Өгэдэй хаан
영어 Ögedei Khan

오고타이 칸의 이름 표기에 대해서는 특정 언어의 말소리를 다른 언어의 표기로 옮길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작용해서, 그 결과 이름이 문헌에 따라 표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몽골어 /Ө/를 'ㅗ', 또는 'ㅜ'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2]

원래 한국에서는 '오고타이'라는 표기가 더 많이 쓰였고 오늘날 관련 서적 등에서도 이 표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21세기에 들어선 이후로는 그나마 원래 발음에 가장 가까운 우구데이로 수정되어 가는 추세다. 2010년대 이후 발간된 동아시아사 교과서 등 관련 서적에서는 '우구데이'로 표기되어 출간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아골타도 '아구다'로 표기하여 출간하는 추세다.

단,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여전히 '오고타이'로 표기하고 있기에, 표준국어사전이 수정되기 전까지는 본문에선 '오고타이'라고 표기한다.

3. 생애

아버지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을 이어 받았는데, 그의 치세에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서쪽 끝[3]과 남쪽 끝에 도달했다. 물론 중국, 이란, 중앙아시아도 연거푸 박살내고 다녔다. 원나라가 건국된 후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하지만 반면 술을 매우 좋아해서 건강에 문제가 있기도 했다. 술 좋아하는 것도 내력인지 그의 아들 중에서 술 때문에 아비보다 일찍 죽은 자식도 있었다. 한 튀르크인 무슬림을 싫어하여 "꿈에서 칭기즈 칸이 나타나 무슬림을 다 죽이라 명하셨다."고 오고타이 칸에게 호소했는데, 오고타이는 그에게 "선대 칸께서는 몽골말밖에 못 하셨으니[4] 그건 그냥 개꿈이니라."라는 말로 침묵시켰고, 후에 송나라인들이 인형극으로 무슬림을 까려고 하자 "송나라인 노예를 부리는 무슬림은 있어도 무슬림 노예를 부리는 송나라인은 없더라. 그러니까 정신승리는 그쯤 하지?"[5]라는 말로 침묵시켰다. 하지만 버로우시킬 뿐 죽인 인물은 없었다.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는 유럽 중앙아시아보다는 송나라 정벌에 힘쓴 시대이니만큼 한족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무슬림들을 끌어들여야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볼 수 있는 일화다. 하지만 다른 몽골족 지도자들보다 온화한 건 사실이다.

보통은 칭기즈 칸이 셋째인 오고타이를 칸으로 임명하자 다 따랐다고 하지만《 원조비사》에서는 주치의 핏줄이 문제가 돼서 둘째인 차가타이와 대립하게 되자 그나마 조정자가 될 수 있는 셋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한다.[6] 칭기즈 칸은 1227년 서하 원정 중 사망했고, 칭기즈 칸의 첫째 아들 주치는 그전에 죽었다. 칭기즈 칸 사후 2년간 막내 동생이 섭정을 했지만 1229년 쿠릴타이에서 대칸에 올랐다. 둘째 형 차가타이는 오고타이 칸을 지지했다.

말자 상속제 때문에 주치와 차가타이에게는 승계권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7]

오고타이 칸 시절 중요한 전장 중에 한 곳은 중동 지역이었다. 칭기즈 칸이 자근자근 밟아놨던 호라즘 왕조의 왕자 잘랄 웃 딘이 중동 지역에 돌아와 깽판을 치고 다니자 오고타이 칸은 몽골군을 보내 중동 지역을 침공하게 한다. 이 군세는 잘랄 웃 딘을 제압하고 캅카스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든다.[8]

1230년 무렵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 전선에 집중했다. 산서성에서 툴루이와 합동 작전으로 금군의 주력을 쓸어버린 뒤[9] 금나라의 수도인 개봉을 포위한다.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자 오고타이 칸은 전선을 떠났고 이후 몽골군은 남송의 지원을 받아 1234년 금나라를 멸망시켰다.[10] 이후 남송이 개기자 1235년부터 남송을 침공하여 이후 40여 년에 걸쳐져 벌어질 남송과의 긴 전쟁을 시작한다. 요동 지방의 거란족 반란군들을 진압하던 와중에 불똥이 튀어 1231년 고려에 쳐들어오기도 했다.[11]

남송과의 전쟁이 막 시작되는 무렵인 1236년 유럽 쪽에도 바투가 이끄는 원정군을 보냈다. 캅카스 지역과 남부 러시아 지역을 강타한 바투의 원정군은 동유럽에까지 나타났다. 1241년 폴란드 헝가리 전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에게 남은 유럽 지역을 정복할 수 있게끔 허가를 받았다. 몽골군은 오스트리아 공국에 처들어가려고 했으나 원인 미상의 이유로 되돌아갔다. 오고다이 칸이 비슷한 시기에 죽어 몽골의 전통에는 황제가 죽으면 황족이 모두 모인 다음에 쿠릴타이를 열어 그 다음 황제를 선출해야 했기 때문이였다는 가설이 전통적인 추측이었으나, 현재는 부정하는 학설도 꽤 많다.[12] 폴란드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다음 타겟은 바로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13]

오고타이 칸은 인도 방면에도 군대를 보냈지만 일부 지역을 속국으로 두었을 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4]

3.1. 내치에서의 실패

야율초재는 북중국 지역에 사는 한인(漢人)들의 호수(戶數)와 인구의 수를 조사한 후, 그에 합당한 법령을 세우고 세금을 거두라는 조언을 하고, 우구데이(= 오고타이)는 야율초재의 말을 받아들여 한지세법(漢地稅法)을 제정했다. 그러나, 우구데이는 호구 조사와 토지 조사를 통해 파악한 세역과 토지를 종실과 부마, 공신들에게 봉토로 주고 말았다.[15]

야율초재는 깜짝 놀라서 말렸지만 오고타이는 듣지 않았다. 야율초재가 기대했던 대로 하북 지역에서는 정해진 호수와 정해진 조세 법률로 인해 막대한 재화가 흘러 나왔지만 봉토를 하사받은 종친들과 공신들의 후손, 그리고 한인 군벌들이 그 세금을 합법적으로 중간에서 가로채기 시작했고 이는 제국의 재정 상태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다.
파일:northern china in mongol empire.jpg
오고타이가 나눠준 봉토 목록

또한 상인인 유정옥(劉丁玉), 세라흐, 우딘, 유쿠투마(劉忽都馬) 등이 제국의 조세 방식을 불평하며[16] 상인들이 정해진 세금을 조세를 거두는 날보다 미리 내는 대신, 미리 내면서 발생하는 손실금을 그 달 거두어 들이는 조세에서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른바 조세에서의 매박(買撲) 행위를 요구한 것이다.[17] 야율초재는 " 세금을 미리 내나 정해진 때 내나 제국엔 변화가 없고 반드시 내야할 금액의 세금을 미리 내고 조세를 더 거두어 들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라며 말렸다. 이때는 오고타이 역시 그 말을 옳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고타이 통치 11년이 되던 해에 이슬람 상인이자 징세를 담당했던 '압둘 라흐만'이라는 자가 당시 몽골 제국에서 책정한 세금보다 훨씬 많은 양인 110만 석의 세금을 미리 내고 그 대가로 조세에서 세금의 2배로 보상 받겠다고 제안하자[18] 오고타이는 솔깃해 그 말을 따랐다.[19]

위의 두 가지 정책으로 인해 제국의 대다수 상인들은 세금을 미리 낸 뒤[20]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기 시작했고 종친과 공신들에게 무지막지한 양의 봉토를 내려준 탓에 종친과 공신의 후손들은 상인들과 손을 잡고 어마어마하게 돈을 긁어모은 것으로도 모자라, 포은세(包銀稅)를 제정해[21][22] 백성들에게 강제로 고리대를 안겨 더 큰 불법적인 이익을 얻어냈다.[23]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제국 말기까지 이어져 몽골인들이 세운 제국의 수명을 크게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그런 상황을 이용하여 세력을 불린 원나라 말기의 군벌들 중 1명이었던 주원장 명나라를 세우면서, 오고타이 칸은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의도치 않게나마 명나라 건국의 원인을 제공한 꼴이 되었다.

3.1.1. 오해에서 기인한 잘못된 평가

위 항목에서는 오고타이 칸이 야율초재의 노력으로 완성된 한지 세법으로 수취하는 막대한 세금과 제국의 거대한 영토를 왕공 대신들에게 퍼줬다고 평가하지만, 이는 몽골 제국에 대해 기초도 모르는 소리다. 당대 몽골인들과 왕공 대신들은 정복지이 소유하는 개인 재산이 아니라 정벌에 참여한 모두의 공유 재산으로 인식했고 칸은 이를 공정하게 분배할 의무가 있었다. 이는 테무진도 어쩌지 못한 관습이며 오고타이도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구데이(= 오고타이)가 칸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칭기즈 칸 생전부터 시작한 자손들 간의 계승 분쟁은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우구데이 울루스의 경쟁 세력들은 여전히 세력이 막강하여 주치계는 몽골 초원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났지만, 그 세력이 건재했고 차가타이계는 수장인 차가타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힘을 합쳐 쟁취해 낸 정복지를 이 다 가져간다면, 칸 스스로 수명을 단축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구데이의 토지 분봉과 많은 이들에게 막대한 재화를 하사하고 사소한 이유로도 큰 은상을 내려준 일들은 모두에게 칸의 관대함을 보여주고 은상과 토지를 매개로 칸으로서의 권위와 왕공 대신, 군인, 부족장들의 충성심을 재확인받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위 항목에서 언급한 '한지세법', 정확히는 '한지과차(漢地差發)' 또는 '쿱추르'는 우구데이(= 오고타이) 당대에 으로 수취하지 않았다. 우구데이 시기에는 중국의 정주민들에게 사료(絲料)라고 부르는 생사와 1호당 4석의 곡물을 세량이란 명목으로 요구하고 있었고, 포은(包銀)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포은을 최초로 징수한 칸은 뭉케 칸이며 뭉케 칸도 1호당 6냥의 은을 납부할 것을 명했다가 그 다음 해에 4냥으로 감액하고, 4냥 중에서 2냥은 비단이나 생사로 대납할 수 있게 허용해 주었다. 위 항목에서 우구데이 시기에 징수했다는 포은은 포은이 아니라 오르톡 상인에게 징세 청부권을 주고 받은 이었다.

위 항목에서 매박이라 표현하는 징세 청부 같은 경우에는, 제왕들이 통치하는 하위 울루스 지역에 만연해 있었다. 이 징세 청부권을 갖고 있던 오르톡 상인들은 오고타이 칸의 시기까지 카안으로부터 막대한 특권을 부여받아 고리대와 징세 청부, 각종 특권을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민중들을 착취했다. 오고타이 칸이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은 것은 오르두와 쿠릴타이에서 필요로 하는 막대한 재화와 제국 전체의 혈관인 역참, 새로운 정복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군수품 조달, 몽골 초원 한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소비 도시인 카라코룸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그가 내정에 문외한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오르톡 상인들의 폭거는 뭉케 칸 시기부터 오르톡 상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가 실시되면서 크게 줄어 들었다. 뭉케 칸은 오르톡 상인들의 고리대, 각 제왕들의 울루스에서 자행하는 세금 착취 행위의 폐단을 완화했다. 또한 면세 혜택을 비롯해 오르톡 상인들이 갖고 있던 온갖 특권도 회수하거나 제한하고 이들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다. 뭉케 칸의 후임인 쿠빌라이 칸도 이러한 기조를 계승해 오르톡 상인들이 고리대업을 하는 것을 계속 제지하고 통제를 강화했다.

따라서, 상인들이 은이나 교초를 융자해 제국의 수명을 크게 단축시키는 일은 없었고, 오고타이 칸은 장기적으로 원명 교체를 야기하지도 않았다. 징세 청부로 상당한 양의 은이 하북에서 서역으로 유출되긴 했지만, 딱히 중국에서 은이 모자라지도 않았다. 쿠빌라이 칸의 시기에 원 조정은 평준고에 막대한 양의 은을 보유하고 있었고, 언제든지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으로 은이나 교초, 동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현실 속에 존재한 오고타이 칸은 여러가지 실책이 있긴 했지만, 즉위 초에 형인 차가타이와 논의하여 세금 제도와 여러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역참제를 확대 시행했으며 아버지 칭기스 칸이 기용했던 색목인 '마흐무드 얄라바치'[24]와 그의 아들 '마수드 벡'[25]을 기용하는 등 정력적으로 국정에 임하며 성과를 내는 모습도 보였다.

4. 기타

《칭기즈 칸 유럽을 깨우다》의 저자 잭 웨더포드는 오고타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그의 술주정뱅이적인 면을 더 강조했다.

원조비사》의 마지막은 오고타이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돌아보는 것으로 끝나는데, 자신이 잘한 것으로 군사 활동 역참을 놓은 것, 물이 부족한 곳에 우물을 판 일 등을 꼽고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술에 빠진 것[26] 등을 언급했다.

야율초재의 명언은 이 오고타이와의 대화 중 나온 거라고 한다.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서는 칭기즈 칸, 쿠빌라이 칸과 함께 동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오고타이 칸 제위 당시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했고, 1234년 남송군이 카이펑, 낙양을 수복했다가 실패로 끝난 단평입락, 제1차 몽송전쟁도 오고타이 칸 대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칭기즈 칸이 다 커서도 자신의 어머니이자 오고타이의 할머니인 호엘룬에게 벌벌 떤 것처럼 오고타이도 자신의 형인 차가타이를 두려워해서 취중에도 그가 나타나면 두려워했다고 한다. 대칸이니 성질 더러운 귀위크 같았으면 무슨 술수를 썼을 테지만 오고타이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은 차가타이가 자신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벌을 받으려 하자 "형제끼리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고 차가타이를 달랬다. 근데 차가타이는 기어코 스스로 벌을 받았지만...

5. 가계

6. 대중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오고타이 칸/오고타이.png 파일:오고타이칸.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파워업키트 일러스트

징기스칸 3원조비사에서는 2번시나리오에서 몽골제국의 징기스칸의 자식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C, 전투B, 지도B 매력B의 정치C를 제외한 올A를 가진 아버지에 비해 한단계 다운그레이드 된 능력치지만 이 능력치도 원조비사에서는 좋은 능력치이다.

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 시나리오 1에선 얼굴도 좀 순딩이[27]에 능력도 정치력이 높긴 하지만(정치 88, 전투 64, 지모 69)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서 대칸이 될 남자치곤 좀 심심했는데... 파워 업키트에 추가된 시나리오 3(늑대들의 포효)에선 대칸으로 시작해서 얼굴부터 상당히 간지나게 변한 데다가 능력치도 올라가서(정치 88, 전투 71, 지모 76) 과연 2대 칸다운 위엄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시나리오 3에선 몽골 제국이 이미 시작부터 최강이라서 도시 하나를 의학의 도시로 만들고[28] 오고타이를 넣은 뒤, 초기 장수들을 잘 활용하면 1대에 유라시아를 통일할 수 있다. 능력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정치 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등용 특기가 있어서 게임에서는 도시의 영주 및 수도에서 왕비와 함께 자식 농사용으로 쓰게 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2.4 기마 군주 DLC 이전에는 부모 및 다른 형제들과 함께 구현되어 있긴 했으나 중국 외몽골 지역이 구현되지 않은 탓인지 칭기즈 칸 사후로 연도를 돌려 보면 차가타이가 다스리는 히바 왕국의 가신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기마 군주 DLC에서 카라코룸이나 돈황까지 맵이 확장됨에 따라, 이후로는 몽골 제국 대칸으로 구현됐고, 옥룡 DLC부터는 1234 ~ 1241년에 원나라 황제로 중국에 있다.[29]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13세기 몽골을 배경으로 한 슈토헬은 마지막 권 말미에 칭기즈 칸의 막내인 톨루이가 2년 동안 왕좌를 맡고 있다가 자신의 등에 새겨진 " 서하의 노예"라는 글자를 노출하고 둘째 형에게 왕위를 양도했다는 간략한 언급으로만 나온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톨루이는 실제 역사의 톨루이가 아니라 이 녀석.

7. 둘러보기

원사(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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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아 · 소열태초올아 · 활활불화 · 배연팔도로 · 아술로 · 소고아 · 아랄와이사 · 초아 · 야포감복 · 조아가반 · 순지해 · 점철발도아 · 겁겁리 · 탑불이아 · 직탈아 · 월리마사 · 날고랄 · 아아사란 · 합팔아독 · 애모
124권 「탑본등전(塔本等傳)」
탑본 · 합랄역합적북로 · 탑탑통아 · 악린첩목이 · 이정(李楨) · 겁렬속가 · 망가산아 · 맹사속
125권 「새전적섬사정등전(賽典赤贍思丁等傳)」 126권 「안동등전(安童等傳)」
새전적섬사정 · 포로해아 · 고지요 · 철가 안동 · 염희헌
127권 「백안전(伯顏等傳)」 128권 「아추등전(阿朮等傳)」
팔린백안 아출 · 아리해아 · 상위 · 토토흡
129권 「내아팔적등전(來阿八赤等傳)」 130권 「철리등전(徹里等傳)」
내아팔적 · 뉴린 · 아랄한 · 아탑해 · 사도 · 이항 연지길태철리 · 불홀목 · 토별연완택 · 아로휘살리
131권 「속가등전(速哥等傳)」
속가 · 낭가알 · 망올태 · 오로적 · 완자도(2) · 백첩목아 · 회도 · 역흑미실 · 배항
132권 「항홀사등전(杭忽思等傳)」
아속항홀사 · 보로합답 · 옥와실 · 맥리 · 탐마적 · 발도아 · 앙길아 · 합랄태 · 사전 · 첩목아불화
133권 「탑출등전(塔出等傳)」
탑출 · 배연 · 야한적근 · 엽선내 · 탈력세관 · 홀날출 · 중희 · 단지아 · 찰랄아태탈환 · 실리백 · 패란해 · 겁렬 · 암백 · 야속태아 · 석도아
134권 「철길사등전(撒吉思等傳)」
철길사 · 월합내 · 석반 · 철련 · 애설 · 활활 · 독홀로 · 당인조 · 타아적 · 화상 · 유용 · 가로납답사 · 활리길사 · 소운석탈홀련 · 알라사 · 타라태 · 야선불화
135권 「철가술등전(鐵哥朮等傳)」
철가술 · 탑출 · 탑리적 · 탑해첩목아 · 구아길 · 홀도 · 패아속 · 월거련적해아 · 아답적 · 명안 · 홀림실 · 실랄발도아 · 아속철리 · 갈랄 · 걸태 · 탈인납 · 내만태화상
136권 「합랄합손등전(哈剌哈孫等傳)」 137권 「백찰한등전(伯察罕等傳)」
합랄합손 · 아사불화 · 배주 백찰한 · 곡추 · 아례해아 · 혁혁저아이정 · 탈열해아
138권 「강리탈탈등전(康里脫脫等傳)」 139권 「내만태등전(乃蠻台等傳)」
강리탈탈 · 연철목아 · 멸아길태백안 · 마찰아태 · 탈탈 내만태 · 타아지 · 타이직반 · 아로도 · 뉴적해
140권 「별아겁불화등전(別兒怯不花等傳)」 141권 「태불화등전(太不花等傳)」
별아겁불화 · 하유일 · 철목아탑식 · 달식첩목이 태불화(太不花) · 찰한첩목아
142권 「답실팔도로등전(答失八都魯等傳)」 143권 「마조상등전(馬祖常等傳)」
답실팔도로 · 경동 · 야속 · 철리첩목아 · 납린 마조상 · 노노 · 자당 · 아영 · 소운석해애 · 태불화(泰不華) · 여궐
144권 「답리마등전(答里麻等傳)」 145권 「역련진반등전(亦憐真班等傳)」
답리마 · 월로첩목아 · 복안철목아 · 성길 · 복수 · 도동 역련진반 · 염혜산해아 · 월로불화 · 달례마식리
146권 「야율초재등전(耶律楚材等傳)」 147권 「장유등전(張柔等傳)」
야율초재 · 점합중산 · 양회중 장유 · 사천예 · 사천상
148권 「동준등전(董俊等傳)」 149권 「야율유가등전(耶律留哥等傳)」
동준 · 엄실 야율유가 · 유백림 · 곽보옥 · 석천응 · 야율독화 · 왕순(王珣)
150권 「석말야선등전(石抹也先等傳)」
석말야선(3) · 하백상 · 이수현 · 야율아해 · 하실 · 학화상발도 · 조진 · 석말명안 · 장영 · 유형안
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설탑랄해 · 고요아 · 왕의(王義) · 왕옥 · 조적 · 저순 · 왕선 · 두풍 · 석말패질아 · 가타라콘 · 오돈세영 · 전웅 · 장발도 · 장영
152권 「장진형등전(張晉亨等傳)」
장진형 · 왕진 · 양걸지가 · 유통 · 악존 · 장자량 · 당경 · 제영현 · 석천록 · 유빈 · 조유
153권 「유민등전(劉敏等傳)」
유민 · 왕즙 · 왕수도 · 고선 · 왕옥여 · 초덕유 · 석천린 · 이방서 · 양환 · 가거정
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홍복원 · 정정 · 이진 · 석말안지 · 알지리 · 정온 왕세현 · 사천택 동문병 · 장홍범
157권 「유병충등전(劉秉忠等傳)」 158권 「요추등전(姚樞等傳)」 159권 「송자정전(宋子貞等傳)」
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왕반 · 왕악 · 고명 · 이치 · 이창 · 유숙 · 왕사렴 · 이겸 · 서세륭 · 맹기 · 염복
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양대연 · 유정(劉整) 이홀란길 · 이정(李庭) · 사필 · 고흥 · 유국걸
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166권 「왕준등전(王綧等傳)」
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170권 「상문등전(尙文等傳)」
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유인 · 오징 정거부 · 조맹부 · 등문원 · 조원용 · 제이겸
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장규 · 이맹 · 장양호 · 경엄
176권 「조백계등전(曹伯啟等傳)」
조백계 · 이원례 · 왕수 · 왕의(王倚) · 유정(劉正) · 사양 · 하약우 · 조사로 · 유덕온 · 울지덕성 · 진기종
177권 「장사명등전(張思明等傳)」 178권 「양증등전(梁曾等傳)」 179권 「하승등전(賀勝等傳)」
장사명 · 양원규 · 장승 · 장몽해 · 진호 양증 · 유민중 · 왕약 · 왕결 · 송도 · 장백순 하승 · 양타아지 · 소배주
180권 「야율희량등전(耶律希亮等傳)」 181권 「원명선등전(元明善等傳)」 182권 「장기암등전(張起巖等傳)」
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여사성 · 왕택민 · 간문전 · 한용 · 이직 · 개묘 장정 · 귀양 · 진조인 · 성준 · 조감 · 장저
187권 「오고손양정등전(烏古孫良楨等傳)」 188권 「동단소등전(董摶霄等傳)」
오고손양정 · 가로 · 녹로증 · 공사태 · 주백기 · 오당 동단소 · 유합랄불화 · 왕영 · 석말의손
189·190권 「유학전(儒學傳)」
조복 · 장수 · 김이상 · 허겸 · 진력 · 호일계 · 황택 · 한택 · 동서 · 안희 · 호장유 · 웅붕래 · 대표원 · 모응룡 · 정저손 · 진부 · 동박 · 양재 · 유선 · 한성 · 오사도 · 주문규 · 주인영 · 진려 · 이효광 · 우문공량 · 합랄로백안 · 섬사
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 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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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칭기즈 칸은 1227년 사망했는데 즉위년이 1229년인 것은 이 2년 동안 동생 툴루이가 섭정했기 때문이다. [2] 몽골어 /Ө/는 중설 원순 중모음인데 독일어 튀르키예어의 전설 원순 중모음인 /ö/보다 훨씬 뒤쪽에서 발음된다. 한국어의 /ㅜ/보다 입을 좀더 벌리되 그렇다고 /ㅗ/처럼 뒷쪽에서 발음하지는 않는 소리. 그래서 '오고타이'보다는 '우구데이'가 몽골어 원어 발음에 비교적 더 가깝다. [3] 바투 유럽 원정. [4] 당시 몽골 땅의 귀족이면 튀르크어는 어릴 때부터 기본으로 배우는 것이었지만, 칭기즈 칸은 아버지가 독살당한 후 젊은 시절엔 죽도록 고생만 한 흙수저였기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전직 나이만 부족의 책사였던 타타통아가 칭기즈 칸의 휘하에 들어온 후 칭기즈 칸 일가에게 위구르 문자를 가르쳐봤지만, 정작 칭기즈 칸은 가족 중 유일하게 터득하지 못하고 문맹으로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칭기즈 칸이 창제한 몽골 문자는 위구르 문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5] 노예로 안 부리는 게 나은 거 아닌가 할 수 있지만, 중세의 노예란 근세 이후의 노예와 달리, 외국인을 인신매매로 사 와서 하인으로 부리는 주인의 권세를 나타내는 사치품 취급이었다. 따라서 아예 하인 취급조차 안 해줬다는 그런 얘기다. [6] 주치는 칭기즈 칸의 장자이기는 했으나 친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치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불발되었다. 차가타이는 성정이 격하고 주치와의 대립이 심했기에 칭기즈 칸은 아예 후계자 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온화한 오고타이가 후계자가 되었다. [7] 이에 대해서는 저자: 김호동, “칭기스 칸의 자제분봉(子弟分封)에 대한 재검토:『집사(集史)』〈천호일람(千戶一覽)〉의 분석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연구》 9권(2004)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말자 상속제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몽골인들이나 하는 거지 거대 제국을 거느린 칭기즈 칸이 선택할 만한 방법이 아니었다. 말자 상속제에 대해서도 다소 오해가 있는데, 형들이 아버지로부터 일정한 재산을 물려받고 독립해 나가면 남은 아버지의 재산을 막내가 받는 식이다. 막내가 모든 재산을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8] 한편 잘랄 웃 딘은 1231년 쿠르드 계열의 아미르에 의해 피살당하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9] 이때 금나라의 마지막 명장 중 한 명인 완안진화상이 충효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해서 몽골군에 맞섰다. 완안진화상은 처음에 도회곡이라는 곳에서 수부타이를 위시한 몽골군을 패퇴시키는 등 맹위를 떨쳤으나 결국 툴루이의 계략에 말려서 한 곳으로 몰린 끝에 최후의 항전을 벌이나 참패하고 몽골군에 자진 출두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당당함을 유지했고 또한 투항을 거부했다. 비록 투항을 거부했으나 그의 당당한 태도에 몽골 장수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완안진화상이 아무리 고군분투했다고 하더라도 전황을 뒤집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미 오랜 전쟁으로 금나라의 정예 전력인 기병 전력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기병 전력을 충원해 줄 만주 지역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한번 소진되면 다시는 복구가 불가능 했다. 결국 완안진화상의 충효군은 보병 위주였고 이들 만으로는 야전에서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10] 금나라가 망하고도 곽하마라는 장군이 저항했다고 한다. 곽하마는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결국 힘이 다하자 스스로 불에 들어가서 분사한다. 곽하마는 활을 매우 잘 쐈다고 하며 서하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수백 발의 화살을 쏴 적을 맞혀 몽골군 장군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11] 여몽전쟁 참조. [12] 우구데이의 사망이 주된 원인이라는 기록은 이탈리아와 교황청의 외교관인 조반니 카르피니의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이 기록은 몽골의 침입 후 100여년 이후 작성된 것 뿐만 아니라 상당히 정치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몽골 때문에 위기에 처한 유럽이 대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 그게 누구의 뜻일까?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 칸국, 즉 툴루이 울루스의 대재상인 라시드 앗 딘은 당시 몽골군이 우구데이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은 몽골 울루스의 공식 기록일 뿐만 아니라, 라시드 앗 딘은 저술 과정에서 볼라드 칭상 등 몽골의 핵심 관료들과 접촉하여 자료를 수집하였으므로 카르피니의 기록보다 신빙성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바투와 그의 부관들은 유럽 원정을 이어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원정대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던 수부타이가 바투에게 다소 협박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까지 귀환을 주장했고 결국 그의 의견에 따라 귀환을 선택했다. 대신 타협책으로 귀환길을 발칸반도를 경유하는 길로 잡아 약탈전을 계속 수행했다. [13] 다만,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레그니차 전투 직후 신성 로마 제국 영방국가인 마이센 변경백국(나중에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인 마이센을 약탈한 후 파괴하거나 다른 영방국가인 보헤미아 왕국을 공격했다가 격퇴당한 적은 있다. [14] 이미 대제국이었던 몽골의 입장에서 큰 성공이 아니라는 뜻이며, 속국으로 두게 된 지역은 라호르 일대의 소국들로 합치면 10만 제곱키로가 넘는 현 대한민국 영토에 비등한 지역을 속국으로 둘 수 있었다. [15] 칭기스 칸의 숙부가 되는 달리타이의 후손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칭기스칸에게 돌아와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영해주(寧海州)의 봉토 10,000호 / 칭기스 칸의 장자인 주치의 자손에게는 평양(平陽)의 40,000호 / 칭기스 칸의 영애이자 오고타이의 누이인 조국공주(趙國公州)에게는 고당주(高唐州)의 20,000호 / 칭기스 칸의 부마인 테무다이에게는 자주(磁州)의 10,000호 / 공신 무칼리의 후손들에겐 동평로(東平路)의 40,000호를 하사하는 등 그냥 땅을 마구잡이로 퍼줬다. 심지어 이 각주 속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정도. [16]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을 현지에서 판매해야 하는데, 조세를 내기 위해 또 별도로 정해진 장소로 이동해야 하니 많은 불편함이 발생하는데다 세리들이 조세를 거두는 때와 상단이 도착하는 시기가 잘 맞지 않아 형평성이 없다는 내용이다. [17] 이 상인들이 세금을 대신 거둬들이는 매박은 송나라에서도 있었다. [18] 이 제안은 들을 땐 그럴싸해 보이지만 어차피 2배를 뜯어가는 거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1도 도움이 안되는 얘기다. [19] 압둘 라흐만은 훗날 귀위크 칸이 즉위했을 때 처형 당했다. [20] 당시엔 유럽의 길드처럼 상인 집단이 지방 귀족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수익의 일부를 바치는 형태의 '오르톡(Ortoq)'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이 집단 자체가 조세 매박에 동참했다. [21] 말 그대로 각 호(戶)마다 강제로 일정량의 은을 반드시 납부하는 제도로, 이율을 따질 수도 은을 대체할 품목을 낼 수도 없었기에 은을 구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상인들, 즉 오르톡에서 반강제적으로 융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22] 한지세법으로 인해 하북의 백성들은 이미 장정수 혹은 토지 면적에 따라 곡물을 세금으로 내고 있었다. 거기에 강제로 은까지 내라고 한 탓에 백성들의 고역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3] 이 포은세로 인해 약 30년 동안 하북의 은이 몽골인 관료들의 주머니와 무슬림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서방으로 대거 흘러 들어갔다. 후일 쿠빌라이는 은 대신에 교초(交鈔)라 불리는 지폐를 받게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도 자체가 바뀐 건 아닌지라 상인들은 은 대신 교초를 융자해 주면서 이익이란 이익은 다 챙겼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매박 상단이 원나라의 교초를 불법으로 유통하는 장면이 바로 이 제도를 악용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24] 무슬림으로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최초의 몽골 총독(= 다루가치)이었다. [25] 훗날 오고타이 칸국 카이두 칸 킵차크 칸국의 멩구티무르 칸이 상호 협정을 맺었을 때, 사마르칸트와 같은 정주민들이 많은 도시의 행정권을 넘겨받기도 했다. [26] 이러한 오고타이의 알콜 중독 성향을 경계하기 위해 차가타이가 매일 1잔만 마실 것을 권하자(사실상 강요) 엄청난 크기의 술잔을 만들어 1잔만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들유들한 오고타이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재밌게도 주당인 인물들이 술잔을 늘렸다는 일화는 한국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조선 시대 세종 시기의 윤회, 성종 시기의 손순효, 선조 시기의 정철 등이 있다. [27] '발에 채이는 클론 장수 1'처럼 생겼으나 게임 폴더에 포함된 이미지 파일을 확인하면 고유 얼굴이다. 파워 업키트라면 PK 오고타이 얼굴로 에딧 없이 바꿀 수 있다. [28] 사마르칸트는 초기 의학, 학술 수치가 57, 42라 의학 + 학술의 도시로 만들기 쉽다. 임안도 초기 의학이 51이라 의학 도시로 만들 수 있지만 바다 때문에 건설 공간이 부족해서 교역도 같이 해야 한다. [29] 게임에선 남송이 없어서 금나라 다음은 곧바로 원나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