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구처기(사조삼부곡)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름 | 구처기(丘處機) |
자 | 통밀(通密) |
도호 | 장춘자(長春子), 장춘진인(長春眞人) |
시호 |
장춘연도주교진인(長春演道主敎眞人), 장춘전덕신화명응진군(長春全德神化明應眞君) |
소속 | 전진교 |
출생 | 1148년 음력 1월 19일[1] |
사망 | 1227년 음력 7월 9일 (향년 7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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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나라 때의 도사. 자는 통밀(通密)이고 도호는 장춘자(長春子)로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이자 전진교 제 5대 조사이다.2. 생애
등주 서하(棲霞) 사람으로 10대 때 도교에 푹 빠져서 장생불사의 이야기가 아니면 입에 담지 않았고 결국 19세( 1166년) 때 출가했다. 이듬해 왕중양이 영해(寧海)에 머무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왕중양은 구처기에게 시 한 수를 지어주며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細密金鱗戲碧流
금비늘이 촘촘한 물고기 푸른 물가를 노닐다가
能尋香餌會呑鉤
좋은 미끼를 찾아서 낚시바늘을 삼키네.
被予緩緩收綸線
내 천천히 낚시줄로 잡아당겨서
拽人蓬萊永自由
봉래산으로 끌어올려 영원토록 자유롭게 하리.
『금련정종기』[2] 「장춘구진인」
금비늘이 촘촘한 물고기 푸른 물가를 노닐다가
能尋香餌會呑鉤
좋은 미끼를 찾아서 낚시바늘을 삼키네.
被予緩緩收綸線
내 천천히 낚시줄로 잡아당겨서
拽人蓬萊永自由
봉래산으로 끌어올려 영원토록 자유롭게 하리.
『금련정종기』[2] 「장춘구진인」
이렇게 왕중양의 제자가 된 구처기는 다른 사형제들과 함께 스승을 따라다니며 공부하였다. 1170년 왕중양은 개봉에서 임종하였는데, 이때 공부가 아직 부족한 구처기를 제자 마옥에게 맡기며 잘 이끌어줄 것을 명했고[3] 구처기에게는 훗날 비상한 지위에 올라 전진교의 교세를 크게 넓힐 것이라 예언하였다고 전해진다.
3년간 스승의 장례를 치른 후, 구처기는 사형들과 헤어져 섬서성의 보계에 머물며 10년 넘게 수련하였다. 1174년부터 1180년까지의 처음 7년 동안은 보계의 반계(磻溪)[4]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매일 한 끼의 밥을 먹고 도롱이 한 벌로 사계절을 보냈기에 사의선생( 蓑衣先生)이라 불렸다. 그 후에는 인근의 용문산(龍門山)으로 거처를 옮겨서 1186년까지 다시 7년간 수도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명성이 높아져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것이 훗날 구처기를 따르는 이들을 용문파(龍門派)라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186년 겨울 협곡청신(夾谷淸臣)의 청을 받고 용문산을 내려와 스승이 수련했던 종남산에 머물렀다.
1188년 금나라 세종의 초청을 받고 연경에서 만춘절의 재초(齋醮)를 주재하는 한편 세종과 세 차례에 걸쳐 도에 대해 문답하였고, 여동빈과 스승 왕중양, 사형 마옥 세 사람의 상을 세웠다. 같은 해 8월 세종이 내리는 십만 전을 사양하고 다시 종남산으로 돌아갔다. 1190년에 장종(章宗)이 혹세무민을 이유로 불교와 도교의 금지령을 내리자 다음해 음력 10월 고향인 등주 서하로 돌아가 임궁(琳宮)[5]을 짓고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재초행사를 지내며 전진교를 전도했다.
1203년 사형인 유처현이 세상을 떠나자 구처기는 전진교의 5대 장문인이 되었고, 산동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펼치면서 왕중양의 내단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였다.[6] 1214년 가을 산동에서 양안아[7]가 일으킨 군사들을 투항시키는데 성공하여 금나라 조정으로부터 자연응화홍교대사(自然應化弘敎大師)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금나라와 남송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은 채[8] 내주(萊州)의 호천관(昊天觀)에 머물렀다.
그리고 1219년 5월, 호라즘 원정 중이던 몽골의 칭기즈 칸이 구처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늘은
중원의 극에 달한 교만함과 화려함을 싫어하지만,
짐은 북쪽의 초원에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을 좋아함에도 오히려 질박하게 지내고,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따라서 먹는 밥과 입는 옷도 목동이나 마부들과 같은 것으로 하고 있소. 짐은 백성들을 내 아이들처럼 바라보고, 재사들을 내 형제들처럼 양성하고 있으며, 생각하는 것도 항상 온화하게 하고 백성들을 은혜로 아끼고 있소. 또한 여러 사람들을 나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고, 수 많은 전쟁에서는 짐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았소. 그리하여 7년 후에는 대업을 이루어 천하(六合) 안에 있는 것을 일통할 수 있었소.
짐은 덕이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금나라의 정치가 기울어져 있었기에 하늘의 도움을 받아 지존의 자리를 이을 수 있었소. 남쪽으로는 송나라와 이어있고, 북쪽으로는 회흘과 접해 있으며, 동쪽에는 서하, 서쪽에는 이적들이 있는데, 다들 나에게 칭신하고 있소. 내 생각으로는 우리 선우국[9]이 그간의 1000년, 아니 3000년 동안 이와 같은 땅을 가진 적이 없다고 보이는구려. 그러나 맡은 일이 크고 수성하는 일이 무거워서 나라를 다스림에 흠결이 있을까 두렵소. 그래서 장차 배를 만들고 강을 건너 현능한 이들을 초청하고 그들을 인선하여 천하를 평안케 하려 하오.
짐이 임금의 자리를 이은 이래 여러 정사들에 마음을 쓰고 있으나, 삼공 구경의 자리에 오를만한 사람들은 아직 보질 못했소. 듣자하니 선생께서는 몸소 참된 예의와 법규를 실천하시고, 만물에 박학다식하시어 그 깊은 이치를 궁구하시며, 크나큰 도와 덕을 알리시면서 옛 사람의 엄숙한 풍모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고아한 지조를 품고 계시고, 오래도록 산에 머무르고 스스로를 숨기시며 조사의 유풍을 밝히셔서, 가만히 계셔도 도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신선의 길을 쫓아 선생이 계신 곳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들었소.
존경하는 선생께오서는 전쟁이 끝난 후부터 산동의 옛 경내에 더욱 숨어살고 계시지만, 짐은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그친 적이 없었소. 선생께서 지난 날 문왕이 위수에서 태공망을 만나 그와 수레를 함께한 일과 유비가 제갈량을 맞이하기 위해 그의 띠풀집을 세 번 방문한 일을 어찌 모르시겠소만, (선생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산천이 대단히 크고 넓어서 내가 선생을 맞이하지 못하는 실례를 범하게 하고 말았소.
다만 짐이 (국사가 많아) 임금의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기에,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는 대신) 목욕재계하고 근시(近侍)인 유중록(劉仲祿)을 선발하여 날랜 기병들과 수레를 갖추어 천리도 멀다 않고 삼가 선생을 맞이하고 싶소. 선생의 신선같은 발걸음으로는 사막도 멀다 여기지 않을 터이니, 만약 백성들과 당금의 일들을 걱정해주시고 보신의 술(保身之術: 도교의 양생술)로 짐을 구휼하러 와주신다면 친히 신선의 자리를 마련하여 기다리고 있겠소. 존경하는 선생의 기침소리라도 좋으니 다만 한 마디 말씀일지라도 다 받아들이겠소. 부족하나마 짐의 이 미미한 뜻의 만분지 일을 이 조서에 밝혀서 보내오.
존경하는 선생께서는 이미 깊은 도의 경지에 이르시어 선함이 필요하다면 응하지 않는 곳이 없으실 것이오. 그러니 어찌 중생의 조그만 소원도 거절하시겠소! 그런 까닭에 짐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이 조서에 적어서 보이는 바이오.[10]
기묘년 5월 1일.
「 성길사황제사 구신선수조(成吉思皇帝賜丘神仙手詔)」[11]
짐은 덕이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금나라의 정치가 기울어져 있었기에 하늘의 도움을 받아 지존의 자리를 이을 수 있었소. 남쪽으로는 송나라와 이어있고, 북쪽으로는 회흘과 접해 있으며, 동쪽에는 서하, 서쪽에는 이적들이 있는데, 다들 나에게 칭신하고 있소. 내 생각으로는 우리 선우국[9]이 그간의 1000년, 아니 3000년 동안 이와 같은 땅을 가진 적이 없다고 보이는구려. 그러나 맡은 일이 크고 수성하는 일이 무거워서 나라를 다스림에 흠결이 있을까 두렵소. 그래서 장차 배를 만들고 강을 건너 현능한 이들을 초청하고 그들을 인선하여 천하를 평안케 하려 하오.
짐이 임금의 자리를 이은 이래 여러 정사들에 마음을 쓰고 있으나, 삼공 구경의 자리에 오를만한 사람들은 아직 보질 못했소. 듣자하니 선생께서는 몸소 참된 예의와 법규를 실천하시고, 만물에 박학다식하시어 그 깊은 이치를 궁구하시며, 크나큰 도와 덕을 알리시면서 옛 사람의 엄숙한 풍모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고아한 지조를 품고 계시고, 오래도록 산에 머무르고 스스로를 숨기시며 조사의 유풍을 밝히셔서, 가만히 계셔도 도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신선의 길을 쫓아 선생이 계신 곳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들었소.
존경하는 선생께오서는 전쟁이 끝난 후부터 산동의 옛 경내에 더욱 숨어살고 계시지만, 짐은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그친 적이 없었소. 선생께서 지난 날 문왕이 위수에서 태공망을 만나 그와 수레를 함께한 일과 유비가 제갈량을 맞이하기 위해 그의 띠풀집을 세 번 방문한 일을 어찌 모르시겠소만, (선생과 나 사이에 놓여있는) 산천이 대단히 크고 넓어서 내가 선생을 맞이하지 못하는 실례를 범하게 하고 말았소.
다만 짐이 (국사가 많아) 임금의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는 몸이기에, (직접 찾아가지는 못하는 대신) 목욕재계하고 근시(近侍)인 유중록(劉仲祿)을 선발하여 날랜 기병들과 수레를 갖추어 천리도 멀다 않고 삼가 선생을 맞이하고 싶소. 선생의 신선같은 발걸음으로는 사막도 멀다 여기지 않을 터이니, 만약 백성들과 당금의 일들을 걱정해주시고 보신의 술(保身之術: 도교의 양생술)로 짐을 구휼하러 와주신다면 친히 신선의 자리를 마련하여 기다리고 있겠소. 존경하는 선생의 기침소리라도 좋으니 다만 한 마디 말씀일지라도 다 받아들이겠소. 부족하나마 짐의 이 미미한 뜻의 만분지 일을 이 조서에 밝혀서 보내오.
존경하는 선생께서는 이미 깊은 도의 경지에 이르시어 선함이 필요하다면 응하지 않는 곳이 없으실 것이오. 그러니 어찌 중생의 조그만 소원도 거절하시겠소! 그런 까닭에 짐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이 조서에 적어서 보이는 바이오.[10]
기묘년 5월 1일.
「 성길사황제사 구신선수조(成吉思皇帝賜丘神仙手詔)」[11]
그 해 12월에 이 초청장을 받은 구처기는 이듬해인 1220년 정월 칭기즈 칸을 만나기 위해 조도견[12], 이지상, 윤지평 등의 제자 18명[13]을 거느리고 내주를 떠났다. 그리고 연경에서 거용관을 거쳐 막북과 천산산맥을 지나 1222년 4월 대설산의 파르완(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칭기즈 칸과 조우하였다. 그리고 약 1년간 칭기즈 칸의 곁에 머물렀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일화들을 남겼다.
- 칭기즈 칸에게 천하를 하나로 만들려면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해선 안 된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칭기즈 칸이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묻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답했다.
- 칭기즈 칸이 오래 살아서 장구히 살 수 있는 도의 비법을 묻자, 구처기는 " 위생의 도는 있지만 장생의 약은 없다"[14]라고 답하며,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 요점이라고 말했다.[15] 칭기즈 칸은 (좀 실망하긴 했지만) 구처기의 솔직함을 높게 사서 호부(虎符)와 새서(璽書)를 하사하였고, 구처기를 신선이란 의미에서 텡그리 뭉케 훈이라 부르며 공경하였다.
- 어느날 뇌성 벽력이 진동하자 칭기즈 칸이 이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구처기는 번개는 하늘의 위엄이라 답하면서, "사람의 죄는 불효가 가장 큰데 이는 하늘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므로 하늘이 진동하여 그 위엄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경내에 불효자가 많으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하늘의 위엄을 밝혀서 사람들을 이끄소서"라 하였다.
- 1223년에 칭기즈 칸이 크게 사냥을 벌이다가 말에 떨어졌다. "하늘의 도는 생명을 좋아하는 것인데, 폐하께선 연로하신데도 자주 사냥을 여시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이에 칭기즈 칸이 몇 달 동안 사냥을 그쳤다.
1223년 봄 구처기는 칭기즈 칸과 작별했는데, 이때 대칸으로부터 여러 조언을 해준 보답으로 전진교에 대한 면세 특권이 내려졌다. 그해 가을에 하북으로 돌아온 구처기는 이후 칭기즈 칸이 하사한 연경의 태극궁(太極宮)[16]에서 머물며 '연경팔회(燕京八會)'라 불리는 도교 모임[17]을 만들어 전진교의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고, 칭기즈 칸으로부터 받은 첩지를 활용해 전쟁으로 떠도는 수많은 난민을 구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원사』에서는 다음의 기록을 남겼다.
이때
나라의 군대가 중원을 짓밟고 다녔는데
하남과 하북의 피해가 매우 심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여 목숨을 부지할 곳이 없음을 두려워하였다. 구처기가 연경으로 돌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첩지를 들려서 전쟁터에서 백성들을 불러모아 구호토록 하였다. 이로 인해 노예가 된 사람은 양민으로 돌아가고, 거의 죽어가던 사람도 다시 살아날 수 있었으니 그 수가 무려 2~3만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중원 사람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구처기를) 칭송한다.[18]
『 원사』 「 석 노 전」
『 원사』 「 석 노 전」
1225년 형혹성이 28수 중 하나인 미수(尾宿)[19]를 범하자 재초를 지냈고, 1226년과 이듬해인 1227년에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청에 응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비가 내렸다고 한다. 1227년 5월에는 칭기즈 칸이 구처기에게 금호패(金虎牌)를 내려 천하의 도교를 총괄할 권한을 주었고, 그가 머물던 태극궁의 이름을 장춘궁(長春宮)으로 고치게 했으며, 북궁의 만세산 태액지를 만안궁(萬安宮)이라 개칭하여 그에게 하사했다.
금호패를 받고 한 달이 지난 1227년 6월 하순에 구처기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6월에 구처기가 동계(東溪)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이틀 후 하늘에서 뇌성벽력을 동반한 큰 비가 내려 태액지(太液池) 북쪽의 물이 동호(東湖)로 흘러넘쳤다. 그 소리는 몇 리 떨어진 곳에서도 들렸으며, 연못 안에 있던
고기와
자라들도 모두 사라지고 마침내 연못이 말라버렸다. 그리고 북구(北口)의 높은 언덕도 무너졌다.
이에 구처기가 탄식하면서 "산이 무너졌구나! 연못도 말라버렸구나! 나 또한 이들과 함께 하겠구나!"라 하였다.[20]
『 원사』 「 석 노 전」
이에 구처기가 탄식하면서 "산이 무너졌구나! 연못도 말라버렸구나! 나 또한 이들과 함께 하겠구나!"라 하였다.[20]
『 원사』 「 석 노 전」
6월 21일, (구처기는) 병으로 인해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의 동계에서 목욕하였다. 23일 오후에 큰 우레소리가 나더니 태액지의 남쪽 언덕이 무너져 물이 동호(東湖)로 흘러갔다. 우레소리는 수십 리 떨어진 곳까지 들렸는데, (태액지에 살고 있던) 자라와
악어며 물고기 등이 모두 가버렸고 끝내는 (연못이) 말라버렸으며, 북구(北口)의 산도 무너졌다.
스승께서 이를 들으시고 처음엔 아무 말도 없으셨다가 오래도록 웃으며 "산이 무너지고 연못도 말랐으니, 나도 저들과 함께 할 것인가?"라고 말씀하셨다.[21]
『장춘진인서유기』
스승께서 이를 들으시고 처음엔 아무 말도 없으셨다가 오래도록 웃으며 "산이 무너지고 연못도 말랐으니, 나도 저들과 함께 할 것인가?"라고 말씀하셨다.[21]
『장춘진인서유기』
얼마 후인 7월 4일에는 제자들을 불러모아 마옥의 말을 회고하며 자신의 임종이 머지 않았음을 제자들에게 암시하였다.
일찍이
단양께서
나에게 글을 남기셨다. 거기에는 "
내가 죽은 후 우리 전진교의 교세가 크게 흥하여 사방 가는 곳마다 도교의 본향이 될 것이다.
그대가
그 때를 만나면 도교 사원들은 모두
칙명으로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고, 또한 (
그대는) 큰 궁궐과 도관의 주지가 될 것이며, 사신이 패부를 내려 교단의 일을 담당토록 할 것이다. 이때가 공업과 명성을 이루고
돌아가 쉴 때이다" 라 적혀있었다.
단양의 말씀이 하나같이 증험을 보아 부절이 들어맞는 듯 하였다. 하물며 교단 안팎에는 일을 맡을 사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나는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22]
『장춘진인서유기』
단양의 말씀이 하나같이 증험을 보아 부절이 들어맞는 듯 하였다. 하물며 교단 안팎에는 일을 맡을 사람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나는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22]
『장춘진인서유기』
일찍이
단양께서
나에게 글을 남기셨다. 거기에는 "
내가 죽은 후 우리 전진교의 교세가 크게 흥하여 사방 곳곳마다 도교의 본향이 될 것이다.
그대가
그 때를 만나면 큰 궁전과 도관의 주지가 되고, (그곳들은) 모두
칙명으로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을 것이며, 사신이 패부를 내릴 것이다. 이 때가 공업과 명성을 이루고
돌아가 쉴 때이다" 라 적혀있었다.
단양의 말씀이 하나같이 모두 증험되었으니, 나는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23]
『금련정종기』 「장춘구진인」
그로부터 닷새 후인 7월 9일 오후, 구처기는 장춘궁의 보현당(寶玄堂)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어 이를
유언으로 남겼다.단양의 말씀이 하나같이 모두 증험되었으니, 나는 돌아가도 여한이 없다.[23]
『금련정종기』 「장춘구진인」
生死朝昏事一般
죽고 사는 일은 아침이 저녁 되는 것과 매한가지요
幻泡出沒水常閒
물거품이 허깨비처럼 일어난들 물은 항상 그대로라.
微光見處跳烏兎
미미한 광채 드러난 곳은 해와 달을 넘었고,
玄量開時納海山
현량(玄量)을 열면 바다와 산도 받아들였지.
揮斥八紘如咫尺
온 누리를 지척처럼 자유로이 휘저었고
吹噓萬有似機關
만물을 마치 기계처럼 뿜어내었네.
狂詞落筆成塵垢
경솔한 말과 글로 허물을 이루고
寄在時人妄聽間
당대의 사람들에게 빌붙어 헛된 이름만 들리게 했네.
『장춘진인서유기』
죽고 사는 일은 아침이 저녁 되는 것과 매한가지요
幻泡出沒水常閒
물거품이 허깨비처럼 일어난들 물은 항상 그대로라.
微光見處跳烏兎
미미한 광채 드러난 곳은 해와 달을 넘었고,
玄量開時納海山
현량(玄量)을 열면 바다와 산도 받아들였지.
揮斥八紘如咫尺
온 누리를 지척처럼 자유로이 휘저었고
吹噓萬有似機關
만물을 마치 기계처럼 뿜어내었네.
狂詞落筆成塵垢
경솔한 말과 글로 허물을 이루고
寄在時人妄聽間
당대의 사람들에게 빌붙어 헛된 이름만 들리게 했네.
『장춘진인서유기』
이 시를 짓고 구처기는 보현당에서 보광당(葆光堂)으로 돌아온 후에 세상을 떠났다.[24] 칭기즈 칸이 사망하기 약 한 달 전이었다.
이듬해 3월 제자 윤지평이 구처기를 위해 장춘궁 동쪽의 백운관에 전각을 지을 것을 건의하였고 스승의 기일인 7월 9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7월 초에 구처기의 관을 열었는데 시신이 썩지 않고 그 모습이 생전과 같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새로 지은 전각에 스승을 장사지내고 그곳을 처순당(處順堂)이라 명명하였다.[25][26] 이후 쿠빌라이 칸 때인 지원 6년(1269)에 장춘연도주교진인(長春演道主敎眞人)으로, 원 무종 지대 3년(1310)에 장춘전덕신화명응진군(長春全德神化明應眞君)에 봉해졌다.
3. 여담
- 전진칠자 가운데 가장 어렸던 동시에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마지막에 죽었다.
- 이마와 눈썹이 크고 넓었다고 한다.[27]
- 금나라 세종 대정 6년( 1166)에 출가하여 대정 7년( 1167)에 왕중양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점은 기록들이 대체로 일치하나, 어디서 왕중양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나의 설은 영해의 곤유산(昆崳山) 연하동(煙霞洞)에서 왕중양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31]는 것이고, 다른 설에서는 출가하여 곤유산에 은거하다 왕중양이 영해의 전진암(全眞庵)에서 가르침을 펼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32] 이외에 『원사』 「석노전」에서는 "19세에 영해의 곤유산에서 전진의 학문을 배우다"라고 되어 있고, 『장춘진인서유기』에서는 "미성년일 때 출가하여 중양진인을 사사했다"라고만 기록하였다.
- 스승 왕중양과 마찬가지로 유 불 도 삼교의 합일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실제 수련에서 성(性)의 비중을 명(命)보다 더 중시하였다.[33] 또한 수련의 요점은 '투한(鬪閑, 게으름과 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34]
- 상술한 칭기즈 칸과의 만남에서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진언하여 이를 관철시켰는데, 이를 두고 청나라의 건륭제는 "만고의 장생함을 맑은 기운 먹는 것으로 비결을 구하지 않았네. 말 한 마디로 살육을 멈추게 했으니 비로소 세상을 구하는 뛰어난 공이 있음을 알았네(萬古長生 不用餐霞求秘訣 一言止殺 始知濟世有奇功)"라는 시를 지어 구처기의 공을 기렸다. 이후 위의 싯귀 가운데 일언지살(一言止殺)은 구처기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 구처기와 칭기즈 칸의 만남 당시,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의 명을 받고 두 사람의 만남을 기록하여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이란 책으로 남겼다. 참고로 야율초재는 구처기와 대면한 초기에는 그를 예우하였지만, 이후에 쓴 『서유록(西遊錄)』이란 책에서는 구처기와 전진교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글을 실었다. 관련논문
- 구처기가 죽은 이후, 제자인 이지상은 구처기가 칭기즈 칸과 만나서 사망하기까지의 일들을 엮어서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를 지었다. 이 책은 원나라와 명나라를 지나며 사라진 것으로 전해졌으나, 청나라 때의 학자 단옥재와 전대흔이 소주의 도관에서 『 도장』에 수록된 『장춘진인서유기』를 발견하면서 다시금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는 청나라가 서역에 관심이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13세기 서역의 모습을 기록한 이 책도 많이 연구되었다. 현재는 왕궈웨이가 주석을 단 판본이 가장 유명하다. 『장춘진인서유기』 원문과 해설
- 구처기의 용문파는 명청시대에도 그 세력을 어느 정도 보전하여 이후에도 유명한 도교 수련자들의 상당수를 배출하였다.
- 현재의 베이징시에 있는 도관인 백운관(白雲觀)은 전진교 용문파의 총본산이다. 본래 백운관은 장춘궁 동쪽에 있던 건물의 이름이었는데, 장춘궁이 원나라 말기에 불타 없어지고 명나라 초에 구처기의 시신이 안치된 처순당[35]을 중심으로 백운관을 다시 세우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원· 명· 청나라 시기, 중국의 민간에서는 구처기의 생일인 음력 1월 19일을 연구절(燕九節)[36]이라 부르며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고 이는 청나라 후기 북경에서 특히 성행하였다. 구처기의 시신이 안치된 백운관에서는 음력 1월 1일부터 19일까지 도관을 개방하여 연구절을 기념하였는데, 특히 구처기의 생일인 19일에 행사를 가장 크게 치루었다고 한다.
- 2020년 중국에서 구처기와 관련된 8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제목은 《구조서행(丘祖西行)》. 유튜브 링크
4. 대중매체에서
4.1. 소설 《 사조영웅전》, 《 신조협려》
자세한 내용은 구처기(사조삼부곡) 문서 참고하십시오.4.2. 징기스칸 시리즈
코에이의 게임인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에서는 도호인 장춘진인으로 등장한다. 2번 시나리오와 유저 시나리오 5번에서 화북의 재야 장수로 나오는데, 정치B 전투E 지도E 매력A 체력10 이라는 정치 특화형의 능력치로 나온다. 이외에 일러스트도 고유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후속작인 징기스칸 4에서도 도호인 장춘진인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정치 수완이 뛰어났던 면모를 반영해서인지 정치력이 매우 좋게 나온다. 다만 사조영웅전에 익숙한 팬들에게는 한자릿수 전투력으로 충공깽을 선사한다. 그리고 금 장종의 도교 금지령을 반영했는지 따로 등용 커맨드로 찾아야 출현하며 초기 충성치도 낮은 편이다.[38]
4.3. 징기스칸전
조조전 모드인 징기스칸전에서는 징기스칸 4와 마찬가지로 도호인 장춘진인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 전투인 사막 수련전에서 위기에 빠진 테무진과 보르테를 구해주고 원본 조조전의 허자장처럼 튜토리얼의 역할을 수행한다.칼카 강 전투가 끝난 후 테무진의 부름을 받고 니샤푸르에서 그와 재회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불로장생에 대해 묻는 테무진에게 그런 비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야하고 답은 그의 마음 속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제국은 피로 일궜으니 이제는 그 피를 버리고 왕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언급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등장 종료.
진 엔딩에서는 자무카와 테무룬이 영원한 도를 찾아 돈황에 있는 그를 찾아 떠난다고 언급된다.
4.4. 징기스칸: 지살령
한중일 합작영화인 징기스칸: 지살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구처기가 칭기즈칸을 만나기 위해 서역으로 갔을 때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1]
원나라 때의 전진교 도사 사서섬(謝西蟾)과 유지현(劉志玄)이 1327년에 완성한
『금련정종선원상전(金蓮正宗仙源像傳)』에 구처기가 "
금나라
희종
황통 8년 무진년 정월 19일에 태어났다(生於金熙宗皇統八年戊辰正月十九日)" 라고 기록되어 있다.
[2]
『금련정종기(金蓮正宗記)』는 원나라 때의 전진교 도사 진지안(秦志安, 1188~1244)이 1241년에 완성한 저술로, 구처기를 비롯하여 전진교의 인물 전반에 대해 기록하였다.
원문
[3]
유처현의 공부는
담처단에게 일임했다.
[4]
위수의 지류로
강상이 낚시를 하며 지낸 곳이었다. 구처기 또한 이곳에서 머물렀기에 그의 저작을 모은 문집을 『반계집』이라고 했다.
[5]
장종이 이곳에 태허(太虛)라는 편액을 써서 내렸기 때문에 태허관(太虛觀)이라고도 부른다. 도교를 금지하였던 장종이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는 당시 전진교가 민간과 관료들에게도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장종은 전진도를 금지하기보단 활용하는 것으로 정책의 방향을 수정하였다.
[6]
이를 다시 정리한 책이 바로
『대단직지(大丹直指)』이다.
[7]
금나라 말기
홍오군(紅襖軍)의 수령으로 본명은 양안국(楊安國).
북송의 장군
양업의 후손으로
양가창법의 명수였다고 한다. 누이는 마찬가지로 양가창법의 명수였던 양묘진(楊妙眞)이고 매부는 철창
이전(李全)이다. 1214년 양안아는 산동에서 난을 일으켜 그 일대를 점령하고 연호를 천순(天順)이라 했는데 끝내는 금나라 군대에게 진압당하고 본인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매부 이전은 잔존한 홍오군 무리를 이끌다가 1218년
남송에 항복했는데, 그 영향으로 남송에 양가창법이 퍼졌다고 한다.
[8]
1216년 금나라
선종이 구처기를 초청했을 땐 "나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 행하니, 하늘이 시킨 바를 행함에 감히 어긋날 수 없다(我循天理而行 天使行則無敢違也)"라는 말로 거절하였고, 1219년 8월 산동을 함락시킨 남송이 그를 초청하자 "나의 출처는 그대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훗날 (이곳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 걱정되네(吾之出處 非若輩可知 他日恐不能留耳)"라며 거절하였다.
[9]
칭기즈 칸은
카간이라 하지 않고
선우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그가
몽골 제국을
흉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인식하였기에 그리 표현한 듯하다. 당시 몽골 제국의 깃발에 담긴 태양과 달 문양,
황금씨족의 송골매 문양은 흉노에서 내려왔으며,
보르지긴 왕가의 도장 문양도 흉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과 같다. 즉, 칭기즈 칸은 흉노로부터 이어져오는 정통성을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10]
원문은 다음과 같다. 天厭中原驕華太極之性,朕居北野嗜欲莫生之情,反樸還淳,去奢從儉 每一衣一食,與牛豎馬圉共弊同餐。視民如赤子,養士若兄弟,謀素和,恩素畜。練萬衆以身人之先,臨百陣無念我之後。七載之中成大業,六合之內爲一統。非朕之行有德,蓋金之政無恒,是以受天之佑,獲承至尊。南連蠻宋,北接回紇,東夏西夷,悉稱臣佐。念我單于國千載百世以來未之有也。然而任大守重,治平猶懼有缺。且夫刳舟剡楫,將欲濟江河也;聘賢選佐,將以安天下也。朕踐祚以來,勤心庶政,而三九之位未見其人。訪聞丘師先生體真履規,博物洽聞, 探賾窮理,道沖德著,懷古子之肅風,抱真上人之雅操,久棲岩谷,藏聲隱形,闡祖師之遺化,坐致有道之士,雲集仙徑,莫可稱數。自幹戈而後,伏知先生猶隱山東舊境,朕心仰懷無已。先生豈不聞渭水同車、茅廬三顧之事,奈何山川防闊,有失躬迎之禮。朕但遲位側身,齋戒沐浴,選差近侍官劉仲祿,備輕騎素車,不遠千裏謹邀。先生仙步,不以沙漠悠遠爲念,或以憂民當世之務,或以恤朕保身之術。朕親侍仙座,欽惟先生將咳唾之餘,但授一言,斯可矣。今者,聊發朕之微意萬一,明於詔章。誠望先生旣著大道之端,要善無不應,亦豈違衆生小願哉!故玆詔示,惟宜之悉。
[11]
이 조서의 글은
몽케 칸 때인 1251년에 세워진
대몽고국누조숭도은명지비(大蒙古國累朝崇道恩命之碑)에도 새겨져 있으며, 해당 비석은 현재도
산시성
시안시의 중양궁(重陽宮)에 남아 있다.
[12]
趙道堅, 1163~1221. 본래 이름은 조구고(趙九古)이고 도호는 허정(虛靜)이다. 구처기가 칭기즈 칸을 만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났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1221년 11월 병에 걸려
새람성(賽藍城: 현재의
카자흐스탄
심켄트 근교
사이람)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그곳에서 장사지냈다고 한다.
[13]
앞의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15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송도안(宋道安), 손지견(孫志堅), 하지성(夏志誠), 송덕방(宋德方), 왕지명(王志明), 우지가(于志可), 장지소(張志素), 국지원(鞠志圓), 정지수(鄭志修), 장지원(張志遠), 맹지은(孟志穩), 기지청(綦志淸), 하지청(何志淸), 양지정(楊志靜), 반덕충(潘德沖).
[14]
『장춘진인서유기』, (칭기즈 칸이) "
진인께서 먼 곳으로부터 오셨으니, 어떤 장생의 약으로 짐을 도와주시려오?"라 묻자,
스승께서는 "위생의 도는 있지만 장생의 약은 없습니다" 라고 답하였다(問眞人遠來,有何長生之藥以資朕乎?師曰:有衛生之道,而無長生之藥。)
사실 구처기의 이 말은 전진교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도교 종파들과는 달리 불로불사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15] 『원사』 「석노전」, (칭기즈 칸이) 장생구시의 도를 묻자,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답했다(問長生久視之道,則告以淸心寡欲爲要。) [16] 본래의 이름은 천장관(天長觀)으로 당나라 현종 때 만들어진 전각이었다. 천장관은 금나라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203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이름이 태극궁으로 바뀌었다. 얼마 안가 몽골과의 전쟁으로 다시 황폐해진 태극궁은 칭기즈 칸이 구처기에게 하사하였고, 이후 3년에 걸쳐 수리하였다고 한다. 이후 태극궁의 역사는 장춘궁으로 이어져 현재의 백운관에 이르고 있다. [17] 모임 각각의 이름은 평등(平等), 장춘(長春), 영보(靈寶), 장생(長生), 명진(明眞), 평안(平安), 소재(消災), 만련(萬蓮)이었다. [18] 원문은 다음과 같다. 時國兵踐蹂中原,河南、北尤甚,民罹俘戮,無所逃命。處機還燕,使其徒持牒招求於戰伐之餘,由是爲人奴者得復爲良,與濱死而得更生者,毋慮二三萬人。中州人至今稱道之。 [19] 전갈자리 μ성 [20]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六月,浴於東溪,越二日,天大雷雨,太液池岸北水入東湖,聲聞數里,魚鱉盡去,池遂涸,而北口高岸亦崩,處機嘆曰:「山其摧乎,池其涸乎,吾將與之俱乎! [21] 六月二十有一日,因疾不出,浴於宮之東溪。二十有三日,人報已午間,雷聲大作,太液池之南岸崩裂,水入東湖,聲聞數十里,黿鼉魚鱉盡去,池遂枯涸,北口山亦摧。師聞之,初無言,良久笑曰:山摧池枯,吾將與之俱乎? [22] 昔丹陽嘗授記於餘云:吾歿之後,敎門當大興,四方往往化爲道鄕。公正當其時也,道院皆賜敕名額,又當住持大宮觀,仍有使者佩符乘傳,勾當敎門事,此時乃公功成名遂、歸休之時也。丹陽之言,一一皆驗,若合契符。況敎門中勾當人內外悉具,吾歸無遺恨矣。 [23] 昔丹陽嘗授記於予云:吾沒之後,敎門大興,四方往往化化爲道鄕,公正當其時也,住持大宮觀,皆勅賜名額,仍有使者佩符乘傳,此時乃功成名遂歸休之時也。丹陽之言一一皆驗,吾歸無遺恨矣。 [24] 『장춘진인서유기』에서는 "마침내 보광당에 올라 돌아가셨다(遂登葆光堂歸眞焉)"라 적혀 있고, 『금련정종기』에서는 보현당에서 위의 시를 유언으로 남긴 후 "마침내 보광당에 돌아와서 훨훨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遂歸葆光堂 栩栩然蝶化矣)"라고 적혀있으며, 『금련정종선원상전』에서는 보현당에 올라 위의 시와 몇몇 유언을 남기고 "보광당에 돌아와 단정히 앉으신 채로 돌아가셨다(歸葆光堂端坐而逝)"라고 적혀 있다. [25]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歷世眞仙體道通鑑續編)』, 1228년 3월 초하루, 청화가 스승을 위해 백운관에 전각을 지을 것을 건의하였고 7월 9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6월에 장마가 오자 모두가 (장례에) 방해될까 염려하였지만 7월 초에 날이 개었다. 관을 열자 (구처기의) 용모가 살아있을 때와 같았고 (그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7월) 3일 (새로 지은) 전각에 구처기의 시신을 두었는데 (시신을) 옮길 때 기이한 향기가 매우 짙었다. (9일에) 장례를 끝내자 큰 비가 내렸다. 선무 왕즙이 장례에 참여하여 스스로 주맹(主盟)이 되어 친히 (구처기의 장례를 치르는) 전각의 이름을 '처순(處順)'이라 하였다(戊子三月朔,淸和建議爲師構堂於白雲觀,期以七月九日大葬。六月霖雨,皆慮有妨。七月初廓晴霽。及啟棺,容色如生,觀者如堵。三日,藏仙蛻於堂,異香芬馥者移時。旣寧神,大雨。宣撫王楫會葬,自爲主盟,親榜其堂曰處順。)
이 부분은 『장춘진인서유기』보다 조금 축약되었을 뿐 내용과 맥락은 같다. [26] 『금련정종기』에서는 "백운관의 처순당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3년이 지난 후 (구처기의 시신에)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관을 열었더니 손과 발이 부드러웠고 안색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殯於白雲觀之處順堂焉。三年之後,啟棺更衣,手足如綿,顔采如生)"라고 기록되었다. [27] 『금련정종기』, 활발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이마와 눈썹이 크고 넓었다(敏而强記 博而高才 眉宇閑曠) [28] 『원사』 「석노전」에는 본문과 같이 어릴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훗날 마땅히 신선들의 우두머리가 되리(兒時有相者謂其異日當爲神仙宗伯)"라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금련정종기』에는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구처기에게 "귀문(龜文)이 있으니 반드시 제왕의 스승이 될 것(善相者言足下有龜文必爲帝王師)"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29] 『금련정종기』, 집안의 세도가 서하에서 가장 이름났다(家世棲霞,最爲名族。). [30] 『철경록(輟耕錄)』, 등주 서하현 빈도리 사람이다. 조부는 농업에 종사했는데 주변에 덕을 잘 베푸는 사람으로 이름났다(登州棲霞縣濱都里人也。祖父業農,世稱善門。). [31] 진지안의 『금련정종기』와 이도겸(李道謙, 1219~1296)의 『감수선원록(甘水仙源錄)』에서는 이 설에 따라 기록하였다. [32] 사서섬과 유지현의 『금련정종선원상전』과 조도일(趙道一)이 지은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에서 이 설에 따라 기록하였다. [33] 『장춘조사어록(長春祖師語錄)』, 스승께서는 사람들에게 " 우리 교단의 (공부에서) 전반의 세 관절은 모두 유위(有爲)의 공부이니 바로 명공(命功)이다. 후반의 세 관절은 곧 무위(無爲)의 묘한 도이니 곧 성학(性學)이다. 10 중에 3은 명(命)의 공부요, 나머지 7은 성(性)의 공부이다 …… 우리 교단에서는 견성(見性)을 귀히 여기고, 수화(水火)의 배합은 그 다음이다"라 말씀하셨다(師示衆曰:“吾宗前三節,皆有爲工夫,命功也;後六節乃無爲妙道,性學也。三分命功,七分性學 …… 吾宗惟貴見性,而水火配合其次也。). [34]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 일찍이 (마옥이) 진도(秦渡)의 진무묘(眞武廟)에서 구처기, 유처현, 담처단 세 사람과 밤중에 각각의 뜻을 말하였는데, 스승은 투빈(鬪貧), 담처단은 투시(鬪是), 유처현은 투지(鬪志), 구처기는 투한(鬪閑)이라 하였다(嘗與邱劉譚三人,在秦渡眞武廟,月夜各言其志。師曰鬪貧,譚曰鬪是,劉曰鬪志,邱曰鬪閑。). [35] 현재의 이름은 구조전(丘祖殿)이다. [36] 燕九 외에 달리 筵九, 宴九, 烟九 또는 엄구(淹九)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37] 해당 다큐의 13분 8초~13분 12초 사이에 그의 초상화와 함께 '옥조각의 시조 구처기(玉雕鼻祖邱處機)'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38] 사실 딱히 장춘진인만이 아니라 등용 커맨드로 찾아낸 장수가 스스로 임관을 신청 하는 장수에 비해 충성도가 낮다.
사실 구처기의 이 말은 전진교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도교 종파들과는 달리 불로불사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15] 『원사』 「석노전」, (칭기즈 칸이) 장생구시의 도를 묻자,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답했다(問長生久視之道,則告以淸心寡欲爲要。) [16] 본래의 이름은 천장관(天長觀)으로 당나라 현종 때 만들어진 전각이었다. 천장관은 금나라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203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때 이름이 태극궁으로 바뀌었다. 얼마 안가 몽골과의 전쟁으로 다시 황폐해진 태극궁은 칭기즈 칸이 구처기에게 하사하였고, 이후 3년에 걸쳐 수리하였다고 한다. 이후 태극궁의 역사는 장춘궁으로 이어져 현재의 백운관에 이르고 있다. [17] 모임 각각의 이름은 평등(平等), 장춘(長春), 영보(靈寶), 장생(長生), 명진(明眞), 평안(平安), 소재(消災), 만련(萬蓮)이었다. [18] 원문은 다음과 같다. 時國兵踐蹂中原,河南、北尤甚,民罹俘戮,無所逃命。處機還燕,使其徒持牒招求於戰伐之餘,由是爲人奴者得復爲良,與濱死而得更生者,毋慮二三萬人。中州人至今稱道之。 [19] 전갈자리 μ성 [20]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六月,浴於東溪,越二日,天大雷雨,太液池岸北水入東湖,聲聞數里,魚鱉盡去,池遂涸,而北口高岸亦崩,處機嘆曰:「山其摧乎,池其涸乎,吾將與之俱乎! [21] 六月二十有一日,因疾不出,浴於宮之東溪。二十有三日,人報已午間,雷聲大作,太液池之南岸崩裂,水入東湖,聲聞數十里,黿鼉魚鱉盡去,池遂枯涸,北口山亦摧。師聞之,初無言,良久笑曰:山摧池枯,吾將與之俱乎? [22] 昔丹陽嘗授記於餘云:吾歿之後,敎門當大興,四方往往化爲道鄕。公正當其時也,道院皆賜敕名額,又當住持大宮觀,仍有使者佩符乘傳,勾當敎門事,此時乃公功成名遂、歸休之時也。丹陽之言,一一皆驗,若合契符。況敎門中勾當人內外悉具,吾歸無遺恨矣。 [23] 昔丹陽嘗授記於予云:吾沒之後,敎門大興,四方往往化化爲道鄕,公正當其時也,住持大宮觀,皆勅賜名額,仍有使者佩符乘傳,此時乃功成名遂歸休之時也。丹陽之言一一皆驗,吾歸無遺恨矣。 [24] 『장춘진인서유기』에서는 "마침내 보광당에 올라 돌아가셨다(遂登葆光堂歸眞焉)"라 적혀 있고, 『금련정종기』에서는 보현당에서 위의 시를 유언으로 남긴 후 "마침내 보광당에 돌아와서 훨훨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遂歸葆光堂 栩栩然蝶化矣)"라고 적혀있으며, 『금련정종선원상전』에서는 보현당에 올라 위의 시와 몇몇 유언을 남기고 "보광당에 돌아와 단정히 앉으신 채로 돌아가셨다(歸葆光堂端坐而逝)"라고 적혀 있다. [25]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歷世眞仙體道通鑑續編)』, 1228년 3월 초하루, 청화가 스승을 위해 백운관에 전각을 지을 것을 건의하였고 7월 9일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6월에 장마가 오자 모두가 (장례에) 방해될까 염려하였지만 7월 초에 날이 개었다. 관을 열자 (구처기의) 용모가 살아있을 때와 같았고 (그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7월) 3일 (새로 지은) 전각에 구처기의 시신을 두었는데 (시신을) 옮길 때 기이한 향기가 매우 짙었다. (9일에) 장례를 끝내자 큰 비가 내렸다. 선무 왕즙이 장례에 참여하여 스스로 주맹(主盟)이 되어 친히 (구처기의 장례를 치르는) 전각의 이름을 '처순(處順)'이라 하였다(戊子三月朔,淸和建議爲師構堂於白雲觀,期以七月九日大葬。六月霖雨,皆慮有妨。七月初廓晴霽。及啟棺,容色如生,觀者如堵。三日,藏仙蛻於堂,異香芬馥者移時。旣寧神,大雨。宣撫王楫會葬,自爲主盟,親榜其堂曰處順。)
이 부분은 『장춘진인서유기』보다 조금 축약되었을 뿐 내용과 맥락은 같다. [26] 『금련정종기』에서는 "백운관의 처순당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3년이 지난 후 (구처기의 시신에)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관을 열었더니 손과 발이 부드러웠고 안색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殯於白雲觀之處順堂焉。三年之後,啟棺更衣,手足如綿,顔采如生)"라고 기록되었다. [27] 『금련정종기』, 활발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이마와 눈썹이 크고 넓었다(敏而强記 博而高才 眉宇閑曠) [28] 『원사』 「석노전」에는 본문과 같이 어릴 때 관상을 보는 사람이 "훗날 마땅히 신선들의 우두머리가 되리(兒時有相者謂其異日當爲神仙宗伯)"라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금련정종기』에는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구처기에게 "귀문(龜文)이 있으니 반드시 제왕의 스승이 될 것(善相者言足下有龜文必爲帝王師)"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29] 『금련정종기』, 집안의 세도가 서하에서 가장 이름났다(家世棲霞,最爲名族。). [30] 『철경록(輟耕錄)』, 등주 서하현 빈도리 사람이다. 조부는 농업에 종사했는데 주변에 덕을 잘 베푸는 사람으로 이름났다(登州棲霞縣濱都里人也。祖父業農,世稱善門。). [31] 진지안의 『금련정종기』와 이도겸(李道謙, 1219~1296)의 『감수선원록(甘水仙源錄)』에서는 이 설에 따라 기록하였다. [32] 사서섬과 유지현의 『금련정종선원상전』과 조도일(趙道一)이 지은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에서 이 설에 따라 기록하였다. [33] 『장춘조사어록(長春祖師語錄)』, 스승께서는 사람들에게 " 우리 교단의 (공부에서) 전반의 세 관절은 모두 유위(有爲)의 공부이니 바로 명공(命功)이다. 후반의 세 관절은 곧 무위(無爲)의 묘한 도이니 곧 성학(性學)이다. 10 중에 3은 명(命)의 공부요, 나머지 7은 성(性)의 공부이다 …… 우리 교단에서는 견성(見性)을 귀히 여기고, 수화(水火)의 배합은 그 다음이다"라 말씀하셨다(師示衆曰:“吾宗前三節,皆有爲工夫,命功也;後六節乃無爲妙道,性學也。三分命功,七分性學 …… 吾宗惟貴見性,而水火配合其次也。). [34] 『역세진선체도통감속편』, 일찍이 (마옥이) 진도(秦渡)의 진무묘(眞武廟)에서 구처기, 유처현, 담처단 세 사람과 밤중에 각각의 뜻을 말하였는데, 스승은 투빈(鬪貧), 담처단은 투시(鬪是), 유처현은 투지(鬪志), 구처기는 투한(鬪閑)이라 하였다(嘗與邱劉譚三人,在秦渡眞武廟,月夜各言其志。師曰鬪貧,譚曰鬪是,劉曰鬪志,邱曰鬪閑。). [35] 현재의 이름은 구조전(丘祖殿)이다. [36] 燕九 외에 달리 筵九, 宴九, 烟九 또는 엄구(淹九)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37] 해당 다큐의 13분 8초~13분 12초 사이에 그의 초상화와 함께 '옥조각의 시조 구처기(玉雕鼻祖邱處機)'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38] 사실 딱히 장춘진인만이 아니라 등용 커맨드로 찾아낸 장수가 스스로 임관을 신청 하는 장수에 비해 충성도가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