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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23:08:27

우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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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3사단과 11사단의 도착3.2. 일본군의 상륙3.3. 우쑹의 함락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7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벌어진 제2차 상하이 사변의 2번째 국면으로 상하이 북부의 우쑹(吴淞)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 한국식 독음으로 오송 전투, 오송 크리크로도 알려져 있다. 베르됭 전투 이래 최대 격전으로 불렸다.

2. 배경

1937년 8월 9일 훙차오 공항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상하이 사변이 개막되었다. 8월 13일부터 일본군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으나 일본군에 비해 10배나 되는 수적 우세를 자랑하던 중국군은 일본군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결정, 8월 14일부터 클레어 셰놀트가 지휘하는 항공대와 함께 일본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실시했다. 이어 천청 장제스에게 "일본군의 전력을 양분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상하이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장제스는 서남, 화중, 화남의 대규모 부대를 상하이로 집결시켜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한편 일본 제국은 8월 13일에 상하이에 대한 증원을 결정, 3사단과 11사단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마쓰이 이와네를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참모본부는 마쓰이 이와네에게 임참명 73호를 통해 목표를 " 해군과 협력하여 상하이 부근의 중국군을 소멸, 상하이와 북방지구의 요선을 점령하여 일본인을 보호하는 것"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마쓰이는 이를 묵살하고 8월 18일 육군대신 관저에서 열린 참모총장, 육군대신, 교육총감 3장관 송별식에서 난징 공략을 주장하였다.

한편 8월 18일, 경호경비사령 겸 9집단군 사령관 장즈중의 반격으로 중국군은 일본 해군특별 육전대를 거세게 밀어붙였으나, 중화기의 부족으로 일본군을 결정적으로 섬멸하진 못했다. 상하이 전투가 시작된 지 열흘 후, 마침내 증원군이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3. 전개

3.1. 3사단과 11사단의 도착

8월 23일, 긴급동원상태였던 일본군 3사단의 절반이 상하이 북쪽 20km 떨어진 우쑹에, 11사단이 우쑹에서 15km 떨어진 촨사전에 상륙했다. 이 지역은 1935년 장제스의 지시로 견고한 콘크리트 방어진지와 토치카가 건설된 상태였고 독일에서 수입한 중화기와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뢰밭, 철조망을 비롯한 다수의 방어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3월 시점에서 상하이를 방위하기 위한 45개 진지 중 17개가 완성된 상태였다. 그중 쑤저우에서 복산을 잇는 오복진지는 7할이, 무석에서 강음을 잇는 석징 진지는 100% 완성된 상태였고, 독일 고문단은 "100파운드 이하의 폭탄은 모두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에 우쑹 방면의 우회 상륙을 허용했다가 크게 패했던 장제스는 천청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청이 지휘하는 18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병력을 배치하여 일본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1]

일본군의 전략적 목표는 상륙부대를 홍구, 보산, 나점 3곳으로 분산시켜 상하이 이북을 포위 점령하고 해군 특별육전대와 교전하고 있는 중국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을 허약한 오합지졸로 얕잡아보고 상륙지점에 대한 조사는커녕, 상륙하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탄약조차 쥐어주지 않고 무작정 상륙시켰다. 후지타 스스무 장군이 지휘하는 일본군 3사단은 상륙 첫날에 바로 교두보를 마련하여 상하이 시내로 진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는 일본군의 큰 오산이었다.

3.2. 일본군의 상륙

파일:상륙일본군.jpg
상륙하는 일본군

한 사람당 겨우 200발의 총알을 지급받은 3사단 상륙 1진은 우쑹에 상륙하자마자 중국군이 무장하고 있던 기관총의 집중사격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우쑹 전투에 참전했던 한 일본군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쑹의 해안절벽 아래에 펼쳐진, 나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마치 지옥의 그림과 같았다. 지옥도 이렇게 심하진 않을 것이다. 해안벽 아래의 한쪽은 완전히 시체의 산으로, 바닥도 보이지 않을 만큼 차레차례 겹쳐 있었다. 마치 시장통에 쌓인 참치떼처럼 수천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구역질이 나올 만큼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이것이 10일 전 상륙했던 나고야 제3사단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 땅에 중국군 대부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가, 알지 못했던 것인가. 상륙하자마자 차례차례 죽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병사들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죽어갔던 것이다."

탄약이 부족했던 일본군은 무모한 총검돌격, 육탄돌격을 일삼다가 거듭 격퇴되었고, 8월 29일, 전선을 시찰한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긍정적인 전황보고를 올렸다.
"비록 완전히 적을 축출하진 못했지만, 계속해서 곳곳에서 수비를 한다면 적이 전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촨사전에 상륙한 11사단 역시 중국군의 견고한 저항에 부딪혔다. 6일간의 전투 끝에 5km를 전진한 11사단은 겨우 교두보를 마련했으나, 더 이상 전진은 불가능했다. 11사단 산하 12보병연대는 10일 만에 3,400명에서 900명으로 감소했고, 44보병연대가 자살공격을 감행하여 1달 만에 뤄뎬전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9월 28일에 11사단이 뤄뎬전을 점령하였다.

3.3. 우쑹의 함락

파일:BLOODYSATURDAY.jpg
1937년 8월 28일, 일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상하이 남부역에서 울부짖는 아기[2]

하지만 제공권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있었고, 함포 사격과 기총소사, 폭격의 엄호를 받은 일본군은 하루에 100~600m씩 악착같이 전진하면서 우쑹을 공략했다. 8월 31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일본군이 우쑹 포대를 점령하면서 일본군이 우쑹을 장악, 공세 주도권은 일본군에게로 넘어갔다.

9월 7일 마쓰이 이와네는 "기존 상하이 파견군으로 중국군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타이완에서 시게후지 지대를 차출하여 9월 18일 촨사전에 투입하였고, 9월 10일 9사단, 13사단, 101사단, 야전중포병 5여단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이시와라 간지 작전부장은 이에 대해 반대했으나 오히려 경질되어 9월 28일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쫓겨나고, 신임 작전부장은 확대파 시모무라 사다무 소장이 차지하면서 증원이 확정되었다. 특히 13사단과 101사단은 예비역과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로, 일본은 이미 현역병들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정도의 규모의 전쟁을 맞이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우쑹 전투는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 지도부의 패착이 겹쳐 참혹한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우쑹 함락까지 일본군 3사단에는 전사자 1,080명, 부상자 3,589명이 발생했으며, 11사단은 전사 1,560명, 부상자 3,980명을 내면서 전체 병력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게다가 3사단과 11사단은 이후에 예비군들을 긴급히 소집한 군기가 문란한 사단이 아니라 현역병들로 구성된 정예사단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일본군의 피해는 상당한 것이었다.

4. 결과

우쑹을 점령한 일본군은 타이완의 시게후지 지대와 본토에서 증원받은 3개 사단을 동원, 다창전을 공격하기로 결정하면서, 2차 상하이 사변은 다창전 전투로 이어져 3번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이 시점에서 상하이에는 3전구 산하 20만의 병력이 집결한 상태였다. [2] 이 아기는 촬영직후 바로 구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