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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2 16:06:06

우담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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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무창효열후(武昌孝烈侯)
虞潭 | 우담
시호 효열(孝烈)
작위 도정후(都亭侯) → 동향후(東鄕侯) → 영릉현후(零陵縣侯) → 무창현후(武昌縣侯)
(虞)
(潭)
사오(思奧)
생몰 불명
출신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부모 부친 - 우충(虞忠)
모친 - 정부인(定夫人)
자녀 우흘(虞仡), 우초(虞楚)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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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청렴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지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조부 우번과 아버지 우충은 모두 삼국시대 오나라를 섬겼으나, 서진의 황제 사마염이 보낸 군대에 의해 오나라가 멸망할 때 의도태수 우충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2. 생애

일찍이 양주(揚州)에 징소되어 종사와 주부를 지내다가 수재(秀才)로 천거되었다. 이후 대사마 제왕(齊王) 사마경 밑에서 좨주로 일하던 중 흘향(祁鄉)의 현령이 되었다가 예릉(醴陵)의 현령으로 부임했다.

태안 2년(303년) 5월, 의양국의 만족 장창이 스스로 이진(李辰)이라 개명하고 백성들을 현혹해 석암산(石巖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 군과 현들이 장창에게 투항했으나 우담은 홀로 거병하여 장창의 별동대를 격파하고 장창의 장수 등목(鄧穆) 등을 참수했다. 이를 본 양양태수 화회(華恢)가 우담을 건평태수로 천거하자 우담은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했다. 이후로도 우담은 수많은 전장에 출전해 반란군을 토벌하면서 전공을 쌓으니, 조정에서 그를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영흥 2년(305년) 12월, 광릉상 진민이 역양(歷陽)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우담은 또다시 출병해 진민의 동생 진찬(陳贊)이 있는 강주(江州)를 공격해 토벌하였다. 광주자사 왕구(王矩)의 천거 덕에 우담은 영여릉태수(領廬陵太守)에 임명되고, 황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에 힘썼다. 이후 진민의 명을 받고 무창(武昌)을 침범한 진회(陳恢)를 물리칠 때 공을 세워 남강태수로 옮겨지고, 동향후(東鄉侯)로 진봉되었다.

영가 5년(311년) 6월, 강주자사 화일을 토벌하라는 낭야왕 사마예의 격문에 응해 여릉(廬陵)에 이르렀으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화일이 토벌된 후였다. 하지만 당시 파촉 유민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킨 예릉현령 두도가 아직 토벌되지 않았기에, 강주자사 위전(衛展)이 우담을 영안성태수(領安成太守)로 천거했다. 감탁이 의양(宜陽)에서 두도의 반란군과 싸울 때 그 형세가 불리했는데, 우담이 진군해 감탁을 구원했다. 감탁은 우담을 장사태수로 천거하려 했으나 우담이 사양했다. 반란군 토벌을 진두지휘하던 왕돈 또한 우담의 활약상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상동태수로 삼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우담은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건흥 3년(315년) 8월, 4년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반란군이 전멸하고 그 수괴인 두도는 도망치던 중 객사했다. 승상 낭야왕 사마예는 우담을 자신의 군자좨주로 삼았다가, 낭야국의 중위(中尉)로 옮겼다.

건무 원년(317년) 3월,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오르자 둔기교위에 임명되었다. 이후 우위장군, 중정경을 역임하다 병을 이유로 귀향했다.

태녕 2년(324년) 7월, 2차로 반란을 일으킨 왕돈이 사망하자, 명황제 사마소는 그 심복인 심충을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심충이 군대를 이끌고 도성 건강(建康)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우담은 고향인 여요현의 가문 사람들을 설득해 의군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회계에서 잘나가는 명문가인 우씨 가문이 명제의 편에 서니 의군은 순식간에 10,000명이 모였고, 우담은 명위장군(明威將軍)이라 자칭하며 상우(上虞)에 이르렀다. 이에 명제는 손수 조서를 내려 정식으로 우담을 관군장군, 영회계내사(領會稽內史)로 삼았다. 우담은 장사 공탄(孔坦)을 선봉으로 삼고 절강(浙江)을 건넜다. 그러나 우담의 군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심충은 유량(庾亮)과 소준에 의해 격파되고 패주한 상황이었다. 우담은 입조해 상서에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위장군으로 옮겨진 뒤,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태녕 3년(325년) 3월, 명제가 붕어하고 성황제 사마연이 즉위하자, 오흥태수로 옮겨지고 보국장군이 더해졌다. 또, 이전의 전공들이 다시 인정받아 영릉현후(零陵縣侯)로 진봉되었다.

함화 2년(328년) 5월,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을 점령한 소준이 형주에서 일어난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석두성(石頭城)으로 이동했다. 우담은 집안의 재산을 전부 팔아 군자금으로 삼고, 노복들을 군대에 입대시킨 뒤 왕서 등과 거병했다. 도간 등은 우담을 가절, 감양주절강서제군사(監揚州浙江西諸軍事)에 임명해 서로 동서에서 반란군을 협공하기로 약조했다. 우담은 왕서의 지시를 받으며, 소준이 보낸 장건(張健), 관상(管商) 등의 장수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연이어 패배했다. 그렇게 동쪽 방면의 의군은 패배하는 듯 했지만, 왕서의 아들 왕윤지가 전장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왕윤지는 장건과 관상을 대파해 우담을 구원하고, 나아가 한황(韓晃)까지 격파하면서 소준의 부하들을 소탕해나갔다.

함화 3년(328년) 10월, 도간이 건강에 남겨진 소준의 반란군을 몰아내고 도성 건강에 입성했다. 왕서, 우담 등은 수 차례 반란군에게 패배한 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절(節)을 반납했다. 그러나 조정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그 후에 세운 전공에 주목하여 우담을 진군장군, 오국내사로 삼았다. 이후 다시 회계내사에 임명되고 무창현후(武昌縣侯)로 전봉되니, 식읍이 1,600호에 달했다.

함화 4년(329년) 2월, 온교, 왕윤지의 활약으로 소준의 잔당은 멸절하였지만, 전란으로 땅이 황폐화되고 기근까지 겹치면서 백성들이 고통받았다. 우담은 관아의 곡창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호독루(滬瀆壘)를 수리해 해적을 막았다. 그리고 수 년 후, 모친 손씨가 사망하자 우담은 상을 이유로 사직했다.

함강 2년(336년), 상을 마치고 복직되어 시중, 위장군에 임명되었다. 우담이 입조할 때 즈음에 조정에서 그를 우광록대부, 시중, 개부의동삼사로 고쳐 임명하고, 친위병 300명을 하사했다. 재직 중 사망하니, 그의 나이 79세였다. 사후 좌광록대부, 개부로 추증되었으며, 시중은 전과 같이 하였다. 시호는 '효열(孝烈)'. 아들 우흘(虞仡)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은 우장군사마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