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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07:42

상부 슐레지엔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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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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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 슐레지엔 공세
러시아어: Верхнесилезская наступате
독일어: Oberschlesische Operationn
영어: Upper Silesian offensive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1945년 3월.jpg
1945년 2월 24일 3월 30일 시점에서 양군의 전선[1]
날짜
1945년 3월 15일 ~ 31일
장소
나치 독일 오버슐레지엔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이반 코네프|]]
(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바실리 소콜롭스키|
바실리 소콜롭스키
]]
(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참모장)
[[틀:깃발|]][[틀:깃발|]][[파벨 쿠로치킨|]]
(제60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페르디난트 쇠르너|
페르디난트 쇠르너
]]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프리드리히 슐츠
(제17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고트하르트 하인리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
(제1기갑군 사령관)
결과
소련의 승리
소련이 오버슐레지엔 점령
영향
나치 독일이 슐레지엔의 공업지대 상실[2]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좌익의 안전 확보
전력 병사 408,400명
포 5,640문
전차/자주포 988대
피해 규모 상부 슐레지엔 공세
전사 및 실종 15,876명
부상 50,925명
염소 작전
전사 822명
실종 777명
부상 3,146명
상부 슐레지엔 공세
전사 9,913명
실종 14,254명[3]
부상 24,801명



1. 개요2. 1945년 3월의 중부 전선
2.1. 독일군2.2. 소련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4. 독일군의 공세 : 염소 작전
4.1. 공세 준비4.2. 라우반 전투4.3. 공세 종료
5. 소련군의 공세 : 상부 슐레지엔 공세
5.1. 공세 준비5.2. 오펠른 포위
6. 결과7. 여담

[clearfix]

1. 개요

상부실레시아 공세 혹은 오버슐레지엔 공세는 하부 슐레지엔 공세로 니더슐레지엔을 점령한 소련군이 독일군의 반격을 막아낸 뒤 나머지 오버슐레지엔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펼친 공세이다. 독일군의 반격이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이어진 공세 결과, 슐레지엔 지방을 완전 점령하긴 했으나 독일군의 저항이 거센 탓에 소련군은 종전까지 이 근처에서 공세작전을 펼치지 않게 된다.

2. 1945년 3월의 중부 전선

2.1. 독일군

하부 슐레지엔 공세가 한창이던 2월 중순, 쇠르너는 작은 반격작전을 구상중이었다. 동시기에 독일군은 오데르강에서 지점 작전(Unternehmen Sonnenwende), 헝가리 서부에서 남풍 작전(Unternehmen Südwind)을 진행중이었고 비슷한 규모의 대규모 반격인 봄의 새싹 작전을 위해 기갑전력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슐레지엔에서의 반격은 작은 규모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염소 작전(Opeartion Gemse)을 위해 그나마 집단군 내에서 운용 가능한 기갑 전력을 모아서 공세를 준비했다. 독일군 공세의 주력은 17군이었고 2개 기갑군단을 합친 네링 집단이 핵심 전력이었다. 4기갑군은 이미 나이세 강 너머로 밀려났지만 17군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잘 막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적의 길어진 측면을 파고들기로 했다.

2.2. 소련군

하부 슐레지엔 공세가 진행되면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우익은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어도 나이세 강에 도달했고 구벤에서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좌익과 연결에 성공하면서 베를린으로 진군하기 위한 좌익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력이었던 좌익이 생각보다도 더 지지부진한 성과를 보이면서 이번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좌익이 지나치게 늘어나버렸다. 그래서 코네프는 이어서 상부 슐레지엔 공세를 진행하기 위해 좌익에 지원 전력을 모았다. 그렇지만 그 전에 독일군의 기습적인 반격을 막아야 했다.

3. 전투 서열[4]

3.1. 소련군

3.2. 독일군

4. 독일군의 공세 : 염소 작전

4.1. 공세 준비

독일군의 계획은 간단했다. 라우반(Lauban)을 탈환하여 라우반을 통과하는 철도를 장악하고 양익 포위를 통해 3근위전차군을 섬멸한 뒤 브레슬라우의 포위망을 뚫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발터 네링 기갑 대장의 지휘 아래 북쪽에는 39기갑군단 휘하 17기갑사단, 총통척탄병사단, 6국민척탄병사단을, 남쪽에는 57기갑군단 휘하 408보병사단, 8,16기갑사단과 103기갑여단, 총통호위사단, 21기갑사단의 전투단을 배치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독일 기갑 전력은 아래와 같다.
||<tablewidth=100%> || 17기갑사단 || 총통척탄병 || 6국민척탄병 || 8기갑사단 || 16기갑사단 || 103기갑여단 || 총통호위사단 || 21기갑전투단 ||
88mm[13] 0 0 3 0 8 0 0 0
4호 전차 10 5 0 38 8 0 40 32
5호 전차 20 17 0 18 13 0 20 34
4호 구축전차 0 0 12 0 17 7 0 0
헤처 구축전차 0 0 9 9 11 0 0 0
돌격포 0 33 0 0 36 12 29 0
합계 30 55 24 65 93 19 89 66

1944년 말까지도 독일 완편 기갑사단은 180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했으나 이 시점에서의 독일 기갑사단은 편제상 전차대대가 1개 뿐이었다. 그러나 위 수치를 보면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를 전부 합쳐도 1개 대대 분량을 갖춘 사단이 16기갑사단과 총통호위사단 뿐이었다.[14] 물론 공세중인 소련군이라고 사정이 크게 나은 것은 아니어서 전선군 좌익에서 괴를리츠를 향해 진군하던 기갑전력의 핵심인 3근위전차군의 경우, 2월 중순 시점에서 장갑차와 같은 기갑 차량을 모두 합쳐 400대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15] 휘하의 9기계화군단은 전차가 48대, 7근위전차군단은 전차가 55대로 편제의 25% 수준이었다.

4.2. 라우반 전투

하부 슐레지엔 공세 도중 3근위전차군은 코네프로부터 괴를리츠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파벨 리발코는 17일부터 라우반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라우반은 괴를리츠-브레슬라우- 오스트라바를 잇는 철도가 있었기 때문에 브레슬라우 탈환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곳이었고 독일군은 라우반을 지키기 위해 2월 18일부터 20일 사이 8기갑사단, 408보병사단, 10기갑척탄병사단을 파견했다. 소련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기에 기습적인 반격을 받긴 했지만 곧 독일군을 밀어냈다. 라우반을 두고 몇 주간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독일군은 반격을 위해 극비리에 기갑 전력을 모았다. 하늘에는 소련 항공기가 떠있고 탄약과 연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었다. 보안 유지를 위해 라우반 근처에서 방어전을 수행중이던 6국민척탄병사단은 공세 시작 당일에야 관련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파일:라우반 전투.jpg
▲ 독일군의 진격[16]
3월 1일부터 17군은 반격을 개시했다. 39군단은 총통척탄병사단과 17기갑사단을, 59군단은 8기갑사단을 선두로 진격을 시작했고 103기갑여단과 6국민척탄병 사단은 아군이 적의 측면을 파고드는 사이 중앙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어서 독일군은 라우반을 탈환하고 나움부르크(Naumburg)에서 만나 3근위전차군을 포위하려 시도했다.

첫 날, 17기갑사단과 총통척탄병사단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격했다. 제2 총통기갑연대와 제4 총통기갑척탄병연대는 나움부르크 서쪽에서 강 건너에 교두보를 만들었으나 곧 소련군에게 밀려났다. 남쪽에서는 8기갑사단이 진격했으나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2일이 되자, 총통척탄병사단은 나움부르크 서쪽에서 소련군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17기갑사단은 북서쪽에서 번즐라우(Bunzlau)로 진격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소련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해 라우반에서 철수했고 6국민척탄병사단은 라우반을 탈환했다. 2일 하루동안 소련군은 81대의 전차를 손실했다.

8항공군단이 항공지원을 해주고 있었지만 3일이 되고 소련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39기갑군단이 나움부르크를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더군다나 남쪽의 59기갑군단은 진격이 더 지지부진했으므로 4일에 총통척탄병사단과 8기갑사단이 만났을 때의 포위망은 원래 계획보다 훨씬 작은 상태였다. 8기갑사단 우익의 총통호위사단은 사실상 진격자체를 거의 못했고 따라서 대부분의 소련군이 포위되지 않고 빠져나갔다. 8일까지 포위망 안은 정리됐고 라우반은 독일군 수중에 남아있었다.

4.3. 공세 종료

쇠르너는 이어서 브레슬라우로 향하는 길을 뚫기 위한 공세를 추가로 준비했고 9일부터 시작했다. 독일군은 슈트리가우(Striegau)에서 남동쪽으로 공세를 펼쳤고 부족한 전력으로 11~12일에 5근위군의 일부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코네프가 공세를 위해 전력을 모으면서 독일군의 브레슬라우 구출작전은 자연스럽게 끝나버렸다. 쇠르너가 포로를 잡지 말라고 명령한 탓에 대부분 사살되면서 독일군의 공세 기간동안 포로가 176명뿐이었다. 소련군은 이 기간동안 전차 162대, 차량 106대, 자주포 159문, 박격포 74문을 손실했고 3근위전차군은 아예 후방으로 빠져 재편성해야될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3근위전차군은 이후 4월 중순, 베를린 공세 시기에 다시 전선에 등장한다. 독일군은 총통호위사단의 인명 피해가 심했을 뿐 2개 군단의 전차 손실은 10대에 불과했다. 괴벨스가 9일에 라우반을 직접 방문했을만큼 이 시기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거둔 몇 없는 의미있는 성과였다.

5. 소련군의 공세 : 상부 슐레지엔 공세

5.1. 공세 준비

2월 24일, 하부 슐레지엔 공세가 마무리 된 시점에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우익에 6군, 13군, 52군, 3근위군 좌익에 4전차군, 5근위군, 21군, 59군, 60군이 배치된 상태였다. 이후 독일군의 반격 과정에서 좌익에 있던 3근위전차군이 큰 피해를 입고 보충을 위해 후방으로 빠졌기 때문에 4전차군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공세에 참여했다. 상부 슐레지엔 공세(Upper Silesian offensive)는 사실 목적이 애매했다. 전선군 좌익을 확보한다는 목표가 있긴 했지만 하부 슐레지엔 공세는 베를린 공세를 위한 준비라는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면 상부 슐레지엔 공세는 그러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고 적의 예비 전력을 끌어들이려는 양동 작전의 성격이 강했다.

동시기, 남쪽에서는 체코 방면으로 제2,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모라바-오스트라바 공세,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제2,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빈 공세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이 공세에 그닥 많은 전력을 동원하진 않았다.[17] 사실 이미 연속된 공세로 전력 자체가 편제의 절반이 될까말까였으며 보충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무기야 생산하면 되지만 인력은 아무리 소련이라고 해도 공장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 공세와 마찬가지로 1차적으로 오버슐레지엔주의 중심지인 오펠른을 포위하고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5근위군이 공세의 가장 우익에 있었고 주공은 오펠른 북서쪽의 21군, 4전차군과 남동쪽의 59군, 60군이었다. 좌익에서는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38군이 다른 공세를 진행하고 있었다.

5.2. 오펠른 포위

소련군은 3월 15일에 공세를 시작했다. 5근위군은 17군 우익의 8군단을 공격했으며 엄청난 포격 이후 21군과 4전차군, 4근위전차군단도 공격을 시작했다. 45국민척탄병 사단은 곧바로 밀려났으며 슐츠는 즉각 예비인 40기갑군단[18]을 투입했다. 소련군은 북쪽에서 폭 8km에 깊이 8km의 돌파구를 형성했다. 16일부터 남쪽에서는 59군과 60군이 1기갑군의 11군단에 공세를 개시했다. 코네프는 여기에 31전차군단과 7근위기계화군단을 투입했다. 공세는 순탄치 않았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잘 갖추고 있었으며 대전차 방어에 중점을 둔 결과 31전차군단은 하루만에 전차의 1/3을 손실했다. 날씨 때문에 항공 지원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371보병사단과 18SS 의용기갑척탄병사단 사이에 폭 12km 깊이 8km의 돌파구가 생겼으며 11군단 우익의 59군단은 남쪽으로 밀려났다.

17일, 이틀 간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소련군은 본격적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네링의 24기갑군단[19]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이 이 포위를 막기 위해 북쪽에서 내려왔지만 막는데 실패했고 18일, 오펠른 주위에 5개 사단이 갇혔다. 슐레지아 그룹의 20SS 무장척탄병사단과 168보병사단을 포함해 18SS 의용기갑척탄병사단, 344보병사단이 포위망 안에 있었다.

3월 20일이 되자 슐레지엔 그룹은 전멸했고 독일군은 오파바 북쪽에 다시 전선을 구축했다. 이어서 24일, 21군은 오펠른 서쪽 50km 떨어진 나이세(Neiße)를 점령했고 마지막 목표인 라티보어(Ratibor)로 향했다. 쿠로츠킨의 60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코네프는 18일부터 4근위전차군이 된 4전차군과 돌파포병사단들을 남쪽으로 돌렸다. 30일, 31전차군단과 60군은 97엽병사단을 밀어내고 라티보어를 점령했고 31일에는 5근위군이 슈트렐렌(Strehlen)을 점령했다. 이제 소련군은 슐레지엔을 완전히 장악했고 주데텐란트에 도달했다.

6. 결과

독일군의 반격은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소련군은 딱히 성과가 없었다. 물론 전략적으로는 소련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성과가 컸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독일군은 반격을 통해 3근위전차군의 전진을 막아낸 반면 소련군은 땅만 조금 차지했을 뿐 독일군의 예비 전력을 그다지 소모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버슐레지엔의 공업지대는 동쪽에 몰려있을 뿐더러 이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상부 슐레지엔 공세 시작 시점에서는 이미 소련군의 땅이었다. 이 공세 결과로 얻은 소득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라우반을 비롯하여 슐레지엔 전선이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최후까지 나치 독일의 수중에 있던 얼마 안되는 영토 중 하나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독일군은 남북에서 대규모 반격이 이루어지는 상황[20]에서 지원 없이 집단군의 기갑 전력만으로 제일 작은 규모의 반격 작전을 펼쳐 세 집단군 중에 가장 성공적인 성과를 냈다. 소련군의 슐레지엔 공세 자체를 막지는 못했으나 이 지역에서 더 이상의 공세가 없었으므로 성공적인 방어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7. 여담

소련군은 이 시점에서 독일군이 거의 괴멸됐다고 생각했기에 쉽게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44년 하계 공세의 결과로 독일군은 전선이 절반으로 줄어든데다가 총을 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기에 방어선 구축이 수월해졌다. 소련도 전선이 줄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병력을 한 번에 투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다시 동부전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독일 본토는 오래전부터 요새화되어 있었다. 심지어 슐레지엔 공세는 독일군이 딱히 예비대를 투입하지도 않고 중부 집단군 자체 전력만 가지고 방어한 것인데도 진격이 지지부진했다. 그 결과 소련군은 오스트리아와 체코로 관심을 돌리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베를린에 집중하기로 했다.
[1] 3월 말이 되자 북쪽에서는 동부 포메른 공세로 독일 국방군이 콜베르크(Kolberg)와 단치히(Danzig)에 갇혔으며 북동쪽에서는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Koenigsberg)에 갇힌 상태였다. [2] 슐레지엔은 나치 독일에서 루르공업지대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며 인구와 자원도 풍부한 지역이었다. [3] 소련 측 기록으로는 14,000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므로 대부분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됨 [4] 3월 1일 기준 [5] 공세에 참여한 좌익 절반만 작성 [6] 3월 18일부터 4근위전차군 [7] 데미얀스크 전투 당시 북서 전선군 사령관 [8] 4월 5일에 원수로 진급 [9] 제24기갑군단 사령부로 구성 [10] 기갑척탄병 사단이지만 사실상 여단급 [11] 기갑척탄병 사단이지만 사실상 여단급 [12] 3월 19일부터 발터 네링 기갑대장, 하인리치는 20일부터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이 되었다. [13] 중전차대대 소속 티거 2와 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야크트판터를 포함한 수치로 보인다. [14] 기갑전력이 타 전역에 우선 보충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 [15] 2월 16일 기준으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보유한 전차 및 자주포는 1,289대였다. [16] 라우반(Lauban)을 탈환하긴 했으나 원래 1차 목표였던 나움부르크(Naumburg)까지 가지 못하고 그 전에 총통척탄병사단(FGD)과 8기갑사단이 만나면서 작은 포위망이 만들어졌다. 17군 좌익에는 17기갑사단이 있고 우익에는 총통호위사단(FBD)가 있다. 괴를리츠(gorlitz)를 관통하며 남북으로 이어지는 강이 나이세 강이다. [17] 물론 독일군에 비하면 압도적이었다. [18] 19, 20기갑사단, 10기갑척탄병 사단 [19] 16기갑사단, 총통호위사단(기갑척탄병사단), 78보병사단 [20] 북쪽에서는 비스툴라 집단군의 지점 작전, 남쪽에서는 남부 집단군의 봄의 새싹 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