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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나톤

아멘호테프 4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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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톤
Akhenaten
파일:Akhenaten.jpg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아케나톤(Akhenaten)[1]
출생 미상
사망 기원전 1336년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1353년 ~ 기원전 1336년[2]
(약 17년)
전임자 아멘호테프 3세
후임자 스멘크카레
부모 아버지 : 아멘호테프 3세
어머니 : 티예
배우자 네페르티티
자녀 투탕카멘
무덤 아마르나

1. 개요2. 생애
2.1. 종교개혁2.2. 아마르나 문서
3. 사후4. 평가5. 기타6. 문화 속의 아케나톤

[clearfix]

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10대 파라오.

아케나톤(Akhenaton), 또는 아크나텐(Akhnaten)이나 아케나텐(Akhenaten), 아케나톤(Ikhnaton)이라고도 한다.[3] 아케나톤이 살던 시대에 사용된 후기 이집트어로는 ˈʔiːχ ne ˈjoːtə[4] 라고 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했으며 재위기간은 기원전 1353년에서 1336년으로 추정된다. 아케나톤은 즉위하자마자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며 이집트에 대격변을 일으켰다. 이전의 아문 중심의 다신교 신앙을 무너뜨리고 태양신 아톤을 숭배하는 유일신 사상을 도입했으며,[5] 이에 따라 자신의 이름도 '아톤에게 이로운 자'를 뜻하는 아케나톤으로 개명했다.[6] 또한 아마르나 지방에 신도시 '아케타톤'을 건설해 궁전을 짓고 수도로 삼아 천도했으며, 기존의 신관층들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당연히 신관과 기존의 기득권층들은 극렬히 반발했다. 결국 아케나톤이 죽자 아톤 신앙은 빠르게 소멸했고, 아케나톤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파라오 취급을 받게 되었다.[7]

참고로 아케나톤 이후의 파라오들은 정말 아케나톤을 혐오했다. 제18왕조를 이어 들어선 제19왕조의 파라오들은 아케나톤과 그의 유일신 사상을 죄악시하면서 거의 그를 악마화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가 지었던 건물들 대부분은 무너지거나 다른 건물들에 쓰기 위해 헐려나갔고, 아케나톤의 이름이 새겨진 석상이나 벽화들은 모조리 사포로 지워내 버렸다. 역대 파라오들은 아케나톤을 포함해 그 후계자들인 투탕카멘, 아이 등을 '그 악마', '악귀' 등으로 칭하며 아예 파라오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케나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까지 갔었기에 19세기까지 아케나톤에 대해서는 고고학계에 알려지지도 않았으나 19세기 후반에 아마르나 유적이 발굴되고, 아케나톤의 미라가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후 '최초의 유일신 신앙'을 도입하고 사회 개혁을 이끈 계몽군주로서 재조명되었지만, 실상은 권위만 드높이려 했지 이렇다 할 민생 개혁을 주도하지는 않았던 파라오였다.

2. 생애

아케나톤은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라면 그 위에 '투트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 있었기에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겠지만 투트모세가 일찍 죽으면서 아케나톤이 그대로 왕위를 승계하게 된다. 아케나톤은 기원전 1353년 경[8] 테베에서 '아멘호테프 4세'라는 이름으로[9] 파라오에 즉위했다. 그가 처음부터 아톤 신앙을 신봉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재위 초기 아케나톤은 아멘호테프 4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아툼, 오시리스, 아누비스 등의 기존 신들에 대한 전통적인 의식을 그대로 진행했다. 아버지가 시작했던 카르나크 대신전의 아문 사원 공사를 계속했고, 아문 대사제 직함을 유지하면서 기존 신앙을 어느 정도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아케나톤의 행보는 기존 신앙을 부정하고 아톤 신앙쪽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서서히 보이게 된다.

2.1. 종교개혁

파일:header_essay-6946.jpg
파일:Small_aten_temple.jpg
아톤의 가호를 받는 아케나톤 아마르나 유적[10]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케나톤은 슬슬 아톤을 위한 태양신전들을 축조하려고 들었다. 재위한 지 4년 차쯤 되자 그는 자신의 신앙이 태양신 아톤 종교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선포하며 기존 신관층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부바스티스, 헬리오폴리스, 멤피스, 케르마, 네켄 등의 대도시들에 속속이 파라오 주도하의 아톤 신전들이 들어섰고, 심지어 기존 신앙의 중심지인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에도 아톤에 바치는 사원을 집어넣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자신이 더이상 아문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아톤에게 이로운 자'라는 뜻의 '아케나톤'으로 개명했다. 즉위 초에 아톤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선포했을 때만 해도 아톤은 의 다른 모습이라고 선언되었지만, 재위 9년에 드디어 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부인하고, 아톤을 유일신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아톤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에서 인격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로지 둥근 태양에서 끝에 손이 달린 빛살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으로만 묘사하게 했다. 이는 역사상으로 확인 가능한 세계 첫 번째 일신교이다.

사실 "하나"와 "여럿"을 대조하는 형태의 이원론은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존의 신앙에서 이러한 이원론이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데에 비해 아케나톤의 경우에는 이를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오직 "하나"만을 선한 개념으로 규정했다는 차이가 있다. 특히 고대 이집트 종교에서 "여럿"이라는 개념은 신학적으로 신성(神性)의 물리적인 현현과 관련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아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11]

아케나톤은 이름을 개명함과 거의 동시에 새로운 수도를 지어 천도하기로 결심했다. 새 수도는 현재 아마르나 지방의 한 분지에 지어졌다. 테베 멤피스 사이에 위치한 이 분지의 지형은 중간이 깊숙히 파여있고 그 주위를 높은 절벽들이 둘러치고 있어 히에로글리프로 '수평선'을 의미하는 글자와 형상이 유사했다고 전해진다. 아케나톤은 이 신도시에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아케타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2]

진흙 벽돌을 사용한 신공법으로 궁전, 신전, 귀족들의 저택 등이 속속이 들어섰고, 신공법을 사용한 덕택에 몇 년도 되지 않아 거대한 도시가 완성되었다. 아케나톤은 정말 이 도시를 세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덕분에 아케타텐은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아케나톤이 왜 굳이 멀쩡한 테베나 멤피스 등을 두고 신도시를 세웠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고학자들은 기존의 대도시들에는 전통 신앙을 신봉하는 사제층이 너무 깊숙이 깔려 있었고, 이에 환멸을 느낀 아케나톤이 신관들과 마주치기 싫어 아예 새 도시를 지어 그 곳으로 옮겨가버린 것이 가장 타당한 이유라고 본다. 이 아케타텐이 현재의 아마르나 지역에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흔히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2.2. 아마르나 문서

파일:Five_Amarna_letters_on_display_at_the_British_Museum,_LondonA.jpg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아마르나 문서의 일부.

아마르나 시대의 국제 정세는 19세기 후반 즈음에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에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총 382개의 토판으로 구성된 아마르나 문서는 외교, 교육,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주된 내용은 아멘호테프 3세, 아케나톤, 투탕카멘 등의 역대 파라오들이 미탄니, 시리아, 바빌로니아,[13] 히타이트, 아시리아, 그리고 여러 봉신국들과 나눈 외교 서간들이다.

아마르나 문서를 보면 당시 아케나톤 시대의 이집트 신왕국과 중동의 정세를 짐작할 수 있다. 아케나톤이 즉위하기 약 200년 전,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을 몰아내고 제2중간기를 종결했다. 힉소스인들을 몰아내면서 기세가 오른 이집트인들은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시대에 중동 권역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장하며 패권국으로 군림했고, 이 과정에서 중동 지방의 전통적인 강대국인 미탄니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미탄니와의 적대보다는 공존을 선택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미탄니와의 결혼 동맹, 그리고 봉신국 설치 등을 통해 중동 인근의 국경을 안정시켰고, 이 덕분에 중동은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아케나톤의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리아 지방에서 신흥 강대국인 히타이트가 발흥하여, 미탄니를 꺾고 중동 지방을 집어 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 1세는 미탄니를 공격해 투쉬라타 왕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중동의 국제 질서는 완전히 붕괴했다. 수많은 봉신국과 도시들이 무너져가는 미탄니에서 떠오르는 히타이트로 줄을 갈아탔고, 바로 근처에 있었던 이집트의 봉신국들은 당연히 동요하거나 심지어는 히타이트에 충성을 맹세하기까지 했다. 아케나톤 역시 재위 초반에는 히타이트 제국의 성장에 큰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정작 군사적인 행동은 거의 취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비블로스의 왕이자 이집트의 동맹국 군주였던 리브-하다는 히타이트의 공격을 받자 아케나톤에게 60차례나 넘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아케나톤은 이를 냉정하게 거절했고, 결국 리브-하다는 무너져 내렸다.[14] 다른 동맹국이나 봉신국들도 거의 엇비슷해서 히타이트는 이집트와 직접적인 충돌 없이 빠르게 몸집을 불려나갈 수 있었다. 아케나톤은 이렇게 파병이나 원조를 요청하는 요구들 대부분을 묵살했다. 이로써 이집트의 중동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수축되었고, 반대 급부로 히타이트의 영향력은 크게 늘어났다.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이집트학 학자들은 아케나톤의 전쟁을 회피하는 태도 때문에 히타이트가 지나치게 성장해버렸다고 크게 비판했다. 평화를 좋아하는[15] 파라오 때문에 히타이트를 조기에 찍어누를 기회를 놓치면서 이집트가 이후 100여 년 넘게 히타이트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학계의 주류 의견은 안 그래도 온건한 성향의 파라오가 종교개혁 따위에 몰두하다가 결국 히타이트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헨리 홀은
'평화에 집착하다가 베테랑 군사 전문가 몇 명이면 될 일을 망쳐 후세에 큰 혼란을 남긴 인물'
이라고 혹평했고, 헨리 브레스테드는
'급변하는 당시 중동 정세에는 걸맞지 못했던 인물'
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표면적인 평화에 미쳐서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부 정세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아케나톤이 여러 차례 파병군을 파견하고 중동 정세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으며, 가나안 등지에서 이집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아케나톤의 외교가 실패로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16] 아케나톤은 봉신국들에 공문을 발송해 대비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아케나톤은 히타이트의 부상을 제지하는 데 실패했고, 후임 파라오들은 종교개혁의 뒤처리에 온 힘을 쏟느라 히타이트를 제대로 견제하지도 못했으니 아케나톤이 외교적으로 실책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3. 사후

파일:4127388497_6d41b4c4a9_b.jpg
고의적으로 훼손된 아케나톤의 형상
파라오 아케나톤의 치세 말년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스멘크카레[17]나 아내 네페르티티 등이 함께 공동 섭정을 맡았을 가능성이 큰데, 이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중동에서 기세를 떨치던 전염병이 이집트까지 번지면서 사회가 흉흉해졌고, 아케나톤을 비롯해 왕실에서 이를 다잡기 위해 온갖 애를 썼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든 아케나톤은 기원전 1336년[18] 재위 17년만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투탕카멘[19]이 즉위했다.

종교개혁의 구심점이었던 아케나톤이 죽자 아톤 신앙은 종말을 고했다. 기존의 신관들은 파라오가 죽자마자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을 꼬드겨 아버지의 모든 행적을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원래는 투탕카멘의 이름도 아톤과 관련이 있는 '투탕카톤'이었으나 아문 신앙이 복귀하면서 '투탕카멘'으로 바뀌었다. 야심차게 건설했던 신수도 아케타텐은 버려졌고, 모든 것은 아케나톤 이전으로 회귀했다. 특히 호렘헤브를 거쳐 제19왕조가 들어서면서 아케나톤은 철저하게 이단아로 기록이 말살되었다. 제19왕조를 제창한 람세스 1세부터가 전통 신앙을 부흥하고자 아톤 신앙을 대대적으로 말살한 인물이었다. 아마르나에 있는 아케나톤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곳은 이름이 모두 지워져버렸고, 제19왕조 제2대 파라오 세티 1세의 신전에 있는 역대 파라오의 왕명록[20]에서도 아멘호테프 3세에서 호렘헤브로 바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투탕카멘도 같이 잘렸다. 다만 투탕카멘의 경우는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그다지 치세가 길지도 않았으며 삭제해봤자 대부분의 내용들이 별다른 건더기가 없는 것들이라 어떤 의미로는 아버지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파라오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후대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아케나톤만큼 악마화되거나 부정당했던 파라오는 드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회의 핵심 기반인 종교를 건드렸으니 신관 계급에서 정말 철저하게 아케나톤을 역사 자체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아케나톤이 심혈을 기울였던 신수도 아케타텐은 아케나톤이 죽자마자 버려졌다. 남아 있던 벽돌과 건축물들은 사람들이 다 헐어가 다른 데다 사용했고, 아케타텐은 신들에게 저주받은 곳으로 여겨지며 인적 없는 황무지가 되었다.

이집트 곳곳에 점점이 있었던 아톤의 신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톤 신전들은 이단으로 파괴당했고, 아톤 신관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다시 전통 신앙으로 개종했다. 비석이나 건축물들에 새겨진 아케나톤의 부조나 이름은 모조리 지워졌고, 아케나톤은 심지어 역대 파라오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조차 못했다. 특히 제18왕조 이후 들어선 제19왕조 시대에 이같은 경향이 가장 심했다. 세티 1세. 그리고 람세스 2세 시절에 아케나톤과 후대 제18왕조 파라오들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이쯤 되자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케나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907년 1월에 왕가의 계곡 KV55 분묘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미라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미라의 자세[21]와 넓은 골반, 그리고 남성 성기가 없는 점 등을 보고 티이 왕비[22]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KV55의 발굴자인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를 '티이 왕비의 무덤'이라고 학계에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카이로에서 미라를 정밀 검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알고 보니 여성이 아니라 젊은 남성의 미라였던 것이다. 남성치고는 골반이 크고, 두개골이 독특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작아서 여성으로 착각한 것이었다.[23]

그 와중에 KV55에서 발견된 미라는 관의 얼굴이 심하게 파손되고 (굉장히 음산하다) 카르투슈 안의 이름이 파내어져 있는 등[24]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훼손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미라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케나톤 설, 스멘크카레 설, 하트셉수트 설 등 다양했는데, 유골이 확실히 남성의 것이라는 점에서 하트셉수트는 가능성이 낮고[25], 무덤 내부에서 조금 훼손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아케나톤의 왕명을 새긴 진흙 벽돌 4개가 발견되어 미라가 아케나톤이라는 설이 힘을 싣던 추세였다. 결국 2010년 투탕카멘 미라와의 DNA 감정 결과 아케나톤 본인의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투탕카멘도 그의 아들로 확인되었다. 기사 링크

4. 평가

아케나톤이 이러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던 사제 계급을 일소하고 권력을 파라오에게 집중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으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는 거위 그림, '어머니'라는 말 등을 금지시켰는데 거위는 아멘호테프의 사자를 상징했고 '어머니'라는 말은 아멘호테프의 아내 무트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를 공포정치 시기로 보기도 한다.

19세기 서유럽에서 고대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아케나톤이 처음 재발굴되었을 때부터는 아케나톤을 정체된 국가를 개혁하려다가 실패한 비운의 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동정적인 인식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이 컸지만, 아마르나 개혁이 일신교를 주창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문화상대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19세기에는 유럽의 일신교를 우월하다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이러한 시각은 아케나톤이 아텐 신앙과 평화주의를 탐닉해 기본적으로 정복 왕조의 성격을 가진 제국인 이집트를 약체화시킴으로써 히타이트 등 외세의 세력 확장을 방조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또한 아마르나 개혁의 본론도, 기존의 사제 계층을 분노시켰을 뿐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남겨둠으로서 제대로 된 왕권 강화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그가 죽자마자 기존 신앙이 다시 회복되어버렸다는 점 등을 들어, 심하게는 어떤 실질적인 목적으로 이뤄진 개혁이 아니라 파라오 개인의 변덕에 불과했다고 분석하는 견해까지도 있다.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가 집필한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 의하면, 아케나톤은 파라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만 했을 뿐 정작 그렇게 높인 권위를 민생에 쓰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조각상에 남아 있는 모습이 워낙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보니, 그의 이단아적인 행동이 유전적인 기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2010년 아케나톤의 것으로 판명된 미라를 연구해본 결과 정신이상을 의심할 만한 심각한 유전병의 징후는 발견되지 읺았다고 한다.

또한 남겨진 조각상의 모습이 워낙 인상적인 탓에 외계문명기원설의 지지자들에게 자주 거론되며, 역사에 기록된 처음이자 마지막 혼종왕으로 자주 회자되는 파라오이다.

5. 기타

세계 최초의 일신교를 만들었다는 점과 그의 치세가 < 출애굽기>의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와 가깝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기원(나아가 기독교의 기원)을 그에게서 찾는 시각도 있다. 사실 이집트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무렵부터 나오기 시작한 뿌리 깊은 가설이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 람세스》는 이런 관점을 차용하여 람세스 2세의 친구이자 신하였던 히브리인 모세가, 지하에 숨어든 아톤 신도들의 영향을 받아 결국 람세스와 대적하는 것으로 그렸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출애굽 전기설에 따르면 투트모세 3세 혹은 아멘호테프 2세 때 출애굽이 시작되었다고들 하니... 이쪽은 워낙 <출애굽기>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설이 많으므로 < 출애굽기> 문서를 참조하자.

그 외에도 아케나톤이 이러한 유일신 신앙을 내세운 것은 《 성경》의 인물인 요셉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물론 근본주의 기독교계에서 하는 주장이다. 이 설을 지지하는 측에선 아케나톤의 외할아버지 "유야"[26]가 요셉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을 한다.

유야는 당시 파라오에 이어 서열 2위였으며, 거의 파라오에 버금가는 권력이 있었다.[27] 또한 파라오도 아니었으면서 왕가의 계곡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유야와 요셉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는 이러한 유야의 독특한 위치 외에, 유야의 미라가 팔을 가슴 위에 교차하는 이집트 방식과 달리 셈족의 그것처럼 턱 밑에 손을 두고 있는 포즈이며, 이집트의 관료가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금기였지만[28] 유야는 멀쩡히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야=요셉 설은 역사로서 인정받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와 모순되는 점이 많다. 시신이 왕가의 계곡에 있다거나,[29] 무엇보다도 요셉 이후의 세월이라는 것도 있어서...사실 아케나톤은 아멘호테프 3세의 차남으로 그의 형 투트모세 왕자가 요셉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또한 아텐 신앙이 아브라함계 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 자체도 비판을 받고 있다. 신뢰성도 낮은 편에 속하고 특히나 해석 부분에 실수한 부분이 많은 데다가 끼워 맞추기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아케나톤과 유대교와의 관계를 증명하려면 모세가 아케나톤의 사제이고, 유대인들이 그 시기에 그곳에 있었음를 증명해야 하는데 그런 증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이다.

아케나톤이 신수도로 정했던 아마르나의 유적지에서는 기록보관소 같은 유적들도 있는데, 이곳에는 점토판에 기록된 다양한 종류의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문서들 중에는 아케나톤의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 치세때의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키프로스 섬, 미케네, 바빌로니아, 미탄니 등 다양한 곳에서 보낸 외교 문서들도 있어 중요한 기록들이다. 아멘호테프 3세와 아케나톤은 이 지역들과 혼인 동맹을 맺거나 교역을 통해 외교 관계를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집트 남부의 누비아 광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잘 나지 않는 을 채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서 중 바빌론에서 보낸 문서들 일부에는 받은 금을 녹여봤더니 받기로 한 양의 1/4 정도밖에 안되더라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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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나톤의 황금관
보통 아케나톤의 부장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아케나톤의 황금관이 보존되어 있다. 사실 아케나톤의 것이라고 정확한 판정이 나온 것은 아니나 일단 그 양식과 화려함이 파라오의 것임은 확실하고, 아케나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KV55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학계에서는 아케나톤의 관이라고 거의 확실시하고 있다.[30] 다만 투탕카멘의 관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아니다. 아케나톤 사후 사제들이 그를 기록말살형에 처하면서 그의 무덤을 파헤쳤고, 이때 그의 관이 심각하게 훼손당했다. 관의 얼굴 부분은 오른 눈썹 주위를 제외하면 아예 날아갔으며, 관 전체가 아닌 관뚜껑만이 남아있다.

6. 문화 속의 아케나톤



[1] '아케나톤'(Akhenaton)이라고도 한다. 또한 아톤 신앙 이전에 불렸던 '아멘호테프 4세'라는 이름도 있다. [2] 다른 설로는 기원전 1351년 ~ 기원전 1334년. [3]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크나톤으로 표기하지만 아케나톤, 아케나텐 등이 훨씬 대중적으로 사용되기에 본 문서에서는 아케나톤으로 통일한다. [4] 굳이 발음하고자 한다면 "잌네요터" 정도가 될 것이다. [5] 역사상으로 확인 가능한 세계 최초의 일신교이다. [6] 이전까지는 ' 아문은 만족한다'라는 뜻의 '아멘호테프 4세'였다. [7] 아이러니하게도 아케나톤의 종교개혁과 후대 파라오들의 기록말살형으로 인해 오히려 후대인들 사이에서는 자기 아들과 더불어 인지도가 가장 높은 파라오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수많은 기록 중 말살되고 파기된 부분만 복원해 조합하면 아케나톤의 기록이 말끔히 완성되기 때문. [8] 기원전 1351년이라는 설도 있다. [9] 이름은 아멘호테프이지만 아멘호테프라는 동명이인 파라오들이 이전에 3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아멘호테프 1세는 18왕조의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는 그의 아버지였다. [10] 정확히는 아케타텐의 아톤 신전 유적이다. [11] David, Rosalie. 《Religion and Magic in Ancient Egypt》. Harlow: Penguin UK, 2002 [12] 이전, 혹은 아마르나 이후의 시대에는 이곳을 '아마르나', '텔엘아마르나', '아케타톤'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13] 바빌로니아는 하나의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바빌론을 중심으로 번영하던 국가를 그냥 모두 바빌로니아로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함무라비의 아모리 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왕조였고, 이슈타르의 문으로 유명한 칼데아 바빌로니아는 바빌론 제10왕조로 부르는 등 여러 왕조들이 존재했다. 아마르나 문서 당시의 바빌로니아는 카시트 왕조라고 불리는 바빌론 제3왕조였다. [14] 이때 아케나톤은 "니가 보내는 편지 수가 우리나라 신하들이 보내는 편지 수보다 많으니까 그만 좀 보내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리브-하다는 혼자서 비블로스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다가 잡혀 죽었다. [15] 사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가 맞다면, 이것은 평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겁하고 게으른 것이다. 당장 전쟁 벌이기 싫다는 이유로 외교에 필수적인 동맹국 지원을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장은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집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줄 나라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역사 속 수많은 국가들이 동맹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국민을 희생시켜가면서 도와주는 것은 그들이 자원봉사자거나 바보라서가 절대 아니다. [16] 만일 아케나톤이 외교에 아예 신경을 끊고, 자신들을 방치한다고 생각했다면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17] 아케나톤의 딸 메리타텐과 결혼한 사위. [18] 기원전 1334년이라는 말도 있다. [19] 중간에 ' 스멘크카레'가 있는데, 이 또한 기록이 없어서 정체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투탕카멘의 형으로 보기도 하고, 왕비 네페르티티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네페르네페루아텐'(Neferneferuaten)이라는 여성 파라오도 있는데 이 사람도 네페르티티 혹은 메리타텐(스멘크카레의 아내)과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스멘크카레와 동일 인물인지(스멘크카레가 여성이라는 가정 하의 주장) 혹은 Neferneferuaten Tasherit 공주인지 정체가 불확실하다. 일단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아케나톤이 투탕카멘의 장인이라고 적어 놓았다. [20] 흔히 "아비도스 왕명록"이라고 부른다. 세티 1세가 왕자인 훗날의 람세스 2세에게 이집트의 역대 왕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21] 일반적으로 파라오의 미라는 양손을 교차한 상태로 가슴에 올려져 있고 왕비의 미라는 왼손만 가슴에 올려져 있다. 이 미라는 왼손만 가슴에 올려져 있었다. [22] 티이의 경우, 아멘호테프 3세의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정확히는 미확인 여성 미라였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티이'의 상자에서 발견된 머리카락과 대조한 결과 티이로 확인되었다. [23] 초기에는 만성 수두증과 장애 때문에 두개골이 기형인 것으로 추측했지만 재조사한 결과 그냥 정상 두개골인데 모양만 조금 이상할 뿐이라고 한다. [24]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름을 파괴하면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순한 저주나 기록말살형을 뛰어넘어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히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25] 사실 하트셉수트는 2007년 KV60 분묘의 미라가 하트셉수트의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26] 아멘호테프 3세의 장인으로 왕가의 계곡 KV47 무덤에 부인 투야와 매장된 만큼 권력과 지위가 높았다. [27] 이집트 역사에 유야 외에 유야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 없다. [28] 오직 파라오만이 진짜 턱수염을 길렀다. [29] 《성경》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우선 < 창세기> 종반부에서 요셉은 죽기 직전 자손들에게 나중에 때가 되면 자신의 유해를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했다. 또 < 출애굽기>의 중반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을 할 때 무덤에서 요셉의 유해를 가지고 나갔으며, < 여호수아> 종반부에는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요셉의 유해를 그곳에 안장했다고 나온다. [30] 특히 황금관 안쪽의 카르투슈까지 싹싹 긁어내진 것으로 보아 더욱 아케나톤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도굴꾼이었으면 그냥 관 자체를 털어가 녹여버렸지, 굳이 이름까지 번거롭게 파낸 다음 방치할 이유가 전혀 없다. [31] 그의 아들인 투탕카멘은 어둠의 유우기의 모티브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어둠의 유우기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