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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1:59:14

프톨레마이오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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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4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Ptolemy IV Philopator
파일:프톨레마이오스 4세.jpg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프톨레마이오스 4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출생 기원전 244년 5월/6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망 기원전 204년 (향년 40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4년
(약 17년)
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후임자 프톨레마이오스 5세
부모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3세
어머니: 베레니케 2세
배우자 아르시노에 3세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종교 이집트 다신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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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4대 파라오. 라피아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정치를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에게 위임하고 궁정 의식에만 몰두해 왕조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2. 생애

기원전 244년 5월 또는 6월 프톨레마이오스 3세 베레니케 2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누나 아르시노에 3세, 남동생 리시마코스, 알렉산드로스, 마가스를 두었다. 기원전 222년 11월 또는 12월,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사망한 뒤 파라오에 즉위했다. 당시 22세의 성인이었으나 정부 아가토클레아에 푹 빠져 있을 뿐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가토클레아의 형제 아가토클레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절부터 활약한 장군 소시비오스에게 모든 걸 위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시비오스는 기원전 221년 초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베레니케 2세를 독살했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삼촌 리시마코스를 죽였으며, 남동생 3명 역시 숙청되었다고 한다. 특히 베레니케 2세가 파라오로 삼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마가스는 화형에 처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이 일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딱히 제지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볼 때 방관 내지 방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누나 아르시노에 3세는 기원전 220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기원전 221년,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가 제3차 시리아 전쟁 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코엘레-시리아의 프톨레마이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총독 테오도토스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하다가 메디아의 사트라프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9년 봄 모든 반란을 제압한 그는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소시비오스에게 숙청될 위기에 몰려 있었던 테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군에 귀순하였고, 코엘레-시리아와 프톨레마이스 함대 상당수를 넘겼다.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오키아의 항구도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공략하고 뒤이어 티레우스와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한 뒤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잇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시돈과 도라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고, 공세는 지지부진해졌다. 이때 소시비오스가 휴전을 제의하자, 안티오코스는 4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 스파르타의 전 국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3,000명의 용병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왕위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약속을 믿고 이집트에 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곧 죽었고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그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급기야 소시비오스는 그를 경계하여 가택 연금했다. 기원전 219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카노포스에 떠나 있는 사이, 클레오메네스는 탈출한 뒤 소시비오스에 대항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요새 공략도 실패했다. 이후 토벌대가 압박해오자, 추종자들과 함께 자살했다.

기원전 218년 초,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베리투스에 주둔한 적군을 섬멸하고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다마스코스, 시돈 공략엔 실패했다. 소시비오스는 이집트 병사 3만 명을 모집하고 용병대를 최대한 긁어모은 뒤 파라오를 설득해 군대를 직접 인솔하여 적을 상대하게 하였다. 기원전 217년 여름,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아르시노에 3세와 함께 8만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팔레스타인 라피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군 7만 명과 격돌했다.( 라피아 전투)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셀레우코스군이 맹공을 가하여 대열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의외로 두려운 기색 없이 이집트 장병들 뒤에 서서 격려하자, 이집트 장병들이 용기를 내어 마케도니아 정예 보병대를 상대로 대단히 선전했다. 여기에 안티오코스 3세가 패주하는 좌익을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대열을 완전히 이탈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고, 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전하던 셀레우코스군의 팔랑크스가 무너지자 다른 부대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뒤늦게 복귀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전장을 이탈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코엘레-시리아에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통제력을 회복하는 한편, 소시비오스를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군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막대한 양의 금을 헌납하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기원전 217년 10월 12일 이집트로 돌아온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멤피스에서 '라피아 칙령'을 발표하여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전쟁을 더 이어갔으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전역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이집트로 얼른 돌아가서 사치를 즐기고 싶은 생각에 그만뒀다며 파라오를 비난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라피아 전투 7년 후 이집트가 은화를 표준 통화로 사용하는 걸 완전히 포기한 걸 볼 때, 은 부족 현상이 심각해져서 용병을 추가로 고용하기 어려워졌기에 전쟁을 더 이어갈 여력이 안 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 마케도니아와 아이톨리아 동맹이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평화 협상을 할 때 중재 역할을 하였으며, 그리스 도시들에게 많은 재정 지원을 해 환심을 사고자 하였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때 로마 공화국 고대 카르타고 중 어느쪽도 손잡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과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의 무덤을 허물고, 알렉산드리아의 궁전 구역 내에 알렉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시신을 함께 수용한 새로운 피라미드 건축물을 축성했다. 동시에 왕조의 창시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왕비 베레니케 1세의 숭배를 알렉산드리아의 사제가 감독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숭배에 포함시켰다. 기원전 211년 어머니 베레니케 2세를 위한 또다른 숭배 의식을 벌이고자 알렉산드리아 해안가에 베레니케 신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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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추정한 '테사라콘테레스'(40단선)
그는 예술을 무척 사랑했다. <아도니스>라는 제목의 비극을 직접 쓰고 주역을 맡았으며, 호메로스를 기리는 성지인 호메리온을 세웠는데, 그 안에는 호메로스의 출생지라고 추정되는 도시들의 의인화된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호메로스의 동상이 있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보이오티아의 뮤즈 계곡에서 뮤즈 축제를 위한 자금을 지원했다. 한편, 테사라콘테레스(tessarakonteres)라는 이름의 거대한 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배의 길이는 128m였고 4,000명의 노잡이가 필요했다고 한다. 파라오는 이 배를 타고 나일강을 유람하면서 호화스러운 연회를 자주 벌였다고 한다. 뱃머리와 뱃꼬리가 각각 2개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배는 쌍동선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7년, 이집트 토착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현대 학자들은 라피아 전투에서 대활약한 토착민들이 자신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05년 10월 또는 11월, 반란군은 테베를 점령한 뒤 호르베네페르(Horwennefer)라는 인물을 파라오로 선출했다. 호르베네페르는 이후 20년간 남부 이집트에서 통치를 행사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항했다. 누비아는 이집트가 양분된 틈을 타 지난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도데카스코에누스(Dodecaschoenus) 일대를 탈환하고 그곳에 지어진 많은 사원의 비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들의 왕 아르카마니의 이름을 새겼다.

기원전 204년 7월 또는 8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붕어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에 따르면, 그는 궁전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 얼마 안가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공동 파라오 아르시노에 3세 역시 이때 죽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죽기 직전에 정부 아가토클레아의 권유에 따라 그녀와 이혼한 뒤 곧 죽였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녀는 소시비오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죽음은 며칠간 비밀에 붙여졌다가 6살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공식적으로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아의 형제 아가토클레스를 섭정으로 하여 파라오로 즉위했다.